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겨울수련회 열왕기하강해 제 7강 핏줄과 성전 -이 근호 목사
열왕기하 9장에 보게 되면 선지자 엘리사가 선지자의 생도 중 하나를 보내어서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고 했는데, 길르앗 라못이라는 동네가 어느 동네냐 하면, 여기 지중해가 있고, 위에는 북이스라엘, 아래는 남유다, 그 옆으로 모압, 암몬, 그리고 요단강과 갈릴리 호수 중간쯤 이쪽이 길르앗 라못이라는 곳입니다. 이게 어느 지역이냐 하면 시리아 아람하고 북쪽 이스라엘하고 충돌지역에 있어요. 이 지점에 자기 선지생도를 보냈습니다. 거기에서 장군들끼리 군사회의를 하고 있는데, 그 중에 예후라는 장군에게 찾아가서 선지자가 전달하는 말씀을 이야기하고 그를 기름 부어 왕으로 삼으라고 했어요.
선지자의 예언이라는 것은, 이것은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귀신이 홀린 것 같아서 여기 예후라는 사람은 절대로 이 예언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예언대로 실시한다는 말은, 이거는 예후가 하는 것이 아니고 엘리사가 한 것이고, 엘리사 배후에는 죽은 엘리야가 있고, 엘리야 배후에는 엘리야의 하나님이 있는 거죠. 엘리사는 지금 엘리야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에,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리는 그런 방식으로 계속 가는 겁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린다는 이 말은 이 세상 전체가 이미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의 세상이 되는 겁니다. 죽은 자의 세상.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죄의 보편성이라고 합니다. 죄의 보편성. 보통 죄라고 할 때는 선한 사람 따로 이야기하고, 악인 따로 분류해서 이 사람은 보다 더 착하고, 이 사람은 보다 더 악한 사람, 이렇게 되는 거죠. 차사가 선과 악을 구분하는 그런 일을 하잖아요. 차사는 <신과 함께>라는 영화에 보면 나와요. 그 영화에 보면 오랜만에, 48년 만에 귀인이 왔다고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제가 볼 때는 귀인이 아니라 귀신들린 자에요. 이렇게 선인과 악인을 구분 짓는데, 이렇게 구분하게 되면 죄의 보편성은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의인이 따로 있고 선인이 따로 있기 때문에 한꺼번에 죄인이라고 하기에는 여기에 무리가 따른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나 엘리야의 입장에서는 전부다 죽은 자에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중에서 어떻게 의인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은 개인적 발상이고, 이 죄의 보편성을 선언할 수밖에 없는 그 원천, 근거가 어디서 비롯되는가 하는 겁니다. 원래 죄는 있지만 죄의 보편성이라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다룬다는 것은 상당히 무리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보편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죄의 원천이 이제는 보일 때가 된 거예요.
죄의 원천이 어디서 보이느냐 하면 유다와 이스라엘이 본격적으로 떨어져나가야 해요. 떨어져나가면서, 같은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여겼던 여기에 균열이 가고 균열의 틈 사이에서 마그마 올라오듯이 여기서 뭐가 올라오느냐 하면 죄가 올라옵니다. 죄의 기준이 되겠죠. 죄의 보편성을 위한 기준이에요. 개인적으로 얼마나 착한가로 기준을 정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냐? 그러면 다 죄인이라고 할 수 있는, 죄의 보편성 기준이 유다와 이스라엘이 갈라지면서 떨어져 나옵니다.
갈라져서 떨어져 나오는데,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유다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성전이 있고 이스라엘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전이 있는 것과 성전이 없는 것의 그 틈 사이에서, 왜? 성전이 있는 곳은 의가 되어야 하고, 왜? 성전이 없는 곳은 성전이 없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죄가 되어야 하느냐, 라는 그 이유도 함께 여기에서 나타나게 되죠. 그리고 이 균열을 주도하는 자들은 선지자들이 주도하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추려보면 엘리야의 기능을 가지고 엘리사가 북쪽으로 갔는데 그 북쪽의 예후가 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죄의 보편성입니다. 죄의 보편성에 의한 근거에 의해서 될 때, 선지자들은 어떤 조치를 내리느냐 하면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의 차이를 보이는 거죠. 틈새에 균열이 일어나면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차이를 보이는 겁니다.
뭐든지 어떤 구분을 할 때는 차이 또는 대조, 대비, 대립, 이런 것들의 파악을 해줘야 서로 양쪽다의 정보를 획득할 수가 있어요. 공부할 때, “이게 뭐냐?” 하면 안 되고, “이것과 저것은 왜 다른가?”라고 한다면 양쪽을 다 알 수가 있어요. 한꺼번에 두 개를 다 알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면접 볼 때도 너는 이 회사가 어떻게 좋으냐?”라고 물을 수도 있지만, 다른 회사에 있다가 왜 나왔는지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이쪽 회사가 저쪽 회사보다 더 좋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말할 때 양쪽 다 나오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 차이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차이를 끄집어내는데, 북이스라엘에서 예후가 바알선지자를 아주 몰살 내버립니다. 요람(여호람)왕부터 해서 바알선지자를 다 죽이는데, 비슷하게 같은 시기에 유다에서도 바알을 섬겼던 아달랴 라고 하는 왕후가 살았는데, 이 아달랴를 여호야다 라는 사람이 작살을 내버립니다. 여호야다는 사위가 되죠(대하22:11). 아달랴는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 아달랴에요. 아달랴가 유다왕 여호람과 결혼을 했어요(왕하8:18). 여호람은 왕이 돼서는 자기 동생 6명을 다 죽였거든요. 미친 인간이에요(대하21:2,4). 둘이 결혼해서 아하시야 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아하시야에게 아들들이 있었는데 엄마 아달랴가 손자들을 다 죽인 거예요. 다 죽이고 자기가 정권을 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하시야의 아들들이 죽임을 당하는 가운데서 아하시야의 누이, 고모가 요아스를 구사일생으로 구해내서 6년 동안 숨겼어요. 그 후에 할머니 아달랴를 엎어버리고 이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누가 나서는가 하면 고모부가 나서요. 고모부 직업이 뭐냐 하면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 나서서 바알선지자 죽이고 아달랴를 죽입니다(왕하11장). 이러한 식으로 이쪽 유다가 바알을 제거하는 방법과 이쪽 이스라엘이 바알을 제거하는 방법과의 차이가 나면서 죄의 보편성의 근거가 밝혀지게 됩니다.
이러한 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상당히 복잡한데 주의 있게 들으시기 바랍니다. 열왕기하 9장의 이야기입니다. 열왕기하 9장에 보면 엘리사의 종이 최고의 지휘관들이 회의를 하는데 가서 묻습니다. “예후 계십니까?” “내가 예후다.” “내가 당신에게 할 말씀이 있나이다.” “그러냐?” 하고서는 골방으로 데리고 갑니다. 문을 닫아놓고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 주리라” 7절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 이야기를 한 후 조건이 있는데, 엘리사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문을 열어놓고 지체치 말라, 후딱 빠지라고 한 겁니다. 이게 뭐와 같은가 하면 화약고에다 심지에 불붙여놓고, 너는 거기에 가담하지 말고 후딱 발을 빼라고 한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자기들끼리 폭파하도록.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악한 세계에서 정의의 이름이라는 악함이 어떻게 나오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악한 세계에서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하노라! 라는 정의의 이름에서 어떻게 악함이 실제적으로 나오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왜 이런 정의로운 일을 하는데도 악할 수밖에 없는가? 그거는 이쪽 유다에서 바알선지자들을 척결하는 것과 이게 대조가 되고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전이 없는 상태에서의 정의와 성전이 있는 상태에서의 정의가 달라요.
그래서 이 점을 오늘날과 적용시키면 교회를 부정한다, 한국교회는 썩었다, 목사가 돈만 안다, 뭐 목사의 비리와 한국교회는 개혁돼야 한다, 라는 종류의 사탄의 종들이 많이 설칩니다. 이단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기존교회의 비리를 뽑아내는 거예요. 구천지, 신천지, 구원파 등등 전부 다. 기존교회의 비리를 말하면서 여러분들은 새로운 말씀의 세계로 와야 된다고 하니까 전부 다 거기로 가는 거예요. 거기에 뭐가 있는 것처럼. 악한 세계에서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하노라! 라는 이름의 새로운 악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어떻게 해서 새로운 악인지, 그게 분명히 엘리사가 시켰는데, 엘리사가 시킨 게 맞는데 왜 이렇게 말하느냐, 결국은 이 악한 세대에서 정의롭게 보이는 이 예후가 아합의 적을 척결하면서 뭘 드러내느냐 하면 유다와 차이 나는 진정한 악함의 근거가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다는 그 최종적인 근거가 나타나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핏줄입니다. 핏줄. 핏줄이라는 말은 개인위주죠. 개인위주.
오늘날 60대 되신 분과 20대나 30대 되신 분의 정서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60대는 그냥 가족의 정이 중요해요. 가족의 정. 단합하는 것, 화합하는 것, 형제간의 친하게 지내는 것. 그런데 20대나 30대에서는 에너지의 반을 거의 소비하면서 지키고자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 것과 네 것의 구분이에요.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뭐 이런 노래 있잖아요. 내 것과 네 것을 구분하는 데 젊은 사람들은 혼신의 힘을 다 쏟습니다. 상당히 서구적이죠. 서구에서는 자기 집에 허락 없이 들어오는 사람을 총으로 쏘아도 죄가 안 돼요. 벌을 안 받습니다. 맞는지 안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들은 것이 있어요. 사적인 공간은 절대적 공간이에요. 절대적 공간에 허락 없이 들어오면 쏴 죽여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그런 게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내 것과 네 것을 분명히 구분하자는 거예요. 그런데 시어머니는 60대고 결혼한 며느리는 30대 초반이다 이 말입니다. 시어머니가 아들집에 가는데 어떠냐는 겁니다. 잘못하면 총 맞는 수가 있습니다. 철저하게 혼밥, 혼술, 뭐 전부 다 개인들이에요. 개인들. 내 통장 네 통장, 내 필통 네 필통, 내 볼펜 네 볼펜, 내 안경 네 안경, 전부 다 내 것에 집중하는데 에너지를 그렇게 소비합니다. 아무리 키우는데 고생을 했어도 노크하고 딸 방문이나 아들 방문을 열어야지 왈칵 열었다가는 끝이 좋지가 않습니다.
그러한 현대적 정서를 나이든 사람들은 견디기 힘들죠. 이게 가정이냐, 이게 무슨 사는 것이냐, 내가 무슨 키운 보람이 있느냐고 이렇게 하는데, 젊은 사람들에게 보람은 내 것을 내가 간직하는 것이 보람이에요. 그래서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안 된다고 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핏줄의 우월성은, 이게 개인 플러스(+) 개인이 되게 되면, 그게 정주적 가족이 돼요. 정주적이라는 뜻은 무슨 뜻이냐 하면 거기에 늘 머무를 수 있는 가족이에요. 여기서 생긴 문화가 무슨 문화냐 하면 농경문화라고 합니다. 농경문화.
그러면 바알종교라는 것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개개인의 핏줄이 그 땅에 계속 머무르는 겁니다. 머문다는 것은 농사지을 때 농사의 생산성이 늘어나요. 늘어나기 위해서는 집약적 산업체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데 그게 농경문화고, 그 문화 또는 풍습, 풍속, 이것을 정신적으로 추상적으로 관장하는 신이 무슨 신이냐 하면 바로 바알신입니다. 어머니일 수도 있고 부인일 수도 있는 아스다롯, 누이동생 되는 아세라, 이것이 가나안 지역에서 각 형태는 다르지만 어쨌든 통합하게 되면 바알신입니다.
그리고 이 바알 신을 섬기는 근거가 이 핏줄에 있는 거예요. 핏줄. 핏줄에 있기 때문에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가나안 땅에서 살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본성상 바알 플러스(+) 여호와가 전혀 어색하지가 않습니다. 바알+여호와, 껍데기는 여호와인데 알맹이는 자기 가족위주에요. 자기 핏줄위주에요. 이거는 유목시대가 끝났다는 이야기에요. 유목시대의 하나님은 여호와입니다. 여호와에게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목적지점에 가야 돼요. 근데 목적지점으로 돌아오고 난 뒤에는 그들이 토착민을 내쫓고 그들이 주인노릇을 하는 거예요. 정주민 되는 거예요. 거기에 영구히 거주하는 거주민이 되는 거예요.
거주민이 되면서 남들이 남기고 간 그 문화의 결실이, 곡식이 잘 되게 했으니까, 곡식이 잘 되게 하는 그 기술적 노하우를 기존에 있는 선배 되는 토착민에게 배울 때에 그들의 문화와 방식까지 다 함께 흡수해서 농사를 짓게 마련입니다. 농사의 세밀한 기술이 있잖아요. “이 기술을 할 때는 바알 신에게 아침에 정성 드려 세 번을 기도해야 된다. 이렇게 하면 나락이 잘 자라고 곡식이 잘 됩니다.” 이런 것까지 빼놓지 않고 전부 다 수입하는 거예요. 정주민들이 갖고 있는 그 본성이 떠돌이 같은 유목민들이 들어오고 난 뒤에는 그 인간이나 그 인간이나 다 같이 아담의 자손이 아닙니까?
그대로, 뭐 어색함이 없이 자연스럽게, “아이고, 선배님. 잘 배웠습니다.”하는 식으로 바알을 섬기는 거예요. 바알 섬겨서는 자기 핏줄 살리고, 옛날의 기억, 옛날에 애굽에서 홍해 건너올 때 그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못해서 건성으로 여호와 섬기고. 형식과 용어나 단어 선정은 여호와고 그 순수한 내용은 바알식이고. 그러니까 쉽게 주변나라와 동화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것은 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가족, 내 핏줄, 개인의 집합체가 중요한 겁니다. 이 개인의 집합체를 주체집단이라고 합니다. 집단인데 하나의 개인으로 행사하는, 주체집단을 형성하는 거예요.
이 집단에 의해서 바알은 굉장히 권장되고 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안에는 이스라엘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옛날에 포로 잡혀 온 토착민들이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평소에 했던 그들의 풍습이 이스라엘에게 스며들었습니다. 스며드는데, 예후라는 사람은 이런 바알종교에는 관심이 없어요. 자기에게는 자기의 새로운 핏줄이 중심이에요. 그래서 아합이라는 선배, 하여튼 선배들은 다 나빠요. 모든 대통령 선배들은 다 나쁜 대통령이에요. 자기가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적폐 해야 될 대상자에요. 아합 그 다음에 아하시야 그 다음에 여호람 또는 요람이라고도 하는데, 이런 왕들을 깡그리 예후가 나서서 죽일 때, 엘리사가 보낸 선지생도에게 들은 예언이 뭐냐 하면 아합의 집을 치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예후는 뭘 노리느냐 하면 아합의 집을 친 자리에 자기 가문, 자기 가족이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을 품은 거예요. 이들이 믿던 종교가 바알종교거든요. 근데 바알종교는 뭔지 모르겠고, 하여튼 바알종교를 하나의 구실로 잡아서 처리하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엘리사의 하나님께서 바알 믿었기 때문에 쳤다면 어쨌든 간에 그거는 아합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나는 모르겠고, 나는 시킨 대로 바알을 구실로 잡아서 치게 됐을 뿐이고, 문제는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이걸 교회에 적용해서 재미나게 이야기하게 되면 교회에 현재 선임목사, 또는 당회장 목사가 돈 때문에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다 싶으면, 그 교회 부목사로 들어온 사람은 교인들에게 상대적으로 굉장히 자기의 거룩함과 경건함을 어필합니다. 어필해야 반정이, 쿠데타가 성공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교회는 항상 몇 십 년 전에 목돈 냈던 은퇴 장로들이 있어요. 은퇴 장로들이 아무리 은퇴를 했어도 그 은퇴 장로들의 아들들이 장로후보감으로 되어 있고 재정을 보고 있다면 그 사람을 빨리 포섭해서 자기 자리를 잡는데 구실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 구실이 뭐냐 하면 선임목사가 이러이러한 잘못을 했으니까 빨리 내보내야 한다고 해요. 그러면 또 선임목사는 배후에 무슨 세력이 있다고 하고. 이렇게 해서 붙는 겁니다.
그래서 새로 뽑힌 젊은 목사는 본당에서 예배드리고, 당회에서 쫓겨난 선임목사는 아래층에서 예배드리고. 충현교회 이야기 아닙니까? 이게 서울의 어느 교회뿐만 아니고 그런 현상들이 교회에 전부 다 있다고요. 그런 현상들이 다 있다고요 그래서 선임목사는 너 노회에서 제명시킨다고 협박하고. 제명시키면서 그 목사의 비리 같은 것을 나름대로의 정보원을 통해서 또 캐내고. 그리고 하는 말은 거룩하고 경건해야 될 교회가 목사를 제대로 모셔야 된다고 하면서 경건과 거룩을 들먹이지만, 이거는 구실에 불과하고 사실은 그 자리가, 권력의 자리가 탐이 나는 거예요. 그리고 다 끝나고 난 뒤에는 이거는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하는 거예요.
교인들은 아마추어기 때문에 성경대로 ‘아, 하나님 뜻이었구나!’ 이렇게 알고 있을 뿐이지 두 인간이 무슨 목적으로 헐뜯고 싸운다는 것을 전혀 몰라요. 그냥 내가 목돈을 낸 교회가 부흥되기만을 바랄 뿐이지 딴 건 전혀 관심이 없어요. 교회를 붙들 뿐이지 예수를 붙드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복음이 뭔지 모르고. 그냥 교회만 시도 때도 없이 섬기는 거예요. 그것도 3, 4대 대를 이어서. 그래서 거기서 깃발 들고 나선 사람이 누구냐 하면 3, 4대째 장로출신 가정의 그 손자들이, 자기들의 선대 장로가 기존의 장로에게 밀리니까 여기에 나서서 정치적인 싸움을 하는 거예요. 이게 성경에 나옵니다. 지금은 옛날 옛적 남의 이야기가 됐지만. 이게 왜 그러냐 하면 교회 부동산이 돈 되는 부동산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교회에서 돈 모이고 어떤 모임에서 돈 모이면 아주 위험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돈 막 쓸 수는 없는 거고.
자, 그래서 이 예후가 작살을 내는데, 우선 그 선배 요람 왕이 아람 왕 하사엘과 싸울 때 부상을 당해서 이스르엘이라는 곳에 피난을 가 있었어요. 원래 이스라엘 수도가 브니엘이었어요.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얍복나루 거기에 있다가 디르사로 이동했다가 나중에 오므리 시대에 세멜(왕상16:24)이라는 사람의 토지를 구입해서 이름을 사마리아라고 바꿔가지고 여기에 수도가 있었어요. 이스르엘은 그 위에 있어요. 이스르엘 평지라고 합니다. 이 이스르엘에 그 당시 요람이 몸이 아파서 피신을 했는데 위로하려고 남쪽에 있는 아하시야 라는 왕이 와 있었습니다.
예후가 말을 타고 오니까, 이때가 하사엘이라는 아람 왕과 대치하면서 전쟁하고 있었기에 길르앗 라못을 지키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예후가 오니까 승전보를 가지고 왔나, 아니면 전쟁에서 뭔가 문제가 있었나, 패배했나, 함락됐나, 뭐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후는 오자마자 그냥 다 죽여 버렸어요. 도망가는 아하시야도 죽여 버렸어요. 다 죽이고 사마리아로 돌아오는 길에 아하시야 동생들 42명도 다 죽여 버렸어요. 그러니까 남쪽 아달랴가 미치죠. 자식들, 일가친척들 42명을 다 죽였으니까. 또 사마리아에 있는 아합의 후손들 70명을 죽이라고 시킵니다. “너희들이 알아서 죽일래? 내가 가서 죽일까?” “알아서 다 죽이겠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거예요.
예후가 죽인 숫자를 보면 만만치 않아요. “아합의 아들 칠십 인이 사마리아에 있는지라 예후가 편지들을 써서 사마리아에 보내어”(왕하10:1). 그 다음에 뭘 하느냐 하면 열왕기하 10장 15절에 보면, 예후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과 손을 잡고 둘 다 거짓말을 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18절에, “예후가 뭇 백성을 모으고 이르되 아합은 바알을 조금 섬겼으나 예후는 많이 섬기리라” 아합이라고 한 것은 아합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19절에,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한 사람도 빠치지 말고 불러 내게로 나오게 하라” 20절에 보면 나오죠. 바알을 위하여 대회를 공포하는 겁니다. 그리고 22절에 보면 그냥 모이는 것이 아니고 예복을 줘요. 바알 섬기는 자들이 티가 나도록 하기 위해서 예복을 주는 겁니다. 21절로 27절까지를 보게 되면 바알의 당에 들어가게 한 후에 호위병들과 장관들에게 한 사람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다 죽이라고 합니다. 다 죽이고 바알의 목상을 헐고 당을 훼파해서 그걸 변소를 만들었다 이 말이죠.
자, 여러분 이렇게 하게 되면, “아, 이 예후 참 개혁자다.”라고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개혁자라고! 근데 뭘 위한 개혁이냐 이 말입니다. 29절에 그게 나옵니다.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아, 여기서 예후가 바알을 섬기는 것을 구실로 해서 선대에 속한 사람들을 다 죽인 그 이유가 나오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교회 이야기를 합시다. 교회에서 후임목사가 들어와서 인기리에 장로들을 포섭해서 선임목사를 추방했어요. 추방하면서 단서를 붙여가면서 했는데, 그 목사가 결국 노리는 것은 뭐냐 하면 그 교회의 부동산과 십일조 내는 교인들의 숫자, 이게 탐이 나는 거예요.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이 교회를 몽땅 먹겠다는 거예요. 이제는 나를 섬기라는 겁니다. “나를 섬겨라! 내가 얼마나 경건하고 내가 얼마나 말씀에 열심인 것을 이번 선대목사를 쫓아내면서 충분히 알지 않았느냐? 따라서 진짜 하나님의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할 수 있는 것은 나니까, 개혁한 내가 공로자니까, 이 공로자를 섬기고 나를 받들어라!”라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 참, 목사가 교회를 이기지 못하면 그거는 목사도 아니에요. 교회 자체가, 이게 유혹의 대상이에요. 출세에 힘과 보탬이 되고요. 목적이, 내 교회 하나 소유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잖아요.
그래서 금송아지를 왜 섬기느냐 하면, 금송아지가 벧엘과 단에 있어요. 단은 북이스라엘 제일 높은 곳에 있고 벧엘은 남유다와의 경계선에 있습니다.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둔 이유는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인들이여, 다른 교회에 가지 마세요. 특히 돈 좀 되는 교인들이여, 가지 마요.” 이 교회가 있어야 내 존재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이걸 통째로 삼키기 위해서 나는 피를 많이 흘렸고 개혁을 외쳤다는 겁니다. 딴 건 다 없애는데, 만약에 벧엘과 단의 금송아지를 없애버리면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유다만이 여호와를 섬긴다는 것을 알고 그쪽 방식에, 그쪽 문화에 흡수되어 가버리면 예후는 무엇을 위한 정의였고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습니까?
뭔가 전쟁을 했으면 얻은 게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피 흘렸으면 챙기는 것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냥 주님만 챙기면 되지 않습니까? 주님만 챙길 것 같으면 엘리사가 후딱 손잡지. 후딱 내빼라는 소리를 안 하죠. 그것을 전하는 선지생도 너도 악함의 일부의 일원이라는 것입니다. 일원이기 때문에, 너는 손 턴다는 식으로 빨리 빠져나와라. 안 그러면 너도 당한다는 이런 뜻이에요. 악함은 악한 것끼리 같이 붙어서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는 거예요.
자, 북쪽이스라엘의 본색이 뭐냐 성전이 없으니까, 성전이 없으면 없는 가운데서 마치 성전 흉내를 내어가지고, 우리나라는 우리가 지켜야 되니까 유다나라로 가지 않도록 막는 차원에서, 우리식의 종교 금송아지를 두 개 섬기고, 그걸 여호와의 이름으로 섬기면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장소를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두고, 7월 15일을 8월 15일로 절기를 바꾸고, 아무나 돈만 주면 제사장이 되는 가짜 제사장으로 해서 자기 백성을 단속하고자 하는 거예요.
심지어 북이스라엘 지파는 10지파에요. 남유다는 2지파고. 10지파의 중심은 요셉지파고 2지파의 중심은 유다지파에요. 결국 중심의 축은 요셉지파인 이스라엘은 날아가고 메시아가 유다지파로 넘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 창세기에 보면 요셉지파가 라헬의 자손으로서 그렇게 잘했지만 역사가 유다지파로 넘어오는 거죠. 그냥 넘어오는 것이 아니에요. 한쪽이 망해줘야 유다가 부각되게 되어 있어요.
어쨌든 예후의 반란은 금송아지만은 버리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건 뭐냐 북이스라엘의 정체성, 왜 전체가 죄의 보편성일 수밖에 없는가의 그 근거를 먼지를 털어서 깨끗하게 보여준 거예요. 싸우는 그 명분이라는 것이 딴 게 아니고, 이 북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이 지역과 인구와 재산은 우리가 지킨다는 겁니다. 우리가 지킨다는 것.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가 물러가면서 자기 아들 김하나에게 왜 물려줬는가 하는 것을 한국교회가 들먹이는 이유는 명성교회가 탐이 날 정도로 크기 때문에 그래요. 온 한국교회가 관심이 있는 것은. 명성교회 교인수가 12명이고 판잣집 같은 곳이라면 아무도 데모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이름이 명성이라고 해도 명성에 걸맞지 않다고 해서 무시합니다. 선교단체든 교회든 뭔가 숫자가 많고 재산이 많으면, 이거는 이미 무당집입니다. 무당집이에요. 복음 전하는데 그렇게 많이 올 리가 있습니까? 좁은 길인데. 그게 무슨 좁은 길이에요? 숫자가 많은데? 넓은 길이죠. 넓은 길을 외치기 때문에 많이 오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여기에 비해서 유다는 어떤가, 유다는 그럼 명분이 있느냐, 있지요. 이게 좀 어려운데요. 유다의 명분은 뭐냐 하면 핏줄이 아닙니다. 핏줄이 아닌 이유가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나와요. 이때는 남북으로 갈라지기 전입니다. 다윗시대니까. 1절,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2절, “왕이 이에 그 곁에 있는 군대장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그 도수를 내게 알게 하라”라고 인구조사를 시켰습니다.
자, 인구 조사한 그게 뭐가 나쁩니까? 역시 죄의 보편성이에요. 인구조사를 하는데, 그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왕이 되고 난 뒤에 이만큼 부흥이 됐다는 거예요. 내가 왕이 되고 난 뒤에. 진짜 하나님의 언약 주체자는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이어야 해요. 하나님의 언약대로 돼야 되는데, 다윗 자기가 왕이기 때문에, 잘했기 때문에 부흥됐다고 해서 도중에 가로채기를 실시한 거예요. 백성들을 의식한 거죠. 역시 다윗만한 왕이 없다는 칭송을 평소에 듣다보니까 자기가 낫씽nothing, 아무것도 아닌 허깨비 같은 존재라는 생각을 못하고 자기가 상당히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잠시 착각에 빠졌는데 그 착각을 누가 하게 하시느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분노하사 착각에 빠지게 하신 거예요.
그만큼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이 문제가 있고 그 문제책임자인 다윗을 정신 나가게 만들었다, 또는 같이 결부시켰다, 라고 이렇게 보시면 되는 거예요. 인구조사하면서 그 인구 하나하나가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그 귀한 것을 사무엘하 27장 5절에 보면 사흘 만에 7만 명이 날아갑니다. 7만 명. 유다의 원칙은, 히스기야도 마찬가지지만 바벨론 사신에게 자기가 귀하게 여기는 것, 관심 있게 여기는 그것을 주께서 다 날려버립니다.
관심을 어디다 두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친히 왕이 되시고 하나님의 언약대로, 약속대로 보여주심 앞에서 우리는 죄인인데, 이만한 과분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는, 낫씽nothing,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는 이런 자세를 견지해야 되는데, 갑자기 나라가 잘 되고 가정이 무탈하고 아무 일이 없으니까, ‘내가 어지간히 바른생활 했고, 복음을 아는 보상이 이렇게 주어졌구나. 역시 내가 처신 하나는 잘했네.’라고 하는 순간 주님의 적이 돼요. 그때, “너 같은 것이 바로 나를 망친다. 하늘나라를 확장한다고 하는 네가 하늘나라를 막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럼 목사님 사전에 예방하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하는데,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자질이나 능력이 우리한테는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당하라고 하면 당해야죠. 까불 때는 까불어야 해요. 사무엘상 24장처럼 오히려 까불락 거릴 때는 까불락 티를 내고 까불락 거려야 돼요. 그리고 당하고 난 뒤에 까불락 거리지 않도록 말려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면 되죠. 맞아도 감사! 터져도 감사! 7만 명이 날아가도 감사! 7만 명 키우는데 얼마나 애를 썼겠습니까? 교인이 한 50명이 되는데 갑자기 어떤 교회에서 사단이 나서 그쪽에서 20명이 단체로 왔다. 그러면 합쳐서 70명이죠. ‘하나님께서 다른 교회의 차이점을 두고 역시 내가 바르게 목회한다는 것을 주께서 아셔서 20명을 보냈구나.’라고 하는 순간 30명 날아갑니다.
그렇게 날아가게 해 준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왜냐하면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안 날아가게 해주면 그건 이미 배린 자식이에요.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그렇게 해주시는 거예요. 특히 유다, 다윗은 핏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인구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관된 약속에 부합되느냐가 중요해요. 왕은 바로 성전의 의미, 성전의 취지를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그런 역할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역할을 잘했던 자가 누구냐 하면 다윗 이후에 솔로몬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지킴이었습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실제로 성전만 바라보게 했어요. 성전 건축할 때 기도의 내용을 한번 보세요. 열왕기상 8장에 쭉 나오거든요. 나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한 게 아니에요. 왕은 낫씽nothing,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성전이 있으면 이스라엘은 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유다나라에 아달랴 라는 악한 여왕시대 때에, 그 바알 신을 쫓아내고 개혁할 때는 여호야다 이 제사장이 안식일에 왕궁과 성전을 지키기 위해 호위병과 백부장들을 5개조로 모아서 2개조는 왕궁에 숨어있는 어린 요아스를 지키고 3개조는 여왕을 공격해서 성전 자체를 회복시켜서 그걸 누구한테 명령합니까? 어린 요하스에게 합니다. 그 배후에서 수렴청정해가지고 성전을 새롭게 개축하고 신축하는데 전력을 다해요.
성전을 개축한다는 것은 뭘 인정하지 않느냐, 성전을 지키지 못한 것은 왕 자격이 없기에 왕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했던 여호야다는 왕들만 가야 될 그 묘실에, 왕도 아닌 일개 제사장이 여기에 묻혀버립니다. 유다 왕들이 솔로몬 포함해서 21명인데, 그걸 종묘라고 하는데, 왕실에 묻히지 않은 사람이 굉장히 많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자진해서 안 묻힌 사람도 있어요. 자기가 부끄러워서. 므낫세 같은 사람들.
유다는 성전이 있어줄 때만, 하나님이 이름이 계신 곳에만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의미가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핏줄입니다. 무조건 자기 핏줄로 대치한 거예요. 그래서 예후가 시키는 대로 바알선지자를 다 죽여 놓고도 기껏 몇 대만 보장받느냐, 4대만 보장받아요. 4대 뒤에는 살룸에 의해서 이 핏줄도 날아가 버립니다. 여호아하스, 요아스, 여로보암 2세, 그 다음 스가랴 왕은 살룸에 의해서 망해버리죠. 결국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그 망한 그 가문을 위해서 아합가(家)의 바알 섬기는 것을 청산했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바알이라는 종교가 도대체 뭔데 그렇게 여호와와 가까이 갈 수밖에 없는가, 그건 제가 잠깐 언급했죠. 순하게 융합될 수 있고 통합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 바알이라는 뜻은 주인이라는 뜻이에요. 이 주인이 뭘 하느냐 하면 폭풍신입니다. 제때 바람 불고 비 내리게 하는 것을 관장하는 신이에요. 그렇다면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제때 바람이 불고 비가 오지 않으면 수확이 나오지를 않죠. 그러면 가만히 있던가요? 지난 6월에 비 안 올 때 충청도에서 뭐했습니까? 기우제 드렸어요. 기우제 드릴 때 누가 동원됐느냐 하면 그 지역 군수들입니다. 표 때문이에요. 표 때문에 군수들이 들어가는 거예요.
지금도 고령이나 성주에 가면 고령가야나 성산가야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가야는 6가야로 고령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 가락(금관)가야, 대가야, 소가야가 있는데 가락가야가 최고입니다. 가락가야의 시조가 김수로거든요. 하늘의 명을 받아 제사를 지내자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로 싼 금빛 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안에는 태양처럼 둥근 황금색 알이 6개가 있었다고 해요. 제일 먼저 그 알에서 사람으로 태어났다 해서 수로에요. 나머지 다섯 알도 태어나 5가야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김수로는 최초로 이주민여자하고 결혼했어요. 인도여자하고. 제사를 드리는데 국가의 예산이 들어갑니다. 거기에 제사장이 누구냐 하면 성주군수가 들어갑니다. 왜 그래요? 어디 성주군수가 김수로한테 반했습니까? 언제 봤다고?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하는 자가 누구에요? 자기 표 찍어주는 군민이잖아요. 군민. 군민은 정주민, 토착민이에요.
왕은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해줘야 돼요. 그래야 왕의 권력이 온전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 왔다, 교인수가 많다, 거기에 토착장로들이 20명이 넘는다, 새로 젊은 목사가 왔다, 설교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 교회는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가득한 교회입니다.”라고 모든 멘트가 이렇게 나와야지, “여러분, 이 교회 포기하고 우리는 예수만 믿읍시다.” 이러면 재계약 안 됩니다. 재계약 못 들어갑니다.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러면 뭐 개척하지요? 개척을 10년, 20년 해도 안 커지면 천만다행인데, 10년, 20년 했는데 한 2,000명이 되었다. 그렇게 되면 초반에 개척했던 그 목사는 완전히 기념비적인 존재,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가지고 모든 교인들이 다른 후임자가 와도 오직 설립목사만 쳐다보고 있다니까요.
이게 핏줄 중심, 정주민 중심의 바알종교에요. 바알종교. 한국교회가 바알종교라니까요. 돈 내고 모아서 예배당 짓고, 증축할 때마다 부동산! 부동산! 부동산! 부동산이 우상이에요. 부동산이 우상입니다. 말씀에는 관심이 없어요. ‘이 부동산 팔고 딴 데 가면 얼마 남고, 남은 걸로 터 사가지고 더 크게 예배당 짓고 그러면 교인들 더 많이 모을 수 있다.’ 그것만 생각합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고 목사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하면 목회 아주 잘 한 것으로 보는 거예요. 거기에 속아가지고 얼마나 갖다 바쳤습니까? 하여튼 돈 있을 때는 딴 데 다 갖다 바치고 복음 알 때는 돈 한 푼 없이 밥 빌어먹고 살고. 돈 있을 때는 교회에서 자랑질 해주니까 경쟁적으로 돈 갖다 바쳐놓고. 그렇게 했는데 이제는 안 알아주니까 한국교회 썩었다고 나가가지고는.....,
여호와의 말씀의 기초는 언약이고 신약에는 새 언약입니다. 십자가에요. 십자가는 핏줄이 바뀌었다는 거예요. 기존의 이런 핏줄 말고 새로운 피조물, 예수님의 핏줄에 의해서 살과 피가 흐르게 되면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바로 자기가 만든 피조물 속에 주님이 함께 계시죠. 성령으로 함께 계시면 그게 바로 성전이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되면 주님이 알아서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가 나가라고 해도 절대로 나가지를 않아요. 나가지를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사도바울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죠.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편하게 되었는가, 편하게 된 게 아니고 의가 들어왔기 때문에 죄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죄의 본색을 드러내면서 북이스라엘의 역할을 충실해 해줘야 해요. 말이 이상하죠. 이것을 끊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고 난 뒤에 우리에게서 구약 열왕기상하가 나와 줘야 된다 이 말입니다. 열왕기상하가 계속 나와 줘야 해요. 이거는 전혀 어렵지 않아요. 왜?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되니까. 평소대로. “나도 이 교회에 돈 냈다. 나도 발언권 주세요.”라고 할 때, “김권사! 손 내려! 니가 얼마나 돈 냈다고!”라는 이런 수모를 당해야 돼요. 거기에서 손들고 발언권 달라고 한 것도 이상하죠. “교회 이래서는 안 됩니다.” 뭐, 이런 이야기를 왜 해요. 뭐, 이런 발언을 할 때, 본인을 참 착하고 정의로운 일을 했던 예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렇게 발언권을 안 주게 되면 그 다음에 기도할 때는, “주여! 죽여주옵소서!”라고 하거든요. 독한 말이 나오거든요. “나를 무시하는 이 교인들 다 죽여주옵소서!” 슬슬 애굽 본성 나옵니다. “우리 아버지가 세운 교횐데 니가 와?”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이거는 복음과 관계없는 주도권 싸움에 빠지면서, 그때 기도는 또 얼마나 빡세게 하는지. “정의로운 주님이여, 이 정의를 굽어 살피소서.” 완전히 예후라. 예후. 예후의 이야기가 여기에 나온다는 말은 우리가 얼마든지 그러한 일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교회뿐이겠어요? 회사는 안 그렇겠습니까? 노동세계는 안 그렇겠습니까? 모든 단체에서 다 이렇게 패 가름을 강요받고 있어요. “니 어느 패야? 니 어느 쪽이야? 분명히 해!”라고 요청하고 강요받고 있는 이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가족 간에 싸우면서도, “엄마는 누구 편인데? 큰 아들 편이야? 내 편이야?” 뭐, 이런 수모까지도 막 당하게 됩니다. “엄마는 다 너희들 사랑하지.” “뭐 그런 우유부단한 소리하지 말고. 그렇게 사랑하면서 LA이 갈비를 저쪽에는 다섯 개 주고 나는 두 개밖에 안 줬나?” 저 아들 키울 때는 아이스크림 막 먹이면서 미워하고, 이 아들 키울 때는 건강 챙기고. “엄마 나 미워하지?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뭐. DNA이 조사 해보자.” 이거 뭐 막장드라마 가는 겁니다. 우리는 구원받아놓으니까 느긋하게 마음껏 예후노릇 할 수 있는 겁니다. 아달랴 되고 예후 되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자신을 자책하지 마세요. 우울증 걸립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