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1801012b 빌레몬서1장(노예)-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작을 하겠습니다. 여기 보면 사도바울이 갇혀있다는 이야기를 해요. 갇혀있다는 말이 9절에 있거든요.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혀있다는 말은, A.D.60-61년 사이에 로마에 두 번이나 세 번, 하여튼 많이 갇혀있었어요. 갇혀있었을 때에 누굴 만났느냐면 거기서 오네시모를 만났는데, 그 오네시모가 감옥에 왜 들어왔는가 하면 주인한테서 도망을 쳤다 이 말이죠.
그러면 주인으로부터 도망을 치면 왜 안 되는가? 하는 겁니다. 왜 노예가 주인으로부터 도망을 치면 왜 안 되느냐? 라는 질문이 성립이 안 되는 시대에요. 그 시대는. 왜냐하면 노예는 본인의 주체가 없어요. 주체가 없다는 말은 뭐가 없다는 말이냐 하면 신체가 없어요. 일종의 가구죠. 가구. 신체는 있고 주체는 없어요. 신체는 일종의 가구거든요. 집 안에 있는 가재도구다 이 말이죠. 가재도구인데, 이렇게 좀 움직여요. 근육이 있고. 이 가재도구는 반드시 주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근데, 어떤 사람의 가재도구가 이렇게 도망을 쳤다 잡혔으면 다시 그 주인에게 돌려줘야 사회질서가 유지가 돼요. 만약에 종이 도망가는데 그걸 봐주는 법이 돼버리면 사회 전체의 모든 노예들은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노예들이 더 피해를 많이 보게 되어 있습니다. 없는 자들이. 뭔가 조금 모자라고 힘들더라도, 안정이 된다는 말은 각자 자기 자리가 딱딱 마련이 될 때 정서적으로 심리적으로 안정이 돼요. 애굽 나라에서 살던 히브리인들이 안정이 되니까 식구가 많이 늘어났어요. 안정이 되니까. 불안할 때는 자식도 유산이 되고 안 돼요. 안정이 되게 되면 자식도 순풍, 순풍 많이 낳잖아요.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그 애굽에서 나갈 생각을 안 했어요. 너무 힘드니까 법을 좀 완화해달라는 요청이지. 만약에 히브리인들한테 바로를 따를래? 아니면 모세를 따를래? 라고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그들은 당연히 바로를 따릅니다. 모세는 나가자는 이야기고 바로왕은 힘들지만 이 자리에 있으라는 이야기고. 그게 노예죠.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노예생활을 한 거예요. 안정된 노예가 낫지, 이건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고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는 것은, 이건 애굽보다 더 심한 노예가 될 가능성이 많아요. 땅이 없다는 것은 양식을 구할 수 없다는 말이고, 근데 애굽에서는 양식이 없으면 자기 신체를 팔아가지고 아무 주인이라도 찾아서 밥이라도 얻어먹을 수는 있다는 말이죠. 밥이라도.
남자들이 직장 힘들다고 나오게 되면, 미생이라는 드라마에 나왔어요. “직장생활은 전쟁이다. 하지만 직장 그만두고 밖에 나가면 지옥이다.”라고. 전쟁할래? 지옥갈래? 지옥보다 전쟁하는 게 낫다. 힘들더라도 버텨야지 그냥 직장 나오면 이거는 지옥생활이다. 이 말이거든요. 이게 히브리인들한테 딱 적용이 되는 거예요. 살아온 가락이 있잖아요. 살아온 노하우가 있고. 이미 애굽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고 있는데, 힘들고 싫겠지만 애굽 사람들이 죽지는 않을 만큼 해요. 노동력이 없어졌기 때문에. 옛날에는 기계가 노동한 것이 아니고, 옛날에는 사람의 힘이 기계를 대신했습니다. 피라미드를 만들 때도 그랬고요. 전부 다 사람의 힘이기 때문에 노예들이 그렇게 필요한 거예요. 엘리트들은 쉬고 노예들은 일을 하고.
그래서 그 자체로 질서가 정교한 하나의 기계처럼 잘 돌아가는 겁니다. 노예 하나 빠져버리면 전체가 안 돌아가요. 안 돌아갈 때는 전쟁을 해서라도 그 빈자리를 다른 나라에서 잡아와 메우는 일들을 왕들이 해야 되는 겁니다. 국가가 이런 사회질서를 갖추는데요. 리즌 reason, 이성이죠. 이것이 바로 이성체제가 되는 겁니다. 이성체제. 이성적인 것. 따져서 하는 것. 따라서 노예의 특징이 뭐냐, 따지지 말라.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면 해야 돼요. 창세기 39장에 보면 유명한 노예가 나옵니다. 이름이 요셉이죠. 종으로 팔렸잖아요. 요셉이 종으로 팔린 것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낮아진 것과 같은 겁니다.
종으로 팔렸는데, 요셉이 준수하니까 애굽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하죠. 유혹을 했을 때, 요셉이 보디발을 생각해서 거절했어요. 이 집의 모든 것은 다 허락받았지만 누구는 허락받지 않았다? 보디발의 아내만큼은 허락받지 않았다. 이렇게 되거든요. 허락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본인이 알아서 결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이거 이거는 네가 알아서 하라고 이미 지정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이 종의 모습이라든지, 신체는 있고 주체는 없는 이 모습이,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우리의 이야기라고 보면 돼요. 우리의 이야기. 우리가 지금 이런 입장에 있어요.
우리는 사탄의, 죄의 종이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낮추거나 겸손하거나, 안 그러면 자기 의를 포기하고 싶어도 욱하는 내 깊은 심정에서 자기주장과 자기 정당성을 놓치기 싫어해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쉽게 말해서 모든 인간은 누구를 대적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십자가를 배척하는 속성들을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모든 인간이.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그걸 다시 한 번 조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거 뭐 구라 아냐? 그럴 리 없어!”라는. 어떻게 인간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있어요? 인간이? 자기 정당성, 자기 의를 어떻게 하루아침에 그걸 왕창 다 버릴 수가 있어요? 뭐 인간은 자존심도 없는 거예요? 자기 의, 자기 자존심 전부 다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까?
예수님의 복음을 받는다는 말은 십자가 앞에서 나의 자리는 어느 자리다? 죄인의 자리거든요. 제가 말 틀리게 했습니까? 십자가에서 누구보고 피를 흘렸습니까? 잘난 사람보고 피를 흘렸습니까? 십자가와 연계되어 있는 자가 누구에요? 스스로 자기 죄를 못 벗어나는 사람이죠. 아닌가? 저는 이걸 맞는다고 보는데요. 스스로 자기 죄를 못 벗어나게 되면 그 사람은 갇혀 있죠. 죄에 갇혀 있는 죄인이 맞죠. 십자가 바라볼 때마다 “나는 착합니다. 내 주장이 옳습니다.”라는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죠. 어떤 손해가나도 아니요, 안 돼요, 라는 소리를 하면 돼요? 안 돼요? 그냥 예, 예, 하는 겁니다. 의의 종이 그런 겁니다. 의의 종이. 예, 예, 그렇게 할뿐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죄의 종은 사탄이 배후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뭐든지 다 시키면 해주겠지만, 아예 나의 의도 없고, 나의 정당성도 없다는 그 소리만큼은, 그 말만큼은 제발 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거예요. 제발 그 말만은. “너는 지금 죽어도 마땅해, 라는 그러한 부정적인 소리는 저한테 하지 마세요. 저한테 용기를 부여해주시고 위로해주세요. 외로워요. 위로받고 싶어요.” 이런 식이다 이 말이죠. 다 같은 인간이 다 이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다 같은 인간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특이한 인간이 등장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에 양쪽에, 사이드에 십자가 두 개가 또 있었어요. 그러면 십자가가 세 개에요. 십자가 달린 사람이 세 명이죠.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 라고 할 때 예수님은 기본적으로 의인이니까 구원받고, 그러면 나머지기 두 사람도 기본적으로 십자가 졌으니까, 예수님하고 십자가 졌으니까 구원받겠네요? “아니요”죠. “아니요”에요. 그러면 예수님은 의인이기 때문에 구원받고 나머지기는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 못 받는다? 그것도 “아니요”죠. 아니요.
그렇다면 이게 다 같은 죄인이고 강도인데, 예수님의 은혜를 입는다면 둘 자체를 가려내는 기준이 투입이 되어야 되겠죠. 그러면 그 기준은 어디서 나와야 돼요? 가운데 있는 십자가에서 나와야 되겠죠. 십자가는 뭐냐, 십자가는 외부에서 볼 때는 똑같은 인간인데, 똑같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둘 사이를 따로 분류되게 하는 능력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나를 구원하는 용도의 십자가가 아니라, 저쪽에서 나를 떼 내었음을 내가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십자가에요. 저 사람과 내가 다를 바가 없는데, 똑같은데, 하나님께서 이런 혜택을 전혀 줄 필요도 없어요.
이번 수련회 9강, 제일 마지막에 왁스의 ‘화장을 고치고’라는 노래가 나오죠. 이무 것도 해준 게 없고 받기만 했는데, 나 같은 여자를 왜 사랑하는지. 그 뒤에 가사는 안 하겠어요. 왜 떠나야 하는지 하게 되면 이게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에. 나 같은 여자를 왜 사랑하는지. 아무것도 한 게 없고, 그 다음에 뭡니까? 그 다음이 참 은혜롭죠. 뭡니까? 받기만 했죠. 명품가방에다가, 놀러가는 것에다가, 식사에다가... 뭐 받기만 했는데, 해준 게 없고 받기만 했는데, 그 다음에 나온 게 뭐냐 하면, “그래, 이 정도 예쁘니까 나한테 해줘야 된다.”라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왜 나에게 알아서 주인 노릇을 하십니까? 주여!” 이 말이에요. 나는 누구의 종인 게 지극히 지당하다는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그 가사가 참 특이해요. 보통은 스스로 일어서라, 네가 결심하라고 하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선택이란 언제나 둘 중의 하나라고 했잖아요. 그렇죠. “처음으로 돌아가겠어. 이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서울의 달이라는 드라마 주제곡이에요. 장철웅이 부른 노래가 있어요. 한석규 나오고 채시라 나오고 하는 드라마인데, ‘서울의 달’ 그 노래에요. “어울리는 사람끼리 끼리끼리 놀아라. 나는 이곳이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서 처음으로 돌아가겠다는 거예요. 처음으로. 선택을 하는데, 선택은 언제나 둘 중의 하나에요. 그런데 처음이 어딘데? 이 가사를 보면 자기가 종이 아니고 자기 미래는, 자기 운명은 본인이 결정할 수 있다고 계속 우기고 있는 거예요.
오늘 빌레몬의 이야기는 뭐냐 하면 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종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종은 누가 편드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이 사도바울이 누구 편을 드는가 하면 오네시모라는 종의 편을 들어버려요. 그럼 이 오네시모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다시 노예가 돼야 합니까? 이 빌레몬의 노예로 돌아가는 게, 처음으로 돌아가야겠어, 이게 해결책입니까? “오네시모 이리와. 왜 주인이 따로 있는데 도망쳤어? 예수 믿는다고 하니까 봐줄게. 집에가!”라고 이렇게 했습니까? 이 빌레몬의 내용이?
집에 가는 것이 아니고, 빌레몬의 허락을 맡고, 그 다음부터 다시 빌레몬에게 보내지 않고, 누구의 동역자로 삼겠다? 사도바울이 복음 전하는데 오네시모를 나와 같은 동등한 형제로 간주해서 내가 복음 전파에 사용하겠다. 이 내용이잖아요. 요즘 사람들은 이 내용을 보면 “뭐, 사람이 쓸 만하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잖아요. 근데 옛날 노예를 몰라서 그래요.
옛날 노예란 이성적체제입니다. 이성적 체제란, 따지고 판단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성에서 뭘 만들어내느냐 하면 지식을 만들어내요. 이 지식은 곧 뭐냐 하면 경제생산으로 이어집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뭐 경제생산을 한다고 해서 노동자들만 지식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생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를 지배하는 관리체계 전부 다 이성적 지식이 필요해요.
이 말이 약간 어렵기 때문에 쉽게 하겠습니다. 이번 수련회 때 첫째 강의 제목이 뭐였던가요? 패턴이죠. 자연세계는 전부 다 무작위죠. 무작위. 01010110, 제가 이렇게 했잖아요. 왜 이렇게 합니까? 1234566789 또는 13141516...뭐 이렇게 하지 왜 이렇게 합니까? 라고 하는데, 인간이 보기에 인간의 선택은 항상 이거 아니면 저거에요.
나는 히아신스를 좋아한다고 하면 그 선택하는 순간 뭡니까? 나는 히아신스라는 꽃을 좋아하는 사람인 동시에, 내가 히아신스를 좋아함으로서 히아신스를 싫어하는 사람을 의식하게 되어 있어요. 나는 빵을 좋아한다는 그 순간, 예를 들어서 선을 보는데 “우리 식사는 조금 있다가 하고 빵을 시킬까요?”라고 하는 순간, 여자 쪽에서 “저는 알레르기가 있어서 단 빵을 못 먹어요.”라고 하는 순간, 벌써 0과 1이 구분이 되어 버렸죠.
처음에는 아무 구분이 없던 것이 한쪽이 자기 의사를 나타냄으로써 저쪽과 구분이 되죠. 그럼 자기가 1이라면 저쪽은 0이 되고. 저쪽이 1이라면 당연이 나는 0이 되는 거예요. 인간은 자연적으로 무슨 체제를 만들어낼 때는 따지게 되어 있어요. 따지는데 누굴 위주로 따져요? 자기의 성질, 자기의 속성, 자기의 취향, 이런 입장으로 모든 것을 분류를 해나가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를 형성하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자기의 세계를.
자식이 친구를 데려오면 엄마는 몰래 분류체계에 들어갑니다. 저 친구를 계속 사귀라고 해야 될 친구인지, 사귀지 말아야 될 친구인지. 그러면 거기에 해당하는 게 이성적인 판단이 들어가죠. “그 애 너희 반에서 몇 등 하노?” “너그 아버지 뭐하시노?” “조폭인데요.” “놀지 마라” 시계 풀어 놓고, “이 자식이 지금 장난치나? 이게 친구가?” 모든 것은 이성적 판단입니다. “너그 아버지 뭐하시노?” “교도소에 있습니다.” “교도소?” “이게 어디 장난치나?” “우리 아버지 교도소 소장인데요.” “아이고, 알았다. 미안합니데이.”
‘슬기로운 감빵생활’이라는 드라마를 보게 되면 어떤 할머니가 촌에서 음식을 해가지고 바리바리 싸들고 그 새벽에 택시를 탔는데, 택시 운전사한테 우리 애가 잘 있는지 걱정을 하면서 이야기해요. 그래서 택시 운전사는 ‘감옥에 있는 자기 아들한테 면회 가는구나.’라고 이렇게 생각해서 택시 값을 안 받고 그냥 보냈어요. 나중에 보니까 교도소에 잡힌 자식을 면회 가는 게 아니라 교도소에서 근무하는 직원 면회를 간 거였어요. 택시 운전사가 깜빡 속았어요. 시험 쳐서 합격해 교도소 직원이 된 아들 면회를 간 거예요.
그래서 제가 수련회에서 했잖아요. 남 도와주지 말라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정보를 알고 하라 이 말이죠. 징징댄다고 다 도와주면 안 돼요. 징징댄다고 예, 하면 안 돼요. 안 될 때는 안 된다고 하란 말이죠. 사람이 왜 징징댑니까? 아까 했죠. 자기 정당성, 나는 징징댈만한 권리가 있다고 징징대고 있는 거예요. 인간에게 무슨 정당성이 있어요? 없는데.
자, 여기서 어렵습니다.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이 나와요. 왜 사도바울은 남의 물건에 개입합니까? 옛날의 종은 물건이었어요. 물건. 신체라는 물건덩어리만 있고 주체가 없는 거예요. 주인이 따로 있다 이 말이죠. 그 주인이 빌레몬인데, 왜 이 주인과 종 사이에 사도바울이 개입을 합니까?
사도라고 해서 너무 건방진 게 아니에요? 만약에 목사가 이사 가면서 목사라는 이름으로, 교인이 월급주고 데리고 있는 그 교인 직원을, 목사라고 자기 맘대로 우리 집 이사하는데 일 좀 해달라고 하면 되겠어요? 안 되죠. 월권이죠. 월권. 이사 자기가 하면 되지, 이삿짐센터 많이 있잖아요. 얼마 전에 천주교 신부가 이사하는데 도와준 거 있어요. 실제로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사도바울이 왜 개입하느냐, 문입니다. 무슨 문? 천국의 문이거든요. 물론 천국의 문은 예수님이죠. 이 예수님의 원칙을 누구한테 전합니까? 사도한테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전하잖아요. 지금 예수 믿고 난 뒤에 형제간에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친하게 지내느냐, 이게 문제가 아닙니다. 항상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 복음이 어느 지점에, 어느 장소에, 어느 순간에, 어디에 있더라도 그것은 천국의 문입니다. 문이라는 말은 열려있다는 의미보다도 현시국은 닫혀있다는 것에 더 우선이 되어야 해요. 닫혀있다.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복음은 문이에요. 그러면 교회는 문이다, 문이 아니다? 천국의 문이 아닌 거예요. 복음이 없는 교회는 천국의 문이 아니에요. 그냥 벽돌로 가두어졌지, 벽돌 채 다 지옥 갑니다. 왜 교회에 복음을 전해야 되는 이유가 뭐냐, 교회에 사람들이 건물 중심으로 모였다고 해서 그게 천국의 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길이 아니고, 진리가 아니고,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난 낮 설교에 제가 생명이야기를 하면서 두 개를 대비했어요. 자기 몸 챙기기 위해서, 자기 몸은 아까 이야기한대로 신체죠. 자기 신체 챙기기 위해서 꾸역꾸역 먹는 그 먹는 행위와, 이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행위와, 한쪽은 죽음을 먹고 한쪽은 더 살고 싶어서 음식 처먹고. 주님보시기에 어느 쪽이 복음 쪽이에요? 죽음을 먹는 거예요. 죽음을. 살과 피 죽음이라는 것을 먹는다고요.
그래서 교인들이, 성도도 마찬가지지만, 제가 보기에 가장 답답한 것은 본인들이 알고 있는 복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몰라요. 본인들이 시시하게 간주해요. 시시하게. 복음이야기를 했는데 그걸 자기 자존심과 관련시켜서 처리해버려요. 그 진정성과 취지를 못 알아들어요. 복음과 관련해서 제안을 했는데, NO! 라고 단칼에 거절해버려요. 복음인데.
자, 정리해봅시다. 복음이란 뭐다? 십자가. 십자가만 복음입니까? 아까 강도이야기 했죠. 강도를 이 사람과 저 사람으로, 둘로 분류했잖아요. 그럼 복음을 전했을 때, 한쪽은 뭐냐 하면 우선 나부터 풀어주라고 나오고, 한쪽은 나는 죄인이라고 나왔죠. 그러면 십자가 복음은 상대의 짝이 있어야 해요.
뭐냐 하면 피를 흘리신 분과 자기 죄를 아는 거예요. 아까 인간은 돌아간다고 했는데 어디로 돌아간다고 했습니까? 늘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쪽으로 돌아가 있어야 해요. 죄인의 자리로 후딱 가야 돼요. 그 자리가 본인의 자리에요. 그 죄인의 자리에 가게 되면, 죄인의 자리가 자기의 자리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요청하면 안 돼요.
그 자체가 글러먹었어요. 죄인이면 벌을 받아야지 왜 구원을 해달라고 해요. 그래서 죄인의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으면 건져갈 자는 건져가고 내버려두면 그건 지옥가고. 뭐 그런 거지 뭐예요. 그런 거예요. “우리에게 문을 달라!”라고 요청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냥 문이 와서 “내가 문이다.”라고 알려주면 열린 문으로 천국에 가고, 그게 없으면 가둬져 있고 닫혀있는 거예요.
제가 얼마 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인간은 수용소에 갇혀있으면서도 수용소에 갇혀있는 줄 모른다고 했어요. 수용소에는 갇혀있는데, 수용소 자체를 느끼지를 못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안이 너무 살기 좋으니까. 이게 이성의 체제에요. 이성의 체제에서는 질서를 갖게 되어 있고, 여기서 질서를 갖는데 질서를 가지는 그 위치는 이성의 체제에서 생산된 지식이 많은 쪽이 갑이 되고 주인이 되고, 지식이 없는 쪽은 을이 되고 종이 되는 관계에요. 이 관계가.
이 전체를 옛날에는 국가가 대표적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지금은 미시권력이라고 해서 병원, 학교, 군대, 공장, 감옥, 교회, 그리고 가정, 공장을 기업으로 봅시다. 그러면 요새 농사도 기업이니까. 고기 잡는 것도 기업화됐으니까. 병원, 학교, 군대, 공장, 감옥, 교회, 가정. 여기에 빠진 게 없어요. 예술계까지 전부 다 들어있는 거예요. 이걸 하나로 누가 묶는가 하면 국가가 전체를 묶는 것이 아니에요. 자본주의라는 경제원리가 하나로 묶어요.
왜냐하면 자본주의라고 하는 이것은 이성적 체제거든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물건을 사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고, 돈을 벌기 위해서, 돈이 돈을 벌기 위해서 물건을 사는 겁니다. 돈부터 모아놓고, 처음에는 뭘 사기 위해서 돈을 구했지만 이제는 돈부터 모아놓고 뭘 살 것을 결정하는 거예요. 근데 그걸 사더라도 그냥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자본이 재생산되는 쪽으로 물건을 구입해요. 차를 구입한다든지, 아파트를 구입한다든지 할 때, 이것을 나중에 팔면 얼마나 이윤이 남을 것인가를 계산하는 거예요. 빌라보다는 아파트. 왜? 나중에 팔 때 살 수요층이 많으니까.
이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쓰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고, 돈을 모으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근데 돈을 모아서 뭐 할 거냐? 돈 모아서 돈 모으기 위해서 돈 모으죠. 그럼 돈 모아서 돈을 왜 모으나? 또 돈 모으기 위해서. 왜냐하면 돈을 모아 놓아야 선택권이 넓어지니까요. 저 사람을 부릴지 말지 내가 결정하고, 저걸 살지 말지 내가 결정하니까. 근데 돈이 없어버리면 구매권이 없잖아요. 옛날에는 구매 결정을 누가 했느냐 하면 왕이 했어요. 왕은 모든 것에 약탈권을 갖고 있어요. 약탈권. 그냥 일방적으로 가져오라고 하는 수용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왕입니다.
지금은 이걸 누가 하느냐 하면 자본가들이 해요. 돈이 있는 사람이 물건을 가지고 와서 사고팔고 해요. 자본가가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돈의 노예가 된 상태에요. 잘 사는 사람이나 못 사는 사람이나 모든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된 상태입니다. 죄의 종이죠. 사탄의 종이에요. 돈을 왜 모으는가, 돈이 있을 때 비로소 사회에 나가서 내가 여기에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사회는 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돈, 그것을 신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갖고 있는 그 돈을, 신용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신용을 많이 확보한 사람이 자본가고, 신용이 없는 사람은 바로 빈털터리에요.
그러면 이건 뭐냐, 옛날에는 신체를 위해서 돈이 필요했는데, 이제는 돈의 신체가 돼요. 돈을 표현하는 신체. 이 신체덩어리가 얼마짜리 돈인지, 돈으로 표현하는 그런 신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녀가 선을 본다. 두 돈 덩어리가 만나는 거예요. 돈 덩어리가. 정상이 아니죠. 이건 미친 거예요. 그래도 교회가 있잖아요? 교회도 돈이 없으면 안 된다니까요. 돈이 없으면. 교회라는 기업자체도 돈이 없으면 안 돼요. 돈을 모으려면 손님 모아야 되고. 손님 모으기 위해서 고객이 왕이라고 해야 되고. 사람을 기쁘게 해야 돼요.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사람을 좋게 하면 주의 종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굶어죽는다는 소리에요.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으면 교회가 안 된다니까요. 교회이름부터가 사람을 기쁘게 해야 돼요. 행복나눔교회. 축복교회. 행복의 나라. ‘행복의 나라로’라는 노래가 있잖아요. 창문을 열어라~♬ 하여튼 교회 이름도 너무 긍정적인 이름들을 많이 해요. 긍정적인 이름을. 죽자 교회 봤습니까? 피 교회 없어요. 제가 알기로는 피 교회라는 이름은 없어요. 저거 정육점인가? 이러니까. 행복나눔교회라고 해놓고 밑에 표어도 해놓죠. 표어도 뭔가 희망적으로 해놓아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뭐 이런 거.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고 저주입니다. 이 엉터리 같은 죄의 몸을 죽여 버리는 거예요. 죽이시는 주님이십니다. 죽여주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잖아요. 그 십자가에 같이 달려야 해요. 혼자 십자가에 달리면 안 돼요. 우리를 죄인으로 달리도록 주께서, 성령께서 이끄십니다.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실 때, 그 옛사람에게서 쏟아지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이러한 것들을 따지는 것, 이성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탄의 종의 특징이 뭐냐, 나는 종이 아니다. 나는 자유자다. 나는 모든 결정을 내가 할 권한이 있다. 그래서 천하의 인권운동이 사탄의 종이에요. 그러나 정작 주님의 종은 뭡니까? 나는 주님의 종이다. 복음의 종이다. 복음이 나를 낳았다.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빌레몬서 1장 10절에 나오죠.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니”라고 이렇게 되어 있죠. 오네시모가 재벌입니까? 이 사람에게서 어디 얻을만한, 챙길만한 내용이 있어요? 십일조 꼬박꼬박 할 사람 같아요? 아니죠.
그냥 복음의 종이잖아요. 복음의 종.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말은, 천하보다 귀한 것을 갖게 된 사람, 얻게 된 사람을 말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것.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교인이나 성도 자체가, 자기가 얼마나 귀한 줄을 몰라요.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는 모든 것이 예가 되고 아니라는 말은 있었다고 했습니까? 없었다고 했습니까? “아니요”가 없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아니요”가 없죠.
“아니요”가 없다는 말은 안 돼요, 라는 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복음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안 돼!”라는 말을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누구한테 꿇릴 필요도 없이, 확신 가운데서 안 돼요, 라고 말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너희의 종이 아니다. 나는 주님의 종이니라.” 그럴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성질 더럽다고 하지 말고, 박수를 치면서 반가워해야 해요. “세상에! 주님이 살아계시는구나.” 안 돼, 라고 하면 당하는 불이익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오케이 하는데 안 된다고 한 사람이 있죠. 400대 1로 붙은 사람이 있습니다. 미가야 선지자.
아합하고 여호사밧하고 아람나라하고 전쟁할 때(왕상22장), 미가야 선지자가 나서서 과감하게 “안돼요!”라고 했어요. 자, 미가야 선지자가 과감하게 나서서 “안돼요!”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뭡니까? 다른 사람은 수평적인 것을 봤죠. 수평적인 세상, 같은 인간들을 본 거예요. 인간들의 안정적이고 밥 먹여 살리는 그러한 이성적 질서체제를 본 겁니다.
다시 한 번 봅시다. 이성적 질서체계는 지식을 생산하죠. 그러면 지식의 양으로 하게 되면, 지식이 높은 사람은 지도자 위치에 있고, 지식이 낮은 사람은 이건 어쩔 수 없이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를 설명할게요. 지식의 체제가 피라미드(△)형식이거든요. 맨 위쪽에서는 많은 지식이 요구가 돼요. 만약에 종을 이 자리에 집어넣게 되면 이게 돌아갑니까? 안 돌아갑니다. 이 자리는 많은 지식이 필요한 자리에요.
일반직원들이 한 보고서를 대리가 받고, 대리가 과장한테, 과장이 차장, 차장이 부장, 부장이 사장, 사장이 회장이나 임원들한테 하죠. 그러면 맨 위에 있는 사람들은 노는 사람들처럼 보이죠. 이 사람은 세 명의 부장이 갖고 있는 것 그것을 검토를 하는데, 그럼 세 명의 부장이라고 하는 것은 세 명의 부장의 개인적인 사견입니까? 아니죠. 세 명의 각 부장은 세 명의 차장이 갖고 있는 것을 부장이 관리했잖아요. 그럼 세 명의 차장은 자기 의견이 아니에요. 세 명의 과장이 갖고 있는 것을 가지고 하잖아요. 그럼 과장은 자기 의견입니까? 아니죠. 세 명의 대리, 이 대리는 세 명, 다섯 명, 열 명의 직원들이 갖고 있는 것이죠. 이 모든 것을 맨 위에서 총괄하고 결정한다는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전체를 다 봐야 되는 거예요. 패턴이 단수한 것이 아니고, 패턴이 복잡한 거예요. 복잡하기에 전체를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맞는 규칙을 세우는데 그게 무슨 체계냐 하면 법체계에요. 법체계. 이성체계는 뭐로 나간다? 결국 이성체계의 표면은 법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이 법을 아주 정교하게 만든 쪽이 뭐냐 유대교 아닙니까? 예수님이 누구한테 죽었습니까? 유대교한테 죽었잖아요. 유대교는 주장하기를 율법해석 자체를 하늘의 문이라고 주장한 겁니다. 하늘의 문.
제가 하늘의 문이라고 주장했다고 했는데, 주장했다는 말을 빼고, 만약에 우리가 랍비라면,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면 이건 주장이 아니고 진리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이유가 유대교는 전통적인 조직이에요. 그 시대에 자기들이 단순하게 결정해서 법을 만든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 때부터 내려오고 누적되어 있는 신학 체제가 있어요. 말씀에 대한 주석들이 있어요. 그 주석들을 어릴 때부터 달달 외우게 합니다.
이거는 현재에 있는 인간들의 지혜뿐만이 아니고, 자기의 선배들, 고매한 신앙인, 순수한 신앙인이라는 것을 자랑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했어요. 그 해석으로 신앙이 월등히 높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에, 그 해석도 진리에 근접했다고 우리가 이성적으로 판단이 가능하거든요. 하나님 보시기에 아, 정말 진리에 가깝구나, 하는 지식들을 모아 모아서, 집대성해서 거기다가 현시대를 맞췄기 때문에 선배들이 미처 몰랐던 새로운 사태에 대해 거기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과 규칙들이 추가가 되겠죠.
그래서 제가 주일날에 설교하면서 한국교회의 모든 이론은 유대교라고 했어요. 신학이 유대교입니다. 유대교의 특징을 뭐라고 했던가요? “기적으로 구원받고 그 기적의 은혜에 감사한 사람이 말씀 지켜서 영광 돌린다.” 이게 유대교의 논리가 아닙니까? 이게 유대교의 논리에요. 유대교는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성전 자체를 기적으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전을 지켜줄 것이다. 스가랴의 예언에 의하면 감람산에 메시야가 와서 두 발을 딛고 설 것입니다. 그걸 하기 위해서, 오실 때 원활하게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말씀에 충실해서, 말씀에 충실하려면 뭐가 생산이 되어야 하느냐 하면, 말씀이 지식이잖아요. 이 지식을 누적시키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거룩이 되고 이게 경건이 된다는 겁니다. 말씀덩어리니까.
어떻습니까? 방금 이야기한 이것이 하늘의 문입니까? 자,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여러분이 한 번 이야기해보세요. 이 유대교사상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지적했거든요. 예수님은 그들의 배후를 지적합니다. “너희들은 악마의 자식이다. 너희 애비는 악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악마의 종이다.” 그들의 이성 자체가 결국은 뭘 변호하느냐 하면, 오실 메시야와 정반대가 되는 논리를 지금 유포시키고 있는 거예요.
자, 강의를 잘 들었는지 한 번 확인해보겠습니다. 자, 인간의 타고난 논리가 뭡니까? 뭘 항상 상상한다? 자기 결정에 대해서 정당성과 자기 의로움을 항상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굉장히 자유롭게 보이죠. 내가 결정했으니까. 근데 배후에, 자기 정당성과 자기 의로움을 추구한다는 것은 배후에 누가 있다? 마귀가 그렇게 한 거예요.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자기는 정당하죠. 그러나 배후에 누가 있었습니까? 사탄이 가인을 시켜서 죽여 버린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아니요, 라고 누가 누구보고 이야기를 해야 돼요? 남보고 이야기할 게 아니고 매일같이 누가 누굴 보고 이야기해야 돼요? 내가 나보고 너는 아니야! 라고 해야 돼요. 너는 아니야!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이 계속 만들어지고 솟아오르거든요. 뭔가 알게 되면 그것이 천국에 보탬이 되는 줄로 알고 있어요. 천국의 문은요, 우리가 지식을 보탠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만 열리게 되어 있어요. 그걸 아셔야 돼요. 예수님의 피가 중요하지, 피 더하기 우리의 행함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 들어가든 우리는 죄인이라는 그 고백이 더욱 우리에게 표면적으로 피의 효과로서 나타나야 되는 겁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망가지는 거예요. 내가 빌레몬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고 오네시모의 편에 선다는 말은, 사도이면서도 그 당시에 가장 천한 종의 편을 들어버린 거예요.
이건 사도바울이 문인데 망가져 보이는 문이 된 거예요. 그렇다면 빌레몬이 사도바울의 말에 동의하려면 주인 입장에서 종을 포기해야 될, 그 시대에서 이성자체를 포기하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해야 돼요. 자기도 같이 망가져야 해요. 따라서 사도바울은 빌레몬 복음 내에서 오네시모도 망가지고, 이건 자칫하면 잡혀 죽어요.
지금 사도바울이니까 보호해주지 다른 사람한테 걸렸으면 죽어요. 경찰한테 걸렸으면 죽는다고요. 오네시모도 망가졌고, 몰락이죠. 몰락. 사도바울도 몰락. 사도바울 배후에서 해주셨던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몰락. 빌레몬도 몰락. 이 말을 달리하면, “나는 나라고 할 게 따로 있으면 안 돼.”라고 나를 지적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나를 나에서 떼 내어야 해요.
이번 수련회에서 마지막에 히스기야 이야기를 했죠. 하늘의 징조가 있는데, 이미 물 건너갔는데, 자기가 왕으로서 더 살겠다고 이야기한 것은 왕 노릇 더하겠다는 거예요. 이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넘겨주지 않고 자기가 왕 노릇해서 자기 힘으로 한 번 버텨보겠다는 거예요. 그 히스기야 시대가 이사야 선지자 때 시대거든요. 주님께서 “히스기야 힘내라! 힘!” 이랬습니까? 아니죠. 이미 노선이 어디로 갔습니까? 히스기야 노선이 아니고 이사야를 통해서 나온 미지의 노선,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는 그쪽 노선으로 갔잖아요.
그렇다면 선지자가 제시한 그 노선에 비해서 히스기야가 버티려고 하는 그 노선은 하자를 드러내야 하죠. 그 하자가 살려달라고 기도해서 15년 더 산거예요. 제가 이번 강의하면서 했죠. 왕들의 특징이 뭐냐, 살려주세요! 선지자의 특징은 죽으면 죽으리라! 어느 쪽이 하늘의 징조입니까? 오실 메시야의 모습이 어느 쪽입니까? 예수님이 살려달라고 빌었어요? 어떻게 했어요? 내 영혼을 거두어달라고 했죠. 자기 영혼을. 죽어야 된다는 사실, 이 쓴잔을 마셔야 된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우리 자신들은 워낙 나의 정당성, 나의 결정은 옳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남들로부터 수모를 당해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우리는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기 때문에. 지금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생각해보세요. “야, 저리 안 가나! 웃어?”라고 화 낼 잽이 못되죠. 우리는 주님만 쳐다봐야 하는데, “개들 좀 치워라!”라고 하면서 십자가에 달려서도 화내고 있고. 아마 지옥 간 십자가에 달린 한편 강도는 그렇게 했을 거예요. “사진 찍지 마! 사진 찍지 마!”
이쪽은 찍든 말든, 개가 짖든 말든, 애들이 놀리든 말든, “너는 이 세계를 몰라. 주여, 저를 용서해주세요.” 나를 생각해달라는 이야기가 용서해달라는 이야기에요. 주님 용서해달라고 할 때, 용서해달라는 말은 강도 자신이 이성적으로 한 게 아니고 이미 믿음이 왔기 때문에, 주님께서 일부러 십자가가 어떤 효과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한 강도에게 이미 믿음이라는 것을 줬어요. 줬기 때문에 이런 고백이 나온 거예요. “네가 오늘밤에 낙원에 나와 함께 있으리라”
낙원에 가면 된 거 아닙니까? 어떤 분의 따님이 공무원 시험 봐서 합격됐는데, 공무원 합격된 것도 좋아요. 뭘 했는지 모르겠어요. 공무원 시험 합격은 에듀윌, 공인중개사 합격도 에듀윌, 서경석이 찍은 광고가 있는데, 그거 해서 합격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더 소중한 것이 있잖아요. 온 천하를 얻고도, 합격하고도 네 목숨 잃으면 그 합격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무슨 소용이 있어요? 남한테 내 정당성에 대해 예스, 라는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즐거움을 생각하지 말고, 아니요, 라는 소리를 들음으로써 내가 남한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도 욕심이라는 생각을 한번쯤 해봐야 합니다.
지금 사도는 망가졌어요. 그 당시 같으면 이 사도는, 안 그래도 체포당했지만, 체포에다 또 체포당해야 할 감이에요. 그러나 사도는 문입니다. 천국의 문입니다. 복음을 갖고 있어요. 그렇다면 사도만 갖고 있습니까? 우리도 갖고 있어요. 거침없이 이 세상의 모든 법과 정당성에 대해서 우리는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천국의 문이지, 내가 행동을 반듯하게 하고 있는가, 내가 이렇게 YES, NO, 예, 아니요, 라고 함으로서 남이 나를 어떻게 봐줄 것인가, 이건 전혀 고려대상이 아닙니다.
지금 주께서 나로 하여금 예! 할 것은 예! 하게 할 것이냐, 아니요! 라고 할 것은 아니요! 라고 하게 할 것이냐, 그 관계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몰랐는데, 사도바울의 편지를 통해서 보니 이 세상이 사탄의 종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탄 말 들으면서 평생을 살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사탄의 눈치나 살펴서 훌륭한 소리 들으려고, 출세했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살지 않게 하옵시고, 주의 복음의 문, 천국의 문을 증거 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