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강-롬5장 1-4(환란 중에 즐거움)1303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5장 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5페이지입니다.
로마서 5:1-4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방금 읽은 이 이야기가 우리 실생활에 관련도 없고 관심도 없는 이야기라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는 이 모든 이야기는 천국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21세기의 한국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이민 가서 어떻게 살 것인가, 결혼해서 새 살림을 어떻게 살것인가, 거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천국 가게 된 사람은 천국에서 이런 삶을 산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이 이야기와 관련이 없는 사람은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이야기에요. 방금 읽은 이 이야기가 천국에 가게 되면 이것이 ‘아, 이렇게 되는구나. 이것이 천국의 삶이구나.’라고 생각이 되는데 지금부터 여기에 대해서 아무 생각도 없고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 나라 의를 위해서, 천국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고 천국과 끊어져 있는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의 물음은 ‘과연 천국이 뭐냐’하는 겁니다. 천국이 대체 뭐길래 이 땅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못 들어가고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여기에 부합되어야만 가는 나라냐 하는 겁니다.
대체 어떤 나라이기에!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열심히 살아보려고 얼마나 아등바등 애를 씁니까? 만신창이가 될 정도에요. 젊을 때는 자기가 멋진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세월가면 갈수록 살아남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입니다. 젊을 때는 양심도 챙기고 사회정의도 부르짖고 인류공영, 인류평화도 구현해가면서 밥 먹고 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상 살아보니 밥 먹고 사는 이것조차 안 되는데 인류공영이니 세계평화가 거기 왜 들어옵니까? 지금 밥 먹고 살기도 급급한데. 저축은행에 투자했다가 돈 날린 자갈치 시장 아줌마 보고 “아줌마! 인류공영에 힘 좀 써보시겠습니까?”라고 하면 그게 말이 되겠어요?
국제 평화를 위해서 어쩌고, 그게 말이 안 된다는 이야기에요. 세월이 가면 갈수록 아주 치사스럽게 돼요. 쫌생이가 되지요. 사람이 쫌생이가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자기 맘대로 안 되어서 그래요. 세상이 맘대로 안 되어서 쫌생이가 되는 겁니다. 세계평화, 인류공영, 양심대로살기, 이것은 다 부질없는 것입니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판국인데 거기다가 하나님마저 챙기려고 드니 이것은 엎친데 덮친격으로 하나님 챙길 여력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들이 교회 다니다가 예수님 포기하는 이유가 행함으로 예수님 말씀을 지켜보려고 따라 붙이다가 나중에 힘에 부칩니다. 도저히 따라 하다하다 안돼요. 주님이 속도를 너무 내니 똥차 타고 뒤에서 못 따라 붙이거든요.
행함으로 이만큼 하나님의 백성답다고 얼추 따라 붙었다 싶으면 주님은 속도내서 저 앞에 가버리는데, 절대로 우리 행함으로 따라 붙을 수 없도록 계속 몰아붙이는데 어느 세월에 주님과 동행이 됩니다. 거기서 우리는 ‘에라 모르겠다. 해도 안 되는데 뭐.’ 하고 포기하고 말지요. 그것은 오늘 본문에 대해서 크게 오해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사는 버릇이 있기에 천국도 착하고 잘하면 들어가고 못되고 성질 더럽고 나쁜 짓하면 못 들어간다고 생각을 해요. 교회가 다들 그렇게 가르치니까요. 착하면 복도 받고 나중에 천국 가서 보너스도 받습니다, 그렇게 가르쳐요.
그런데 사람이 이 땅에서 잘하려고 들면 잘하는 정도가 어디까지 잘해야 잘하는 겁니까?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았는데 돈도 생기면 그것은 착하고 싶지요. 착하고 바르게 사는데 돈도 생기더라, 그러면 누구나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지요. 그런데 이 땅에는 착한 것이 돈이 안 된다니까요. 양심적으로 살면 기본적인 품위유지도 안된다니까요. 독하게 맘먹어도 살까 말까 하는데 그렇게 퍼져서 어느 세월에 애들 피아노 시키고 학교 보내고 영어 가르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거든요. 그러니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기도 힘에 부치는데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예수님의 말씀도 지킨다는 말입니까? 무슨 힘이 남아돌아서 그렇게 하겠어요?
부자들 교회 다닌다고 하지요. 하루아침에 돈 있는 것 다 날려보세요. 한동안 새벽기도까지 나오겠지요. 도로 물러 내라고. 아주 땡깡(생떼)을 부리지요. 내 인생을 원 상태로 만들어 놓으라고.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에 대한 가장 솔직한 반응은 필사적으로 하나님에게 대드는 것이라고. 이게 가인 이야기에요. 가인이 하나님 앞에 대들잖아요. 결국 하나님과 관계있는 사람을 죽여 버리는데 이것이 인간에게 보여줄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솔직한 반응이고 거기에 맞춰서 가장 하나님다운 모습이 그 모습이에요. 인간의 분노의 샘을 자극합니다.
인간이 점잖고 착하고 반듯하고 훌륭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교회에서 신앙생활 오래한 장로님 스타일, 그거? 그런 사람들이 진짜 하나님을 만나면 그 화풀이가 하나님에게 다 쏟아져 나옵니다. 가인입니다, 가인. 근본적으로 오늘 본문 보면서 점잖은 장로스타일로 보게 되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그래, 우리가 믿음으로 의를 얻어야지.’ 그렇게 나와요. 그 다음에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그래, 더불어 화평을 누려야지.’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 다음에 특히 3절에 보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그래, 환란아 들이닥쳐라. 내가 그 중에 즐거워함으로서 신앙인으로서 본때를 보이리라. 보세요, 하나님. 내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잖아요.’ 이게 장로스타일이에요.
사업부도 한 번 나보세요, 이것이 되는가.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대체 어느 때까지 우리 자신을 속이려고 합니까? 근본적으로 문제점이 어디 있느냐? 천국은 잘 했다, 못했다, 그런 것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어쩔 수 없이 가는 곳이 천국이에요. 내가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런 상황을 가지고 우리를 조져놓고 질질 끌려서 어쩔 수 없이 천국은 가는 겁니다. 본문 볼 때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뭘 해야 됩니까, 라고 묻지 마세요. 주여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 라고 질문하세요. 우리가 어떤 인간이 되어가면서 천국으로 어쩔 수 없이 질질 끌려서 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까, 라는 질문을 해야 돼요.
가인이 하나님께 대든 것은 이유가 하나밖에 없어요. 제가 수천 번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천국까지 이사를 가겠다는 거예요. 천국 가서도 내 것을 심어놓겠다는 겁니다. 천국은 어쩔 수 없이 가는데 우리는 우리 것을 유지하면서 가고자 하는데서 한국교회 전체가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여러 번 이야기했어요. 천국은 자기 의로는 못 간다고. 천국은 자기 의로 못 간다는 뜻이 뭐겠어요? 평소에 너는 네 의로 천국 간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주님께서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쩔 수 없이 천국을 가게 된다면 여기에 출현하는 것은 뭐냐? 내가 주인공 되는 것이 아니에요. ‘나 어때요? 살기 힘든 가운데서도 바르게 산다고 이렇게 수고했습니다. 이렇게 수고한 저 어떻습니까?’ 하고 자기 자신을 출현시키는 것이 아니고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만 출현시키는 거예요. 예수님만 출현시켜서, 왜 나는 나의 못했다, 잘했다, 이런 식은 주께서 완전히 배제하고 예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우리는 그 일로 인하여 천국 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를 보게 하시는 거예요.
지난 주 본문 읽어보면서 다시 회상해 봅시다. 4장 23절과 24절에 보면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보세요, 이게 한 사람의 출현이잖아요. 천국주도권, 결정권이 잘했다 잘못했다만 따지면서 자기의 세우기에 급급한 우리의 출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4장 25절에 나오는 대로 어떤 분이 우리 범죄 함을 위해서 죽게 되고 그 분이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해서 살아났다는 것, 혼자 무대에서 벌이는 그 이벤트가 우리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천국가게 하는 전부다, 그 말입니다.
내가 설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설치면 설칠수록 더욱더 주님에 대해서 욕하게 되어 있고 주님 만나면 멱살 쥐고 흔들게 되어 있어요. 왜, 살아보려고 애를 쓰기에. 그런데 인간에게 산다는 것은 자기혼자 사는 것을 산다고 해요. 더불어 사는 것을 산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만 살면 그것을 가지고 산다고 하는 거예요. 대학시험에 누구 합격하면 합격된 그 집안만 웃어요. 자기 때문에 떨어진 다른 집은 울고 있다니까요. 후보 7번은 되고 8번은 떨어졌습니다. 참 인간이 얼마나 간사한지요.
어떤 시험에서 후보 8번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후보들은 1번이고 뭐고 다 취소되고 원래 합격자만 다 들어갔다면 후보 8번이 섭섭하지가 않아요.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 알아보기는 뭣 하러 알아보는데, 알아보니 후보 7번까지 되고 8번에서 끊어졌을 때 저 애는 되는데 나는 왜 안 되는지 나 못살겠다, 그러니 내가 산다, 못산다 하는 것은 절대적인 요건을 갖춰서가 아니라 ‘왜 남들은 살아가는데 나는 못 살아가느냐.’ 남하고 비교해서 그런 거예요. 남하고 비교하지 마세요. 우리는 남하고 비교하지 마시고 예수님하고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산다 죽는다, 죽는다 산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지옥이냐 천국이냐, 그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결정된 거예요. 우리 인간들 수십억은 다 모아놔도 쓰레기더미입니다. 거기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옵니까? 아무 소용도 없어요. 오늘 본문 로마서 5장 3, 4절,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 유명한 대목을 가지고 ‘내가 후보 8번이라도 한 번 살아보자.’ 이런 식으로 이것을 지켜서는 안돼요.
이 구절은 보통 부흥회 할 때 첫날에 하지요. 월부터 금요일까지 부흥회 할 때 목요일 밤이 헌금 날이고 돈 받아 챙기면 부흥회가 거의 마무리가 되는데 이 부분은 월요일에 많이 해요. 그 이유가 뭐냐, 내가 부흥사인데 이 부흥사가 이단이 아니라는 것, 강사초빙 참 잘했다고 하면서 월요일 아침 10시에 시작할 때 이 대목이 들어가요. “여러분, 구원받으려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천국에 가려면 환난을 받아야 되고 환난은 인내를 만들고 인내는 연단을 낳아서 연단은 소망을 이룹니다.”라고 이야기를 해보는 거예요.
사람들이 이 대목에서 천로역정이 떠오르고 그 다음에 자기 6.25때 폭탄 떨어지는 속에서 살아난 이야기가 들어가고 그것으로 세 시간 때웁니다. “환난 중에도 주님을 바라봤습니다. 여러분도 주님을 바라보면서 견디고 또 견디면 여러분도 구원받습니다.”라고 하거든요. 여러분, 구원은 견디고 또 견뎌서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받는 겁니다. 오늘 아침에 제가 부흥회 왔다고 치고 구원을 어떻게 받는가를 먼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구원은 하나님의 선제공격이 있어야 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사람들이 안이하고 무방비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선제공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사자가 낮에 온 것이 아닙니다. 밤에 다 잘 때 찾아왔어요. 하나님이 얼마나 비겁합니까? 사람이 맞짱을 떠도 한 판 붙자, 이런 것이 있어야 할 것인데 밤중에 새벽 몇 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만 밤중에, 다 잘 때에 난데없이 선제공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아들을 잃은 통곡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어요. 다들 아들 잃고서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제가 지금 구원에 대해서 설명하는 겁니다. 착하게 살고 견디면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하는 분위기 속에서 성경에 나오는 구원은 하나님의 선제공격이에요.
하나님의 비겁한 공격이고 무조건 공격해요. 집안의 희망이 뭡니까? 맏이가 잘 되는 겁니다. 맏이를 위해서 부모는 콩나물을 팔든지 어떤 수모를 당하더라도 자식 하나 잘되는 것 보려고 정화수 떠놓고 아침마다 기도해 왔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알고 그 지점을 쳐버리는 거예요. 둘째 셋째, 말 안 듣는 막내 같은 것은 치지도 않아요. 제일 맏이, 그 애만은 대학에 보내기를 바라는 그 맏이, 그 맏이를 친다니까요. 난리가 났지요. 너나 할 것 없이 맏이만 골라서 다 죽었어요. 하늘나라 폭격기가 들어왔어요.
구원은 뭐냐, 히브리인들에게는 평소에 집에서 키우던 어린양 하나 있을 거예요. 잡아먹으려고 키운 거지요. 그런데 그 어린양이 자기 집안의 맏이를 살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시시한 어린양, 시장에 가면 몇 만원주면 사는 그 어린양이 하나님의 급습에서도 유일하게 살아남고 구출될 수 있다니, 그 시시한 어린양이, 똥 싸고 오줌 싸는 어린양이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살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렇게 시시한 것과 주님의 급습과의 연결,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견디고 인내하면 구원받는다고?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면 구원받는다고? 그것은 구원이 아니에요. 그것은 인간들이 조작한 것이고 종교화시킨 겁니다. 그것은 상식적인 이야기인데 그런 상식을 피해서 하나님께서 급습해버린 거예요. 어린양이 피를 흘릴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양을 잡아먹기 위해서 키웠지만 이제부터 양이 그 히브리가족을 주관합니다. 가인이 하나님 앞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제사를 드린 것이 문제가 되었어요. 내가 갑이고 을은 하나님이에요. 내 것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해 볼까 싶어서 교회 온 겁니다.
그런데 막상 구원을 받고 보니 주도권이 내가 아니고 오히려 내가 어린양의 것이 되고 말았기 때문에 나라는 인생은 어린양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다가 죽어야 되는가, 그 절차와 여정을 보여주는데 우리는 질질 끌려가면서 어쩔 수 없이 천국까지 가는 겁니다. 왜, 어린양이 거기 가기에,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 거기에 도착해서 거기 영원히 살고 있기에 거기에 합류하는 차원에서 우리는 천국 가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 것 위해서 성당에서 기도하고, 자기 것 위해서 결혼식 하고, 자기 것 위해서 교회 나가고, 자기 것 위해서 절에 가던 그것이 이제는 집에 있으나 등산 가나 이민을 가나 어디를 가도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이 이런 수모를 당했군요. 이 세상은 예수님 살기에 적합지가 않았군요.’ 하면서 같이 적합지 않은 삶을 어쩔 수 없이 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 것 키우고 자기 것 지키기 위해서 살아가는 현실이지만 우리는 이상스럽게 내 것 지키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고 예수님이 어떤 분임을 실생활로 보여주기 위해서 난데없이 예상 밖의 사태를 만나야 될 운명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어린양이 있기에 우리 안에 예수님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의 내용은 우리 인간들이 개인적으로 이렇게 사세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을 예수님과 대비시켜서 인간 자체를 통으로 봅니다. 통으로 본다는 말을 쉽게 설명하면……, 가락교회 강의에서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통 오징어 있잖아요. 물오징어를 주부들이 요리할 때 식도로 절개를 하면 우리 눈으로 외부에서는 안 보이던 먹물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절개해요. 평소에는 내 안에 이런 것이 있었나, 할 정도로 몰랐고 또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들이 우리 안에 물컹물컹 들어 있거든요. 그것을 수술하듯이 칼로 째버리면 퍽 하고 터져요. 터지만 어떻게 되느냐,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님은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라고 했으니 그 세트에 맞추기 위해서 우리 범죄 함이 통 오징어 먹물처럼 우리 안에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기 위해서 ……, 참 어려운 말입니다. 왜 어려운 말인가, 나는 내 것이 키워지는 즐거움으로 인하여, 라고 살아가잖아요. 내 것이 즐거워지는 지는 것이 통 오징어 먹물이잖아요. 그것을 칼로 째버리면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지 아닌지를 끌어내기 위해서 그 말씀으로 우리를 절개를 해요. 맘 같아서는 통 오징어 한 마리씩 앞에 놓고 칼로 해부해보는 생물학 실험실로 하고 싶어요. 쭉 째면 먹물 튀어서 얼굴에 다 묻는다는 말이지요.
쉽게 하면 하얀 식탁보가 있는데 애가 거기서 공부하다가 잉크를 엎질러서 그 하얀 보자기위에 검은 잉크자국, 이것이 우리 인생의 오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 참하고 깨끗하고 근사한 우리 인생에 오점을 남기는 겁니다. 오점을 남겨서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분노하고 어떻게 하나님께 반발하는지를 주께서 지켜보십니다. “주님이여, 내 인생을 왜 이렇게 조져놓았습니까?” 주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네 인생? 누구? 네가? 네 인생이 있었어? 모든 인간은 동일한 인간인데, 통 오징어인데 어떻게 네 인생이 따로 있고 저 사람 인생이 따로 있지?” 주님께서 절개를 할 때 그 사람은 예수님이 들어있는 새로운 통 오징어가 되는 겁니다. 주님이 손 댄 적이 있는 통 오징어.
그것을 외상이라 합니다. 정신분석학용어지요. 내 인생의 트라우마, 그것만 없었으면 나는 아주 괜찮은 인생인데 이것 때문에 내 인생을 누구 앞에 떠벌이기도 부끄럽다는 것, 그것 주께서 손댔습니다. 그냥 (칼로) 그려버렸습니다. 주께서 똥물, 먹물 튀어나오게 만들었습니다. 그 범죄는 다른 것이 아니고 죄인이면서도 죄인 된 내가 아까워서 이 아까운 나를 포기 못하고 천국까지 기어들어가려는 시도, 그게 바로 죄입니다. 누가 손대지 않았는데 자기 스스로 겉멋을,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겉멋, 교회에서 들었던 것들로 매끈한 피부로 천국 들어가려고 시도하는 이 모든 것, 그것은 바로 애굽 사람들이 자기 아들 자랑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부르스윌리스가 주연했던 유명한 영화 <식스 센스>라는 것이 있어요. 그 영화가 마지막 돌발적 반전으로 유명합니다. 그 반전이 뭐냐, 어떤 소년이 고민거리가 있어서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하러 갔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지요. 나중에 영화 끝에 보니 자기가 상담한 정신과 의사가 이미 죽은 유령이에요. 그게 반전입니다. 사람은 교회 와서 예수를 불러내서 상담을 하는데 그 예수는 진짜 살아계신 예수가 아니고 자기가 호출해 낸, 자기가 키운 꿈속의 예수, 자기 야망이 만들어낸 가짜 예수와 그동안 신앙상담을 해 왔어요.
그런데 그 신앙상담을 시도하는 그 기초가 뭐냐, 내 것을 어떻게 하면 잘 보존될 수가 있느냐, 이것이 출발점이에요. 제발 수술 안하고 손 안대고 어떻게 좋은 나라 갈 수 없습니까,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 생각으로 천국 가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천국 가는 내내 내가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이길 수가 없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이길 수가 없으면 우리는 내 것에 대해서 힘들게 한 그 모든 것은 자신의 원수가 되고 적이 됩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제가 드라마를 만들어 볼까요? 어떤 형사가 있는데 경찰되기 전에 교통사고가 났었어요. 그래서 기억을 상실했습니다. 그 후에 형사가 되었지요. 오래전부터 난제인 수사를 해보니까 범인이 누구냐 하면 수사하는 본인이 바로 범인인 것이 드러난 거예요. 이 아이디어를 어떤 작가가 좀 사갔으면 좋겠어요. 좋은 반전이잖아요. 예수를 유대인들이 죽였다고 하니 많은 유럽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들었지요. 히틀러도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내가 믿는, 내가 인생 상담하고 있는 예수를 몰라보고 죽였으니 그 원수가 누군가 하고 찾아보니까 결국 누가 죽였나, 예수 믿는 본인이 예수를 죽인 거예요.
한 번도 칼질 받은 적이 없어요. 인생의 오점이 없어서 그래요. 먹물이 안 튀어나와서 그런 겁니다. 절개 당한 적이 없어요. 매끈하게 자기사수, 자기 방어하는데 급급하면서 평생을 살아온 겁니다. 자기 품위유지 한다고. 그러니 성경 백독했다느니 천 독했다느니 하는데 성경 만 독을 해보세요. 자기 피부에 주님의 칼질이 일 밀리도 들어간 적이 없는데, 먹물이 튄 적이 없는데. 다시 말씀드립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할 때 이것은 뭐냐 하면,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를 이용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이제는 예수님이 누구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미 우리 값을 다 치르고 우리 인생은 잘했다, 못했다와 전혀 무관하게 어쩔 수 없이 천국으로 가야 합니다. 삼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어쩔 수 없이, 자기 뜻과 관계없이, 교회 몇 번 나왔는가와 관계없이, 헌금 얼마나 했는가와 관계없이, 잘했다 잘못했다 관계없이, 얼마나 성실했느냐와 관계없이, 사기를 쳤느냐 아닌가와 관계없어요. 사기를 치게 하는 그것도 내 인생에 오점을 남기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제가 말조심해야 됩니다. 자칫하면 범죄를 정당화 하는 수가 있어요. 제자들이 예수님 십자가 전에는 꼼수를 썼습니다. “야, 이제 되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 덕분에 구원받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천국 갔을 때 우리 중에 누가 높은 자리에 앉겠는가?”라고 되도 않는 꼼수를 썼어요.
주께서 모를 리가 있습니까? 맘을 만드시고 귀를 만드시고 눈을 만드신 이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자기를 잊어버렸어요. 자기가 사라져버렸어요. 강도의 위협, 물의 위협, 이런 것이 문제가 안돼요. 왜냐, 내 안에 살아계시는 예수님의 인생을 자기가 바깥으로 보여주기에 그렇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라고 하는 것이 이론이 아니고 진짜 현실 속에서 주님께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 땅에서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 이 세상이 얼마나 주님이 살아가는 것을 힘들게 만들었는가, 이것을 느끼게 하는 인생을 살게 된 거예요. 자기 인생이 아닙니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마태복음 10장 16절입니다. 제가 성경 보면서도 여러분도 이렇게 생각했는지 의심도 들어요.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제가 이렇게 읽었잖아요. 이 때 ‘제자들한테 그런 일이 일어났구나.’ 이렇게 생각할까봐 걱정이 돼요. ‘아, 제자들은 이렇게 힘들게 살아갔구나.’라고만 생각할까봐서. 제자들 따로 우리 따로 되어버리면 제자들만 성령 받고 우리는 성령 안 받은 것이 되잖아요.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너희들이 나를 인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조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항상 우리는 나를 위하여 예수님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하여 내가 살아간다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통으로 보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통으로 보는 관점에서 성경을 보시는 겁니다. 그동안 성경을 어떤 관점에서 보셨습니까? 저것은 제자들의 이야기고 나의 이야기는 아니고, 그렇게 되잖아요. 또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내가 너희를 대신해서 죽는다고 했어요. 사도바울도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대신해서 죽는다는 말을 ‘음, 대신해서 죽겠지.’라고 생각했는데 한 번 가만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공무원시험 칠 때 예수님이 대신해서 여러분의 시험을 쳐주던가요? 주님이 대신해서 살아준다면서. 이발할 때 여러분은 가만있고 주님이 대신 이발 다 합니까? 목욕할 때 그리고 여성들 임신할 때, 예수님이 대신 임신해 주던가요? 성경에서는 대신한다고 해놓고 대신하는 것이 하나도 없네요. 그래놓고는 예수님이 믿을만한 분이 되겠어요? 뭘 대신했습니까? 그래서 가락교회 강의에서 질문을 던졌어요. 마리아가 잉태해서 해산을 했는데 예수님이 마리아 대신 임신을 했다 치면 예수님이 예수님을 임신한 것이 되는데 그게 맞는 말이냐고 물었어요.
사람들이 유구무언이지요. 여자들 경우는 임신인데 남자들의 경우를 봅시다. 남자들은 군에 가는데 첫날밤 훈련소 막사에서 잠을 잡니다. 거기서 많은 청년들이 꿈결에 생각해요. ‘나는 지금 군에 온 것이 아니고 집에 있다.’하고 잠을 자면서 꿈속에서 그리고 있는데 꿈을 깨면 “동작 봐라.”하고 몽둥이 들고 설칩니다. 주님이 내 대신 군에 가 주셨습니까? 평소에 주님이 내 대신 살아줬다는 것을 느끼지도 않고 말만 믿는 척 하면서 살아온 거예요? 그게 신앙입니까? 아니면 신앙인 척 하는 건가요?
여러분 인생에서 주님이 나를 대신 한다는 것을 언제 아느냐하면, 바로 내 행함, 착함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오점을 남길 때, 바로 통 오징어를 절개해서 수술하는 그 순간에 내가 군에 간 것, 임신한 모든 것을 통해서 나는 얼마나 내 자신에 집착했는가를 느끼게 만들 때 주께서 내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죄짓는 역할을 평생토록 하도록 일임 했군요, 라는 것을 느낍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케 함으로써 마리아는 자기 죄를 알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이 당했던 생활의 서러움, 밥 먹고 살아야 된다는 그 갈등, 그러면서도 아버지 뜻을 이루어야 된다는 그 갈등, 그 갈등을 우리로 하여금 감내하게 하고 그것을 느끼게 만들어서……, 생중계가 잘 되니 제가 지치지도 않아요. 사람이 이렇다니까요.
모든 것이 술술 풀리지 않을 때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이 싫어지고 그동안 손해보고 고생시킨 것 생각하면 손해배상 청구하고 싶고 내 인생 돌려달라고 얼마나 가인처럼 따지게 됩니까? 그것이 바로 주께서 기다렸던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살아야 될 모습입니다. 여기 3절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말은 환난에서 벗어나서 즐거운 것이 아니고 환난 중에 ‘어린양이 내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내가 어린양의 소유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그 순간순간으로 우리로 하여금 즐거워하게 만드는 겁니다. 어쩔 수가 없이.
내가 일부러 유도한 나쁜 환경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만든 환경 속에서. 그 다음에 연단은 소망을 이루거든요. 그러면 소망이라 하는 것은 원래 없는 거예요. 주께서 우리에게 개입하지 않으면 소망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소망은 내 것 유지하겠다는, 내 것 지키겠다는 소망인데 그런 헛된 소망뿐이니 그것은 소망도 아니거든요. 진짜 소망은 항상 숨어 있고 절개를 통해서 내 것이 날라 가 버렸을 때 주께서 친히 준비하신 소망이 비로소 우리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불신자들은 자기 것만 생각하기에 결국에는 자기가 죽는 순간에 소망도 끊어진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죽고 난 뒤에 “천사님, 혹시 천국 명단에 제 이름이 있습니까?” “봅시다. 미안합니다. 명단에 당신 이름이 없네요.” 이것은 착한가 안 착한가의 문제가 아니고 처음부터 명단에 없기에 환난 중에 즐거워하는 것도 없었고 인내와 연단과 진짜 소망도 없었고 그저 소망이라 하는 것은 내 것을 놓치면 안 되고 쥐어야 되고 잃으면 안 된다는 식의 자기가 키운 소망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러데 그 소망이 결국에는 자기로 하여금 ‘나는 이만큼 성실했고 착했고 교회에 열심 냈다.’는 장로스타일의 자기의, 이만하면 상급 받아 챙겨도 합당합니다, 이런 것들, 성질 같아서는 면도날로 쫙쫙 째고 싶어요.
우리가 죄짓는 인생은 주께서 대신 지심을 알리기 위해서 죄짓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는 뭐냐, 그것이 죄 아니라고 우기면서 자신이 정당하다고 우기는 그 죄입니다. 이 죄가 언제 드러나느냐 하면 주께서 인생을 절개할 때, 인생을 째서 먹물이 터질 때 ‘애초부터 나는 나라는 것이 없었다는 사실, 주님의 것으로 쓰임 받는 주님의 지체일 뿐이지 아예 나라는 것은 없었고 어린양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의 희생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죄를 짓고 있음’을 깨닫는 그 관계가 우리로 하여금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입니다.
비겁하게 급습한 그 심판 앞에 그 지옥의 혹독함을 무슨 착함으로 이겨내고 배겨낼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것을 버텨낼 수 없어요. 아무리 착해도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미리 주께서 우리 어린양 되시는 예수를 준비하셔서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 분을 준비해 놓고 이제 왜 예수님만으로 구원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고난에 참여시켜서 이제는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으로 살아야 된다는 옳은 관계를 주께서는 이렇게 알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지식이 아니고 우리 현실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지식으로 치장만 하기에 급급했는데 내 인생 살기 위해서 하나님 이용하지 말고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기까지 왜 어린양이 내 대신 죽어야 되는가를, 왜 내 죄 때문에 먼저 돌아가셔야 되는가를, 우리를 의롭다함을 위해서 왜 살아나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관계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