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를 읽는다. 바울을 생각한다] 테드 W. 제닝스 저 박성훈 역 그린비(서울: 2014)
저자는 교회가 개인 구원에만 집중하는 것에 불만이다. 그 결과로 오늘날 교회가 더 이상 사회로부터 불필요한 단체로 전락할까봐 불안해한다. 사회는 온통 정의(正義)를 기대하고 있는데 교회가 제대로 부응하지 못해서 천덕구니로 내침을 당하는 형편에 대해서 교회가 스스로 반성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2000여년 교회가 이어오면서 성경에 대해서 뭔가 잘못 해석한 게 있지 않는가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전통적 해석에 있어 오류를 전통적 신학자가 아니라 철학자인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기뻐한다. 그 오류는 다름 아닌, 사도 바울의 사상이 ‘사회 정의’를 외치고 있다는 사실을 교회가 못보고 있었고 누락시키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사도 바울의 복음은 ‘정의(正義)’인데 이 ‘정의’를 그동안 교회는 개인이 구원받는데 필요한 용도로만 이해해 왔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교회는 현실 속에 넘쳐나는 불의에 대해서 끼어들 근거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데리다가 이해한 사도 바울 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의함에 대해서 진리값의 제공처 역할을 적극적으로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나 데리다의 의견을 따라 제대로 깊이를 더하면서 이해된 사도 바울 사상의 진수는 어떻게 정립될 수 있는가?
우선 인간들의 권리주장과 하나님의 정의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인간들의 권리는 하나님의 정의에서 바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법, 혹은 율법이 존재하는 영역에서 분석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예를 들면, “개인들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윤리적 명령 같은 것이다. 이런 법에 준해서 근대인들은 자신이 누릴 권리를 발휘하고자 한다. 즉 성경에 나오는 각종 법에 대해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려는 근거로 삼으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정의’인 양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나 데리다는 단호하게 이 점을 반대한다. 하나님의 정의는 인간의 자기 권리 요구와는 분리된 곳에 있다. 정의는 법(그리고 권리)과의 다소 대립적인 관계에 서게 되고, 법(그리고 권리)은 다시 법들/권리들과의 대립적인 관계에 서있다. 왜냐하면 법과 정의의 불일치는 보복적 정의에 따른 법의 (끝없는) 순환의 중단일 뿐만 아니라 또한 분배적 정의에 따른 법이라는 의미에 따라 정당하게 주어져야 할 것에 대한 고유한 계산의 중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계산 가능한 평등을 위한 분배도 것도 정의가 아니며, 책임 지움을 묻고 거기에 따라 배상을 요구하는 것도 정의가 아니며 보상적 되갚아주는 것도 정의가 아니며 오히려 남에 대해서 비-경제적 선물성을 보여주는 것이 곧 하나님의 정의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기대하는 정의란 정의에 대해 책임을 지거나 또는 정의를 계산하는 한 가지 중요한 방식은 분배와 관련된 것이다. 말하자면 각자에게 받을 것을 주고, 그에 의해 미덕과 해악에 상응하는 포상과 벌을 기록하는 결산 장부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 나쁜 아이였는지 그리고 착한 아이였는지를 조심스럽게 합계하여 선물이라는 범위 안에서 적절하게 호의를 분배하는 일종의 산타클로스와 같은 정의다.
그러나 데리다는 또한 이러한 방식을 넘어서는 정의를, 즉 계산을 넘어서는 정의를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이 세상에 주어진 법이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율법이라는 것도 이러한 계산의 일종으로 이해될 수 있음을 본다. 그래서 데리다는 율법이 곧 하나님의 정의라고 여겨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 정산하기를 넘어서는 정의를 사유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정의는 권리들과 동일한 것이 아닌데,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의 권리들을 초과하여 정초되는 것이며 분배적 정의도 아닐뿐더러 인간 주체로서의 타자에 대한 존중도 아니다. 그것은 각 사람에게 받아야 할 것이라는 보복적 또는 심지어 분배적 규칙에 따른 단순한 계산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해명한다. 그것은 단순하게 정의를 나타낼 뿐인가 아니면 반대로 마땅히 주어져야 할 것, 부채, 범죄, 또는 과오를 넘어서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의 이름으로 자기에게 피해를 입힌 쪽에 복수를 감하고, 그리고 그렇게 해서 당했던 쪽에서 신의 이름으로 앞세우며 되갚아주는 이 무한한 복수의 순환을 중지시키는 정의가 하나님의 정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데리다와 저자는 두 번째 사안도 언급하는데 그 두 번째 사안은 법과 권리의 관계이다. 이러한 구분은 필연적인 불안정성을 지닌다. 중간항 지점이 곧 법 자체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불안정성은 어떻게 생각하면 율법에 결함이 있다고 간주되어 법으로 정의 실현이 아예 관계없다고 단정 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정의 실현에 아예 법이 불필요하다고 여길 가능성이 있다고 오해할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안은 바로 하나님의 정의가 지상에 주어질 때는 ‘환대=환영’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정의는 어떤 면에서 단순히 법과 대칭적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묘한 위계에 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정의’가 법에 대해서 불법적이며, 위반적이고, 법 바깥에 있으며 즉 무법적인 법과 같이 법들 위의 법이며 그리고 법 바깥에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환대에 의한 하나님의 정의’도 법들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이 세상에서 구성적이다. 이로 인해 정의 속에 있어 환대는 이 세상에서 전복될 위험을 떠안게 된다. 요컨대 환대를 부인하거나 또는 위협하거나 혹은 타락하게 하거나 혹은 도착(倒錯)에 빠트릴 수 가능성 있는 법들을 필요로 한다. 이로서 이러한 타락은 지워질 수 없고 필연적이기도 하다.
정의는 법이 없이는 예시(例示)화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데리다나 저자가 제시한 아이디어는 정의를 현재가 아니고 과거도 아니고 미래에서부터 벌써 현재를 향하여 오고 있는 것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이는 곧 완성된 약속이 ‘저 위’에 있는 무시간적 초월의 차원도 아니라 법에 관련된 정의의 초과가 현재에 관련된 미래의 초과로 사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벌써 완료가 되면 메시아를 거론하는 ‘종교 전체주의’의 등장을 용인하는 셈이 된다. 이는 위험한 일이다. 메시아를 빌미로 초월적 권리를 행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정의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율법에 가려진 하나님의 정의를 끄집어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의 사회적 현실 내에서 효과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끄집어냄’을 위해 모세법(율법)과 로마법의 한계를 지적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메시아가 그 두 개의 법 바탕에 의해서 단죄를 받았기 때문이다. 로마법은 오늘날 국가법과 관련된 다. 따라서 이 국가에 변화를 촉구하면서 법 자체에 도전하는 정치적 방식은 결과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다.
곧 정치적 총파업과 프롤레타리아총파업이다. 국가를 다시 정립하겠다는 것은 ‘정치적 총파업’이라면 국가 자체의 파괴를 추구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이다. 현대국가에는 이 파업 사이에 양자택일이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의 정의’를 배경으로 하는 정의구현을 추구하는 데리다는 이러한 대립 혹은 양자택일에 대해서 ‘해체’에 나선다. 이들 파업 사이에 결코 순수한 대립은 없다는 것이다. ‘정치적 파업’은 법 정초에 대한 폭력이고, 프롤레타리아 파업은 ‘법 보존’에 대한 폭력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정의는 이 두 폭력 사이의 구분 이상인 것이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정의를 보이는 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데리다와 저자는 ‘메시아적 희생’의 확산을 강조한다. 살아 있는 우리를 위해 살아 있는 다른 사람의 희생을 용인하는 것과 스스로 희생을 감수하는 자와의 차이를 눈여겨봐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은 사람들이 단순히 실수해서 정의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인간에게 있어 율법이나 법은 적어도 정의를 생산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 근거는 바로 메시아는 인간들의 법에 대한 실책이 아니라 법과 정의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성으로 인하여 통해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던 것이다.
즉 예수의 유죄 판결은 (율)법의 관점에서 볼 때 잘못된 것이 아니며 그의 처형 또한 합법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율)법의 관점에서 유죄 판결과 처형을 옳은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된다. (율)법은 합법적이지만 불의하며, 정의와 충돌하거나 또는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위치에 선다. 그리고 이것이 합법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된 그 인물이 신의 정의, 신의 메시아였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편지, 특히 데리다는 로마서 해석은 데리다가 도착(倒錯)성이라는 방식으로 실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읽기에 있어 문제를 일으키거나 또는 난점이 그리고 심지어 배신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는 것이다.
메시아의 죽음을 통해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법에 대해서 만일 한 사람이나 국가가 정의(혹은 신의 뜻)를 대표한다고 주장한다면,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은 신체적 위해를 가하지 않더라도 전체 사람들에게 돌아갈 일반적 복지(복리)에 위협이 되기에 사전에 이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법을 조치는 정당화된다.
물론 저자(제닝스)는 마냥 데리다의 논조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율)법이 정의를 생산할 능력이 없다는 바울의 인식은 신의 메시아가 합법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율)법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데리다의 논증은 메시아의 도래에 대해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법과 하나님의 정의가 합치되지 않는 결과에 대해서 집중해서 이해하는 반면에 저자가 이해하는 사도 바울은 이것을 통해서 메시아의 모순적 희생에 집중한다.
메시아의 약함(=신의 약함)은 법의 폭력을 노출시키고 이에 따라 법보다 더 강력하며 그리고 실제로 진정하게 법(말하자면 또한 국가, 제국 등)을 이기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이 땅에 분명히 법을 허용하고 정의 또한 법이라는 형태로 표명되어 실존하게 한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그래야 세상 권력에 대해서 가만두지 않고 진노를 퍼부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즉 “즉 복음과 상관없는 짓은 하지 말라. 세상 권력이 가만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정의의 힘을 지금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메시아적 정의는 사도 바울의 복음 속에서 메시아적 희생과 환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서로를 환영(welcoming)하십시오”라는 바울의 권고가 바로 그것이다. 죄의 부채를 넘어서는 용서를 베풀고 선물과 환영의 공유함이다. 서로에게 친절하고 부드러운 마음, 은혜로움, 선의를 가짐, 또는 심지어 환대를 보이는 것이다.
새로운 정의의 유발은 메시아의 죽음으로부터다. 이런 의미에서 이 죽음은 이제 메시아적 사건에 포함되는 자들을 가지고 칭의를 새삼스럽게 생산하는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불의한 자를 그 어떤 교리적 전제 없이 수용하고 받아들여서 그들마저 환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의 실현’이라고 데리다와 저자는 외친다.
신의 진노는 불의와 불경건을 향하는 것이다. 하지만 메시아적 사건은 반대로 정의와 충실성을 이미 생산하고 있을 것이고 따라서 진노로부터 구원한다. 모든 선행적 조건 없이 이를 실행한다. 즉 불의와 불경건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인류에게는 율법의 장악력을 파괴하는 심지어 불의와 불경건에 대한 보복이라는 신적인 법까지도 파괴하는 사건을 통해 새로운 시작이 주어진다.
이는 곧 자기 의를 포기하는 희생으로 실시되어야 한다. 만일 정의라는 것이 우리가 타자에 대해 응답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 사람 또는 그 사람에 대해 정의롭기를 바라는 즉시 우리는 필연적으로 불의하게 되는 듯 보인다.
내가 특정한 타자와의 관계로, 응시, 시선 요구, 사랑의 명령, 또는 타자의 요청과 관계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오직 나의 윤리를 희생시킴으로써, 즉 무엇이건 동일한 방식으로 동일한 순간에 또한 모든 타자들에게 응답하도록 나 자신을 강제하는 것을 희생시킴으로써만이 그 타자에게 응답할 수 있다.
즉 타인 앞에서 나의 의, 나의 구원받음, 내가 위치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에서 내가 능동적으로 제 3자에 대해 불의하기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나는 정의롭기를 추구한다. 하지만 바로 이런 방식으로 정의롭게 되기를 추구함으로써 나는 작동 중인 또 다른 법을 정의롭게 되기를 추구하는 행위에 나의 전심을 다해 정의롭게 되기를 욕망하는 나 자신의 이기성에 엄연한 불의를 끼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데리다나 저자가 발견은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갈등이다. 즉 나의 의로움이 타인에게 불의함으로 비치게 되는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맹세한 믿음을 배신하고 따라서 어쩔 수 없이 믿음을 믿음 없음으로 바꾸는 것에 주저하는 되는 바로 이런 주저함이 나의 연약한 육신됨이라는 것이다. 이 육신적 약함에서 사도 바울은 과감하게 벗어나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자신의 구원마저 포기한 것이다.
데리다는 바로 내가 정의롭기에 불의하며 그리고 따라서 정의롭게 되기 위해 용서와 유사한 어떤 것이 도리어 나에게 위증과 배신을 낳는다고 보고 이 장악력을 부수는 불가능한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곧 이 불의한 세상에 대해서 그 어떤 심판이나 정죄를 행사해서는 아니 된다 는 것이다. 테러리스트나 동성애자나 그 어떤 불의나 경건치 않는 자에 대해서도 그들을 심판하는 자세가 아니라 그들 앞에서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진리성마저 포기하고 환대하는 것이 곧 메시아가 보여준 ‘하나님의 정의’의 실시라는 것이다.
그동안 교회는 동성애나 테러리스트나 국가의 정체성을 흔드는 파업하는 자나 이민자나 난민자에 대해서 너무 가혹한 정죄를 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전혀 이 현실에 끼어들만한 진리값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교회가 스스로 ‘하나님의 정의’를 막아서는 짓을 해온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그동안 정통 교회 교리에 대해서 해체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해체라는 모순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바른 사도 바울의 사상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고 주장한다.
저자나 데리다는 그동안 현실 참여적인 ‘사회정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득 분배라는 경제적 원칙에 입각한 정의관이기 때문이다. 그런 정의관은 성경에나 메시아 죽음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자기 권리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불필요하고 성경이 불필요한 그런 식의 정의관은 결코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정치적 정의는 ‘법적 조치’라는 한계를 못 벗어나 세상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저자나 데리다는 ‘은혜/용서’라는 불가능한 가능성(그냥 ‘불가능하다’가 아니라 이미 ‘불가능한 것’으로 변했다)이 발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정도 되려면 그냥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에 질서에 속하지 않는 ‘유령’이라고 불러야 합당할 것이다.(p 94)
보복이나 복수(復讐)를 넘어서 환영(welcoming)과 환대(hospitality)를 보이는 주인이어야 하되, 결코 주인으로 우위에 서지 않는다. 모세법이 한계를 보이므로 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남자나 여자 종이나 자유자의 차이는 극복되었지만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 노출되어있다. 그런데 이 심판과 진노를 극복한 ‘불가능한 것’ 용서와 은혜로서 누구라도 그들의 불의를 묻지 않고 받아들이는 희생을 나타내는 것이 곧 ‘하나님의 정의’라는 것이다. 이들 대상은 이제 ‘아담적 인류’가 아니라 ‘메시아적 인류’이기 때문이다. (p 262)
(평)
데리다는 용서에 대해서 이런 단서를 붙인다. “용서, 그런 게 있다면…” p 327 즉 용서가 없을 가능성을 고려하자는 것이다. 이게 잘못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외쳐야 맞다. “용서는 없다!” 데리다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요? 그는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천국도 없다. 신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어두운 세상 속에서 악마의 권세에 눌러 눈이 감긴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 26:17-18)
따라서 “없기에 우리가 짐작하고 예상하고 만들자”라는 것이다. 이게 바로 어두움에 속했다는 증거다. 즉 그 어떤 보장이나 근거도 없이 “혹시 신이 있다면, 혹시 용서가 있다면, 혹시 천국이 있다면 …”는 식으로 사상을 시작하고 끌어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형편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자꾸만 놓치게 된다. 단지 어떤 미흡함으로 인해 기대와 희망과 의미를 본능적으로 내뿜을 뿐이다. 신학도 예외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 속에 인간들이 보여주는 종교성이다.
아담에 속한 모든 이들이 진정으로 저주받아 죽는다. 인간은 그 이유에 대해서 아는 바 없다. 그냥 사단의 외침을 대행하면서 죽어갈 뿐이다. 남 걱정도 오지랖이다. 인간에 대한 저주는 언약에 의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취지를 보여주기 위해 당연히 벌어져야 하는 사태다. 그래야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드러내는 그물망을 구성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