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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13-03-10 13: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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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강-롬4장 23-25(이삭과 예수님)1303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4장 23절에서 25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5페이지입니다.
로마서 4:23-25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 말씀에 아멘, 하기가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이 등장하잖아요. 우리가 일주일 생활하면서 언제 아브라함을 생각합니까? 아브라함은 성경책에나 나올 사람이죠. 그것도 과거의 인물이고요. 지금 21세기에 아브라함이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박근혜 대통령은 살아 있고 북한의 김정은은 살아 있는데 아브라함은 안 살아 있잖아요. 우리 가운데 있지 않는 아브라함을 우리가 왜 생각을 해야 될까요? 아브라함 모르면 위궤양 걸립니까? 사는데 무슨 지장이 있습니까? 소비가 촉진이 안 된다는 이것이 오늘날 제일 큰 고민거리잖아요. 경제가 살아나지 않는 것이 사람들의 관심사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가 아브라함을 알아야 돼요? 경제가 우선이고 돈이 우선인데 아브라함을 왜 알아야 됩니까? 그 다음에 “의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왜 알아야 됩니까? 우리는 의에 굶주려서 사는 자가 아니고 돈에 굶주려서 사는 자거든요. 그런데 의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 우리가 여기 앉아서 왜 그것을 알아야 되느냐는 말이지요. 거기 보면 “우리도 위함이니.” 이것은 오늘 본문 가운데 제일 어려운 대목이니 뺍시다. 너무 어려워서 설명이 안 될 정도거든요.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우리가 예수님 보고 죽으라고 했나요? 혼자 죽어놓고 이 사실을 왜 우리에게 알려주느냐는 말이지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죽은 적이 없습니다. 잠시 기절한 적은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죽은 적은 없잖아요. 우리는 지금까지 세월 따라 나이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단절의 경험을 한 적이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사람들의 얼굴을 대하는 것은 죽은 적이 없는 같은 인간들끼리 대화하고 소통하고 모인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죽은 적이 있는 분이 왜 끼어들어야 됩니까? 쏙 빼버리지. 당당하게 살아 있는 사람을 영웅으로 경배하면서 ‘부럽다’ 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에 맞거든요.
만약 여기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왔다 합시다. 그 사람은 아직까지 죽은 적이 없어요. 지금 바른 소리 합니다. 우리와 같이 살아 있는 그 사람이 왔다면 모든 관심사가 지금 이건희 회장한테 쏠릴 것인데 여기에 죽은 적이 있었던 예수님이 여기 계시다면 왜 우리는 이건희 회장에게는 관심이 없고 죽은 적이 있었던 예수님에게 관심을 둬야 되느냐는 말이지요. 왜 그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편지로서 우리한테 들이대느냐는 말입니다. 이것도 어렵고요, 또 어려운 것이 뭐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라고 했는데 우리가 언제 죄를 지었습니까?
우리는 소시민으로서 착실하게 살아온 사람입니다. 물론 한때 실수로, 한때의 방탕으로 경찰서나 교도소에 들어갈 수도 있는 문제지만 그 죄 값이야 거기가서 치르면 그만이고 우리는 죄 범한 자로서는 살아가지 않고 그 대신 착실하다, 반듯하다, 가정교육 잘 받았구나, 교회에서 목사님 교육 잘 받았구나, 이렇게 되지요. 우리의 머리에서 나 범죄했다, 이런 느낌을 갖고 평소에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은 또 이것을 이야기해요. 우리의 범죄함, 남이 아니고 우리, 우리 범죄, 나쁜 악마의 범죄가 아니고 우리가 범죄한 거예요.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내어줌이 되었다, 우리가 범죄했는데 왜 예수님이 내어줌이 되지요? 우리가 범죄하면 우리가 죄 값을 치르면 그만이죠. 예를 들어서 내가 한 주간 나쁜 생각이나 나쁜 짓을 했다 하면 교회 와서 그 주일만큼은 좀 일찍 오고 헌금도 좀 하면 죄 씻어주는 것 아닌가요? 기도도 열심히 하고 예배도 착실하게 드리면 그것으로 봐준다, 해서 죄용서 받는 것이 아닙니까? 나쁜 짓을 했을 때 뭔가 양심이 가책이 되었을 때 교회에 헌금 듬뿍 하면 왠지 죄졌다는 느낌이 상쇄되고 죄가 씻겨 내려간다는 느낌이 들 수 있잖아요.
혹시 주일학교나 성가대로 봉사한다면 죄를 지었다 싶을 때 일찍 와서 가운 입고 남의 파트 것까지 다 챙겨주고 동료 교사나 애들 다 돌아보고, 그렇게 하면 왠지 죄가 상쇄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본문에 예수님이 범죄 했는데 예수님이 왜 죽어야 됩니까? 인간사회에서 그런 방식이 납득이 될 수가 없어요. 죄는 내가 지었는데 왜 남이 내 대신 벌을 받아야 됩니까? 이것은 기분 좋다는 것보다는 그런 소리 들을 때 기분 되게 나빠요. 내가 내 지은 죄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 질 수 있는 존재도 아니란 말인가, 당신이 그 정도로 나를 무시했어, 죄를 지었으면 내가 알아서 착한 일을 더 많이 투입해서 상쇄시켜서 내 지은 죄는 내가 알아서 할 정도로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내 지은 죄에 대해서 책임도 못 지고 감당 못할 만큼 나는 허접스럽고 되도 않는 인간이었다는 말인가,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기분이 참 더럽지요.
그런데 그 기분 더러운 것을 알면서 또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라는 말이지요. 그러니 여러분의 잘못은 다른 것이 아니고 여기 와서 이 본문을 봤다는 것이 잘못입니다. 이거 안 보고 경제활동에 열중하면 돼요. 이것 안보고 정치에 관여하면 되고 북한 핵문제나 걱정하면 남들 사는 것처럼 평탄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괜히 교회 와서 단체로 로마서 4장의 이 이야기, 이것을 봐버렸어요. 납득도 안 되고 이해도 안 되고 용납도 안 되는 이것을 봤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우리가 착한 것을 모아서 그것이 누적되면 그것이 우리의 자랑거리인 의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의 의, 착함, 선한 것, 다 끌어 모아서 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본인이 십자가에서 살아남으로서 졸지에 우리가 의인이 되었다는 말을 기분 좋게 들어야 합니까, 아니면 어처구니없는 막말로 들어야 됩니까? 특히 여기서 제일 어려운 단어가 뭐냐, “의로 여기심을 받을” 다음에 나오는 “우리도 위함이니”입니다. 23절부터 다시 읽어보면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너는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을 자가 있다는데 그 사람이 바로 우리라는 겁니다. “우리” 이 우리가 누굽니까? 이것이 기독교 2천년동안 해명이 안 되었어요. 이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 우리래요, 다! 교회 오는 사람마다 다 우리고 목사 장로 집사 다 그 우리가 자기래요. 자기가 이 “우리”에 해당된다는 거예요. 누구 맘대로, 자기 맘 대로에요. 여기 우리에 해당되는 우리는 단 한명도 없습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하면 방금 읽었던 이 성경말씀은 우리를 주시하고 있고 우리에게 시선을 보내는 그 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이야기가 아니에요.
성경은 예수님이 하실 이야기에 대해서 언급해 놓았지 우리이야기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이렇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이 성경에 있는 “우리”라는 것은 우리교인들의 이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이 이 말씀대로 실행했기에 비로소 없는데서 생겨나고 죽은데서 살아난 그 집단을 가지고 우리라고 하는 거예요. 이해도 안 되고……, 나는 지금 쉽게 한다고 하는데 참 어렵죠, 여러분. 쉬운 이야기부터 먼저 할게요. 이러면 좀 이해가 될 거예요. 어제 저녁에 포항에 불났어요. 누가 냈느냐 하면 중학생이 불을 냈어요. 중학생이 라이터를 왜 들고 갑니까?
사람도 다치고 집도 탔다는 말이지요. 불 지른 그 중학생이 태어났을 때 그 집안에 아들이 태어났다고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참 좋아했겠지요? 돌잔치 할 때 “우리 아들 실 잡을래, 돈 잡을래, 책을 잡을래, 연필 잡을래?” 설마 장차 포항의 방화범이 되려고 라이터를 잡을 애는 없을 거예요. 그걸 놓지도 않겠지만.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남에게 본인가정, 본인우리, 자기들 집안의 우리, ‘이 애는 내 아들입니다. 이애는 예쁜 내 중학생입니다.’하는 그 많은 우리는 자기가 그 애를 살리려고 할 때 남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나, 우리라는 것, 내 가정, 내가 여기 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그 중학생이 태어날 때 그 엄마는 그것을 익히 알았느냐는 말입니다. 중학생 된 애들이 태어날 때 “얘야, 네가 앞으로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남에게 피해를 줄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 아버지여, 남에게 피해를 적게 주는 애가 되게 하옵소서.”라는 식으로 감사하고 기도하는 부모는 없어요. 모든 집안의 애는 다 자기애가 최고에요. 지금 설교본문이 너무 어려워서 다 아는 쉬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 자식이든 어느 우리든 다 남에게 자랑하고 싶은 우리라는 말이지요.
우리로 인하여, 나로 인하여 남이 피해를 본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우리가 될 수 없다고 본 거예요. 내가 여기 있음, 내가 여기 존재함에 남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사실을 안 하고 있는 우리는 성경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우리, 그것은 마귀적인 우리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악마적인 우리가 우리라고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왜, 자랑하고 싶어서 환장했거든요. 남들한테는 자기의 장점을 드러내고 자기한테는 숨기고, 그래놓고는 성경에 나오는 이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 이 우리를 어디서 함부로 넘봅니까?
교회 나왔다고 “우리”가 돼요, 예수 믿는다고 “우리”가 됩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서 이 “우리”에 포함될 수가 있어요? 그렇게 자기위주로 믿고 자기위주로 신앙생활 하는 자체가 남한테 피해를 준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습니까? 한국교회 목사나 신학자들의 제일 큰 문제가 뭐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십자가, 하고 십자가목걸이는 달고 다니면서 그 예수님이 누구한테 죽었다는 것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어요. 예수님이 누구한테 죽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누구한테 죽은 거예요? 죽었다는 그것만 이야기하고 누구한테 죽었다는 이야기는 안 해요. 누구한테 죽은 지 알아요? 하나님 잘 섬긴다는 그들, 우리한테 죽은 거예요. 누가 뭐래도 천국 간다고 장담하던 그 ‘우리’라는 집단에 의해서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똑 같아요. 전부 다 그들은 따라다니면서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 편이지요? 그치요?” 맨 날 이러면서 따라다녔어요. 제자들이 모였다 하면 “얘들아, 하늘나라 가면 우리 중에 누가 더 높겠는가?” 그런 소리 한다는 자체가 예수님을 피해준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우리 편이니까 죽고 난 뒤에 좋은 나라 가는 것은 기본이고 이제 보너스 받아서 더 좋은 자리에 우리 중에 누가 갈까, 라는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는 생각을 예수님 옆에 있으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거예요.
우리가 교회 나오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봉사하는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는 생각을 헌금하고 전도하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저는 선교사, 물론 다는 아니겠지만, 아는 사람 있다고 이런 멘트를 집어넣고 있는데, 선교사 중에 선교자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만든다는 것을 고백하는 선교사를 본 적이 없습니다. 목사가 목회하는 그것이 예수님을 죽게 한 죄라는 것을 어느 목사도 이야기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처음부터 새로 다시, 매일 새로 다시. 포항에 불난 사람, 바로 우리에게 속한 우리 가족이에요.
다 어릴 때 훌륭하다, 착하다, 우리 애를 보세요, 다 그랬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애가 남에게 생뚱맞게 집 다 날리고 쫓겨나게 만들고 귀한 국가재산을 다 허비하는 피해자가 될 줄 몰랐지요. 산불의 뜨거운 이것이 허상입니까? 이게 있지도 않는 말을 지어낸 거예요? 그 불이 뜨거운 것을 피부에 대 봐야 알아요? 산 불 난 것이 헛말이 아니고 그것을 보도한 그 일은 진짜 일로 믿으면서 왜 여기 본문에 나오는 ‘우리 범죄 함을 인해서 예수님은 십자가 죽게 되고 우리 의로움을 위해서 예수님은 다시 부활했다.’는 이 이야기는 왜 우리가 몰라도 되는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겁니까?
산불난 이야기는 진짜고 성경 이야기는 가짜로 왜 자꾸 밀어내는데요? 실제로 예수님 죽었다가 부활했잖아요. 그게 실제로 일어난 사건 같으면 거기에 의미가 있을 것이고 그 의미를 왜 우리가 모른 척 해야 되느냐는 말입니다. 교회 오는 것, 자기 교회 와서 믿음 좋다고 자랑 질 하러 온 거예요. 교회 있다는 것 자체가 범죄고 목사가 설교하는 그것도 범죄고 이 세상에 범죄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왜 범죄인가? 피해를 주니까. 누구에게? 하나님에게.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해 봅시다.
이 본문 말씀은 우리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시선, 그 시선에 관해서 적어놓은 글이 오늘 본문입니다. 우리보고 하라, 말아라,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분이 이 일을 해 내신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려면, 이것이 믿어진다면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뭘 해도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수십 년 교회 다니고 목사가 되고 까불고 찧고 해도 그것 자체도 죄라는 것을 인정을 해 줘야 돼요. 왜 그게 죄인가, 우리는 나만 쳐다보면서 하루 하루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내가 착할까, 내가 나쁠까, 내가 주의 말씀을 지켰나 아닌가, 이 모든 것이 바로 나에 대해서만 신경 쓰면서 나에게 질문해가면서 살아가는 그런 죄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실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보는 겁니다. 베드로도 삼년동안 그렇게 자기 생각을 하면서 예수님 따라 다녔습니다. 참 어처구니없는 짓이에요. 주님 생각하면서 따라다닌 것이 아니고 저 주님을 어떻게 이용해먹을까, 생각하면서 따라다닌 거예요. 내가 죽고 난 뒤에 저 분이 나의 구원을 보장해주겠지, 라고 자기구원욕구에 예수님을 이용하기 위해서 그렇게 믿은 거예요.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날 교인들이 똑같은 거예요. 그런데 보세요. 베드로가 닭 우는 소리에 회개했잖아요.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입니까? 닭 우는 소리에 회개했다고 할 때 우리가 닭 우는 소리를 녹음해 봅시다. 그 소리를 천명에게 들려줍시다. 회개할 사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아무도 없지요. “이게 뭐야? 닭 우는 소리잖아. 그래서 어쩌라고?” 우리가 매사 이런 식이에요. 베드로에게 닭 울음소리가 들렸을 때 베드로에게는 닭 우는 소리로 들린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 예수님이 자기 이야기한 그 것이 생각난 거예요.
그런데 평소에 예수님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생각만 화는 사람에게는 닭울음소리를 아무리 틀어줘도 그것이 자기를 주시하고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그 시선, 예수님의 목소리로 들리지 않고 양계장의 닭 우는 소리로나 들릴 뿐이에요. 그러니 교회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곳입니까? 교회라는 곳이 주님의 소리가 들려야 되는데 목사소리만 들리고 같은 집사 장로소리만 들리니 교회 백날 다녀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내가 가해자구나, 내가 피해를 입히는 자구나, 피해자는 오직 예수님만 피해자가 되고 나는 계속 가해자로 살아가는구나, 라는 것을 느끼는 닭 울음소리를 여러분이 언제 적 느낀 적이 있습니까?
똑같은 닭 울음소리를 음성파일로 만들어서 해 줘도 베드로는 우는데 우리는 ‘미쳤나’ 하고 “아저씨, 울지 마세요. 그냥 닭이 울었을 뿐이에요.”라고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닭 울음소리로 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평소에 어떤 짓을 했습니까? 이런 짓을 했어요.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질질 끌어서 데려왔습니다. 그 여자 본인은 신난 것이 아니어도 우리 보기에는 그 여자는 신났어요.
왜냐, 예수를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간통하고 안 들켰다고 예수님 앞에 올 기회가 없었는데 그게 들켜서 바리새인들한테 질질 끌려서 강제로 예수님한테 도달된 여인, 복 받은 여인입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에게 간통한 여인을 데려왔을 때 그들인 우리는 아주 당당했습니다. 자신만만했지요. 처벌할 수 있는 증거가 확보되었기에 저 여인을 처벌함으로써 저 여자는 죄가 되고 자기들은 의가 되고, 여자를 죄라고 규정하는 자기들의 의는 옳다고 인정받을 것이니까 그래서 좋고.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글을 썼습니다. 글 쓰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평소에 예수님께서 늘 하시던 닭 우는 소리였습니다. 평소에 늘 하던 이야기였어요. 바리새인들도 그 이야기를 평소에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이 언제 그것마저 죄라는 것이 들통 났느냐 하면 자기가 분명히 죄라고 규정한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타났을 때 망해야 될 사람이 바로 저 여인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쓰신 글 앞에서 들통 났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도망쳤습니다. 도망칠 라야 칠 수 없는 여인이 있어요. 그 간통하다 잡힌 그 여인만 예수님 앞에 도망칠 수 없이 예수님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 여자가 오늘 본문 24절에 나오는 “우리”입니다. 이랬던 저랬던 강제로 주님 앞에 끌려나온 사람, 간통을 했든 안했든, 누가 끌고 나왔든 자발적으로 왔든지 예수님 앞에서 비로소 ‘예수님은 우리 범죄 함을 인하여 이 땅에 오셨고 그 분이 죽고 살아남으로서 우리가 의인되기 위해서 그분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자가 우리입니다.
만약 여러분 집이 포항에 있었는데 중학생이 장난치다 불이 나서 집이 홀라당 불에 탔어요. 그런데 우리는 여기 이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면 기분 좋습니까? 우리는 내 집 불탄 것이 일종의 닭 울음소리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집에서 살 자격도 없는 죄인인 것을 일부러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집도 홀라당 불타게 했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예수님이 이미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내 생각하면서 평생을 내 자랑 질 하고 싶어서 환장하면서 살고 있어요.
교회 간다고 자랑 질했지요, 목사라고 자랑 질했지요, 평생을 우리는 자랑 질 말고는 다른 것 할 줄 모르는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 나와서 나왔다고 자랑 질하고 교회 못나온 것 반성한답시고 그 반성한 것이 예뻐서 또 자랑 질을 하고 회개하면 회개할 줄 안다고 또 자랑 질하고 우리는 자랑 질 외에 다른 것을 할 줄을 모르는 인간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입장에서 이 성경말씀은 우리하고 아무 접촉이 안 되는 말씀으로 남을 뿐이에요. 예수님은 따로 있고 교회가 만든 가짜 예수 따로 있고, 내가 믿고 싶은 예수 내 자랑 질을 긍정해주는 가짜 예수 따로 있고 너는 뭘 해도 죄라 하는 것을 보여주는 그 범죄 함을 위해 내어준 바 된 그 예수 따로 있는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여러분이 잘 아시지요. 롯이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유황불이 떨어져서 온 도시가 날라 갔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죽었지만 롯과 두 딸은 살아났다, 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잖아요. 우리는 성경 말씀을 그 반대로 읽을 줄 알아야 돼요. 롯 빼놓고 소돔과 고모라의 나머지 모든 사람은 살만큼 살다가 죽은 것이고 롯은 천사가 왔을 때 심판이 있다는 소식을 알았을 때 비로소 처음으로 그는 목숨 끊어지는 죽음 말고 진짜 죽음을 처음으로 맛본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심판을 처음으로 맛본 사람입니다.
롯 말고 다른 사람들은 심판받고 곧장 죽었잖아요. 그러니 그것을 끝났는데 롯은 무엇을 알고 있느냐하면 주님의 심판이 이 만큼 무섭다는 것을 유일하세 산채로 품고 살아가니 누가 뭐래도 롯의 입장은 이미 죽은 자예요. 죽은 자로써 살아가는 사람이 된 겁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식으로 하면 예수님이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람,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심판이 들어 있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잊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은 우리도 롯처럼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이미 받은 거예요.
우리는 살아도 산 게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도 내 안에 누가 사느냐하면 내가 살았다고 우길 수가 없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제발 거기까지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까지 만이라도 이해해줬으면 좋겠어요. 그 다음에 내가 아니고 누구라고 했습니까?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정말 이것은 남들이 들으면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에요. 왜 헌금을 해도 자기가 했고 헌금을 해도 자기가 했고 선교를 해도 내가 했는데 왜 내가 한 선교를 내가 안했다고 할 수 있느냐, 남들은 이해 못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했다는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 있는 것은 기적 받은 사람 외에 없어요. 포항에 집 샀는데 불났고요? 할 수 없어요. 그게 나에게 들리는 닭울음소리인데요, 뭐. 더 이상 나에게 포항에 집이 있다는 자랑 질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베드로에게 울렸던 그 닭소리로 그렇게 불 질러 버린 거예요. 그 중학생은 고마운 천사가 되고. 하여튼 자랑 질 할 수 있는 어떤 여건도 허락지 않는 것은 그 자랑 질 할 요소가 있으면 우리는 그 다음부터 내가 죄인이라는 소리를 하지를 못해요. 왜, 내 노력으로 평생 이만큼 애써서 재산 모았다는 자기자랑에 급급하다 보니까 주님이 하신 일을 놓치고 있는 겁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과 관련 있어야 될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나는 내 착함 모아서 의를 만들어서 천국 가려고 하는데,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다 해서 그것이 의가 되어서 상급도 받고 복도 받고 그것 가지고 나를 천당으로 밀어붙이는데 성경은 그것마저 죄라고 하니까, 오직 의는, 오직 구원은 예수님의 의로만 받는다고 하니까 왜 예수님이 내 인생에 개입하고 침투해야 됩니까? 내 허락도 없이. 그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 설명을 하는데 그게 어렵기에 주보뒤에 글로 써놓았습니다.
평소에 안 보시지만 오늘만큼은 부탁드리니 보시기 바랍니다. 위에서 네 번째 줄에 “인간들이 기껏 노리는 바는 죽음을 무효로 해서 마치 안 죽거나 덜 죽거나 못 죽어서 여전히 살아있는 자아상이 되고 싶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니 아들이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가 없다.” 이것이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아들이 되어야 구원되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를 지으라고 허락해 놓고 이제 와서 죄 안 지은 것으로 없이해 주는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일부러 죄 지을 수밖에 없게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너 죄 없다.’ 왜 그렇게 변덕입니까?
우리가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는 것이 비참해서 그래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래요. 사람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제발 나만 살 테니 너는 죽어달라는 식으로 살아가거든요. 직장, 가정, 모든 사회에서 그래요. 내 애가 시험 치면 내 애만 되고 나머지는 떨어져달라는 부탁 같은 것들이 있어요. 그래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남을 가해할 수밖에 없어요. 왜, 내가 사는 것이 우선이기에. 저 바른 소리합니다. 우리는 우리 사는 것이 우선이에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내 몸이 편한 것이 행복이에요. 이것은 어려운 이야기도 아닙니다. 내가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는데 새삼스러워하지 마세요.
사람의 행복이 뭐냐, 자기 몸 편하면 최고에요. 남이야 죽든 말든 관계없어요. 내 몸만 편하면 최고라니까요. 그러면서도 우리 맘대로 안 되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몰아넣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 안 지을 라야 안 지을 수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놓은 거예요. 그런데 이제 와서 죄가 없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죄 없이 하지 왜 죄를 실컷 짓게 해 놓고 죄 없다 하는 그 이유가 뭐냐? 우리 구원해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성사시키기 위함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2절에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태어났고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태어났다.’ 참 단어가 어렵지요. 여자는 여자지 무슨 자유 하는 여자, 자유가 왜 나옵니까? 민주화 투쟁할 일 있습니까? 여기서 자유가 왜 나오지요? 누가 성경을 쉽다고 했습니까? 그리고 23절에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모든 사람이 다 육체를 따라나잖아요. 산부인과에서 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이에요?
우리가 평소에 성경을 안 보니까 성경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모르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다 산부인과에서 태어나는 것 아닌가요? 촌에서야 집에서도 나지만. 육신에서 태어나야 인간인줄 알잖아요. 심지어 예수님도 육신에서 났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약속에서 태어났다는 겁니다. 이해는 안 가지만 계속 가 봅시다. 24절에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갑자기 웬 산, 백두산이나 한라산도 아니고 시내 산이 왜 튀어나옵니까? 우리나라에는 산이 없습니까? 또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났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저 멀리 있잖아요. 거기서 태어났는데 ‘그 예루살렘이 하늘에 있다.’? 점점 미궁에 빠집니다. 하늘에 예루살렘이 있다는 거예요. 26, 27절,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과부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다, 참 믿기가 힘들지요. 과부라는 것은 남편이 없다는 뜻이거든요. 남편이 없는데 자식이 있다는 정도가 아니고 오히려 육체로 난 자식보다 많다고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예루살렘, 하늘나라 예루살렘에.
지금 제가 소설 쓰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믿고 있다고 우기는 성경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무슨 뜻입니까? 설문조사 하는 거예요. “저, 엄마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 엄마는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혹시 과부십니까?” “예, 과부 맞습니다.” “아버지 누구십니까?” “아버지는 하늘나라에 계십니다.” 그 설문조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미쳤어요. 그렇게 답변하는 자가 미쳤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부모가 있어야 DNA를 받고 그 DNA가 뭉쳐서 자식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지금도 과학이 아니라 산부인과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증거가 있어요. 우리는 부모가 있어서 태어났고 우리는 다 부모의 얼굴을 닮은 거예요. 여기서 하등 하자가 있는 것이 전혀 없고 다 정상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진짜 아들은 인간의 육체에서 태어나면서도 그 육체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흔적을 가져야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겁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육체로 태어난 모든 자들을 지옥에 보내시는 분이 바로 우리 아버지라는 겁니다.
그래서 육체로 태어난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그 아버지를 믿는 사람만 이 세상에 아들이라고 인정할 수가 있다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입니다. 쉽게 말해서 태어난 것도 죄라는 거예요. 부모 잘 만나서 태어난 것도 죄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태어나다 보니 부모에게서 태어났잖아요. 그 책임이 우리한테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한테는 책임이 없는 거예요. 왜,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이렇게 태어나게 해주세요, 라고 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면 왜 책임도 없는 사람에게 왜 지옥 가는 책임을 묻느냐는 생각을 우리가 할 수 있거든요. 그럴 때 하나님의 답변은 뭐냐 하면, “너는 태어나서 지옥가든 천국가든 너한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만이 참 아들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너는 들러리로 태어나야 했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만이 진짜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는 겁니다. 그럴 때 로마서 본문 4장 24절에 나오는 “우리”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저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아버지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예수님 보내셨고 아버지가 그 예수님을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죽게 하셨고 아버지가 우리 의롭다 하심을 위해서 살게 하셨습니다.’라고 믿어지는 사람, 이것이 엄마가 하늘에 있는 사람이고 아버지가 하늘에 있는 사람이고 약속에 의해서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중요하기에 저희들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죄가 얼마나 강한지 우리는 우리를 지켜보는 시선보다 나한테 시선을 두면서 내가 나를 구원하려고 이것저것 믿어보면서 교회도 다녀보는데 그것이 다 우리의 자랑 질이 되고 그것이 바로 죄라는 사실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죄인을 죄 되게 만드는 그 닭소리가 오늘도 성경말씀을 통해서 담겨 있고 이게 우리에게 전달되는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진짜 믿는 자는 믿음으로 아멘, 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첨부파일 : 24강-롬4장 23-25(이삭과 예수님)130310-이 근호 목사.hwp (32.5K), Down: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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