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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8강-기쁜소식 18010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 16. 16:16
2018-01-13 12:05:22조회 : 34         
2018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8강–열왕기하 강해 : 기쁜 소식이름 : 이미아 (IP:122.43.178.64)

2018 겨울수련회 열왕기하강해 제 8강 기쁜 소식 -이 근호 목사

 

열왕기하 6장 24절을 보겠습니다. “이 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그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니”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더불어서 싸우려고 오는데, 아람 왕 이름이 벤하닷이라고 해서 세 명이 나옵니다. 1세인지, 2세인지, 3세인지 성경에는 그게 안 나와 있는데, 벤하닷 1세(왕상15:18)가 나오고, 아합시대에는 벤하닷의 아들 벤하닷 2세(왕상20:1), 벤하닷 2세를 살해하고 왕으로 오른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 3세(왕하13:3, 24)가 나옵니다. 여기서는 벤하닷 2세가 됩니다. 열왕기하 6장에 24절 이전에 침공을 했어요. 6장 8절에 보면, “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며” 싸운다고 할 때에 여러분들이 왜 자꾸 하나님께서 싸우게 하시느냐고 생각하는데,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 논리에 의하면 약속의 땅에 살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계속해서 깨우치는 거예요.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것은 땅이 있다고 들어가는 동네가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부합된 사람만 들어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나가야 해요. 그 땅에서 살 수가 없어요. 지금 우리에게 들어온 천국은 한 번 들어오면 나가지를 않지만, 아직 천국이 되기 전까지는 들어갔다 나갔다, 들어갔다 나갔다 해서 누가 구원되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은 들어갈 사람만 들어가야 하기에, 이런 기준이 수립되어 있는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겁니다. 천국이 있으면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들의 죄를 통해서 서서히 천국기준이 구체화돼요. 정립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천국이 정립이 되게 되면 아담에 속한 인간은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확증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나라에 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거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 관계가 새 언약 관계에요. 새 언약 관계인데, 여기 열왕기하 6장 24절부터 나오는 그 이야기를 보게 되면 이 새 언약 관계에서 천국 백성을 모집하는 이 원칙이 아람과 이스라엘 전쟁가운데에 잘 나와 있어요. 여기 새 언약이 천국이거든요. 여러 번 제가 이야기하지만, 천국의 백성들은 본인이 본인을 관리한다든지, 본인이 본인을 변신시킨다든지, 이런 것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새 언약이 꽂아서 잡아당기는 식으로 끌고 가요.

 

그래서 제가 지난 설교에서 이야기했잖아요. 미안해해야 한다고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그냥 천국에 가니까. 남한테 뭔가 이야기할 게 없어요. 내 쪽에서 이야기할 게 없어요. “너 어떻게 해서 천국 갔느냐?” “몰라! 나도 몰라! 그냥 주님이 불러줬어.” “아니, 불러줄 때 기도를 했다든지, 순수했다든지, 뭐 그런 게 있잖아?” “아니야. 순수하지도 않았어. 설거지 할 때 불러줬는지, 운전할 때 불러줬는지 그냥 불러줬어.” 그냥 불러준 순간, ‘아, 이거는 내 쪽에서 더 이상 할 게 없구나! 전혀 보탤 게 없구나!’하는 것이 확 기쁨으로 다가오는 거죠.

 

마치 놋뱀을 쳐다볼 때, 미리 목을 45도 각도로 꺾어서 준비하고 있다가 쳐다본다. 뭐 이런 게 없어요. 뭐지? 봤네! 깨끗하게 나은 거예요. 그걸 본 자기 덕으로 돌리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게 신약에 오게 되면,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났느냐 하면 인간이 이렇게 누워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살아있는 인간을 죽여 버립니다. 죽게 만들고 여기서 뭔가 으스스~ 하고 떠오르는 게 있어요. 죽은 인간을 대신해서 떠오르시는 분이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하나님 오른편에 가시고 난 뒤에 성령을 보내시면 죽은 너희들도 예수님처럼 살리라. 이런 관계거든요. 죽은 자에게 주께서 오셔서 그들을 대신해서 죄를 해결하셨지, 본인이 해결하지 않았어요. 죽은 상태에서 무슨 해결이 돼요? 죽은 상태에서 아무것도 해결이 안 되죠. 본인이 뭐 한 게 있어야죠. 죽어있는데.

 

죽은 상태에서 예수님이 오셔서 다 이루시고 그들을 끌고 가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뭐라고 하게 하시느냐 하면, “나 죽었다⬏”라고 자랑질 하게 합니다. 여기서 죽었다고 하는 것은 숨 쉬지 않는다, 눈이 감겼다가 아니라, “나는 내 마음대로 살았다⬏”라는 것을 마음대로 보여주는 것이 죽은 상태에요. “내가 행한 대로 나는 내 자존심만 챙기고 이기주의였다⬏”라고 마음껏, 마음껏 선전해가면서, 헤헤거리면서 천국을 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새 언약적 모습은 구약의 옛 언약에서 이야기한, 뭔가 요구한 사항과 대비해보면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구 언약은 인간에게 뭔가 요구한 것이 있는데, 새 언약은 전혀 요구한 것이 없잖아요. 요구한 게 없어요.

 

사도바울의 명령은 요구한 게 아니고 확인 작업이죠. “너 죄인 맞지?” “맞아요.” 이렇게 확인 작업하는 것이지, 새삼스럽게 행위를 추구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돈도 필요 없어요. 정성도 필요 없어요. 그냥 주님 앞에 끌려올라가는 겁니다. 구약에서도 그런 게 있죠. 그런 것을 열왕기하 6장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럼 구약 시기에는 모습을 어떻게 보여주느냐 하면은, 아람 왕 벤하닷이 와서 사마리아를 포위해버렸어요. 포위를 하니까 굶어죽게 되었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모습을 구약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그들을 굶겨 죽이는 방식에 누가 동원되느냐 하면 아람 군대가 와서 사마리아 성을 완전히 포위를 해버립니다. 여기에서 점점 양식이 떨어져나가겠죠.

 

자, 양식이 떨어져나간다는 모습이 25절에 보면 물가物價로 나와 있어요.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합분태 사분 일 갑에 다섯 세겔이라” 근데 지금 굶어죽는 마당에 돈 모아서 뭐 할 건데요? 장사하는 사람도 희한해요. 자기가 먹지. 이참에 돈 모아서 뭐 할 건데요? 돈을 모은다는 것은 항상 미래는 발전하다는 것에 돈이 필요한 거예요.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미래의 신용을 앞당겨서 돈으로 사는 것이 자본주의입니다. 만약에 돈이 필요 없다면 자본주의는 이제 망하는 거죠. 자본주의 망하면서 모든 세상도 망하는 겁니다. 자본주의가 살아있는 한 세상은 계속 발달하고 미래의 신용에 의해서 서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본주의에서 발을 뺄 마음이 안 들죠.

 

그런데 돈까지 떨어지고 양식까지 떨어지니까, 아파트 201동하고 202동하고 서로 약속을 했어요. 약속이 뭐냐 하면 28절에 보니까, “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 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이거 자동적으로 식인종 돼버린 거예요. 양식을 자체생산 했어요. 이게 어디서 일어난 일이냐 하면 놀랍게도 약속의 땅에서 일어난 겁니다.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기를 약속의 땅은 젖과 꿀이 흐른다고 이야기했어요. 신명기 28장에 보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잘 먹고 잘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근데 조건이 있어요. 내가 준 이 언약의 말씀을 순종하면 그때 잘 먹고 잘 살 것이라고 한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왕 들어왔기 때문에, 이왕에 들어온 장소기 때문에 언약의 조건은 끊어내도, 이왕에 차지했기 때문에 농사지으며 어떻게든 먹고 살겠거니 한 거예요. 그런데 옛날 토착민들에게는 이런 일이 없어요. 이런 일은 이스라엘이라는 약속의 사람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약속의 압박감을 받아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야 약속이 생생하게 살아있으니까. 약속이 살아있는 것이 중요하지 우리가 굶어죽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이렇게 실시하니까, 약속이 없는 이방민족인 아람이 쳐들어와서 힘으로 눌러버립니다. 포위를 해버리니까 굶어죽죠.

 

그런데 여기서 무엇이 일어나느냐 하면 굶어죽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죽음 직전의 산 자들이 아직 죽기 전에 죽음에 대한 그 공포심과 인식이 여기서 살아나는 거예요. 죽는 것은 전혀 무서운 일이 아니에요. 죽겠다는 그것이 무서운 것이지 죽으면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뭐 꼭 죽어본 사람같이 이야기하는데. 그래서 자다가 죽으면 괜찮아요. 모르고 죽기 때문에.

 

그런데 자꾸 죽인다, 죽인다, 약을 올리는 이게 무서워요.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이 죽음은, 흔히 인간이 아는 대로 의학적으로 숨이 끊어진 게 아니에요. 뭔가 딴 게 있어요. 죽음에서 주는 공포에 대해서 흔히 눈 한 번 찔끔 감으면 된다고 하는데, 그게 죽음이 아닙니다. 이 죽음은 그 이상의 공포를 유발하는 큰 게 있어요. 그걸 그들은 모릅니다. 다만 죽는다는 것이 무서울 뿐이지, 왜 죽음에 대해서 무서워해야 하는지를 몰라요.

 

그러면 여러분 물어봅시다. 현재 사마리아 성이 포위됐는데, 여기에서 아람군대의 압박이 있겠죠. 처음에는 누가 무서울까요? 아람군대가 무섭죠. 생존을 위협하니까. 그런데 나중에는 누가 무서운가 하면 201동 아줌마가 무서워요. 제가 또 궁금한 게 있는데, 아직도 납득이 안 되는데, 드라마 같은 것을 보면 사채업자 욕 되게 하잖아요. 그게 제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자기가 사채를 안 썼는데 욕 합니까? 사채를 분명히 계약서를 쓰고 썼잖아요. 1년에 30퍼센트 이자를 주기로 계약서 쓰고 돈 빌려 썼으면 고맙잖아요.

 

근데 왜 욕을 하죠? 이자 받고 하니까 그렇다고 하는데, 돈 빌렸으면 갚아야죠. 저는 아무리해도 사채업자가 왜 욕을 얻어먹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거야 이율이 너무 높으니까 그렇다고요? 그럼 이자 높다고 겁내지 말고 계약서 쓸 때 5퍼센트 하자고 미리 그렇게 주고받으면 되잖아요. 안 빌려주면요? 그러면 사채업자가 무서운 게 아니고 생존의 의지가 무서운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무서워하는 거예요. 본인보다 더 무서운 게 없어요. 본인이 본인에게 감당이 안 돼요. 어떤 모험을 해서라도 내가 나를 지켜야 된다는 이 의지가 괴물입니다. 괴물이에요.

 

처음에는 아람군대가 무서웠지만 옆에 이웃집 아줌마가 사채업자거든요. “내 아들 먹었으니까 오늘은 네 아들 내 놓아라” 먹을 때는 뭐 맛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부터는 자기 아들을 내 놓아야 해요.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29절에,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 계약위반 했습니다. 이 계약이 법적으로 성립이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이 계약 가운데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공포심이에요.

 

다시 말해서 사는 것이 가장 무서운 일이에요. 사는 것이. 살아있을 때는, 여유 있을 때는 몰라요. 그리고 죽을 때도 몰라요. 죽으면 이 살아가는 실체도, 그 본체도 날아가 버리니까 괜찮은데, 죽음 직전에 사는 것 자체가 무서운 일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주신 창세기 3장의 저주에요. 저주입니다. 이 점을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할게요.

 

여기서 상대성원리가 동원될 수밖에 없어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에는 힘을 받지 않는 세계에 적용되는 특수 상대성 이론과 힘을 받는 세계에 적용되는 일반 상대성 이론이 있지만, 대략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우주의 질량에 의해서 곡면이 휘어진다. 여기 질량이 있으면 질량에 따라서 우주 자체가 휘어진다. 이것도 일반인들은 납득하기가 상당히 곤란해요. 텅텅 비었는데 휘어질 게 뭐가 있다고 휘어지느냐, 이게 나무 그네냐? 라고 하는데, 휘어지게 되어 있어요.

 

이 상대성원리를 더 일반화시킨 게 뭐냐 하면 중력의 궤적에 따라서 질량이 나중에 정해진다는 겁니다. 이게 더 희한한 이야기다 이 말이죠. 무게가 있는데, 이 자체의 무게하고 질량하고는 좀 다르지만 같다고 보고, 이 질량 자체는 주위에 흐르고 있는 힘의 장, 필드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겁니다. 이 물리학을 사회학적으로 우리한테 적용시키면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알튀세르에 의한 호명이에요.

 

그 사회의 권력의 장, 이거는 미셀푸코가 이야기한 것인데, 권력의 장에 의해서 주체가 형성된다는 겁니다. 주체 이전에 자아가 있고 자아는 자기밖에 모르는데, 여기서 호명해줄 때, “이 자리는 네 자리야”라고 지정해줄 때, 그때 ‘아, 나는 나를 이렇게 보더라도 남들은 나를 이렇게 보는구나.’ 그렇게 되면 남이 인정하는, 그 권력의 장이 인정하는 그 주체를 나의 자아로 대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거는 상대성원리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여기 이 권력의 장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데올로기라고 해요. 이데올로기. 그런데 이데올로기가 주체가 맘에 안 들면 뭘 바꾸느냐 하면, 이데올로기를 바꾸면 되는데, 이데올로기 이게 실체가 없어요. 왜? 네트워크 자체가 신이기 때문에. 네트워크 자체가 신이에요. 비트코인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아무도 만든 사람이 없어요.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이 공동으로 만든, 네트워크가 비트코인을 만든 거예요. 실체가 없는데 거기다가 투자를 해요. 실체가 없다는 것은, 그거는 남의 돈을 빼먹겠다고 투자한 거예요. 비트코인을 처음으로 만들어낼 때는 암호가 단순해요. 그런데 비트코인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되면 그 암호 푸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져서 더 많은 컴퓨터가 동원되고 전기력이 없으면 점점 더 어려워져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도박장에다가 도박장을 개설한 것하고 똑같은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도박이 우리의 문명을 굴리게 만들어요. 도박이 없는 곳에는 발전이 없어요. 북한 같은 데. 발전이 안 됩니다. 계속해서 바보들이 투자를 해줘야 빼먹을 놈은 빼먹고 망할 놈은 열군데 망하고 한군데 살고. 이 사회 참 좋은 사회에요. 돈 날린 사람이 한 열사람이 있어줘야, 돈을 날려줘야 한쪽에서는 돈을 버는 겁니다. 어느 바보가 걸려드느냐, 그 바보가 걸려들 때 나는 떼 부자 되는 거예요. 왜? 누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기존의 자본주의라는 이 이데올로기가 나를 그런 인간으로 호명해주고, 호출했고, 확정짓고, 규정시켜준 겁니다. 공무원 생활하다가 퇴직하면 이제부터는 이 생활로 들어가는 거죠. 정말 퇴직한 교장선생님만 알려줘도 수수료 받는다고 안 합니까? 바보하나 소개시켜줬다고.

 

사는 게 다 불안하기 때문에 남을 등쳐먹고, 이용할 수밖에 없고, 도박판을 벌일 수밖에 없습니다. 도박은 주식하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투기가 아닙니다. 그냥 산속에 있는 사람도 투기에요. 투기에서 빠질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사는 것이 힘든 이상 누구든지 나보다 더 바보고 등신 같은 인간을 만나기를 학수고대해요. 그래서 옛날부터 엘리트들은 놀고 무식한 사람은 일한다고 하잖아요. 엘리트들은 뭘 갖고 있느냐 하면 언어에요. 말을 한다는 것은 거기서 법을 만들고, 법은 이데올로기를 만들어서, 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전부 다 거기에 호출당해서, 호출한 사람은 느긋하게 양반으로 살고, 호출당한 사람은 죽으나 사나 거기에 봉사하고.

 

이 법의 체제, 이게 인간의 사회를 구성하는 겁니다. 인간은 동물이 아니고 추상적인 존재기 때문에. 그래서 법을 공부한 사법고시출신자들이 사회의 엘리트층을 형성하고 있잖아요. “싫으면 너도 공부하던지!” “그때 수학 잘 할 걸.” “수학할 때 수학공부 안 하고 뭐 했노?” “그때 짬뽕이냐? 짜장이냐? 그 이야기했다. 와?” “그때 왜 그 이야기나 하고 있었어?” “개나 고양이 키우지 말고 그때 공부해놓을 걸.” 이 모든 것이 이렇게 된 것은 두려움에 쫓겨서, 죽음에 쫓기기 때문에, 계속 살아야하기 때문에 누구 등신하나 걸리기를 바라면서 사는 겁니다.

 

자, 아람이 포위했어요. 아람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 같은 존재입니다. 악마지만 천사 같은 존재로서 북이스라엘의 실체와 본색을 완전히 드러나게 만드는 겁니다. 드러나게 만드니까 그 다음 내용이 뭐냐 하면, 이걸 참다못한 백성들은 이 한탄을 누구한테 호소하겠습니까? 그 당시 왕에게 호소하겠죠. “왕이 뭐하냔 말이야? 왕이. 왕은 백성들을 위해서, 백성의 목숨과 재산을 위해서 뽑아놓았는데, 지도자 이게 뭐냔 말이야? 아람한테, 북한한테 핵 선제권 뺏기고 도대체 뭐야?”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왕은 백성들의 말을 들어준다고 했죠. 하나님 말은 안 듣죠. 백성들이 뽑아서 왕이 됐으니까. 그러면 왕은 백성한테 자기가 당한 것을 누구한테 화풀이 하겠어요?

 

하나님한테 화풀이하는데, 그 당시 하나님과 관계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엘리사죠.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엘리사 죽여 버린다고 합니다. “엘리사, 너 죽여 버린다.”라고 이래 나와요. 201동하고 202동 아줌마 둘이 싸우는데 가만히 있는 엘리사한테 하는 것이 31절에 나와요. “왕이 가로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날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지로다 하니라” 이미 죽기 살기에요. 너 죽고 나 죽자. 이런 뜻이에요. 아주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그 사실을 엘리사가 알죠. 자, 이야기는 뭐냐 하면 복음이 형성되는 그 현장은 그냥 편할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더러운 본색 다 토해내고, 토해내는 그 순간에 그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복음이 나옵니다. 그것을 네 자로 기쁜 소식,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합니다.

 

열왕기하 7장 9절을 보세요. 그 아름다운 소식을 누가 획득하고 있는지를.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 아름다운 소식, 복음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는 것이 옳지 않다. 이렇게 나온 겁니다. 제가 방금 띄엄띄엄 이야기를 했는데 그 중간이 지금 빠져있죠. 만약에 여러분들이 시나리오 작가라고 하고 이렇게 사태가 포위돼서 급한데, 이게 지금 열왕기하 6장이잖아요. 이걸 드라마 6회로 봅시다. 그리고 7회는 예고편으로 나오는데 예고편이 뭐냐 하면 7장 9절에 나왔어요. 예고편으로.

 

그러니까 6회 끝나고 드라마를 안 볼 수가 없는 거예요. 뭔가 이거는 도저히 해결책이 없는데, 다음 회 예고편을 보니까 좋다고 문둥이들이 서로 기쁜 소식을 이야기하고 있더라 이 말이죠. 그렇다면 그 중간의 시나리오를 어떻게 써야 합니까? 이제는 여러분들이 써보세요. 엘리사 죽인다는 말은 하나님 죽인다 이 말이거든요. “하나님 너도 필요 없어. 우리는 죽음에 쫓기는데 해결책 내놔!” 해결책 내놓으라고 하고 있는 분노한 민중들과 분노한 왕이 그 다음 드라마 7회에 보니까 웃고 있더라 이 말이죠. 이게 도대체 중간에 이야기를 어떻게 끌어가야 이 메커니즘, 과정이 납득이 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여러분들이 시나리오 작가라고 한다면 여러분의 인생가운데 그게 녹아져 나와야 되겠죠.

 

엘리사의 기능은 엘리야의 기능인데, 엘리야의 하나님이니까. 엘리사의 기능을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사랑보다 깊은 상처라고 했죠. 사랑보다 깊은 상처. 사랑인데 그것은 실제로는 어디서부터 출발한다? 상처를 내게 해서 세상 사람들이 예상 못한, 인간이 사랑이라고 여겼던 그 사랑은 사랑도 아니었고, 상처 없는 데서 나온 사랑은 사랑도 아닙니다. 상처가 있는 데서 드디어 기쁜 소식,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대가없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상처는 상처받는 자가 있어야 돼요. 상처 받는 자가 그 상처를 안는, 그게 희생이죠. 그 희생을 근거로 해서 이 사랑이 나와야 됩니다.

 

그 희생자가 있어요. 그 희생자가 어디에 나오느냐, 열왕기하 7장 2절에 보면 나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시나리오 작가라면 엘리사가 욕을 많이 얻어먹었으니까 그 다음 7회 드라마에는 엘리사를 그 희생자로 쓰고 싶죠. 그러나 이 드라마 작가는 보통 작가가 아닙니다. 상식에 어긋납니다. 그 희생자가 누구냐 하면, “그 때에 한 장관 곧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엘리사가 가로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7회 드라마가 시작됐는데도 시청자들은 아직도 헷갈립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이거 열왕기하 재미있습니다.

 

계속해서 점점 더 인간의 힘을 손 놓게 만들어요. 이게 인간의 힘으로 풀리지 않게 만들어요. 그 현장에 우리가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도 엘리사를 욕할 거예요. “이러려고 하나님 믿었나?” 그러나 북이스라엘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세울 때는 죽은 자가 살린다는 이 복음, 이 복음이 복음 되게 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거기에 걸맞은 현장성을 이렇게 하나님께서 일부러 조성해주시는 거예요. 죽음에 쫓기고 참다 참다 못 참아서 화를 내는 그런 모든 움직임들이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열왕기상하는 이게 우연이 아니라고. 이거는 필수적인 것이고 이 상황은 반복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엘리사가 이야기하죠.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이 대목 다음부터는 여러분들이 한번 써보세요. 여러분의 아이디어를 백날 끄집어내보세요. 여기에 부합되는 내용을 끄집어낼 수 있는지. 못씁니다. 여기에 추가되는 변수들을 감안해야 되죠. 추가되는 변수들. 변수들이 자꾸 생기거든요. 독감 예방주사 맞았는데 독감에 걸렸다. 뭘 고려 못한 거예요? 예방주사보다 더 센 게 나왔다는 변수를 고려하지 못한 거예요. 앞으로 또 변수가 등장합니다. 그렇게 변수가 등장하면 우리는 본색이 드러나요. ‘아, 살기 만만치 않다. 무섭다. 두렵다.’ 이렇게 돼요. 제가 지난 오후 설교에서 재레드 다이아몬드 박사의 『총, 균, 쇠』라는 책을 이야기했습니다. 아주 유명한 책인데, 이 책의 내용이 뭐냐 하면 “인간 문명의 모든 파멸과 멸망은 인간의 지혜가 모자라고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기후 때문이다.”라는 내용입니다.

 

이 기후 때문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자연의 힘에 의해서 망할 때는 망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문명이 아무리 맞추려고 해도 영하 50도 내려가면 활동 못합니다. 지금 뉴욕, 뉴저지가 전부 다 얼어붙었어요. 왜? 인간은 기후를 못 이깁니다. 기후를 조정할 능력도 없고. 이게 변수에요. 변수. 이 변수를 어떻게 감안합니까? 우리 자체가 하나의 변수기 때문에 안 돼요. 주식의 동향도 마찬가지로 변수입니다. 인공지능 들이대니까 이쪽도 인공지능으로 해요. 이제 인공지능끼리, 알파고끼리 알아서 주식투자하는 거예요. 어느 알파고가 센지 그거는 알파고도 몰라요. 왜? 아직까지 미래가 안 됐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이 투자한 거나 인공지능으로 주식투자해서 예측한 거나 둘 다 마찬가지에요. 둘 다 로봇 들고 설치니까. 로봇 없는 회사만 망하는 거죠. 인공지능이 행복한 시대가 아니에요.

 

열왕기하 7장으로 다시 돌아오면 여기에 새로운 변수가 등장하는데, 6절에 보면 나옵니다.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자진해서 철수했습니다.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저희로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우리가 사마리아를 포위하고 있는데 포위한 우리를 헷 사람 왕들과 애굽 군대가 포위하고 있기 때문에 도망가야 한다, 빨리 도망가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뭔가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들리게 했겠죠. 성경에서 이런 소리가 나게 되면 우리는 또 여기서 가슴을 칩니다. 진작에 이야기하지 진작에.

 

여러분,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보고 믿는 것은 자기 행함의 연장이지 믿음이 아니에요. 우리의 행함을 끊어놓아야 그게 믿음이다 이 말이죠. 우리의 행함을 끊어놓아야 진짜 우리의 관심사는 내가 사는 데에 있지 주님께 있지 않다는 것이 들통 나는 겁니다. 내가 쓰레기가 될 때 비로소 쓰레기도 구원하시는 주님의 귀한 보혈의 피가 찬양받으실 수밖에 없잖아요.

 

주님의 방법은 그 방법이에요.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근데 해결책이 없습니다. 해결책이 없는 정도가 아닙니다. 궁지에 몰아넣게 되면 소위 핏줄끼리 서로 정 나눈다고 “초코파이 하나 드릴까요? 떡 했는데 드릴까요?”라고 했던 이 모든 것들이, 이제는 떡으로 하던 것을 새끼(자식)가지고 교환하다가 그것도 틀어져서 오늘은 내 새끼, 내일은 네 새끼 하다가 새끼, 새끼 하다가 다투고. 사람이 배고픈데 무슨 체면이 있고 위신이 있습니까? 배고픈데.

 

꿩 잡는 것이 매다(방법이 어떻든 간에 목적을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라는, 뭐 그런 말이 있어요. 교인을 몰아내야 훌륭한 주의 종이다. 이 말이에요. 숫자가 점령하는 것이지, 바른 믿음 이런 것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했죠. 신앙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앙으로 이용할 생각하지 말아요. 신앙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선 볼 때 신앙이야기하지 마세요. 뭐 성령께서 나오게 하시면 할 수 없습니다만. 백번 실패합니다. “뭐 은혜군요.” 이래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보면서 신앙을 보는 것이 아니에요. 돈보고 키보고 성격 보는데, 신앙은 나중에 할 말 없을 때 하는 말입니다. 키 크고 돈 있고 성격 좋으면 누가 안 오겠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변수를 추가해줍니다. 근데 이 변수를 누가 알고 있는가, 엘리사가 알고 있어요. 여기서 한 군대장관이 희생자라는 말은, 모든 사실을 엘리사가 알고 있으면서도 알려주지를 않아요. 왜? 그 사람을 희생타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희생타로 사용하는 것은 그 공동체에서 내다버린 거예요. 그 생명을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이야기해요.

 

아감벤이라는 철학자가 몇 십 년 전에 이야기했는데,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해서 사회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자, 피해자, 탈락자, 그리고 폐업자가 발생될 때만 사회가 돌아간다고 했어요. 도태될 자는 도태되어야 사회가 앞으로 굴러가지, 다 같이 가자고 할 때는 다 같이 망해요. 냉혹한 사회죠. 그렇게 보면 살아남는 것은 뭡니까? 내 대신 죽은 자 때문에 살아남았기 때문에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되죠. 살아남은 것이 자랑질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감벤이라는 사람이.

 

따라서 어떤 사람이 우리들의 경제논리에 어긋나서 튕겨져 나간 사람을 돌볼 때라고 이렇게 나온다면, 그 사람은 윤리적으로 맞는지는 모르지만 전혀 경제에 보탬이 안 됩니다. 경제에 보탬이 안 되지만 탈락된 사람을 돌보자라고 하는 논리는 맞는데, 우리의 본성이 그걸 용납하지 않아요. 우리의 사악한 본성이 용납하지 않아요. 용납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돌본다는 것은 사악 중에 사악입니다. 자기 본성과 어긋난 위선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사악하면 사악한대로 살아야지, 그걸 뭐 평등이 어떻고, 뭐 이렇게 균형을 맞추고 하자는데, 진짜 무슨 개소리하고 있어요? 왜 인간이 살아야 되는데? 없어서 죽게 되면 죽어야 하고, 빨리 죽는 게 낫잖아요? 왜 그걸 같이 얼싸안고 가야 됩니까? 물에 빠졌다. 애를 살릴래? 아내를 살릴래? 정답은 자기만 살면 돼요. 누가 살든 관계없어요. 둘 다 발로 차버려요. 둘 다. 지금 나부터 살아놓고 여자는 또 구하면 되거든요. 이건 뭐, 강의 끝날 때 쯤 진짜 진리가 나오네요. 여자는 또 구하면 되잖아요. 어차피 내 존재중심인데.

 

7장 드라마에서 희생자가 누구냐 하면,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솔직하게 이야기한 이 장관은 밟혀죽어요.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서 밟혀죽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느냐, 밤중에 포위를 했는데 변수가 있어가지고 애굽 군대가 오는 줄 알고 다 떠나고 말았어요. 엘리사는 이걸 알고 있죠. 떠날 때 급하게 떠난다고, 8절에 보니까 그냥 자기의 모든 귀중품들과 체류할 수 있는 물품들을 다 두고 갔어요.

 

그런데 여기에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문둥이 네 명이 왜 갑자기 성 밖으로 나갔는가 하면, 여기서 죽으나 저기서 죽으나 굶어죽기는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이게 복음을 듣는 자세에요. 이게. 재벌 돼서 돈으로 구원 못 받으나, 가난해서 돈이 없어 구원 못 받으나, 어차피 구원 못 받을 걸 예수나 믿자는 이런 식이에요. 예수나 믿자. 부자나 가난한 자나 차별두지 않는 그 예수나 믿자 이 말이죠. 그래서 문둥이 네 명이 거기에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그들이 실컷 먹었죠. 아주 배 채웠어요. 이건 뭐 뷔페식당도 아니고.

 

8절, “그 문둥이들이 진가에 이르자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서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 욕심 다 냈습니다. 이 문둥병자들 몸은 장애자지만 마음은 장애자 아니에요. 똑같아요. 자기 욕심 챙기는 것은 마찬가지에요. 그래놓고 이제 많이 먹었다 이거죠. 가진 자의 여유죠. 양심이 있지 이거 너무 심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는 사람이 있으니까 이 소식을 빨리 전하자해서 성으로 가서 전하고, 나중에 백성들이 와보니까 정말 많았어요.

 

그래서 19절에 보면 “그 때에 이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 일이 있으랴 하매 대답하기를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였더니” 그 위에 17절을 보면 “왕이 그 손에 의지하였던 그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그러니까 여기서 세상 정치에 나오는 교훈이 뭐냐 하면 법도 좋고, 철학도 좋고, 종교도 좋고, 정치도 좋지만 백성들을 일단 먹고 마시게는 해줘야 되지 않느냐, 핵도 좋지만 인민들이 굶어 죽지는 않아야 되지 않겠느냐, 이게 트럼프 쪽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엘리트만 먹고 살지 나머지는 다 죽인다. 백성의 지도자라면 몇 명만 잘 먹고 잘 살게 하지 말고, 골고루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그런 지도자가 되어야 되지 않느냐, 라는 것인데, 여러분 그런 지도자 없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하는 말이 나는 한 푼도 누구한테 받은 적이 없다는 거예요. 아니, 뭐 귀신들렸어요? 한 푼도 받은 적이 없는데 돈이 왜 그렇게 많아요? 하늘에 창을 낸 모양이라. 그러나 그 박근혜는 보기는 보았지만 먹지는 못했어요. 최순실도 같이.

 

결국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이겁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이 살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말은 인간이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욕망이 이미 인간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 욕망은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계속해서 부추겨서, 인간은 그 정신명령을 따라서 정신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한테 걸린 바보 같은 인간에게 빼먹으면서 나만 살면 그게 진리라고, 실용주의적 사고방식,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으로 그렇게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이 세상 자체가. 이거 지옥입니다. 여기서 더 살겠다는 심보 자체가 더러운 심보에요.

 

그러면 엘리야나 엘리사는 뭐냐, 그냥 떠나겠다는 거예요. 사도바울도 마찬가지고. 사도바울은 죽는 날을 학수고대했습니다. 미련 없이 떠나겠다는 겁니다. 미련 없이. 그리고 사도바울은 아주 무리한 요구를 합니다. 재산 있는 사람도 그거 신경 쓰지 말고 떠나고, 심지어 아내 있는 사람도 아내 신경 쓰지 말고, 자식 신경 쓰지 말고 너만 그냥 빠져나오라는 거예요. 이거 뭐 이단도 아니고 뭐 신천지인가. 세상은 곧 끝나기 때문에. 세상은 끝나기 때문에 빠져나오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돈 모아서 지하벙커사지 말고. 그거 소용없어요. 그렇게 해서 이 기쁜 소식에 대한 희생자, 다시 말해서 한 장관은 그런 헛소리를 하다가 밟혀 죽죠.

 

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시다. 이런 게 참 정리하기 어려운데요. 북 이스라엘이 있다. 지금 북이스라엘은 어디에 살고 있느냐, 약속의 땅에 살고 있어요. 하나님의 성전을 무시하면서 여전히 자기 땅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굴 보냈는가 하면 아람나라를 보냈어요. 아람나라를 보냈는데, 그런데 여기 북이스라엘에 누가 있느냐 하면 엘리사가 있죠.

 

엘리사는 어떤 나라의 선지자냐 하면 아람나라 선지자가 아니고 북이스라엘의 선지자인거예요. 그래서 북이스라엘을 지켜주는 선지자라고 오해한 겁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북이스라엘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고 이 땅 주인 되신 언약의 하나님을 지키죠. 언약의 하나님. 너희를 위해서 선지자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너희를 깨우치라고 있게 한 선지자에요.

 

그렇다면 만약에 아람 나라가 쳐들어왔는데 일이 이렇게 돼서 북이스라엘의 숨통이 트이고 잘 먹고 잘 살았다면 그 혜택은 어디서 와야 됩니까? 희생자가 있어야 되죠. 그럼 희생자가 누구냐 하면 “여호와께서 창을 여신들 어찌 이 일이 있으랴”라고 했던 그 불신앙자죠. 그 불신앙자가 북이스라엘의 희생자로 나왔다는 그 자체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이거는 밥 먹어도 이 나라는 이미 끝장났다는 거예요. 엘리사는 이 나라를 포기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는데 이 핫도그 원칙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핫도그를 다시 한 번 그려보겠습니다. 핫도그를 유다,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속의 땅에 있으니까. 이 나라가 개판으로 돌아가도 여기에 꾸준히 기어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살려주신다, 살려주신다, 라고 하면서 충성되게 이 나라를 일으켜보려고 했던 선지자가, 핫도그 안에 소시지 엘리야, 엘리사라고 했죠. 꾸준하게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 엘리사 이 사람들이 죽고 난 뒤에 특징이 뭐냐 하면 엘리사의 후계자가 없다는 겁니다. 엘리사의 후계자가 없어요. 많은 선지자가 있죠. 나중에는 많은 거짓선지자가 됩니다.

 

후계자가 없다는 말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자체 붕괴가 일어난다는 거예요. 특히 엘리야, 엘리사는 사실은 남쪽 유다나라가 아니고 북쪽 이스라엘의 이야기지만. 북쪽 이스라엘의 핫도그가 이렇게 있다면, 북쪽 이스라엘을 엘리야, 엘리사가 일으켜보려고 그렇게 해도 결국은 소시지인 엘리야, 엘리사가 빠져버리니까, 내부적으로 살려보려고 했던 선지자들이 빠져버리니까, 이게 내부적으로 붕괴가 되는데, 붕괴를 도와줄 하나님의 언약은 이제 바깥에서 공격을 하는 거예요. 바깥에서. 그래서 마지막 때에 호세아, 아모스 선지자가 북쪽 이스라엘을 압박해서, 이 나라 아주 잘 망해버리라는 이야기를 쏟아냅니다.

 

제가 왜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성경에 아모스, 호세아가 나왔을 때 그들이 뭐 정의를 이야기하고, 뭐 사회적으로 약자를 학대한 이야기를 했다는 그런 차원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구체적인, 일으켜야 될 실체 자체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겁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 자체가 없어져야 마땅하는 거예요. 나라 자체가 있다는 것이 성도한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호세아, 아모스에요. 눈에 보이는 이 땅에서 괜찮은 나라, 괜찮은 교회를 찾을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언제 하느냐 하면, 아직 엘리야, 엘리사까지는 있었는데, 소시지(엘리야, 엘리사)가 빠지고 난 뒤에는 핫도그가 뭉개져버려야 돼요.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이 빠진 자리에서 일으켜보려고 하지만, 선지자는 이제는 안 들어가요. 유다도 이스라엘도 다 망해버리니까, 이걸 누가 대신하느냐, 내일 마지막 시간에 할 건데, 엘리야와 엘리사가 빠진 그 자리에 히스기야와 요시야가 여기에 들어간다고 제가 전 시간에 강의할 때 이야기했죠. 들어가는데, 이 사람들은 선지자가 아니에요. 왕입니다. 왕이 건전할 때만 국가는 연속된다는 원칙을 고수하면서 고집스럽게 이 국가와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계속해서 노력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역부족이에요. 붕괴됩니다. 유다 붕괴되고 이스라엘 붕괴되고. 모든 것은 깔끔하게 끝납니다.

 

나머지기는 태산, 하나의 돌이 날아와서 이 세상을 넘어뜨리는 그 순간에만 등장하는 나라, 그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하늘나라에 있는 사람들은 이 나라 대한민국이 왜 망해야 마땅한 나라인지를 증거 하는 그것이 성도로서 마땅히 해야 될 일입니다. 그거는 어떻게 해야 돼요? 정말 하기 쉬워요. 왜냐하면 남이 못 되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은 자기가 안 되면 같이 망하기를 원합니다. 아주 수월한 거예요. “에이, 나도 안 되는데 같이 망하자!” 그 마음을 고수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