로마서

로마서29강-죄를 뚫고(5;14-16)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3. 4. 14. 19:17

 

죄를 뚫고(로마서 5:14-16)

         동영상   음성1           

 이근호 13-04-14 13:43 
죄를 뚫고

2013년 4월 14일                           성경 본문: 로마서 5:14-16

(롬 5:14, 개역)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롬 5:15, 개역)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롬 5:16, 개역)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사람들은 평소에 생존이 우선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든 죽음과 피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죄를 다스려서 죄로 인한 징벌이 오지 않는 식으로 대책을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인간은 이미 ‘죄의 왕노릇 속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는 곧 죄를 인간들에 의해서 처리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죄인이 자기 죄를 처리할 수 없다는 말이요 죄인이 이 죄악된 병든 세상을 고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기 죄를 처리하겠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자체적으로 타인과의 관련성 속에서 죄를 통합해서 파악하려는 의도입니다. 죄나 의는 인간들 끼리의 공통점에서 파악해 낼 수가 없습니다.

내부에서 하나님께로 연결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외부에서 진정한 죄의 본질이 주입되어야 합니다.  타인의 관계에서 제일 신비스러운 점은 자신의 본 의도가 타인에게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는데 있고 타인의 의도 또한 항상 인간은 자기 선으로 왜곡해서 받아들이게 된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한 지붕에서 같이 사는 가족이나 부부라 할지라도 역시 각자 자기 생각 속에 파묻혀 살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다양성에서 하나로 이어지지가 성사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죄가 부모에서 자식으로 전수된다고 하지만 부모가 가진 죄관과 자식이 가진 죄관이 다 다릅니다.

일치되지 않는 것을 하나로 억지로 조성된 것인양 행세하면서 나온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게 되고 메사라고 우기게 됩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하나는 자기 것으로 당길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전국 이발사 협회’라고 했을 때, 이 하나 속에 있는 회원들은 모두 이발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교도소를 대표해서 교도소장이 나선다면 그 교도소 내에 있는 그 어떤 사람도 교도소장처럼 죄없는 자가 단 한명도 없게 됩니다. 즉 죄수들끼리 보편적으로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바가 교도소장에게는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상관없이 대표자로서 등장하는 하나(1)은 도리어 개개인의 묵살하고 부정하는 작용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 작용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들 중의 한 사람을 대표로 뽑아버리면 개개인이 품고 있는 속성이나 성질이 부정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부정하는 성질이 먼저 주어지게 되면 모든 인간들은 동일한 성질에 의해서 부정과 그 고유한 가치, 즉 하나로 뭉쳐지는 권리는 부여받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같은 것은 누가 우리의 대표자이냐를 물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하나됨을 훼손하는 작용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느냐를 봐야 합니다. 즉 숨겨진 한 분을 드러내는 와중에서 인간은 기존의 모든 성격과 가치는 부정당해야만 합니다. 여기에 등장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죄라고 규정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죄를 우리 인간이 알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오해하면서 나름대로 죄에 대해서 안다고 여기면서 장차 심판에 대비해서 나름대로 의로움으로 대책을 세우게 되는게 그것이 바로 ‘예수 피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기게 됩니다.

즉 죄로 미처 모르면서 의에 대해서 아는 양 여기는 겁니다. 그렇다면 죄는 어떻게 알게 되나요? 지구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마그마가 지표면을 적시면서 화성암으로 바뀝니다. 이와 마찬가지에 죄란 유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만 분출하게 됩니다. 즉 죄는 하나님 아버지와 만난 적이 있는 예수님만 아시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비로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나태복음 27:46) 예수님에게서 죄가 나옵니다. 그리고 은혜도 나옵니다. 세상 지면을 젓시는 그 죄를 주님의 보혈의 공로에 근거한 은혜로 용서가 주어질 때, 이 죄와 은혜가 합쳐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기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의’로 여겨서 결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진정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바는 인간이 아니라 죄인입니다. 이 죄인이라는 것은 그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알려진 죄의 취지가 담긴, 그 죄인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나름대로 죄를 반성한다고 하지만 차후에 지금 반성하는 것보다 더 큰 죄를 짓게되면 종전의 반성법으로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에게서 출발하는 그 모든 시도도 전혀 예수님의 그 ‘하나됨’과 연결되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간들이 시도하는 모든 것들이 인간의 근본적 죄성에서 나오는 오해들이라면 도대체 어떤 식으로 육적인 인간이 영적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그 예가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옵니다. 11절-14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렸다가 “잠들었느니라”고 평하십니다. 이는 인간 세상에서 통하는 안목으로 의도적으로 비틀어버리기 위함입니다.

즉 너희들이 보기에 죽은 것은 나 예수님이 보기에는 잠들은 것이요, 너희들 보기에 잠들은 것은 나 예수님 보기에 죽음의 흔적으로서 매일같이 잠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잠잔다는 것은 죽음과 마찬가지고 일체 인간의 자의적으로 의도적인 것이 중지되는 모습니다.

따라서 나사로의 존재는 단순히 “어떻게 구원받느냐”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지“라는 것을 보이기 위한 존재입니다. 바로 이 관계성에 입각해서 나사로는 필히 죽어야 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를 보이기 위해 그는 이 땅에서 ’잠들은 나사로‘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도 주님을 보여주기 위한 창조 세계에 놓여 있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면 우주가 새롭게 창조되는 것처럼 우리는 새로운 살려냄을 당합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 아니라 우리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 취지를 살려내기 위함입니다. 화덕에서 피자판을 삽으로 끄집어내듯이 주님은 주님의 피를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로부터 구원과 죄와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9강-롬5장 14-16(죄를 뚫고)1304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5장 14절에서 16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5페이지입니다.

로마서 5:14-16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성경에서 상당히 복잡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볼 때마다 우리 자신이 이것을 꼭 알아야 될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 싸우거든요. ‘어떻게 하면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가?’ 우리의 모든 것은 나를 죽이는 죽음과 우리를 살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과 싸우는데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뭘 보여줄 것인가, 사람은 살든 죽든 상관없이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이 땅에 존재하는가, 그 문제에 대해서 성경은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성경을 덮어 버리면 오늘도 어떻게 밥 먹고 살지, 이것이 가장 궁극적인 문제가 돼요. 남들처럼 살고 싶다, 이것이 가장 문제가 되는데 성경을 펼치면 그렇게 살아서 뭐하는데, 이렇게 됩니다. 그렇게 80, 90까지 산들 뭐하느냐는 말이지요. 내가 있는 이유도 모르면서 시간만 질질 끈다고 그게 사는 것인가, 이렇게 되묻게 되는 거예요. 나는 누구를 위해서 이 땅에 살아야 됩니까, 라고 자기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외부, 바깥에 있는 다른 분과 연결을 시키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버릇처럼 되었는데 성경을 펼치면 나는 나를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내가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나는 누구를 위해서, 도대체 나는 누구를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느냐, 그리고 우리가 나중에 죽고 난 뒤에 누구를 만난다는 말인가, 죽으면 그만인데. 그런데 그만이 아니라는 거예요. 누굴 만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분이 누구냐 이 말입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그 분과 나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왕 사는 거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훌륭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 싶지요. 그러나 성경을 펼치면 그것과 반대 이야기가 나옵니다. 네 죄는 제발 네가 좀 처리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가 있는 것은 죄를 처리해서 의로운 사람 만들려고 성경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성당이나 교회 가는 이유가 지금보다 내가 질 좋은 사람 되기 위한 의도로 가잖아요.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뭐냐 하면, 죄를 죄로 드러내기 위해서, 그러니까 죄의 처리는 네가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죄는 우리 힘으로 처리가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안 되는 것을 우리가 막무가내로 죄를 처리하겠다는 그 의도가 잘못된 겁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죄를 처리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사람 사는 이유가 아니고 나를 통해서 죄를 노출시키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우리는 죄를 노출시키고 처리는 내가 아닌 다른 분이 처리하시고, 죽이 맞고 장단이 맞는 겁니다. 얼쑤, 하고 판소리 하듯이 장단이 맞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복잡하지만 딱 한마디로 요약해서 이야기하라면 죄의 처리를 네 선에서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펼치기 전에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가 죄를 지었는데 이 죄를 처리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어서 그것이 처리가 되어서 내가 죽어서 좋은데 가고 싶다, 라는 생각은 네가 할 몫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죄의 처리의 담당자가 우리 본인이 아니고 따로 있어요. 따로 있는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16절에 이렇게 표현해요.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러 사람, 각자 각자가 아니라, 교인들 각자 각자가 아니라 한 사람, 그 한사람의 담당자가 처리를 해 줄 테니까 네가 해 줄 일은 ‘주여, 이런 죄도 처리됩니까?’라고 내어놓으면 되는 거예요.

사람 앞에 내 놓을 필요 없고 교회 앞에 내 놓을 필요 없어요. 그냥 주님 앞에 내 놓는 겁니다. “주님이여, 오늘도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내 놓으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못된 놈! 네가 왜 그런 죄를 지었느냐?” 이렇게 물으시는 것이 아니고 “음, 네가 내놓은 그 죄도 네 죄가 아니고 아담이 지은 죄야.”라고 이야기를 해 줘요. “죄를 지은 주인공이 우리가 아니고 원래 네 조상 속에 포함되어 있던 죄가 흘러 흘러서 너에게까지 퍼졌구나.”라고 주께서는 그렇게 보시는 겁니다.

우리는 성경을 덮어버리면 ‘남은 죄를 안 지었는데 내가 죄 지었구나.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 내 죄를 처리하고 착한 일을 해서 죄 지은 것을 상쇄해서 난 나쁜 놈 되지 않고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라는 의도가 있는 것 같은데 성경을 펼치면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말라는 그 말이지요. “왜냐하면 네가 지은 죄가 아니고 네 속에 있는 죄가 너를 통해서 스스로 발현된 것이고 설친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니 이 인식이나 사고방식이 우리가 평소에 알고 있는 것과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는 괜히 쫄았잖아요. 괜히 쫄았어요. 일이 꼬이고 잘 안 되는 이유가 죄를 지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죄 지어서 꼬인 것이 아니고 죄 졌기 때문에 꼬였다고 여기는 그 자체, 그런 논리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내가 나쁜 짓하니까 벌 받는구나, 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아담이 남긴 죄의 일종이 되는 겁니다. 원래 지구 내핵에서 올라와서 외핵 거치고 맨틀 거쳐서 마그마가 폭발하는데 이 마그마가 약한 지점을 뚫고 올라와서 터져버리면 이것이 화산이라는 겁니다. 화산에서 마그마가 올라오지요.

마치 인간내부에서 음식물 토하듯이 토해내는데요. 마그마가 토해져서 지표면을 적시면 그것이 화성암이 돼요. 제주도에 그 돌이 많고 돌하루방이 그런 돌로 만들었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뭔가 분출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우리는 하나님의 의라고 알고 있지요. 그것을 다시 해석해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너무 성급하게 다가서다 보니까 주님한테서는 의만 나온다고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데 주님에게서 우리가 아는 의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미처 몰랐던 죄의 진수가 나와요.

그 죄가 뭐냐하면 예수님만 경험했던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던 그 죄, 버림받을 수밖에 없게 만든 그 죄가 예수님을 통해서 분출해서 나옵니다. 그 다음에 그 죄에서 무엇도 같이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도 같이 나와요. 그 은혜가 분출된 그 죄를 용서해줄 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나오는 것 맞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 안하고 나한테서는 죄가 나오고 주님한테서는 의가 나오니까 주님의 의가 내 죄를 용서하면 구원받는다고 이렇게 생각들 하시는데 그것은 무엇이 오류냐, 우리는 아무리 죄를 지어도 죄가 무엇인지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우리는 아직도 멀었어요. 아직 죄의 극한에 이르지를 않았습니다. 나이가 74살 된 도둑이 있었는데 그 사람을 대도라 하지요. 그 사람이 74살 될 때까지 도둑질을 했는데 아직도 멀었어요. 그 사람은 86살 먹어서 요양병원에 가서 옆에 있는 할머니 지갑 훔쳐야 돼요. 아직도 멀었어요. 평생 죄를 지어도 우리는 죄의 진수에 접근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단번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그 순간에 우리가 미처 다 경험도 못할, 경험도 안 될 그 죄의 진수를 보여줬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죄를 접어버리고 주께서 했던 그 죄가 우리에게 덮치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다 날라 갑니다. 왜냐하면 죄를 안 지어야 복 받아서 내가 생존하는데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그 주눅 든 인생을 내가 뭘 해도 주님 십자가 앞에서는 죄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일괄해서 마지막 최종 해답을 얻어버렸으니까 죄 아닌 게 없는 셈이 되는 거지요. 그걸 세자로 똥배짱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죄 아닌 게 없이 되는 거예요.

네 글자로 “내배 째라” 혹은 “막장인생” 북한이나 써먹는 막다른 전략, 그 순간 그 동안 내가 나를 관리했던 그 수고와 무거운 짐은 다 부질없는 헛수고를 한 것이구나, 성경을 안 보니까, 성경 봐도 성령이 와야 보니까. 성경을 안 보고 상식으로 알았던 윤리 도덕으로 자기 인생을 측정하다 보니까 갈수록 힘들어지는 거예요. 사람이 바르게 살면 살수록 더욱더 힘들어지는 것을 여러분 모르지요. 사람이 바르게 살면 살수록 바르게 살았다는 그것이 누적이 되어 있어서 조금만 잘못해도 바르게 산 그 자존심이 다 날아갈까 싶어서, 그 체면이 다 구겨질까 싶어서 우리는 몸 둘 바를 모릅니다.

세상에서 그야말로 막가는 식으로 살았던 범죄인을 인사청문회 한다고 합시다. “당신 15년 전에 다운계약서 쓰면서 세금 포탈했지요?” 하면 “예! 그게 무슨 범죄 축에나 듭니까? 내가 지은 죄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렇게 당당할 것인데 헌법재판소장 후보가 되고 환경부장관 후보가 되니까 국회의원이 “다운계약서 썼잖아요.” 하니까 “그것은 제 아내가 한 일입니다. 저는 잘 몰랐습니다.” 이게 뭐냐하면 그만큼 착했다는 거예요. 착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기이어 나쁜 일이 미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더 힘든 거예요.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먹힐 이유가 없지요. 주님의 의가 좋아질 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본인 혼자 살아도 그렇게 착한데, 착한데 주님의 죄용서가 긴급하고 다급하게 들어올 이유가 없지요. 그딴 것 안 믿어도 혼자서 훌륭한데요. 제가 다시 화산 분출이야기를 할게요. 화산이 분출되었습니다. 그저 내가 죄지은 것만 죄고 착한 것은 착한 것이라고 이렇게 편재되어 있는 이 세상에서 뭔가 새로운 죄와 새로운 의가 낯설게 마그마처럼 분출되어서 퍼졌습니다.

그게 바로 화산 한 곳, 오직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숨겨져 있던 인간의 비밀이 드디어 폭발해버린 거예요. 십자가를 통해서. 4월 말에 신천지하고 토론회가 준비되어 있는데 준비하는 가운데 제가 점점 부아가 나는 것이 있어요. 요즘 일간신문에 보면 국도라는 것이 있어서 전면광고를 내요.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된다는 광고가 동아일보에도 있고 중앙일보에도 있는데 여러분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돈 엄청나게 들어가요. 그런데 처음부터 하나님부터 이야기해요.

그런데 하나님이라는 이것이 가짜입니다. 성경을 모르니까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 성경의 하나님이 자기들이 이야기하는 그 하나님인줄 알고 있는데 성경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만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고 다른 민족도 하나님을 다 믿었어요. 그런데 구약에서 다른 민족의 하나님을 뭐라고 하느냐, 우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누구 맘대로?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믿는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고 나머지가 믿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우상입니다, 라는 말을 누가 했느냐하면 이스라엘 쪽에서 한다 이 말이지요.

이스라엘 민족이 하는 말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모세가 진짜 만났던 하나님이고 실제로 하나님에게서 직접 받은 계명이 증거로 있기에 이는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고 이 하나님을 우리민족만 알고 다른 민족은 모른다, 이 이야기를 다른 민족이 들었을 때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다른 민족들도 나름대로 하나님이 있어요. 우리 단군의 자손들도 하늘님, 하느님, 하나님, 다 있어요. 그래서 번역도 자기들 맘대로 하잖아요.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스스로 우상이라고 인정할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성경에 보게 되면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는 하나님만 하나님이고 나머지는 다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때 그 근거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그들과 함께 있는 주의 이름, 주의 이름을 부르면 그것은 진짜 하나님이고 주의 이름 없는 하나님은 다 인간들이 창작해낸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 하나님, 찾지요.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하다가 옆 집 불교 보살이 와서 전기도 고쳐주고 수도관 배관도 고쳐줄 때 하나님이 고마운 것이 아니고 절간의 보살이 더 고마운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너무나 허황되고 추상적인 개념이라서 실체적으로 누가 옆에서 도와주면 그분이 곧 내가 지금까지 믿던 하나님을 대체할 고마우신 사람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언제 하나님을 말 하느냐, 뭔가 구체화 되지 않고 말로 설명이 안 될 경우에 임시변통으로 걸쳐보는 것이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좋다고 하다가 구체적으로 뭔가 등장하면 얼른 그동안의 하나님을 철회해버리고 실제로 도와주는 그 사람에게 홀딱 빠지게 되어 있어요.

“나는 믿습니다. 당신을! 오늘부터 도와주세요.” 이렇게 됩니다. “당신 절에 가니 치우세요. 난 하나님만 믿습니다.” 이런 바보 없습니다. “지금 수도관 터졌어요? 그러면 고쳐주세요.” 이렇게 하면서 그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했던 기도도 철회하고 그 사람에게 달려가지요.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정말 좋은 분을 안 만났기 때문에 그리고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말로 설명이 안 되니까 하나님이라고 그냥 걸쳐놓는 것뿐입니다. 아가씨들이 ‘난 하나님 안 믿는 사람과는 절대로 결혼 안한다.’고 철썩 같이 하다가 키 186에 연봉 8천에 아파트 32평에 차는 외제차에 성격 좋고 인물 좋고 시부모 다 돌아가서 없고 형제도 시누이도 하나도 없고 몸 건강하고 잘해주고 당신 없으면 죽는다고 시늉까지 할 때 얼마나 구체적입니까?

그런데 단 한 가지 약점이 있다면 하나님을 안 믿는 것, 그거야 하나님을 믿는 이미지만 뒤집어쓰면 그만이고. 실제로 손에 잡히는 것이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이 본문에서 제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아무리 예수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용서했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해도 이것도 실제적이 아니고 하나의 추상으로 남는 거예요. 어려운 말로 해서 ‘인간의 다양성은 절대로 하나로 뭉쳐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전국 이발사 협회라는 것이 있다 합시다.

전국 이발사 협회장은 이발사일까요, 영양사일까요? 당연히 이발사겠지요. 어떤 협회의 장이라고 해서 우두머리로 모신다면 그 사람은 회원들이 갖고 있는 자질을 일부 포함하고 있는 사람이 왕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아는 상식이 그래요. 그러면 교도소장은 죄인일까요, 아닐까요? 성경적 죄 말고 일반적인 죄 개념에서 말입니다. 죄수들을 모아놓은 그 죄수에 대해서 교도소장은 빠지는 겁니다. 교도소장이면서도 그 죄수들의 죄와 겹치지 않지요. 왜냐하면 이발소협회는 회원들이 투표해서 뽑는 것이지만 교도소장은 죄수들의 인기투표로 뽑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으로서 주의 이름으로 오셨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들이 큰 바위 얼굴 찾듯이 우리 중에서 훌륭한 사람을 메시아로 하자, 해도 이미 거기서 벗어나 있어요.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나는 하늘에 속했고 너희는 땅에 속했기에 너희가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너희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주님께서 하신 거예요. 이 본문 설명하면서 이 딜레마를 일부러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난 주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사람이 눈이 있는 것은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있다고. 눈이 있기에 나는 반드시 사물을 보고 그 본 사물을 종합해서 세상은 이렇고 현실은 이렇다고 주장함으로써 진짜 숨어 있는 세상과 현실을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눈을 줬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눈을 만들어놓고 하는 말이 ‘본다고 하니 소경이고 차라리 눈이 없었으면 볼 것을 본다고 하니 점점 더 주님이 보이지 않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왕 노릇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죄가 왕 노릇 할 때 죄가 왕 노릇 한다는 것을 ……, 우리가 이발협회 회원 같으면 협회장의 이발 기술이 누구보다 낫다, 이것이 되는데 아무리 교도소 죄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해도 교도소장이 누군지를 알 수가 없어요. 왜, 같은 범죄를 안 저질렀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는 메시아를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갖고 있는 장점들을 끄집어내서 예수님을 구성하기에 그 예수님은 가짜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가 가짜라니까요. 이것은 진짜 예수가 아니에요. 이것은 우리가 ‘난 그렇게 되고 싶어. 이 착한 것을 더 많이 갖고 있는 분이 예수 일거야.’ 우리가 자꾸 우리를 연장시켜서 우리가 조작해내고 만들어낸 예수가 그 예수에요. 평생 교회 다니면서 40년 50년 예수 믿어도 그 예수가 그 예수가 아니라니까요. 이발소협회회원들이 뽑아서 섬기는 이발소 협회장은 사실은 그 협회장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투표했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섬기는 식으로 자기의 이상체로서 믿는 것이지 그 이발협회장은 자기 안에 있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자기가 만들어낸 하나님, 자기가 만들어낸 예수를 믿는 겁니다. 진짜 살아계신 그 예수가 그 예수가 아니에요. 항상 예수는 우리 외곽에 있어요. 아무리 접근하고 찾아가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뭘 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런 예수님이 진짜 예수님이십니다. 그 말은 여기서 하나마나에요. 본문에서 “한 사람으로 인해서 죄가 여러분에게 들어왔지만 여러분들은 한 사람 때문에 의인되어서 영생 얻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조작에 나섭니다. ‘아, 아마 이런 예수 일거야. 아마 저런 예수일거야.’

이것을 어렵게 말해서 ‘다양성은 절대로 하나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는 거예요. 다양성에서 출발해서 절대로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 아니 학자들 전부 다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거스틴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설명했는데요. 아담이 생식해서 그 죄가 자식에게 전수되어서 유전으로 죄가 퍼졌다, 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엉터리입니다.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죄란 것은요, “죄인들 다 모여보세요. 죄를 다 끄집어내보세요. 아, 죄가 이렇구나. 이것이 죄입니다.” 사람들 모아놓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 죄는 그 죄가 아닙니다.

인간은 죄를 영원히 모르게 되어 있어요. 모르게 되어 있는데 문제가 뭐냐, 모르면서 죄가 이것이라고 여기고 죄가 이것이라고 여긴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을 가져다 붙여 놓으니 죄도 엉터리고 갖다 붙인 예수도 엉터리고 전부 다 일방적으로 스스로 만들어 낸 죄고 예수가 되는 겁니다. 거기서는 용서도 엉터리, 은혜도 엉터리, 다 엉터리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에게 남은 문제가 뭡니까? 어떻게 다양성에서 하나가 되는가, 지금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의인 되었다 했거든요. 그러면 이 하나인 예수님과 우리 모든 성도라고 하는 이 사람과 연결되어야 되는데 연결되는 방식이 우리 쪽에서는 알 수도 없고 만들어 갈 수도 없고 주님 쪽에서 뭔가 제시해야 되는데 주님께서 제시한 것이 그 한 길인 것을 내가 어떻게 파악합니까?

또 엉터리 방법을 가지고 맞는 것이라고 내가 우길 수도 있잖아요. 다시 해 봅시다. 지금 한 사람 때문에 우리가 용서를 받았다 하잖아요. 그런데 한 사람 때문에 용서를 받았다고 하면 듣기는 기분 잠시 좋지만 그 한 사람이 나뿐만 아니고 여러 사람을 구원할 때 그 연결고리가 어떻게 되는지 우리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에요. 그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되겠지, 하는 식으로 막 밀어붙이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사기당하기 십상이죠. 안된다니까요.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시켜본다고 기껏 2천년 교회역사가 낸 것이 뭐냐, 헌금과 전도와 예배참석과 성경공부와 열심히 기도하기와 교회 등록하기와 성만찬과 세례받기, 그런 거잖아요.

그게 그만큼 엉터리라는 뜻이에요. 교회 등록하면 구원받습니다, 세례 받으면 구원받습니다, 이게 전부 엉터리에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몇 사람 외에는 세례준 일이 없다(고전 1:16)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사람 꾀이려고, 우리가 납득이 되는 식으로 하려고 자꾸 등록이나 시켜서 “여러분, 한 사람으로 인하여 의에 이릅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의에 이르기는 뭐가 이르러요, 누구 맘대로, 네 맘대로? 보통 딜레마가 아니지요. 지금부터 이것을 설명해 드립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인간들끼리 어떻게 단합되느냐, 그것부터 봐야 돼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단합하는 그 방식 그대로 가져와서 예수님과 단합하는데 써먹기 마련이거든요.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니까. 그런데 사람은 타인에게 자기의 뜻을 절대로 전달 못합니다. 전달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막히게 되어 있습니다. 동상이몽이라는 말이 있지요. 같이 자도 꿈이 다르지요. 심지어 형제라도 생각이 다르고 내 몸에서 난 자식이라도 생각이 다 다릅니다. 예를 들어 “이것이 성경책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그 성경 저도 갖고 있어요. 맞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이것이 성경책입니다.” 하면 어떤 사람은 “어쩌라고! 그래, 네 믿음이 좋다는 말이냐? 너만 믿음 좋아?”

나는 말을 똑같이 했을 뿐인데 답변은 다양하게 나오지요. 이 말은 내가 아무리 친절, 사랑, 소망 뭘 담아서 이야기해도 저쪽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말할 거예요. “목사님, 성령에 입각하지 않고서 했기에 그러합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28장을 몰라서 그래요. 사도바울이 성령에 충만해서 전했건만 유대인들은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한 말이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행 28:26) 그 이유는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대로 된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뭐냐하면 다양성이 모여서 하나로 전달될 길이 없다는 겁니다. 창세기 4장 24절에 보면 사람이 우우 몰려간다고 해서 생명나무 따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게 안돼요. 그렇다면 안 된다면 당신 보기에 세상은 왜 이렇게 잘 돌아가느냐, 우리끼리 한 민족이다 하고 잘 돌아가는데 무조건 안 된다는 식으로 하면 당신 말이 앞뒤가 안 맞지 않는가, 라고 나올 거예요. 그것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시장에서 콩나물을 팔고 있다 합시다. “할머니 그 콩나물 얼마입니까?” “이제 막장이니 그냥 가져가세요. 5천원인데 4천원만 받을게요.” 하면 “끝물인데 2천원에 해주세요.” “이 아줌마, 너무 얄밉다 정말. 아니 5천 원짜리 4천원에 해 준건데.” “2천원에 합시다.” “에이, 모르겠다. 2천원.” 그렇게 흥정하다 2천원 되잖아요.

사람과 사람이 유일하게 통했다는 것은 뭐로 표현되느냐 하면, 친절과 봉사가 아닙니다. 한 글자, 돈입니다. 모든 사회는 돈으로만 소통이 되어 있어요. 농협중앙회, 단위농협, 새마을금고, 신협, 축협……예금이나 적금금리 왜 붙여놓습니까? 한 달에 월 얼마씩 넣으면 이자가 얼마씩 붙는다고 왜 붙여놓는 겁니까? 마지막 최종 의사소통은 돈입니다. 결혼식 할 때 부조가 많이 들어왔다 하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 부조 돈은 우리 것이라 하지요. 그 소리 듣고는 결혼한 당사자가 하는 말이 “아버지가 다 가져가면 안 되지요. 내 동료들이 한 부조는 내가 가져가야 되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결혼식이지요.

부모자식간이나 형제간 우애나 결국은 돈 문제로 최종 낙찰됩니다. 부모 죽고 나서 삼형제가 모였다 치면 우애가 있는 것이 아니고 3분지 1이 의미가 있지요. 우애, 사랑, 믿음, 돈으로 말해요. 언젠가 수요일에 그런 설교 했잖아요. 교인들이 목사에게 “목사님, 설교 은혜 됩니다. 이렇게 은혜 되는 설교가 있다니 진짜 주의 종입니다.” “말로 하지 말고 돈 갖고 오세요. 말로만 하지 말고 돈으로 말하세요. 돈으로!” 그럴 때 우리는 단합이 돼요. 남편이 돈 하나도 안 벌어주면 이혼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교회라는 것이 뭐냐, 돈으로 유지되는 겁니다. 돈 바치면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돈이 아니고 역시 한 글자입니다. 피 입니다, 피! “너 가만있어. 내가 대신 하나님한테 벌 받을게.” 그래서 흘린 피 입니다. 그 피를 수용한다는 말은 내가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돼요. 제가 분명한 문장 날립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합니다.” 그런데 그 죄인 되기는 우리가 불가능해요. 인간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죄를 몰라요.

십자가 앞에 오게 되면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드러난 그 죄의 취지가 우리에게 담기게 되면 거기에 담겨 있다는 조건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왜, 자기 아들이 했던 모든 공과가 거기에 담겨 있기 때문에 그것을 쏙 빼내서 하늘나라 보내주십니다. 우리가 귀한 것이 아니고 우리한테 묻혀 있는 예수님의 피가 귀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복음 11장을 통해서 인간은 육인데 어떻게 …… 다시 해 봅시다. 인간은 육인데 결국 말에 있는 것이 아니고 돈에 있고 돈이 가장 구체적이다. 왜,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존재하기에, 하나님의 뜻은 관계없이 나의 생존만 된다면 주의 뜻을 얼마든지 외면할 마음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아직까지 자기 일이 안 풀리기 때문에 혹시 주의 뜻을 내 뜻 안에 집어넣어볼까, 하고 시도는 해보지만 만약에 하나님이 없어도 잘 된다면 구태여 하나님은 필요치 않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그만큼 돈의 여유가 있을 경우에는 그것이 바로 자기의 본색입니다. 참 바라기는 우리 교인들이 하나님 없이도 돈으로 살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기를 ……, 그래서 잘 먹고 살이 피둥하게 찌기를, 내심 바라기도 해요. 그런데 고마운 것은 절대로 내 뜻대로 안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 내 맘대로 안 되거든요.

지금부터 약간 어렵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모든 것이 육이거든요. 인간은 다양성이기에 하나가 안 된다. 인간의 하나라는 것이 결국은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을 끌어 모으는 것이지 하늘나라 진짜 살아계신 예수님하고는 관련이 안 됩니다. 죄는 죄로 처리되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에. 죄지은 인간이 죄인인 주제에 자신이 나서서 죄를 처리한다,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죄악 된 세상을 죄인이 나서서 처리한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 동원하고 예수 동원해도 안돼요.

죄 자체도 모르는데 무슨 죄를 처리합니까? 착한 일 하면 죄가 없어지는지 압니까? 다시 어떤 환경이 주어지게 되면 인간은 누구나 죄 지을 수밖에 없어요. 사람이 죄를 좀 적게 지었다고 여길 경우는 일상이 바빠서 그래요. 한가해 보세요. 나이 한 70넘어서 다방에 앉아서 쌍화탕 한 잔 시켜놓고 화장 덕지덕지한 50대 마담 앞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할 일이 없으니까. 그래서 죄도 안 바빠야 짓지 바쁘면 죄도 못 져요. 한가할 때 죄짓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해도 육은 육입니다. 영으로 난 것이 육을 잡을 수가 없어요. 죄는 처리가 안 되기 때문에.

그런데 어떻게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가 구원받았느냐 그 말입니다. 요한복음의 그 나사로도 죄인인데, 이게 우리가 안 되는 것이 분명한데. 그가 마리아 마르다의 오빠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을 즈음에 주님이 오지를 않았어요. 죽고 난 뒤에 주님이 왔습니다. 이 나사로 이야기에서 제가 처음에 운을 뗐던 것, 대체 나라는 인간은 왜 있느냐를 성경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했거든요. 잠들었도다, 깨우러간다, 했습니다.

제가 서울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인간이 잠들었다 할 때 인간은 잠을 이길 수가 없거든요. 잠이 인간의 왕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잠이 오는 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듯이 죽음이라는 것을 매일같이 잠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알려줬어요. 사망, 곧 죽음이 왕입니다. 아무리 나쁜 인간, 설치고 까부는 인간도 잠들게 되면 자기의 모든 의지와 행동도 다 놓고 그냥 코 골면서 푹 자게 됩니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살아야 되는 거예요. 아침에 하나님께서 깨워주니 마치 자기가 스스로 살아가는 것처럼 까불다가 밤 되면 또 시체처럼 퍼져서 자거든요.

그래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한 날이라. 하나님은 창조에다 뭘 집어넣었는가, 죽음을 집어넣고 잠을 집어넣고 밤을 집어넣고 하나님은 계속 창조해 왔던 겁니다. 죽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잠자는 것도 이미 죽음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흔적이라는 거예요. 잠잘 때 죽었다고 이야기하시고요, 정작 죽을 때는 잠잔다고 이야기하세요. 왜, 둘 다 동일한 의미입니다. 누구 눈에는? 살아계신 우리 밖에 계신 예수님의 안목으로 봤을 때는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잠잔다, 잠들었으니 이제는 깨워야지’ 할 때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난 뒤의 이야기를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되는 날에 주님께서 무덤에 가서 꼭 잠자는 사람 깨우듯이 깨웁니다. 금요일 밤에 제가 강의 마치고 밤 차 타고 내려올 때 꼭 코 고는 사람 있어요. 다른 사람은 무서워서 가만있지만 저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납니다. 꼭 완장 없는 반장처럼 죽 다니다가 코 고는 사람 있으면 깨웁니다. 막 깨우죠. 그러면 실례가 되지 않는가, 본인은 잠자고 있었기에 실례인지 뭔지도 몰라요. 깨고 나면 무슨 일이 있었지, 모르기에 그때는 마귀 실례를 해도 괜찮아요. 아무것도 모른 채 코를 골고 있으니까.

마구 쑤셔대면 후다닥 일어나지요. 한 20분 동안 잠잠해지고 다들 좋아합니다. 물론 우리 가족이 있다면 그런 짓을 못하지요. 나대지 말라고 할 것이기 때문에. “나사로야 나오너라!” 잠 그만 자고 그만 나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나사로가 나왔습니다. 이게 뭐냐, 세상 사람들이 죄도 모르고 메시아도 모르는 인간들이 나사로보고 죽었다고 결론을 지었어요. ‘나사로는 죽었어. 예수님 아니어도 우리끼리도 이것은 다 알아.’ 심지어 나사로의 누이동생도 그랬어요. “우리 오빠는 죽었다.” 우리가 아는 한 이것은 맞는 이야기라는 것이죠.

주님께서는 “죽은 것이 아니고 잠잔다.” “죽었습니다.” “잠잔다.”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잠자는 것을 깨워놓아도 또 잠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개입하는 거예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요 11:25,26)라는 구체적인 증거로서 나사로를 찾아가신 거예요. 여기서 나사로가 죽었다 살아났다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가 죽었다고 단정한 나사로를 누가, 누가, 누가 살려내느냐 하는 겁니다. 그 분이 바로 “나 예수다”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면서 진짜 예수님을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면서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어요. 왜, 죽은 자를 살려낸 그 예수를 그들은 체험하지 못했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 옆에 있고 보고 있고 믿는다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안 믿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는 말은 예수를 안 믿는다는 뜻입니다. 안 믿어지니까 오죽 하면 예수 이야기를 많이 해서 믿는 척이라도 하는 거예요. 그러나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요, 신앙생활 안하는 사람이에요. 왜, 할 필요가 없기에.

그냥 아침에 밥 먹잖아요. 그것도 신앙생활이고 밤에 자는 것은 내가 죽어 마땅한 것이고 아침에 일어나면 주께서 또 살려주시는 것이고 사나 죽으나 먹든지 마시든지 우리는 누구의 것이다? 주의 것이라고 살면 되는데 거기에 왜 신앙생활이 따로 또 필요합니까? 왜 보충수업이 필요하죠? 심화학습이 왜 필요합니까? 그냥 살면 되는데, 발걸음 세가면서 주께서 걷게 하시고 머리카락도 주께서 알아서 빠지게 하신다, 이렇게 살면 되고 죽는 것도 주께서 죽이시는 것이고 살려주는 것도 살리시는 것이거든요.

세상의 모든 권세는 다 우리 주님 손에 있으니까. 주님께서는 방금 이야기한 그 모든 다양성을, 여러 사람이 죽고 깨어나고 나사로가 죽고 깨어나고, 이런 것이 다 귀찮으니까 단 한 번에 끝내버렸어요. “내가 죽는다. 내가 죽어서 사흘 만에 부활했다. 이것을 믿어라. 그러면 이것을 믿는 자도 나처럼 같이 부활된다.” 이렇게 요약을 하신 거예요. 이게 우리 모든 인생에 마그마처럼 파급이 되어 있어요. 우리가 왜 있는가, 우리 살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은 예수님이고 그분의 능력으로 산다는 것을 믿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야 했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 온갖 짓을 다하고 죄인 줄도 모르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거예요. 그것은 전부 다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것을 소급해서 알도록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겁니다. “네가 죄짓는 것 네가 처리하지 마. 네가 죄지었다고 울고불고? 그러지 마. 앞으로 그 울고불고 이상의 더 큰 죄를 또 지을 거야. 지금 울고불고 하면 나중에 그것보다 더 큰 죄 지으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건데? 칼로 네 가슴을 찢을 거야? 괜히 오버하지 마. 괜히 가슴 쥐어뜯으면서 ‘나는 죄를 압니다.’ 그런 짓 하지 마. 그것마저 앞으로 둔감해질 거야.”

사람은 반복하게 되면 별로 죄 지은 느낌도 안 들어요. 술 먹고 오줌 누면 양심에 가책이 들지만 자꾸 하다 보면 그 다음부터 자연스러운 것이 돼요.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이 죄인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비로소 그 순간이 예수님이 구원해주려고 나로 하여금 전적 죄인으로 깨닫게 했구나, 하는 순간입니다. 죄 짓는다고 죄인이 아니고 아무것도 안했는데 이것은 바로 주님을 위해서 내가 죄인으로, 나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내 능력으로 내가 죄인 되는 것이 아니고 진리의 능력이 임했기에 내가 뭘 해도 이 땅에서는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오히려 그런 증거가 눈앞에 나타났다는 그것이 이젠 기쁨으로 바뀌는 거예요.

죄졌다고 울고불고 하는 것이 아니고 기쁨과 환희로 바뀌는 겁니다. “내가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어떤 인간인지를 이제야 내가 알다니! 십자가, 십자가 그렇게 해도 못 알아들었더니 십자가 앞에서 내가 아무것도 할 필요도 없고 할 게 없다는 사실이 주께서 주신 은혜 덩어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들끼리 모여서 연구해봐야 나올 것도 별것이 없고 자기 자랑밖에 없는데 우리는 덩달아 자랑 질이나 하면서 인생 하루하루 보냈습니다. 잠이 왜 오는지 옆 사람이 왜 늙어죽는지 아무 의미도 몰랐고 나 자신도 사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서 죄에 갇혀있는 꼴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미 우리는 영생 받은 사람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9강-롬5장 14-16(죄를 뚫고)130414-이 근호 목사.hwp (37.0K), Down: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