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강-신 32장 2–6절(모세의 증거 노래)1801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2장 2 – 6절입니다. 구약성경 313페이지입니다.
“내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내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의 가는 비요 채소 위의 단비 로다,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우리 하나님께 위엄을 돌릴지어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오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모세가 신명기 31장 30절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 이 노래의 말씀을 끝까지 읽어 들리니라” 라고 했어요. 노래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쉽게 말해 찬양이죠. 찬양이라 하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일이 최종 마무리 되었을 때 더 이상 진척 시킬 일이 없을 때 그 때 노래가 나옵니다.
그러면 우리들 역사 속에, 이스라엘 역사 속이나, 인간 역사 속에 군데 군데 찬양이 나오는 건 뭐냐? 그것은 일이 마무리 안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하늘에서는 마무리 지어졌어요. 보통 찬양은 위에서부터 오거든요. 오늘 본문에도 보면 ‘위에서 내리는 비’라고 해서 항상 위와 아래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누가 복음 2장에서 목자가 천사의 찬양을 듣습니다. 새삼스럽게 인간들에게 손대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결론 지어 졌다는 겁니다. 결론 났다는 겁니다. 찬양을 한다는 것은 최종적인 하나님의 뜻은 이미 최종적으로 마무리 지어졌다는 겁니다.
그것이 이제 지상을 향하여 펼쳐지는 거죠. 부채를 접으면 부채를 접게 되면 접어도 어차피 부채예요. 그런데 부채를 사용할 때는 펼쳐지잖아요. 한국식 옛날 부채는 붙여진 것을 펼쳐서 부채질 할 때 이게 접어 있다고 부채 아닌 게 아니듯이,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접어 있지만 시간이 되면서 겹쳐진 것이 서서히 풀리는 겁니다.
겹쳐진 주름이 풀리면서 풀릴 때 마다 숨겨져 있던 이미 완료된 상황들이 세상이라는 이름으로 전개가 되요. 요한 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일곱 인을 뗄 때마다 위에서부터 단추 하나씩 뗄 때마다 숨겨진 확정된 사실이 현실로 구체화 되요.
또 하나 탁 뗄 때마다 단추하나 뗄 때마다 또 나오고. 모든 단추를 다 뗄 때, 세상은 불바다 된다는 말은 첫 단추를 뗄 때에 이미 일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한 미련 버리라고 심판이 나오는 거예요. 일곱 단추 특징이 뭐냐, 전부다 세상 작살내는 겁니다. 인간들이 맘 두고 있고, 인간들이 맘 쓰고 있고, 인간의 일이 주된 관심사잖아요.
인간들이 왜 바쁩니까? 주님 섬기려고 바쁩니까? 내가 참 웃습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 섬기려고 바쁜 거예요? 세상에서 자기 꺼 한 몫 떼겠다고 바쁜 거잖아요. 다 가지는 건 욕심이니까. 자기 숨통 트일 만큼만 영역 잡고자 바쁘단 말이죠. 근데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모든 걸 했는데 오늘 밤 너의 영혼 데려가면, 오늘 밤 말고, 2시 26분 54초에 너의 영혼 데려가면 그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는 겁니다.
자식 키우는 거나, 부모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자기가 죽고 싶어서 죽는 게 아니고 전부다 발걸음이라든지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우연이 아니고 필연입니다. 그 필연에 저장고, 그 세계가 확정되어 있음을 약간 알려줄 때 이게 찬양으로 노래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노래가 최종적이거든요. 그 노래 중에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거기에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노래를 해요. 노래하는데 그 노래 내용이 쭈욱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이시니~” 그러니까 홍해를 건너왔다고 해서 그것만 구원이 아니라 앞으로 줄곧 구원이시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홍해 갈라진 것은 그거는 하나의 작은 예에 불과하고 지금 우리와 누구와 동행하느냐 이 말이죠.
누구와 동행하느냐 하면 누가 덤벼도 칠 수밖에 없는 분이 우리와 동행하는데 그 분이 바로 “여호와는 나의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의 이름이죠. 지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약속을 실천에 옮기는 전담 담당자, 그분이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무 추상적이잖아요. 그런데 주의 이름은 너무 구체적이에요. 주의 이름으로 벌려 놓은 것이 이스라엘이었고 신약에서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를 통해서 이미 십자가에 다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네가 이미 의롭다는 그 범주 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통보해 주는 이것도 주님의 공로입니다.
그런데 이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그 주의 이름이 용사라고 되어 있어요. 용사라는 것은 싸우는 거예요. 싸우는데 전쟁은 막 끝났다는 거예요. 이제 전쟁의 전리품만 챙기면 되는 그런 입장에 있고 패배한 자는 작살나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이런 계획에 대해서 누가 미리 알아차렸느냐 하면 악마가 알아차렸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2장에 보면 아주 집요하게 예수님의 출생을 저지하려고 그렇게 애를 씁니다. 마태복음 2장에 헤롯왕 때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출생했던 그 이야기, 여기에 대해서 이미 그 출생 자체를 거부하려고 하다가 실패로 끝나니까 그걸 알리지 말라고 또 동방박사에게까지 달려드네요. 동방박사에게 천사가 하는 말이 “오던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마라.”고 했어요.
이것은 마치 여로보암 시대에 하나님의 사자가 유다에 와서 요시아왕이 장차 유다 여로보암왕의 제사를 제단을 완전히 끝낼 것이라는 내용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자에게 “너는 왔던 길로 도로 돌아가지 마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 선지자 죽었어요. 말 안 들어 가지고. 그래서 예수님이 출생했으니까 이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집요하게 베들레헴 2살 아이들 다 죽입니다. 애먼 아이들만 죽었지요.
그리고 누가복음 4장 2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예수님이 설교하니까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듣고 분이 가득하여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설교 자체가 그들에게 분노하게 할 만한 일을 한 거예요.
그들은 뭐냐 하면 앞으로 열심히 하면 잘될 거라는 미완료를 이야기하는 반면에 예수님은 본인의 의사에 의해서 그 자체로 완료가 되어 버린다고 이야기 하니까 그동안 그들이 밑천들인 게 다 소용이 없잖아요. 교회 가서 복음 이야기 하면 목사만 분노하는 게 아닙니다. 한두 번 경험한 게 아니에요. 뭣도 모르는 교인들, 초짜들은 좋다하지만, 그 교회 장로부터 다 분노합니다. 그 근처에 아파트 단지 공사장이 없어서 안 밀리는 거지, 아파트 건설 공사장 있으면, ‘들어가지 마시오.’라고 써있는 데 있잖아요, 거기에서 밀어 버릴 수가 있어요. 그 정도로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누가 복음에 2장에 보면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아기 예수를 안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군요” 완료 되었다는 거예요. 더 이상 뭐 혼동 일어날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안 되니까 주께서 아기예수 보내 주셔가지고 안되니까 마무리 짓는다는 이 소식을 시므온이가 알고, 아기예수 안고 하는 말이 “이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군요”
시므온이는 종을 마음이 평안하도록 놓아 주셨다고 하는데 글쎄 우리교회 교인들은 지금 마음이 평안한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시므온이는 평안한 거예요. 정말 최종적인 것에 도착 한 겁니다. 그래서 노래라는 것이 뭐냐 하면 항상 승자가 부르는 여유있는 찬가에 들어가는 거예요. 이미 도착지점에 먼저 선착한 사람들의 유유자적함. 그런 사람들이 노래라는 형식으로 찬양으로써 예언을 이어가는 겁니다. 하늘나라는 완성이 되었는데 세상은 미완성 이니까 예언이 되는 거죠.
이것을 신명기 32장에서 모세가 노래 할 때는 그냥 자기가 기분 좋아서 한 게 아니고 예언입니다. 이 노래의 특징이 뭐냐 하면 대 서사 구조예요. 큰 이야기 구조. 마치 이 세상이 거대한 드럼세탁기 안에 들어간 것 같은 그런 구조. 하나의 세탁기 안에 다 집어넣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대로 돌려 버리죠. 요나의 물고기 배속처럼, 바깥이 중요한 게 아니고 자기가 있는 곳이 중요해요. 자기가 있는 곳이 곧 성전입니다. 그런 식으로 서사구조가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뭐가 되느냐 하면 전쟁에서 승리한자의 노래기 때문에 전쟁의 어떤 요소들이 끼어들었고 어떤 것이 추려지겠느냐, 잘라질 것은 잘라내고 남아 있는 승리감 가지고 노래를 이렇게 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노래를 신명기 32장에서 보게 되면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왜냐하면 과정들이 다 여기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제 이 과정들은 그 뒤에 이스라엘이 세월이 지나고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서 속속들이 그 결론과 결론 사이에 집어 들어 갈 거예요. 김장할 때 배추와 배추 사이에 속 들어가듯이, 그 고춧가루 버무린 거요. 이제는 이 승리, 승리와 승리 사이에.
예를 들어서 4절에 봅시다. “그는 반석이시니 공덕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시며” 이미 정답들이 나와 있는데 이 정답이 이 세상의 어떠한 치열한 전쟁을 통해서 이런 정답에 도달했는지는 계속 이 원칙에 준해서 이어져나갈 겁니다.
이 대서사 구조가 그럴 때 찬양 된다는 것을 알고 계시고 아주 알기 쉽게 이야기 하기 위해서 제가 예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하나의 노래에 어떤 내용이 있느냐, 이미 승자의 노래예요. 모든 노래는. ~ 건너 마을에 최진사 댁에 딸이 셋 있는데 그 중에서도 셋째 따님이 제일 예쁘다던데 아따 그 양반 호랑이라고소문이 나서 먹새도 얼굴한번 밤새도 얼굴한번 못 봤다나요 그렇다면 내가 최진사 만나 뵙고 넙죽 절하고 아랫마을 사는 칠복이놈이라고 말씀 드리고 나서 염체 없지만 셋째 따님을 사랑하오니 사윗감 없으시면 이 몸이 어떠냐고 졸라봐야지~
하고 용기를 낸다고 쭉~나옵니다. 이 노래가 ‘최진사댁 셋째 딸’이에요. 노래 가사예요. 승자입니다. 승자인데 최진사가 문을 열기 전에 볼기만 맞았다고 이야기 했는데 그 다음에 자기는 실패했다고 생각했는데 웃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고개 들어보니 최진사 양반 보이지 않고 구경꾼만 모였다고 나와요.
~아차 이제는 틀렸구나하고 일어서려니까 셋째 딸 사뿐사뿐 내게로 걸어와서 절을 하네요 얼씨구나 좋다 지화자 좋을시고 땡이로구라 천하에 호랑이 최진사 사위되고 예쁜 색시 얻으니 먹새란 놈도 밤새란 놈도 나를 보면은 일곱 개 복중에서 한 개 가 맞았다고 놀려대겠지~
하나님의 이름이 이름답게 성취가 된 거예요. 승자의 입장에서 노래를 부른 거예요. 우리가 찬양을 부른다는 것은 내가 내 인생에 대해서 해줄게 보탤게 전혀 남아 있지 않아요. 행함이. 같이 누리는 겁니다. 하늘의 천사와 더불어서. 확 다가오지 않습니까? 하나 더 해보겠습니다.
~ 우리 동네 담뱃가게에는 아가씨가 예쁘다네 짧은 머리 곱게 빗은 것이 정말 예쁘다네 온 동네 청년들이 너도나도 기웃기웃기웃 그러나 그 아가씨는 새침데기
앞집의 꼴뚜기 녀석은 딱지를 맞았다네 만화가게 용팔이 그 녀석도 딱지를 맞았다네 그렇다면 동네에서 오직 하나 나만 남았는데 아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담배 하나 사러가서 가지고 간 장미 한 송이를 살짝 건네어주고 그 아가씨가 놀랄 적에 눈싸움 한판을 벌인다 아라라라라라라라 라라라 라라라~
송창식이 불렀던 ‘담뱃가게 아가씨’ 노래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지난 과거의 추억들을 쭈욱 이야기 하는 거예요.
~ 하루 종일 가슴 설레며 퇴근시간 기다렸지 오랜만에 말끔히 차려입고 그 아가씨 기다렸지 점잖게 다가서서 미소 띠며 인사를 했지 그러나 그 아가씨는 콧방귀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나면 대장부가 아니지 그 아가씨 발걸음 소리 맞춰 뒤따라 걸어간다 틀려서는 안 되지 번호 붙여 하나 둘 셋 오 위대한 손 나의 끈기
바로 그때 이것 참 야단났네 골목길 어귀에서 아랫동네 불량배들에게 그 아가씨 포위됐네 옳다구나 이때다 백마의 기사가 나가신다 아자자자자자자 자자자 자자자자자자~
하면서 얻어 맞았는데 하늘이 ‘노랗다’인데 ‘뇌랗다’ 총각이 자기 마음대로 지어내서 ‘뇌랗다’고 한 거죠. 그 다음에 아가씨가 자기를 위해서 희생한 거 보고 웃어준다 이 말이죠. ‘아~나는 지금 담배 사러 간다’ 하면서 끝납니다. 담배 많이 사서 폐암 걸려라~
이런 노래 가사가 느긋한 자기의 승전보를 노래에 담지요. 그렇다면 신약에 나오는 사실은 모든 신약 성경은 하나님의 찬양의 내용입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 가죠. 그럴 때 천사가 날개가 여섯 개 있는데 날개 여섯 개가 다 불필요 한 게 아니에요.
두 개는 감히 발을 드러낼 수 없어서 발을 가리고, 두 개는 몸체를 가리고, 몸체를 가렸으니까 두 개 남잖아요. 두 개는 펄럭이면서 자기의 속에 있는 “하나님은 찬양 받기에 합당 하니이다” 라는 표시를 두 날개를 펄럭이면서 하는 거예요.
거기에 이사야가 감히 낄 수가 있느냐는 말이죠. 그걸 보고 난 뒤에 “저는 끼지 못 할 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망하는 자입니다. 그 찬양에 끼지 못한다면 그거는 천국 백성 아닌 거예요. 어디서 날아 왔는지 제단 불에서 숯불이 날아오죠. 천사가 숯불을 가지고 입술을 지집니다. 입술 속에 집어넣죠.
이 기능을 바로 천사가 하지만, 이걸 실제적으로 누가 하느냐 하면 신약에 예수님이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그게 바로 제단이거든요, 제사장으로 우리에게 어린양 되신 예수님께서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 하신 겁니다.
이사야 6장과 비교해 보면 전혀 어려울 게 하나도 없어요. 전혀 어려울 게 없는데 어떤 사람에게 어려울 게 없느냐 하면 사람들 보기에 밑지지 않지만 정말 거룩하신 하나님 보시기에 밑지는 정도가 아니고 이게 과연 괴물인지, 도대체 인간이라고 하는 그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없어요. 이번에 수련회 할 때, 교재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가 과연 인간이냐’라고 했잖아요. 과연 인간이냐. 인간일 수가 없어요. 인간은.
그런 입장에서 누가 입술을 지져주고 우리의 죄를 용서한다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천사들이 찬양하는 그 집단의 일원이 된 것을 우리는 찬양하지 않을 수 없죠. 내가 스스로 되고자 하는 그것은 소용없고, 이사야가 선지자니까, 그냥 선지자겠습니까? 얼마나 완벽하겠어요. 그러나 그 완벽도 참 추하고, 치사하고, 내가 산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의 참사입니다. 몰락된 참사라고 보면 되요.
여러분, 차가 사고가 나면 차가 다 휴지처럼 찌그러질 때, 참사라고 하잖아요. 우리 인생이 그런 모습이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참사입니다. 내가 산다는 자체가 어디 드러낼 가치도 없는 그러한 존재이지요.
그래서 이사야가 그걸 하고 “누가 갈 거냐?” 할 때, 이건 군말 없이 손들고 나옵니다. “제가 가겠나이다.” 왜? 이미 안정되어 있으니까. 어떤 경우에도 이 신분이, 이미 주신게 있기 때문에, 하늘에서 주신 게 있기 때문에, 그걸 오늘 낮에 성령세례라고 했는데, 성령을 이미 주신 게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뭐 주저 할게 없죠. 신분이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입장에서 이사야가 세상에 나갑니다. 그런 이사야를 기다린 게 뭐냐. 전쟁입니다. 전쟁이죠. 그런데 그 전쟁은 하나마나한 전쟁이에요. 아주 신이 나는 전쟁이고 여유 만만한 전쟁이에요. 왜냐면 그 전쟁에서는 하나님이 붙여준 전쟁이기 때문에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승리할 필요가 없어요. 지기만 하면 승리하는 희한한 전쟁이에요.
나는 무조건 지기만 하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얼마나 여유롭게 보이는지, “내 자녀야, 네가 얼마나 여유가 있었으면 많이 양보해도 되고, 많이 져줘도 될 정도로 네가 자유로우냐.”라고 칭찬이 늘어지는 그런 전쟁을 하는 겁니다. 져도 괜찮은 전쟁, 패배해도 그게 승리가 되는 전쟁, 그런 게임은 우리가 할 만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러한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 이 신명기가, 그 작업 중의 하나가 여기 나옵니다. 5절에 보면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사악한 종이로다” 사탄의 백성이라는 말이죠.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라고 해서 모세가 기분 좋게 이야기 하면서 내용은 정말 백성들이 들었으면 모세를 죽일 정도로 우리 자신의 가치를 아주 무시하니까, 용서가 안 될 정도로 아주 무시무시한 예언을 하는 거예요. 실제로 이 예언에 우리도 끼어듭시다. ‘끼어들었다가 지옥가면 어떻게 하느냐’라는 그런 걱정은 하지 마라니까요.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까 이제부터는 우리의 남은 몸 가지고, 이제는 부채를 펴는 거예요. 도대체 나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어서 내 힘으로는 구원이 안 되었을까를 마음대로 펼치는 그거. 아니, 그것도 못 합니까? 이게, 참, 말은 쉽다마는. 내 뜻대로 안 되는 그것을 즐길 수 있어야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어린아이들 보면 이빨이 날 때 분명히 이빨이 있어요. 그런데 이미 나와 있는 이빨은 제거 대상입니다. 젖니 밑에 영구치가 있어가지고, 이름도 영구예요, 영구치가 있어서 아주 사납게 밀어 올려 버려요. 더러운 이스라엘 백성,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 악마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렇게 설정해 놓고 밑에서 주의 이름이 그것을 들어 올려 버립니다. 그러면 이게 대체가 되어 버리지요.
그러한 싸움은 결국, 이스라엘이 남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 우리 자신이 예수를 싫어하는 요소로 가득 차 있음을, 결국에 마지막 싸움은 나와 나의 싸움이에요. 내 의미, 내 가치와 주의 이름. 내 이름과 주의 이름의 마지막 싸움.
이미 구원 받은 사람도 그 싸움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아, 이러면 내가 욕 얻어먹는데.’ 라는 싸움이 있을 거예요. 너는 욕 얻어먹으라고 이 세상에 던져 진거예요.
끝으로 한 말씀 드리지요. 여러분 수족관에 고기들이 놀잖아요. 그 수족관에 물은 누가 채워 준거예요? 고기들이 자기가 침 뱉어서 채웠습니까? 이 수족관의 물은 누가 채워 준겁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물어 보세요. “당신이 그렇게 살도록 나무, 해, 달, 별 이거 누가 채워 준거예요?” 아침에 이야기 했잖아요. 요한복음 1장 3절. “주가 아니면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는다.” 라고요.
우리는 주님께서 이미 확정된 주의 나라에 주님이 만든 이 세상에 우리는 하나의 뽀골뽀골 거품만 내는 하나의 물고기로써 마음껏 헤엄쳐야 됩니다. 이 몸은 썩을 몸이고 그리고 새로운 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젖니는 날아가고 영구치가 올라오는 그것을, 우리가 실패하는 가운데서 또 다시 주의 몸, 주의 약속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이미 너는 성공했다는 기회를 자꾸 우리에게 주께서 주시기 때문에 이 땅을 살 때는 자유롭게 여유만만하게 찬양하면서 찬양 속에 있으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내 것이 아니고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무슨 악마적 고집이 그렇게 센지 마치 내 세상처럼, 착각도 유분수지, 엄청난 착각을 하면서 고집부리고 살고 있습니다. 주여, 한꺼번에 성령세례로 말미암아 다 부서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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