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으로서의 인간
2013년 3월 24일 본문 말씀: 로마서 5:5-8
(롬 5:5, 개역)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 5:6, 개역)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 5:7, 개역)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롬 5:8, 개역)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오늘 본문에서 ‘성령’이라는 단어 ‘그리스도’라는 단어 등 여러 가지 각가지 단어들이 나옵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눈에 보이는 않는 단어들은 실재하지 않는 것들이라고 여기고 다 빼버립니다. 현실 속에 없다고 간주하고 솎아내듯이 뽑아내어버리고 자신이 경험했다고 여기는 것들로 재조립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의인’이라는 것 그리고 ‘선인’이라는 단어들이 눈에 띱니다. 의인과 선인은 일반인들의 수준에서 감히 하지 못하는 것들을 해내면서 평생을 살아온 위인들을 연상하게 됩니다. 즉 예수 잘 믿는 자는 기껏해야 의인이나 선인 수준에 해당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흔한 상식선에서 보면 죄인이란 우리 인간들이 선정해놓은 의인과 선인과는 정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을 두고 말할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의인과 선인이란 평소에 악한 일보다 착한 일을 보다 많이 하고 사는 사람이고, 죄인이란, 평소에 선한일보다 악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적으로 의인이나 죄인은 없고 비율적으로 선한 일이 많은 선인이요 악한 일한 쪽에 많으면 악인이라고 보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 말씀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인간도 죄를 지을 수 있다’가 아니라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이기에 무엇을 해도 죄가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내용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규정을 거부하려고 합니다. 즉 죄를 지은 적이 있지만 선한 일을 한 적도 많이 있고 또한 선과 아니요 죄도 아닌 중립적인 가치를 지닌 행동은 하루 일과중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주장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죄를 지은 적이 있다’가 아니라 ‘뭐해도 죄인으로서 하는 일이다’라고 자신을 받아들이 아니하면 그 뒤에 나오는 ‘그리스도’를 바르게 이해될 수가 없습니다.
‘죄를 지은 적이 있다’와 결합되는 것이 ‘참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참 그리스도는 ‘죄인’과 결합되어 하나님의 의와 구원과 영생을 만들어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점을 거부하는 이유는,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 배제시키고 있는 성령님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뽑아서 ‘현실’이라고 간주합니다. 어떤 원주민들에게 탐험가들이 방문했습니다. 탐험가들은 원주민에게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야만춤을 보여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이야기를 건네 들은 원주민들은 한참을 숙의하더니만 과연 야만춤을 보여주었습니다.
나중에 어떤 이가 원주민들에게 물었습니다. “그 춤이 진짜 전통적인 야만춤입니까?” 그러자 원주민 대표가 말을 합니다. “우리는 탐험가들이 보기를 원하는 대로 즉석에서 만들어 보여주었을 뿐입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나, 종교나, 교회나, 신이나, 예수, 성령, 이 모든 것들로 마찬가지입니다.
있지도 않지만 사람들이 보고 싶고 듣고 싶기에 인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모든 종교는 이처럼 조작된 것들입니다. 아무리 그 종교 안에 법이 있고 구원의 방식이 있다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다 조작된 원주민의 야만춤에 불과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규정하고 그 지은 죄를 나열하고, 그 죄에 대해서 분명히 안다고 자부하기에 그 죄를 씻을 수 있는 방안까지 인간들이 자의로 만들어내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어디까지나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있고 죄 지을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기는 하지만 뭘해도 죄가 되는 죄인은 아니다”가 밑바닥에 깔려있습니다.
그 예가 마태복음 26:3-8에 나옵니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단이 몸이 들어가서 일생을 마칠 수 밖에 없었던 가룟 유다의 행동을 살펴봅시다. 그는 나름대로 죄의식과 죄책감에 충만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른지를 안다고 우기는 가운데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스승을 팔아먹었는데 그 스승은 결코 죄가 없으신 분이고 억울하게 죽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하면서 자신이 저지른 죄를 삭제하고자 노력합니다. 일단 받은 돈은 성전금고에 넣습니다. 그리고 스승을 팔아먹는 자신의 몸은 스스로 살해해서 없애버립니다. 여기에 대해서 당국자들은 그 돈을 도로 분리시키고, 그 돈으로 묘지터를 구입합니다. 그곳이 바로 ‘피밭’이라고 불립니다. 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국자들의 태도나 가룟 유다의 태도를 통해서 어떻게 원상회복을 시도하는 인간들의 본래의 모습을 접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는 어떻게 하든지 자신이 해결하므로서 책임질 줄 아는 자아상을 구축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끝까지 자신은 죄인일 리가 없다는 겁니다. 비록 자주 죄를 지어도 죄인이라는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 견지되면 구원이고 영생이고 뭐고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그리스도와 접할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의 피값은 하늘나라 입성을 위한 피값으로 적절치 않습니다. 그는 비록 자신이 죄를 안다고 시도했지만 자신이 진정 죄인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이 죄인이라고 여기는 것은 성령님이 임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직 이삭이 임신도 하기도 전에 천사 세 분이 아브라함 가정을 방문합니다. 이 때 부엌에서 음식준비하면서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가 천사가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그 이야기의 내용는 “내년 이맘쯤에 아들을 가질 것이다”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사라는 부엌에서 웃었습니다. 말 같지도 않는 말을 천사가 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 그 천사들은 ‘그 웃음’에 주목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왜 웃음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느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웃음을 우습게 만드는 식으로 아들 이름을 사전에 정해버립니다. ‘웃음(이삭_’이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기적인 일의 개시입니다. 아이가 생기는 것만이 기적이 아니라 그 앞서 비웃는 인간의 비웃음도 기적이 합류합니다. 사람이 자신이 죄인이라고 여기는 것은 기적에 속합니다. 자에게서 그 어떤 선의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인정할 때만 비로소 참되고 그리스도의 일을 접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죄값’으로서의 피흘리심입니다. 십자가 지신 것만이 기적이 아니라 그 십자가의 피를 보고서 “어느 인간이 그 저 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다 말인가”라고 자기 속내가 들켜버리게 된 것, 바로 이것이 기적입니다. 성령님의 찾아오심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십자가 지셨기에 비로소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환자는 말이 많으면 아니됩니다. 처방은 의사가 홀로 다 하듯이 성도는 추가적으로 자기 행동으로 보태야만 자신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만 구원받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체가 죄인이기에 죄인으로서 믿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보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6강-롬5장 5-8(죄인으로서의 인간)1303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5장 5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5페이지입니다.
로마서 5:5-8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세상에 하나님 믿는 종교가 많지요. 종교라 하는 것은 다 신을 전제로 하고 만드는 것인데 그 많은 종교들이 있지만 그 많은 종교들 중에서 특히 유대교라는 것이 있는데 기독교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있었고 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줬다는 계시까지 있어요. 그것이 구약성경인데 다른 말로 율법이라고 하고 또는 선지서라고 합니다. 그 율법과 선지서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특히 율법 같은 경우는 아예 돌판에 글자로 새겼습니다. 십계명을 새겼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신이 친필로 쓴 글자가 있으니 누가 뭐래도 이것 외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없다, 우리만이 하나님과 유일하게 통하고 하나님께 구원받고 복 받는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도바울이 전하는 이 복음에 의하면 이 세상 어느 종교에도 ‘죽는 하나님’은 없어요. 살아 있는 하나님이 살아 있는 인간과 상관하는 종교는 사람들에게 호응이 되는데 하나님이 그만 죽어버렸어요. 하나님이 죽어버렸으니 뻥, 하고 모든 것이 무효로 돌아가는 셈이 되어버린 겁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정상인데 하나님에 손대는 순간 하나님이 뻥 하고 터져 사라져버렸다면 내가 믿는 하나님은 허상이었는가, 가짜였는가, 이 점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해 주기 위해서 메시아가 돌아가신 거예요.
쉬운 예를 들면 탐험가들이 소문 듣고 원주민들을 만나러 왔어요. 원주민 만나고 나서 하는 말이 “토속 춤을 보여주세요. 돈을 드릴게요.”라고 하니 원주민들이 쑥덕쑥덕 회의를 하더니 벌거벗고 추는 야만스런 춤을 보여줬어요. 탐험가들은 사진도 찍고 아주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이춤은 언제부터 이렇게 춰 왔습니까?”라고 하니 “전통은 무슨 전통? 당신이 이걸 보고 싶어 했잖아요.” 그들이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들어보고 거기에 맞추어서 새롭게 만들어낸 춤이 원주민들의 춤이었어요.
이 말은 뜻은, 신은 없다는 거예요. 신은 없는데 사람들이 신을 찾으니 거기에 맞춰서 신을 만들어낸 거예요. 기가 막히지요? 종교라든지 천주교의 교황제도, 이런 것은 다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기에 만들어낸 거예요. 자기가 보고 싶어 하기에 본인들이 만들어낸 겁니다. 왜, 다른 것은 안 보고 싶어 하니까. 제가 서울을 한 달에도 여러 번 가는데 갈 때마다 서울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릴 때는 ‘서울이 이렇게 생겼다.’ 하면서 드라마에서 봤던 서울, 달동네도 있고 다 있는데 막상 가니까 내가 상상한 서울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에요. 내가 직접 서울에 발을 딛었다는 그 사실이 서울을 없어지게 만든 겁니다. 서울을 떠나오면 서울이 있는데 내가 서울에 들어가 버리면 내가 생각한 서울은 없어요. 그냥 사람 사는 동네에요. 내가 만약에 브라질에 간다고 한다면 내가 생각하는 브라질은 브라질에 없어요. 그런데 만약 브라질에 갔다가 거기를 떠나서 다시 한국에 오게 되면 삼바를 추고 축구를 좋아하는 그 브라질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삼바 춤 속에 내가 춤을 추면서 들어가면 삼바 춤이 뭐라는 그것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춤을 추니 배고프다, 어디 햄버거 집이 없을까, 이런 일상적인 것만 느껴질 뿐입니다.
세상의 이 모든 것은 조작된 거예요. 교회고 종교고 다 이것은 평소에 내가 보고 싶은 것을 골라서 꽃다발 만드는 식으로 내가 만들어 낸 종교고 내가 만들어낸 신이고 내가 만들어 낸 교회, 내가 만들어 낸 예수인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정작 내 자신이 누구냐에 대해서 스스로 매일같이 조작해 내고 있는 겁니다. 어제는 이것이 나라고 하다가 오늘 되면 이것이 나라고 하고 내일 되면 이것이 나라고 우기니까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를 모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몰라요.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찾으니까 그 하나님이 있을 리가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5절에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라고 성령이 나오지요. 눈에 보이나요, 성령이? 눈에 안 보이는 것은 없는 거예요. 우리가 내가 본 적이 있기에 서울을 구상하게 되지 성령은 본적이 없기에 여기에 글자로 적혀 있어도 이것을 빼버리지요. 적혀 있어도 소용없는 겁니다. 왜, 내가 만들어 낼 수 없는 대상이니까 이것은 있어도 나에게 관련이 없기 때문에 없는 거예요. 그 다음 6절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라고 하는데 그리스도께서 지금 있습니까? 안보이니까 없잖아요. 그러니 이것도 빼버립시다.
그 다음에 뭐냐, 7절에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라고 했는데 의인을 한 번 찾아보는 거예요. 의인이 어디 있는지 이것을 구상을 해 봐야 되니까. 그러면 유명한 사람들, 법정스님이나 테레사수녀나 김수환 추기경같은 사람들을 의인항목으로 묶는 거예요. 훌륭한 목사나 순교자 행세한 사람들 묶어서 의인이라 치는 겁니다. 그 다음에 계속해서 나오는 것이 “선인을 위하여”라고 나오는데 이 선인은 일본 유학 갔다가 철로에서 떨어져 죽을 뻔한 사람 구하고 대신 죽은 학생같은 사람을 분류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이것이 골치 아픈 거예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다고 하니까 죄인이라는 것이 뭔지를 규정해야 되는데 우리가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말이 돼요. 오늘 설교가 참 어렵지요. 우리가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라는 말이 참 쉬워요. 그런데 우리가 죄는 지을지언정 죄인은 아니거든요. 우리가 맨 날 죄를 짓는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죄를 지은 적은 있어요. 학교 때 컨닝 안한 사람이 누가 있어요? 컨닝 하고 싶지 않아도 선생님이 잠시 나가게 되면 하게 되고 안하고 싶어도 남들 다 하는데 혼자 안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지금 학교 폭력이니 왕따 문제가 있지만 학교 다니면서 누굴 왕따 안 시켜본 적이 있습니까? 다 경험이 있지요. 그러니 여기 있는 이 말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라는 이것도 우리한테 해당이 안돼요. 우리가 죄를 짓는 적이 있지만 곧장 돌아서서 착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많은 착한 일이 실수로 어쩔 수 없이 한 모든 죄를 거뜬하게 씻고도 남는 착함이 있으니 이것도 해당이 안 되죠. 결국 성경 말씀을 우리가 이렇게 같이 봐도 중요한 것은 다 뽑아요. 횟집에 가서 회는 안 먹고 곁다리로 나오는 것만 먹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회는 먹지도 않고 상에 깔린 다른 음식 먹고서 회가 맛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없다고 여기는 이 말씀을 여기에 집어넣는 이유가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하고 우리가 구상하는 하나님하고 거리가 있다는 거예요. 서로 안 맞고 차이가 나고 연결도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없어서 우리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내 입맛에 하나님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있어도 나에게는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매일 같이 만들어내거든요. 매일같이 만들어내고 그 내가 만들어낸 하나님만 섬기지 내가 안 만든 하나님은 안 섬긴다는 말이지요.
내가 만들어 놓았기에 나에게 친밀하고 나에게 납득이 되는 거예요. 내 마음에 안 맞는 하나님을 우리는 배척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 뭐합니까? 이미 다 빼버리는데. 성령은 안보이니 빼고 그리스도는 이미 죽은 분이라고 빼고, 우리는 죄인 아니기에 빼버리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일들이 하나같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가 만든 하나님을 우리 쪽에서 대조해가면서 이 성경이 맞는지 안 맞는지 확인해 가면서 바라보게 됩니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우리가 죄인이기에 그렇다고 하는 거예요.
죄인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이야기한 것을 우리 쪽에서 확인해서 믿겠다는 그 모양새 자체가 죄인의 모습인 겁니다. 쉬운 예를 들면 양 집사님 자제가 태민인데 태민이가 유치원에 들어갔어요. 한 달쯤 되었잖아요. 그런데 애가 운다는 거예요. 유치원에 가니까 자기 가방이나 놀던 장난감을 치워야 되는데 그게 속이 상해서 우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는 엄마가 다 해줬잖아요. 엄마가 다 해줬는데 이젠 엄마가 유치원에는 안계시니까 선생님이 “네 자리 깨끗이 치워라. 그리고 밥 먹은 식판은 여기다 갖다 놓아라.” 이렇게 시키니까 거기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우는 겁니다.
인생이란 것이 왜 이렇게 힘드냐는 거지요. 왜 이렇게 사는 것이 힘든 겁니까? 힘든 이유가 있지요. 자기가 생각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힘들기 때문에 그게 유치원인거예요. 힘들면 유치원에 안가면 되는 거예요. 안가고 집에 있으면 자기가 상상한 세계에서 영원히 30되고 50되고 할 때까지, 그 때 엄마는 한 백 살이 더 넘겠지요, 그 때까지 다 엄마가 해주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은 변하네요. 엄마가 유치원에 가라고 하네요. 가니까 스트레스 받네요.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꼬이냐고 후회를 하지요. 빼도 박도 못합니다. 나중에 군대에서 오라고 하면 스트레스 더 받는데.
태민이, 7살짜리의 자기가 구상한 세상, 거기에 맞추어서 엄마를 이해하고 아빠를 이해했는데 이것이 무너지고 와해될 때 그게 내가 생각못한 여분의 남아 있던 그것이 바로 세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신을 믿고 교회 나와서 하나님 섬기면 된다는 이거스 이것이 태민입니다. 이것이 일곱 살 먹은 애의 자기세계에요. 그런데 살아 있는 말씀, 우리가 빼버리고 싶은, 갖다 버리고 싶은, 예수고 성령이고 죄인이고 뭐고 성경의 용어는 다 빼서 던지고 싶은데 그 던지고 싶은 그것을 다 주워 모아서 다시 우리에게 안길 때 우리는 여기서 울 수밖에 없습니다.
네가 만든 교회 다니기, 네가 만든 예수 믿기, 그것은 탐험가들이 요구해서 원주민이 즉각적으로 만든 조작된 토속무용이고 야만 춤에 불과한 거예요. 우리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한 겁니다. 그렇다면 8절에 나오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여기서 죄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이것이 여러분을 위로하려는 것인지, 또는 기분을 좋게 하려는 것인지 그것은 저와 관계없습니다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는 범죄한 적이 없기에 우리는 죄인 된 적이 없어요.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전제가 뭐냐, 우리가 죄인 되었다는 것을 알 때 그 다음에 우리가 없다고 여겼던 그리스도가 등장하고 그 다음에 우리에 대한 구원, 사랑, 복음이 만들어지거든요. 그런데 처음부터 만들어진 그 재료에 우리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라는 자격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우리는 죄를 지은 적이 없기에 우리가 전적으로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의식이 우리에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초반에 성경입구에서 이 성경을 피해 버리는 겁니다. 죄는 지은 적이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겠는데 뭘 해도 죄인이라는 이것은 거북스럽기에 우리는 죄인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죄를 지은 적은 있지만 전적으로 모든 것이 죄라는 인식은 없는 거예요.
그게 없으니까 그리스도도 우리한테 죄를 가끔 지을 때 필요한 그리스도 따로 있고요 우리가 전적으로 죄인 되었을 때 필요한 그리스도가 따로 만들어지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가끔 짓는 죄가 있다고 할 때 필요한 그리스도, 죄를 지을 때 그냥 용서만 해주면 되는 그런 그리스도로 우리는 충분한 거예요. 그런데 그런 그리스도는 원주민이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서 즉각적으로 만든 전통 춤일 뿐이고 실제로 주님은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죄인 되었을 때”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초반부터 틀리게 들어갔기에 그 뒤에 나오는 영생, 이것은 우리한테는 상관이 없는 겁니다. 결국 상관없는 빈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는가? 그런 천국과 영생을 또 조작해서 성경구절 가지고 만들어내야 돼요. 죄에다 죄를 더하는 것이고 가짜에 가짜를 더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사분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환자 중에서 제일 골치 아픈 환자가 있답니다. 사실은 우리 집안 이야기입니다만. 요양병원 환자 중에서 제일 골치 아픈 환자가 가만있는 환자 말고 막 말을 쏘아대는 환자랍니다.
환자 티도 잘 안 나는데 이게 치매라 진짜 환자인데 막 쏘아대면서 말이 너무 많을 때. 정신과가 아니고서야 청진기를 자기가 들고 설치는 이런 식의 환자는 없겠지만 하여튼 말이 너무 많은 거요. 의사가 묻는 것만 이야기하면 되는데 자기가 막 이야기할 때, 자기가 자기를 치료하려고 할 때 그 환자가 의사로서 제일 부담이 된답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자기 인생에 보충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제발 입 좀 다물라는 거지요. 너는 그냥 환자로서, 죄인으로 왔을 뿐이고 치료는, 의사는 이 예수님이 의사에요.
그런데 이 환자가 너무 말이 많아. 어릴 때부터 십일조 했습니다, 교회 봉사했습니다, 내가 기도해서 땅값 올리고 예배당 새로 지었습니다, 내가 목회해서 교회 이만큼 부흥했고 선교사도 30명 보냈습니다, 저녁마다 기도하고 매일 큐티합니다, 말이 너무 많아요. 저녁마다 기도한다고 해놓고는 우리교회는 오후예배 때 기도하라고 하면 아무도 없어요. 누가 환자인지 누가 의사인지 분간이 안돼요. 보충해서 채워주는 식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아무것도 내놓을 필요가 없어요. 그냥 값을 예수님이 대신 치렀기에 해결되는 겁니다. 왜 주님께서 값을 다 치러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죄를 짓는 사람이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점점 더 죄인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주님이여, 반성합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그 말 뒤에 괄호를 열고 무엇이 붙어 있느냐, ‘하지만 죄인은 아닙니다. 내가 죄는 지었지만 그래도 죄 지은 것을 알고 반성할 정도로 제가 기특하고 대견스럽지요. 하지만 죄인은 아니올시다.’라는 것이 뒤에 붙어 있어요. 그것을 잘라야 되는데 그것을 자를 수가 없습니다. 왜, 자기가 생각해봐도 늘 죄짓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제가 말씀드립니다. 본인이 죄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에 그런 겁니다.
그러면 죄라는 것도 모르는데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도 자기가 조작한 거예요. 내가 죄가 뭐라는 것을 자기 맘대로 조작해놓고 자기가 어긴 죄, 안어긴 죄라는 판정도 자기가 만들어낸 겁니다. 그것 다 무효입니다. 그것이 무효라는 것을 성경에 나오는 예로 들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에 가룟유다 이야기가 나오는데 가룟유다 이야기가 나오면 우리는 살짝 기분 더럽습니다. 왜냐, 사람 속에 사탄이 들어갔던 분이거든요. 이미 인간 속에 악마가 들어왔다는 것은 사람취급 안하잖아요.
가룟유다에 사탄이 들어가서 스승인 예수를 팔아먹었습니다. 팔아먹고 난 뒤에 우리는 가룟유다 이야기는 그 정도 선에서, ‘역시 사탄이 들어가니 멸망하는구나.’라는데 까지만 듣겠다고 멈추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을 멈춰버리면 우리가 오늘 본문 로마서 5장의 설명이 곤란해집니다. 로마서 3장도 설명이 곤란해져요. 성경은 멈추지 않고 이야기를 진행시킵니다. 나중에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고 은 30개를 받았는데, 요새 다른 말로 하면 수표로 30장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은 삼십 받고 나중에 가만 생각해 보니 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되어 있어요.
죄도 없는데 내가 죄라고 지적함으로써 그 예수님의 생명이 피로, 죽은 목숨으로 전환되었다, 내가 예수님을 안 팔았으면 지금도 살아서 안 죽고 있어야 될 그 분이 내가 팔아서 예수님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하니까 당국자가 하는 말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라고 하니까 “내가 당신에게 받은 돈인데 내가 착복 안합니다. 당신들 봤지요? 내가 받은 돈을 당신들이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성전에 도로 냅니다.” 하고 던져넣고는 자기는 목매서 자살했습니다. 그러니까 6절에 대제사장이 그 연보궤를 뒤집어요.
뒤집어서 가룟유다가 넣은 그 은 삼십 개를 골라내서 하는 말이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 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이것은 피 값이기에, 죄가 묻혀서 발생된 죽음의 증거물이기에 죄는 성전에 들어오면 안 된다는 것, 죄로 형성된 그 값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탱하는데 기여하게 할 수는 없다는 식으로 따로 빼냅니다. 그래서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죽음에서 오는 것은 결국 죽음밖에 없다 해서 죽음의 묘지를 샀는데 그 뒤에 8절에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라고 하는 거예요. 가룟유다는 이미 자살해 버렸죠.
우리가 세상 살아가면서 가룟유다가 자살했다는 것, 받은 돈도 착복하지 않고 돌려줬는데 사탄 들린 가룟유다가 생각하기에 무엇이 죄인가, 무엇이 죄 아닌가를 본인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잘못된 죄라는 것이 다시 원상회복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리되면 죄라는 것은 없는 것이 되고 내 몸 때문에 억울한 분이 죽었다면 내 몸이 자살하게 되면 이미 저질러진 일은 되돌릴 수가 없지만 내가 자살한 이 값으로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내가 죄는 지었지만 죄 안 지은 사람으로 될 수 있다는 원리와 법칙이 이미 이 세상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거기에 준해서 양심에 가책도 없고 자살도 안하는 그것은 죄고 비록 죄는 지었지만 돌이켜서 회개하게 되면 죄 없이 된다는 그 죄와 죄 씻는 원리원칙이 이미 이 세상에 형성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자체가 죄를 모른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제가 학교 교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때부터 담배연기를 싫어한 모양입니다. 남학교인데 애들이 담배를 피우는 거예요. 한 정의 한다, 하는 내가 쉬는 시간에는 나도 좀 쉬어야 하는데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서 담배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상상해 볼 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작대기 하나 들고 아침에 스트레스 다 풀 요량으로 갑니다. 한 놈이라도 걸려야 돼요. 안 걸리고 넘어가면 찝찝해요. 스트레스 풀길이 없거든요. 그래서 한 놈이라도 잡는데 한 놈이라도 걸린 날은 다른 애들이 안 피우거든요. 잡아서 팹니다. 애는 그것을 수용할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 애는 담배 피우는 것이 죄라는 그것이 죄의 항목에 안 들어가 있어요. 그런데 담배 피우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담배를 피워서 나쁜 것이 아니고 교칙을 위반한 그 권위에 대한 무시 자체가 죄가 되기에 거기에 대해서 나는 죄라고 이야기하고 나쁘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선생님과 학생이 만났는데 둘 사이에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죄의 수준, 레벨이 달라요. 레벨이 다른 수준에서 내가 때리니까 몇 대 맞아요. 인간이 매를 맞는 이유는 ‘내가 선생님의 권위를 존중해 줄 테니 선생님도 좋은 쪽으로 해서 내가 몇 대 맞아준 것으로 해서 선생님의 권위도 살았으니 그 정도 선에서 타협하고 치웁시다.’ 하는 계산이 깔려 있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것은 담배 피우는 것은 규칙을 어긴 것이고 나쁜 것이라는 생각을 얘가 갖아야 다른 애들도 그것을 이해하고 그 다음부터 학생지도가 수월해 진다는 것을 또 노린다는 말이지요. 이게 심리적으로 복잡해요.
내가 작대기로 몇 대 때리니까 그 다음에 작대기를 빼앗아서 세워 넣고 하소연을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피 값으로 졌는데 그 피 값에 가룟유다의 피 값이 섞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섞일 것으로 여긴 거예요. 왜, 자기 딴에는 할 수 있는 도리를 다 했기에. 선생님 팔아서 돈 착복한 것 다 돌려줬지요, 그 다음에 그것도 모자라서 ‘그러면 내가 장렬하게 목매 죽겠습니다.’ 해서 실제로 죽었지요. 그런데 그 피 값은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건져내기 위한 피 값에 부합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십자가에 예수님 피를 흘리고 그 피를 믿어야 용서받고 영생 얻는다는 것을 알지라도 아무도 그 피를 믿을 능력이 있는 사람은 없어요, 아무도! 그것은 자기 죄의 레벨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껏 하는 것이 뭐냐, 예수의 피를 믿어주는 배려로서 구원받고자 하는 시도를 하게 된 겁니다. ‘예수님, 제가 예수님 흘린 피를 믿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구원받는 것이 맞지요?’ 이 정도로 타협하잖아요.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고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라고 했는데 지금 이 말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우리가 지금 어디까지 들어갈 수가 없느냐하면 우리는 죄를 지은 적은 있지만 우리는 아직 주님께서 죄인이라 하는 그 죄인규정 속에 자기를 자발적으로 집어넣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너무 말이 많아서 그래요. ‘내가 이렇게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내 생각에 내가 지은 죄는 내가 책임지어야 된다는 생각으로서 내가 지은 죄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기 위해서 나는 이런 행동을 했습니다. 이 정도면 어떻습니까?’ 하고 우리는 너무 말이 많아요. 그 말 하는 것 자체가 죄인데. 제가 어제 광주에서 그런 강의를 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너무 많이 사랑하니까 자식으로서는 그것을 기분 좋게 보는 것이 아니라 기분 되게 나쁘게 보는 거예요. 왜 기분 나쁘냐 하면 사람이라 하는 것이 하나의 인격자고 주체자잖아요.
그러면 내 인생은 내가 꾸려 가는데 누가 오버해서 너무 많은 은혜를 베풀어버리면 내가 어느 세월에 그 은혜를 다 갚습니까? 어느 세월에도 못 갚으니 항상 부모 앞에 오면 자기는 죄인이 되는 거예요. 이게 자기의 품성과 안 맞는 거예요. “적당히 하이소, 적당히! 김치는 맛 더라도 내가 담을 테니 촌에서 배추 들고 그만 오세요.” “김치 맛이 이래서는 안 된다, 얘야!” 너무 하지 마세요. 너무 하게 되면 어느 세월에 부모의 은혜를 다 갚습니까? 다 못 갚으면 부모 앞에서 나는 죄인 되며 내가 스스로 잘난 인간으로 군림을 못하잖아요. 그게 기분 나쁜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온 이유가 잘난 체 하기 위해서 나온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갚을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되어버리면 나는 천국 가서 내 주장 못하잖아요. 그러면 천국가도 내 세상 아니고 주님의 세상 되어버리면 나는 똘마니 밖에 안 되잖아요. 나는 영원히 내가 주인공이고 돛대고 왕초가 되어야 되는데 내가 천국 가서 기죽으면 그렇게 힘든 천국을 내가 미쳤다고 갑니까? 못가지. 안가지.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이유는 하나님을 안 믿기 위해서 교회 나온 거예요. 천국 안 가려고. 천국 안가겠다고 시위 하듯이 교회 나온 겁니다. 속지 마세요. 한국 교회 전체에 대해서.
성경말씀은 그 사람들하고 달라요. 그 사람들은 고객들이 원하는 하나님과 천국을 준 거예요. 그러니까 좋다고 교인들이 모인 겁니다. 그래서 그 자식이 부모한테 어떻게 하느냐하면, 일부러 나쁜 죄를 지어요. 나쁜 죄를 일부러 지어버리면 부모가 자식한테 “내 새끼가 이런 죄를 짓다니. 우리 애가 그런 애가 아닙니다.” 하고 드디어 엄마 입에서 복음이 나옵니다. “나는 너한테 실망했다.” “(됐다!) 엄마 아빠! 제발 날 좀 그냥 놔둬. 이제는 나도 나 스스로 천상천하유아독존, 나도 스스로 나만 있다는 감을 확 느끼면서, 내가 신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살도록 은혜니 사랑이니 제발 귀찮은 것들이 떨어져 나가줘.”
사소한 죄를 지음으로 그 은혜 준 것에 대해서 나한테 값을 치르지 못하도록 사전에 전략적으로 방비하는 사고방식이나 정신 상태를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자기 수준에 맞추어서 변경시키는 겁니다. 선생님이 막대기로 때리니까 맞다가 화가 나서 막대기를 도로 빼앗아 버려요. 특히 여선생님한테는 그런 일이 많이 있어요. 여선생은 약하거든요. 고 3애가 빼앗으면 빼앗기는 거지요. 맞다가 막대기 빼앗고 하는 소리고 “선생님! 이 정도 맞으면 담배 피운 값은 되었지요?” 하고 자기 종아리 내놓고 자기가 때려버려요.
많이 보시지 않았습니까? 자기가 교회 한 번 안 나왔다고 헌금 곱빼기로 해요. 성가대 파트 맡아놓고는 못나왔다고 그 다음 주에 헌금 한 2천원 더 보탠다니까요. 더러운 피 값을. 가룟유다가 다른 것이 아니에요. 가룟유다가 자살한 것은 자기가 아는 레벨에서는 예수님이 하는 모든 것이 수용이 안 되는 겁니다. 우리는 내가 만든 원주민 춤을 내가 스스로 즐기면서 평생 동안 교회 왔다 갔다 안 나왔다 또 갔다가, 그런 식으로 살아온 겁니다. 자기가 만든 서울을 서울이라고 우기는 거예요. 실제 서울은 다른데. 천국도 가는 순간 내가 안 그 천국이 아닐걸요.
그러면 대책이 뭐냐?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 늙은 부부가 나옵니다. 종 하갈과 관계해서 나은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이 이미 있고. 그 가정에 누가 찾아옵니다. 천사 세 명이 찾아와요. 천사 셋이 찾아와서 아브라함에게 네가 내년 이 맘 때 아기를 생산할 것이다, 라고 할 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부엌에서 듣습니다. 남자들 이야기하는데 여자가 부엌에서 그 소리를 들었던 모양입니다. 사라가 싱긋 웃었습니다.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아이를 낳으리요.’ 하니 바깥에 있는 천사가 하는 말이 “웃었다.” 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라가 하는 말이 “제가 언제 웃었습니까?” “네가 분명히 웃었잖아. 웃었다.” 웃고 안 웃고가 뭔 상관입니까? 그런데 천사가 굉장히 심각하게 생각했어요. “네가 분명히 웃었고 네 자식 이름은 이삭이라고 지어라.” 그러니까 웃었다는 말을 요즘 말로 바꾸면 ‘웃기네. 우습지도 않은 일이.’ 그 우습지도 않은 일이 우리가 만든 현실을 완전히 파토 내는 주님이 심어 넣어둔 웃기지도 않은 사건, 이 기적이 있어야 돼요. 이 나이에 늙은 할머니에게 애가 생긴다는 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그 말도 안 되는 소리, 누가 들어도 웃기는 소리밖에 안 돼.’라고 우리의 본심을 들추는 그것이 기적이에요.
하이고!~ 이해되려나 모르겠다. 예수님 십자가 피 흘리는 그게 기적이 아니라 “어느 인간이 그걸 믿어! 웃기네. 저 피가 내 죄를 어떻게 용서해?”라고 나는 죄는 지었어도 죄인은 아니라고 느낀 그것을 들춰내는 그 능력, 그게 바로 오늘 본문 5장 5절에 ‘성령’입니다. 성령이 그 일을 하십니다. 성령은 십자가에 죽지 않고는 성령이 온 법이 없어요. 성령은 반드시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와야 돼요. 성령은 다른 소리를 못하기에. 성령은 오직 십자가 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거든요. 십자가 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우리하고 다른 단어나 신학적인 이야기를 해봐야 그런 것은 다 우리가 즉각적으로 조작된 원주민의 춤에 불과하다니까요.
자기가 자기하고 즐기기 위해서 만들어낸 개념들이기 때문에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따라서 성령께서는 오직 한 가지만 이야기합니다. 의사가 “그래요? 아이고 환자분이 이야기도 잘하네요. 그래요. 또 뭐?” “그래서 선생님, 제가 주사는 이렇게 맞고 약은 이렇게 먹어야 되는거 맞지요?” 하면 의사가 다 듣고 나서 “아니요” 하고 피 한 방울 줘버리는 거예요. 실컷 이야기하게 해 놓고 성령께서는 이미 주께서 하신 것으로 주는 겁니다. 왜냐하면 방금 네가 주저리주저리 꺼낸 모든 것들이 네가 네 수준에서 아는 잘못 생각한 죄 개념이고 주님의 죄 개념에 의해서 너는 죄를 지은 정도가 아니라 ‘죄인’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인된 것을 아는 것을 감사해야 돼요. 죄인된 것을 알기에 더 이상 우리가 생각하는 죄의 자책감을 우리한테 적용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존에 내가 알았던 죄의 개념을 가지고 적용시키면 그것은 예수님의 피를 가려버리는 악마의 혼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결국 가룟유다처럼 우리도 자살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죽어야 꼭 자살입니까? 화투치는 것도 자살이고 포로포폴 주사 맞는 것도 자살이에요. 태민이가 유치원 가서 우는 것도 결국 그거예요. 인간은 스트레스 받는 것 때문에 우는 겁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는 거예요. 제가 광주에서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어떤 상황에서 전염병이 감염되었다는 말은 감염될 때 병균이 온 것이 아니고 이미 그 지역에 병균이 있었기 때문에 감염이 된 거잖아요. 전염병이라고 아는 순간 이미 그 전부터 병균이 거기에 있었음을 보여주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매개로 해서 이 세상을,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하는가를 설명하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처럼 하는 겁니다. ‘경건치 않은 자, 연약한자’,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고 10절에 보면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이런 개념은 우리가 이것을 깨닫기 이전부터 이미 형성된 것인데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깨닫는 순간 전부를 아는 거예요.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했을 때 죄인이 된 것이 아니고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하고 나서 나단 선지자가 와서 ‘바로 당신’이라고 지적할 때 다윗은 그 순간만 죄인이 아니고 ‘내가 모친의 뱃속에서부터 죄인이었구나.’ 하는 온 세상 진리전체가 한꺼번에 다가오는 겁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전체를 알아야지 일부를 알면 우리가 어느 세월에, 몇 개월 하고 몇 년 해야 다 떼는 겁니다. 학원처럼 얼마 다녀서 다 떼는 것이 아니고 한꺼번에 다 와요, 한꺼번에. 십자가를 알게 되면 모든 진리에 대해서 한꺼번에 다 아는 겁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보충하지 마세요. 자꾸 보충하게 되면 교회 목사 수법에 말려듭니다. “당신은 이것은 좋은데 돈을 안내서 문제다. 돈만 추가해서 내면 당신 좋은 교인이다.” 이런 식, “당신은 돈은 되는데 기도가 모자라니 기도만 추가하게 되면 온전한 교인이다.” 이런 식으로 자꾸 말려들어 가는데, 사실 여러분이 스스로 그런 조작된 것을 원하기도 하지만 이젠 그런데 말려들지 마시고 성경말씀을 보는 순간, 이것을 한꺼번에 내가 더 이상 보충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피 값을 다 치룬 거예요.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한 겁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참 이야기 더 하고 싶은데 지금 시간 관계상 이야기를 더 못해서 아쉬운데 그건 할 수 없는 거고요. 그러면 이 사실을 안 믿으면 어떻게 하는가?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신데렐라 동화를 여러분이 아시잖아요. 계모와 언니들의 구박을 받았으나 천사가 와서 파티에 초대를 받잖아요.
12시안으로 돌아오라는 거예요. 파티에서 놀다보니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이 다 되었어요. 급하게 온다고 서둘러서 오다가 하이힐 한 짝을 놓쳤는데 현 빈인지 원빈인지 신데델라 부르면서 보니 계단에 하이힐이 한 짝만 있거든요. 그거 하나 남기고 떠나가 버렸어요. 그게 흔적입니다. 여기서 십자가가 왜 등장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흔적, 십자가는 흔적이에요. 이걸 쥐고 찾아가는데, 그래서 온 동네방네 소문이 났는데, 현 빈이 찾는다고 찾아갔는데, 온 색시들이 꾸미고 나오는데, 문제는 신발이 안 맞는다는 거예요.
이 십자가는 구원받기로, 오직 창세전에 영생주기로 작정된 사람만 이 신발이 딱 맞아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아무도 자신을 죄를 지은 적이 있지만 죄인이라고 간주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피가 담긴 이 말씀, 십자가 피로 세운 언약이라고 히브리서에 나오거든요. 모든 언약은 피로 세웠다고(히브리서 9장). 피로 세웠기에 피를 배후에 깔고 그 다음에 말씀을 앞에 던집니다. “네가 죄인 되었을 때에” 뒤에는 뭐가 준비되어 있다, 피가 준비되어 있어요. “네가 죄인 되었을 때에 네가 네 힘으로 해결하지 않고 내가 이미 해결한, 이미 치른 그 십자가 피 값으로 너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용서를 얻게 되었고 공짜로 천국을 가게 되었다.”는 이 소식이 바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사도바울의 복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한테 속았다 하기 전에 우리가 스스로 매일같이 속고 있었습니다. 잘난 체 하고 말은 왜 그리 많은지, 하나님에게 잘 보이려고, 내 식대로 죄 값을 치러 보려고 한 것들, 다 부질없고 그것마저 죄인이 행세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예수님의 피로만 감사함을 남에게 증거 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