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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장래(신31;13-18) 17123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 1. 08:10
2017-12-31 14:56:34조회 : 29         
   이스라엘의 장래171231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이스라엘의 장래(신명기 31:13-18)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kBIbU3RFIj0, Hit:2
 이근호17-12-31 15:44 
이스라엘의 장래 

2017년 12월 31일                      본문 말씀: 신명기 31:13-18 

(31:13)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31: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죽을 기한이 가까웠으니 여호수아를 불러서 함께 회막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에게 명령을 내리리라 모세와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회막에 서니 

(31:1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에서 장막에 나타나시고 구름 기둥은 장막 문 위에 머물러 있더라 

(31:16)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 

(31:17)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내림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냐 할 것이라 

(31:18) 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하나님의 뜻과 우리 인간의 뜻이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충분히 밝혀집니다. 인간은 자기 위주라서 ‘하나님과 함께 있음’으로 인해 자신들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여깁니다. 이런 소원의 출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냥 있지 않으시고 노리고 들어가십니다. 

그 ‘수상한 출처’를 갈수록 밝혀내십니다. ‘감히 네가 뭔데!’하는 식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해서 만드신 공간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주인 행세하고자 하는 겁니다. 문제는 인간들이 이 사실을 도저히 인식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자기 백성들에게는 이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이게 바로 인간들이 미처 짐작 못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내용에 대해서는 인간들을 ‘망함’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만큼 인간들은 꾸준히 평소에 ‘자기 아집’으로 뚤뚤 말려있음을 드러내는 겁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자식’에 대해서 미리 예고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자식이란 ‘자기의 전부’입니다. 인간들의 본성상 지니고 있는 육적인 힘은 ‘생식’ 또는 ‘번식’으로 다 소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모로서 해야 될 전부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자기를 건드리는 자는 용서하되, 자기 자식을 건드리는 자는 용서가 되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이론이나 논리로 설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터져 나오는 본심이 이러합니다. 따져 볼 것도 없습니다. 자식은 단순히 ‘자아의 확장’ 정도가 아닙니다. 자아를 불멸의 존재로 구체화하는 증거 같은 겁니다. 즉 ‘나는 비록 죽지만 자식이 있는 한 나는 영원하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낌없이 자식에게 헌신입니다. 인간의 관심사는 과거가 주가 아니라 미래로 갑니다. 자식이 잘되는 것이 곧 자기 생애를 뛰어넘어서 죽음 그 이후까지 멈추지 않는 ‘자기 신격화’ 작업입니다. 자기에 관한 일이기에 멈추거나 비난하거나 망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인간들의 본성적 움직임에 주목하십니다. 

누가 할 것 예외없이 진행되는 이 작업성에서, 왜 인간은 필히 망해야 하는 이유가 밝혀집니다. 이 내막이 밝혀지면서 병행해서 밝혀지는 것이 바로 언약의 본질입니다. 언약,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근원에서 뿜어져 나오는 원초적 죄를 통해서 알려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망함을 사전에 막지 않으시는 겁니다. 

경고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선언하시는 겁니다. 즉 “너희들이 그토록 귀하게 여기는 자식들은 지금보다 훨씬 막가게 될 것이다. 나를 버릴 것이며 나의 언약을 위반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언약은 갈수록 그 본질 들추어냄에 더욱 집중하게 될 것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은 언약을 써먹을 그 어떤 시도도 하나님께서 옳은 것으로 봐주지 않습니다. ‘언약에 의한 망함’은 곧 인간들이 구원받을 옷을 뺏는 것과 같습니다. 동화 ‘선녀와 나뭇꾼’에서 나뭇꾼은 선녀의 옷을 감춥니다. 천하의 선녀도 돌아갈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보여지는 이러한 조치는 곧 인간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만의 방식이 따로 있음을 알리시는 계기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흥부전’에 나오는 놀부의 행태입니다. 멀쩡한 제비 다리를 부러뜨립니다. 그리고 난 뒤, 본인이 스스로 그 제비 다리를 치료합니다. 이 연이는 행동들은 철저히 자신의 의를 따로 확보하려는 태도일 것입니다. 

이처럼 언약은, 언약으로만 치료되도록 하는 환경을 조성하게 됩니다. 바로 그분이 언약의 끝에 나타나시게 됩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분이 등장하게 되면 ‘언약’이란 결코 인간을 위한 언약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언약임이 분명히 집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의해 이스라엘 장래가 무너지게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언약 성취에 대해 인간의 육이 개입될 사항이 아님을 계속 알려주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인간은 망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참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아는 자들은, 자신들의 육의 본성상 망하는 그것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경외가 성사된다는 겁니다. 

즉 ‘재앙이 있기에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이 계시기에 참으로 언약에 합당한 재앙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망하게 되는 것은, 본인들이 손대지 말아야 할 것에 감히 자기 육신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손 대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에게 ‘필요한 언약’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언약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필요한 분은 따로 있습니다. 마치 일란성 쌍둥이가 양자로 갈라서고 난 뒤,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만나게 될 때와 같습니다. 어두운 터널 밖에서 ‘다른 자기’를 만났을 때, 어두움 속에 있는 자기가 참된 자기인지, 아니면 터널 밖에 밝은 곳에서 자기를 쳐다보는 그 자가 진짜 자기인지 순간적으로 혼돈이 오는 것과 같습니다. 

신약의 성도는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위한 그림자는 아닌 것입니다. 기존의 아담의 몸은 흙으로 사라져야 마땅하지만 언약 안에서 성도는 예수님의 그림자로 살면서 주님의 영원함 속에 합류되어 있는 겁니다. 따라서 자기 육의 흔적을 세상에 남기려고 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들은 자신의 영속성을 자식을 통해서 이어나가려고 합니다. 그 자식에 대해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폭격이 감행됩니다. 그 자식의 끝에는 조상의 영원함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과 연결하게 됩니다. 인간이 예수님, 곧 참된 ‘하나님의 아들’과 연결은 죽음을 통해 실현되는 겁니다. 

따라서 망해야 합니다. 그 망함 속에서 그동안 자신의 육적 욕망으로 가리워진 진정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망해야 되는 자들을 위한 언약 완성을 위해 일그러진 얼굴, 상처입은 얼굴, 고통스럽고 저주를 표현하는 그 하나님의 얼굴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이 세상에서 망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함을 배워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통해 내가 없어져야 될 그림자에 불과한 자임을 자인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12-31 22:04 

166강-신 31장 13 – 18절(이스라엘의 장래)17123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1장 13 – 18절입니다. 구약성경 312페이지입니다.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죽을 기한이 가까웠으니 여호수아를 불러서 함께 회막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에게 명령을 내리리라 모세와 여호수아가 나아가가서 회막에 서니,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에서 장막에 나타나시고 구름 기둥은 장막 문위에 머물러 있더라,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①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 신들을 음란이 좇아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
②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③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냐 할 것이라, 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이 본문 말씀을 보면서 여러 가지 오해를 할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정신 차리라고 주신 말씀인지 아니면 정신 차리지 말라고 주신 말씀인지를 분명히 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보고 망하라고 주신 말씀이에요. 

정신 차리고 대비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이 인간의 행함보다 먼저 우위에 있는 거예요. 먼저입니다. 말씀이. 너희가 백날 해 봐야 말씀을 안 지키고 여기 16절 말씀처럼 “나를 버리고 이방신을 음란이 좇아서 우상 숭배 할 것이다”하면 할 것이에요. 

그리고 그 명령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분명히 전달했습니다. ‘필히 망한다. 필히 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느냐?’ 망할 때 비로소 경외함이 제대로 성취된다는 겁니다. 내가 망할 때. 


내가 하나님 때문에 안 망하게 될 때 경외가 안돼요. 뭔가 숨통 틀만 하면 절대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숨통 틀만 하면. 자기 것이 있으면. 철저히 망하라고 명령을 줬으면 이 지시만큼은 우리가 따라 줘야 돼요. 그런데 이 지시를 못 따라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자진해서 자기가 망하도록 부추길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러면 주님께서는 뭐라 하시냐, “거봐, 네 고집 대단하잖아. 내 말이 맞지?”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디로 자꾸 몰아세우시느냐 하면 마지막 때까지 계속 끌고 갑니다. 마지막 때는 누가 나타나느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요. 진짜 참 이스라엘이 그 때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 때까지 임시방편으로 사용한 것이 혈육적 이스라엘입니다. 

육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로 허약한 존재냐, 인간이 허약한 존재인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 육과 육의 연결에서 하나님의 연결성은 바로 부모와 자식 사이입니다. 어느 부부도 자기 부모한테 못해주면 이혼하지 않습니다. 허나 자기 자식한테 못하면 바로 이혼입니다. 

부모와 자식을 이렇게 놓게 되면 못해줘서, 그 못함에 대한 미안함에 어쩔 줄을 모릅니다. 자기를 막 때리는 거예요. ‘집에 같이 있을 때 잘 해 줄걸. 그렇게 구박을 하다니. 미쳤어. 미쳤어. 좀 더 잘 해 줄걸.’ 이런 격한 미안함이 막 밀려오는 거예요. 그런데 극한의 미안함은 언제 오느냐 하면 같이 있을 때는 절대로 안 일어나요. 꼭 이렇게 자식이 없을 때, 떠나보냈을 때에 좀 더 잘해줄 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부모한테는 그런 게 없어요. 부모에게는 그런 게 없는데 이상하게 자식을 통해서는 그런 마음이 들어요. 

보통 자식을 키워보면 부모심정을 안다고 하는데 절대로 모릅니다. 지식 키우면 자식만 알지 부모 몰라요. 왜냐하면 인간의 육은 예수그리스도를 향하게 되어 있지 거꾸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 쪽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자식 쪽에서 자식 쪽으로 계속 미련이 남아요. 자신의 못 다한 한을 자식에게 실어 버립니다. 내가 실수한 거, 내가 실패한 거, 내가 한 맺히는 거, “너는 두 번 다시 실수 하지 마라”하면서 이렇게 넘기는 겁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자녀는 자녀를 낳고 그 자녀는 또 자녀를 낳고 하는 그 연결 고리가 결국은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까지, 장차 이 땅에 오셔서 마중 나오시는 하나님과 연결 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본문에 ‘하나님에 의해 망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함이다’라는 뜻이 뭐냐 하면 인간이 자신의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육의 사랑이에요.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육이 죽고 난 뒤에 중단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자식 손자로 펼쳐지는 겁니다. 계속 펼쳐지는 거. 

인간의 육은 안 죽어요. 자식을 낳으면 낳을수록 계속 그 쪽으로 전달되어서 ‘네가 잘 되면 내가 잘되는 것이고 네가 살아 있으면 내가 살아 있는 것이고 너만 건강하면 나는 아파도 괜찮고’ 이걸 흔히 세상에서는 뭐라고 하냐 하면 부모 마음이라고 하거든요. 그 부모의 마음이 사탄의 마음이에요. 

자식에게 잘 해 줌으로써 자식의 자기 의, 자기에 대한 자기 충성, 자기의 사명 감당을 자식을 통해서 충분히 증명하고 증거 할 수 있다고 희망을 갖는 거 그런 것이 인간이란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에게 너무 실망스럽게도 ‘지금 보다 너희 자식이 나를 더 모를 것이고 우상숭배 할 것이다’라고 한 칼에 쳐버리시는 겁니다. 

이거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우리나라 동화에 ‘선녀와 나무꾼’이 있지요. 선녀와 나무꾼에 그 동화에 보면 그 나무꾼이 옷을 숨겨 버립니다. 옷을 숨겨버리면 천하의 선녀라도 하늘로 올라가지를 못해요. 나무꾼이 발목잡기 위해서 옷을 감춰버리죠. 

인간에게 이 옷의 역할을 하는 게 뭐냐 하면, 다시 내가 계속해서 나로 되돌아 올 수 있는 다시 회귀할 수 있는 그 되돌아오는 지점을 하나님께서 차단시켜 주시지 아니하면 우리는 천국 가서도 거기에서 지옥 생활을 하게 됩니다. 

심지어 불교에 보면 그런 게 있어요. 불교에 보게 되면 자기는 극락에 왔는데 자기 딸이 지옥 불에 남편과 함께 있는 것이 안타까워서 다시 허락 맡아가지고 지옥 불에 내려갑니다. 근데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그게 차단되어 있어요. 거지 나사로는 다시 지옥 불에 못 가는데 인간들이 지 마음대로 계시를 만들기 때문에 다시 갑니다. 

다시 가는데 드디어 딸을 구해가지고 ‘극락으로 가자’하고 가는데 남의 딸이 아니고 자기 딸이에요. 자기 딸을 빼돌려요. 왜 자기 딸을 구원 하느냐 하면 극락에 가 보니까 아무리 살기가 좋아도 자기 딸이 지옥 불에 있는 것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인간의 자기 우상화입니까? 잘 먹여주고 잘 입혀줘도 싫어요. 왜? 내 딸이 지옥 불에 있는 걸 생각할 때 끔찍하거든요. 그래서 자기 딸을 건져 올리는 데 이게 마늘의 파를 가지고 올리는데 파의 한계 중량이 1인밖에 안돼요. 엘리베이터가 한 사람만 탈 수 있는 거죠. 그런데 너도 나도 따라가겠다고 파 뿌리 뒤에 모여드니까 이 아줌마가 발로 차는 거예요. 자기 딸 빼놓고는 다 제치는 겁니다. 염라대왕이 약 올라 가지고 “너도 빠져라”해서 둘 다 빠져서 지옥 불에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보세요. 아무리 천국 극락 하지만 육의 관계를 끊지 못하면 구원은 없습니다. 그러면 육의 관계를 왜 끊어야 하는 가. 그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언약을 주게 되면 인간은 이 땅에 하나의 예수님의 그림자로만 있어야 돼요. 그림자. 

보이지 않는 분의 그림자가 성도입니다. 그리고 남은 자들은, 같이 남은 구원 받은 사람은 이 그림자 끼리 그리스도의 실체를 통해서 서로 연락을 취해야 됩니다. 그 연락을 취하는 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육에서 끊어졌고 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로만 살아가는 것은 이 그림자가 내 그림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식도 내 그림자 아니고 주님의 그림자입니다. 자꾸 ‘내 실체 있고 실체 있으니까 그림자가 온다.’ 라고 하면 안 되고, 내가 한평생 살아가는 것이, 우리 집사님 기도 하신 대로, 한 평생 살아가는 것이 내 인생 2017년도 내 인생 살았는데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인생의 그림자로써 2017년도 스케줄 잡고 한 거예요. 

내년에도 계획한다는데 계획 잡지 마시고 그냥 막 살면 됩니다. 막 살면 주님께서 알아서 그림자로써 살게 하실 거예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요. 이거 하라면 이거 하고 저거 하라면 저거 하고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요. 

그 작업을 할 때에 우리의 사탄의 요소가 만만치 않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에게 계속해서 육이 망하는 쪽으로 시도를 하십니다. 그 예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우리나라에 전래동화에 보면 ‘흥부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흥부전에 누구를 주목해야 하느냐 하면 ‘놀부’를 주목해야 합니다. 흥부를 주목하면 안 되고 놀부를 주목해야 해요. 놀부를 보게 되면 그게 가슴에 확 와 닿아요. 뭐냐 하면 놀부는 복을 얻기 위해서 멀쩡한 제비 다리를 부러뜨립니다. 부러뜨리는 이유가 부러뜨리는 것이 취미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제비 다리 부러 뜨려 주고 그걸 고치게 되면 하늘이 착하다고 해서 흥부 이상의 복을 자기에게 제공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보면 부러뜨리고 그걸 치료한다는 거예요. 그 가운데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나는 착해. 나는 계속 살아야 돼.’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펼칠 수가 있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 신명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꼭 놀부전의 놀부와 똑 같아요.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해 주십니다. 들어가게 해주게 되면 인간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의해서 들어가게 되어서 자기 자신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복 받을 권한이 있고 자격이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왔습니다.’라는 놀부의 심정으로 행세를 하게 되어 있어요. 놀부가 철썩 같이 자기밖에 모르잖아요. 

그것을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임할 때, 약속의 땅에 임해야 그것을 충분히 보여 주는 겁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냐 하면 16절 끝에 보면 “그들이 이방 신들을 음란이 좇아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그때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17절 끝에 보면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냐” 하나님이 안 계시니까 이런 재앙이 왔다는 거예요. 

이게 오늘 설교에 결정적인 겁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재앙이 온 게 아니고 하나님이 계셔서 온 재앙이기 때문에 

재앙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아, 하나님이 계시긴 계시구나.’하고 만족해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제비다리를 부러뜨려야 돼요. 

제비 다리를 부러뜨림으로 말미암아 이것에 대한 합당한 재앙은 내가 의도한 재앙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하고 똑같이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잃어버려서 아버지께로부터 얻어낸 그 은혜가 

아무것도 아닌 우리에게 공짜로 제공되는 식으로 천국에서 살게 하십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그것을 분명히 하게 되면 우리 자신이 허깨비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KBS에 인간극장에 보면 33년 만에 일란성 쌍둥이가 미국에서 서로 멀리 떨어져 살다가 하나는 버지니아 비치라는 곳이 있어요, 미 해군기지가 있는 곳인데 거기에 해군 군인으로 살고 있는 서른세 살 먹은 아줌마, 아이 하나있는 아줌마하고 LA에 잘 사는 동네에 살고 있는 아가씨하고 같은 서른세 살인데, 이 일란성 쌍둥이가 둘이 서로 입양되었다가 진짜 33년 만에 만나가지고 미국에 매스컴을 타서 유명인사가 되었어요. 한국으로는 지금 올까말까 하고 있는데 그걸 보면서 그 쌍둥이 중 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복음을 설명하는데 아주 합당한 이야기를 했어요. 뭐라고 하냐 하면 동생이 언니를 딱 보는 순간 터널 속에서 내 자신이 탁 튀어나온 걸로 알았다는 거예요. 어두운 터널 속에서 자기 주위는 캄캄한데 저 터널 밖에서 뭔가가 오는데 나는 분명히 터널 안에 있어요, 여기 있는데 저쪽에서 또 다른 내가 터널 밖 환한 곳에서 안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답니다. 그 때 자기는 큰 충격을 받았다는 거예요. ‘여기 있는 내가 전부 인데 내가 왜 또 저기 있지?’이렇게 되거든요. 

바로 여기 이 신명기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신다고 하는데 나중에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나게 되면, 이건 고린도 후서 3장에 나온 말씀인데, 얼굴이 나타나게 되면 바로 주님의 복음의 광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거예요. 그동안 너는 너도 아니면서 가짜로 네가 전부인 양 행세를 해 왔다는 겁니다. 

이런 걸 설명한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워요. 인간의 언어의 한계인데, 성경을 이렇게 보면서 낮에도 변화산 이야기 했지만 이 현실하고 저 현실하고 바꿔치기 한다는 게 이게 무슨 수로 가능합니까? 실제 세계 현실하고 또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현실하고. 

그래서 과학자들은 자꾸 그게 안 되기 때문에 변화하자고 하잖아요. 변화하자고. 그런데 변화해 봐야 소용없어요. 변화해 봤자 이 세상이 육이고 이 세상뿐인데 그래 놓고 예수가 뭐 어떻고, 뭐가 어떻고 그런 이야기 하거든요. 

터널 밖에서 어떤 게 등장했을 때, 그 사람이 진짜인지 아니면 터널 속에 있는 내가 진짜인지 이렇게 만나 보니까 내가 가짜고 저분이 바로 진짜인 거예요. 저분이 오실 아담이고 나는 사라질 흙이 되어야 할 가짜 마네킹 같은 아담을 쥐고 이게 인생의 내 목적이고 전부고 여기서 자식을 낳으니까 자식이 나의 불멸을 이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자동적으로 온 정성을 쏟아 부은 겁니다. 그렇다며 하나님의 신명기 말씀은 뭐가 돼요? 

오늘 신명기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감사하고 기뻐해야 돼요. 스스로 망하지 못하는 것을 망하게 해 주신다는 거. 우리는 망할 의사가 없잖아요. 그런데 십자가 딱 등장해서 가짜 나 말고 진짜 나를 발견하는 순간, ‘아, 내가 나를 지키는 힘든 수고는 이제 그만 해도 되겠다.’ 

이제는 자식을 볼 때 내 자식이 아니고 주님이 나라는 파이프를 통해서 넘겨준 자식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자식이 부모에게 잘해주는 것은 애당초 기대를 하지 마세요. 애나 안 먹이면 천사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자식은 뒤로 갈 줄 을 몰라요. 자식은 자기 잘 되는 미래만 있을 뿐이에요. 과거를 돌아보는 자식은 퇴행성 정신병 비슷합니다. 부모가 어떻게 되는가는 자식은 신경 쓰면 안돼요. 그리고 부모에게 신경 쓰기를 기대해서도 안 되고. 

이제 부모는 은퇴해야죠. 이 세상에서. 챙겼잖아요. 연금. 연금 챙겼으면 됐지, 그거 가지고 슬슬 은퇴해야지요. 은퇴하면서 어떤 생각 합니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이런 말 하면 안 되고, “미안하다, 내 자식아. 내가 재벌이 못 돼서 미안하다. 내가 좀 더 부지런 해가지고 너 맛있는 거 못 사주고, 내가 너만 바라보면 못해줘서 한이 맺힌다.” 이런 마음을 가질 때 혹시 철들은 자식 같으면 쬐금 존경합니다. 그것도 기대하면 안 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맞추는 거, 이것이 바로 허연 머리가 가진 노인의 면류관이라고 잠언 서에 나옵니다. 

나이 먹는 다고 인간 되는 거 아니에요. 떠나야 될 곳과 가야 될 곳을 뚜렷하게 자식에게 알려주고 “너는 아직 이 세계를 모르니까 너 하는 대로 하게 되면 내가 장담하건데 너는 필히 망한다. 내가 네가 망할 때 이 신명기 말씀 잊지 말아라 ” 이게 부모가 자식에게 남겨 줄 유일한 유산입니다. 

어떤 통계에 보니까 ‘미리 주는 게 낫냐, 나중에 죽을 때 주는 게 낫냐’ 는 쓸데없는 조사를 했는데 바보도 아니고 미리 줘서 망하는 가속도를 더 하려고 합니까? 절대로 돈 같은 것 주지 말고 못줘서 미안 해는 하지만 절대 주지 말고, 상당히 이중성이 있어요. 이중적입니다. 

자식에게 줄 것은 “너는 세상에 나처럼 더 살면서 나는 떠나지만 너는 살아가면서 네가 말씀과 멀어지게 되면 얼마나 하나님을 너의 밖으로 떼어 내려고 네가 얼마나 악바리처럼 사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목격할 때, 그리고 느낄 때, 그 때 너 대신 제비의 발목을 부 러뜨렸던 예수님이 자기의 목숨을 죽여서 너를 끄집어 낼 수 없는 이 세상에서 빼내주신 진짜 나의 실체, 나의 일란성 쌍둥이 그 쌍둥이를 만나서, 그 분이 사는 그 나라를 아들의 나라라고 하거든요, 그 천국에 같이 합류하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으로 미안한 마음으로 자식들을 키우고 세상에 보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자기 딴에 성의 있게 살았다, 열심히 살았다, 최선을 다해 살았다, 자식에게 할 만큼 했다하는 이 모든 것이 비겁한 변명이고 위선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일뿐이니, 주여, 은혜 주셔서 망하는 가운데서도 같이 망했던 주님 따라서 천국에 갈 수 있는 자식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부모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