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신학이란 책은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과 칼빈과 알미니우스의 논쟁만큼이나 유명하고 어려운 인간의 계시수용능력에 대한 논쟁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의 역자인 김동건 교수가 지은 <현대신학의 흐름>을 참고삼아 책의 내용을 정리하고 평가한 다음 마지막으로 바르트가 자유주의자가 아님을 주장해보고자 한다.
1.내용
많은 논쟁들이 있지만 중요도에 따라 3개의 논쟁에 대해서 각자의 신학적 입장을 살펴보려 한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대한 논쟁이다.
브루너는 하나님의 형상을 형식적(formal)인 것과 물질적(material)인 것으로 나누었다. 이간에게 물질적인 형상은 사라졌고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하지만 형식적인 형상은 죄인이든 아니든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된다.
브루너는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도 이 형식적 형상 때문이며, 죄를 짓더라도 이 형식적 형상은 파괴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바르트도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차이가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르트는 인간에게 형식적 형상이라는 것이 남아 있어서 스스로 주체적이고 책임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여기서 바르트가 말하는 주체적이고 책임적인 측면은 당연히 구원과 연관해서 하는 말이다. 바르트는 인간이 스스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다른 피조물과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해도 실제로 여타의 피조물과 차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죽기 직전에 수영을 잘하는 사람에게 구해졌다. 이때 물에서 건져진 사람이 구해진 이유는 자신이 납덩어리가 아니고 사람이었기 때문이며, 그것이 ‘구원받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부당한 주장이 아니겠는가?” (p.91)
두 번째는 예수 외에 다른 ‘계시’가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다.
브루너는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모든 피조물에서 창조자의 영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느낄 수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기 때문에, 이 세상의 창조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자기 현현이기도 하다. 따라서 피조물 속에서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도 인간은 양심이라고 부르는 책임성을 가지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따라서 브루너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계시와 일반계시라는 두 종류의 계시를 주장한다. 하지만 브루너는 일반계시로는 구원에 이를 만큼 하나님을 충분히 알지는 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pp.32-33)
이에 대해 바르트는 만약 피조물을 통한 계시도 하나님의 계시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어떻게 이 계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지 반문한다. 어떤 계시는 희미해서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알게 하고, 어떤 계시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게 하는, 곧 계시를 이렇게 단계적으로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성령을 통하지 않는 자연을 통해 인식한 신이 성서가 증언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근거가 어디 있는지 반문하다.(pp.92-93)
세 번째는 바로 ‘접촉점’(point of contact)논쟁이다.
접촉점 논쟁은 신학적으로 상당히 미묘한 문제를 여러 개 포함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첫 번째 주제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브루너는 인간이 돌이나 나무와 달리 하나님의 말씀이나 성령을 받을 수 있다면, 인간에게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접촉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브루너에게 이 접촉점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의미한다. 브루너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식적 형상은 손상되지 않고 남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물질적인 접촉점은 없지만 형식적으로 볼 때 이것은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말씀의 수용능력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p.38) 이제 브루너가 주장하는 형식적 형상의 의미가 분명해졌다. 브루너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인간이 상실하지 않고 가지고 있던 형식적 형상이 말씀과의 ‘접촉점’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브루너는 인간은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능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브루너가 주장한 ‘수용능력’을 잘 이해해야 한다. 브루너가 말하는 수용능력은 인간이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이신론적(理神論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브루너가 말하는 인간의 수용능력은 인간이 말씀을 받아들이거나 수용하는 주체적인 능력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할 수 있다는 형식적인 가능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브루너는 접촉점에 대한 주장이 종교개혁가들의 ‘오직 은혜’의 교리와 상충되지 않는다고 보았다.(pp.37-38)
바르트는 브루너의 주장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한다.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은혜 이전에 인간이 어떤 형태로건 계시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바르트는 브루너의 물질적 형상과 형식적 형상의 구별과 적용에 문제를 제기한다. “인간이 물질적 형상을 잃었기에 구원의 능력은 전혀 없지만, 계시를 수용할 형식적 능력은 가진다.”는 주장을 문제 삼는다. 결국 브루너가 형식적 형상을 수용능력으로 봄으로써 인간이 ‘구원의 접촉점’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발전하게 된 것을 지적한다.(pp.99-106) 바르트의 입장은 인간에게 계시를 받아들일 수용능력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계시와 인간 사이의 만남, 즉 접촉점은 없어도 되는가? 이 점에 대해 바르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성령은 어떤 접촉점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필요한 것을 스스로 창조하신다. 단지 우리가 과거를 되돌아볼 때 그가 인간과 ‘접촉한’ 사실을 회상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데, 이때 회상은 사실상 기적에 대한 회상이다.”(p.133) 즉, 브루너는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도 하나님의 형식적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고, 이 형상은 말씀이 들려올 수 있는 통로로서 수용능력을 의미한다. 반면, 바르트는 인간은 계시를 수용할 어떤 능력도 가지지 못하며, 말씀의 수용도 오직 은혜로 인해 가능하다고 보았다.
2.평가
브루너는 어느 곳에서도, 단 한 번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외에 구원의 가능성을 언급한 적이 없다. 이런 관점에서 브루너가 자연신학을 주장했다는 해석은 전혀 근거가 없는 오해이다. 브루너 자신도 자연신학이라는 용어가 오해를 불러옴으로 일반계시라는 단어로 바꾸기를 희망했다. 따라서 브루너와 바르트의 논쟁을 자연신학 논쟁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고, 계시에 대한 수용성 여부를 토론한 계시논쟁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브루너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이 은혜보다 먼저라고 생각한다. 브루너의 말을 통해 바르트와의 차이가 분명해질 것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들려질 수 있는 가능성이란 인간의 책임성(responsibility)이 전제 조건이 된다. 하나님께서 말을 건네실 수 있는 사람만이 책임성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무엇인가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결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사람만이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리고 책임성을 가진 인간은 죄를 지을 때 그것을 어느 정도 알 수도 있다. 인간이 스스로의 죄를 안다는 것은 거룩한 은혜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전제 조건이 된다.” (pp.37-38)
위 인용에서 드러나듯이 브루너는 은혜의 말씀을 듣고 인식하기 위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능력이 ‘전제조건’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은혜의 말씀이 먼저가 아니고 인간의 죄에 대한 인식이 먼저이다. 인간은 스스로 책임성을 가지고 행동하고, 이 행동의 결과가 죄로 나타나면 은혜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인간의 책임성과 죄에 대한 각성을 은혜의 전제조건으로 본다는 것은 율법이 먼저라는 신학적 인식을 의미한다. 바르트도 다른 부분에서는 브루너와의 차이를 상당부분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은혜의 우선성에 대해서는 어떤 양보도 할 수가 없다. 즉, 브루너와 바르트의 진정한 차이는 ‘은혜의 우선성’ 여부에 대한 차이에서 비롯된다. 바르트의 말을 보자.
"...브루너는 특별한 ‘보존의 은혜’를 주장한다. ... 우리는 브루너의 주장을 이해할 수도 있다. ... 창조란 것은 참 하나님의 진정 자유롭게,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며 행위인 동시에 지속하는 돌보심이다. 모두 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브루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보다 앞서는 특별한(아니 오히려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계시를 언급한다. 만일 이 생각만 제외한다면 우리는 브루너와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다..." (pp.94-95)
바르트에게는 어떠한 것도 그리스도의 은혜보다 우선될 수가 없다. 인간의 수용능력이든, 파괴되지않고 남아 있는 형식적 형상이든, 일반계시의 이름이든,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은혜보다 앞서지는 못한다. 바르트는 전통적으로 인식되어 온 율법이 먼저이고, 이 율법을 준행하지 못한 인간에게 복음과 은혜가 주어지는 도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물론 브루너도 오직 은혜를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계시를 강조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의 우선성이 분명하지 않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하므로 다시 한 번 브루너의 말을 보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알게 된다고 말함으로써 이와 같은 변증법을 말살시키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볼 수도 있다. 자신의 죄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은혜를 깨달을 수 있다.”(p.38)
위의 인용을 통해 둘 사이의 차이는 다시 확인된다. 브루너는 먼저 죄를 인식해야 은혜를 깨달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브루너도 오직 은혜의 교리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브루너는 죄에 대한 인식, 즉 율법을 은혜에 우선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바르트는 먼저 은혜가 와야 우리가 죄를 알게 된다고 믿는다. 즉 복음이 율법에 앞선다고 본 것이다. 바르트에게는 율법-은혜의 도식이 정반대의 구조를 가지고 은혜-율법의 순서로 나타난다.
3. 자유주의를 극복한 바르트
바르트신학의 특징중에서 계시의 주체성과 일방성이 자유주의를 극복하게 한다.
바르트의 신론의 핵심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식되어지는 하나의 객체(an object)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자유주의의 역사비평학을 공격하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어떠한 존재의 유비도 없는 하나님은 인간의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인간의 어떠한 능력으로도 신에게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의 지적인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경험의 대상도 될 수가 없다. 하나님은 결코 객체로 전환될 수 없는 주체(subject)이다. 그는 이 세상의 많은 객체들 중에서 하나가 아니다. 그는 그 자신이 스스로 말함으로써만 우리에게 알려지는 ‘주체’이다.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다른 두 평행선으로 마주하고 있으며 이 간격을 넘어설 수 있는 자는 주체로서의 하나님이다.
두 번째로는 계시의 일방성이다.
바르트는 자유주의의 공로와 업적을 타이타닉의 침몰에 빗대어서 거인주의(titanism)라고 조롱한다. 신은 경건주의의 기도나 자유주의의 이성으로도 알 수 없고 오직 스스로를 알려주심으로만 알 수 있는 분이기에 우리는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고들 한다.
결론적으로 바르트는 200년간(1700-1900) 기독교 세계를 대변하던 자유주의의 큰 파도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변호한 20세기의 교부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참고로 바르트 신학을 사람을 위기에 몰아넣기에 ‘위기의 신학’, 종교개혁가의 정통신학을 계승했다고 ‘신정통주의 신학’, 그리고 신의 존재를 역설적으로 변호했기에 ‘변증법적 신학’이라고도 불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