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강-신 32장 13–19절(반석)1802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2장 13–19절입니다. 구약성경 314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그런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은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 너희의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것들이로다,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보시고 미워하셨으니 그 자녀가 그를 격노하게 한 연고로다”
전에 이야기한 신명기 32장의 이 노래 말씀은요 이미 모든 것이 결론이 난 상태에서 현장을 다시 한 번 보는 겁니다. 이미 결론 났어요. 물론 지상의 역사는 지속되기 때문에 결론 나지 않았지만, 위에서 묵시적 입장에서는 필히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일종의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그 뒷자리를 하나님께서 미리, 그 경험하지 아니한 그 미래를 우리에게 미리 보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봤다고 해서 개과천선할 정도로 만만한 인간들이 아니죠. 우리는 이 말씀대로 가서 구원받아요. 이 말씀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안에 있으면서 구원받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경고를 우리가 눈치 채가지고 “우리는 정신 차리자! 이렇게 경고하는데 우리가 정신 안 차리면 우리는 인간도 아니지.”라고 우리가 결심하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구원이 성사되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오늘 본문에 여러 번 나오는 데요 13절에 보면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여기에서 ‘반석’이 나와요. 그리고 18절에 보면 “너를 낳은 반석을”이라고 나옵니다. 반석은 독보적입니다. 두 개의 반석은 없어요.
탄탄한 바위, 반석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그 반석위에서 예루살렘, 시온 성을 건설하고, 그 반석에서 광야 때는 물을 냈습니다. 그 반석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동행했다는 흔적이거든요. 너희들끼리 내버려두지 않았다는 증거가 반석입니다.
“반석을 믿고, 반석에서 우리가 새롭게 태어났습니다.”를 인정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니고 처음부터 하나님을 위한 세상에 우리가 끌려들어갔습니다”라는 고백이에요. 주도권이 나에게는 없는 거죠.
반석의 단독성, 독보성, 반석이 반석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불려 들어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온통 저주로 포장을 하거든요. 오늘 본문은 “마귀를 섬겼다, 너희가 망한다...”온갖 이야기 할지라도 온갖 언급을 하나님께서 하신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반석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지, 우리를 따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구원시키려고 이 말씀 주신 건 아니에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신명기 32장 말씀은 모든 일이 정황이 종결된 상태에서 보니까, 태풍 지나고 보니까, 반석이 반석답게 또렷하더란 말입니다. 모든 것이 불태우고 난 뒤에 오직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만 이 구원의 능력이 나오더란 말입니다.
자기가 대단한 존재인 가운데서 십자가를 믿는 건 좋아요. 하지만 그 대단한 존재가 삭제 당했을 때 혼란과 핍박 가운데서 나를 지탱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상실했을 때 그때도 그리스도의 한결같은 사랑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가를 보는 겁니다.
로마서 8장에 나온 말씀처럼 환란과 핍박이 올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진 환란과 핍박이 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어요. 네가 지금 무엇을 의지하는 가를 계속 주시하시는 겁니다.
환란, 핍박 따로 있습니까? 정남쪽 햇빛 비춰서 좋아가지고 낮잠 자는 거지요. 그게 환란 핍박이에요. ‘여기가 좋사오니’ 하다가 지진 일어나서 깨든지 하지요. 이 모든 게 종결 된 안목이라면 이걸 우리가 신약에 있는 우리는 이방인의 입장에서는 미리 그것을 당겨서 종결된 입장을 우리가 가지자는 말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이것을 선물로 받아요. 종결된 입장에서 우리가 미리 받아버리면 아주 느긋한 입장에서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구원받았다”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고, “나는 예수 믿는다”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단이 뭔지 알아요?”라고 물을 수 있어요. 이단이 뭔 줄 아느냐고...
많은 목사들이 있어요. 목사들이 설교 할 때 저 목사가 성령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어떻게 분간 하느냐 하면 그 사람에게 물어 보면 됩니다. “이단이 뭡니까?”라고 물어보는 거예요. 왜 이렇게 물어 보느냐 중요하냐 하면 그 사람이 “나는 이단을 이렇게 생각합니다.”하는 그 순간 그것이 자기를 자기 자신이 어떤 식으로 구원 되었다고 장담하는지를 티를 다 내게 되어 있어요. 이단이 뭡니까?... “목사님, 구원받았습니다.” 그런 소리 할 필요 없어요. “목사님, 성령 받았습니다. 은혜 받았습니다.” 그런 소리 하면 안돼요.
“실례지만 목사님, 뭘 가지고 이단이라고 보십니까?” 또 다른 말로 “어떤 사람이 지옥 간다고 보십니까?” 지옥가고 천국 가는 기준을 한번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목사가 나름대로 전통 개혁주의 신학을 반대하고 삼위일체를 반대하면 지옥 간다고 하겠지요.
그런데 그 교회에 한 달에 헌금 천만 원, 십일조 천만 원 하는 사람이 왔는데 그 사람이 딴 건 인정하는데 삼위일체는 잘 안 믿어진다 하면 그 사람보고, 돈 많이 내고 있는데 지옥 간다고 할 수 있겠어요? 자기가 입으로 이런 자는 지옥 간다고 해 놓고 막상 헌금 많이 하고 목돈 많이 내면 그런 말 하겠어요? “이런 인간 무조건 지옥 갑니다.” 해놓고 자기 딸이 그걸 안 믿으면, 자기 딸이, 자기 외손녀가 안 믿으면. 백날 ‘아멘’해도 자기 외손녀가 그걸 안 믿으면 “이 사람은 지옥 간다.”라고 말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최종적 관점이 없는 인간들은 “이단은 이렇습니다.”라고 장담을 하지 못해요. 못하고 그저 전략을 꾸미는 거죠. 어떻게 좀 꼬셔볼까 싶어서. 꼬셔볼까 싶어서 전략을 세우면서 기준을 내세우는데 그 기준이 날마다 달라요. 조정한다고. 교인수와 헌금 조정한다고.
장담을 못하겠다는 겁니다. 장담을 했다가 내가 내세운 기준에 내가 만약에 미달하게 되면 본인이 지옥 가는 수가 생기잖아요. 그래서 장담을 못하니까 “그건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하죠. “아니, 네 이야기, 주께서 말고 당신 이야기, 당신은 이단 기준도 모르고 지옥과 천당 기준도 모르면서 지금 설교를 하고 있느냐?” 이 말이죠.
“뭐, 이렇게 될 겁니다. 이렇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뭐 그런 이야기 하는 거예요? 본인 확신도 없고 확정된 기준도 없이. 지난 달 1월 29일 날 전북 장수에서 절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절도 사건이 일어났는데 돈 31만원을 잃어버렸어요. 31만원. 식당에서.
신고가 되었겠지요. 장수 경찰서에서 조사를 하는데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진돗개가 짖지를 않았습니다. 진돗개가 짖지를 않아. 개는 도둑놈을 보면 짖으라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개가 안 짖었어요. 요거 한 패거든요. 한 패. 잡아보니까 그 식당의 전직 직원이었습니다. 직원은 놀래요. “제가 어떻게 잡혔죠?” 개가 안 짖었거든요.
선지자는 개 같은 인간이에요. 짖어야 되요. 어떤 입장에서? 최종적 입장에서. 뭐, 개연성 이런 거 따지지 마세요. 뭐, 앞으로 어떻게 달라지고 이런 거 따지지 말고 최종점, 최종적 입장에서 그 걸 이야기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 최종적 결론 부분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것은 반석에서 꿀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반석에서 자기 백성이 나온다는 겁니다. ‘여수룬’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인데, 여수룬이라는 말이 어디에 자주 나오느냐 하면 이사야에 뒤쪽에 나와요. 이사야는 나라 망하고 난 뒤에 최종적 관점에서 선지자의 관점에서 성전에 여섯 날개를 가진 천사가 이야기 하는 관점에서 “여수룬아” 여수룬은 최종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이 여수룬이에요. 이건 이스라엘과 좀 차이가 나죠? 이스라엘은 ‘한번 두고 볼까?’하는 나라는 이스라엘이고 맨 이스라엘인데 “너는 최종적으로 사랑 받는다”에 대한 호칭이, 그걸 애칭이라고 하는데, 그 애칭이 여수룬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원인이 뭐냐? 여수룬 수준에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거예요. “네가 왜 여수룬이 되지 못하고 이스라엘이냐?”라는 말이죠. 내가 원하는 최종적인 수준에 이르지 못하느냐는 말이죠.
근데 그 여수룬이 되기 위해서 뭘 하느냐, 죄를 안 지으면 되느냐. 아니에요. 그럼 마귀를 안 섬기면 되느냐. 아닙니다. 그건 기준이 아닙니다. 최종기준이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여기 16절에 보면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질투라는 말은 극단적인 사랑을 질투라고 해요. 극단적인 사랑. 제가 언젠가 그런 주례를 한 적이 있어요. 사랑할 생각하지 말고 상대방을 존경할 생각을 하라고 했죠. 주제넘게 급하게 뭐, “사랑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안돼요.
존경해야 돼요. 존중 정도가 아니고 존경해야 돼요. 존경이 뭐냐, 나한테 없는 요소가 저쪽에서 나오는 것에 대해서 고마워 할 줄 아는 게 존경입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요, 나이 40 넘어서 어떤 아가씨가 처녀인데 결혼을 해가지고, 집안에서 같은 교회를 다니는 남자 만난다고 해서 했는데 그 남자가 다른 것은 직장도 있고, 집도 있고 다 있는데 바짝 말랐다는 그 외에는 뭐 아무 하자가 없거든요. 십자가 마을에도 바짝 마른사람 더러 있잖아요. 오용익 목사님 같은. 그래서 그거 말고 별다른 하자 없어서 상견례하고 다 했어요. 결혼 날짜 잡고 결혼식장도 전부다 알아보고 다 했는데 그 아가씨가 기분 좋게 남자 집에 놀러를 갔는데 거기서 긴 머리카락이 하나 나왔다는 거예요. 그 머리카락 한 개 때문에 파혼했습니다. 팩트예요. 실제 있었던 상황입니다.
뭐가 문제냐, 긴 머리카락이 있다는 것은 어떤 여자가 들어갔다는 이런 뜻으로 일관했는데 남자는 그게 아니라고, 바짝 말랐는데 무슨 일이 있을 리가, 아무튼 그게 아니라고 어디서 묻어 왔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안 듣는 거예요. 자, 뭐가 문제냐, 청소 안 한 게 문제냐, 그게 아니고 존경심이 없는 거예요. 결혼에. 내가 이만한 조건 내미니까, 너도 이만한 조건에 맞게 계산을 하고 있는 거예요. 계산. 존경심이 없어요.
계산은 누구만 하느냐. 주님만 계산합니다. 다른 사람은 계산할 쨉도, 자격도 없어요. 여러분 자식이 부모 놓고 계산 하면 되겠습니까? 안되지요. 반석이 바로 부모 역할을 하는 거예요. 이사야에 나옵니다. “송아지도 자기 주인을 아는데 너희들은 내 자식이 되어가지고 어떻게 애미, 애비도 못 알아보냐!”라고 꾸준히 이야기해요.
하나님의 말씀은 뭘 하라는 말이 아니고 높은 위치에서 이야기 하는 겁니다. 높은 위치에서. 그동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수준에 맞추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에게 맞춘다고 애를 썼는데, 애를 쓰면 쓸수록 누가 반석이 되느냐 하면 반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본인들이 반석이 되요.
“이 만큼 애썼습니다. 노력했습니다.” 지가 구원의 중심인 냥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여기 13절에 한번 봅시다. 하나님의 작전이 너무 오묘하기 짝이 없어요. “여호와께서 그로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은혜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거든요,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소의 젖기름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 소산의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그런데 여수룬아” 이건 이스라엘에게 준 게 아니에요. 누굴 보고 준거냐. 여수룬보고 준거예요.
여수룬이나 이스라엘이나 다 같은 이야기예요. 다 같은 이야기 인데 단어를 바꾸는 거예요. 여수룬보고 이야기 한 건데 그들은 자기가 반석인줄 알고 자기보고 이야기 한 겁니다. 배불렀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뭐라고 오해 하느냐 하면 내가 귀하니까 배부르게 해줬다는 거예요. 주께서는 하찮은 것들을 여수룬 만들었거든요. 하찮은 것들을 백성 만들었는데 그 초기에 하찮은 것들을 빼버렸어요. 자기는 하찮지 않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욕심을 계속 내는 거예요. 욕심. 다른 말로 욕망. 욕망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원함이나 어떤 기대함이 나와요. 소망이 나와요. 이것 때문에 세상살이가 스트레스 받아요. 모든 스트레스는 이 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은근한 기대감이 있어요. ‘오늘 손님 좀 와야 될 텐데..’ 뭔가 자꾸 기대해요.
목사도 마찬가지로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좀 잘해야 될 텐데.’ 자꾸 뭔가 기대한다고요. 행동할 때만다 기대 없는 행동이 없어요. 전화 걸 때도 그렇고 누구 찾아 갈 때도 그렇고 뭔가 이랬으면 하는 ‘이랬으면 좋겠네~~’하면서 자꾸 기대하고 있는데 “네가 뭐야?”하고 물으면 ‘저 괜찮은 인간인데요.’ 이걸 차마 입으로는 말을 못하죠. 속으로는 생각하면서.
어떤 가정에서 딸이 하나있는데 그 다음 둘째 낳는 다는 게 뭐가 잘못 돼서 네쌍둥이 낳았어요. 네쌍둥이 낳았을 때에 그 가정에서의 사랑이 뭐냐. 네쌍둥이 있고, 친정엄마, 친정아빠, 시엄마 다 동원시켜서 아이들을 보는데 감당이 안 될 정도예요.
지금 하나도 감당 안 되는데 세 명이 하나를 감당 못하거든요. 외손녀 하나를. 그런데 아이 다섯이 어떻게 감당이 되겠습니까. 그럴 때 38살 먹은 남편 되는 남자가 “여보, 나 당신 사랑해”하면 그 사랑이 사랑이겠어요? 사랑은 직불카드입니다. 현찰입니다. 아이들 때문에 지금 자기 좋아하는 스케이트 타는 거, 서핑 하는 거 다 팔았어요. 팔았는데 한 달 치 분유 값, 그것도 보니까 독일제예요, 독일제 분유 값도 안 나와요. 자기 딴에는 취미생활 끝냈는데 한 달 치 분유 값도 안 나와요.
사랑은 뭐냐, 현찰로 이야기 하는 겁니다. 현찰 없이 사랑이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꼭 퇴직하고 난 뒤에 “여보, 사랑해”하는데 소용없어요. 계속 돈을 벌어 와야 사랑이 결제되는 것이지. 현찰, 직불카드 없은데 무슨 사랑이 되겠어요.
바로 이게 인간입니다. 바로 먼 위에서 보면, 진짜 여수룬 입장에서 보게 되면 이스라엘이 왜 망했는가, 살려줄 가치도 없는 거예요. 피투성이가 되었어요. 에스겔에서 보면 길에서 누구도 안 찾는 거예요. 누구도 거둬주지 않는 버려진 자. 그게 하찮은 겁니다. 그 하찮은 것을 신약에 오게 되고 구약 마지막에 오게 되면 그게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자유라 하는 것은 독자적인 자기 것이 있어서 자유가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노예가 될 때, 예속 될 때 그것보다 더 누리고 누리는 자유가 없어요. 최고의 자유는 본인의 자유 됨을 포기하는 겁니다. 자진해서 자발적으로 흔쾌히 “까라하면 까겠습니다, 가라하면 가겠습니다.” 하는 이 자유 말고는 다른 자유가 없습니다.
시편 131편에 보면 정말 이건 액자 해 놓을 만합니다. 신앙의 최종 상태, 여수룬 상태, 이스라엘 상태가 아니고 여수룬 상태, 모든 것이 마감된 구원의 상태. “신앙생활이 뭡니까?”라고 물으면 나올 답변, 그것은 시편 131편입니다.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이제 기도할 이유도 없어요.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근원적인 바닥에서는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떼쓰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요구르트 하나 얻어먹었다는 말이거든요. 젖 뗀 아이가 곶감 하나 입에 물려주니 “아이 좋아~” 하면서 만족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거예요.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다음 누구를 보고 있느냐 하면 “그의 어미를 보면서” 이스라엘이 이렇게 엄마를 쳐다보는 거예요. 캥거루 같아요. 어미 캥거루 보자기 안에 새끼같아요. ‘엄마세상이지 내 세상 아니었군요.’ 이게 최종적 관점이에요. 그러면 이 최종적 관점인 시편 131편은 액자를 해 놓아도 괜찮아요.
이렇게 다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커피 석잔 먹어가면서 금요철야 하면서 떼를 쓰면서 쭈여~쭈여~ 왜 그렇게 하는가. 사람이 목적이 생기면 실력이 늘어난다고 오해하기 때문이에요. 목적을 어떤 목표점을 정해버리면 사람이 미쳐버려요. 내가 지금 그 목표점과 몇 센티 남아있는가 그거 측정한다고.
그러면 교회 목회 딴 거 없어요. 인간의 욕망을 계속해서 목표를 걸어 놓고 “그 목표 달성하게 되면 다시는 천벌 받지 않습니다.”라고 이걸 보상으로 주는 거예요. 여러분 삼대가 복 받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교회의 목회 관심사는 “너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야. 너는 사랑 받기에 합당한 존재야”라고 계속 ‘너’에게 집중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그 마귀의 말에 죽기 살기로 천벌 안 받으려고, 저주 안 받으려고 몸부림치면서 교회는 몸집이 커지죠. 겨울철이 되어서 그런지 우리교회 몸집은 완전히 다이어트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성경은 네가 잘 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하나님이 내려 올 자리 마련하는 것이 성경이에요. 구약 성경.
하나님이 인간과 섞일 때 과연 섞일 만한 자리는 어떤 자리냐, 섞이면서 어떤 현상이 동반해서 일어나느냐를 보여주는 게 구약성경입니다. 그리고 신약에는 말씀이 육신이 된 거고요. 간단하지요? 어렵지 않지요? 우리는 자리 내 줌이에요. 그뿐이에요.
우리 엄마 오는 거예요. 우리 아빠 오는 거예요. 젖 먹여주러 오는 거예요. 그게 반석이라는 겁니다. 단독적이에요. 오직 그분 뿐 이에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 준적 없어요. 그분이 다 이루었다면 다 이룬 거예요. 사법 당국에서 뭔 소리를 해도 다 이룬 거예요. 그것은. 그 사람 구원에 대해서는.
옆에서 누가 ‘저주받는다, 천벌 받는다.’ 해도 다 이룬 거예요. 이 세상의 법은요, 남에게 피해를 입힐 때, 또는 피해자 입장에서 보상 차원에서 적용하는데, 그 피해라는 것이 고통의 경중이거든요. 고통의 경중.
제가 울산 강의에서 초반에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살아가면서 참 착실하게 죄를 안 지었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분명히 이야기 했어요. 집에서 홈쇼핑 하는 거, 홈쇼핑 해가지고 누가 나와서, 최유라 나와서 뭐 이렇게 하고 나면 저거 사야지 하고 버튼 누르는 순간 재래시장 상인 4명 죽였어요. 그 상인 가족들 바로 전셋집에서 쫓겨나게 만들어요. 홈쇼핑이 되는데 이 추운 날 누가 물건 사러 나갑니까?
중국집, 피자집 배달 안하고 버틴다하면 그건 보통 오기 아닙니다. 출애굽기 31장 14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하나님이 하나님 스스로 이 인간 속에 있기 위해서는 먼저 터를 잡는데 터를 잡는 게 뭐냐 하면 죽이는 거예요. 죽여 버린다.
그런데 죽여 버리는 게 저주가 아닙니다. 천벌이 아니고 복이에요. 나를 죽이는 그 자리가 주께서 젖 주는 엄마로서 거기에 자리 잡는 곳이에요. 우리는 안 죽으려고 도망치지만, 그러지 마세요. 이리 사나, 저리 사나 죽는 자리를 주께서 친히 마련해 줄때, 죽은 세마포 귀신 되어가지고 다시 자기 자신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귀신이면 귀신답게 살아야지요. ‘아, 내가 여기서는 죽었구나.’ 왜 자꾸 다른 귀신에게 쫓기는지. 귀신은 귀신한테 안 쫓기거든요. 산 사람이나 귀신에게 쫓기지. “내 다리 내놔라!” 하면 “다리 가져가라!” 하면 될 것 아닙니까?
여기 출애굽기 32장 2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가 이르기를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치는 거예요. “내가 정해준 천지창조를 기념해서 만들었던 안식일을 네가 왜 어기느냐?” 하시면서 사랑하기에 질투하기에 죽여 버리는 겁니다.
죽이는 그 능력이 사랑에서 나와요. 그러니까 ‘아, 나를 죽이는 것이 나를 살리는 사랑의 극단적인 모습이구나.’ 하는 사실을 알 때, 주 안에서 우리는 주님만 살아있고 그 앞에서 우리는 죽은 자 되는 이것보다 더 가볍고 즐거운 일이 없어요.
왜냐하면 죽는 자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기 때문에. 제가 이 복음을 전하려고 지금 이때껏 살아 있는 거 같아요. 이미 죽은 자에게는, 죽은 놈은 건드리지 않잖아요. 죽은 자에게는 뭐 뼈다귀에게 욕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어요. 뭐 잘 하라고 욕을 해야 하는데 이미 죽어 버렸는데요. 죽어 버렸는데 거기에다 무슨 책임을 물어요.
물론 단독 죽음이 아니고 함께 죽었기 때문에 책임을 묻지 않는 거예요. 누가 저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 누구야? 어느 마귀가 책임을 물어? “여기 내가 있사오니” 하면서 우리 대속자 십자가 피가, 그 피가 전부다 내 피예요. 내 죄가 섞인 피가 같이 흘러가는 거예요. 그게 반석에서 나오는 꿀입니다. 생명의 꿀이에요. 먹어서 ‘맛있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꿀이라는 것은 반석에서 생수 나오는 것처럼 거기서 꿀 나오는 겁니다. 거기서 마지막에 자기 백성이 나와요. 반석에서. 예수님에게서. 어떻게? 죽여 놓고 다시 끄집어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 죽고 언제 사느냐? 살렸다고 여기는 가운데 죽여 버리죠. 살았다고 여기는데.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은 후패한 썩은 내 속에 새로운 사람이 그리스도와 결부 되서 계속 살아나는데 그게 뭐냐, 질투심 품은 사랑입니다. “이제 다른 신은 없어. 다른 반석은 없는 거야. 다른 십자가 진 사람은 나 말고 없는 거야.” 이것이 새록새록 생각나시거든 주께서 젖 주는 시간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젖을 먹고 살아야 될 텐데 현찰 먹고 살고 있습니다. 더 쫓기고 계속 마귀에게 시달리고 언제까지 고된 생활해야 되겠습니까? 주여, 주의 품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주의 얼굴과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는 하나님이 친히 만든 백성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