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선한 일(디도서3;8) 1711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1. 16. 08:44
 이미아 (IP:122.♡.181.188)17-11-16 00:05 
서울의존강의20171110a 디도서3장8절(선한 일)-이 근호 목사 

디도서 3장 8절입니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미쁘도다”는 말은 믿음직스럽다, 확고하다, 뭐 그런 뜻이죠. “원컨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는 말은 확고하니까 주저하지 말고 자신만만하게 하라, 이 말이죠.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는 구별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구별되어야 되는데, 사도가 디도에게 보내는 이 디도서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구주예수를 보내시고,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것이 사람들이 원하고 고대했던 것이 아니죠.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선이 없어서 그렇게 안달부리고 애타고 가슴치고 통곡하고 애걸복통하고, 뭐 그러지는 않죠. 사람들이 자살할 때 뭐 선이 없어서 자살합니까? 뭐가 없어서 자살해요? 돈이 없어서 자살하죠. 힘이 없어서 자살하고 그리고 외로워서 하고.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다는 이 하나님의 일은 끝까지 인간들이 원하는 것은 제공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원하는 것은.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그야말로 새롭게 하심이거든요. 새롭게 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데다가 추가해서 숟가락 하나 더 얹는 식이 아니에요. 새롭게 하심이란 세상을 보는, 또는 세상을 사는 모든 관점 자체가 획기적으로 완전히 다른 겁니다. 누가 봤으면 “저 인간 미쳤나? 왜 저러지?”라고 할 정도로. 

자,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들을 정상인으로 봅니다. 정상인. 정상인으로 보는데, 자기를 정상인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의 삶의 철학이랄까? 세상 보는 태도, 살아가는 이유, 그리고 그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 의도, 뭔가 노리는 것이 있고 얻고자 하는 것이 있죠.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는 것입니다. 절대화라고 하는 것은 견줄만한 대상자가 안 보일 때까지를 말합니다. 예선 본선 준결승 결승, 끝까지 남을 때 제 일인자가 되는 겁니다. 일인자라고 하는 것은 자기 말고 다른 견줄 대상이 없는 것. 어떤 분야든 간에 최고가 되는 거예요. 최고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 자존 자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특히 종교분야에서 이러한 본성을 인간들이 접지를 않아요. 이걸 포기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어느 교회에서 목사가 교인에게 전도 열 명 했다고 칭찬을 하게 되면, 아홉 명 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두 명만 전도하면 자기가 최고가 되죠. 어떤 교인이 새벽기도를 일 년 동안 다섯 번만 빠지고 다 나왔다고 칭찬하게 되면, 그러면 몇 번만 빠지면 일등을 할 수가 있습니까? 네 번만 빠지면 되죠. 어떤 교인이 교회에 봉사하는데 일주일에 세 번 나와서 봉사한다면 자기는 몇 번 나오면 돼요? 네 번 나오면 되죠. 세 번 나와서는 영 성이 안 차요. 기분이 나빠서 안 돼요. 

사람은 목표가 있는데 그 목표는 최고의 자리에요. 견줄 대상이 없는 최고의 자리까지 이르는 겁니다. 그래서 노벨상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거예요. 최고의 자리니까. 재벌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고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도달해야 될 목표, 회사를 자기 회사로 만들어야 될 그 목표가 되는 겁니다. 

그 드라마에서 자기가 재벌총수가 되는 것과 킬러영화에서 사람들을 자기가 다 쏴 죽이는 것하고 차이점이 다를까요? 같을까요? 똑같죠. 그리고 대통령 선거 어떻습니까? 대통령이 두 명입니까? 단 한 명이죠. 최고의 하나로 목표가 있는 이상 사람은 어떤 역경과 수모도 감내 해내가면서 기어이 사는 이유와 목적을 자기는 확고히 가졌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절대자라고 하는 것은, 견줄 대상이 없다고 했으니까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경쟁자가 없다는 겁니다. 경쟁자. 그럼 경쟁자라고 하는 것은 결국 힘과 힘의 마주침이죠. 힘과 힘의 마주침이에요. 싸움이죠. 오랜만에 학교 동창생들 만나보세요. 힘과 힘의 마주침입니다. 

동창회에 나오면 꼭 못난 것들이 자랑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나는 소주 일곱 병 먹는다.”라고 하는 것이에요. 다른 동창생들은 차 자랑하는데, 이번에 차 바꿨다고 자랑하는데, 자기는 자랑할 것이 없으니까 소주 일곱 병 먹는다는 것. 소주회사 홍보하러 나왔나? 그걸 왜 자랑해요? 기어코 자랑하려고 하는 오기가 그런 오기가 있는 겁니다. 자, 그럼 한 번 물읍시다. 동창회에서 소주 일곱 병 먹는다고 자랑하는 것하고 목사들 모임에서, 우리교회는 교인 오천 명 모인다고 자랑하는 것 하고 같아요? 안 같아요? 똑같죠. 똑같아요. 

성경에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고 하셨는데, 중생이라는 뜻 자체가 새롭다는 뜻이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도 새로운 거죠. 새롭다 하는 것은, 어느 자리에서 새롭냐 하면 인간들이 웅성거리는 이 세상에서 그 인간들과 다른 새로운 사람의 등장을 말하죠. 그럼 오늘 본문에서 선을 행한다고 할 때에 이미 선은 선으로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니고 반드시 악과 짝을 이뤄요. 

그러면 악이 뭐냐는 이미 여기서 결정이 났죠. 악이 뭡니까? 중생도 없고 새롭지 않는 그 모든 것이 악이 되겠죠. 그렇죠. 사모님, 옆집 가게 아줌마가 선입니까? 악입니까? 중생이 안 됐죠? 새롭게 성령의 거듭남이 없죠? 그러면 그거는 어두움이고 악이고 그런 겁니다. 

그런데 중생, 거듭났다고 자부하고 성령으로 새롭게 되었다고 자부하면서도 단골 많은 그 옆집아줌마가 부럽다면, 그러면 어딜 봐서 새로운 겁니까? 그렇게 되면 어딜 봐서 새로워요? 어떤 목사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했다, 그런데 신학교 동기 모임에 가니까 동기는 오천 명 목회를 하고 있다, 아, 부럽다! 그게 부러운 겁니까? 도대체 어딜 봐서 거듭났어요? 거듭난 티가 안 나는데? 오천 명이 그렇게 부러워요?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부럽더냐? 

새롭게 되었으면 새롭게 된, 이거는 남이 봐도 도저히 인간 힘으로 달성 할 수 없는 다른 게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오늘 본문 8절에 보게 되면 “선한 일을 힘쓰게 함이라” 선한 일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된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이 성령 받은 사람의 선한 일과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선한 일과 다를까요? 같을까요? 같죠. 

같다는 말은 성령 받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 선한 일은 이미 예수님의 재가를 받은 거예요. 예수님이 보시기에 선한 일을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선한 사람으로 취급받았습니까? 악한 사람으로 취급받았습니까? 아니면 중성입니까? 몇 번 입니까? 중성도 아니고 중립도 아니고 선한자도 아니고, 악한자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잖아요. 

그러니까 십자가 사건 안에 뭐가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말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악한 힘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죠. 작용해서 예수님을 떠밀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올 때는 성령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십자가의 성질이 들어있거든요. 그러면 십자가의 능력으로 새롭게 되었다는 말은 그 사람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 사람을 예수님처럼 떠밀 수밖에 없는 그 요소가 그 사람 속에 가득 들어있다 이 말입니다. 그 아비의 그 자식이라고. 

예수님을 미워했던 세상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을 안 미워할까요? 미워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근거로 해서해야 돼요.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다시 한 번 정리를 하게 되면 선한 일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사람들이 미워해서 죽인 그 분이 진정 선한 분이었다. 의인이었다.”라는 것을 증거 하는 그것만이 선한 일이에요. 

지난 시간에 강의했던 디도서 3장 5절에도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주님의 선행에다가 우리의 선행까지 보태면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될 텐데, 왜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차버리느냐 이 말이죠. 배격하는 이유가 뭡니까? 참 그게 상당히 따지기 힘든 일이에요. 

또 디도서 2장 14절에도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원하지 않고 불법에서 구속하지 않으면 왜 선한 일이 안 되느냐 이 말이죠. 왜 인간이 좋은 말로 하면 선한 일이 안 되느냐 이 말입니다. 

좋은 명령과 좋은 교훈과 좋은 지시에 고분고분 순종하면 그게 왜 선한 일이 아니냐 이 말이죠. 그게 왜 불법이 되느냐 이 말입니다. 희한하죠. 디도서 3장 5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우리는 의롭다고 주장하지만 이거는 주님보시기에 이것이 불법이 되는 겁니다. 의롭지 않은 행동, 악한 행동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우리가 따져야 할 것이 굉장히 많아요. 왜 우리가 하는 일이 불법이고 악한 일일 수밖에 없는가? 그것부터 따지지 아니하면 우리는 여기 흐름을 전혀 파악을 못하게 됩니다. 자칫하게 되면 이런 게 돼요. 나는 선하다, 라는 것을 자랑하게 돼버려요. 내가 선하다. 내가 선하다는 것은 거듭나지 않고 중생의 씻음이 없는 사람의 전매특허처럼 내쏟는 것이 바로 그거거든요. 

아까 경쟁이라는 말을 했죠. 견줄 대상이 없는 것. 인간이 교회에서도 선함과 착함의 경쟁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분명히 있죠. “내가 선하다.” “아니야 내가 선해.” “내가 의로워!” “아니야 내가 의로워!” 그렇게 경쟁이 됐다는 자체가 둘 다 다 가짜라는 뜻이에요. 둘 다가 다 가짜에요. 

만약에 그 중에 한 사람이 진짜 성령으로 거듭났으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하겠어요. “니가 내세우는 행위가 그렇게 의로우면 나는 반대로 갈게. 나는 불법이고 악하다. 됐냐?” 그렇게 나온다니까. 그렇게. “예. 나 개입니다.” 세리처럼 감히 고개도 못 들고 죄인이라고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나는 의롭다는 그걸 유지하는 것이 힘듭니까? 나는 죄인 맞습니다, 라고 하는 그게 힘듭니까? 어느 게 힘들겠어요? 나는 이래서 잘났다, 라고 하는 것이 힘들겠어요? 나는 뭘 해도 못났다, 라는 것이 힘들겠어요? 어느 쪽이 그걸 유지하는 것이 힘들겠습니까? 나 잘났다고 하는 것은 덜 힘들죠. 왜냐면 평소에 하는 행세가 그거거든요. 근데 그거하고 반대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강의를 다시하게 되면 사람이 행동할 때 다 노림수가 있고 목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목적은 뭐라고 했던가요? 그 목적은 견줄 대상자가 안 보일 때까지 자기를 절대화 하는 거예요. 자기 절대화. 낚시 노는 데 가면 낚시고수 따로 있고 바둑 두는 데 가면 바둑고수 따로 있고 등산하는 데 가면 등산고수 따로 있고 물리학상식이야기하면 그 바닥에 고수가 따로 있고 교회사 공부하러 가면 교회사 도사가 따로 있고 성경봉독 했다고 자랑하면 성경 다 외운다는 동네가 따로 있고. 

그들이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 하면 그게 사는 목적, 자기 절대화가 되는 밑천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목사님. 나는 절대화되기 싫어요. 나는 그런 목적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보편화시키지 마세요.”라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묻고 싶어요. 그럼 왜 사는데? 꼴찌 되려고 살아요? “꼴찌는 아니고 3등 하려고요.” 4등 앞에 3등은 절대자에요. “나는 한 25등요.” 26등 앞에 25등은 절대자에요. 딴 사람보다 못하고 24등한테 밀리지만 나는 너하고 비교해서 낫다는 이게 있단 말이죠. 나는 너보다 낫다는 자체가 나를 책망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왜? 너보다 나으니까. 

책망하지 말라는 요소를 품고 있다는 말은, 지금은 25등이지만 보라! 언젠가는 나는 24등, 23등으로 차츰차츰 나아가겠다. 어디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그런데 2등까지 올라갔는데, 1등 안 돼서 좀 속상했는데, 1등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어버렸어요. 그러면 야호! 하고 이젠 신나하겠죠. 모든 인간은 사탄의 정신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신이 되고 싶은 이 마음을 인간이 출생할 때부터 다 갖고 있습니다. 

자, 꼭 일등, 이등이 안 되도 이미 그런 잠재성을 다 갖고 있어요. 일등이 안 되도 견줄만한 대상이 안 보일 때까지 계속 시도를 하는데, 시도하는 그 과정 속에서 이미 일등이 안 되도 절대자 행세는 다 하고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거에요. “날 건드리지 마라!”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날 무시하지 마라!”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요즘 목욕 값(모욕감)얼맙니까? 팔천 원입니까? 요 앞에 육천 원입니까?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그렇게 되는 겁니다. 

부부가 결혼했다. 절대자 두 명 만난 거예요. 그래서 호시탐탐 관찰합니다. “니가 나에게 모욕감을 줬나?” “니는 나에게 안 줬나?” 호시탐탐 이거 노리고 있어요. 만약에 아내가 차를 몰고 갔는데 바쁜 일이 있어가지고 딴 데 정신을 팔다가 신호위반으로 범칙금 오만 원짜리 하나 끊어왔다. 그러면 그건 이미 아내는 범칙금 끊게 된 것을 인정하죠. “내가 바보같이 과속했어.”하고 아내가 인정하는 그것에 남편은 어떻게 대처를 해야 됩니까? “그까짓 것 오만 원 가지고 마음 상하지 마. 내가 열심히 일해서 오만 원 더 벌어줄게. 나는 돈 오만 원이 아까운 게 아니고 오만 원 때문에 마음 상하는, 당신의 마음에 생채기 나는 그게 난 더 아쉽고 아까워. 걱정하지 마.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바쁜 일 있는데 잘했어.” 잘했군~ 잘했어~♬라는 하춘화 노래 있잖아요. 

이렇게 되기를 상대방한테 기대를 하는데, 남편은 그걸 잘됐다 해가지고 “니는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오만 원어치.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차 몰고 다닐 때 당신이 한 두 번이야?”라고 이렇게 나와 버리면, 이거는 상대방이 모르는 상태도 아니고 이미 아는 상태에다가 윽박지르는 것이죠. 왜 윽박지릅니까? 이번 기회를 통해서 갑을관계를 확실히 하자는 겁니다. 그러면 아내 쪽에서 실수 했다고 해서 갑을 관계가 바뀝니까? 일단은 작전상 후퇴를 하죠. ‘그래! 니 어디 한 번 두고 보자!’하고 노리죠. 

그러다 카드 값 나오게 되면 살핍니다. “나는 오만 원 했지만 당신은 오십만 원이야.”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이거는 뭐 부부가 아니고 원수 간에 전쟁하려고 결혼한 것처럼. 이거는 심지어 부부뿐만 아니고 자식과 부모사이에도 마찬가지에요. “성적 한 번 보자. 성적 꼬락서니하고는! 내가 반드시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라고 하니까 빈둥대며 누워만 있고. 이러다 빌어먹는 거야.” 아들이 하는 말이 “엄마, 나도 안다. 답안지 하나씩 밀려 써가지고 어쩔 수 없었다.”라고 하죠. 

인간들이 말을 내뱉거나 행동을 할 때는 이번 기회를 통해서 자기가 절대자가 되는 자기의 속내를 한 걸음 더 성취성에 가깝도록, 한 발짝 더 업그레이드되는 절호의 찬스로 이용하기 마련이에요. 이번 기회를 통해서. 상대방의 약점을 쑤셔놔야 나는 그거보다 덜 약점이 있는 것처럼 올라가죠. 

이렇게 되면 이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이거는 불연속성이 아니고 결국은 의와 선함의 연속성을 추구하는 셈이 됩니다. 어디까지? 그 목표는 어디까지입니까? 나는 의로움과 선함에 있어서 남하고 견줄 대상이 없을 정도로 나는 내 나름대로 나는 최고다, 라고 자랑질 할 때까지.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여러 사람 상대를 하면 이거는 윤리가 되고, 개인적으로 이걸 가지고 양심을 거론하면 도덕이 되는 거예요. 도덕과 양심은 연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디도서 3장 5절에 보세요. 거기를 보면 연속성입니까? 불연속성입니까?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연속성이에요? 불연속성이에요? 불연속성이죠. 끊어져있죠. 단절되어 있죠. 본인 스스로 단절됩니까? 인간 스스로 단절할 수가 없어요. 단절하겠다는 그 의지 자체가 이미 단절이 불가능하게 만들었어요. 단절했는데 그 사이에 내 의지가 포함되어 버리면 그거는 단절이 아니고 연결이 되죠.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뭔가 바라는 거예요. 단절을 하고, 일단 내가 죄인이라고 하고, 그 죄인에 대해서 성령이 오시게 되면 나는 다시 이어져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을 내가 미리 사전에 생각을 하게 되면 그 생각이 결국은 불연속성이 아니라, 그 생각 자체를 소위 스스로 단절했다는 자리에다가 자기 생각, 의지를 집어넣어버리면 이게 바로 윤리와 도덕이 되는 겁니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영웅서사구조라고 해요. 쉽게 영웅이야기라고 해요. 

영웅이야기를 보면, 영웅들의 특징에 뭐가 있느냐 하면 반전이 있어요. 영웅인데 그냥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실패를 겪어요. 역경을 겪고. 하지만 영웅은 어떻게 된다? 그 실패와 극복을 통해서 오히려 그동안 몰랐던, 자기에게 갖추어지지 않았던 그러한 에너지가 역경과 실패를 통해서 전환되게 되면, 그 놀라운 에너지를 가지고 적들을 부수고 기어이 산 넘고 물 건너서 마법의 성에 갇힌 자기 애인을 건져내잖아요. 

영웅구조가 심청전도 그렇고 춘향전도 그렇고. 자기 신랑이 거지라고 여겼는데, 단절되어 있는데, 나중에 보니까 거지가 아니라 그 마을에 암행어사로 나타난 거예요.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꾸며낸다는 것은 그 단절너머에 있는 그 존재가 단절 이쪽에 있는 내 존재와 같은 존재이기를 원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되잖아요. 내 뜻대로 안 된다고 포기하면 안 되고, 고집이 보통고집이 아닙니다. 내 뜻대로 안 되더라도 내가 절대자가 되려면 이 정도 수모는 내가 감당을 해줄 때, 나는 오히려 절대자 되는 것을 앞당길 수 있다. 나는 영웅이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을 한 것이 영웅설화, 옛날 모든 설화가 영웅설화에요. 단군도 마찬가지고. 단군도 사람 되기 위해서 곰이 뭘 먹었어요? 쑥과 마늘을 먹었죠. 

어벤져스라든가, 지구를 지키는 인류의 영웅들을 보게 되면 처음에는 악당들에게 져요. 좀 밀려요. 하지만 우우웅~~하고 내부발동기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나오면 이거는 감당도 못할 정도로 파워가 나오죠. “파워 레인저!”하고 쭉 나오면 전부 다 무너트리죠. 남자아이들이 이걸 왜 좋아합니까? 결국은 정의는 이긴다. 그거 아닙니까? 정의가 이기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이겼습니까? 졌습니까? 이 땅에서? 졌죠. 이번 주일 낮 설교가 그겁니다. 약하신 그리스도. 이게 팩트fact입니다. 이게 사실이에요. 조금이라도 힘주시는 주님이 나오면 백퍼센트 사탄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고 악마에요. 예수님은 버림받았잖아요. 그러면 예수 믿는 우리도 이 땅에서 어떻게 돼야 해요? 같이 버림받아야 해요.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잖아요. 양쪽 다로부터 버림받았죠. 성도도 양쪽 다에서 버림받아야 해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다고 너무 서러워하지 마세요. 왜? 버림받을만하잖아요.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당연한 조치인데 뭐 거기에 서글픔과 서러움과 분통함이 있어서는 안 돼요. “나를 지옥 보내다니!”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지옥갈만 하니까 지옥 가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성전에 오실 때 구원받은 세리가 예수님 앞에서 연기를 하고 있습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5미터 가까이 오신 것을 엿보았다가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죄인이에요.”하면서 꺼이꺼이 울면서 할 때 “그래. 니가 죄인인 걸 알았구나. 너 같은 인간이 의인 된다”고 하니까, 흑흑흑~히히히 울다가 웃으면서 ‘성공했어!’라고, 이렇게 혼자 까불고 그랬습니까?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나에게 그 단절이, 천국과 끊어짐이 하나님의 조치인데, 그 조치에 대해서 이제야 합당한 조치 맞습니다, 라고 동의를 하는 거예요. 죄인은 천국 못 간다는 것에 대해서 전에는 조금 불만이었는데, 이게 불만을 품을 이야기가 아니고 너무나도 정말 하나님다운 당연한 처리였습니다. 행정조치였습니다, 라고 수용하게 되면 그 수용한 그것이 그 사람 속에 들어오게 되죠. 

그러면 그 조치, 내가 멸망 받는 것은 당연한 조치입니다, 라는 그 당연한 조치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죄를 위해서 대신했다는 것과 결합이 되는 거예요. 그 조치와 대신함이 결합이 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 구원받고자 하는 그것이 고개를 내밀면 안 돼요. “구원은 무슨 구원 나 같은 인간에게...내가 구원 못 받는 것은 당연하지.” 그 당연함과 예수님의 대신하심이 결합이 되어서 구원받는 것은 인간이 사전에 노림수나 꼼수나 조작이 거기에 전혀 개입될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좀 쉬운 거거든요. 그럼 이제부터는 좀 난해하게 접어들어야 되겠죠. 아까 무슨 이야기를 했냐면 선한 일을 할 때는 반드시 짝을 이루는 무엇이 악한 일이냐를 알아야 된다고 했죠. 아까 이야기를 계속해봅시다. 어떤 인간이 만약에 지옥 간다면 당연한 조치입니다, 라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개인적인 죄 때문에 지옥 간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이 죄 많은 세상에서 태어났다는 그 이유 때문에 나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서 나는 이 땅에서 저주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요? 어느 쪽이에요? 다른 사람은 멀쩡한데 나만 죄를 지어서 지옥 가는 겁니까? 아니면 다 같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지옥 가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전자에요, 후자에요? 후자죠. 그걸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디도서나 신약을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역사, 구약역사를 배제하면 안 돼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갔죠. 갈 때 하나님께서 개입합니다. 풍랑이입니다. 그때 요나는 물에 빠지잖아요. 강제로 물에 빠졌죠. 사실은 반강제죠. “자진해서 내가 죽을게.”라고 해서 빠졌지만. 그것도 뭐 어쩔 수 없이 빠졌지만. 

그럴 때 요나가 물에 빠진 것을 쳐다보던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요나 덕분에 자신들은 살았다고 생각하겠죠. 그렇죠? 그럼 어느 쪽이 산 쪽이에요? 어느 쪽이 하나님의 성전을 알고, 어느 쪽이 주님의 깊은 은혜를 아는 쪽입니까? 물에 안 빠진 쪽이에요? 물에 빠진 쪽이에요? 요나 쪽이에요? 아니면 자기들은 좋다고 휘파람 불면서 여행했던 그쪽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요나 쪽이죠. 요나 쪽. 

하나님이 일하는 기둥이 요나냐, 아니면 다른 사람이냐 이 말이죠. 요나죠. 그러면 그들은 구원받으려면 어디를 가야 돼요? 요나 뛰어내릴 때 그들도 같이 뛰어내려야죠. 저게 살길이라고. 근데 미쳤어요? 뛰어내리게? 바닷물도 차가운데. 물이 좀 온도가 따뜻하면 수영겸 하겠는데, 뭐 튜브도 없고. 혼자 죽으면 되지. 다른 사람들은 살아야 될 게 아닙니까? 왜 죽는데 같이 따라 죽겠습니까? 안 되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요나는 바로, 예수님의 표적이 바로 요나의 표적이에요. 아무도 예수님을 따라 죽는 자가 없을 정도로 이 세상은 악하다는 겁니다. 자, 악하다는 것의 정의가 나왔어요. 악하다는 것은 모든 생각과 행동들은 누구를 살리기 위해서 그렇다? 누를 위함입니까? 바로 나를 살리기 위해서 행동하고 생각하는 이것이 악한 거예요. 왜냐하면 중심 기둥이 누구기 때문에? 나이기 때문에. 

요나도 마찬가지고 자기 살기 위해서 갔는데, 근데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이기 때문에 특별한 은혜를 받아서 물속에 던져졌습니다. 특별한 은혜를 받아서 물속에 풍덩하고 던져져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근데 그걸 쳐다보는 다른 사람들은 그걸 하나님의 은혜로 보겠습니까? 아니면 참 당신 인생도 기구하다고 보겠습니까? 어느 쪽이겠어요? 참 처량하고 가련하게 보겠죠. 

마르다 마리아 오빠가 죽었잖아요. 그것도 젊은 나이에. 그래서 아플 때 긴급호출해서 119불렀는데, 119가 듣고도 오지를 않아요. 그래서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결국 오빠가 죽죠. 죽었을 때 유대인들이 얼마나 애통해했는지 몰라요. 많이 울었어요. 그것도 젊은 나이에. 나이도 뭐 사십 오세인가 하는 그런 나이에. 물론 사십 오세라고 안 나왔지만. 사십 오세에 죽은 사람은 김주혁이고. 하여튼 젊은 나이에요. 결혼도 안 한 것 같아요. 올케언니 없는 것 보니까 결혼도 안 한 것 같아요. 김주혁 아닙니까? 

결혼도 안 했다, 나이 사십 중반 젊은 나이에 죽었으니까 얼마나 처량하겠어요. 세상의 좋은 맛도 보지 못하고. 그것도 예수님을 뒤에서 욕했습니까? “예수 죽어라!”라고. “예수 당신 싫어!”라고 이랬습니까? 경쟁에서 우수상 받았죠. 예수 잘 모신다고. 그 여동생 마리아는 턱 밑에 앉아 말씀 들어서 우수상 받았고. 

언니 마리아는 요리 잘해가지고, 잡채라든지 고추튀김이라든지, 백날 해야 드시지도 않는데. 그런 것 해가지고 또 칭찬받고. 그리고 올 때마다 숙소를 정해가지고 잘 대접하고. 이거 뭐 더할 나위 없이 충성봉사 다 했는데, 돌아온 상이 뭡니까? “에라 죽어라!”가 아닙니까? “죽어라!”가 상이었어요. “죽어라!”가. 마리아도 실망했고, 마르다도 실망했고, 일가친척 유대인들 다 실망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 그 나사로를 죽이는 것은, 바로 마리아로 하여금 나중에 예수님이 유월절에 죽을 때 마리아가 향수병을 깹니다. 뭔가 눈치를 챘어요. “지금은 따라 죽을 수 없지만 내가 귀히 여기는 향수, 향수 같은 존재가 예수님 당신의 존재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주님 앞에 그저 죄인일 뿐입니다. 내가 구원되고 안 되고의 모든 권한은, 결정권은 우리가 주님 앞에 얼마나 섬겼는가, 대접했는가가 아닙니다. 그냥 우리 집에 방문하신 것도 우리가 대접 잘 해서 방문하신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일방적인 간택이었고 채택이었습니다.” 더 쉽게 말해서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있음 자체가 선과 악을 결정하는 중심기둥으로서 여기 있음을 이제는 알았습니다.” 

중심기둥. 그럼 그전까지의 모든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아니고, 누가 중심이었습니까? 각자가, 내가 선악의 중심이었습니다. 근데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 내가 선악의 중심이 돼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이건 칼빈의 커다란 오류가 발생돼요. ①번. 선한 것이 있고 ②번. 악한 것이 있고 ③번.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성적인 것, 또는 중립적인 그런 가치관도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①번 ②번만 있는 게 아니고, ①번 ②번 ③번 세 개가 있는 거예요. 

도둑질하는 것은 악한 것이고, 남을 구제하는 것은 선한 것이고, 집에서 오줌 싸는 것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칼빈의 이야기에요. 이게 이단이 아니고 뭡니까? 이게 이단이잖아요. 이게. 결국 이렇게 한다는 것은 이(①번②번③번)앞에 관찰자의 자리에 누가 있습니까? 각자 본인들이 있는 거예요. 본인들에게 선과 악과 중성이 있다는 이 자체가 뭐냐, 이게 바로 아까 이야기한 연속성, 이 자체가 바로 악인 거예요. 이 자체가. 중성으로 있을 수가 없어요. 선악과지, 선악중과가 아니잖아요. 

선 아니면 악, 악 아니면 선이에요. 인간의 윤리도덕이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관계없다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성적인 요소를 인간들이 자꾸 생각한다는 것이고, 그 자체가 비성경적이고 마귀적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이게 잘못이라면, 예수님 중심으로 보면 어떻게 되느냐, 예수님 중심은요, 세상에! 중성도 없어요. 일어나는 모든 일이, 파리 한 마리가 방에서 날아다닌다, 파리 한 마리 날아다니는 것도, 모든 것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주되심과 복음과 다 연관성이 있어요. 연관성. 

근데 인간이 따지는 윤리도덕은, ‘요거는 나의 선한 것과 관련되어 있고, 이런 짓은 내가 악하게 되고, 아, 요것은 선도 아니고 중간쯤 되네.’ 본인이 선과 악과 중립을, 연관성을 본인이 정해버려요. 본인이 정해버리면 파리가 날아다니는 것은 이거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중성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 중성 자체, 중성적인 가치관 자체는 하나님께서 인간 만들 때 처음부터 없었어요.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고 할 때, 이미 안 따먹으면 선이고 따먹으면 악이 되죠. 

근데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문제 출제를 어디 아담 본인이 제안했습니까? 하나님과 협의해서 된 겁니까? 일방적으로 에덴동산에 꽂은 겁니까?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주셨죠. 일방적으로 주셨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인간은 선과 악에 대해서 본인이 판단할 사항이 아니라 이 말이죠. “하나님! 선악과 그 문제 말고 내가 따로 문제를 내겠습니다.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그 문제보다도, 니는 잠 잘 때 오른쪽으로 누워라! 뭐 이런 문제를 제가 내서 저는 오른쪽으로 눕겠습니다.” 뭐 이런 식이라. 자기가 출제내고 자기가 판단하고. 

실제로 이게 우스운 이야기지만, 우리의 일상이 다 그렇잖아요. 우리 일상이. 고아원 방문해서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것, 친한 친구의 엄마가 아프다고 내가 그 친구를 위해서 내가 아끼던 돈을 주겠다. 이것은 누가 봐도 선한 것이다, 라고 자부했던 울산의 한 청년은 그 돈 때문에 자살했어요. 오늘 뉴스에 나왔어요. 제가 그걸 가지고 안양강의에서 깊이 많이 다루었어요. “이 청년의 문제점을 발견하라.” 뭐 이런 것. 

친구의 엄마가 아픈데 왜 도와줘야 해요? 왜 도와줘야 합니까? 북한의 김정은이 엄마가 아픈데 도와줬습니까? 안 도와주잖아요. 근데 친구 엄마가 아픈데 왜 도와줘야 합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친구니까 도와준다는 거예요. 누구 친군데? 내 친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관계를 누구 중심으로 돌립니까? 내 친구, 나죠. 내 친구니까 도와주는 거예요. 자식한테 도시락을 싸줬다, 왜 싸줍니까? 내 자식이거든요.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 선입니까?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면 내게 합당치 않다.”라고 하죠. 예수님은 갑자기 개입해서 “그 귀한 자식이냐? 나냐?”하고 지금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인생에다가. “아이고, 자식 귀한 것은 선과 악을 초월해서 본능입니다.”라고 이렇게 하거든요. 그걸 본능이라고 하면 안 돼요. 죄라고 이야기를 해야죠. 자식한테 나쁜 짓시키는 것이 죄가 아니고, 자식을 사랑한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된다 이 말이죠. 

“아이고, 그거는 죄 짓고 싶어서 짓는 것이 아니고 본능입니다.”라고 하는데, 죄라는 것은 짓고 싶어서 짓는 것이 아니고 죄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남의 자식 죽는다고 해서 그렇게 가슴 아프면 자기 자식은 안 죽어도 가슴 아파요. 본능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중심이 내 중심이라서 그런 거예요. 말을 분명히 해야 돼요. 

“그러면 목사님, 내 자식 사랑하고 하는 그게 나쁩니까?”라고 화를 내면서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니까 성경이야기를 하면 발작을 일으키게 되어 있어요. 발작을. 점잖은 체 해도 발작을 일으키게 되어 있어요. 그게 나쁩니까? 나쁘죠. 왜 나쁩니까? 세상의 모든 중심은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데, 니는 거기다가 건방지게, 주님의 중심의 관계에다가 니가 함부로 거기에 끼어든다는 그 죄를 짓는 것이니까. “이거는 내 자식입니다.” 이러고 있다고요. 내 자식이라고. 

주님 복음을 위해서, 주님 영광을 위해서 만든 자식인데, 존재인데, 내가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라고 해서 이거 내 자식이라는 거예요. 그럼 뭐 아프면 자기 것 다 되겠네요? 버스에 발 집어넣어서 발이 아프면 그 버스 자기 것 되겠네요? 세상에 돌아가는 모든 세세한 움직임을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움직인다고 되어 있어요. 그 소용돌이가. 

그런데 우리는 그 중에서 자기 몫을 따로 뽑아내려고 합니다. 그걸 뽑아내면 어떻게 되겠어요? ‘나는 그리스도 중심이 싫어. 요거 뽑아낸 만큼은, 이건 내 중심이고 싶어.’하고 끼어드는 거예요. 주님께 영광 돌리는 그 현장에서 주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짜증나서, “와? 내 건 없노?” 하고 끼어드는 겁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열왕기하 5장에 보면 게하시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 고치러 온다고 선물을 가득 들고 왔거든요. 엘리사가 만나주지도 않았어요. 그냥 명령만 하고. 명령만하니까, 지금 게하시는 병 낫는 것에는 관심도 없어요. 아이고, 저 가져온 선물을 그냥 가져가면 아깝다고 해가지고, 어떻게 했습니까? 이 게하시가 그 선물을 가로챈 게 되죠. 

지금 엘리사는 선지자잖아요. 선지자이기 때문에 엘리사가 고쳐 줄 병은 아무것도 없어요. 엘리사는 아무 병도 못 고칩니다. 다만 엘리사는 주님이 친히 하시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는 변사죠. “옛날 그때에~” 목소리 깔고 하는 변사 있잖아요. “김중배 하고~” 이렇게 하는 변사에요. 변사. 움직이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하는 변사인데, 그 변사의 내용이 뭐냐 하면 “주님을 위해서 그랬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모든 것이 예수 중심으로 그랬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이런 변사 역할을 하는 거예요. 변사역할. 

오늘날 선지자가 누굽니까? 성도가 선지자죠. 성도가 이 땅에서 변사역할을 해야 되는 거예요. “오늘도 주님은 머리카락 세 개를 희게 했습니다. 주의 영광을 위해서 했던 것이었습니다.” 뭐 이렇게 하는 거예요. “염색을 했는데 염색약이 독해서 다음부터는 안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 

성령을 받으면 우리가 주님을 증거 하는 변사가 되면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왜? 중심이 자기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이런 일이 일어나는, 심지어 나한테 일어나는 일도 내 중심하라고 일어난 일이 아니고, 이 세상이 주님 중심으로 돌아감을 증거 하라고 나한테서 일어나는, 그런 주님과 성도의 관계가 그렇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중심이거든요. 자기중심밖에 없는 세상에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바로 그 새로움이에요. 더러운 내가 깨끗한 내가 되는 것이 새로움이 아니고, 더러운 내가 주님 중심의 나로 바뀔 때 그게 새로운 거예요. 나 중심이 뽑혀버리고 거기다가 주님 중심의 기둥이 박히는 것, 이게 새로운 거예요. 다른 새로움은 없어요. 

선과 악의 중심이, 에덴동산에 있을 때는 하나님 중심이었는데 선악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선악과 훼손됨으로 말미암아 그 중심이 마귀나라, 인간중심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중심이. 인간이 선악과를 아는 자기를 중심으로 삼아서 신처럼 되겠다고 설쳐댔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중심의 중심을 그 다음에 뭐로 옮깁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옮겨야 되겠죠. 옮기는데, 그냥 옮겨지는 것이 아니에요. 

선은 악이 되고, 악은 선으로 바뀝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선은 악이 되고, 악은 선이 됩니다.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선이 되고,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악이 되는, 그 가치의 전적인 바꿔치기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제 일어납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81.188)17-11-16 00:07 
서울의존강의20171110b 디도서3장8절(선한 일)-이 근호 목사 

자, 아까 첫째 시간에 했죠. 주어진 모든 것이 주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움직인다면, 성도는 되어진 모든 소용돌이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냥 그 상황에 순응하고 주어진 대로 살면 돼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본인이 내 인생이 왜 이러냐고 판정내리면 안 돼요. 자기중심으로 소용돌이치는 것이 아니잖아요. 내가 뭐가 잘났다고 주께서 나를 갈구겠어요? 갈굴 게 있어야 갈구죠. 주님 중심으로 돌아가요. 주님 중심으로. 이건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에요. 사도바울도 가는 길이 자기마음대로, 뜻대로 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주께서 인도하는 대로 갈 뿐이에요. 인도하는 대로. 

인도한 대로 간다는 것은 뭐냐, 본인이 내 행동은 잘했다, 못했다는 것을 판정내릴 수 없다는 겁니다. 내릴 자격도 없고 그럴 권한도 없어요. 이번에는 잘했어! 이번에는 못했어! 이걸 본인이 판정을 내리면 안 돼요. 왜냐하면 그 일이 일어난 것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일어나야만 하는 일인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세상의 모든 일은 오케이, 예스가 된다고 했어요.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겁니다. 이 세상은 선이 아닌 게 없이 다 선이에요. 왜? 이 세상은 다 악이기 때문에. 모든 게 악이기 때문에 모든 게 선이 되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지금 괴변을 늘어놓는다고 생각하시는데. 

모든 세상이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이잖아요. 십자가는 예수님을 밀친 거예요. 죽인 거예요. 싫다는 하소연이 그건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죄 아닌 게 없어요. 다 죄에요. 근데 그 죄가 예수님을 밀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합당한 게 되었어요. 

왜? 그래야 세상을 심판할 수 있기 때문에. “잘했다. 너희들 죄 잘 지었어요~” 모두 다 죄를 지었으니까,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죠. 그래놓고 보자~ 이제는 누구 천당 보내고 누구는 지옥 보낼지 소매 한 번 걷어볼까? 너 천당! 너 지옥! 충분히 그럴 권한이 있죠. 왜? 모든 인간은 저주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에. 오직 긍휼로 인하여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가 긍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뭘 해도 그게 죄가 된다는 겁니다. 왜? 죄 속에서 태어나서 죄 지은 것 밖에는 없기 때문에. 죄가 된다고 고백하는 순간, 그게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성경에서 세리에게 죄인이라고 하는 순간, 그 사람은 의인되어서 천국 가는 거예요. 천국에 합격한 거예요. 수시모집에 합격한 거예요. 근데 잘났다고 하는 바리새인은 지옥의 수시모집에 합격했어요. 지옥에 합격했어요. 

지금 세상이 사는 게 빡빡하고 힘든 이유가 뭐냐 하면 돈이 없어서 힘든 게 아니고 본인이 본인 인생에 대해서 판정을 내리기 때문에 힘든 거예요. ‘아, 좀 더 잘할 걸. 내가 왜 그런 마귀의 시험에 빠졌냐?’ 자기가 마귀면서 무슨 마귀의 시험에 빠져요? 그럼 마귀의 시험에 안 빠질 거예요? 마귀를 누가 그렇게 하셨는데요? 주께서 그렇게 하셨어요. 

마귀의 시험이 됐든, 마귀의 테스트가 됐든 그 배후에 누가 그렇게 한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마귀가 그렇게 시킨 거예요.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 말이죠. 판정내리지 말고. 

“자식이 군에 간다는데 군에 간다는 소리를 듣고도 내가 새벽기도도 안 나가고 기도도 빡세게 하지 않았더니 애가 전방으로 빠졌구나. 내가 엄마가 되가지고, 이런 못난 엄마가 어디에 있노? 애가 군대에 간다고 하면 빡세게 새벽기도를 해가지고, 성경쓰기도 해가지고,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잘만 했으면 애가 후방으로 빠질 건데...”라는 이런 후회가 막심하죠. 원서가 잘못되어가지고 애가 원래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덩달아 비율이 세 가지고, 이게 다 못난 에미 탓이라고 하는데, 못난 에미 탓이 아니라 주님 탓이에요. 

“촌에 있는 큰 아들한테 이번에는 배추가 잘 되니까 배추 심으라고 했더니 배추 값이 폭락하고. 에미가 사는 게 죄야. 사는 게. 이런 에미는 죽어야 되는데. 내가 너한테는 보탬도 안 되고...”뭐 그렇게 궁시렁궁시렁대는지. “어머님. 이번 배추 값 폭락은 주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배추 값이 폭락한  것입니다.” “애야, 논리의 비약이 너무 심하다. 중간을 한 번 연결해봐라.” 그런 것을 또 연결하면 복음이 나오죠. 

본인이 본인을 책임지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판단내리지 않으면 책임질 이유도 없어요. 가정법과거완료 쓰지 마세요. 만약에 그렇게 안 했었더라면~이라는 말을 쓰지 마세요.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없어요. 우리한테는. 

그런데 이렇게 세상의 모든 일이 주님 중심이라는 말이 자칫하면 주님의 주권사상이 되거든요. 주권사상이라는 것은 성경에 없는 거고. 무슨 중심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이에요. 

뭐 하나님의 주권, 주님의 주권, 이 주권사상과 십자가의 차이점이 뭐냐, 주권사상 같으면 예수님의 존재자체가 최고가 돼버려요. 하지만 십자가 중심, 복음 중심이 돼버리면, 여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인간들은 뭘 해도 죄가 된다가 되죠. 죄가 됨을 여기서 아울러 보여주잖아요. 

세상의 돌아가는 모든 것이 인간은 구원될 권한도 없고 자격도 없다는 것을 아울러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 중심이에요. 복음 중심이에요. 이걸 가지고 새 언약 중심이라고 해요.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 중심이에요. 부활중심 아닙니다. 십자가가가 중심이에요. 부활중심이 아니에요. 

사도바울이 “내가 너희 중에서 부활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했다.”라고 한 게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라고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그렇게 이야기를 하죠.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더 나갈 것은,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십자가 죽음으로 다 이룬 거예요. 부활해서 다 이룬 것이 아니고. 십자가상에서 다 이룬 거예요. 죽고 난 뒤에 부활해서 다 이룬 것이 아니고.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기위해서 이 땅에 오셨는데, 그렇게 해서 주님의 주 되심과 어떤 연관성이 있느냐 하면, 그게 바로 구약에 나옵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 회의론’입니다. 이걸 제가 제목 후보감으로 일단 올려볼게요. 하나님 회의론. 하나님 회의론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들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두고,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회의,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이죠. 

그게 구약 스바냐 1장 12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 라는 이야기는 하나님은 멍청하다 이 말입니다. 있으나마나한 존재다 이 말이죠. 복도 내리지 않는다는 말보다 더 무서운 이야기는, 뭐도 내리지 않는다? 화, 저주도 내리지 않는 거예요. 

신의 저주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도 저주도 안 내린다는 말은, 그러면 인간이 행동할 때 그 행동결정권이 누구한테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멍청하니까, 아무것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결정은 누가 해요? 본인이 하겠죠. 본인이 행동해서 결정한다는 말은, 결국은 절대자의 냄새가 벌써부터 나죠. 어떤 행동에서 옳고 그름과, 나에게 이익 되는 것과 이익 되지 않는 것을 본인이 결정하겠다는 겁니다. 

왜 복음 듣다가 복음을 거부하고 안 듣고, 시치미 떼고 복음 안 들리는 곳으로 내빼고, 왜 그렇게 되는 거예요? 십자가 복음 듣다가 이제는 십자가 복음 안 듣겠다는 이런 생각이 왜 듭니까? 그 판정을 누가 내린 거예요? 본인이 내린 거예요. 본인이 어떻게 해서 내렸기에 복음을 거부합니까? 그 복음이 실속이 없다는 거예요. 자기에게 구체적인 이득을 안 가져다준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회의론이에요. 

그러니까 회의론 자들은 신을 안 믿는 것이 아니에요. 신을 믿는데, 신에 대해서 내가 테스트를 해가지고 믿을만한 신이냐, 아니냐를 결정하고 난 뒤에 믿겠다는 겁니다. 그럼 뭡니까? 기도를 해보고 기도에 응답이 되면 그게 내 마음에 맞는, 나에게 적합한 내 신이 되는 겁니다. 애가 성적이 안 오른다, 몸이 아프다, 생활이 궁핍하다, 그때는 빡세게 기도를 해서 내 기도에 응답을 해주면 그 신이 바로 내 신이죠. 

그러면 이게 뭐냐 하면 악마하고 결탁을 한 겁니다. 악마가 인간에게 뭘 제공하느냐 하면, 니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격려하잖아요. 한 번 적어야 돼요. 이게 너무 중용한 이야기라서. 악마가 이야기했다고 하지만, 악마라는 말을 떼 봅시다. 우리 마음이 늘 평소에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제일 중요해!’라고 계속해서 속에서 우러나오는 겁니다. 

“내가 제일 중요해. 내가 제일 잘나가.” 101명이 불렀던 남자버전이 있죠. “오늘밤 주인공은 나야 나.” 막 춤추면서 “나야 나!”라고 하죠. 그 노골적인 가사, 투박스러운 그 노골적인 가사가 왜 먹힙니까? 동감과 공감을 불러일으키거든요. 오늘밤 주인공은 나야 나. 갑자기 제목을 바꾸고 싶네요. 

교회가 왜 교회가 아니고 무당집인 줄 아시겠죠. 십자가로 보지마시고 대나무로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건물 앞에 대나무 꽂아놓은 거예요. 그게 나야 나를 후원해주니까. 구약에는 그걸 바알신이라고 합니다. 바알신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제물의 양에 따라서 응답이 달라진다는 것이 바알신이에요. 

성전에 몇 번 나오는지, 출석률이 높아야 되고 제물의 양이 증가하게 되면 정성이 더 지극하다는 의사로 알고 그만큼 응답도 풍성하게 해주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돈 놓고 돈 먹기라고 하는 겁니다. 큰돈 얻으려면 큰돈을 내놓아야 해요. 주식한다고 2장사고 3장사고 이래선 안 돼요. 빚내서 한 5000장사야 나중에 그게 대박이 되든지 망하든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교재를 보면 나옵니다. 과연 우리가 인간이냐? 돈이 돈을 낳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그 논리를 제가 적어놓은 거예요. 처음에 일상생활이라고 되어 있죠. 교요한 일상생활, 정말 고요할까요? 큰 흐름에 휩쓸려가고 있습니다. 교요하지 않습니다. 큰 흐름에 휩쓸려가고 있어요. 

하나님 회의론인데, 아까 스바냐 1장 12절에서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 이게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 다니면서도 그걸 느껴요. 그냥 재미로 다니는 거지, 하나님은 좀생이가 아니니까 이거 했다고 벌 내리고 저거 했다고 벌 내리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자, 예레미야를 한 번 봅시다. 예레미야 44장 17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17절,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정녕히 실행하여 우리의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방백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대저 그 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하늘여신을 아스다롯이라고 합니다. 바알의 부인이죠. 하늘여신을 섬겼더니만 응답이 왔잖아요. 마귀가 응답을 주죠. 왜? 그래야 너희들이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것을 마귀가 계속해서 격려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말은 교회 다녀서 이익을 봤다 이 말이 아닙니까? 

그러면 처음부터, 교회 갈 때부터 뭘 노린다? 내가 지금보다 힘을 더 갖는 거예요. 왜 힘을 가져야 된다고 했습니까? 첫째시간에 했잖아요? 왜 힘을 가져야 돼요? 힘을 계속 가져줘야 견줄만한 대상이 없는 절대적 존재가 되는 여정에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신에게 계속 응답을 받게 되면 나도 언젠가는 최고의 자리에 이를 것이라는 그 인생의 목표가 힘겹고 고된 일상을 견디게 하는 유일한 꿈, 드림dream이잖아요. 꿈이라 이 말이죠. 

전에 광주강의에서 맥아더기도를 예로 들었죠. 맥아더장군이 그만큼 욕심이 많은 줄 몰랐죠. 자기자식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보세요. 그 우상성, 이단성을 한 번 보세요. 맥아더기도 몰라요? 인터넷에 자식을 위한 기도가 나옵니다. 그게 하도 유명한 기도라서 액자로 많이 팔아요. 내 자식이다 이 말이죠. 자기자식인데 하나님 자식 만들겠다고 그거 하고 있는 거예요. 

그냥 전부 교회가 하늘여신을 섬기고 있다고 보면 돼요. 전 교회가. 십자가가 아니고 전부 대나무로 보면 돼요. 모든 교회가 그냥 무당집이에요. 그 무당집을 그만 사람들이 천국 가는 집으로 오해를 하다보니까, 우리교회는 언제 저 교회처럼 안 되냐고, 자꾸 모델로 삼을 수 없는 것을 모델로 삼아버려요. 이 옆에 있는 중부교회처럼 언제 주차장이 있어가지고 남은 주차장을 다른 사람에게 활용하게 해주나? 뭐 이런 식으로. 

무당 짓을 안 하면 교인들이 오겠어요? 안 오죠. 사람들이 왜 사는데요? 신이 되고 싶어서 환장한 인간들이에요. 절대자가 되려고 환장한 인간들인데 거기에다 구미를 맞춰 줘버리면, 입맛에 맞게 해주면 고객만족 아닙니까? 고객이 왕이잖아요. 장사가 되죠. 

18절을 봅시다. 18절, “우리가 하늘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이래 되어 있거든요. 지금 이 사람들이 왜 화를 내는 겁니까? 우리가 가난하고 핍절당하고 창피스럽고 남한테 무시당하는 이것이 자기의 본모습이다? 아니다? 이거는 자기의 본모습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핍절하게 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게 한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게 니가 몰랐던 너의 본모습이다. 고마운 줄 알아라 이것들아! 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 핍절과 칼, 기근, 이 모습이 신약으로 넘어가면 이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사람들에게 밉상 받아서 십자가 벌거벗고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그 모습이 누구 모습이에요? 하나님 아버지 앞에 앉아있는 현재 우리의 모습이에요. 이게 그 모습이에요. 

자꾸 애써 외면하려고 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처참한 몰골과 흉측한 그 모습이 딱 우리들이에요. 딱 나에요. 이런 자 만이 합격합니다. 이런 자 만이.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 것을 알 때, 사람들은 그런 자기모습이 되는 것을 자기 속에 있는 마귀가 애써 격려합니다. “왜 자꾸 너를 부정적으로 낮춰보려고 하지마라. 니는 얼마든지 절대자가 될 수 있다.” 마귀가 하는 그 주장은 영원토록 한결같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의가 있으면, 선악에서 선한 것이 있으면, 부자청년도 마찬가지죠. 선한 것이 있으면 복이 오지 말라고 해도 복이 오고, 복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힘이죠. 힘이 오게 되어 있고, 힘이 오게 되면 니가 원했던 최고의 자리, 영웅의 자리에 오를 수 있어. 힘내! 이렇게 마귀가 이야기하잖아요. 

이 마귀가 하는 이야기가 오늘날 부모가 자식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애가 이렇게 하다가 좀 엎어지면, “이거는 길들여야 돼. 혼자 힘으로 일어나야 돼. 그래야 나중에 어떤 역경을 만나더라도 스스로 일어설 수 있어.” 그러면 스스로 일어나게 되면, 일어나서 가만히 있습니까? 그걸로 만족합니까? 만족이 어디에 있어요? 최고의 자리까지 질주하는데요? 참 훌륭한 신사임당이에요. 

첫째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중심은 이겁니다. 지금 마귀하고 싸우는 이 중심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이냐 아니면 나 중심이냐. 나 중심으로 선악체제를 잡아버리면 우리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까지라도 골라내서 그거는 제키고, 악을 멀리하고 선만 차곡차곡 모아서 자기 의로써 절대적인 자기화, 이런 의로움이 가득 차 있는 이상 설마 하나님 나를 죄인이라고 하겠느냐, 저주하겠느냐, 라고 이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근데 로마서 3장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하시고, 율법대로 지키기 때문에 의가 쌓이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주신 목적은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저주아래 있게 함이라. 저주아래. 저주아래 있다는 말은 인간도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제가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도 했지만, 인간도 아닌 것들의 평판에 놀아나지 마세요. 움츠려들지 마세요. 인간도 아닌, 마귀의 나불거리는 소리에 주눅 들지 마세요.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니가 뭐 안다고? 세상은 예수님 중심이지 내  잘남의 중심이 아니야.” 톡하고 이렇게 면박을 주라 이 말이죠. 

한 번 정리를 해봅시다. 간단하게 정리를 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했다. 철저히 망했죠. 망할 때 개인적으로 망했습니까? 집단적으로 망했습니까? 집단적으로 망했죠. 이 말은 누구 탓 할 것 없다 이 말이죠. 뭐 착한 사람, 악한 사람 필요 없어요. 나라 전체가 다 포로 잡혀갔어요. 나라전체가. 심지어 나라 전체가 포로 잡혀 바사나라에 갔을 때에 부림절이라고 있어요. 

에스더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하수에로 왕 때 미스바사를 뽑는 것 있죠. 그때에 그 나라가 포로 잡혀갔다고 해서 예수님 중심이 사라진 게 아니에요. 물론 유대인들은 자기중심으로 언젠가는 회복되리라고 생각했죠. 중요하기 때문에 적어볼게요. 비록 우리 이스라엘이 죄를 지어서 바사나라에 왔지만, 이 유대나라는, 그때는 이스라엘이 없어요. 유대나라에요. 이 유대나라는 언젠가는 회복될 거야, 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이거 하나님 뜻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죠. 이거는 인간의 희망사항이지 하나님 뜻이 아니에요. 그럼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있지 않는가? 함께 있어요. 함께 있는데, 이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어요? 에스더가 뭐라고 했습니까? 죽으면 죽으리라고 했죠.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했을 때 에스더는 죽었어요. 그 순간, 이거 고백하는 순간 에스더는 산 사람이 아니고 죽은 사람이에요. 

죽으면 죽으리라고 한 것이 뭐냐 하면 누가 와서 붙들었기 때문에 붙든 분이 알아서 할 문제지 내가 알아서 할 문제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지금 에스더가 오기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말로 요시よし(좋아)!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이정도로 결심했는데도 나를 안 도와줘? 이런 뜻이 아니라니까요. 

그냥 주님 앞에 붙잡히니까 ‘죽으면 죽으리라’에요. 예수님하고 마찬가지에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이 일하셨어요. “자기 뜻이 아니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걸 에스더 식으로 말하면 뭡니까? “죽으라면 죽어야죠. 그게 아버지의 뜻이라면.” 

제가 아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자기에게 일어난 환경에 대해서 본인이 판정내리지 말라고 했죠. 뭐 하면 된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사나죽으나 누구 뜻이다? 꼭 살 필요 없다니까요. 죽으라고 하면 죽으면 되고, 살려주면 살면 되죠. 참 말은 쉽게 한다. 내가 생각해도. 

근데 이걸 쉽게 하나 어렵게 하나, “목사님 그 말씀 우에 지킵니까?” 자꾸 지킬 생각하지 말고, 주께서 그렇게 몰아가시는 거예요. 몰아가시는 거예요. 어떤 분이 저한테 가락강의에서 그런 질문을 했어요. 하나님 말씀을 지키면 내 친구라고 하니까, 우리가 말씀을 지키면 되지 않습니까? 그거는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친구 되도록 그렇게 이끄세요. 열두 제자가 다 도망갔다는 사실을 빼먹으면 안 돼요. 도망갔던 사람을 끝까지 따라와 붙들어서 죽으면 죽으리라고 만들어낸 거예요. 

그거 누가 만들었어요? 주님이 만들어낸 거예요. 왜? 세상 모든 일은 누구 중심이기 때문에? 예수님 중심으로 지금 돌아가고 있는 중이라니까요. 지금 우리가 일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우리를 가지고 주님이 일하시는 거예요. 근데 주님이 일했다는 그 증거가 뭐냐 하면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는 거예요. 

자, 짜장면 보통을 시켰는데 주방장이 잘못 만들어서 곱빼기를 줬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죽으면 죽으리라고 그냥 다 먹어야죠. 그런 뜻이에요. 이번에 애가 시험을 쳐서 나는 전교 5등만 바랐는데 1등을 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빨리 공부 못해서 5등까지 내려가! 이래야 됩니까? 그러지 마시고, 뭐 까라면 까야죠. 이런 식으로 그 1등한 것을 화내지 마시고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화내지 말고. 

남편 보너스 한 이백만원 받아와가지고 갑자기 목돈이 생겼다, 너무 분노하지 마세요.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세요. “내 인생이 와 이러노? 갑자기 왜 돈이 들어왔노?” 이러지 마시고. “뭐 까라면 까야지. 이러면 여행가야지. 할 수 있나? 가기 싫어도 가야지. 이 돈 가지고.” 뭐 이런 식으로. 속으로는 좋으면서. 이렇게 되는 일이 뭐 기도를 많이 해서 이렇게 됐다든지, 헌금 많이 해서 그렇다든지, 그런 것 하고 연관시키지 마세요. 그러면 내 중심이 돼버려요. 

싸움은 그 싸움이라고요. 내 중심이냐? 주님 중심이냐? 자, 그 전쟁이 있는데, 그 전쟁이 무슨 전쟁이냐 하면, 사사기 4장을 한 번 봅시다. 구약을 복음적으로 어떻게 봐야 되는가를 제가 알려드립니다. 7절,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스사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셨느니라” 붙이리라, 붙인다, 네 손에 붙인다. 붙이리라는 말은 그 일의 기획을 누가 했다는 말입니까? 이스라엘이 했다는 말입니까? 이스라엘로 하게 하신 주님이 했단 말입니까? 주님이 하셨죠. 

아까 에스더서에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고백을 했단 말은, 이번 유대나라의 승리를 누가 기획했다는 말입니까? 에스더가 기획했어요? 아니면 모르드개가 기획했어요? 고백하게 하시는 주님이 기획한 거예요. 주님이 하신 거예요. 주어진 환경입니다. 붙인다는 말은, 세상 돌아가는 그것을 니가 돌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생 이런 식으로 움직임을 하도록 우리가 한 게 아니에요. 정말 돌아버리겠네요. 주님이 그때마다 환경을 그렇게 조성하시는 겁니다. 

특히 장사하는 사람들이 단골이 오게 되면 으레 오는 것으로 여기지만, 만약에 그 단골이 한 두어 번 안 오게 되면, ‘아, 그때 내 뜻대로 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당연한 것이 아니고 그동안 발걸음을 인도해주셨구나.’하는 거예요. 이거는 목사가 교인들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그 사람은 늘 와서 앞자리에 앉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덜덜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매주 허락하셔서 참석한 거예요. 그럼 참석을 못했다, 그럼 오늘 허락을 안 하신 거예요. 

그럼 교인들이 다 참석을 했다는 것은 주께서 다 허락을 하셨다는 말입니까? 그럼 기분 좋겠네요? 아니요. 왜냐하면 교인들은 다 참석했는데 자기 자리에 늘 앉아있던 목사 본인은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했어요. 이 자리에 앉는 것도 내 뜻이 아니고 주님께 휘둘린 거예요. 주께서 이렇게 몰아세우신 겁니다. 이게 ‘붙이시매’에요. 이 전쟁을 가지고 ‘붙이시매 전쟁’이라고 해요. 

붙이시매 전쟁에 있어서 특이점이 뭐냐 하면 어느 것이 중심기둥이냐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준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준다고 이렇게 돼버리면 우리가 중요하고 주님은 그냥 후원하는 것밖에 안 되잖아요. 사사기 같은 경우에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줘버리면, 그 도움 받은 그 이스라엘이 얼마 안 가서 다시 우상을 섬기게 되어 있어요. 뭐 도와줌이 왜 그리 시효가 짧아요. 도와줌이. 

도와주려면 세상 끝 날까지 팍팍 도와줘야지, 기껏 도와주는 것이 몇 년 가지도 않아요. 다시 이방신을 섬기고 또 부르짖고 주께서 또 도와주고. 도와줌이 이렇게 한계가 있다는 말은 처음부터 도와줬다는 말에 대해서 뭔가 수정이 필요한 겁니다. 전쟁을 벌이는데, 이 드보라 전쟁에 있어서 원래 누가 해야 하느냐 하면 군대장관 바락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바락이 대표적으로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되어 있어요. 바락은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사사기에 보면 이 전쟁을 바락한데 줬는데, 이 바락이 남자잖아요. 자기가 해야 되는데, 가나안 땅 종족중의 하나인 이 야빈 군대의 숫자가 너무 많아요. 주께서 붙여줄 때에 이쪽은 한 열 명 되는데 저쪽에서는 22개월 된 어린애 하나가 그냥 걷는지 마는지 오게 되면 그건 붙여 준 게 아니죠. 그건 안 붙여줘도 자기 손에서 처리해야 되는 거예요. 

자, 다윗과 골리앗이 전쟁에서 같이 싸웠습니다. 다윗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전쟁은 하나님이 붙여준 전쟁이라고 해서 인간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본 반면에, 골리앗 입장에서는 이거 붙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애 하나 오는 것, 이거는 뭐 한 줌의 먹잇감도 안 되잖아요. 

누가 이겼습니까? 그냥 다윗도 아니고 소년다윗이죠. 소년 다윗이 이긴 게 아니에요. 소년 다윗을 앞장세운 누가 이겼습니까? 주님이 이겼어요. 다윗이 거기서 이겼다고 그 다음부터 다윗은 매일같이 물맷돌만 돌리고 있습니까? 아니다 이 말이죠. 날아가는 그 돌멩이 그 궤적까지 다 주님이 하셨죠. 골리앗은 하나님이 붙여주셨기 때문에, 골리앗은 저쪽에 있고 다윗이 물맷돌을 반대쪽으로 던진다고 해도 골리앗은 쫓아가서 그 돌에 맞아야 돼요. 

마치 예수님께서 아무 물고기를 잡았는데 거기서 동전이 나와서 그 돈으로 성전 세를 낸 것처럼. 성전 세를 그 동전으로 낸 것은 예수님 본인이 성전 세를 받을 자임을 알리시는 거예요. 내가 바로 성전이다. 내가. 내가 하나님의 집이다, 라는 뜻이에요. 

어쨌든 그런 것처럼, 드보라의 전쟁에 있어서 바락이 해야 될 일인데, 바락이 자기중심의 일을 포기를 해버려요. 왜냐하면 붙여준 전쟁이 아니고 본인이 이기려고 나선 전쟁이라 자신감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당시의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 선지자가 여선지자 드보라에요. 제발 여장부라고 말을 붙이지 마세요. 팜므 파탈(Femme fatale, 치명적인 여자)이니, 걸 크러쉬(girl crush, 여자가 봐도 반할 반한 여자)니, 이러지 좀 마세요. 

다만 이 전쟁은 우리 손에서 해결될 전쟁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야말로 누가 붙여줄 때만, 어차피 전쟁의 승리는 우리가 할 수 없어요. 승리를 시작하신 분이 승리를 가져가시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뭐가 중요하냐 하면 이 승리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절대로 인간들의 승리가 아님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전쟁이 진행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전쟁이. 

자, 여러분들이 구원받았다고 합시다. 구원받았으면 인생을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뭘 제대로 보여줍니까? 구원의 그 절차, 절대로 나의 의로, 행함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죠. 디도서 3장 5절 말씀에서 보았듯이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는 거죠. 

주님의 긍휼하심과 주님의 붙여주심으로 우리가 구원되었다는 것을, 인생의 어느 사건이 있더라도 그 사건 안에 실려서 우리에게 찾아왔으니까, 우리는 그 사건을 맞이해서 그 사건에다가 화답하는 식으로 “주께서 하셨잖아요.”라고 답변을 그렇게 주님한테 보내면 되는 겁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내보내면 되는 거예요. 

그럼 이번 전쟁에 있어서, 이걸 남자에게 줬는데, 이번 전쟁의 주인공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 두 명이 나와요. 하나는 드보라가 나오고 하나는 야엘이 나와요. 야엘이라는 사람에게 패잔병으로 찾아온 사람이 있었으니, 그 남자는 바로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에요. 그 시스라가 전쟁에 패배해서 쫓기니까 야엘이라는 아줌마 집으로 도망갔어요. 이스라엘 적인 시스라 장군이 패배한 이유가, 여자가 나서니까 그 다음부터는 열두 지파 각처에서 용사들이 떼처럼 자기지역에 연연하지 않고 이 전쟁에 참전을 개시한 거예요. 

그러면 원래 이 일을 누가 해야 한다? 남자가 해야 되잖아요. 남자가 해야 하는데, 바락이 못하겠다고 나자빠졌죠. 그러면 이 전쟁의 핵심은, 이 땅에 중심이 있음이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 중심이 없음이 돼요. 남자한테 맡겨줬는데 남자 대신 여자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남자 대신 여자 드보라가 했다가 아니라, 남자 없음을 통해서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는 겁니다. 

여자가 했다는 말은 여자가 영광 받는 것이 아니고 남자가 없이 했다. 다른 말로 하면 이거는 사람이 하지 않았다. 다른 말로 하면 그럼 누가 했다? 하나님이 친히 하셨다가 되는 겁니다. 이게 붙여주는 전쟁이에요. 기드온이 있죠. 기드온에게 32,000명 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300명 남고 다갔죠. 그 300명이 횃불로 승리했잖아요. 근데 그 승리가 기드온의 승리입니까? 주님의 승리입니까? 주님의 승리죠. 

근데 그 기드온은 왜 들어갔느냐, 기드온의 칼날(삿7장14절)이요. 기드온이 들어가는 이유는 기드온이 한 게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기드온이 들어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승리요 되지도 않은 기드온의 승리요, 이런 뜻이라는 말이죠. 아무것도 없는, 별 볼일이 없는 자의 승리가 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 하면 이번 승리에 인간이 보탠 것은 일체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악의 기준에서, 인간중심의 선악기준을, 그걸 하나님이 적으로 간주해서 아무 기준이 없는, 아무 중심기둥이 없는 가운데서의 의가 인간중심의 의를 공격하는 겁니다. 인간의 자기 의를 이 땅에서 아무 의도 없는, 죄인이라고 우기는, 우길 필요도 없이 죄인이 맞지만, 그들의 의가 저쪽의 의보다 나은 거예요. 그걸 치는 겁니다. 이 땅의 전쟁이. 

예수님을 살해했잖아요. 그럼 이 세상에 예수님은 없는 분이죠. 죽여서 보냈으니까. 없는 분의 의가 있는 사람의 의를 공격해서 진정한 의의 나라, 천국을 들어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 일관된 작업이 바로 사사기에 나온다는 이 말입니다. 

자, 그럼 다시 야엘로 돌아가 봅시다. 야엘이라는 그 아줌마 집에 시스라가 허겁지겁 들어왔어요. 그래서 사사기 4장 18절에 보면 “야엘이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그에게 말하되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하매 그 장막에 들어가니 야엘이 이불로 덮으니라” 푹 주무시도록, 쉬도록, 야엘이 참 착하죠. 

19절, “시스라가 그에게 말하되 청하노니 물을 조금 마시우라 내가 목이 마르도다 하매 젖부대를 열어 그에게 마시우고 그를 덮으니” 물을 마시게 하고 또 이불을 덮어줬어요. 그러니까 시스라가 얼마나 안심이 됐으면 푹 잤어요. 20절에 보면 깊이 잠들었다고 했습니다. 

자, 이 대목에서, 지금 누가 시스라를 쫓느냐 하면 전 이스라엘이 쫓습니다. 그런데 야엘이라는 농부아내는 이 시스라를 신고하기는커녕 잘 대접해서 편히 쉬게 하죠. 원기회복 하도록 물도 주고 따뜻한 방에다가 잠도 자게 하죠. 얼마나 마음이 편했으면 곤히 깊이 잠들겠습니까? 

그러면 지금 시스라 장군을 쫓아 지명수배해서 찾기에 급급한 사람들의 모든 공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뭐 시스라 죽이는데 아무 보탬이 안 되죠. 시스라 어딨어? 찾아야 되는데? 못 찾아요. 지금 야엘 집에 잠들어 있는데 못 찾는다고요. 그런데 야엘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장막 말뚝을 낑낑하면서 뽑아가지고 와서 말뚝채로 땅에다가 박아버렸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시스라 같은 이런 인간들은 약속의 땅에서 사람취급 할 가치조차 없는 겁니다. 근데 그걸 누가 죽이냐 하면 여인이 죽이죠. 그럼 전쟁은 남자 없이 시작해서 끝까지 남자 없이 끝나버린 거예요. 적의 장군이 죽었으니까. 나중에 가나안 왕 야빈도 진멸 당해죽어요. 

결국 이런 스토리가 뭐냐 하면 아무리 남자들이 설쳐대도 마무리는 여자가 짓는다. 여자가 짓죠. 여자가 마무리를 지었잖아요. 좋게 한 것이 아니라 이거는 벌레 한 마리 콱 밟아 죽이는 것처럼, 사람을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고 말뚝으로 박아버렸어요. 21절, “말뚝을 그 살쩍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시스라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여자는 아까 뭐가 없다? 남자 없음이죠. 남자 없는 상태에서 시스라가 죽었다고 하면 누가 죽인 거예요? 여자의 모습이지만 하나님이 죽인 거죠. 그러면 시스라는 처음부터 하나님 보시기에 이거는 살 가치도 없는 거죠. 살 가치도 없죠. 

그럼 살 가치도 없는 쪽한테, 살 가치도 없는 허수아비 같은 그들에게 이스라엘이, 바락이 벌벌 떨면서 “아줌마! 나 좀 도와주소!”라고 한다는 말은 그 당시 이스라엘 신앙이 지금 하나님의 중심과는 전혀 맞지 않다는 이야기를 이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다시 한 번 꾸짖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꾸짖는 방법은 전쟁을 일으켜서, 그 전쟁에서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고 모든 남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방식으로 전쟁에 승리케 함으로 말미암아 그 승리 앞에서 모든 이스라엘이 “우리가 평소에 우리 중심으로 살았지 주님 중심으로 살지 않았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하게 만들죠. 

그러니까 이 전쟁이 결국 신약으로 오게 되면 십자가로 완전히 뭉쳐져요. 십자가로 모든 것이 최종상태에 이릅니다. 십자가에서 완료된 모습을 보여줘요. 완성의 모습을 보여줘요. 그러면 십자가 앞에 우리가 설 때에 뭘 느낍니까? “나는 이만큼 바르게 살았습니다. 착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라고 이런 소리를 할 겁니까? 바르게 산들, 착하게 산들, 악하게 산들, 십자가 앞에서는 의미가 있어요? 없어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중심이 십자가 중심이기 때문에. 내 중심이, 내가 착해서 구원받는 중심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이런 전쟁을, 시스라와 야엘의 전쟁을 계속해서 치르게 되는데, 제가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제발 우리가 야엘이 되어달라는 겁니다. 야엘이. 야엘이 전쟁할 때에 무기 들고 나섰습니까? 가만히 있는데 누가 기어들어왔어요? 알아서 들어왔죠. 

야엘이 시스라라는 적군의 남자 장군을 무서워했습니까? 무서워 한 게 아니고 갖고 놀았죠. “예~ 어서옵쇼! 뭘 도와드릴까요? 우유 드리겠습니다. 따뜻한 방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껏 우리 집에서 편히 쉬세요.”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상대방을 사람으로 취급을 했다? 안 했다? 말뚝으로 박는 것 보세요. 사람취급 했습니까? 인간존엄성을 인정해줬습니까? 존엄성이 어디에 있어요? 

바로 그러한 야엘의 안목으로 우리가 평소에 이 세상 사람들을 보고 있느냐를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교회 목사가 돈만 밝히고 우리 교회 목사는 엉망이야. 어떻게 하면 좋아. 기도해서라도...”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그런 시스라를 가지고 기도한들. 

“목사님한테 건의했더니만 목사님이 짜증을 내고, 장로님 말도 안 듣고,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럼 제가 물어요. 목사 나이가 얼마나 됐습니까? “나보다 다섯 살 어립니다.” 그럼 어린데 그 말을 왜 듣습니까? “주의 종이고 어떻고...” 그러니까 그 생각이 목사를 위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주의 목사를 이렇게 섬겼습니다.”라고 하는 그 선악의 중심에 누가 있어요? 본인이 있어요. 

그러면 본인을 말뚝 들고 본인을 찍어버려야 해요. 오늘 제목을 말뚝으로 해버릴까요? 본인을 늘 찍어버려야 해요. 본인을. 세상이 내 중심으로, 내 잘난 중심으로, 내가 이만큼 훌륭한 신앙인의 중심으로 자랑하는 그것을 말뚝으로 찍어버려야 해요. “나는 복음도 알고 이제는 어떻게 구원받는가를 알았으니까, 나는 이정도면 신앙인이겠지.”라는 그걸 박아버려야 해요. 그게 마귀생각이라니까요. 

이제 복음 알았으니까 헤헤거리면서 자기 할 짓 다하고 다니면서 복음이 안 들리는 쪽으로 내빼기나 하고. 얼마나 내빼는지. 복음 알았으니까 챙길 것 챙겼으니까 내 마음대로 산다고요? 목사님도 그랬잖아요? 자기 맘대로 살라고. 니 맘대로 사세요. 살면서 십자가가 나와야 돼요. 나는 잘했다가 나오면 그거는 십자가 모르는 거예요. 

마음대로 사시되, 그 결과는 뭡니까? ‘아, 내가 정말 마음대로 살 수 없는 인간이구나. 주께서 이렇게 죄인으로 살도록 해주셨구나.’ 이게 나와야 되는데, “복음 아는데 뭐 마음대로 살면 어때?” 지금 정신이 어디에 가있느냐 하면 자기 행복에다가 마음대로 못 살아서 환장을 했어요. “이참에 잘 됐다. 이근호 목사가 이야기했기 때문에 나도 이근호 목사 핑계대고 마음대로 살자.” 이거 뭐예요? 이거 중심이 누구 중심입니까? 자기중심이잖아요. 그거 시스라입니다. 말뚝가지고 콱 박아버렸으면 좋겠어요. 악담으로 끝나버리네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마귀가 우리 속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 핑계대고 하나님 핑계대면서 속에 자기중심으로, 자기 편한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것을 날마다 십자가로 박아버리게 하여 주시옵시고, 그냥 피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