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171208a 디도서3장9절(자기 증명)-이 근호 목사
디도서 3장 9절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이 디도서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도바울이 편지를 할 때에 그들로 하여금 그레데 교회를 믿게 하기 위함이겠어요? 아니면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겁니까? 이 편지를 보낸 목적이 교회가 있으니까 교회 믿으라고 하는 거예요?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는 겁니까? 교회 믿어서 구원받는 거예요?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그리스도죠.
그런데 이 사도바울이 편지를 할 때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는 이 지상에 계시지 않죠. 예수님 당시에는 열 두 제자가 주변에 포진되어 있었는데, 예수님과 더불어서 함께 활동을 했죠. 그때에 사람들이 “제자들이 활동하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활동하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반드시 예수님을 언급 했겠죠.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저렇게 활동한다고.
그러면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제자들이 중요한 게 아니고, 누가 중요하냐면 예수님이 중요한 거예요. 그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에요. 그렇다면 그 제자들이 옆에 있는 이유는 뭐냐, 제자 본인들도 알아요. 자기들이 중요한 게 아니고 예수님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신들은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다. 다윗의 자손이다. 우리의 구세주다. 세례요한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세례요한이 이 세상을 심판주로, 심판이 왔다는 것을 언급할 때는 이 세상이 심판받아 합당하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죠. 이 세상이. 이 세상이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그 사실에 대해서 세례요한은 그 기준을 잘 몰랐어요. 그냥 세례요한이 아는 수준 내에 알곡은 거둬서 창고에 들어가고 쭉정이는 불에 태운다. 이렇게 했는데, 무엇이 알곡이 되는 기준이고 무엇이 가라지가 되는 기준인지, 그 기준에 대해서는 세례요한도 뚜렷하게 이야기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예수님이 하실 일이 많기 때문에.
세례요한 같은 경우에는 그냥 상식선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자기의 기준을 정한 데에 있어서 “심판 날이 가까이 왔으니까 여러분이 각자 생각하는 그 상식선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심판주의 처분을 기다립시다.”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세례요한이 깜짝 놀랐어요.
심판받아야 될 사람들을 물에서 세례를 주는데 거기에 예수님이 합류가 된 거예요. 합류가 되니까, 자기 기준선에서는 이거는 생기지 말아야 될 일이 생기게 된 겁니다. “예수님이 죄인이 되다니!” 그 물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죄인들만 들어가는 자리인데, 예수님이 죄인이 된다고 한다면 세례요한의 입장에서는 도리어 예수님에게 물을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은 이럴 필요가 없는데 왜 이렇게 하십니까?”
세례요한이 제시하는 것은 예수님을 심판주로 보는 거죠. 심판주. 심판주를 선도해서 가져오는 거고요. 그럼 심판주 앞에서 세례요한이 제시하는 것은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 회개. 세례요한이 회개하라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죄가 있다. 이걸 물세례를 통해서 정화하자. 지금 이 정도까지는 아는 겁니다. 그럼 물세례로 정화 받으면 심판주 앞에서는 죄가 없어지니까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께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스케줄을 세례요한은 생각을 했는데, 놀라운 것은 이 물세례에 누가 관여를 했습니까? 예수님이 여기에 들어와 버린 거예요. 들어와 버리니까 세례요한이 생각했던 그 심판의 기준에 대해서 모순이 생긴 겁니다. 난감한 거예요. 왜냐하면 회개할 필요도 없는 예수님이 들어왔으니까.
회개해서 심판에서 면제를 받으라고 했으면 예수님은 안 들어오고 그냥 심판주 자리에 앉아있고 인간들이 회개해야 하고, 이렇게 돼야 모든 것이 제대로, 정상적으로 이 구원스케줄이 가동된다고 생각하는데, 심판주가 죄인 속에 합류를 해버리면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 심판에서 구원이 되려면, 천국가려면 무슨 내용이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은 심판주께서 죄인 되어야 했다는 내용이 제대로 납득이 되면서, 이것까지 심판의 기준으로 들어가 있어야 되는 것을 세례요한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부담으로 느끼는 겁니다.
시험을 치는데, 25페이지까지만 시험을 친다고 했는데 25페이지가 아니고 마지막 교과서 끝까지에서 시험문제를 낸다고 하면, 25페이지까지만 나온다고 했던 반장의 전달사항은 반장 자신에게 부담을 느끼게 하는 거예요. 50페이지에서 문제가 나온다고 하면 자기는 거짓말을 한 셈이 되니까.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물은 겁니다. “오실 분이 당신 맞습니까? 내가 아는 기준하고는 이거는 전혀 맞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이 됐다는 말은, 이 말은 세례요한 측에서 제시하는 그 어떤 기준도 결국은 구원이 될 수 있는 기준은 안 된다는 겁니다. 미흡하다는 거죠. 제일 중요한 것이 빠졌다는 겁니다. 어떤 기준을 받아들여야 구원받느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죄인 됐대.”라는 그 기준까지 받아들인 자만 구원이 됩니다. 예수님이 죄인 되었다는 것.
그러면 예수님이 죄인 되었다는 그 기준을 받아들이려면 무엇까지 알아야 하느냐 하면, 왜 심판주가 심판받는 자리에까지 합류를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되죠.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죄인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면 그 내력을 알아야 하죠. 그 내력을. 그냥 죄인 되었다고 문장 외우면 구원받는 겁니까? 그건 아니잖아요. 진정성 있게 그 내용이 자기 안에 자리 잡아야 되지 않습니까? 자리 잡아야 되죠.
예수님이 심판주인데, 심판주라고 하는 것은 엄해야 되고, 단호해야 되고, 흠도 티도 없는 완벽한,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에요. 그래서 심판할 수 있잖아요. 죄도 없고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인데, 왜 죄 속에 자기자리를 잡느냐 이 말이죠. 왜 죄 속을 자신의 자리라고 잡아버리느냐 이 말이죠. 그 취지에 대해서 모른다는 말은 곧 예수님에 대해서, 구원의 스케줄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 되는 겁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건 당연히 그 당시 유대사회가 갖고 있는 잘못된 선입감을 뒤집어놓는 겁니다. 모래시계의 한쪽이 다 됐으면 밑을 위로 뒤집어놓는 거죠. 그래서 제가 제시하는 것은 모래시계처럼 밑을 위로 뒤집어놓는 것도 되지만,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겉은 속으로, 속은 겉으로 이렇게 바꾸어주는 겁니다. 속옷을 겉에 입은 사람이 누구죠? 슈퍼맨이죠. 슈퍼맨처럼 되는 거예요. 슈퍼맨처럼.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받느냐 하면 소경과 절름발이 병든 자가 구원을 받죠.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속사정이 바깥에 드러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이 예수님 보기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잖아요. 죄인이잖아요. 죄인 같으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죄인의 표시를 보여주겠습니까? 아니면 소경된 자, 절름발이, 병든 자가 죄인의 표시를 보여주겠습니까? 어느 쪽이겠습니까? 병든 자, 가난한 자, 소경된 자, 이런 자들이 소위 죄인이기에 받는 징벌을 지금 한껏 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겠죠.
바로 그들과 같이 하시는 주님, 그들을 깨끗케 하시는 주님의 취지가 무엇과 일관성이 있느냐 하면 죄인들, 자기가 죄를 알고, 나는 이런 죄를 가지고 있으니까 주여, 이런 죄를 메시야로서 용서해주셔서 그 용서받은 그 상태로 구원해달라고 하면서 요단강 속에 빠진 사람, 물속에 들어간 사람, 그 들어간 사람과 예수님이 합류한 취지와 같은 취지라 이 말이죠. 같은 취지.
그러니까 예수님은 죄인 속에 들어오고 싶은 거예요. 예수님이 죄인 속에 들어온다는 말은 죄인이 새삼스럽게 자기 구원을 위해서 할 게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죠. 없다 이 말입니다. 어느 집에서 피자가게에 피자를 배달시키는데, 승윤301호에 피자 열판, 꿈같은 이야기지만 피자 열판을 배달해달라고 했다 이 말이죠.
가게 주인이 신나게 피자 열판을 가지고 자전거를 타든지 오토바이를 타든지 해서 열판을 가지고 출발을 하려고 하는데, 이 추운 날 피자집까지 전화를 했던 사람이 가가지고 자기한테 달라고 하면 좀 이상하겠죠. 그럼 가게 주인이 “추운 날에 왜 왔는데요? 우리가 알아서 가는데...”라고 하겠죠. “손수 이렇게 오면 좀 깎아줄까 싶어서 왔습니다.”라고 하면 말이 안 되죠. 깎는 것 없이 그냥 제 값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쪽에서 하나님에게 나아간다고 해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죄 있는 자리에서 우리 죄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거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소경된 자, 절름발이, 병든 자를 낫게 하신다는 그 말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지금껏 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준 것은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하시는 거예요. 죄를 더욱 죄 되게.
그럼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봅시다. 같은 범죄를 해도 어떤 사람은 소경되었다, 또 어떤 사람은 눈 벌겋게 뜨고 신나게 당구치고 있고 놀고 있고 골프치고 있다, 그러면 어느 쪽이 더 유리하겠습니까? 그렇게 죄를 지었는데도 불구하고 멀쩡하게 살게 되면 사람들이 그렇게 된 본인이 ‘아이고 나는 죄인이야.’라고 이렇게 하겠어요? 아니면 ‘하나님 보시기에 역시 나는 건강하게 살만한 충분한 자격과 권리가 있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겠어요? 후자를 생각하겠죠. 왜? 나는 아무 탈이 없으니까.
무슨 일을 해도 안 되고, 밥도 못 먹고, 빌빌 거리면, 이거는 분명히 전생에 무슨 죄가 있다든지, 남은 모르고 하나님만 아시는 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징벌을 받는 것이라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벌 받는다는 것은 그 원인이 오직 죄가 있을 경우에만, 신에게 나쁜 짓을 했을 경우에만 벌이 있고. 그 벌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인간이 힘들게 사는 것만 벌이라고 보잖아요.
근데 어떤 사람은 아주 여유만만하고 집도 몇 채 있고 현찰도 많고 죽을 때까지 다 못 쓰고 애도 공부도 잘하고 가족들끼리 하하 호호 웃고, 늘 이렇게 평화롭고 아주 인자하고 인격 있게 산다. 근데 그 집안을 보고 “이 집안 아주 죄도 많이 지었어. 이거 봐. 이번에 애가 사법고시 수석 된 거 봐.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으면. 아이고, 이 집이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으면 작년 순수익이 26억이었다던가? 아이고, 참 죄 많이 지었구나.”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렇게 생각하겠어요? 생각 못하죠. 생각 못한다 이 말이죠.
그럼 누가 불리 하느냐 하면 슈퍼맨 아닌 사람들이 불리한 거예요. 계속 자기 속에 죄를 자기가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평안한 그것을 가지고 꾹꾹 누르는 겁니다. 무슨 시루떡처럼. 찐빵이라고 하면 찐빵 안에 팥은 쪼끔 들어있고 밀가루 층이 10센티, 앙꼬 층은 0.2센티, 이렇게 되게 되면 그게 찐빵입니까? 밀가루덩어리죠.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의 덩어리에요. 의 덩어리.
물론 완벽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어요. 참 인간 부족하지, 특히 교회가면 부족한 사람들이 왜 그리 많은지. “부족합니다. 할렐루야!” 왜 그리 많은지 몰라. 그러나 자체적으로 반성하는 기재, 메커니즘이 가동된다는 말은 죄 지어봐야 반성이 곧장 따라붙기 때문에, 죄 지은 것도 자체적인 반성 때문에 이미 반성한 걸로 되어서 이게 죄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 의로움으로 계속 누적이 되겠죠. 자체적으로 처리하는 거예요. 자체적으로. 자체적으로 처리가 되는 거예요.
아무리 죄를 지어도 자체적으로 죄가 의롭게 되는 그런 장치가 자기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러면 생각날 때마다 반성하면 되니까. 그 일을 잘 했던 자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입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거에요.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과 제자들과 함께 있었던 그때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있어서 어느 누구도 예수님모임, 예수님집단이라고 생각했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지금 여기 디도서는 예수님이 하늘나라에 가시고 디도서에 나오는 그레데교인들이 있잖아요. 거기에 사도들이 이 편지를 보내잖아요. 그럴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이 함께 있었을 때의 그 예수님의 취지나 뜻이, 이렇게 예수님이 떠나고 난 뒤에 아무 하자가 없이 누수가 되지 않고, 복음의 내용이, 진리의 내용이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고 어떻게 보장을 할 수가 있느냐, 라는 취지로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 그 제자들이 뭘 알겠느냐는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고 싶지 어떤 그레데교회를 믿고 싶지는 않잖아요. 계속해서 예수님 믿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하고 함께 있을 때, 예수님이 평소에 사람들과 싸웠던 그 대목들이 있잖아요. 싸웠던 대목.
그 싸웠던 대목들 중 제가 일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죄를 바깥에 드러내는 그런 작업을 주님께서는 계속하시는 거죠. 그 근거를 뭐라고 했느냐 하면 제가 예수님이 세례요한이 물세례를 주는, 죄인들의 죄를 씻으라고 있는, 죄인들 정화하라고 있는 그 물에 예수님이 풍덩 뛰어들었다는 사실. 예수님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심판을 하시는 분이 아니고, “피고들 이리와! 내가 재판한다.” 이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심판하시는 분이 죄인이 되신 거예요.
심판하시는 분이 죄인이 되니까, 죄인을 심판하려면 누구도 같이 덤으로 심판을 해야 됩니까? 예수님도 같은 죄인이니까, 예수님을 죄인으로, 같은 기준으로 같이 심판을 해줘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구원자를 누구 손에 죽인다? 사람 손에 의해서 죽여 버리면 결국 구원자를 죽였다는 말은, 오실 메시야를 죽였다는 말은 더 이상 구원자를 통해서 구원되는 그 마지막 기회마저 휑하니 날라 가버리는 거죠.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가 되고”(히6장4절). 그리고 계속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나오잖아요. 이미 주신 그 피라는 것을 외면한 자는 더는 더 기회가 없다는 거예요. 더는 기회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 피를 줬다는 것은 결정적 기준을 준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의 결정적 기준을 준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 속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인간들을 바라볼 때에 니 속에 의인 몇 퍼센트 있고 죄인 몇 퍼센트 있고를 묻는 것이 아니고, 몇 퍼센트를 일체 따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백퍼센트 니는 죄인이야!” 그걸 선언하시는 취지에서 주께서 죄인 되셨잖아요. 주님께서 물세례에 뛰어들지 않으면, “보자~보자~ 착한 사람 있는가 보자~ 내가 심판 할게.” 이래 될 텐데. 만약에 착한 사람이 아무도 없고, 천국 갈 사람은 있어야 되겠고, 그럼 방법은 뭐에요?
심판주가 구원받을 사람을 심판주 손에서 새롭게 생산해내야 되죠. 그 생산하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에 결국 자기 백성을 어디서 건져야 돼요? 의인들 이리오라고 해서 건지는 것이 아니고, 의인은 없으니까 죄인 속에서 예수님께서 자체적으로 죄인을 의인되게 하는 그 작업을 하셔서, 그래서 의인된 자만을 골라가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마태복음 8장 한 번 봅시다. 2절에,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이래 되어 있죠. 문둥병자입니다. 문둥병은 저주받은 것이죠. 다시 묻습니다. 문둥병만 저주받았습니까? 문둥병 안 걸린 우리도 저주받았습니까? 어떻습니까? 둘 다 저주받았죠. 근데 멀쩡한 사람이 “예수님 저 구원해주세요.”라고 하면서 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멀쩡한데 왜 와요? 멀쩡한데? 자기가 멀쩡하다고 생각하는데 왜 옵니까?
근데 문둥병자는 예수님께 와서 “주께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했죠. 그러면 주님께서 이 사람을 낫게 한 거예요? 아니면 이 사람의 죄를 예수님이 같이 한 거예요? 어느 쪽입니까? 예수님께서 문둥병자가 되신 거예요? 안 그러면 예수님은 멀쩡한 채 이 사람만 그냥 건지신 거예요? 어떻게 된 겁니까? 예수님이 그냥 건지신 거예요? 예수님이 같이 문둥병자가 되신 거예요? 어떻게 된 겁니까?
같이 문둥병자가 됐죠. 그 증거가 뭐냐 하면 4절에,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 하라”라고 하셨죠. 그래서 하나의 문둥병자를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 자신이 그 문둥병자와 같이 되는 겁니다. 문둥병자는 구원받을 수 없어요. 자, 문둥병자를 시커멓게 그려봅시다. 그리고 예수님은 멀쩡합니다. 죄가 없으시니까.
근데 예수님께서 죄인 되셨다고 했죠. 문둥병자는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는 죄 때문에 문둥병자가 됐기 때문에. 문둥병자는 죄에 대한 저주가 합당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같이 문둥병자가 돼버립니다. 같이 문둥병자가 된다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제물이 돼요. 예수님=제물
예수님이 제물이 되어서 문둥병자하고 합세하는 겁니다. 합세해서 이 제물이 완성이 되게 되면, 그 제물은 어떤 제물이냐 하면 문둥병자 되었다가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서 문둥병을 치료받고 난 뒤에 드리는 제물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8장에서 드리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와 같이 했다는 자체가 이거는 예수님께서 그 문둥병자를 불쌍히 여겨서 모든 죄를 용서한 셈이 되죠.
제물이니까. 제물. 제물이 뭐냐, 전에는 문둥병자였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 과정 속에서 주님의 자비와 긍휼이 개입이 됐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제물이거든요. 근데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었다는 말은 이 사람이 죄인인데 의인되는 중간 과정에 누가 개입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개입했다는 말이 돼요. 예수님이 개입했다는 말이.
근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둥병자는 구원될 자격이 없어요. 권리도 없어요. 없는데, 예수님이 친히 그 문둥병자의 제물이 되심으로써 예수님의 그 의지, 그 결심이 그 문둥병자로 하여금 의인되는 결과를 낳은 거예요. 그러면 그 문둥병자는 누구를 증거 하겠습니까? 내가 예수님 찾아갔던 자기 결심을 증거 하겠어요? 아니면 예수님 증거 하겠어요? 예수님을 증거 하겠죠.
그게 바로 예수님과 자기백성의 관계가 아닙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서 자기백성을 만드시는 방법이 그 방법이에요. 의인인데 죄인에 합류하는 것. 그 방법이다 이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왜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까? 자기는 멀쩡하고, 귀신들리지 않았다고 자부하고, 그리고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뭔가 착한 구석이 있기 때문에 병도 안 들고, 사는 것도 괜찮고, 자기보기에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여서 뭐가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 심판주가 내 속의 죄에 들어올 건덕지가 없기에 나에게는 그 심판주가 아무런 필요가 없는 게 돼버려요.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주님 없이는 구원이 안 된다는 사람이 구원이 되죠. 주님 없이는. 나의 어떤 결심과 각오, 이런 것 소용이 없는 거예요. “주님이 친히 오시지 않으면 구원될 수 없습니다.” 이게 바로 구원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겁니다.
본분 디도서 3장 9절을 봅시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벌써 변론 앞에 어리석다는 말이 붙어 있죠. 그 다음에 “족보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이런 것들은 무익하고 헛되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뒤에 제자들이, 사도들이 편지를 보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안에도 역시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편지를 쓰게 하셨기 때문에 복음이 담겨 있겠죠. 그 복음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복음과 비교해 볼 때 무익하고 헛된 것들이 이제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면 복음이 무엇이냐 할 때에, 오늘 본문을 통해서 “목사님 복음이 뭡니까?”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출발점을 어디다 두느냐 하면 무엇이 복음 앞에서 무익하고 헛된 것이냐를 정리하는 그것부터 출발하게 되면 이제 복음이 무엇인가가 드러날 수 있겠죠.
지금까지가 서론입니다. 서론이 이렇게 길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떠나도 디도서라는 이 편지 자체에서 예수님의 뜻이 가득 계속 흐르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이 무익하고 헛되다고 이렇게 이야기했으면, “그래. 이제 우리는 족보이야기 하지 말자.”라고 이렇게 끝날 문제가 아니고, 무익하고 헛되다는 이 말씀은 왜 이들이 족보이야기, 변론, 분쟁, 율법에 대한 다툼을 왜 해야만 했던가를, 우리가 이걸 놓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걸 놓치면 복음도 같이 놓치는 것이 되는 겁니다. 이 시대에 복음에 대해서 알려면 주께서 이런 것은 무익하고 저런 것은 헛되다는 이 힌트를 우리가 딱 포착해야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어리석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이야기, 분쟁과 율법에 대해서 다투는 이유가 뭐냐 하면 사람이 행동한다든지 말을 할 때는 이런 이유 때문에 그래요.
어떤 이유냐 하면 ‘~가 증명하려고 한다.’ 무엇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는 겁니다. 족보, 왜 족보이야기 합니까? 지금 족보이야기를 하는 당사자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뭔가 증명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보시기에 합당한 족보라는 거예요. 율법해석도 마찬가지고. 증명이 제대로 됐다면 자기는 율법에 대해서, 족보에 대해서 자기가 현재 제대로 된 해석을 하고 있다고 증명이 돼버리면 그 순간 자기는 죄인이 됩니까? 의인이 됩니까? 의인되겠죠.
우리가 법을 위반한다는 것은 우리가 뭔가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위반하잖아요. 모르기 때문에. 자, 도적질하지 마라는 것이 십계명에 나오죠. 도적질 하지 말라는 것이 십계명에 나온다 말이죠. 그러면 도적질 하지 마라를 아홉 살, 열 살, 열두 살, 스무 살, 서른 살, 마흔 살에게 도적질 하지 마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전부 다 설문조사를 해보자 이 말입니다.
설문 조사를 하게 되면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도적질이라고 했겠죠. 남의 것을 내 것으로. 그러면 왜 남의 것을 내 것으로 삼고자 하는 겁니까? 그게 남의 것이 탐이 나서 그렇죠. 전에 언제 십계명 강의할 때 그랬거든요. 십계명이 십계명이잖아요. 근데 안에 들어가 보면 전부 다 관으로 다 연결이 되어 있어요. 전부 다 연결이 되어 있다는 말이죠. 12345678910 앞에 표면적으로는 문장으로 열 개가 구분이 되어 있지만, 안에 들어가 보면 전부 다 서로서로가 교차되어 있고 연결되게 되어 있어요. 2는 4로, 9는 10으로, 4는 1로... 이런 식으로 전부 다 연결되어 있어요.
이게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나오는데, 탐심, 욕심이 잉태하여 뭘 낳습니까? 죄를 낳죠. 근데 십계명에서 어기면 뭐가 된다? 죄가 되죠. 십계명에서 죄를 낳는 것이나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는 것이나. 결국은 이 십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십계명이 오기 전에 인간들의 존재는 처음부터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몰라요. 자꾸 인간은 존재하면서 자기를 증명하는 식으로, 자기가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인간은 존재하고 활동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인간들입니다. 인간들은.
자꾸 증명하고 싶을 때 뭘 증명하느냐 하면은, 자기가 살아왔다는 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렇게 살만한 권리와 권한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증명하고 싶은데, 근데 남들에게 안 먹히니까 성경가지고 증명하고 족보가지고 증명하는 겁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족보가지고 증명할 때는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 자손 가운데 할례를 행해버리면 이거는 창세기 17장에 의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민족이 돼요. 거룩한 민족이냐, 아니냐는 유대민족에게는 뭐에 달려있다? 할례를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이 말이죠.
마찬가지로 십계명에서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이거는 뭐 도둑질하지 말라는 경우가 나이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수천가지가 넘죠. 담을 타넘고 넘어가서 남의 집 물건을 가져오는 것. 그걸 도둑질이라고 한다면, 그 집에 감나무가 우리 집에 넘어왔을 때 감 따는 것은 도둑질이 안 되는 거예요.
왜? 감나무가 어디 내 공간을 차지해! 오성과 한음이라는 책에 있잖아요. 어린 이 항복이가 대감 집에 가서 “우리 집 감을 왜 따먹었습니까?” “넘어와서 따먹었다.”라고 하니까, 어린 이 항복이가 창호지 문에 주먹을 팍 집어넣고 “이 주먹은 대감님 주먹입니까? 내 주먹입니까?”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대감이 하는 말이 “내 주먹이겠냐? 니 주먹이지.”라고 하죠. 선을 넘었어도 주먹이 내 주먹이잖아요. “이게 대감님 주먹입니까? 내 주먹입니다. 마찬가지로 감이 넘어왔어도 이거는 우리 집 감이지 대감님 감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가 하여튼 싸가지 없어.
그러면 탐심까지 더 수준을 높여봅시다. 추상적으로 해봅시다. 누구를 탐을 내는 것. 탐은 냈지만 도둑질은 안 했다. 이게 죕니까? 죄 아닙니까? 자, 그러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죠. 죄가 어디서 나온다? 욕심에서 나왔죠. 욕심에서. 그러면 욕심이 나오는 것은 마음이 부패한 거잖아요. 그러면 마음이 부패한데 십계명을 줬다. 그러면 1계명, 8계명, 7계명은 지켰는데 5계명 이건 약간 점수가 안 나오고, 9계명 이건 일등급이 나올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마음 자체가 썩었는데 1계명을 주던 2계명을 주던 다 못 지키고, 3계명을 줘도 못 지키고 10계명을 줘도 못 지켜요. 자칭 자기가 의인이라고 여겼던 다윗이 간음하고 살인하고 난 뒤에 그 사람 땡 잡았어요. 무슨 수로 자기 자신을 알겠습니까? 평생을 살아도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모를 거란 말입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간음하게 하고 살인하게 하니까 성령에 의해서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알았어요.
본인이 뭡니까? 본인은 뭐예요? 모친의 죄 중에서 잉태된 죄인이잖아요. 죄인이니까 번제와 속죄제를 지키라는 것도, 죄인에게 그 법이 주어졌다는 말은 죄인이 번제와 속죄제를 드린다고 용서받습니까? 용서받지 못합니까? 용서 받아요? 못 받아요? 시편에 보면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라고 했어요? 하지 말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원한다고 했습니까? 원치 않는다고 했습니까? 시편 51편에서 원치 않는다고 했죠. 16절,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왜 줘놓고 원치 않는다는 거예요? 다윗이 안 거예요. 이미 우리의 심령이 부패한 가운데 번제를 주나 속죄제를 주나 십계명을 주나, 그거는 전혀 내가 의인이 되는데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어느 자리가 내 자리입니까? 주께서 원하는 것은 번제도 속죄제도 아니고 십계명 지키는 것도 아니고 율법을 지키는 것도 아니에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심령인데, 어떤 심령이죠? 상한 심령이죠. 17절, “주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상한 심령. 유통기한 지난 것, 푸른곰팡이가 핀 것, 얼룩덜룩 푸른곰팡이가 핀 것.
예수를 믿으라고 해도 못 믿어요. 푸른곰팡이 핀 이것으로 무슨 예수를 믿어요? 삼위일체이야기해도 소용이 없고 교회 다녀도 소용이 없고. 그것을 제가 지난 낮에 이야기했잖아요. 잠자는 자여 깨어라 죽은 자여 살아나라고 했죠. 이미 우리는 죽은 자에요. 죽은 자는 외부에서 건드려줘야 한다고 했죠. 자기가 자기를 건드려봐야, 내가 깼다고 하면 그건 꿈꾸는 거예요. 전혀 현실성이 없는, 혼자서 꿈을 꾼 겁니다.
정말 깨어났다면 내가 죽어 마땅하며, 내가 무슨 말씀을 지켜도 내 죄가 나올 뿐이지, 결코 나의 정당성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사하면서, 이게 중요해요. 고마워하면서, 내가 무슨 수로 내 자신을 알겠느냐 하고 감격하면서 찬미할 때, 그게 바로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집안이 엉망진창이 되고, 걷잡을 수없이 나락에 떨어질 때에 “주여 어찌합니까?”라고 누구나 그렇게 할 가능성이 많아요. 자기 힘으로 하다하다 안 되니까 하나님께 비는 것. 그런데 자기가 건강하고 수입이 많고 아무리 뭘 해도 너무 행복해. 그럴 때 “주여 이렇게 살아도 됩니까?”라고 탄식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그때 감사할 때는 진정한 감사가 아니에요.
감사는 뭘 경유해야 됩니까? 죄를 경유해야 돼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죄인이 되셨기 때문에. 의인이 죄인 되는 그 방향을 같이 함유하고 있어야 돼요. 그게 안에 있는 것을 나타내 보여줘야 그게 성도에요. 의인인데 죄인된 것, 그 모습이 그 안에 그대로 노출 될 때 그게 성도죠.
“뭐 착하게 사니까 복을 안 받으려고 해도 복이 오는데 뭐 어떡해?” 본인이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우기는 거예요. 왜? 너무 모든 일에, 매사에 잘 되니까. 그렇게 복받을만한 어떤 짓거리를 했기 때문에 복 받았다는 거예요. 그럼 뭐가 없어져요? 주님이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죄 속에 합류하신 그 대목이 그 사람 속에는 없는 거예요. 없으면 뭐가 돼요? 지옥 가죠. 뭐. 살아있을 때 호강이나 실컷 해라. 죽으면 니는 그걸로 불구덩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목사님, 그럼 가정이 어렵고 약간 어려워도 주님께 안 찾아오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건 아직도 숨쉴만하고 견딜만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에어포켓이 아직도 있다고 보는 겁니다. 낚싯배 밑에서 숨 쉴 공간이 있기 때문에 아직도 자기는 이렇게 죽을 만큼의 죄인은 아니라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복음을 안 듣죠. 기어이 살아보겠다는 거예요.
왜? 살아있는 그것이 나중에 내가 살게 됐을 때 나는 살만해서 살았다는 자기증명이기 때문에. 자기존재증명이거든요. 인간은 자꾸 증명하려고 해요. 근데 그 증명하는 것이 복음 앞에서, 9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다 무익하고 헛되다 이 말입니다. 사람이 족보를 거론한다는 것, 뭔가 변론한다는 것, 율법에 대해서 다툼을 한다는 것, 그걸 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결국은 나는 아직도 이만큼 복받을만한 여지는 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주동자 짓을 한 이유를 이제 아시겠죠. 예수님 하나 살리든 죽이든 그게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파급되는 그 영향력이 뭐냐 하면, 이렇게 착한 내가 예수님의 말에 의하면 뭐가 돼요? 졸지에 뭐가 됩니까? 세리와 창기보다 더 못한 인간이 된다고요. 아니, 병든 자나 고쳐주고 배고픈 사람에게 빵이나 주면 손 안 댑니다.
세상에 자기가 죄인인 이유를 알려달라고 교회에 온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자기가 챙길 것 챙기겠다고, 전능한 신에게 혜택 입겠다고 다 교회에 오잖아요. 그럴 때는 목사가 “왜 왔느냐? 육을 위해서 왔느냐?” 라고 고함을 쳐야 돼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냐? 이 교회는 떡을 먹고 배부른 교인도 없겠지만.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냐, 이 말이죠.
사람들에게 “이러면 삽니다. 이러면 배부르게 삽니다. 이러면 부자 됩니다. 이러면 행복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당신들은 마땅히 이 땅에서 오래오래 살 자격이 있습니다.” 이게 돼버려요. 그러면 그 하나님은 내가 상상한 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에요. 죄인의 자리에 찾아오신 그 심판주가 아닙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지어낸 그 하나님이에요.
그 당시 예수님을 죽였던 유대인들, 그 유대인들에게 어떤 사상이 있느냐, 그걸 우리가 한번 생각을 해봐야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였다고 생각을 하는데, 도대체 그들의 사고방식은 뭐였는가 하는 겁니다. 특히 사두개인의 경우에는 바리새인과 차이점이 뭐냐 하면 사두개인은 모세오경만 주장하고 바리새인은 다른 성경을 인정한다고 하거든요. 사두개인의 입장에서는 모세오경이에요.
우리는 모세오경이라고 하지만 그들 말로는 이걸 토라라고 해요. 토라. 그들은 일종의 말씀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모세오경, 그 말씀에 의해서 세상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이 세상은 모세오경의 원칙만 계속해서 지금도 가동되고 있다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얼른 들으면 그게 틀린 말은 아니죠. 세상 모든 것은 주의 말씀으로 된 거죠. 말씀으로 되었기 때문에 말씀의 자체적인 능력으로 이 세상은 계속해서 움직인다. 그거는 뭐 시편에도 나와 있고 이사야에도 나와 있고.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는 풀의 꽃 같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40:8). 맞잖아요. 그 다음이 문제에요. 말씀이 구체화 된 것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겁니다. 말씀이 이렇게 역사한다. 오케이. 그럼 그 말씀이 지상에 남긴 것이 뭐냐고 할 때,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를 들고 나옵니다. 그게 족보에요. 모든 족보가 우연이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족보를 거론하고 율법을 받았다는 겁니다. 율법. 토라. 토라가 율법이거든요.
모세가 직접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율법을 받고 그 다음에 그 율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민족, 백성들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거예요. 그럼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적으로 뭐를 계속해서 뒤로 표출하겠어요? 율법의 정신, 말씀의 정신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계속해서 나타내왔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그것이 유대교의 사상입니다.
그러면 너희 나라 이스라엘이 왜 망했느냐고 하면, 이거는 망한 것이 아니고 징계라는 거죠. “이놈아! 똑바로 하란 말이야. 정신 차렸어?” “예. 정신 차렸습니다.” “정신 차렸으니 이제는 옛날 조상들같이 나쁜 짓 안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메시야를 보내주마.” 유대인에게 메시야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사람으로 와요. 사람으로 와서 그 목표되는 목표에 도달점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다윗나라의 재현입니다. 다윗나라.
다윗 당시에 이스라엘 수도가 어디였죠? 다윗왕국 당시 유대나라 수도가? 예루살렘이죠. 예루살렘. 그럼 예루살렘을 수도로 잡고 거기다가 성전 다시 회복하고 거기서 제사를 다시 드리게 되면, 그거는 메시야가 와서 그렇게 하게 하시든지, 안 그러면 메시야가 오기 위해서 그렇게 하게 되면, 그러면 이 세상은 끝이 되는 거죠. 이스라엘 역사가 최종지점에 도달하는 것이 곧 천지를 만드신 말씀이 최종상태에 도달한 것과 같이 보는 거예요.
그러니 이스라엘 역사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족보가 얼마나 중요해요?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성을 지음으로써, “우리의 이 족보는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진 족보기 때문에 우리를 건드리면 하나님을 건드린 것이다.”라고 대외적으로 말씀의 권위를 역사적 상황가지고 충분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며칠 전에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확정했잖아요.
지금 예루살렘은 동쪽, 서쪽 전부 다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어요. 그냥 봐주고 있는 거예요. 팔레스타인은 힘이 없어요. 국제적인 압력에 의해서 그냥 공통수도가 되어야 된다는 것뿐이지, 실제적인 점유자는 이스라엘이에요. 그래서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하나로 정한 거예요. 점유자가 수도를 가져야지 점유하지도 못한, 종속된 사람들의 수도가 왜 되냐, 이래가지고 하게 한 겁니다. 이스라엘은 아주 좋아하죠.
그래서 유대인들은 말씀이 그렇게 천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성스러운 곳과 속된 곳의 구역이 사실은 따로 없어요. 모든 직업이나 일상생활 자체가 거룩해야 돼요.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주께서 주신 그 토라, 말씀이 그때 그 당시의 생활상이기 때문에 점점 더 이스라엘 역사가 복잡해지게 되면 말씀을 계속 만들 필요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계속해서 세부세칙이 만들어지겠죠. 그게 율법의 온전인 거예요. 이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왜냐하면 일상에서 거룩을 표현해야 되니까.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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