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선입견 파괴 18031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3. 18. 17:22
2018-03-17 00:30:52조회 : 97         
선입견 파괴 180316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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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8.64)18-03-18 16:28 

서울의존강의20180316a 베드로전서1장 1-7절(선입견 파괴)-이 근호 목사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절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절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절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절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6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절 너희 믿음이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를 오늘부터 시작하겠습니다. 1장 1절에 1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절,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이렇게 되어 있는데, 여기에 ‘나그네’라는 말이 나오죠. 

나그네라는 말이 나오고, 그 다음에 그 앞에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지금의 터키지역인데, 이걸 대한민국이라고 본다면, 강원도-본도, 그 다음 경상북도-갈라디아, 그 밑에 경상남도-갑바도기아, 전라도 충청도-아시아, 경기도 서울-비두니아, 라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어쨌든 터키의 전 지역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나그네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그 나그네라고 지칭이 되는 사람들, 현재의 터키인데, 그때는 터키가 없고 본도, 갑바도기아, 갈라디아, 아시아, 비두니아, 뭐 이런 식으로 했는데, 흩어진 성도가 있다는 겁니다. 흩어진 성도가 없으면 이런 이야기를 안 했을 거예요. 그럼 흩어진 성도가 이 중에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예를 들어서 아시아 이 지역에, 우리나라 같으면 충청도 전라도에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은 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나그네라고 되어 있거든요. 나그네. 그러면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는 나그네라고 하는 것은 아시아에 살다가 갑바도기아 또는 비두니아로 돌아다니는 것을 나그네라고 하잖아요. 근데 그 사람이 평생 아시아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아시아라는 동네에서 한 발짝도 나간 적이 없고 늙어죽었다. 그래도 나그네입니까? 나그네 아닙니까? 어디 옆 동네로 가 본 적도 없는데요? 돌아다닌 적도 없는데요? 출장 간 적도 없는데요? 우리의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이 사람을 나그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붙박이라고 하죠. 그냥 터 잡고 사는 사람. 그러면 나그네라는 말이 성립이 되려면, 본도 갈아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말고 다른 동네가 제시되어야 합니다. 

그 다른 동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바로 4절에 나와요. 4절,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래 되어 있죠. 그렇다면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 나그네라는 사람의 소속이 어디 갑바도기아입니까? 아시아입니까? 비두니아, 본도입니까? 갈라디아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거기에는 일체 소속이 되어 있어요? 안 되어 있어요? 나그네니까, 어디 소속이 되어 있으면 나그네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면 이런 세상에는 소속이 안 되어 있고, 어디에 소속이 되어 있느냐 하면 하늘에 간직한 나라에, 하나님이 주신 천국에 소속되어 있죠. 그렇죠. 그렇다면 베드로전서를 시작하면서, 1장 1절에 베드로가 말하기를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뭐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지역민이에요. 그 거주지가 맞다 이 말이죠. 

그러면 베드로가 편지를 할 때, 나그네라고 이야기한다고 할 때는 그 지역민한테 이야기하면 안 되고, 딴 동네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맞는데, 나그네라는 말을 하면서 그 지역민을 이야기했다는 말은, 그 지역에 살지만 그 지역에 소속되어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 편지하노니, 이래 되는 거예요. 소속되어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럼 이 편지는 하늘에 간직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에 간직하신 기업, 하나님의 그 나라에 성령이 없어서 소속이  안 된 사람 같으면, 이 베드로전서는 뭐냐 하면 희대의 사기극입니다. 희대의 사기극이에요. 

강원도-본도, 그 다음 경상북도-갈라디아, 그 밑에 경상남도-갑바도기아, 전라도 충청도-아시아, 경기도 서울-비두니아, 라고 이 지역을 우리나라로 이야기했잖아요. 이렇게 구체적으로 지명을 이야기했는데, 그래서 구체적으로 지명을 이야기한 걸로 봐서는 이건 사기극이 아니다. 왜? 구체적으로 지명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없는 나라를 이야기한 게 아니라 있는 지명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희대의 사기극은 아닌데, 어떤 편지의 대상자가 있는데, 

그런데 나그네라는 말을 함으로 말미암아 살기는 여기에 살되 하늘나라에 소속된 사람에게 편지하노니, 라고 이렇게 돼버리면 이 편지를 대하는 사람들 가운데, 천국 갈사람 같으면 기뻐하겠고, 만약에 천국을 못 갈사람 같으면, 도저히 갈 수 없는 사람 같으면 이 베드로전서의 내용은 희대의 사기극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는. 

그렇다면 이 베드로전서의 편지의 내용가운데서, 이 세상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나님 앞에 도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한테는 이 베드로전서가 하등 소용이 없는 편지가 되는 겁니다. 거부감을 유발할 수밖에 없어요. 특히 여기 2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라고 되어 있죠.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택하심을 입었다고 했으니까 이거는 피동성입니다. 본인이 본인을 택하지 않았다 이 말이죠. 근데 인간은, 만약에 천국이 있다면 본인이 본인을 선택해서라도 가고 싶어요. 그렇다면 이 베드로전서는 그 사람들한테는 희대의 사기편지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강의하는 자나 강의를 듣는 사람이 출발을 어디서부터 해야 되느냐 하면, “여러분 택함 받았죠?”라는 출발부터 해서는 안 되고, “자, 이 베드로전서가 왜 사기극인지 한번 조사해봅시다.”라고 이렇게 시작을 해야 된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편지를 듣는다고 해서 다 천국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럼 천국 갈 사람을 해놓고, 좋은 고기 나쁜 고기 가려내는 것처럼, 천국 갈 사람이 있다고 치고, 못 갈 사람이 고기라면 한 마리, 두 마리.. 빼내는 식이에요. 제외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자 이 말입니다. 제외시키는 방법. 거기에 이 베드로전서의 편지가 적절합니다. 하나 둘 빼내는 데에는. 반대로 뭐, “사람이라면 듣고 억지로라도 믿고 교회 나오세요.”라고 하면서 끌어 모으려고 하면, 이것은 나그네를 위해서 준 편지라는 취지가, 이게 없어져버려요. “인간이냐?  그렇다면 다 납득이 된다.”이래 되어 버린다니까요. 

이것이 베드로전서만 그렇겠어요. 모든 성경이 다 그렇죠. 사도바울의 편지를 볼 때 성령 받지 아니하면 못 알아듣는다 이 말이죠. 그런데 천국가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사도바울의 편지를 인용하는지. 만약에 우리가 그들 입장이라면 사도바울의 편지나 베드로의 편지는 이거는 사기입니다. 

자, 사기가 뭐냐 하면 사기라는 것은 누굴 교묘히 속이는 것을 사기라고 하잖아요. 그럼 사기가 아닌 게 뭐냐 하면 인간이 뭘 행하게 되면 그 결과가 제공되는 것이 사기가 아니에요. 인간이 뭘 행하게 되면 제공되는 것. “이거 가져보세요.”라고 하면 “예. 가질게요.”라는 행함. “이걸 갖겠습니다.”하고 손을 내밀어 이걸 갖게 되면, 이건 내 것이 되었다는 결과를 낳았을 때, 그건 사기가 아니에요. “가져보세요.”라고 해서 손을 내밀었는데, “안줘.”라고 하면 이거는 사기죠. 그렇죠. 

그렇다면 하늘나라가 “이거 드립니다. 이거 받으세요.”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냐 이 말이죠. “여러분! 하늘나라 다 갖고 싶죠? 예, 하늘나라 드리겠습니다. 하늘나라 소식을 전할 테니,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편지를 써서 하늘나라를 드릴 테니까 받을 사람은 다 받으시면 다 천국 갑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받는다는 행함만 제공된다면 누구나 하늘에 간직한 나라에 다 갈 수가 있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이 베드로의 편지는 고맙죠. 사기가 아니라 고맙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베드로 편지의 내용이 그게 아니고, “이거는 인간이 달라고 해서 받을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라고 이래 나온다면 천국가려고 만반의 열심을 다한 사람한테는, 만약에 그런 내용의 편지를 베드로전서라는 이름을 안 밝히고, “여기에 이런 내용의 편지가 있는데 한번 보니까 어떠냐?”라고 물어본다면, “이거는 완전히 이단이네. 이거는 사기네.”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어떻게 인간이 수용을 한다든지 받는다든지 뭐 그런 것도 없이, 왜 인간이 어떤 태도를 취하기 전에, 인간이 뭘 하기 전에 이미 구원이 결정이 됐다는, 그게 어떻게 납득이 될 이야기냐? 뭐 그런 게 다 있어? 그거 이단 아니야? 그거 이단이네! 이래 된다 이 말이죠. 제 말이 지금 어려운가, 어려워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어느 교회에 갔더니만 “택하지 않은 사람들은 나가세요.”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게 이단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예, 잘 나오셨습니다. 교회 나오는 행위도 주께서 알아주시고 기도소리를 무시하지 아니하시고 여러분이 예배 참석하시는 그 성의도 다 알아주셔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어여쁘게 여겨서 다 사랑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이러면 우리는 그 교회에 나간 보람을 갖잖아요. 보람을. 여러분, 보람이라는 게 뭐예요? 자기가 수고한 그 대가를 누릴 때 그게 보람이잖아요. 보람을 갖잖아요. “내가 뭘 해도 내가 기대한 것은 제공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 그건 보람을 갖는 것이 아니고 기분이 되게 나쁜 거죠. 

그러면 그런 목사한테 뭐라고 합니까? “당신 사기꾼이지? 이단이지?”라고, 이렇게 화가 나서 이야기한다 이 말이죠. 제 말은 그 사기꾼이 베드로다 이 말입니다. 그 사기꾼이 베드로다 이 말이에요. 행함도 없이 구원받는다는 이 말 자체가, 이게 교회가 하는 모든 것을 개무시 하는 것밖에 안 돼요. 교회에 왔는데, “여기에 택함 받지 않은 사람들은 다 나가시기 바랍니다.” 이러면 교회 되겠어요? 교회 운영이 되겠어요? 이 형광등 전기세라도 나오겠습니까? 안 나오잖아요. 

교회에 사람이 없으면 운영이 안 되고 교회 문닫아버리면, 교회 문닫아버리면 사람들의 그 다음 생각이 뭐냐 하면 “교회가 문 닫으면 무슨 수로 천국 갑니까?” 이래 나오죠. “교회 문 닫아도 천국 갑니다.”라고 한다면 그건 사기꾼이에요. 이건 이단이죠. 누구의 안목으로 보기에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가 아닌 사람들이 보기에는. 나그네가 아닌 사람이 보기에는 이미 그 사람은 사기꾼이고 이단이라는 말이죠. 

여러분! 나그네라는 말이 뭡니까? 스스로 나그네 되고 싶은 사람은, 뭐, 사업이 망해서 피해 다니는 사람이면 몰라도, 스스로 나그네 되고 싶은 사람은 없어요. 어디 정착하고 싶어요. 그런데 나는 경기도 서울... 어디에 있든지 나그네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나그네로 확정지어줬기에 그 운명을 내가 거부할 수 없습니다.”라는 그런 사람에게만 나그네라는 것이, 이게 합치가 되지 않습니까? 그렇죠? 아닌가? 

나그네라는 말은 머물 곳이 없다는 뜻이에요. 본도, 갑바도기아, 갈라디아, 아시아, 비두니아, 이곳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도 남들이 보기에는 그곳에 있어요. 본인이 본도 갈라디아, 강원도 경상북도 그곳에 있는데, 나는 나그네라고 하는 이 말은, 지금 자기 집에서 45년 째 살고 있는데 나그네라는 거예요. 붙박이처럼 박혀 살면서, 온 동네 구박질 다 하면서. 하도 오래 살다보니 자동적으로 그 다음 순번으로 이장이 되었어. 그래놓고 자기는 나그네래. 

그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여기서 살았기 때문에 나그네가 아니라, 살았기 때문에 분명히 나는 본토박이인데, 주께서 내가 살았던 그런 것은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나를 이 땅에서 떠날 사람으로 규정했습니다. 그게 나그네잖아요. 그게. 자기는 이 땅에 박혀 사는데, 자기가 하는 모든 행동의 결과가 그 지방에 박혀 사는 결과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의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너를 너 되게 한 그 분이 누구야? 이렇게 묻게 되겠죠. 

니가 지금의 너를 안 만들었다면, 니가 지금의 니가 되는데 아무런 책임이 없다면, 그러면 누구야? 오늘날 너를 이렇게 만든 게 누구야? 거기에 대해서 지금 베드로가 베드로전서를 통해서 소개를 하고 있는 겁니다. 소개하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베드로전서는 희대의 사기극입니다. 이거는 인간이 시도해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결과를 차단시킵니다. 베드로와 그 일당은 사기집단이에요. 가능성을 다 배제해버리니까.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다 배제해버려요. 이단이든 사기든 뭐 같은 말이니까 어떻게 말해도 상관없어요. 

제가 사기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극구 강조하는 이유는요. 베드로전서를 알아듣고 이해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의 모든 태도가 시작부터 끝까지, 이미 우리는 다 알고 있는 입장에서 나오는 태도가 되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자, 기존의 흔하고 흔한 교회의 교인이 한명 있다고 합시다. 흔하고 흔한 교회에 다녀요.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합니다. 행동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이런 행동을 함으로써 미지의 무슨, 지금까지 없었던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를 하는데 분명치가 않아요. 지금 하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자기는 인간이기 때문에, 신이 아니기 때문에 모른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베드로전서는 이미 시작과 끝을, 성도라면, 나그네라면 다 알고 있다는 겁니다. 다 알고 있는 그게 뭐냐 하면 2절에 나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피 뿌림으로 시작해서 피 뿌림으로 끝난다. 나그네는 피 뿌림에 합치되는 태도와 경향성과 행위를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했더니만 나는 이렇게 복 받았다.”가 나오는 게 아니에요. “십일조 했더니만 복 받았다.” 이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피를 위해서 헌금하게 되었고, 그 헌금의 결과가 피 뿌림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와요. 모든 인간의 행동에 피 뿌림이 제거되어 버리면 남는 것은 뭐냐, “나는 이런 행동을 하기 전에는 그런 결과가 안 나올 건데, 이런 행동을 함으로써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다.”라는 쪽으로 나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중보기도 아닙니까? ‘내가 기도를 안 하면 이런 결과가 안 나올 건데, 빡세게 기도를 하게 되면 바로 이런 결과가 나올 거야.’라고 생각할 때 그 사람이 기도하는 태도, 기도하는 경향, 기도하는 행동의 취지, 그것은 자기가 원하는 어떤 결과를 은근히 바라면서 저런 것들이 나오는 거예요. 자기의 행동이죠. 나는 이런 행동을 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나 지금 살아있어서 살아있는 자답게 행동하고 있다.’를 만방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는 뭐냐 하면 피 뿌림부터 시작해요. 피 뿌림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피 뿌림이라는 것은 이 땅을 다녀가신 예수님이나 너나 둘 다 이 땅에서는 죽은 자다. 이 뜻이에요. 피 뿌림이라는 게. 피라는 것은 죽지 않고 생기지 않는 법이잖아요. 피 뿌림을 입었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밉상 받아서 죽었던 그 피. 거기서 생산된 그 피를 누구한테 뿌린다? 어떤 자기 사람한테 뿌리게 되면, 예수님이 이 땅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죽은 자인 것처럼, 그 사람도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사실은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죽은 자처럼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 합당한 그 내용을 뿜어낼 수 있는 태도를 보일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 태도를. “이미 죽은 자입니다.”라는 그 태도를 보일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게 피 뿌림이에요. 어디 뭐 계란프라이에 후춧가루 뿌려서 아이고 맛있다고 하는, 요리에서 뿌리는 그런 뿌림이 아니에요. 인간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고, 달라진 그 인간의 태도나 경향성이나 취지나 소망 같은 게 다 달라지는 거예요. 그게 피 뿌림이에요. 

자, 피 뿌림하고 고춧가루 뿌리는 차이는 뭐냐, 고춧가루는 그 뿌림이, 짜장면 먹을 때 고춧가루 치는 것은, 콩나물국에 고춧가루 치는 것은, 이거 먹고 살라는 뜻이거든요. “살아있는 자야! 이거 먹고 더 튼튼하게 살아라!” 근데 피 뿌림은 “니가 산자 행세를 하면 안 돼! 니는 이 땅에서 이미 죽은 자처럼 살아야 돼!”라고 해서 피 소스를 뿌리는 거예요. 

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살고자 하는 것이 다 죄입니다. 아무리 경건하게 살고 거룩하게 살아도, 그렇게 해서 더 살아보겠다고 하는 노림수를 갖고 있으면 그건 죄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피 뿌림과의 태도가 정반대의 태도가 되기 때문에. 정반대기 때문에. 제가 아까 강의하면서 베드로전서가 이 시대의 사기극이라고 했죠. 안 믿는 사람에게는, 성령 안 받은 사람에게는. 

그리고 베드로전서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함이 아니라, 가짜는 하나 둘 빼내기 위해서 주신 편지에요. 이게 사기극으로 드러난 사람은, 사실은 천국 못 간다는 사람이라고 빼 낸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근데 이야기가 좀 진전됐잖아요. 우리는 산자가 아니라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확인시킨다고 할 때, 이게 만약 교회 같으면요, 저쪽 뒤쪽부터 벌써 다 나가기 시작합니다. 우르르 다 나가요. 엄마 같으면 그냥 안 나가요. 딸보고 “야야 나가자! 나가자! 이상한 소리한다.” 우리들이 알았던, 우리들이 기대 걸었던, 자기의 행함으로 자기가 구원받겠다고 기대해서 교회 왔던 것하고는 안 맞으니까, 이상한 교회니까 나가자! 이래 할 거고. 

그럼 장로는 나가는가? 장로는 안 나가요. 왜냐하면 장로는 부동산 소유자이기 때문에 장로는 안 나갑니다. 안 나가고 목사보고 나가라고 해요. 자기 가게니까. 자기 업소거든요. 업소의 조폭 같은데 왜 나가요. 다른 사람보고 나가라고 해요. 부동산 구입했다고. 그 교회에 돈 별로 안 낸 사람은 우르르 나가고. 중간쯤 남아있는 사람은 애매하게 목돈 낸 것도 아니고 장기적금으로 십일조 낸 것 밖에 안 되니까, 이런 사람은 발을 뺄까? 말까? 설교자 바꾸면 계속 있을 요량이죠. 어쨌든 간에 나가게 되면 다 나가는, 부동산 소유자 빼놓고 다 나갈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까요. 베드로가. 베드로전서가 그런 거예요.  

2절에 봅시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미리 아셨다 이 말입니다. 미리 아셨다. ‘미리 아셨다’는 것을 요즘 제가 강의하면서 주로 써먹는 것이 뭐냐 하면 ‘응시’라는 것입니다. 미리 보는 거예요. 우리 쪽은 못 보는데 주님 쪽은 보고 있는 거예요. 그냥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구원하기 위해서 보고 있는 거예요.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보시는데, 그 인간을 구원하는 데는 그 인간의 행함이 아무소용이 없어요. 

뭐가 필요 하냐, 예수님 자신의 피 뿌림으로만 종결돼요.
시작도 피 뿌림이고, 제가 시작과 끝을 안다고 했죠.
시작도 피 뿌림이고 끝도 뭡니까? 피 뿌림이에요.
처음에 예수 믿을 때는 피 뿌렸으니까
그 다음부터 예수 믿었으니까 십일조 하자. 십일조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끝까지 피 뿌림이라니까요. 시작도 피 뿌림이고 끝도 피 뿌림이라면 중간은 뭐가 되겠습니까?
피 뿌림이죠. 중간도. 순간순간 피 뿌림이에요.
십자가의 공로입니다. 십자가의 공로만 계속 나오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목돈 낸 것도 아니고 애매하게 낸 사람들까지도 다 나갑니다. 이러면. 처음에 돈 몇 푼 안 낸 사람은 빨리 나가고, 안 냈으니까 미련 없이 나가고. 한 5년 다녀서 목돈이 들어갔다 싶어서 그동안 머뭇거렸는데, 이 대목하게 되면 다 나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택하심을 얻었다는 이 말은, 그 사람 속에 무엇이 스며들어간다? 예수의 피가 스며들어가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의 피가 스며들지 않으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자가 아니고, 천국 갈 수 없고, 이 땅의 사람이지 나그네가 아닙니다. 나그네 아니에요. 

자, 그 다음 문제, 예수님의 태도라고 했는데, 제가 방금 태도라는 말을 했죠. 제가 태도라는 말을 쓰는 이유가 있어요. 이 십자가복음에 대해서 안다는 사람이 하도 많아요. 하도 많아가지고 골라내기가 참 곤란해요. 하도 자기가 복음을 안다고 해서. 골라내야 되는데. 그때는 어떻게 아느냐 하면 이 태도를 통해서 알 수가 있어요. 태도. 태도가 뭐냐 하면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두 가지를 이야기했죠. ①번, 하나는 무슨 태도? 내 행동에 어떤 결과를 기대하게 하는 이런 태도가 있어요. 은근히 기다리죠. ②번,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그 태도는 피 뿌림으로 인해 피 뿌림만 드러내는 태도에요. 이 태도가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첫 번째 것 이거 가짜거든요. 이거 나가야 돼요. 이런 태도는. ‘예수님 피 믿었으니까 앞으로 우리 가정이 잘 될 것이다.’라는 이런 결과를 기대하는 것, 이런 것 전부 다 가짜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의 피 뿌림과 크림소스 뿌린 것 하고 구분이 안 돼요. 

피 뿌림이라는 것은 자기 죽음을 이야기해야 되는데, 크림소스는 아무리 뿌려봐야 자기는 생생하게 살아 있잖아요. “아이고 맛있다!”이래된다 이 말이죠. 피가 맛있는 겁니까? 아니잖아요. 같이 죽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같이 죽었다는 확정된 증거잖아요. 그런데 크림소스나 짜장소스 같은 경우에는 이거 먹고 내가 더 신나게, 이만큼 잘난 인간이라는 것을 유별나게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이니, 십자가니, 그런 것을 자꾸 가져오는 거예요. 

모든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지식으로 다 수용하는데, 본인의 태도는 본인이 갈수록 더 생생하게 살았어. 더 생생하게 살아가지고 자기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 남한테 자랑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게 태도라는 거예요. 태도. 남한테 과시할 거리를 잔뜩 진열해놓는 자세. 마음자세. 그게 태도입니다. 

2절을 다시 보게 되면 “성령의 거룩함”이죠. 성령의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께서 시작과 중간과 마무리까지, 성령께서는 뭐만 이렇게 내세웁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만 내세우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뭐 랄랄랄랄~ 자기도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는 것, 그게 성령의 역사 아니에요. 

그래서 피 뿌림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령이 역사한다는 이 말은, 그냥 길거리에 가면서 “피 뿌림, 피 뿌림, 피 뿌림...”하는 것은 미친 거지, 이건 미친 거지 성령 받은 게 아니에요. “피 뿌림, 피 뿌림, 피 뿌림, 피 뿌림...” 공무원시험 치는 데 이름 쓰는 칸에 피 뿌림이라고 쓰고, 답에는 1번 피 뿌림. 2번 피 뿌림.. 경찰공무원시험 치는데 25번 끝까지 피 뿌림이라고 쓰면 그게 뭐예요? 빵점. 그건 정신병자죠. 

예수님의 피 뿌림이라는 태도가 나오려면, 주의 말씀에 입각해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왜 주님께서는 내 행위에 대한 결과나 행위 자체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고 구원하시는 이유가 뭐냐? 그것이 늘 나와야 되겠죠. 그것은 바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되비치게 하는 겁니다. “피 뿌림, 피 뿌림, 피 뿌림...” 이렇게 한다고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라. 

모든 일에 대해서 피 뿌림이 관여하게 되면 내가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근거는, 이미 지상에서 뿌리 채 뽑혔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돼요. 본도, 갈라디아... 어디에 가도, 요새 말로 하면 한국에 있다가, 중국에 이민 갔다가, 미국에 이민 갔다가, 캐나다에 이민 갔다가 그렇게 돌아다녀도, 그렇게 돌아다녀서 나그네가 아니라 캐나다에 정착해도 미국에 50년 정착해도 그 사람은 나그네가 돼요. 왜냐하면 피 뿌림은 이 땅에서 나그네 되신 분의 피기 때문에. 그 분의 피를 받아서 우리가 어디에 산다고 할지라도 나그네가 됩니다. 

따라서 구태여 나그네 삶을 산다고 이민 간다고 들썩들썩하지 마시고, 그렇게 되면 “나는 여기에 있지 않고 나그네의 삶을 삶으로서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하는 태도는, 아까 이야기한 태도에서 이건 ②번이 아니고 ①번에 해당하는 거예요. 어떤 내 행동, 이민 가고자 하는 내 행동이 나를 구원했다는 것을 반증해줄 것이라는 그 태도가 잘못된 태도죠. 신자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신자적인 태도는 이런 행동조차도,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거예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시험을 쳤는데 백점 맞았다. 시험을 쳤는데 수석합격 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거는 하늘의 축복이 아니죠. 피 뿌림 자체가 축복이기 때문에 피 뿌림으로 시작된 축복은 중간도, 시험에 합격이 되나 안 되나 축복이고, 마무리도 피 뿌림 자체만이 축복이 되는 겁니다. 옆에 있는 강도, 구원받은 강도는 마지막에 누굴 믿었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 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2-43). 

그렇다면 그 강도의 마무리는 결국 피 뿌림이죠. 십자가의 피 뿌림이죠. 그렇다면 그 마무리가 되기 전, 2시간 전에는 뭡니까? 소급해서 보면 그것도 피 뿌림이에요. 태어난 것도 이 땅에서 예수의 피를 증거 하기 위해서 강도질하라고 하신 거예요. 강도질하라고. 그래서 잡히라고. 그래서 사형당하라고. 사형날짜도 미루지 않고 즉각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죽으라고. 그러니 그 강도는 얼마나... 그 강도를 가지고 2절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미리 아심”이라고 되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미리 아심.  

하나님이 미리 아셨다는 것에 대해서, “직업이 어떤 직업이 좋습니까?”라고 할 것 없이, 어떤 직업이든 좋습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대해서는 어떤 직업도 거기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태도가 문제에요. 그 태도가. 피 뿌림을 성령을 통해서 아는 순간, 이거는 소급해서 전체가 피 뿌림과 관련된 인생을 살게 되었구나! 주께서 내 인생에 피 뿌림을 내용으로 하는, 피 뿌림을 스토리로 하는 인생으로 그동안 끌고 오셨구나!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이 베드로전서는 사기극이 아니고 진실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베드로전후서를 미리 한번 봅시다. 사기극 비슷한 게 또 나와요. 베드로후서를 봅시다. 베드로후서 1장 16-17절을 제가 읽습니다. 16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절,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게 언제 들었던 이야기죠? 

이걸 18절에 보면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이 소리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하늘에서 나왔죠. 이게 사기극이 아니고 뭡니까? 왜, 사기극이냐 하면은 우리 인간에게는 행동에 따라서 동일한 결과가 나올 때는 사기극이 아니거든요. 그럼 이 변화산, 이 거룩한 산, 다골산에 가봤는데, 다골산이 변화산인지 그거는 믿지 마세요. 성지순례 자꾸 부정하라고 해서 제 입으로 부정합니다. 부정해도 부정 자체에 또 의미가 있어요. 부정한다고 해서 입에 안 올리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로 의미가 있어요. 

어쨌든 간에 그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러면 그 뒤에 변화산에 간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잖아요. 쭉 올라갔어요. 소리 듣겠습니까? 소리 안 들리죠. 사기네! 그게 사기가 아니고 뭡니까? 그게 사기잖아요? 니는 되고 나는 안 되고, 이러면 안 돼요. 누구나 해도 동일한 결과가 나와야 사기가 아니잖아요. 지금 베드로후서를 보고, “나도 베드로처럼 그렇게 돼야지”라고 한다고 해서 베드로처럼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까? 못 듣죠. 그럼 베드로한테 “돈 물어 도!” 이래 나오죠. “왜 당신은 사람을 상대로 해서 사기를 칩니까?” 

누가 해도 동일한 결과가 나와야 그게 사기가 아닌데, 이건 베드로 자기 혼자 경험했다고 그걸 진리라고 전파하게 되면, 그럼 다른 사람은 뭐예요? 다른 사람은 “나는 왜 안 되는데?” 그럼 베드로가 “제가 된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요? 하나님 음성 듣는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요?” “아니, 뭐 샛별이야기하고 듣는다면서?” “그거는 하나님이 아신 자만 그렇고.” “왜 지금 와서 말을 바꾸십니까?” 

누구든지 베드로전서를 5독, 10독, 100독하면 은혜 받는다고, 이렇게 우리 행함에 어떤 기대를 걸어줘야 하는데, 그냥 베드로는 “봤다⬏ 우리는 변화산에서 주의 음성 들었다⬏”라고 합니다. 우리보고 어쩌라고? 저는 거기까지 갔는데 하늘의 음성을 못 들었어요. 못 들었다니까요. 그냥 해가 지는 것만 봤어요. 해지는 것만 사진 찍어 왔어요. 못 들었어요. 베드로 사기네. 믿을 것 못되네요. 보편적 진리가 아니잖아요. 보편적 진리가. 특수한 건데. 근데 이거는 베드로의 사적이고 개인적이잖아요. 

어떻게 개인적인 것을 보편적 진리라고 우길 수 있느냐? 그럼 베드로가 하는 말이, “그러니까 니는 나그네가 아니지. 그러니까 니는 미리 아심이 아니다.”라는 거예요. 사람들이 베드로전서를 비롯해서 성경 안 보는 이유를 알겠죠. 사람들이 안 보는 이유는 내 행함에 대한 기대와 결과에만 모든 에너지를 거기다가 다 쏟아 붓습니다. 

내가 행했더니만 이게 나왔다는 것에 인생 전부를 걸어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주셨다? 그거는 못 믿을 이야기에요. 못 믿을 이야기. 그거는 믿으면 안 되는 이야기. 그거 믿다가는 인생 조져버릴 위험천만한, 위험천만도 아니고 아주 위험한 내용이라고 간주합니다. 그게 베드로전서에요. 아주 위험합니다. 아주 위험해요. 베드로전서가. 

2절 계속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었다는 말은, 니가 보고 싶은 것이 아니고, 니가 직업이 뭐고 수입이 얼마인지를 그거 보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근데 평소에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보고 싶어 해요. 남을 통해서 보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울 보면서 내가 보고 싶어 해요. 머리는 잘 나왔는지, 화장발은 잘 받았는지, 색조화장은 잘 발라졌는지, 모든 것을 내가 하는, 내가 그려진 내 얼굴을 내가 보고 싶고, 내가 노력해서 기대했던 것이 그대로 나왔는지를 보아서, 내가 나로 인하여 매료되고 내가 나로 인하여 찬양하고 내가 나로 인하여 기뻐하기를, 우리는 그런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피 뿌림은 어디론지 날아가 버렸어요. 피 뿌림은 없고. 그래서 외치고 싶은 것은 산에 올라가서 “나는 살아있다. 순자야! 나 여기 있다. 나랑 결혼하자.” 순자 앞에서는 말도 못하면서 산에 혼자 올라가가지고 “순자야 나하고 살자.” 이러고 있다고요. 그러면 차 밑에 있는 순자가 “니는 죽었다. 피 뿌림으로 죽었다.” 그럼 위에서 “무슨 말이고?” “그러니까 니하고 못 살지.” 피 뿌림을 받았다는 말은, 베드로가 받았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는 변화산에서 하늘의 소리가 피 뿌림 안에 모두 응축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변화산에서 경험했던 베드로는 결국 시작도 피 뿌림이었고, 마지막도 베드로에게는 나중에 성령이 임해서 피 뿌림을 이렇게 증거 하잖아요. 이게 베드로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그네 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사항이에요. 그 인생이 베드로 같지 않고 각자 다른 인생이라 할지라도. 베드로는 어부고 뭐 사도지만. 우리는 그게 아니고 뭐 농사짓는 사람이라도 거기에서 나오는 결과는 결국 피 뿌림이 나오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피 뿌림을 주시하기 때문에. 내가 준 것을 주시하시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행한 것, 농사지을 때 고생한 것 이런 건 안 봐요. 농사지을 때 고생한 것은 내가 보고 싶을 때, 내가 얼마나 대단하고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싶을 때는, “나는 농사지을 때 고생했는데,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서 지금은 성공했다.” 쭉 이런 것을 이야기하거든요. 

서민갑부라는 TV프로가 있어요. 거의 안 보는데 진짜 후딱 봤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남편은 도박해가지고 고깃배 다 팔고 빚 있고 논밭 다 팔아먹었는데, 악착같은 아내가 있어가지고 결국 배 다 찾고 논밭 다 찾고 빚 다 갚고 지금은 갑부가 되어 있다는, 뭐 그런 이야기에요. 여자가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를 좋아한다는 하는 겁니다. 그런데 실은 남편은 아내를 안 좋아해요. 남자는 이쁜 여자를 좋아하지, 갑부 만들어준 여자는 안 좋아합니다. 고맙기는 고맙지만 좋아하지는 않죠. 

그런 것들이 방송에 나온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그걸 기대하고 나도 그랬으면 하고 기대하기 때문에, 연출자들이 그걸 방송코너로 만들잖아요. 그런데 베드로가 피 뿌림을 연출한다고 해보세요. 누가 봅니까? 기독교방송도 안 넣어줍니다. 기독교방송도 안 틀어줘요.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연결고리가 다 끊어져있기 때문에. 미리 아셨다는데 그걸 어떻게 연결해요? 미리 몰랐던 자가 어떻게 하나님한테 아부를 해서 미리 아신 자로 바꿀 수 있다? ‘미리’때문에 안 돼요. ‘미리’때문에.  

‘미리’라는 것은 후발적으로, 후차적으로 어떤 조작을 해서 앞서 있는 원인을 바꿔치기 할 수 있는, 그런 모든 가능성은 일체 용납하지 않습니다. 끝났어요. 끝났다는 말이죠. 미리 아신 자는 피 뿌림으로 시작해서 피 뿌림으로 마감되고 그러한 태도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태도가 뭐냐, 우리는 피 뿌림으로 말미암아 구원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우리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거예요. 이거는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행동 하나하나가 피 뿌림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죄인 역할 하라고 우리가 부름을 받은 거예요. 죄인 역할 하라고.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죄가 뭐냐를, 그걸 설명해야 되겠죠. 아까 제가 죄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죄란 내가 뭐한다? 살고자 한다. 피는 우리를 이미 죽었다고 규정하는데, 우리의 모든 육적인 태도는 어떤 것을 꼼지락거려도 전부 다 우리를, 나를 살게 하는 식으로 꼼지락거리면서, 생각도 마음도 태도도 그런 식으로 다 튀어나와요. 겸손과 경건을 가장해서, 나중에 보면 “나는 이런 식으로라도 더 살아야겠습니다.”라는 생존에 대한 열의, 집착, 그게 나와요. 

뭐, 질문들을 하고 뭐, 많이들 하지만, 그 질문들의 바닥에는 “죽기 싫습니다.”에요. “죽기 싫습니다. 살더라도 내 것 덜 빼앗기면서 살고 싶습니다.” “왜 덜 빼앗겨야 하는데?” “좀 있어야 살 게 아닙니까? 있는 것마저 다 날아가면 나 죽잖아요?” “왜 죽으면 안 되는데?” 거기에 대한 답변은 없어요. “왜 죽으면 안 되지?” 거기에 답변이 이상해요. 

그래서 죽은 자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죽은 자기 때문에. 산 자는 죄가 뭔지도 모르지만 죄를 못 짓고, 죄지어봐야 그때그때마다 급하게 의로 다 바꿔버려요. 구차한 변명과 핑계가 죄 하나 지어놓고 열댓 개를 다 갖다 붙여요. 죄지어놓고 변호사 한 열댓 명 선임하는 것처럼. 그래가지고, “이거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이거는 내 DNA가 그래서 그렇습니다.”라든지, 하여튼 뭐 온갖 핑계는 다 나와요. “주께서 그렇게 몰아세워서 그렇게 됐으니까 내 책임이 아니고 주님 책임입니다.” 이런 식으로. 

굉장히 믿음이 좋아 보이지만, 그 말은 뭐냐 하면 “지금 죽으면 억울합니다.”라는 우회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아요. 우회적인 표현. 그래서 오랜만에 만나가지고, “아이고, 참 얼굴 좋습니다.”라고 하면 기분이 좀 좋고, “아이고, 얼굴이 삭았네요. 뭐 집에 일이 있었습니까?” 이러면서 서서히 긁는 거죠. 안 그래도 좀 미운데, 속에 담아놓았던 것을 좀 복수해볼까 할 때는, “얼굴이 좀 많이 상했네요.”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긁죠. 

3절에 봅시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3절 초반에 뭐가 나와요? “찬송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죠. 찬송은 지금도 찬송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누가 하느냐, 천사들이 찬송하고 있어요. 그러면 천사들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의 찬송의 원형이 천사를 통해서 지금도 하나님 보좌에서 찬송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사들만 찬송하는 것이 아니에요. 먼저 죽었던 영혼들도 종려나무를 들고 찬송합니다. 근데 찬송하는 당사자들이 달라요. 다를 수밖에 없죠. 하나는 천사고 하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근데 내용은 같아요. 그 찬송의 내용이 같다고 해서 같은 작사가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밖에 없는 찬송의 내용을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찬송의 내용은 이겁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여!” 이게 찬송 내용입니다

자, 찬양을 받으시는 분이 뭘 경유했다? 죽어도 그냥 죽은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와서 사람들에게, 그 배후에는 악마죠.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한 이 과정, 경유가 없으면 결국은 찬양받을 수가 없어요. 마찬가지로 찬양을 하는 사람은, 이 찬양의 내용에 같이 동참을 하려면 그 찬양하는 사람도 목 베인 영혼이 되어야 해요. 이 땅에서 죽은 자가 되어야 해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되어서, 주님께서 먼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그 위력이, 그 능력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죽은 자를 살리신 영이 우리와 함께 있으면 죽을 우리 몸도 살아나게 되죠. 

그러니까 성령이든 예수님이든, 왜 십자가 피 뿌림이 중요하냐 하면 우리를 죽은 자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해주시는 것에 대해서 그걸 복되다고 우리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 그래야 비로소 제대로 우리가 찬양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자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또 찬양을 해버리면, 이거는 죽음이라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찬양을 하기 때문에 이건 노래자랑이 돼요. 누가 누가 잘하나. 그건 찬양이 아닙니다. 찬양이 되려면 예수님과 동일한 경로를 밟아야 돼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 분에 의해서 죽었다가 살아난 자에 의해서만 찬양을 받습니다. 그 외는 찬양을 받지 않습니다. 천사 빼놓고는. 천사는 예수님이 그 길을 가도록 힘을 북돋아줬죠. 그게 마태복음 4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고 났을 때 박카스 음료수 누가 드립니까? 힘내라고 양식 드리고? 천사들이 주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천사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겁니다. 천사들이 지켜보고 있으면서, “힘내라! 힘!” 힘내라고 응원하는 거예요. 

지금도 똑같이 천사들이나 성령께서 우리 성도에게 “힘내라! 힘!” 힘내라고 하는 겁니다. 격려하시는 겁니다. 살려고 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있어요. 골프 치는 것은 좋은데 골프 치면서 죽으시면 됩니다. “아휴, 또 죽자. 골프채 어딨노? 오늘 죽으러 간다.” 필드에 나가서 “죽자!” “나이스 샷! 죽자. 잘했다. 죽자. 짝짝짝.” 홀인원, 티 샷이 한 번에 쑥 들어가서 그 사람은 상 타서 죽는 거예요. 홍삼을 상품으로 타서 죽는 거예요. 노량진학원에 보면 공무원 시험 본다고 표어 같은 것을 써놓는데,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 “하면 된다.” 그런 것  쓰지 말고, 딱 두 자면 돼요. “죽자.” 두 자도 길거든 한 자면 돼요. “피”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피 뿌림” 

공무원이 되는 이유가 뭐냐, 만약에 마지막 면접관이 “자네가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이유가 뭡니까?” “피 뿌림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기위해서.” 피 뿌림과 같은 말이 죽기 위해서잖아요. 그러니까 피 뿌림이라고 하지 말고 죽기위해서, 라고 하면 돼요. 그러면 “고뤠! 나라를 위해서, 국민들에게 죽도록 충성하겠다는 그 말이지? 합격! 면접 10점 만점에 10점이다.” 실은 그런 뜻이 아닌데. 

삼성회사 마지막 3차 면접에서 “왜 우리 회사를 지원했는고?” “죽기위해서 했습니다. 고뤠! 그래! 그렇지! 내가 원했던 답은 바로 그거야.” 사실은 주를 위해서 죽기위해서인데. 자기들은 삼성이라는 회사를 위해서 죽는 줄 알고. 교회 취직할 때도 목사님이 “전도사님은 어떤 태도로 하겠습니까?” “죽기위해서 하겠습니다.” “에이, 살살해. 살살. 너무 과하게 하지 말고. 너무 죽기위해서 하다가는 인기가 너한테 가서 쫓겨나는 수가 있어. 그냥 살살해. 나도 젊을 때는 죽기위해서 했어.” 그거는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죽는다는 것이었겠죠. 

그러나 이거는 이미 죽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죽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78.64)18-03-18 16:29 
서울의존강의20180316b 베드로전서1장 1-7절(선입견 파괴)-이 근호 목사 

그러면 그 피 뿌림이라는 것이 실제로 우리에게 작용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살고자 해요. 우리에게 죽는다는 것은 없습니다. 좋다고 하는 보약은 다 먹고, 어떤 것이 좋다는 소식을 들어서, 그것이 나를 살려내기를 학수고대하고 간절히 원합니다.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뭐가 문제냐 하면 부활이라는 것에 해당사항이 안 돼요. 

부활은 누구한테 해당이 되냐 하면은 죽었던 자에게만 해당이 되지, 죽지도 않는 자에게 부활 자체가 성립이 안 되잖아요. 그리고 부활을 좋아한다는 자체가 이게 말이 안 돼요. 부활을 좋아할 경우는 자기가 희망이 없을 때나 부활이 좋지, 본인이 본인한테 희망을 계속 제공하고 있는데 무슨 부활이 좋아지겠어요. 

그래서 3절에,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능력이 주어집니다. 부활하심에 합당한 능력이 제공됩니다. 그냥 능력이 아니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의 능력은, 현재 우리는 살고자 하는 것이 충만하기 때문에, 스스로 주의 말씀을 납득도 못하고 하나님의 뜻도 이해 못해요. 문제는 성령이 오셔야만 되는데, 성령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주어지거든요.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았을 때 성령을 주시는데.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어떻게 달라지느냐 하면, 모든 선입견이 제거되어지는 현상이 보입니다. 이렇게 보면 돼요. 모든 선입견이 제거가 돼요. 선입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선행되는 인식을 말하거든요. 그런데 그 선행되는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나를 살리는데 필요한 지식이나 정보, 이런 것들이 누적이 되고 거기에 모아지고 종합되어서 이런 선입견들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동이나 태도가 나올 때는 어디서 나옵니까? 선입견에서 나오죠. 선입견에서. 의미 같은 것을 줄 때에. 그런데 주님께서는 인간들의 이 선입견 때문에 돌아가셨잖아요. 그렇죠. 근데 부활이 되어서 인간들에게 다시 찾아온다면, 인간들의 그 선입견은 그대로 유지되어 있을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을 죽이게 만든 선입견이고, 따라서 성도한테도 마찬가지고. 성도한테도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의 피 뿌림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이 선입견을 갈아엎어버리죠. 갈아엎습니다. ‘아, 내가 세상이라는 이 모든 것에서, 내가 잘못된 바탕위에서 모든 것을 판단했고 결정지었구나.’라는 것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이게 뒤집어지고, 뒤집어지고, 그게 파헤쳐지고 파헤쳐져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본인이 점점 뭘 느끼는가 하면, 나는 무식한 자가 된다는 것을 느끼죠. 나는 무식하죠. 무식한만큼 빈자리가 늘어나겠죠. 사람이 좀 안다고 하면 공부를 안 하게 됩니다. 그러면 딱딱해져요. 마지막 공부한 그 선입견으로 딱딱해져버려요. 예를 들면 지난 2012년도 7월 5일에 은혜 받았다. 이러면 2018년도에도 거기서 은혜 받은 것을 계속 우려먹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딱지가 생겨가지고 딱딱해지는 겁니다. 

근데 진짜 성도 같으면 2012년부터 2018년까지 쭉 쉴 새 없이 계속해서 은혜 받았다는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은혜의 전부가 아니다 라는 식으로, 계속해서 파헤쳐지겠죠. 완전히 걸레가 되도록 구멍 뚫려서 다 파헤쳐지게 되는 겁니다. 천이 있으면, 천에 구멍을 이렇게 뚫어버리면 나머지기, 남아있는 천이 있잖아요. 그리고 뚫리다가 뚫리다 다 뚫려버리면 이제는 뚫릴 구멍조차 남아있지 않죠. 완전히 걸레조각도 그런 걸레조각이 없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욥이 이야기한 것처럼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하는 거예요. “제가 무슨 말을 하리요. 그냥 내게 일어난 일은 주님이 주신 은혜고 선물이지, 제가 정신 차려서 행해서 얻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라는 선입견 자체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선입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여기 4절에서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이렇게 세 가지를 이야기했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은 썩을 것이고, 더럽고, 쇠하여질 것이죠. 왜? 이 땅에서 통용되고 이 땅에서 용납되는 모든 것은 인간들의 선입견으로 이렇게 덮여져있습니다. 선입견으로. 산자락에 안개 덮이듯이. 자욱하게. 미세먼지가 서울 시내를 덮듯이. 선입견으로 전부 다 덮여있습니다. 썩어질 것, 더러워질 것, 쇠하여 질 것. 이것을 안 들키도록 선입견으로 덮여있는 이걸 가지고 윤리와 도덕이라고 합니다. 윤리와 도덕. 

윤리와 도덕의 목적은 뭐냐 하면, 살아있는 나를 더 가치 있는 살아있는 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썩어질 것을 더 썩게 만들고, 쇠하여질 것을 더 쇠하게 만들고, 더러워질 것은 더 더럽게 하면서, 이거 붙들면서 살다가 나중에 수십 년 지나면 이 사람이 죽어요. 죽는 게 어떻게 됩니까? 쇠하여지고 썩죠. 썩으면 어떻게 됩니까? 나중에 그 시체는 더럽죠. 처음부터 더러워질 것이었고 처음부터 쇠하여질 것이었고 처음부터 썩어질 것이었어요. 

그 썩어질 것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선입견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뭐로 만들어지는가, 윤리와 도덕으로 제시가 되는 겁니다. 그 윤리와 도덕 뒤에는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나는 기어이 잘난 인간으로 살아야 되겠다. 나는 뇌물을 받았지만 5억밖에 안 받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이야기에요. 10억 안 받고 5억밖에 안 받았다. 

내가 성폭행 한 것이 아니고 합의에 의해서 한 것이다. 16명 성폭행한 이윤택이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나는 합의에 의해서 그랬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그다지 막가는 인간이 아니다. 그다지 나는 인간 말종 정도는 아니다. 어느 정도 나는 윤리와 도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 거거든요. 그리고 그 상대도 내가 이런 윤리와 도덕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고 나하고 상대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서로가 같은 윤리도덕에서 합의하에 좋은 관계를 가졌다. 이래 되는 거죠. 나는 죽어야 된다는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너무 질책하지 마옵소서. 그런 뜻이 돼요. 나를 너무 질책하지 마옵소서. 

지금은 돌아갔지만, 우리 외손녀가 집에 있었잖아요. 집에 있을 때에, 물이나 우유를 주게 되면 뭐 하다가 좀 흘렸잖아요. 흘렸으면, 흘리고 남은 것은 간직하면 되는데, 조금만 흘렸어도 남은 것을 다 부어버려요. 조금 흘렸는데. 이걸 다 붓는 이유가 뭐냐 하면, 원인제공의 흔적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아, 아이의 타고난 본능이죠. 다 흘리게 되면 애초에 이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되죠. 없는 게 되면 흘렸다는 사실 조차도 이게 없는 게 되죠. 흘린다는 게 나쁘다는 사실을 알아요. 흘리면 나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짓을 하는 겁니다. 나쁜 짓을 감추기 위해서 더 나쁜 짓을 해버리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처음 나쁜 짓 안 했던 그 시절의 나 자신을 견지하기 위해서, 그걸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윤리와 도덕을 계속 붙잡고 있는 겁니다. 내가 비록 사람을 팼고 도적질은 했지만 우리 어머니는 사랑한다. 뭐, 이런 것 있잖아요. 교도소에 가서 엄마가 보고플 때~♬ 교회에서 교도소에 위문공연가가지고 단팥빵 한 개씩 주고, <어머니기도 못 잊어> 찬송 기타 치면서 불러주고, 이러면 눈물 줄줄 흘리죠. 비록 내가 사람은 죽였지만 나는 어머니는 사랑한다. 

왜 그러는가 하면, 나는 윤리와 도덕을 견지해서 개차반 같은 인생이지만, 그나마 나는 죽기 싫다. 나는 기어이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아무리 살고 싶어도 결국 인간은 썩고 쇠하고 더러운 육신을,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그 육신을 지니고 태어났어요. 이거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종교를 떠나서, 교리를 떠나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드라마 거의 안 보는데, ‘키스 할까요’라는 드라마를 보니까, 그 주인공 감우성의 개가 암에 걸려 돌아가셨어요. 드라마에서. 감우성이 키우는 개가 돌아가셨어요. 자기애인 김선아 하고 있다가 전화를 받고 급히 병원으로 뛰어갑니다. 그 개라는 어르신네는 지금 아무소리도 하지 않고 있고. 그 담당의사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금 이 개가 얼마나 고통스러운데도 주인 앞이라고 점잖 빼고 있어요. 아파도 아프다는 소리 안 하고 저렇게 참고 있습니다.” 근데 지금 개는 연기에 충실하고 있어요. 

죽을 때도 고상하게 죽고, 암에 걸려도 아주 점잖게 죽는 그 모습을 보고, 인간이 우리가 죽을 때도 저렇게 죽어야 아름답지 않느냐 하는데, 절대로 죽음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썩어지고 쇠하여지고 더럽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꾸역꾸역 기어이 윤리와 도덕으로 덮습니다. 윤리와 도덕으로 덮어버리면, 여기에 뭐가 빠지는가 하면 왜 죽는가? 하는 이유가 빠졌어요. 인간이 왜 죽는가? 그거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그들 속에 들어와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사항입니다. 

근데 자기가 왜 죽는지를 감추기 위해서 윤리도덕으로 무장했고, 예수님은 거기에 대해서 윤리도덕이라는 선입견과 너무나 대조가 되는, 대치가 되는 말씀을 날리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때 윤리와 도덕차원에서 비-거룩하고 경건치 못하다고, 미달이라고 죽여 버렸어요. 이게 연극 1막이에요. 연극 1막으로 끝나버리면 누가 승리했습니까? 누가 진리에요? 역시 인간은 살아남는 것, 온갖 살아남는 것이 진리고, 살아 있을 때까지는 살아야 된다는 이게 진리고, 죽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이게 진리가 되는 거예요. 모르겠다가 진리가 돼요. 죽는 이유를 모르겠다가 진리에요. 

지금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왜 죽는가 물어보면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진리가 무엇이냐를 찾고 있다고요. 죽는 이유도 모르면서 진리를 찾아서 뭐하겠습니까? 백날 좋은 약을 개발해도 결국 죽는데. 불로장생을 하기 위한 약재를 찾아서 진시황제가 돌아다녔다는데, 차라리 그러한 무모함이 솔직함이죠. 그런 무모함이 솔직해요. 죽기 싫다. 그래서 아까 노량진에서 고시하는 사람들이 붙여놓아야 할 것이 아까는 피 뿌림이라고 했지만, 불사  같으면 죽기 싫다. 이런 것 붙여놓죠. 니가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뭐 이런 것을 비슷하게 붙여놓겠죠. 

썩어지고 더러운 것에서 뭐가 나왔다고 했습니까? 윤리도덕이 나오죠. 그러면 지금 우리 육체는 썩어가고 있고, 쇠하여져가고 있고 더럽혀져가고 있죠. 자연적으로 우리에게서 뭐가 나옵니까? 윤리와 도덕이 나오죠. 그러면 주님의 피 뿌림은 지금 남하고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고 결국 자기백성, 자기 성도와 윤리와 도덕으로 티격태격 싸우는 양상으로, 지금 우리에게 부활의 능력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 뿌림의 능력이 작용하는 거예요. 

이제 좀 전체 그림이 됩니까?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에게 피 뿌림을 주십니다. 근데 우리가 피 뿌림, 피 뿌림... 이라고 하면, 이건 정신병자라고 했죠. 실제로 주님으로부터 피 뿌림이 찾아왔을 때는, 그냥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선입견을 그냥 완전히 구멍을 내는 거예요. 뻥뻥 뚫려요. 내가 유지했던 윤리도덕을 지킨다는 것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고, 아무 효험도 없고, 자기 교만하게 하는 것에나 필요하지, 주님의 영광, 내 구원, 복음전파, 전혀 그거에는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지,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 방식은 이미 베드로가 주님을 만날 때 경험했던 겁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예수님과 베드로의 마지막 헤어짐. 십자가 달리기 전에 마지막 헤어짐의 광경을 너무나 잘 알죠.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죠. 그리고 난 뒤에 요한복음 제일 마지막 장에 보면,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 이야기했습니다. 주님께서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할 때, 베드로가 자기의 선입감,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선입감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제시하지 않아요. 

제시하지 않고, 내 것을 철회해요. 갖고 있는 느낌을 철회하고 뭐로 대신합니까? 답변을?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뭐가 구멍 났어요? 더 이상 나를 가릴 윤리와 도덕은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 선입견 자체가 구멍이 숭숭 다 뚫려야 된다는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나 자신을 주님께서 찾아와서 나를 아주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주님한테 부끄럽게 되면 될수록요, 우리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되는 겁니다. 주님한테 부끄러움을 받으면 오히려 당당하게 돼요. 제가 강남강의 마지막에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성도는 자기가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죽은 자로 다가서기 때문에 살아있는 모든 자가 다 같이 죽은 자로 보이는 안목 하에서만 본인이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가지만, 성도는 이미 미래의 사람이기 때문에, 미래에서 온 성령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을 마주본다고 했죠. 명동이나 어떤 곳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오는데, 자기는 혼자서 마주쳐가는 거예요. 마주가면서 뭘 보느냐 하면 자기의 과거상을 다 보는 거예요. 제가 강남에서 그걸 기시감이라고 제목 달아서 올려놨잖아요. 

다 바라본다 이 말이죠. 바라보게 되면 그들 하나하나가 전부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썩어지고 쇠하여지고 더럽습니다. 여기는 김 썩어짐. 최 쇠하여짐. 박 더러움. 다 합쳐서 곧 시체가 될 사람들. 곧 시신, 시체가 될 사람들. 따라서 그들이 갖고 있는 선입감에 놀아날 필요가 없죠. 그들의 평가나 그들의 판단에 대해서 인정받고자, 또는 벌벌 떨 필요가 없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요. 

제가 강남강의에서 했잖아요. 어떤 사람이 여러분 보고 미투해가지고 저 사람이 5년 전에 이런 일을 했다고 하면, 성도는 어떤 태도로 임해야 된다고 했습니까? “더 될 건데? 그거밖에 안 돼요? 한두 명이 아닐 건데요? 와! 그거 참 세상 재밌네.” 그걸 재밌게 봐야 된다니까요. 왜냐하면 죽은 자들이 자기의 윤리도덕적인 선입감을 가지고 내세우는 그것이, 전에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윤리도덕적인 선입감이었잖아요. 

그것 때문에 누가 죽었다? 예수님의 피 뿌림이 있었던 거예요. 이미 피 뿌림을 받았기 때문에 너희들이 주장하는 그 윤리도덕의 잣대가 너희들을 지옥 보내는 그 프레스press압력기계, 악마의 무기가 된다는 사실을, 그들의 평가를 들으면서 뭐 즐겨야죠. 우에 합니까? 즐기는 거죠. 경상도 말로 “~케라”에요. “~말하세요.” 이런 뜻이에요. 마이 케라. 고마 케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영화 친구에 나오는 대사잖아요. 

마이 케라고 해라. 많이 이야기해라. 더 더 더 이야기해봐. 그 윤리도덕 선입감, 나도 옛날에 그것가지고 복 받으려고 하다가, 나 피 뿌림 받았어. 그 중에 하나가 얼마 전에 설교시간에 했는데, 사람은 언행이 일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하나가 될 때, 그게 인격이 인격다운 것이고, 짐승하고 다른 점이다. 인간이 인간다운 그 점이다. 그러면 거기에 대한 정답은 마이~ 케라~!에요

나도 옛날에 그렇게 생각했지. 말과 행동이 같아야 되고, 자기 약속은 지켜야 되고, 나도 그렇게 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인 줄 알았는데, 그게 썩어가고 있는 증거고, 그게 쇠하여져가는 증거고, 그게 더러워지는 증거였다는 거예요.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는 것은 주님의 조치밖에 없습니다. 그거는 피 뿌림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미리 준비하신 영원한 기업을 잇게 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4절에 나오죠. 

자, 이쯤해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합니다. 이 베드로전서는 희대의 왕 사기극입니다. 베드로는 사기꾼입니다. 전혀 사람의 선입감에 합치가 되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사기꾼이든지 아니면 정말 진리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나그네 된 사람, 이 땅에 자기 거처가 없는 사람, 이 땅에 거처가 없는 사람은 죽은 자죠. 

이 땅에 거처가 없는 사람한테는 베드로는 진실한 사도고, 그 외에 모든 사람에게는 베드로전서는 전부 다 사기극입니다. 거짓말입니다. 그 정도로 베드로전서는 타협이나 협상은 없습니다. 도 아니면 모, 모 아니면 도에요. 앞면 아니면 뒷면, 뒷면 아니면 앞면이에요. 일 아니면 이, 이 아니면 일. 그런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베드로가 소개하는 이 나라에 인간의 행함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 윤리도덕을 포기를 해야 되는데, 인간은 이 윤리도덕을 포기를 할 수가 없어요. 왜? 그게 자신의 모든 취약점과 부끄러운 점, 수치스러운 점을 윤리도덕으로 가려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썩어가는 인간들, 썩어가는 모든 사람들의 외침을 한 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추하게 살기 싫다!” 

추하게 살기 싫다. 더럽게 살기 싫다. 나는 자랑거리가 될 만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게 구호입니다. 추하다는 말은 더럽다는 말이잖아요. 그럼 추하지 않기 위해서는 여기에 무엇이 계속 투입이 되는 거죠? 윤리와 도덕. 윤리와 도덕으로 투입된 자의식이 바로 선입견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피 뿌림이 작용하게 되면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육의 사람이니까. 추한 것을 취미로 삼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런 것을 싫어하죠. 

그런데 피 뿌림이 오게 되면 어디를 빵구를 냅니까? 윤리, 도덕, 선입견 이런 것들을 전부 다 와해시킵니다. 와해시키면 우리는 와해시킨 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걸 또 메워요. 또 새롭게 재편성하고. 남아있는 걸레조각을 가지고 재편성하죠. 밀가루 홍두깨로 죽 밉니다. 만두 한다고. 그렇게 만들어놓고 동그란 컵 같은 것으로 찍어내잖아요. 남은 자투리 버립니까? 다시 자투리 뭉쳐가지고 펴서 몇 장이라도 더 찍어내듯이. 

우리의 할 일은 뭐냐 하면 내 선입감을 정리를 하는 것. 이쁘게 정렬을 하는 것. 그게 매일의 하루 일과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특히 옷가게 하는 사람들은 아침에 늘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마네킹 옷 입히고 정렬하는 것이잖아요. 하고 난 뒤에 청소하고 가게 문 열잖아요. 인간들도 마찬가지에요. 여자는 특히 거울 앞에 서서 자기 얼굴 정렬합니다. 균형 안 맞는 것 균형 맞추고, 어젯밤에 남편한테 터진 것은 색조화장으로 커버하고. 누구 만나게 되면 어디에 부딪쳤다고 변명거리까지 준비하고. 추하기 살기 싫은 거예요. 

주께서 한 피 뿌림은 이렇습니다. “맞아도 괜찮다. 천당 간다.” 니가 그런 것으로 커버 안 해도 이미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선입감 자체가 빵구가 나야 된다는 겁니다. 빵구. 펑크가 나야 돼요. 선입감 자체가. 자꾸 그걸 다듬고 메우고 매끈하게 만들 생각을 하지 말고, 뻥뻥 구멍이 나면 날수록, 너덜너덜해지면 해질수록, 성령의 바람이 쑥쑥 들어오죠. 성령의 바람이

그런 윤리도덕을 가지고 나를 사수하고 치장하지 않더라도 사는 삶이 얼마나 자유로운 삶이에요. 그게. 참, 사람의 할 일은 모든 매사에 손가락 놀리고 발가락 놀리고 뭘 보고 하는 모든 것은 이 선입감(견) 정렬에 있어요. 어떻게 가지런하게 정렬해가지고 하느냐. 그래서 하이힐 신은 아가씨가 길에서 돌부리에 넘어지게 되면 아픈 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스타일 구긴 것이 더 아파요. 안 아픈 척하고 후딱 일어나지만, 나중에 피 줄줄 흐르고, 스타킹 줄 나가서 죽 찢어지고. 아이고, 이거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러냐? 라고 하는데, 그거 죄지어서 그런 것이 아니에요. 도로 포장을 제대로 못해서 그런 거예요. 

왜, 자기 죄하고 연관시키지 말아야 되냐 하면은, 태어난 것 자체가 죄기 때문에 그래요. 태어난 것 자체가. 태어난 것 자체가 죄기 때문에 구태여 정렬을 하나마나 이거는 소용이 없는 거예요. 구멍이 안 난 채로 자꾸 정렬을 해버리면 자기가 다듬어놓은, 남들 보기에 나 이 정도라는 그 무게, 그 무게가 상당한 무게거든요. 요즘 미국에서 한국 철강제품 수입을 안 한다고 하는데, 그 철강제품 같은 무거운 선입감. 

그걸 억지로 들고 인생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스트레스고, 스스로를 스스로에게 자초하는 일입니까? 선입감이 이렇게 깨지고 구멍이 나버리면 가벼워져요. 가벼워지면 모든 상황을 내가 흔쾌히 용납이 돼요. 감사가 되고. 이번 일도 감사합니다. 저번 일도 감사합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내 선입감 깨라고 이렇게 일이 일어난 줄 알고 감사합니다. 그 구멍을 만드는 그 작업이 피 뿌림의 능력입니다. 

그게 바로 7절입니다. 7절 한번 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진도 너무 빨리 나간다. 이거 큰일 났네. “너희 믿음이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시련인데 무슨 시련이냐, 믿음의 시련이에요.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포기한 거죠. 자기를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행함이죠. 자기를 믿는 것을 행함이라고 해요. 자기를 믿지 않는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거든요. 자기에 대한 포기거든요. 

포기인데, 세상은 포기하지 말라고 연단이 와요. 불로써. “니 착하잖아? 니 거룩하고 경건하고, 신앙생활한지, 교회 다닌 지 한 50년 됐잖아? 이번 일은 니가 중보기도하면 해결이 돼.” 자꾸 우리로 하여금 이미 구멍 난 양말을 가지고 자꾸 끌어 모으게 만들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기 행함으로 어떤 효과적인 결과를 낳겠다는, 그런 무모한 시도를 또 시도하게 된다고요. 또 벌이게 돼요. 왜 그렇게 벌입니까? 추하게 살기 싫다. 나는 추하지 않게 살고 싶다가 계속해서 작동하게 만들도록 불같은 시험이 오는 거예요. 

“니 그냥 그렇게 죽으면 안 돼. 니 죽으면 정말 니 장례식 때 한 명도 안 온다. 니 친구 없다. 니 그러면 사는 의미가 없잖아. 보람 없이 니 허무하게 이렇게 죽을래?” 그냥 허무하게 죽으세요. 안 그래도 처음부터 허무해요. 요란 떨어도 허무해요. 요란 떨어도. 그 허무를 못 이겨서 죽는 죽음이 자살 아닙니까? 허무하면 허무한대로 살면 되잖아요. 이마에 받치면 받친 대로 살면 되는데, 허무한대로 살면 되는데, 이마 받쳤다고 자살하는 거예요. 추하기 싫은데 뭔가 있으니까 이게 추해보이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없는 요량하세요. 안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 배추밭에 배추라고 생각하고. 그냥 그 사람들은 돌멩이처럼 존재하죠. 그걸 적자존재라고 하는데, 그냥 존재자체뿐이에요. 가만히 있다가 썩어 넘어가는 겁니다.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들이 구원을 받아?” 세례요한이 누구보고 이야기했습니까? 윤리도덕으로 자기를 휘휘 감고 있는 바리새인들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니들이 구원을 받으면 이 돌멩이도 구원을 받겠다.” 왜냐하면 이 돌멩이는 휘휘 감은 게 없잖아요. 바리새인들은 뭐로 감아있어요? 바리새인들은 윤리 도덕적 선입관으로 휘휘 감았어요. 남한테 욕 얻어먹지 않고 살아야 된다. 이것으로 완전 무장되어 있습니다. 

남한테 욕 얻어먹지 않아야 된다는 이야기는, 어릴 때 부모들이 훈계조로 계속해서 심어준 그 정신세계입니다. “니는 명망 있는 이씨 집안의 사람이다. 니가 어디 가서 하는 행동여부에 따라서 우리 집안의 명예와 아버지의 이름이 얼마나 영광을 받느냐, 훼손이 되느냐에 있기 때문에, 우리 집안의 자식이라면 집안의 영광을 위해서 함부로 허투루 행동하지 마라.” 뭐, 그런 식으로 막 훈계를 하죠. 절대로 우리 집안의 명예를 더럽히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게 더럽히는 거예요. 그게. 

그게 뭐냐 하면 마귀의 시험이에요. 그게 믿지를 못하고, 베드로전서가 희대의 사기극이잖아요. 사기극은 믿으면 안 되잖아요. 사기극 제시하고 믿으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에요.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뻔히 다 아시기 때문에. 얼마나 지 잘난 체하면서, 추하게 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윤리도덕으로, 말이 세상은 윤리도덕이지 성경에서는 뭡니까? 온갖 교리와 경건으로 휘휘 감아있는 것. 그게 시험거리에요. 그게 바로 사탄의 시험이에요. 그게. 

욕 안 얻어먹기 위해서. 욕 얻어먹으면 저주받은 것이라고 하는 그러한 선입감. 그러니까 선입감이 문제에요. 나쁜 짓 하면 벌 받는다는 그 자체가 선입감이에요. 그 선입감에 구멍이 나야 된다니까요. 나쁜 짓해서 벌 받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태어난 것 자체가 벌이에요. 이 땅에 산다는 것 자체가 벌이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빨리 제대하고 싶어 해요. “주여! 벌 그만 내리시고 후딱 저를 데려가주시옵소서.” 살아도 이 땅에 낙이 없습니다. 

제가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현재지만 우리 후대에는 종말이 된다. 이래 생각하죠. 그게 엉터리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현재는 재림이 안 됐으니까 우리 후손이 종말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나중에 후손이 되면 그들이 종말이 아니고, 그들은 또 후손이 종말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은 현재라고 보고. 우리 앞선 선배들이 우리보고 종말이라고 했던 과오를 한 것처럼. 

마찬가지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 세대는 아직은 망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선입감을 계속 유지하고 있어요. “이 세대에 주께서 지금 오시면 안 됩니다.” 이런 식으로. “지금 오시옵소서.”라고 하는 말은 “빨리 죽여주옵소서.”하고 같은 말이거든요. 미세먼지 대신 유황불 확 내려가지고 끝장냅시다. 그러면 누군가 이야기하기를 “니도 망하는데?” “저도 망해도 좋습니다.” 

제가 어떤 강의에서 이야기를 했는데,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바라보면서 이 성전이 망해도 좋다고 한 것은, 예수님 자신을 포함해서 같이 망한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이 망한다는 말은 성전 망하고, 성전이 망한다는 말은 예수님 자신도 망한다는 거예요. 죽으시는 겁니다. 예수님 죽을 때 사실은 이 세상도 죽었다고 판정이 끝났어요. 그런데 우리가 무슨 근거로 계속해서 근사하게 살려고 그렇게 애를 씁니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모든 고민과 걱정이 어디서 오는가, 한번 생각해보세요. 다 살고자 하는 데서 와요. 왜 자꾸 남한테 변명하고 남한테 핑계대고 잘난 척하고 구질구질한 뒷말이 왜 그렇게 동원되느냐 하면, 이러고서라도 더 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윤리도덕으로 자꾸 땜질하는 거예요. 그러나 아무리 살고 싶어도 피 뿌림 자체가, 이미 우리는 주님의 죽음 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피 뿌림 자체에. 

세상에서는 우리는 죽은 자고, 그 죽은 자를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나그네라고 하죠. 우리는 나그네에요. 이 곳은 있을 곳이 없습니다. 있을 곳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데나 있어도 괜찮아요. 어차피 있을 곳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있을 곳에 대해서 너무 미련가지면 안 돼요. 아무데나 그냥 엉덩이 대고 살면 돼요. 어떤 사람이 100평짜리 아파트 주거든 그냥 사세요. 거부하지 말고. 그냥 사시고, 한 70평짜리 주거든 너무 섭섭해 하지 말고 그냥 사세요. 50평 같으면 성질나지만 그냥 참고 인내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그런 것들이 시련이거든요. 내가 잘나서 이만큼 큰집에 산다는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윤리도덕으로 이런 복을 받았다는, 교회에서 말하는 경건의 덕으로 이런 복을 받았다는, 자꾸 행함 쪽으로 계속 붙박이처럼 있으려고 하는 시험을 받는 거예요. 믿음이 아니고 행함 쪽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그런 시험을 계속 받는 거예요. 주께서 어떻게 합니까? 거기에 구멍을 내죠. 

그것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입니다. 이게 시련이에요. 계속해서 원인결과를 연결되지 않게 만들어요. 연결되지 않게. 착한 일 했는데 일이 이상하게 되고, 나쁜 짓 했는데 예상치도 않는 복을 받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두 시간 걸려서 파마를 했는데 남편이 파마 새로 하라고 하고. 성질나서 아무렇게나 해달라고 했는데, 니 머리 스타일 최고라고 이래 나오고. 우리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거예요. 

왜? 예상을 빗나가야 예상했던 우리 자신을 안 믿기 때문에. 빗나가야 또 하나의 구멍이 뚫리기 때문에. ‘그래,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 나온다고 했던 이런 선입감. 주여! 또 엉터리로 판정 났네요. 내가 이렇게 기도하고 이렇게 성경 보게 되면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무슨 좋은 일? 개코 아무것도 없어요. 오히려 일이 더 힘들게 되었어요. ‘주여! 선입감 또 깨지네요.’ 선입감 깨지면 선입감 또 만들고, 깨지면 또 만들고, 그 작업 속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그게 5절에 나와 있어요.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 이게 피 뿌림과 관련되어서 우리에게 주신 보호의 능력입니다.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피 뿌림을 보호하는 거예요. 피 뿌려졌다는 그 사실 자체가 보배입니다. 보배라는 말은 나중에 뒤에 나올 거예요. 

6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자, 이걸 설명하는데도 좀 어렵죠. 근심을 사람들이 왜 합니까? 선입감이 바로 마중 나오는데, 이 선입감이 현실을 설명해주는 기준역할을 제대로 못해요. 기도했으면 기도응답이 되어야 하는데 안 돼요. 이게 당황스럽죠. 이 당황스러움이 뭐로 바뀝니까? 근심으로 바뀌는 거예요. ‘어? 내가 신앙생활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근데 결과가 별로 안 좋네. 나 어떡하지?’ 근심하게 되죠. 

근데 여기서 여러 가지 시험을 받는다고 했는데, 시험이라는 것은 전제가 있어요. 시험Test, 또는 템테이션Temptation,유혹은 항상 땅에서 부는 바람입니다. 땅에는 공기로 덮여있고 공기의 흐름에 따라서 땅은 그 기후의 변화가 생기거든요. 멀리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가까운 고기압과 저기압에 의해서 기후의 변화가 생깁니다. 땅의 골격에 따라서 근육의 질이 그때그때마다 울퉁불퉁 새로 생기죠. 침 발라서 봉투 만들다 보면 손가락에 근육이 생기죠. 힘주어서 한 그 부위가 근육질이 발달하잖아요. 

이 세상의 온갖 시험은 우리가 예측 못합니다. 그거는 하나님께서 마귀를 통해서 어떻게 일하시는가에 따라 달라요. 근데 그 모든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선입감의 정렬은 엉망진창이 되는 겁니다. 뭔가 정돈하는 것을 용납 안 해요. 왜? 정돈을 하게 되면 정돈 된 그것을, 또 하나의 그걸 의지하려고 해요. 우리가 의지할 게 없어야 믿음인데, 우리는 의지하려고 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특히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려고 해요. 자식을 애지중지 키운 부모들은 그 자식에 대해서 굉장한 집착과 미련을 두고 있습니다. 걸핏하면 이야기를 해요. “내가 니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니는 이 어미의 마음을 모르나? 이 호래자식아! 내가 먹을 것 안 먹고 숟가락에 담아서 니 줬는데, 니가 이래 나오면 돼?” “엄마! 고마 케라~ 마이 들었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전에 우리 어머니가 젊었을 때 요리학원에 가서 솜씨 부린다고 짜장면을 해줬어요. 우리 어머니는 짜장면이 좋다고 하셨어요~♬(GOD ‘어머니께’라는 노래). 짜장면이 좋다고 하셔서 식구대로 짜장면을 만들어줬어요. 그 면이나 맛이 요리학원에서 했기 때문에 중국집보다 더 맛이 좋았어요. 근데 지금 우리 어머니는 치매로 병원에 가계시거든요. 아까 저녁 먹을 때 제가 짜장면 먹었다고요. 그 짜장면이 생각이 나는 거예요. 어머니가 짜장면을 해주셨던 것이 그렇게 고맙다고 생각이 되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그게 엄마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어머니가 치매 걸려서 정신이 오락가락 하고 있는 입장에서, 그때 지나간 어머니의 수고가 짜장면을 통해서 다시 느껴졌습니다. 이러면 어머니로 인해 내가 불편한 점이 많았다는 선입감에 구멍이 생기는 거예요. 참 고마운 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다음에 짜장면을 먹을 때 그 생각이 들까요? 안 들까요? 어머니에 대한 고맙다는 선입감에 구멍이 나버려요. 

그러니까 뭔가 하나 생겨버리면, 그걸 정당화해서 마치 내가 믿을만한 대상인처럼, 내가 그걸 착각해서, 피 뿌림이 아니고 그걸 믿게 되면, 나는 그 정도로 착하기 때문에 뒤에 더 살아야 한다가 나와요. 더 살아야 한다. 살아 마땅하다. 어머니 은혜를 아는 자이기 때문에 나는 죽으면 안 돼. 왜? 너무 귀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이래 돼요. 그게 짜장면의 유혹이었습니다. 

각양 유혹이 우리로 하여금 내가 죽었다는 피 뿌림을 믿기 보다는, 여전히 아직도 내가 건재할만한, 유지할만한 가치 있음 쪽으로 계속해서 사탄이 우리에게 유혹하는 겁니다. 금보다 더 귀한 것은 주님께서 주신 피 뿌림의 능력이에요. 그게 무슨 능력? 보호의 능력이에요. 우리는 내가 보호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보호하는 능력이 있는데, 그걸 믿어야 하는데, 우리는 따로 구축하려고 해요. 내가 이 정도로 괜찮은 존재라는 것을, 그 기준을 자꾸 따로 만들어요. 

만들면, 그 만드는 방법도 주께서 이 땅의 속성을 위해서, 땅이 무슨 땅입니까? 템테이션, 유혹의 땅이에요. 유혹의 땅이기 때문에, 땅은 항상 우리를 유혹합니다. 유혹해서 뭐라고 하느냐, 나로 하여금 윤리와 도덕, 괜찮은 선입감을 건설하고, 그것을 재정렬하도록 계속 유혹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마지막 끝은, 어쩌나 저쩌나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되겠다가 있는 이상은, 우리한테는 무거운 철판이 되는 겁니다. 

자, 철판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철판이 무거운 철판인데, 이 철판을 뭐라고 했습니까? 선입견, 윤리와 도덕이죠. 이거 뚫어야 돼요. 뚫어야 됩니다. 이거 안 뚫리고 받치고 있으면 안 됩니다. 제가 주저하지 말고 살라고 하는 말이 뭐냐 하면, 그냥 윤리도덕 따지지 말고 그냥 통과해야 돼요. 통과해야 이쪽 복음의 세계가 나옵니다. 

그런데 복음으로 살겠다고 백날해도 철판에 이마만 부딪치고 혹만 나서 되돌아와요. 팅하고 되돌아옵니다. 자꾸 되돌아와요. ‘아니지. 아니지. 성경에서 절제하라고 했는데 절제해야지. 마지막 때일수록 믿음으로 신앙생활 잘 하라고 했는데,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죄로 인도한다는데 내가 인도받으면 안 되지.’ 자꾸 되돌아와요. 인도받으면 안 되지, 그 뒤에 남는 게 뭡니까? 그러니까 나는 더 근사하게 살아야 된다. 추하지 말고. 

저 철판을 뚫어야 돼요. 윤리도덕 판을 뚫고 지나가야 된다고요. 뚫고 지나가면 저 윤리도덕 판이 얼마나 두꺼웠었는지.. ‘바보! 병신! 등신! 나 같은 바보도 없어. 답답하게 저기에 갇혀가지고.’ 내가 스스로 내 근사한 내 존재를 포기를 못한 거예요. 나쁘지만 양심은 지켰다. 이런 것 있잖아요. 그래서 그것가지고 구원받나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최고의 지성과 최고의 양심과 최고의 윤리도덕을 주장한 줄을 여러분이 아시죠? 그런데 그 바리새인이 어느 계층보다도 악마와 가까이 있는, 근접한 존재입니다. 악마의 자식이에요. 너희 애비는 마귀니라. 누구보고 이야기했습니까? 철저에 철저를 기한 사람보고 이야기했어요. 오늘날 우리들입니다. 

그동안 윤리도덕을 가지고 여러분들 어디에 써먹으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빙자하여 어디에 써먹으려고 했어요? “나 괜찮은 신자다.” 그거 자랑질 하려고 써먹었잖아요. 그러면 죽을 요량으로, “나 신자 아니야. 나 개판이야.”라는 것으로 윤리도덕 철판을 뚫어야죠. 

보면 철판이지만, 뚫고 나가게 되면, 그게 뭐냐 하면 그냥 비행기 나는데 약하디 약한 솜사탕 같은 구름에 불과해요. 웰컴 투 마이 월드Welcome to my world~♬ 제가 대한항공 비행기 탔을 때 동영상에 깔아놓은 것인데, 지금은 빼라고 해서 다 빼버렸는데. 옛날에 대한항공 CM송이에요. 노래가 참 좋아요. 

비행기 나를 때 새털 같은 구름이 있잖아요. 그 구름이 윤리와 도덕이었습니다. 그 위를 나른 거예요. “인간들이 저래서 지옥에 가는구나!” 왜, 남자들이 복음을 안 듣고, 여자들이 복음을 이야기해도 안 듣는 이유가 뭡니까? “이 정도로 근사한데, 여기서 복음까지 들으면 더 근사해지면 나 어떡해. 나 대충 근사할래.” 이것 때문에 복음을 안 들어요. 지금 갇혀있어요. 뚫지를 못했다니까. 근사한 폼으로 사는 보람을 찾으려고 해요. 

그러니까 기껏 뭔가 쑤시면 “내가 뭘 잘못했는데?” 꼭 구차한 변명들이 나오죠. “성경은 모르지만 나도 신앙생활 좀 한 사람이라고.” 이런 게 막 나와요. 특히 아내가 복음 알고 남편한테 이야기를 하면, “하지마라. 이야기하지 마. 내가 니 무슨 이야기하려고 하는 줄 다 안다. 여자가 알아봐야 시근머리(지식의 앎 정도)같은 것밖에 더 알아? 남자는 그것 보다 더 알아. 나 니가 안 해도 내가 니보다 더 복음적이고, 나는 다 알아.” 바로 그게 선입견이에요. 

그게 바로 빵구가 나야 돼요. 그게. 그게 되도 않는 남편 구실하려고 하는 겁니다. 밥 먹여주면 고마운 줄 모르고. 니가 한만큼 나도 했다는 거예요. 이게 뭐에요? 이게 바로 갇혀있는 것이 아닙니까? “니가 한만큼 나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윤리도덕으로, 우수한 단계는 아니더라도, 인간 말종은 아니잖아.” 이런 거거든요. 말종이 돼야 돼요. 인간 말종이. 그게 믿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 말종임에도 구원하신 이 사랑을 어떻게 찬양을 해야 되겠습니까? 더 살 가치도 없는 것을 살려주시고, 죽었기 때문에, 죽었다는 소식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계속 살려주시니,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만 찬양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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