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겨울5강-나아만 장군 18010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 16. 16:12
2018-01-13 11:09:50조회 : 40         
2018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5강–열왕기하 강해 : 나아만 장군이름 : 오용익 (IP:121.149.39.243)
2018 겨울수련회 제 5강(나아만 장군 : 이 근호목사)

열왕기하를 보면서 보통사람들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생각하거든요. 이스라엘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이방민족입장에서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이방민족은 일방적으로 이스라엘한테, 또는 유다한테 당하기만 하고 ‘하나님께서 도와줬더니만 이방민족은 멸망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범죄 했더니만 이방민족이 쳐들어왔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 관점은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유대와 이스라엘관점에 치중하게 돼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이방인이에요. 언약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선에 서야 되느냐 하면, 아람, 모압, 블레셋, 그리고 앗수르, 바벨론, 그들이 존재했던 사고방식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도 겸하여 갖고 있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출발점부터 잘못되어 있다는 그 말이지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방민족, 특히 북쪽에서는 아람, 시리아 쪽이 많이 나오는데 그 이방민족 입장에서 볼 때 이 성경, 이스라엘중심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이의를 걸게 되면 어떤 식으로 이의를 걸겠는가,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이방민족에게는 뭐가 없는가 하면, 성전이 없어요. 성전이 없다. 

성전이 없다. 이 ‘없다’를 다른 말로 하면, 무, 또 다른 말로 하면 ‘빈자리’ 또는 ‘공백’ 이렇게 돼요. 그러면, 성전이 없는 것이 이방민족이라면, 일반사물, ‘물건이 없다’ 하고 어떤 차이가 있느냐를 생각해 봐야 됩니다. 물건이 없다면, 지우개가 여기 없다면 그냥 지우개가 없지요. 나타나면 나타나는 거지요.

지우개가 여기 나타난다고 해서 뉴욕에서 태풍이 분다든지 ‘나비효과’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겠지요. 설마 이거 한다고 상하이가 물에 잠기고 그러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사물이 없는 것하고 성전이 없는 것하고는 달라요. 성전이 없다면 그냥 건물 하나가 없는 게 아니에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시공간자체가 의미를 상실하는 겁니다.

성전자체가 세상의 모든 숨겨진 그 배후의 원천이거든요. 이 물건 하나, 지우개나 매직 하나 없는 것하고 달라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가 얼마나 귀한 것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본인들이 모르는 거예요. 성전이 있음에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성전, 원천을 통해서 세상을 향하여……, 성전이 없다 하지 말고 성전이 있다 칩시다.

성전이 있다면 이것은 뭘 유도하느냐 하면, 이 세상에는 성전이 있는 곳에만 성전이 있고 다른 곳에는 ‘성전이 없음’이 돼요. 이방민족의 특징은 “그들도 인간 나름대로 살 수 있는 권리, 권한이 있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고 “너희에게는 성전이 없다.”라는 투로 이야기하게 돼요.

성전이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공백이라고 보고요. 성전이 있음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겁니다. 빈자리에 사건이 일어나면 사건에서 뭐가 생기는가? 사건에서 현재라는 것이 발생이 돼요. 공백에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현재가 발생됩니다. 그런데 이방은 어떻게 되는가? 

줄곧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데 여기에 어떤 물건하나 첨가하면, 지금 현재에서 어떤 물건이 생겼고 무슨 사건이 터지면 현재에서 어떤 사건이 터졌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아람, 또는 이방민족이에요. 이방민족의 특징, 모압, 블레셋의 특징은 성전이 없기에 그들은 성전을 대체해서 자신의 신체, 몸이 있고 신체에서 시간의식이 나오면서 여기서 그들은 사건을 시간의식을 가지고 덮어버립니다.

시간의식을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이 역사가 되는 거예요. 이 역사는 뭐 중심이냐 하면, 자신의 신체중심의 역사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성전이 있어버리면 성전에서는 날마다 원천적인 사건이 터지고, 사건에서 현재가 발생되며, 그 현재 속에서 새로운 신체가 만들어져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요.

그래서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아만 사건이 나옵니다. 그걸 보면서 이 공식이 과연 맞는지를 조사해 봐야 돼요. 다시 한 번 이야기합니다만, 성전은 원천적이기 때문에 거기서 사건이 터지면, 없는 공백에 사건이 터지면 성전의 취지가 살아나고 그 성전의 취지에서 현재가 되기 때문에 이방사람들이 생각하는 현재하고 지금 새로운 현재, 이 두 개의 시간 층이 생겨버립니다.

두 개의 시간 층이 생겨버리면 이 현재에 맞는 새로운 신체가 발생되고 이 신체, 몸에 누가 계시는가? 하나님의 언약의 상대자로서 언약관계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방민족은 성전이 없기 때문에 애초부터 숨겨진 하나님의 언약관계는 없어요. 없고 성전자리에 차지하고 있는 것은 뭐냐? ‘여기 내 몸이 있다. 내가 살기 위한 신체가 있다. 아담에서 내려온 인간의 몸이 있다. 내 몸이 편하고 내 몸이 행복하면 그것이 진리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어떤 사건이 터지게 되면 그 사건은 내 현재 몸을 유지하는데 유리할 것인가, 불리할 것인가, 그것만 계산하는 거예요. 그것을 실용주의라 하지요. 실용주의 이전에 나온 철학이 공리주의라 하는 겁니다. 행복이 곧 진리라는 것. 진리를 따로 찾지 말라. 네 몸이 편하면 그것이 곧 진리다. 공리주의, 그리고 실용주의.

우리는 어디에 친숙한가? 이런 성전위주의 새로운 신체의 등장은 우리는 금시초문이에요. 잘 못 들어봤어요. 우리는 이방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이고, 언약이고 몰라요. 단지 우리는 내 몸, 그리고 내 몸 + 다른 사람의 몸, 합해서 공동체, 형제, 가족, 이 가족이 그냥 잘되고 그냥 편하게 살면 그것이 바로 사는 보람이고 의미고 행복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정월대보름이나 연초가 되면 산위에 올라가서, 또는 울산 ‘간절곶’이나 포항 ‘호미곶’에 가서 빌지요. 빌 때 “우리 가족 한 해동안 무탈하고 건강하고 하는 일 잘되기를 바랍니다.” 이게 바로 우리에게 친숙해진 것이고 우리는 그런 양육 속에서 살아왔어요. 그게 바로 성경에서 말한 이방민족이에요. 이 이방민족의 신체를 가지고 있으면서 성경을 이스라엘 중심으로 보겠다고요? 억지지요. 말할 수 없는 억지입니다.

그러면 이방민족의 공리주의, 실용주의에 있어서는 가족중심, 기존의 신체중심이기 때문에 서로서로의 사이에 엮이는 것은 뭐냐? 정과 사랑이지요. 따라서 이방민족에서는 가족끼리 서로 도와주고, 협력하고, 어려운 사람에게 보태주고,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윤리와 도덕이지만 성전이 있는, 언약이 있는 이스라엘입장에서는 절대로 남을 도와줘서는 안돼요.

지금 무슨 소리 하고 있느냐 하면, 상대방의 사정을 모르잖아요. 상대방의 사정을 모른다고요. 도와달라고 해서 도와주면 안돼요. 냉혹하고 차갑게 대해야 되는 겁니다. 저 사람이 이방 민족적 사고방식가지고 나한테 도와달라고 하는지, 아니면 성전을 품고 도와달라고 하는지 우리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언약관계가 낯설고 특이한 관계기 때문에 일단 저쪽을 이방민족으로 또는 이방종교를 갖고 있는 보통사람으로 보자 이 말이지요. 

보통 사람으로 봐 버리면 성전을 가지고 있는 쪽과 없는 쪽은 반드시 치열한 전쟁관계에 돌입되어야 돼요. 싸워야 된다 이 말이지요. 도와달라고 도와주고, 힘들다고 알아서 보태주고, 절대로 이런 짓 하면 안돼요. 우리가 갖고 있는 것도 우리 것이 아닐뿐더러 그 사람의 사정을 알려면 보다 많은 정보가 필요하고 무엇 때문에 도와주는지 알아야 되잖아요.

이게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 관점이에요. 생소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워낙 믿음이 없기 때문에 자꾸 도와주려고 하는 거예요. 정나미 떨어지게 해야 되는데 믿음이 워낙 없으니까 자꾸 정을 내는 거예요. 

“애 넷이나 되니까 큰 애 등록금이라도 좀. 애 넷씩 낳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도 좋다고 낳아놨는데 큰애 대학 가는데 등록금정도는 내가 보태줘야 되지 않겠는가.” 워낙 믿음이 없으니까. 워낙 사랑이 없고 이방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니까. 뭘 알고 도와줘야 되는데 그냥 도와줘요. 

‘동생네가 새로 결혼했는데 얼마나 신혼에 돈 쓰일 곳이 많겠는가.’ 밤중에 달빛도 컴컴한 구름에 가렸을 때 볏짐을 이고 동생 몰래 동생네 볏단에 턱 올려놓게 되면 동생은 또 ‘형님은 흥부처럼 자식들이 많은데 자식들 키운다고 힘들 테니까 볏짐 들고 형님네 볏단에 몰래 가져다 놓는다고요. 그러다가 그 먹구름 사이에서 달이 뜨니까 둘이 만났어요.

“아이고, 동생 아니냐!” “형님 아니십니까!” 그래서 생긴 것이 농심, 농심라면. 그게 인지상정, 그게 사람 사는 보람이라는 거예요. 이래서 이들이 지옥 가는 거예요. 이래서 이들이 지옥 간다고요. 교회 3, 40년 다니면 뭐합니까? 이방민족인데. 성전의 의미를 모르는데. 둘이 똑같은 신체라. 태어난 신체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신체로 천국을 못가는 겁니다.

성전의 의미를 품고 가야 되는데. 성전의 의미는 새로운 신체를 유발해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주위에 이방민족을 배치하는 이유는, 차이점을 보라는 겁니다. 성전 없는 쪽이 살아가는 모습과 성전 있는 쪽이 살아가는 모습을 한 번 보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열왕기상 이전을 보게 되면, 뭐라고 하느냐? 

그들을 절대로 동정하지 말라고. 심지어 이렇게 이야기해요. “긍휼히 여기지 말고.” 아주 작살을 내라는 겁니다. 심지어 젖먹이 어린아이까지라도 살려두지 말고 다 죽여 버리라는 그 말이지요. 왜? 원래 죽어 마땅하니까. 

그들의 시작은 자기 몸으로부터 시작하거든요. 몸 이전에 나오는 원래의 원초적인 성전의 개념으로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 그 몸은 성전개념을 공격하게 되어 있어요. 따라서 성전개념을 중심으로 새롭게 등장한 이 신체들은, 이스라엘은 이쪽 몸을 제거해 버리고 성전중심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 이게 구약의 이념입니다. 언약의 이념이에요.

인정사정에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넘겨서는 안 됩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 이렇게 하거든요. 강의 끝날 때 되면 이게 반전이 일어나요. 어떻게 반전이 일어나는가? 반전을 미리 말씀드릴게요. 약 안올릴게요. 

하나님에 의해 성전에 맞는 신체는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 빼놓고 전부 다 아람민족입니다. 따라서 아람민족답게 우리는 처신할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만이 갖고 있는 성전고유의 신체를 우리가 어줍지 않게 흉내 내면 안돼요. 예를 들어서 치매 걸린 부모를 형제간에 서로 돌아가면서 모셔야 되는데 전부다 자기 집 누추하다고 핑계를 대서 자기 혼자 모시게 되었다.

모시면 “아이고, 형님, 감사합니다. 형님이 참 착하네요. 원래부터 착했잖아요.” 이렇게 돈내기 싫어서 되도 않는 엉뚱한 소리나 하는데 그래서 모셨단 말이지요. 한 15년 동안 돈 들여가면서 모셨어요. 처음에 모실 때는 10만원씩 다 내라고 해도 얼마 안가서 다 안냅니다. 그래서 혼자 담당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 치매 걸린 엄마가 재산을 10억쯤 남겼다. 형제는 다섯 명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형제들은 말합니다. “N분의 1로 하자.” “내가 그동안 비용 들여서 다 했다. 그러니 나는 N분의 2를 가져야 된다.” 그 순간 “안 됩니다 형님. N분의 1로 나눕시다.” 

이런 소리를 왜 미리 예상을 못했느냐는 말이지요. 처음부터 나도 모르겠다, 하고 치우지 왜 모신다고 해놓고는 동생들을 미워해요? 그게 잘못인 거예요. 모셔놓고는 동생들을 미워하는 본인이 잘못이에요. 본인이 마치 아람민족이면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실현한다고 말도 안되는 흉내를 낸 겁니다. 이게 뭐냐? 예수님만이 참된 성도라는 사실을 몰라서 그래요.

‘주님 비슷하게 사랑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겠지.’ 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하면, 끝까지 매몰차게, 차갑게, 절대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지 말고 이렇게 살아야 돼요. 갈 때까지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그렇게 살아서 참으로 성전을 품고 있는 사람과 맞닥뜨릴 때 강한 저항감이 느껴져야 돼요.

강한 저항감을 느낄 때 우리는 그동안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 그 자기 모습에 대해서 ‘나 같은 것이 사니 뭐하나. 나같이 나쁜 놈은 죽어야 돼.’ 할 때 그 순간이 비로소 은혜를 아는 3초의 순간입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세상을 떠날 생각이 아니고 주님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떠나라 이놈아! 너 같은 것 살 필요 없어.” 할 때 그 짧은 순간 정말 세상이 싫어지고, 그리고 누가 싫어지느냐. 내가 싫어져요. 

그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날아갑니다. 사람이 왜 땅에서 자꾸 살려고 하느냐? 우리가 제일 사탄에 시험 드는 이유가, 이방민족으로 철저해야 되는데 예수 오래 믿었다고 ‘이제 이방민족 아니겠지.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겠지.’하고 넘어서는 순간 더 이상 십자가는 우리한테 무의미합니다. 의미 없어요.

이제는 자기도 예수처럼 살 수 있는데 십자가를 미쳤다고 믿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철저하게 정말 이제는 남이 나쁜 놈이라 하기 전에, 남이 나쁘다고 욕할 때 그게 욕으로 들리면 아직까지 멀었어요, 우리는. 그런데 남이 욕할 때 남이 욕하는 것보다 내가 더 배나 더 욕하고 싶은 순간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 주님만을 증거 하게 되어 있어요.

신앙생활 하면서 조금 복음 안다 해놓고 돌아서면 또 오해하고 돌아서면 또 오해합니다. 예수님과 한패 먹으려고. 언제 주님과 한패 먹어요. 절대로 그런 짓 하면 안돼요. 끝까지 우리는 못돼 처먹은 인간 돼야 됩니다. 갈수록 더욱 더 그래야 돼요. 

그것을 누가 막아서는가 하면, 바로 이 차갑고 싸늘한 냉기마저 발휘되는 이기주의자 앞에서 그리스도의 성전을 기능적으로 보여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예수 믿을 자격도 못 된다는 것을 알 때 그 순간이 예수 믿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순간이에요. “나 훌륭하니 예수 믿어줍니다. 남은 안 믿어주는데 나는 믿어줍니다.”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는 그것은 점점 더 멀어져가요. 복음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갑니다.

그래서 구약에 이방나라가 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아만 장군 이야기인데요. 아람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문둥병자였다. 11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엘리사가 나오지도 않아요. 아예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오해한 것이 뭐냐 하면, 자기가 문둥병에 걸렸다는 거예요.

문둥병 걸렸으면, 자기신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으면 그 문제가 어디에 있느냐? 그 문제는 나아만 장군이 속한 아람나라 전체의 문제점을 대신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포로 잡혀온 소녀 하나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나라에 가면 고칠 수 있는데요.” 이렇게 이야기해요.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이스라엘에 찾아와요. 이게 벌써 이방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문둥병 걸려서 저주받고 죽어 마땅해요. 고치겠다는 사고방식은 뭔 뜻이냐 하면, 현재 문둥병 걸린 시커먼 나, 그리고 뭘 생각하느냐 하면, 문둥병에서 깨끗하게 된 나, 이걸 생각한다고요. 이걸 가지고 ‘이상 자아’(ideal ego)라 해요.

정신분석학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상자아라 하는 것은, 인간이 상상한 그 대상, 자기가 만약 s1이라면, 보통 주체를 두고 subjct1이라고 해요, s1이라면 이것을 s2로 봐서 계속해서 인간은 s1에서 s2를 상상하게 되어 있어요. 계속 상상하는 거예요. 그 상상하는 것을 이상자아라고 해요. 

상상 없는 1초1초를 보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상상해요. 상상할 때 뭘 놓치느냐 하면, 나는 나 자신이 원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해 버리고 나는 영구히 있어야 될 존재인 것처럼 여기면서 상상합니다. 자기의 두 번째 모델을 생각하지요.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상자아지만 남들이 강요하는 것을 가지고 ‘자아이상’(ego ideal)이라 해요. 

자아이상, 이것은 뭐냐 하면, 자기가 속해 있는 주변의 힘 있는 쪽에서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해.”라고 요구할 때 상상하는 자아와 그리고 남, 부모, 자기에게 혜택을 많이 준 가까운 분이 요구하는 그 사이에서 정치적인 협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네 성적 가지고 어딜 가야 돼.”라고 자아이상을 부모가 요구할 때 “나는 의대는 싫고 연극을 하고 싶어요.”

그 사이에 적절한 자아조정이 일어나는 거예요. 인간은 이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너 죽으라고 하는 쪽은 없어요.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 걸리니까 자기는 깨끗해지는 그 몸을 상상한 겁니다. 상상하고, 나는 이렇게 깨끗한 몸을 가질만한 권리, 자격이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이게 우기는 거예요. 

뭐가 없는 상태에서? 아까 배웠지요. 성전이 없는 상태에서 우기는 거예요. 성전은 새로운 신체를 양산합니다. 그런데 아람의 나아만 장군은 현재 있는 이 신체를 그냥 계속 지속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걸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목적도 이거지요. 계속 이 신체 키우려고, 이상 자아, 상상하는 자아를, 그리고 자아이상을 하나님의 이름을 힘입어서 실현하려고 합니다.

그 때 내가 주체답게 된다는 거예요. 내 맘에 맞는 주체가 된다는 겁니다. 주체, 또는 자아라고 합시다. 문제는 이 자아와 실제로 세상 돌아가는 실체하고 일치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게 고민이지요. 이게 고민이에요. 20대의 고민은 취직 안 됩니다, 결혼 안 됩니다. 30대, 40대, 모든 고민은 뭐냐 하면, 이 자아와 세상 돌아가는 외부의 모든 실체와 일치되지 안 되어서 고민이에요.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본인이 문제인데 본인이. 본인이! 이 본인이 문제에요, 본인이. 세상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는데 본인은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기도 빡세게 해서, 헌금을 해서, 십일조를 해서, 교회 열심히 충성봉사해서, 순종해서, 이렇게 자아가 억지를 부려요, 억지를.

남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인간일 때 나는 자식으로서 효도한다고. 그거 이방 민족적 사고방식에요. 무슨 효도가 있어요, 인간에게. 효도한다는 것은 부모를 사랑한다는 거잖아요. 그게 말이 됩니까? 사람은 절대로 자기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쪽으로 이게 귀환하게 되어 있어요. 모든 사랑은. 

귀환 안하면 사랑이 아니고 사랑 준 사람을 저주하게 되어 있어요. ‘네가 내 사랑을 우습게 여겨?’ 이래가지고 욕으로 나옵니다. “이러려면 헤어져”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인간은 자기를 몰라요. 왜? 원천을 모르니까. 열왕기하 5장을 보게 되면 10절에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라고 했어요.

나아만 장군이 이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신체라 하는 것은 신체만 달랑 있는 것이 아니고 상상적자아의 관계성이기 때문에 어떤 것은 듣고 어떤 것은 안 듣겠다는 본인만의 고집 같은 것이 형성되어 있어요. 막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들을 것을 들어주고 안 들어줄 것은 안 들어주겠다는 본인신체의 실용적인 기능을 발휘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는 말이 11절에 보면, “나아만이”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지가 의사노릇 다 해라. 내 생각에는 엘리사가 나에게 나아와서……, 그 당시 아람나라가 여호람의 나라를 지배하고 있으니까,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어디서 들은 풍월은 또 있는 모양이라.

안수한다 그 말이지요.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이걸 자기가 미리 상상한 거예요. 그러면 나는 아마 깨끗한 몸이 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게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성전이 없는 몸에서 나오는 일방적주장이지요. 그런데 엘리사는 뭐냐? 성전에서 나오는 하나님께서 엘리사에서 그런 지시를 한 거예요.

그래서 삐져서 12절에 보면,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몸을 씻으라 하니까 물질적인 깨끗함이 자기의 신체를 깨끗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엘리사는 지금 나아만이 달라지고 난 뒤의 그 신체가 기존의 신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중간에 성전의 존재를 개입시켜서 알리고자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에는 성전이 있고 저쪽에는 없다. 그러면 성전 없는 쪽에서 나온 사고방식은 뭐냐 하면, 성전 없는 평소의 방식으로 병 고침과 선지자를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 문둥병이 낫는다는 것은 저주가 풀리는 거거든요. 저주가 풀리는 것은 저주가 주어지게 된 그 원인을 처음부터 삭제시킨 효과가 저주가 풀리는 겁니다.

저주는 어디서 오느냐 하면, 바로 죄에서 오는 거예요. 죄에서 의로 바뀌지 않으면 저주가 풀리지 않아요. 죄가 뭐냐? 죄는 성전에서 나오는 원초적인 관계가 끊어진 것이 죄거든요. 따라서 성전의 효과를 집어넣어서 문둥병 저주가 풀리는 방식이 엘리사 방식이라면 나아만 방식은 뭐냐? 

내 몸은 귀하다. 귀한 몸이니까 유지되어야 한다. 문제가 있다. 문둥병이다. 문둥병은 그냥 더럽다는 거예요. 죄악 된 몸으로 보지 않고 더러운 몸으로 보는 겁니다. 그 더러움을 해결하는 방법은 뭐다? 깨끗하게 하는 조치를 하면 된다. 깨끗한지 아닌지 누가 아느냐? ‘보자. 물이 더러운가, 깨끗한가?’ 이걸로 판단된다는 거예요. 판단 가능하다는 겁니다.

지금 엘리사가 아람장군을 실컷 욕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어느 자리에 서야 되느냐 하면, 엘리사 자리에 서면 안돼요. 아람장군의 선에 서서 그 말을 이해를 해주려고 생각을 해보세요. 평소 우리의 삶도 이렇지 않습니까? 우리 평소의 삶이 이렇거든요. 

내가 납득이 될 때만 골라서 믿겠다는 거예요. 예수의 피 이야기 그만하고 성의 있게 행하면 보상이 따른다. 행함에 따른 보상이 따른다, 가 훨씬 더 우리한테 친근하게 다가오지 않습니까? 하루를 지나고 반성해 보세요. 반성하면서 오늘 과속이 두건 걸렸고, 주차 잘못해서 7만원 날라 가고……, 우리 장로님이 주일에 그런 이야기를 하셔서 기다려요. 

지난 주간에는 어디 가서 뭘 끊기었는지를. 이번 주는 병원에 갔다가 주차위반 딱지 끊었다고 했거든요. 참 하나님 감사하지요. 그동안 안 끊긴 것이 감사한 거지요. 안 끊긴 것이 이상하지요. 끊긴 것이 정상이고. 왜냐하면 우리는 아람이거든요. 

이 몸은 성전 앞에서 파괴되어야 되고 저주받아야 되고 늘 그래야 되는 몸인데 마치 자기는 조심스럽게 살기에 정당하게 마땅히 어떤 보상받을 권리를 유지한 채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잖아요.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아람장군의 주장에 그걸 그대로 실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종들이 말리지요. 뭐라고 하느냐? “그거 별로 어렵지 않지 않습니까? 왜 그것 가지고 삐집니까?” 하고 종들이 말려요. 종들도 믿음이 있어서 말린 것이 아니죠. 민수기에 보면 뱀에 물렸어요. 뱀에 물렸을 때, 우리 같으면 뱀의 물렸을 때의 아마추어치료법이 있잖아요. 도루코 면도날로 십자가로 잘라서 뱀독을 빨아서 뱉어낸다. 영화에 자주 나오잖아요. 

그 다음에 된장을 처바르든지 해야 되는데 모세가 제시한 것은 뭐냐? 그들을 물었던 놋 뱀을 세워놓고 그걸 쳐다보라는 거예요. 그것도 놋 뱀을 낮게 두면 옆으로 보면 되는데 고개를 들어서 쳐다보라는 겁니다. 별로 어렵지 않아요. 모가지만 들면 되잖아요. 그것보다 더 쉬운 것이 뭔지 알아요? 예수의 피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어렵지요. 왜? 기존의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기의 인생관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인생관은 실용적으로 내 몸을 기죽지 않게 지키려는 고집 같은 것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내 가치, 내 의미,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데. 이 말은, 내가 나를 지키는데 있어서 남들에게 내 판단기준을 뚜렷하게 세우고 있다. 남들에게 이리 저리 휘둘리지 않는다. 내가 믿을만하면 믿고 내가 믿을만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

그러한 자부심 같은 것, 주관 같은 것이 뚜렷하게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모든 인간의 주관에 공통적으로 맞지 않는 방법인데 그게 뭐냐? 예수의 피에요. 모든 인간이 자기의 결심으로 안 믿어지게 하는 조건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믿는 것은 백 프로 거짓말입니다.

십자가 믿을 때는 어떻게 믿어야 되느냐 하면,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희망을 끊었을 때. 그것 때문에 십자가는 하나가 아니고 셋으로 한 세트가 되어 있지요. 양쪽에 달려있던 강도 중 한 강도가 십자가를 믿었어요. 그리고 그 밑에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없어요. 예수님의 엄마나 여자들도 울기만 했지 믿지는 않았어요. 

아이고, 내 자식아, 이런 정으로 생각하지 믿지는 않았어요. 믿은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살 가치가 없다는 것, ‘그동안 내가 나를 붙들고 인생이 정말 부끄럽구나. 붙들만한 것도 아닌데 이 쓰레기를 붙들어왔구나.’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놔버리고 주님만 쳐다볼 때 그 때 찌릿찌릿 통하는 것이 십자가의 효과입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이렇게 우리를 질책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성령은, 바로 이 십자가는 성전에서,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는 성전의 언약궤에서 출발합니다. 출발해서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아람적인 신체를 갖고 있음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그 신체로서는 천국에 못가고, 예수님의 신체로 바꿔지도록 하나님 쪽에서 실시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전이 있고, 없고가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이제 몸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합니다. 몸이 깨끗하면 구원받은 거냐 그 말입니다. 몸이 깨끗하게 되면, 더러운 문둥병에서 깨끗했으면 좋겠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막상 깨끗해지게 되면 이 몸은 내가 상상했던 그 몸이 아니에요.

내가 상상한 이 몸은 내가 그것을 기대했다는 그 공로가 삽입된 깨끗한 몸인 반면에
여기 주님께서 주신 이 몸은, “내가 내 몸을 깨끗하게 하겠다는 이것이 주님의 은혜를 정면으로 박아버리는, 정면으로 그것을 훼손하는, 모독하는 그러한 공로, 행함을 저는 저질렀습니다.”하고 자백하게 만드는 그런 깨끗함이에요.


막상 깨끗하게 되고 난 뒤에는 “부끄럽습니다.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것 기도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처음에는 구원해주세요, 하다가 막상 구원해주게 되면, ‘제가, 구원해주세요, 하는 그 흉악무도한 죄를 범한 것을 용서해주옵소서.
구원은 예수님이 예정해서 구원되었는데 요구하면 구원 들어줄 것처럼 우리는 자기입장만 생각했던 그 일이 지극히 부끄럽구나.
참으로 추잡스럽고 욕심쟁이구나.’ 하는 것을 회고적으로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회고록 알지요. 뒤늦게, 다스는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 있잖아요. 돌아서서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부끄럽게 여기면 모든 것에 대해서 어디로 이어지느냐.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로 이어지는 겁니다. 감사로 이어지면서 뭘 하든 항상 어디로 가느냐 하면, 죄인의 자리에 되돌아가 있어요. 

어떤 일이 터지면 죄인의 자리에 첫 사랑, 처음사랑, 그 자리에 되돌아가 있어버리면
여기서 자기의 어떤 권리주장, 이런 것은 다 욕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동생들이 와서 “치매 걸린 어머니는 형님이 모시세요.” “이것들이!”
이렇게 하다가 갑자기 죄인으로 돌아가면 “그래. 네가 하는 말을 주님의 말로 받겠다.” 하고 되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죄인 주제에, 구원받은 죄인 주제에 뭔들 못하겠느냐, 이렇게 되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눈들을 보니 전혀 안돌아가는 것 같은데요. 이것이 성령의 열매라는 거예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그 표현형이 뭐냐 하면, 바로 성령의 열매라는 겁니다. 

이미 자기는 십자가에서 죽은 몸이기 때문에 감사할 뿐입니다,
이것이 대인관계에서도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 이런 것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만약에 자기가 살아 있다면 아무리 겸손해도 그것이 육의 열매에요.
아무리 겸손하고 자기를 낮춰도 이미 뭔가 기대하고 있고 고대하고 있다는 자체가 이게 건방떠는 짓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아만장군은 깨끗함을 입었어요. 입고 난 뒤에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15절입니다.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엘리사는 안 받는다 하니까 17절에 보면 “나아만이 가로되 그러면 청컨대 노새 두 바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 흙을 왜 달라고 하느냐 하면, 흙을 이만큼 푹 떠서 이 흙은, 나는 성전 없는 아람 땅으로 돌아가지만 아람 땅의 흙에다 이스라엘성전에서 나온 땅의 흙을 섞어버리면 “나는 비록 아람 땅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 받은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그 약속의 땅에 살고 있습니다.” 하는 그것을 스스로 주님 앞에 고백하는 거예요.

이것은 위에서 보면 같이 섞여 있지만 옆에서 보면 아람 땅 따로 있고 가지고 간 이스라엘 땅의 흙이 층으로 따로 떨어져 있는 거예요. 땅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약속의 혜택을 입은 자만이 참여할 수 있는 천국 같은 곳, “그 약속의 땅의 흙을 따로 떠서 가져가겠다는 것을 허락해주옵소서.”

18절에 보면,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아람의 장군이니까 그 나라 왕이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왕을 부축해서 들어갈 때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래서 우리는 절에 가서 비빔밥 먹어도 주께 감사하면 돼요. 향불 냄새 풍기는 그 비빔밥 있잖아요. 어떤 사람은 그거 역겨워서 못 먹겠다는 사람도 있거든요. 출신 자체가 기독교집안이면 그거 못 먹어요. 그런데 배고프면 맛있게 주께 감사하고 먹으면 된다 이 말이지요. 그게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이야기입니다. 

뭘 먹고 안 먹고, 못 먹고, 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네가 지금 누구의 신체, 어디서부터 나온 신체를 가지고 표현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북한에 있다가 남한에 와서 신앙생활 할 필요 없어요. 북한은 아람 땅, 거기서 주와 함께 있으면 되잖아요. 아바이 김정은 섬기면서. “사유하기를 원합니다.” 이미 구원받았는데 사유 안할 수가 있겠어요?

다시 한 번 하게 되면, 공백이란 비어있다. 비어있다는 것은 뭐냐? 성전이 없는 채로 있는 거예요. 성전이 없는 채인데 성전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사건을 일으킵니다. 사건인데 무슨 사건이냐 하면, 심판사건, 다른 말로 하면 멸망사건, 우리를 없애버리는 그런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사건에서 뭐가 생기는가 하면, 새로운 현재가 생겨요. 새로운 현재가 되게 되면 과거-현재라는 그 과거선이 끊어지고 지금 주께서 나로 하여금 이런 신체를 다루고 있다는 것, 성전과 직결되어서 나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이 몸 가지고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고, 성전을 그리워하면서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메일로 그런 질문을 한 것이 있어요. 질문은 뭐든지 간단해요. 답변이 길어서 그렇지. 신약시대 성도의 예배는 어떻게 드리면 됩니까, 라는 질문이에요. 간단한 질문이에요. 성령 받은 성도가 예배를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는 질문이에요. 그래서 답변은 아주 간단합니다. 예배란 하나 됨을 확인하는 겁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간에 하나 됨을 확인하는 것.

아까 수넴여인 자식 살릴 때 엘리사가 죽은 애 위에 올라타서 눈에는 눈, 입에는 입, 코에는 코, 이렇게 맞대고 기를 집어넣잖아요. 이게 하나 됨이에요. 하나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죄인의 입장에서 들어가야 돼요. 죄가 있는 곳에만 의가 있기 때문에 의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옆에 보조적인 죄 속에서 의가 나오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말씀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죄인 되게 하셔요. 죄인 되게 하시는 그것이 주님이 바깥에서 보면 의되게 하시는 겁니다. 얼마 전에 가락강의 하면서 그걸 가지고 이불호청이라고 했어요. 안에 알맹이가 있고 재래시장 가서 번쩍번쩍, 빨주노초파남보, 화려한 호청을 입혀버리면 속에는 죄가 들어 있고 바깥에는 화려하고 예쁜 신혼이불처럼 되지요.

이 이불호청이 뭐냐, 그게 의고 알맹이는 죄가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안에 알맹이도 없이 호청만 가지고 이불이 됩니까? 우리가 죄인된 것은 필요 없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꼭 죄를 지으시기 바랍니다. 꼭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데 죄를 일부러 짓지는 마세요. 주께서 주어지는 모든 상황가운데서, 환경가운데서 ‘아, 내가 많이 모자라고 많이 멀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아까 그 예를 들었지요. 좀 안도와주고 참으려고 하는데 믿음이 없으니까, 죄인이니까 참을 수가 없어요. 참으려니 잠이 안와. ‘그래. 좀 보태줘야지.’ “필요한 것 없나? 내가 줄게.” 참아야 되는데 도와주고 싶어서 참지를 못해요. 저만 그런가? 워낙 믿음이 없어서. 참 아무도안 웃는 이야기 혼자 해서 미안합니다. 이게 웃을 이야기인지 울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구원받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회사에서 사내 광고를 했습니다. “현찰다발 묶는 고무줄 잃어버린 분 오셔서 고무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게 말이 돼요? 현찰다발을 고무줄로 묶어 놨으면 현찰이 중요하지 고무줄이 중요한 것 아니잖아요.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헌디! 현찰이 중요하잖아요. 

지금 우리는 홀몸이 아닙니다. 우리는 고무줄이에요. 현찰은 뭐냐? 주님이 주신 그 은혜가 현찰입니다. 그런데 자꾸 고무줄, 다른 것으로 바꿔주세요, 이러면서 정작 뭐가 중한지를 모르고 있어요. 여러분, 어둠 속에서는 안경도 필요 없어요. 어두운데 안경 낀다고 더 잘 보이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이 어두움 속에서 나름대로 시도하지 마세요. 제가 오늘 아침 강의에 뭐라고 했습니까? 제발 자기 인생에 손대서 변화를 유발하지 마세요. 인위적인 변화유발은 가짜 신과 관련되어 있고 내 자아이상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 변화가 그리워서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하는 말은 그 순간 나는 주님에 대한 미흡함을 자인하는 셈이 돼요.

‘아이고 씨, 하나님이 기껏……, 내가 이러려고 예수 믿었나.’ 하고 짜증내는 순간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흙을 퍼 담아서 자기 나라 아람으로 갑니다. 놀라운 변화, 이스라엘만 있는 성전, 엘리사에게 있는 성전을 수입해서 이제는 본인에게 옮겨가고 있는 거예요. 이제 나아만 장군과 엘리사는 다른 민족이 아니라 같은 형제가 되어버린 겁니다.

동시에 같은 있는 매니저 게하시는 엉뚱한 아람나라가 되어버렸어요. 어떻게? 게하시가 현찰을 그냥 들고 가는 나아만 장군을 붙들고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그걸 들고 왔다가 그냥 가나?” 짜증내면서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 주세요. 우리 선생님께서 선지생도들을 위해서 좋은데 쓰겠다고 저보고 받아오라고 했습니다.” 해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잖아요.

그렇게 하니까 나아만 장군에게 있었던 그 문둥병이 누구한테 갔습니까? 매니저 게하시가 문둥병이 걸렸어요. 이게 뭐냐 하면, ‘문둥병보존의 법칙’이라는 겁니다. 저주는 사라지지 않아요. 이쪽을 누르면 이쪽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술을 끊고 싶으면 담배를 피우고, 담배를 끊고 싶으면 마약을 하고, 마약을 끊고 싶으면 도박을 해라. 

이건 주의 말씀 아닙니다. 그만큼 인간은 더 센 욕망으로서 기존의 욕망의 고통을 잊어보려고 하는데 그 욕망은 항상 보존되어 있어요. 인간이 한쪽을 피한다고 해서 그 욕망이 사라지지 않고 다른 것으로 대체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라는 신체 자체가 수상하고 위험해요. 우리는 지금 위험한 신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다루지 아니하면 우리는 희망 없습니다. 십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