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터 만들기
2009년 9월 16일 수요일 오후 10:39:46
(어제 글을 작성 했지만 망설이다가 오늘 아침 심목사님의 댓글을 보고 올려야 겠다 싶어서 올립니다. "이근호요? 안 믿습니다. 저런 인간 따위는 언제까지 갈런지 또 압니까? 갑자기 치매나 노망이나? 등등의 사건이 성령님이 잔뜩 준비하고 있을수도" 라는 글을 올린 관리자 김대식입니다.)
심재성 목사님의 글을 읽고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제가 이근호 목사를 겨우 몇 년 가까이서 느껴왔던 점을 한번 말해 보고자 합니다.
이근호 목사가 참으로 불쌍하다는 점을 많이 느낍니다.
그의 강의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십자가 라는 빈터 만들기인데 그 십자가에 대한 반감으로 참석하는 자들이 늘 감춘채로 뭔가 남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늘 주장한다는 점입니다.
왜냐 그것이 교회에 써먹을 수 있는 가치로 남아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와 십자가는 양립할 수 없음을 바로 증명하듯이 그런 인물들이 십자가 때문에 배치 된다는 점입니다.
왜 제가 불쌍하다는 느낌이 드는고 하니
사실은 가장 큰 장점이자 곧 그것이 늘 공격받는 단점이 되고 말았는데
빈터를 만드는데 있어서 이근호 목사는 그 다음 공부나 내용에 늘 새로운 것을 끄집어 내지 못하면 안된다는 자기 스스로의 채찍이 늘 보입니다. 어떨때는 지나치게 강박증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남들은 생각지도 않는 듯이 보이는데 자신이, 복음을 듣는 대중들의 자세는 이러하다는 것을 아예 최고수준으로 잡아버리고서는 대중들은 지난 주에 했던 이야기는 듣기 싫어하니 새로운 것을 내어 놓아라 라는 것으로 본인 스스로가 간주해 버리고 그 대중의 요구에 맞게끔 혹독하게 공부를 한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미쳤지요,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지가 지 스스로 북치고 장구치고 하더라는 거죠) 이게 바로 장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다른 목사들에게는 절대로 비켜갈수 없는 타켓이 되는 겁니다. (어떤 이는 그것을 칭찬하면서 등쳐먹는 놈이 있는 반면에, 어떤 이는 욕을 하면서 시기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더욱더 부각 시키려는 시도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다른 목사들은 자꾸 가르쳐 들려고 합니다.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라는 식입니다. 그것도 다른데서 이미 써먹은 내용으로 우려먹으면서도 말입니다. 그것도 수십년 했던거 또 하고 했던거 또 하고 그런 것은 한번 훝어보면 다 알게 되는 것이니 구지 공부를 인도해 달라고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겁니다. 시간을 아껴야 할테니깐요.(물론 처음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을 배려해서 모두가 처음자리로 돌아간냥 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목사 본인은 때려죽어도 안 돌아 갈려는 성향을 아예 처음부터 선언하고 들어가니 그거 조져버려야지 가만히 두면 안되겠지요)
대표적인 놈들을 언급하고 싶으나 말썽이 날까봐 그냥 접고
비록 수련회는 아니였지만 어떤 누가 목사들 공부에 한번 맡아서 공부를 인도했다고 들은적 있습니다. 테잎도 들어 봤습니다.
학문적인 토의이니 괜찮지요 그런데 그런 공부 내용들을 들어보면 참 성의가 없다는 것을 많이 봅니다. (또 성의 있게 준비해도 그것이 전부 였습니다.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다는 거죠.)
학문이 될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복음은 아니겠지요.그래서 저는 참 재미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바로 오늘 공부한 내용을 다 지워버리고 내일 새로운 것을 내놓고자 빈터로 만들어 버리면 반드시 거기에 대한 시기심이 유발되더라는 점입니다.(아니 복음 자체가 이미 새로운 겁니다. 복음이 증거되면 반드시 빛과 대비된 어두움이 드러나기 마련이겠지요. 그리고 복음은 십자가 라는 빈터만 남기고 뒤로 빠져 버립니다. 복음 스스로가 피만 남기고 뒤로 빠져 버리니 십자가의 피만 흥건히 남겨지는 겁니다. 그 희생의 자리에 냅따 목사 새끼들이 왜 앉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을려고 환장했구나 쯧쯧쯧)
또 그것이 유발되기에 당연히 덥썩 무는 자들이 생기고 또 그것이 약점으로 공격하는데 있어서 객관성을 띄는 듯이 보이더라는 겁니다. 독재라고 공격하기에 너무 너무 좋은 겁니다. 누가 봐도 그러하니까 다수성은 이미 확보했으니까요.
예를들어 전형적인 사람이 바로 몇 년전에 있었던 실제사건인 박기삼씨가 수련회에 참석해서 똑같은 발언을 하고서 한번 휘젖고 간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근호 강사만 독재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제대로 발언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숨기고자 그것을 대변하는 방식으로 표출했다는 점에서 덥썩 걸려든 것입니다.
그 쪽 교회는 목사 없이 누구든지 복음을 증거하도록 하는 그런 분위기 였다는 것이 그 교회의 가장 큰 장점처럼 수 몇 년 동안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거의 독재수준인 것이 외부인으로 인해 밝혀졌습니다. (내부인들은 마치 여기 십자가마을 사람들이 이근호에게 중독된 것처럼 보이듯이 내부인들은 자체적인 정제 능력이 상실 되었겠지요, 그래서 외부인이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그 원인이 바로 이근호 목사에게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공격하기 좋은 빌미가 선뜻 눈에 보인 것이 강사 독재 라는 면이 보인 겁니다. 그거 따지러 수련회에 의도적으로 왔더군요.
그렇다면 공격을 할려면 자신은 전혀 독재성이 없는 인물을 내세워야 할 것입니다. 자기자신은 이미 들통이 난 입장이고 자기가 선택한 괜찮은 인물이 이광호 라고 생각했는지 강사로 추천하자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죠. 이광호 그 사람 전형적인 독재 정치꾼입니다. 그 사람이 그것을 의도적으로 감추고자 하는 것이 바로 박기삼씨가 그 동안 교회 이미지를 전혀 독재성이 배재된 이미지로 소문난 것처럼 똑같이 그런 교회 이미지로 먹혀드는 전형적인 인물이였습니다.
얼마나 재미있던지
감추이고자 했던 것이 오히려 더 돋보이도록 한 겁니다.
또 마찬가지로 이광호 씨가 자신의 주관적인 이미지가 안 비치이고자 이근호에 대한 평가 조차도 항상 유들유들하게 중립적으로 표현했지만 정작 자신을 건드리는 사건이 발생되니까 이근호를 조금이나마 변호할려는 그 좋은 이미지를 가감하게 버리고 독선적이고 주관적인 자라고 객관적인 평가를 했다고 자부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저는 배꼽 잡고 웃었습니다.
세상에 저런 xx꾼이 있나
자신의 말이 많은 영향력과 파장이 있다는 것에 늘 조심스럽고 무게감 있게 표현하는 자도 결국 저렇게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것은 여느 인간과 별 다를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조심하는 척을 하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요지를 말하면 이겁니다.
가장 독재적인 형태의 목사권위를 속으로는 버리지도 않았으면서 겉으로는 가장 객관적인 형태를 갖추는데 성공한 자들에게
누가 가장 타켓이 되는고 하니 완전 정반대로 하는 자가 걸려드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나요?
바리새인들의 의로움에는 반드시 창녀 세리 강도가 타켓으로써 걸려 들어야만 하는 겁니다.
무능자 이고 빈터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른 성인 남자에게는 아이들과 여자들이 그러하듯이 말이죠.
최근에 벌어진 일 또한 그러합니다.
빈터를 만드는 십자가가 늘 이근호 목사를 또 못살게 굴고자 목사 직 자체도 손 못대도록 빈자리로 만들어 놓으니까
능구렁이 같이 어슬렁 어슬렁 그 빈자리를 넙쭉 챙기는 놈이 생기는 겁니다.
참 신기하고도 놀랍던지.
자 이런 면들이 있기 때문에 강사로 나서고 싶어도 나서는 인간들이 없는 겁니다. 여전히 빈터로 남겨진 겁니다.아무리 봐도 빈터인데 주변에서 기웃 기웃 거리는 자들은 늘 독재로만 보입니다. 그런데 수련회 때에 우발적으로 그 빈터에 잠시 십자가만 외쳐지도록 이근호를 십자가마을 사람들이 잠시 앉도록 하여서 십자가를 외치도록 만들어 놓은 후에 (그 뒤인 후에 가 더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십자가가 또 어떻게 이근호를 밀쳐 버리고 또 다시 빈터로 만들어 버리는지를 십자가 마을 사람들은 그것까지 보게 되는 기회로써 아직까지는 이근호가 낫다고 여기게 됩니다. 아무래도 잉여성이 크게 보이니까요. (자 이렇게 되면 저들은 또 더더욱 오해 합니다. 더욱더 독재라고 볼 수 밖에 없고 또 더더욱 이근호 에게 세뇌 당했다고 말이죠.)
그것만 보이는게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그 반대의 상황도 같이 벌어집니다. 엉뚱한 놈들이 넙쭉 그 빈터인 십자가의 자리에 앉더라 말이죠. 그래서 수 많은 사건들이 이 십자가 라는 빈터를 보여주기 위해서 어떤 이는 진노의 그릇 어떤 이는 긍휼의 그릇으로써 고정됨이 없이 보여주었습니다. 또 앞으로도 보여줄 겁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이근호를 십자가 마을 사람들이 강사로 하는 이유인 겁니다. 결국 외부인들은 이렇게 봐야 합니다. 이근호가 문제가 아니라 십자가 마을 사람들이 독재자 라는 것을 말해야 하는 겁니다. 저 놈들은 이근호 마저도 여차 하면 짜를 놈들이구만 라고 말이죠. 맞습니다. 짤라야죠. 이근호가 뭔데 지뿔도 아닌 것이 빈터에 넙쭉 앉을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여기겠습니까?)
그럴 때 마다 다들 깜짝 짬짝 놀라게 되는 거죠. 누가 봐도 긍휼의 그릇이라고 여겼던 놈이 교체 당해서 진노의 그릇 이었음이 밝혀 지게 되고 누가 봐도 진노의 그릇 이라고 여겼던 자가 이상하게 긍휼을 보더라는 것을 말이죠.
또 이것 또한 고정화 되지 않고 계속 성령의 흐름에 의해서 늘 수시로 바뀌게 되니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치겠습니까?
오해 하기 딱 좋은 겁니다. 또 반드시 오해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십자가 라는 믹서기에 갈려지게 될 테니깐요. 십자가 마을 조차도 원래 없는 겁니다. 이 잉여성을 모른다면 십자가마을 있을 이유도 없지요. 십자가가 주체이지 십자가 마을이 주체가 되어 십자가를 객체로 삼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빈터 만들기 뿐인 겁니다. (반면에 바른 신학, 건전한 신학 따위는 십자가를 결국 대상으로 삼았다는 결과인 겁니다.)
십자가가 쳐 놓은 올무에 식겁 먹어봐야 아 이게 십자가 이구나 라고 비로소 이근호를 쳐다보는게 아니라. 이근호도 이 십자가에 당해서 저런 오해 받을 짖만 골라서 하게 되는 십자가에 의해 잡혀서 저런 것이 나올 수밖에 없었음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것도 아주 우연히 우발적인 것이지, 고정화 할 수 있는 필연성은 없는 겁니다. 우연히 이근호가 자꾸 강사가 된 것 뿐인데 자꾸 필연적으로 수련회 강사가 된 것처럼 오해를 하더구만요. 그렇다면 누가 나서서 하던가? 너무 너무 할 사람이 오죽 없으면 우연히 나오게 된 인물이 또 지겹도록 지겨운 이근호 라는 별 볼일 없는 자 라는 겁니다.)
저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이근호를 변호 한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말해줘도 말귀를 못 알아 먹는 놈들이 너무 많기에 설득은 이미 포기 했습니다.
십자가는 빈터입니다. 그 빈터에 십자가 마을이 이근호를 앉혀 버렸다면 십자가 마을은 저주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 빈터에서 십자가를 외쳐라고 기회를 주면 아무도 안 앉을려고 합니다.
앉자 마자 갈기 갈기 찢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투 하나 하나가 날카롭고 칼 같이 찢는 듯이 예민한 칼날처럼 쏘아 붙이는 듯이 표현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목사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요? 목사가 뭐 그리 대단한 감투라고 좋은 소리만 들을려고 하나요? 아예 욕 먹는 것은 기본 세끼가 되어야 겠지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워낙 신학으로 똘똘 포장을 하고 건전한 교회로 무장을 했으니 건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그 자체로 자신이 옳다 함을 여겨짐이 마땅하다고 주장 한다면 그 놈은 밟아버려야 합니다.
거꾸로 되어도 한 참 거꾸로 되었지요.
또 벗겨도 벗겨도 양파껍질처럼 본색이 드러나지 않으니 세상 사람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천부적인 사기꾼의 처세술만 가득할 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줘야 본색 드러나게 될까요?
간단합니다. 거꾸로 교인이 목사에게 십자가만 외치면 됩니다.
참 그리고 제가 이런 말투인 것은 지금 심목사님만을 겨냥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과거의 일과 현재에 벌어지는 일들과 또 앞으로도 이런 일들은 어차피 계속 벌어지는 사건이고 하게 될 질문들이기에 한번 종합적인 입장에서 제가 느낀 점을 글을 써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발 이근호를 넘어서는 자가 빨리 나타났으면 하는 겁니다. 제가 말하는 넘어선다는 것은 신학적인 뛰어남이나 목사로써의 자질성 등등이 이근호를 상대로 해서 뛰어난자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빈터인 십자가를 외침에 있어서 십자가가 그 강사 당사자 마저도 언제든지 날려 버릴수 있는, 강사가 외친 십자가가 도리어 그 강사 마저도 빈터로 만들어 버리는,
그 십자가의 살아 있음을 외치는 자가 겨우 딸랑 한 명이 뿐이면 안 된다는 취지에서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훨씬 이전에도 엉뚱하게도리어 타켓으로 삼아서 시비를 거는 것을 보면 하여튼 하이에나들은 냄새를 잘 맡는 것은 확실한 가 봅니다.
(저는 심 목사님이 박기삼씨처럼 뭔가를 감추고자 하는 취지는 분명히 아니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 놓고 이런 건방진 말들을 서슴없이 내 놓은 겁니다. 심목사님의 그런 취지는 이미 계속 있어왔던 바이기에 그것은 이미 다 아는 바이고, 다른 방향에서 말들을 전개한 겁니다.)
십자가가 창조해낸 유들유들한 젤리 같은 다윗처럼 목이 댕캉 날라간 강사 목사 없나요? 틈새 시장을 노려 봅시다. 왜 한 수 가르치겠다는 딱딱한 놈들인 자기 목만 지키는 정치 종교꾼만 나타나는지 원!
그런데 이것은 저의 욕심이 분명 맞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지금은 십자가 자체도 아예 외쳐지지도 않는 실정이니까요 (위의 저런 저의 행복한 고민은 십자가가 많이 외쳐지는 그 가운데서 어느 십자가가 진짜인지 진위를 가려야 할 판국으로 십자가가 여기 저기 널려 있는 입장에만 해당 되겠지만 지금은 교회도 교인도 아예 십자가는 관심조차도 없는 냅따 버린 입장이니 위에서 말한 것은 그저 헛소리일 뿐이지요, 돈이 최고이다는 것만 감추인채로 개혁교회이든 어떤교회이든 그저 돈 돈 돈 뿐이니까요 심지어 돈 때문에 십자가 외치는 놈들도 수두룩 봤으니까요)(마 6:20, 개역)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마 6:21, 개역)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 6:22, 개역)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마 6:23, 개역)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마 6:24, 개역)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5,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26, 개역)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7, 개역)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말씀? 정말로 말씀 그대로 장난이 아닌 현실이지 않나요?
(눅 18:8,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말씀만 남겨 지고 기웃 기웃 거리는 것들은 썩 뒤로 물러 나거라
제발 좀 말씀만 앞장 세워지고 교회도 목사도 신학도 퇴장 되어야 마땅함을 아는 자가 강사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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