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171110b 디도서3장8절(선한 일)-이 근호 목사
자, 아까 첫째 시간에 했죠. 주어진 모든 것이 주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움직인다면, 성도는 되어진 모든 소용돌이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냥 그 상황에 순응하고 주어진 대로 살면 돼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본인이 내 인생이 왜 이러냐고 판정내리면 안 돼요. 자기중심으로 소용돌이치는 것이 아니잖아요. 내가 뭐가 잘났다고 주께서 나를 갈구겠어요? 갈굴 게 있어야 갈구죠. 주님 중심으로 돌아가요. 주님 중심으로. 이건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에요. 사도바울도 가는 길이 자기마음대로, 뜻대로 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주께서 인도하는 대로 갈 뿐이에요. 인도하는 대로.
인도한 대로 간다는 것은 뭐냐, 본인이 내 행동은 잘했다, 못했다는 것을 판정내릴 수 없다는 겁니다. 내릴 자격도 없고 그럴 권한도 없어요. 이번에는 잘했어! 이번에는 못했어! 이걸 본인이 판정을 내리면 안 돼요. 왜냐하면 그 일이 일어난 것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일어나야만 하는 일인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세상의 모든 일은 오케이, 예스가 된다고 했어요.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겁니다. 이 세상은 선이 아닌 게 없이 다 선이에요. 왜? 이 세상은 다 악이기 때문에. 모든 게 악이기 때문에 모든 게 선이 되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지금 괴변을 늘어놓는다고 생각하시는데.
모든 세상이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이잖아요. 십자가는 예수님을 밀친 거예요. 죽인 거예요. 싫다는 하소연이 그건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죄 아닌 게 없어요. 다 죄에요. 근데 그 죄가 예수님을 밀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합당한 게 되었어요.
왜? 그래야 세상을 심판할 수 있기 때문에. “잘했다. 너희들 죄 잘 지었어요~” 모두 다 죄를 지었으니까,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죠. 그래놓고 보자~ 이제는 누구 천당 보내고 누구는 지옥 보낼지 소매 한 번 걷어볼까? 너 천당! 너 지옥! 충분히 그럴 권한이 있죠. 왜? 모든 인간은 저주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에. 오직 긍휼로 인하여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가 긍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뭘 해도 그게 죄가 된다는 겁니다. 왜? 죄 속에서 태어나서 죄 지은 것 밖에는 없기 때문에. 죄가 된다고 고백하는 순간, 그게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성경에서 세리에게 죄인이라고 하는 순간, 그 사람은 의인되어서 천국 가는 거예요. 천국에 합격한 거예요. 수시모집에 합격한 거예요. 근데 잘났다고 하는 바리새인은 지옥의 수시모집에 합격했어요. 지옥에 합격했어요.
지금 세상이 사는 게 빡빡하고 힘든 이유가 뭐냐 하면 돈이 없어서 힘든 게 아니고 본인이 본인 인생에 대해서 판정을 내리기 때문에 힘든 거예요. ‘아, 좀 더 잘할 걸. 내가 왜 그런 마귀의 시험에 빠졌냐?’ 자기가 마귀면서 무슨 마귀의 시험에 빠져요? 그럼 마귀의 시험에 안 빠질 거예요? 마귀를 누가 그렇게 하셨는데요? 주께서 그렇게 하셨어요.
마귀의 시험이 됐든, 마귀의 테스트가 됐든 그 배후에 누가 그렇게 한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마귀가 그렇게 시킨 거예요.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 말이죠. 판정내리지 말고.
“자식이 군에 간다는데 군에 간다는 소리를 듣고도 내가 새벽기도도 안 나가고 기도도 빡세게 하지 않았더니 애가 전방으로 빠졌구나. 내가 엄마가 되가지고, 이런 못난 엄마가 어디에 있노? 애가 군대에 간다고 하면 빡세게 새벽기도를 해가지고, 성경쓰기도 해가지고,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잘만 했으면 애가 후방으로 빠질 건데...”라는 이런 후회가 막심하죠. 원서가 잘못되어가지고 애가 원래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덩달아 비율이 세 가지고, 이게 다 못난 에미 탓이라고 하는데, 못난 에미 탓이 아니라 주님 탓이에요.
“촌에 있는 큰 아들한테 이번에는 배추가 잘 되니까 배추 심으라고 했더니 배추 값이 폭락하고. 에미가 사는 게 죄야. 사는 게. 이런 에미는 죽어야 되는데. 내가 너한테는 보탬도 안 되고...”뭐 그렇게 궁시렁궁시렁대는지. “어머님. 이번 배추 값 폭락은 주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배추 값이 폭락한 것입니다.” “애야, 논리의 비약이 너무 심하다. 중간을 한 번 연결해봐라.” 그런 것을 또 연결하면 복음이 나오죠.
본인이 본인을 책임지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판단내리지 않으면 책임질 이유도 없어요. 가정법과거완료 쓰지 마세요. 만약에 그렇게 안 했었더라면~이라는 말을 쓰지 마세요.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없어요. 우리한테는.
그런데 이렇게 세상의 모든 일이 주님 중심이라는 말이 자칫하면 주님의 주권사상이 되거든요. 주권사상이라는 것은 성경에 없는 거고. 무슨 중심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이에요.
뭐 하나님의 주권, 주님의 주권, 이 주권사상과 십자가의 차이점이 뭐냐, 주권사상 같으면 예수님의 존재자체가 최고가 돼버려요. 하지만 십자가 중심, 복음 중심이 돼버리면, 여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인간들은 뭘 해도 죄가 된다가 되죠. 죄가 됨을 여기서 아울러 보여주잖아요.
세상의 돌아가는 모든 것이 인간은 구원될 권한도 없고 자격도 없다는 것을 아울러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 중심이에요. 복음 중심이에요. 이걸 가지고 새 언약 중심이라고 해요.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 중심이에요. 부활중심 아닙니다. 십자가가가 중심이에요. 부활중심이 아니에요.
사도바울이 “내가 너희 중에서 부활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했다.”라고 한 게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라고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그렇게 이야기를 하죠.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더 나갈 것은,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십자가 죽음으로 다 이룬 거예요. 부활해서 다 이룬 것이 아니고. 십자가상에서 다 이룬 거예요. 죽고 난 뒤에 부활해서 다 이룬 것이 아니고.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기위해서 이 땅에 오셨는데, 그렇게 해서 주님의 주 되심과 어떤 연관성이 있느냐 하면, 그게 바로 구약에 나옵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 회의론’입니다. 이걸 제가 제목 후보감으로 일단 올려볼게요. 하나님 회의론. 하나님 회의론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들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두고,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회의,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이죠.
그게 구약 스바냐 1장 12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 라는 이야기는 하나님은 멍청하다 이 말입니다. 있으나마나한 존재다 이 말이죠. 복도 내리지 않는다는 말보다 더 무서운 이야기는, 뭐도 내리지 않는다? 화, 저주도 내리지 않는 거예요.
신의 저주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도 저주도 안 내린다는 말은, 그러면 인간이 행동할 때 그 행동결정권이 누구한테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멍청하니까, 아무것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결정은 누가 해요? 본인이 하겠죠. 본인이 행동해서 결정한다는 말은, 결국은 절대자의 냄새가 벌써부터 나죠. 어떤 행동에서 옳고 그름과, 나에게 이익 되는 것과 이익 되지 않는 것을 본인이 결정하겠다는 겁니다.
왜 복음 듣다가 복음을 거부하고 안 듣고, 시치미 떼고 복음 안 들리는 곳으로 내빼고, 왜 그렇게 되는 거예요? 십자가 복음 듣다가 이제는 십자가 복음 안 듣겠다는 이런 생각이 왜 듭니까? 그 판정을 누가 내린 거예요? 본인이 내린 거예요. 본인이 어떻게 해서 내렸기에 복음을 거부합니까? 그 복음이 실속이 없다는 거예요. 자기에게 구체적인 이득을 안 가져다준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회의론이에요.
그러니까 회의론 자들은 신을 안 믿는 것이 아니에요. 신을 믿는데, 신에 대해서 내가 테스트를 해가지고 믿을만한 신이냐, 아니냐를 결정하고 난 뒤에 믿겠다는 겁니다. 그럼 뭡니까? 기도를 해보고 기도에 응답이 되면 그게 내 마음에 맞는, 나에게 적합한 내 신이 되는 겁니다. 애가 성적이 안 오른다, 몸이 아프다, 생활이 궁핍하다, 그때는 빡세게 기도를 해서 내 기도에 응답을 해주면 그 신이 바로 내 신이죠.
그러면 이게 뭐냐 하면 악마하고 결탁을 한 겁니다. 악마가 인간에게 뭘 제공하느냐 하면, 니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격려하잖아요. 한 번 적어야 돼요. 이게 너무 중용한 이야기라서. 악마가 이야기했다고 하지만, 악마라는 말을 떼 봅시다. 우리 마음이 늘 평소에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제일 중요해!’라고 계속해서 속에서 우러나오는 겁니다.
“내가 제일 중요해. 내가 제일 잘나가.” 101명이 불렀던 남자버전이 있죠. “오늘밤 주인공은 나야 나.” 막 춤추면서 “나야 나!”라고 하죠. 그 노골적인 가사, 투박스러운 그 노골적인 가사가 왜 먹힙니까? 동감과 공감을 불러일으키거든요. 오늘밤 주인공은 나야 나. 갑자기 제목을 바꾸고 싶네요.
교회가 왜 교회가 아니고 무당집인 줄 아시겠죠. 십자가로 보지마시고 대나무로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건물 앞에 대나무 꽂아놓은 거예요. 그게 나야 나를 후원해주니까. 구약에는 그걸 바알신이라고 합니다. 바알신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제물의 양에 따라서 응답이 달라진다는 것이 바알신이에요.
성전에 몇 번 나오는지, 출석률이 높아야 되고 제물의 양이 증가하게 되면 정성이 더 지극하다는 의사로 알고 그만큼 응답도 풍성하게 해주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돈 놓고 돈 먹기라고 하는 겁니다. 큰돈 얻으려면 큰돈을 내놓아야 해요. 주식한다고 2장사고 3장사고 이래선 안 돼요. 빚내서 한 5000장사야 나중에 그게 대박이 되든지 망하든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교재를 보면 나옵니다. 과연 우리가 인간이냐? 돈이 돈을 낳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그 논리를 제가 적어놓은 거예요. 처음에 일상생활이라고 되어 있죠. 교요한 일상생활, 정말 고요할까요? 큰 흐름에 휩쓸려가고 있습니다. 교요하지 않습니다. 큰 흐름에 휩쓸려가고 있어요.
하나님 회의론인데, 아까 스바냐 1장 12절에서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 이게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 다니면서도 그걸 느껴요. 그냥 재미로 다니는 거지, 하나님은 좀생이가 아니니까 이거 했다고 벌 내리고 저거 했다고 벌 내리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자, 예레미야를 한 번 봅시다. 예레미야 44장 17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17절,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정녕히 실행하여 우리의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방백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대저 그 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하늘여신을 아스다롯이라고 합니다. 바알의 부인이죠. 하늘여신을 섬겼더니만 응답이 왔잖아요. 마귀가 응답을 주죠. 왜? 그래야 너희들이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것을 마귀가 계속해서 격려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말은 교회 다녀서 이익을 봤다 이 말이 아닙니까?
그러면 처음부터, 교회 갈 때부터 뭘 노린다? 내가 지금보다 힘을 더 갖는 거예요. 왜 힘을 가져야 된다고 했습니까? 첫째시간에 했잖아요? 왜 힘을 가져야 돼요? 힘을 계속 가져줘야 견줄만한 대상이 없는 절대적 존재가 되는 여정에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신에게 계속 응답을 받게 되면 나도 언젠가는 최고의 자리에 이를 것이라는 그 인생의 목표가 힘겹고 고된 일상을 견디게 하는 유일한 꿈, 드림dream이잖아요. 꿈이라 이 말이죠.
전에 광주강의에서 맥아더기도를 예로 들었죠. 맥아더장군이 그만큼 욕심이 많은 줄 몰랐죠. 자기자식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보세요. 그 우상성, 이단성을 한 번 보세요. 맥아더기도 몰라요? 인터넷에 자식을 위한 기도가 나옵니다. 그게 하도 유명한 기도라서 액자로 많이 팔아요. 내 자식이다 이 말이죠. 자기자식인데 하나님 자식 만들겠다고 그거 하고 있는 거예요.
그냥 전부 교회가 하늘여신을 섬기고 있다고 보면 돼요. 전 교회가. 십자가가 아니고 전부 대나무로 보면 돼요. 모든 교회가 그냥 무당집이에요. 그 무당집을 그만 사람들이 천국 가는 집으로 오해를 하다보니까, 우리교회는 언제 저 교회처럼 안 되냐고, 자꾸 모델로 삼을 수 없는 것을 모델로 삼아버려요. 이 옆에 있는 중부교회처럼 언제 주차장이 있어가지고 남은 주차장을 다른 사람에게 활용하게 해주나? 뭐 이런 식으로.
무당 짓을 안 하면 교인들이 오겠어요? 안 오죠. 사람들이 왜 사는데요? 신이 되고 싶어서 환장한 인간들이에요. 절대자가 되려고 환장한 인간들인데 거기에다 구미를 맞춰 줘버리면, 입맛에 맞게 해주면 고객만족 아닙니까? 고객이 왕이잖아요. 장사가 되죠.
18절을 봅시다. 18절, “우리가 하늘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이래 되어 있거든요. 지금 이 사람들이 왜 화를 내는 겁니까? 우리가 가난하고 핍절당하고 창피스럽고 남한테 무시당하는 이것이 자기의 본모습이다? 아니다? 이거는 자기의 본모습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핍절하게 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게 한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게 니가 몰랐던 너의 본모습이다. 고마운 줄 알아라 이것들아! 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 핍절과 칼, 기근, 이 모습이 신약으로 넘어가면 이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사람들에게 밉상 받아서 십자가 벌거벗고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그 모습이 누구 모습이에요? 하나님 아버지 앞에 앉아있는 현재 우리의 모습이에요. 이게 그 모습이에요.
자꾸 애써 외면하려고 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처참한 몰골과 흉측한 그 모습이 딱 우리들이에요. 딱 나에요. 이런 자 만이 합격합니다. 이런 자 만이.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 것을 알 때, 사람들은 그런 자기모습이 되는 것을 자기 속에 있는 마귀가 애써 격려합니다. “왜 자꾸 너를 부정적으로 낮춰보려고 하지마라. 니는 얼마든지 절대자가 될 수 있다.” 마귀가 하는 그 주장은 영원토록 한결같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의가 있으면, 선악에서 선한 것이 있으면, 부자청년도 마찬가지죠. 선한 것이 있으면 복이 오지 말라고 해도 복이 오고, 복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힘이죠. 힘이 오게 되어 있고, 힘이 오게 되면 니가 원했던 최고의 자리, 영웅의 자리에 오를 수 있어. 힘내! 이렇게 마귀가 이야기하잖아요.
이 마귀가 하는 이야기가 오늘날 부모가 자식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애가 이렇게 하다가 좀 엎어지면, “이거는 길들여야 돼. 혼자 힘으로 일어나야 돼. 그래야 나중에 어떤 역경을 만나더라도 스스로 일어설 수 있어.” 그러면 스스로 일어나게 되면, 일어나서 가만히 있습니까? 그걸로 만족합니까? 만족이 어디에 있어요? 최고의 자리까지 질주하는데요? 참 훌륭한 신사임당이에요.
첫째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중심은 이겁니다. 지금 마귀하고 싸우는 이 중심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이냐 아니면 나 중심이냐. 나 중심으로 선악체제를 잡아버리면 우리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까지라도 골라내서 그거는 제키고, 악을 멀리하고 선만 차곡차곡 모아서 자기 의로써 절대적인 자기화, 이런 의로움이 가득 차 있는 이상 설마 하나님 나를 죄인이라고 하겠느냐, 저주하겠느냐, 라고 이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근데 로마서 3장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하시고, 율법대로 지키기 때문에 의가 쌓이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주신 목적은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저주아래 있게 함이라. 저주아래. 저주아래 있다는 말은 인간도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제가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도 했지만, 인간도 아닌 것들의 평판에 놀아나지 마세요. 움츠려들지 마세요. 인간도 아닌, 마귀의 나불거리는 소리에 주눅 들지 마세요.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니가 뭐 안다고? 세상은 예수님 중심이지 내 잘남의 중심이 아니야.” 톡하고 이렇게 면박을 주라 이 말이죠.
한 번 정리를 해봅시다. 간단하게 정리를 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했다. 철저히 망했죠. 망할 때 개인적으로 망했습니까? 집단적으로 망했습니까? 집단적으로 망했죠. 이 말은 누구 탓 할 것 없다 이 말이죠. 뭐 착한 사람, 악한 사람 필요 없어요. 나라 전체가 다 포로 잡혀갔어요. 나라전체가. 심지어 나라 전체가 포로 잡혀 바사나라에 갔을 때에 부림절이라고 있어요.
에스더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하수에로 왕 때 미스바사를 뽑는 것 있죠. 그때에 그 나라가 포로 잡혀갔다고 해서 예수님 중심이 사라진 게 아니에요. 물론 유대인들은 자기중심으로 언젠가는 회복되리라고 생각했죠. 중요하기 때문에 적어볼게요. 비록 우리 이스라엘이 죄를 지어서 바사나라에 왔지만, 이 유대나라는, 그때는 이스라엘이 없어요. 유대나라에요. 이 유대나라는 언젠가는 회복될 거야, 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이거 하나님 뜻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죠. 이거는 인간의 희망사항이지 하나님 뜻이 아니에요. 그럼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있지 않는가? 함께 있어요. 함께 있는데, 이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어요? 에스더가 뭐라고 했습니까? 죽으면 죽으리라고 했죠.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했을 때 에스더는 죽었어요. 그 순간, 이거 고백하는 순간 에스더는 산 사람이 아니고 죽은 사람이에요.
죽으면 죽으리라고 한 것이 뭐냐 하면 누가 와서 붙들었기 때문에 붙든 분이 알아서 할 문제지 내가 알아서 할 문제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지금 에스더가 오기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말로 요시よし(좋아)!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이정도로 결심했는데도 나를 안 도와줘? 이런 뜻이 아니라니까요.
그냥 주님 앞에 붙잡히니까 ‘죽으면 죽으리라’에요. 예수님하고 마찬가지에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이 일하셨어요. “자기 뜻이 아니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걸 에스더 식으로 말하면 뭡니까? “죽으라면 죽어야죠. 그게 아버지의 뜻이라면.”
제가 아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자기에게 일어난 환경에 대해서 본인이 판정내리지 말라고 했죠. 뭐 하면 된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사나죽으나 누구 뜻이다? 꼭 살 필요 없다니까요. 죽으라고 하면 죽으면 되고, 살려주면 살면 되죠. 참 말은 쉽게 한다. 내가 생각해도.
근데 이걸 쉽게 하나 어렵게 하나, “목사님 그 말씀 우에 지킵니까?” 자꾸 지킬 생각하지 말고, 주께서 그렇게 몰아가시는 거예요. 몰아가시는 거예요. 어떤 분이 저한테 가락강의에서 그런 질문을 했어요. 하나님 말씀을 지키면 내 친구라고 하니까, 우리가 말씀을 지키면 되지 않습니까? 그거는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친구 되도록 그렇게 이끄세요. 열두 제자가 다 도망갔다는 사실을 빼먹으면 안 돼요. 도망갔던 사람을 끝까지 따라와 붙들어서 죽으면 죽으리라고 만들어낸 거예요.
그거 누가 만들었어요? 주님이 만들어낸 거예요. 왜? 세상 모든 일은 누구 중심이기 때문에? 예수님 중심으로 지금 돌아가고 있는 중이라니까요. 지금 우리가 일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우리를 가지고 주님이 일하시는 거예요. 근데 주님이 일했다는 그 증거가 뭐냐 하면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는 거예요.
자, 짜장면 보통을 시켰는데 주방장이 잘못 만들어서 곱빼기를 줬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죽으면 죽으리라고 그냥 다 먹어야죠. 그런 뜻이에요. 이번에 애가 시험을 쳐서 나는 전교 5등만 바랐는데 1등을 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빨리 공부 못해서 5등까지 내려가! 이래야 됩니까? 그러지 마시고, 뭐 까라면 까야죠. 이런 식으로 그 1등한 것을 화내지 마시고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화내지 말고.
남편 보너스 한 이백만원 받아와가지고 갑자기 목돈이 생겼다, 너무 분노하지 마세요.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세요. “내 인생이 와 이러노? 갑자기 왜 돈이 들어왔노?” 이러지 마시고. “뭐 까라면 까야지. 이러면 여행가야지. 할 수 있나? 가기 싫어도 가야지. 이 돈 가지고.” 뭐 이런 식으로. 속으로는 좋으면서. 이렇게 되는 일이 뭐 기도를 많이 해서 이렇게 됐다든지, 헌금 많이 해서 그렇다든지, 그런 것 하고 연관시키지 마세요. 그러면 내 중심이 돼버려요.
싸움은 그 싸움이라고요. 내 중심이냐? 주님 중심이냐? 자, 그 전쟁이 있는데, 그 전쟁이 무슨 전쟁이냐 하면, 사사기 4장을 한 번 봅시다. 구약을 복음적으로 어떻게 봐야 되는가를 제가 알려드립니다. 7절,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스사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셨느니라” 붙이리라, 붙인다, 네 손에 붙인다. 붙이리라는 말은 그 일의 기획을 누가 했다는 말입니까? 이스라엘이 했다는 말입니까? 이스라엘로 하게 하신 주님이 했단 말입니까? 주님이 하셨죠.
아까 에스더서에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고백을 했단 말은, 이번 유대나라의 승리를 누가 기획했다는 말입니까? 에스더가 기획했어요? 아니면 모르드개가 기획했어요? 고백하게 하시는 주님이 기획한 거예요. 주님이 하신 거예요. 주어진 환경입니다. 붙인다는 말은, 세상 돌아가는 그것을 니가 돌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생 이런 식으로 움직임을 하도록 우리가 한 게 아니에요. 정말 돌아버리겠네요. 주님이 그때마다 환경을 그렇게 조성하시는 겁니다.
특히 장사하는 사람들이 단골이 오게 되면 으레 오는 것으로 여기지만, 만약에 그 단골이 한 두어 번 안 오게 되면, ‘아, 그때 내 뜻대로 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당연한 것이 아니고 그동안 발걸음을 인도해주셨구나.’하는 거예요. 이거는 목사가 교인들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그 사람은 늘 와서 앞자리에 앉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덜덜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매주 허락하셔서 참석한 거예요. 그럼 참석을 못했다, 그럼 오늘 허락을 안 하신 거예요.
그럼 교인들이 다 참석을 했다는 것은 주께서 다 허락을 하셨다는 말입니까? 그럼 기분 좋겠네요? 아니요. 왜냐하면 교인들은 다 참석했는데 자기 자리에 늘 앉아있던 목사 본인은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했어요. 이 자리에 앉는 것도 내 뜻이 아니고 주님께 휘둘린 거예요. 주께서 이렇게 몰아세우신 겁니다. 이게 ‘붙이시매’에요. 이 전쟁을 가지고 ‘붙이시매 전쟁’이라고 해요.
붙이시매 전쟁에 있어서 특이점이 뭐냐 하면 어느 것이 중심기둥이냐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준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준다고 이렇게 돼버리면 우리가 중요하고 주님은 그냥 후원하는 것밖에 안 되잖아요. 사사기 같은 경우에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줘버리면, 그 도움 받은 그 이스라엘이 얼마 안 가서 다시 우상을 섬기게 되어 있어요. 뭐 도와줌이 왜 그리 시효가 짧아요. 도와줌이.
도와주려면 세상 끝 날까지 팍팍 도와줘야지, 기껏 도와주는 것이 몇 년 가지도 않아요. 다시 이방신을 섬기고 또 부르짖고 주께서 또 도와주고. 도와줌이 이렇게 한계가 있다는 말은 처음부터 도와줬다는 말에 대해서 뭔가 수정이 필요한 겁니다. 전쟁을 벌이는데, 이 드보라 전쟁에 있어서 원래 누가 해야 하느냐 하면 군대장관 바락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바락이 대표적으로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되어 있어요. 바락은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사사기에 보면 이 전쟁을 바락한데 줬는데, 이 바락이 남자잖아요. 자기가 해야 되는데, 가나안 땅 종족중의 하나인 이 야빈 군대의 숫자가 너무 많아요. 주께서 붙여줄 때에 이쪽은 한 열 명 되는데 저쪽에서는 22개월 된 어린애 하나가 그냥 걷는지 마는지 오게 되면 그건 붙여 준 게 아니죠. 그건 안 붙여줘도 자기 손에서 처리해야 되는 거예요.
자, 다윗과 골리앗이 전쟁에서 같이 싸웠습니다. 다윗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전쟁은 하나님이 붙여준 전쟁이라고 해서 인간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본 반면에, 골리앗 입장에서는 이거 붙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애 하나 오는 것, 이거는 뭐 한 줌의 먹잇감도 안 되잖아요.
누가 이겼습니까? 그냥 다윗도 아니고 소년다윗이죠. 소년 다윗이 이긴 게 아니에요. 소년 다윗을 앞장세운 누가 이겼습니까? 주님이 이겼어요. 다윗이 거기서 이겼다고 그 다음부터 다윗은 매일같이 물맷돌만 돌리고 있습니까? 아니다 이 말이죠. 날아가는 그 돌멩이 그 궤적까지 다 주님이 하셨죠. 골리앗은 하나님이 붙여주셨기 때문에, 골리앗은 저쪽에 있고 다윗이 물맷돌을 반대쪽으로 던진다고 해도 골리앗은 쫓아가서 그 돌에 맞아야 돼요.
마치 예수님께서 아무 물고기를 잡았는데 거기서 동전이 나와서 그 돈으로 성전 세를 낸 것처럼. 성전 세를 그 동전으로 낸 것은 예수님 본인이 성전 세를 받을 자임을 알리시는 거예요. 내가 바로 성전이다. 내가. 내가 하나님의 집이다, 라는 뜻이에요.
어쨌든 그런 것처럼, 드보라의 전쟁에 있어서 바락이 해야 될 일인데, 바락이 자기중심의 일을 포기를 해버려요. 왜냐하면 붙여준 전쟁이 아니고 본인이 이기려고 나선 전쟁이라 자신감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당시의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 선지자가 여선지자 드보라에요. 제발 여장부라고 말을 붙이지 마세요. 팜므 파탈(Femme fatale, 치명적인 여자)이니, 걸 크러쉬(girl crush, 여자가 봐도 반할 반한 여자)니, 이러지 좀 마세요.
다만 이 전쟁은 우리 손에서 해결될 전쟁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야말로 누가 붙여줄 때만, 어차피 전쟁의 승리는 우리가 할 수 없어요. 승리를 시작하신 분이 승리를 가져가시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뭐가 중요하냐 하면 이 승리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절대로 인간들의 승리가 아님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전쟁이 진행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전쟁이.
자, 여러분들이 구원받았다고 합시다. 구원받았으면 인생을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뭘 제대로 보여줍니까? 구원의 그 절차, 절대로 나의 의로, 행함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죠. 디도서 3장 5절 말씀에서 보았듯이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는 거죠.
주님의 긍휼하심과 주님의 붙여주심으로 우리가 구원되었다는 것을, 인생의 어느 사건이 있더라도 그 사건 안에 실려서 우리에게 찾아왔으니까, 우리는 그 사건을 맞이해서 그 사건에다가 화답하는 식으로 “주께서 하셨잖아요.”라고 답변을 그렇게 주님한테 보내면 되는 겁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내보내면 되는 거예요.
그럼 이번 전쟁에 있어서, 이걸 남자에게 줬는데, 이번 전쟁의 주인공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 두 명이 나와요. 하나는 드보라가 나오고 하나는 야엘이 나와요. 야엘이라는 사람에게 패잔병으로 찾아온 사람이 있었으니, 그 남자는 바로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에요. 그 시스라가 전쟁에 패배해서 쫓기니까 야엘이라는 아줌마 집으로 도망갔어요. 이스라엘 적인 시스라 장군이 패배한 이유가, 여자가 나서니까 그 다음부터는 열두 지파 각처에서 용사들이 떼처럼 자기지역에 연연하지 않고 이 전쟁에 참전을 개시한 거예요.
그러면 원래 이 일을 누가 해야 한다? 남자가 해야 되잖아요. 남자가 해야 하는데, 바락이 못하겠다고 나자빠졌죠. 그러면 이 전쟁의 핵심은, 이 땅에 중심이 있음이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 중심이 없음이 돼요. 남자한테 맡겨줬는데 남자 대신 여자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남자 대신 여자 드보라가 했다가 아니라, 남자 없음을 통해서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는 겁니다.
여자가 했다는 말은 여자가 영광 받는 것이 아니고 남자가 없이 했다. 다른 말로 하면 이거는 사람이 하지 않았다. 다른 말로 하면 그럼 누가 했다? 하나님이 친히 하셨다가 되는 겁니다. 이게 붙여주는 전쟁이에요. 기드온이 있죠. 기드온에게 32,000명 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300명 남고 다갔죠. 그 300명이 횃불로 승리했잖아요. 근데 그 승리가 기드온의 승리입니까? 주님의 승리입니까? 주님의 승리죠.
근데 그 기드온은 왜 들어갔느냐, 기드온의 칼날(삿7장14절)이요. 기드온이 들어가는 이유는 기드온이 한 게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기드온이 들어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승리요 되지도 않은 기드온의 승리요, 이런 뜻이라는 말이죠. 아무것도 없는, 별 볼일이 없는 자의 승리가 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 하면 이번 승리에 인간이 보탠 것은 일체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악의 기준에서, 인간중심의 선악기준을, 그걸 하나님이 적으로 간주해서 아무 기준이 없는, 아무 중심기둥이 없는 가운데서의 의가 인간중심의 의를 공격하는 겁니다. 인간의 자기 의를 이 땅에서 아무 의도 없는, 죄인이라고 우기는, 우길 필요도 없이 죄인이 맞지만, 그들의 의가 저쪽의 의보다 나은 거예요. 그걸 치는 겁니다. 이 땅의 전쟁이.
예수님을 살해했잖아요. 그럼 이 세상에 예수님은 없는 분이죠. 죽여서 보냈으니까. 없는 분의 의가 있는 사람의 의를 공격해서 진정한 의의 나라, 천국을 들어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 일관된 작업이 바로 사사기에 나온다는 이 말입니다.
자, 그럼 다시 야엘로 돌아가 봅시다. 야엘이라는 그 아줌마 집에 시스라가 허겁지겁 들어왔어요. 그래서 사사기 4장 18절에 보면 “야엘이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그에게 말하되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하매 그 장막에 들어가니 야엘이 이불로 덮으니라” 푹 주무시도록, 쉬도록, 야엘이 참 착하죠.
19절, “시스라가 그에게 말하되 청하노니 물을 조금 마시우라 내가 목이 마르도다 하매 젖부대를 열어 그에게 마시우고 그를 덮으니” 물을 마시게 하고 또 이불을 덮어줬어요. 그러니까 시스라가 얼마나 안심이 됐으면 푹 잤어요. 20절에 보면 깊이 잠들었다고 했습니다.
자, 이 대목에서, 지금 누가 시스라를 쫓느냐 하면 전 이스라엘이 쫓습니다. 그런데 야엘이라는 농부아내는 이 시스라를 신고하기는커녕 잘 대접해서 편히 쉬게 하죠. 원기회복 하도록 물도 주고 따뜻한 방에다가 잠도 자게 하죠. 얼마나 마음이 편했으면 곤히 깊이 잠들겠습니까?
그러면 지금 시스라 장군을 쫓아 지명수배해서 찾기에 급급한 사람들의 모든 공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뭐 시스라 죽이는데 아무 보탬이 안 되죠. 시스라 어딨어? 찾아야 되는데? 못 찾아요. 지금 야엘 집에 잠들어 있는데 못 찾는다고요. 그런데 야엘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장막 말뚝을 낑낑하면서 뽑아가지고 와서 말뚝채로 땅에다가 박아버렸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시스라 같은 이런 인간들은 약속의 땅에서 사람취급 할 가치조차 없는 겁니다. 근데 그걸 누가 죽이냐 하면 여인이 죽이죠. 그럼 전쟁은 남자 없이 시작해서 끝까지 남자 없이 끝나버린 거예요. 적의 장군이 죽었으니까. 나중에 가나안 왕 야빈도 진멸 당해죽어요.
결국 이런 스토리가 뭐냐 하면 아무리 남자들이 설쳐대도 마무리는 여자가 짓는다. 여자가 짓죠. 여자가 마무리를 지었잖아요. 좋게 한 것이 아니라 이거는 벌레 한 마리 콱 밟아 죽이는 것처럼, 사람을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고 말뚝으로 박아버렸어요. 21절, “말뚝을 그 살쩍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시스라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여자는 아까 뭐가 없다? 남자 없음이죠. 남자 없는 상태에서 시스라가 죽었다고 하면 누가 죽인 거예요? 여자의 모습이지만 하나님이 죽인 거죠. 그러면 시스라는 처음부터 하나님 보시기에 이거는 살 가치도 없는 거죠. 살 가치도 없죠.
그럼 살 가치도 없는 쪽한테, 살 가치도 없는 허수아비 같은 그들에게 이스라엘이, 바락이 벌벌 떨면서 “아줌마! 나 좀 도와주소!”라고 한다는 말은 그 당시 이스라엘 신앙이 지금 하나님의 중심과는 전혀 맞지 않다는 이야기를 이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다시 한 번 꾸짖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꾸짖는 방법은 전쟁을 일으켜서, 그 전쟁에서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고 모든 남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방식으로 전쟁에 승리케 함으로 말미암아 그 승리 앞에서 모든 이스라엘이 “우리가 평소에 우리 중심으로 살았지 주님 중심으로 살지 않았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하게 만들죠.
그러니까 이 전쟁이 결국 신약으로 오게 되면 십자가로 완전히 뭉쳐져요. 십자가로 모든 것이 최종상태에 이릅니다. 십자가에서 완료된 모습을 보여줘요. 완성의 모습을 보여줘요. 그러면 십자가 앞에 우리가 설 때에 뭘 느낍니까? “나는 이만큼 바르게 살았습니다. 착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라고 이런 소리를 할 겁니까? 바르게 산들, 착하게 산들, 악하게 산들, 십자가 앞에서는 의미가 있어요? 없어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중심이 십자가 중심이기 때문에. 내 중심이, 내가 착해서 구원받는 중심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이런 전쟁을, 시스라와 야엘의 전쟁을 계속해서 치르게 되는데, 제가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제발 우리가 야엘이 되어달라는 겁니다. 야엘이. 야엘이 전쟁할 때에 무기 들고 나섰습니까? 가만히 있는데 누가 기어들어왔어요? 알아서 들어왔죠.
야엘이 시스라라는 적군의 남자 장군을 무서워했습니까? 무서워 한 게 아니고 갖고 놀았죠. “예~ 어서옵쇼! 뭘 도와드릴까요? 우유 드리겠습니다. 따뜻한 방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껏 우리 집에서 편히 쉬세요.”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상대방을 사람으로 취급을 했다? 안 했다? 말뚝으로 박는 것 보세요. 사람취급 했습니까? 인간존엄성을 인정해줬습니까? 존엄성이 어디에 있어요?
바로 그러한 야엘의 안목으로 우리가 평소에 이 세상 사람들을 보고 있느냐를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교회 목사가 돈만 밝히고 우리 교회 목사는 엉망이야. 어떻게 하면 좋아. 기도해서라도...”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그런 시스라를 가지고 기도한들.
“목사님한테 건의했더니만 목사님이 짜증을 내고, 장로님 말도 안 듣고,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럼 제가 물어요. 목사 나이가 얼마나 됐습니까? “나보다 다섯 살 어립니다.” 그럼 어린데 그 말을 왜 듣습니까? “주의 종이고 어떻고...” 그러니까 그 생각이 목사를 위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주의 목사를 이렇게 섬겼습니다.”라고 하는 그 선악의 중심에 누가 있어요? 본인이 있어요.
그러면 본인을 말뚝 들고 본인을 찍어버려야 해요. 오늘 제목을 말뚝으로 해버릴까요? 본인을 늘 찍어버려야 해요. 본인을. 세상이 내 중심으로, 내 잘난 중심으로, 내가 이만큼 훌륭한 신앙인의 중심으로 자랑하는 그것을 말뚝으로 찍어버려야 해요. “나는 복음도 알고 이제는 어떻게 구원받는가를 알았으니까, 나는 이정도면 신앙인이겠지.”라는 그걸 박아버려야 해요. 그게 마귀생각이라니까요.
이제 복음 알았으니까 헤헤거리면서 자기 할 짓 다하고 다니면서 복음이 안 들리는 쪽으로 내빼기나 하고. 얼마나 내빼는지. 복음 알았으니까 챙길 것 챙겼으니까 내 마음대로 산다고요? 목사님도 그랬잖아요? 자기 맘대로 살라고. 니 맘대로 사세요. 살면서 십자가가 나와야 돼요. 나는 잘했다가 나오면 그거는 십자가 모르는 거예요.
마음대로 사시되, 그 결과는 뭡니까? ‘아, 내가 정말 마음대로 살 수 없는 인간이구나. 주께서 이렇게 죄인으로 살도록 해주셨구나.’ 이게 나와야 되는데, “복음 아는데 뭐 마음대로 살면 어때?” 지금 정신이 어디에 가있느냐 하면 자기 행복에다가 마음대로 못 살아서 환장을 했어요. “이참에 잘 됐다. 이근호 목사가 이야기했기 때문에 나도 이근호 목사 핑계대고 마음대로 살자.” 이거 뭐예요? 이거 중심이 누구 중심입니까? 자기중심이잖아요. 그거 시스라입니다. 말뚝가지고 콱 박아버렸으면 좋겠어요. 악담으로 끝나버리네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마귀가 우리 속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 핑계대고 하나님 핑계대면서 속에 자기중심으로, 자기 편한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것을 날마다 십자가로 박아버리게 하여 주시옵시고, 그냥 피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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