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겨울6강-이방나라 18010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 16. 16:13
2018-01-13 11:12:01조회 : 51         
2018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6강–열왕기하 강해 : 이방나라이름 : 오용익 (IP:121.149.39.243)
2018 겨울수련회 제 6강(이방나라 : 이 근호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성전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쪽에서 오히려 성전을 무시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아람나라를 통해서, 또는 모압, 암몬 이런 나라를 통해서 이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지고 이방민족을 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방민족을 가지고 자기 이스라엘 백성을 쳐버립니다. 이방민족을 승리케 해요. 이방 민족은 원래 성전에 없어야 하는데 성전을 당연히 지키고, 성전이 있음에 대한 증거를 제시해야 될 이스라엘 민족이 오히려 성전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을 지키고 싶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키고 싶은 것은 성전을 지키고 싶은 거예요. 성전은 다윗 언약의 구현이에요. 성취입니다. 이걸 지키고 싶은데 정작 지키라고 준 이스라엘은 성전을 아주 우습게 여기니까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다시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오히려 이방 민족을 들어 쓰셔서 정신 차리라고 성전이 전에 있던, 성전을 인정하던 자기 민족을 공격하는 그러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런데 성전이 있다는 말, 성전이 있음, 창세기에 보게 되면 성전이 있음은 무엇으로 통 하냐면, 이것은 땅이 있음으로 통합니다. 성전이 있음을 통해서 땅이 있어요. 무슨 땅이냐 하면 약속의 땅의 구현, ‘있음’ 또는 ‘구현’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전이 없으면, 현재 누가 보기에도 이 땅은 있지만 이 땅은 파괴되어야할 땅이고, 멸망되어야할 땅이고, 이 땅은 마치 있어도 없는 땅이 되고, 그 땅에 사는 모든 인민들, 백성들도 죽어 마땅한 백성들이 없어질 땅이고, 이것은 살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성전이 새롭게 부과함으로써 기존에 성전 없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고 우리 가족끼리 다독거리며 살수 있다는 그 모든 인본주의적 사고방식, 성경 없는 기존의 육적인 사고방식은 새로운 성전의 이스라엘 언약의 등장으로 이것은 저주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이게 구약이에요. 구약은 윤리 도덕책이 아닙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밀어버리는 거예요. 타협하는 것도 아니에요. 너 죽으면 나 죽고, 나 죽으면 너 죽는 이런 싸움이에요. 구약을 쭉 보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 자체가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전이 있는 너희 이스라엘은 참 좋겠다, 하는데 참 좋은 게 아닙니다. 어른을 모시는 게 좋은 겁니까? 좋지요. 그런데 어른의 심성을 어떻게 다 들어줍니까? 못 들어주잖아요. 성전이 있음에 대한 합당한 약속의 백성이 되지 못하면 가장 근접한 상태에서 싸그리 여기에 포탄을 받아요. 서울, 여기는 미국, 미국은 멀리 있지만 서울은 아주 단거리로 공격 받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성전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면 이쪽에는 성전 없는 이방 나라가 이스라엘에게 공격당하고 이 유대 나라에게 공격당해 밀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전, 이 다윗 언약의 구현을 위해서 밀고 당기고 밀고 당기고 계속 가면서 이 성전의 의미를 밝히는데 그러면 성전의 의미가 뭐냐, 성전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이냐? 

성전은 누가 계시는 거예요. 계시는 것을 뭐라고 하냐면, ‘임재’라고 합니다. 어려운 말로 해서 임재. 거기에 누가 계십니다. 거기에 누가 계신다는 것은 이 세상에 어떠한 자리, 산이나 강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고 그 지정된 자리에서만 하나님과 인간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하나님 쪽에서 지정한 곳이에요. 

그러면 산에서, 강에서 기도하면 이거 안 들어주십니까? 안 들어줘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산에서 들에서 강에서 기도 하더라도 방향은 어느 쪽으로 틀어야 되느냐 하면, 방향은 성전 있는 쪽으로 틀어야 해요. 이것이 바로 열왕기상 8장에 나오는 솔로몬이 받았던 다윗 언약의 내용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 가더라도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주께서 들어주실 거죠?”라고 주께서 영광중에 약속을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의 요나 선지자인데 요나 선지자는 어디에서 기도했느냐 하면,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를 했어요. 자, 물고기뱃속의 구조를 보겠어요. 물고기가 여기 있습니다. 큰 물고기. 물고기가 있고 요나는 어디에 들어 있느냐 하면,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궁금해지는 것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어떻게 방향을 틀었는가, 방향을 잡았는가, 그 문제인데요. 요나가 바다 속에 빠졌거든요. 말 안 듣고 다시스로 가다가 바다에 빠졌다는 말이죠. 바다 속에 빠졌는데 배 탄 사람들은 산 사람들이고, 바다 속에 빠졌으니 이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 원리가 여기 있으면,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문둥병 치료 받는다고 이게 저주가 풀린 것이 아니에요. 문둥병 치료 받아서 깨끗한 몸이 된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고 내가 어떠한 인간으로 달라졌는가, 무엇을 증거 하느냐, 누구를 증거 하느냐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데 이 산 사람들은 자기만 살았다고 후, 하면 그만이고.

요나가 언제 있었냐? 여로보함 1세가 있고 2세가 있는데 여로보암 2세 때 북 이스라엘 영토가 가장 넓었는데 이때 선지자가 요나였습니다. 이 여로보함 2세 행적이 아주 개판이에요. 성전은 의미 없고 자기 힘만 키우는 겁니다. 왜 힘을 키울 수 있었냐면 아람 나라 배후의 앗수르라는 대국이 등장해서 그 아람나라는 북쪽 이스라엘을 칠 수 있는 겨를이 없었어요. 여기 방비한다고 군사력을 다 빼돌려서 그 덕분에 그들은 편안하게 여유롭게 살아가면서 그것을 자기가 착해서 산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무탈할 때가 경고예요. 선지자가 뭐냐 하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전의 취지를 계속 보존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언약은 끊어질 리가 없고 끊어질 수도 없기 때문에. 선지자를 통해서 그 언약이 이어지니까. 따라서 이 죽음 속에서 요나는 성전의 의미를 몸소 체험하게 됩니다. 여기 살아있는 자가 산자가 아니라 성전의 의미와 함께 할 때 그 관계성이 곧 하나님 보시기에 산 자가 되는 것이죠. 

요나는 배 타고 가야할 곳을 잠수함 타고 간 것이 돼요. 위험하지요. 이것은 예상도 못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살펴주기 위해서 한 게 아니고 기어이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성실성은 여전히 변함이 없고 꾸준히 이어진다는 것을 이런 망나니 같은 요나를 통해서도 마음껏 보여주는 거예요. 인간은 실패했지만 언약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그 원칙입니다. 나는 예수의 피를 안 믿을 수 있지만 피의 효과는 여전한 거예요. 

이렇게 억지로 니느웨의 성에 가서 전하게 되는데, 그렇게 됨으로써 니느웨 성 사람이 이 북쪽 이스라엘이 본받아야할 하나의 모범적 사례를 보여줍니다. 이게 뭐냐 하면, 40일 지나면 심판받는다고 하니까 그들이 회개해버려요. “우리가 잘못되었습니다.”라고 회개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요나의 입장에서는 국수주의니까, 자기나라밖에 모르니까, ‘너희들은 이제 죽었어.’ 하고 기다렸는데 안 죽어요. 오히려 잘 되고 있습니다. 

누가 삐졌는가, 요나가 삐졌어요. 스스로 자살할 지경까지 삐졌습니다. “이래서는, 이런 식으로는 하나님과 일 못합니다. 하청업체가 전혀 상품 교환이 안 되어가지고 서로 의견이 통하지 않는데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하고 삐져버린 거예요. 이때 요나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자기 나라만 주장하는 이방적인 요소가 이미 요나에게도 포함되어 있어서 요나를 깨우침으로 말미암아 다시 요나가 자기 나라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제대로 된 언약 위주의, 성전 위주의 새로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렇게 조치를 하신 것이 바로 요나에요. 

요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 요나의 출신인 북 이스라엘을 대변해서 요나는 하나님과 정면으로 마주한 겁니다. 인간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우리를 대표하는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서 버림받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자, 여기서 하나님이 이제 이방민족의 편에 서서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성경 열왕기하 1장 1절을 봅시다. 이제 진도 나가려나? 거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딱 이 느낌이 뭐냐 하면, 모압이라는 이방민족은 마땅히 이스라엘에게 복속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축복이니까. 축복이 있다는 것은 쌍으로 반드시 저주를 유발하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이 축복이라면 성전이 없는 다른 나라는 뭐가 되요? 자동적으로 저주가 돼야 하고 창세기의 야곱의 언약에 의하면 반드시 축복된 자에게 저주받은 자가 종이 되어야 한다는 그 원칙을 하나님께서는 고수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압이라는 것은 어디 있느냐? 남쪽 유다, 북쪽 이스라엘이 이렇게 있고 여기 요단강이 있다면 이쪽, 사해의 오른쪽 지역, 위로 암몬, 아래로 에돔이 있고 그 사이가 모압이에요.

해변가 쪽으로는 블레셋, 팔레스타인, 갈릴리호수 북동쪽으로 아람, 그 위쪽으로 앗수르, 바벨론은 변방에 따로 있어요. 아직 힘이 세지 않을 때인데 그 때 모압이 아합에게서 벗어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3장 4절을 보면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지라.” 같은 성질의 나라거든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을 무시했으니까. “내가 너에게 왜 바치는데?’ 이렇게 되는 거거든요. 

이 이스라엘이나 모압왕의 특징이 같이 되었으니까 그 특징은 한마디로 말하면 ‘힘’이 됩니다. 힘이라 하는 것은 자기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모으기 때문에 힘이라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한 힘이 되죠. 자기에게 힘이 있다는 것은 ‘있음’입니다. 있음이니까 이것은 아까 이야기한 무엇이 없다? 성전이 없는 거예요. 

성전이 없기 때문에 성전 쪽에서 이것은 뭐가 되는가? 성전이 없기에 이것을 뭐라고 하는가? ‘공백’ 비어 있는 것, 원천이 끊어져 있는 것, 이런 게 비어있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면 이러한 아람, 이방 나라, 또는 모압, 에돔의 그 정신……, 북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나중에 성전 빼앗기는 유다도 마찬가지에요. 나중에 586년, 성전이 불타버립니다. 

“너희는 성전 받을 자격도 안 돼!” 불타버리죠. 그러면 성전이 에스겔에 의해서 어디로 이동하느냐? 포로 잡힌 데로 이동합니다. 성전은 없지만 성전이 이동할 수 있는 이유는, 성전은 여기에 누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에요. 자, 하나님과 하나님 이름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존재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존재 + 기능’이에요. 

하나님의 이름은 존재에서 의논된 그 약속 또는 그 언약을 지상에 실현하는 실무자, 실무적인 담당을 하는 기능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의 기능을 통해서만 나타나고 그 뒤에 숨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상이 되고 반드시 진짜 하나님은 주의 이름을 경유해야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되어있어요. 

우상의 특징은 뭐냐?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어요. 하지만 주의 이름은 기능적이기 때문에 주의 이름에서 계속 활동을 하게 됩니다. 보통 우상은 내가, 인간이 찾아가면 돼요. 하지만 주의 이름은 기능이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찾아가는 것은 우상을 의식하고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찾아가봐야 소용없어요. 하나님 이름을 불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 찾아간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나라는 인간이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찾아가게 되면 그 주의 이름은 어디서 나온 것이냐? 나라는 존재에서 나온 기능이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주의 이름을 불렀던 나의 공로와 나의 업적을 내가 잊을 수가 없어요.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기 때문에 구원 받았잖아요. 내 공로를 인정해주세요.” 이렇게 돼요. 

그것을 가지고 보통 교회에서는 쌍지읒이 들어갑니다. “쭈여~, 쭈여~, 쭈여~!’” 이 ‘쭈여’가 세 번인데 하나는 성부를 향하여, 또 하는 성자를 향하여, 또 하나는 성령을 향하여 “쭈여, 쭈여!” 주님은 “시끄럽다~!”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쭈여, 쭈여, 하니까 심지어 쌍둥이 애까지 “주여, 주여~, 집사주세요.” 이게 유튜브에 올라와 있어요.

쌍둥이 애들, 아무것도 모르는 십 몇 개월 정도 된 애까지 “주여, 주여~” 막 할렐루야까지 외치고 있어요. 다 자기 기능이죠. 주님의 기능이 오게 되면 우리가 이 공백에서 새로운 사건을 일으킵니다. 변화의 사건을 일으키죠. 내가 하는 모든 기능은 차단되고 안 받는다는 겁니다. 네가 하는 기능, 전도, 헌금, 선교, 예배 참석, 성경 공부, 어떤 것도 받질 않는 거예요. 

이 받지 않는다는 그 소식이 바로 기쁜 소식이에요. 왜냐하면 만약에 하나님이 내걸 받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업적을 느낍니다. “주여 십일조만 해서 되겠습니까? 그것은 기본인데 형편 되면 십의 이조 할게요.” 본인이 뭔가 허전함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 인간의 욕망은, 주체는 뭐와 합치되지 아니한다? 실체와 합치되지 않죠. 다른 말로 하면, 나라는 인간이 예상하는 것과 현실 돌아가는 것이 항상 빗나가고 어긋나는 데서 우리는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왜 내 뜻대로 안 되지? 왜 내 기도대로 응답이 왜 안 되지? 뭐가 부족해서 그렇지? 더 바쳐야 하나? 기도 더 오래 해야 되나? 우리 애를 신학교 보내야 하나? 내 고집으로 내가 애를 너무 패지는 않았나? 내 행동이 너무 세속적은 아니었을까? 누구를 험담했을까? 혹 목사 욕을 했을까?’ 

자기 자신에게 자꾸 손을 대는 버릇이 있어요. 그런데 피부에 손대면 나중에 흉터 져요. 온 몸이 벌개. 너무 긁어가지고. 자학적인 거죠. 바알 아세라 선지자 하는 꼴이 그 꼴 아닙니까? 주님의 기능은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가 평소에 내 기능, 나 잘되기 위한 기능으로 살았다는 것을 유발시키고 폭로시켜주는 해택을 주십니다. 

“너는 이것밖에 안 되잖아.” 이게 바로 주의 기능을 막아서는, 너도 모르는 본래적인 죄의 기능이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게 됩니다. 보여주게 되면 그것은 이미 주님의 기능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 된 것이죠. 그래서 이것을 간단하게,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죄인 됨이 밝혀졌을 때의 이 관계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이 관계를 사랑, 믿음, 소망, 믿음, 소망, 사랑, 이 중 제일은 사랑이라. 

이 모든 것은 사랑에서 나온 거예요. 그 관계를 가지고 고린도전서에서 ‘은사’ 다른 말로 ‘선물’이라 하고, 이 선물의 특징이 뭐냐면 인간의 힘으로, 마귀의 힘으로 이게 안끊어진다는 거예요. 얼마나 질긴지 나일론보다 더 질겨요. 환란과 핍박과 곤고와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독감이나 뭐라도 주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다. 

독감 b형 하나 거기에 더 집어넣으세요. 어떤 경우라도 끊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질김을 주께서 증명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뭘 줍니까? 독감 a형 줬다가 b형 줬다가. a형 걸려서 이틀만에 나았는데 다시 b형 걸리고, 낫고 난 뒤에 다시 a형 걸리고. 계속 이런 식으로 “어느 것이 중헌디?” 고무줄이 중하냐, 현찰이 중하냐? “어느것이 중헌디?” 정말 중한 게 뭐냐는 것을 주께서 늘 고백하게 만드는 겁니다. 

주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성전에 이 주의 이름이 있어요. 그런데 성전이 옮겨진다는 말은 누구만 옮기면 됩니까? 주의 이름이 자기 백성들과 옮겨지면 되는 겁니다. 옮겨지면서 뭐가 바뀌느냐 하면, 약속이 바뀌어요. 하나님의 언약이 바뀌게 됩니다. 어떻게 바뀌는가 하면, 옛날에는 율법을 주셔서 율법 지키면 복 받고 율법 안 지키면 저주 받는 다는 조건을 주의 이름으로 했는데, 이미 그들이 멸망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안 돼! 안 되는 거야!” 

이미 모든 인간은 절대로 주의 말씀을 지킬 재주가 없다는 것을 이미 확인시키고 난 뒤에는 아예 이 죄 속에 주의 말씀이 성령을 통해서 이 안 까지 허락도 없이 그냥 파고들어 와버립니다. 여기 하나의 집처럼 장착이 돼버려요. 우리 안에. 이 걸 가지고 뭐라 하는가? 이 원리가 새 언약이라는 겁니다. 

‘새’ 빼고 옛날 언약, 이걸 구언약 또는 구약이라 하는데 옛날 언약은 우리에게 호소를 했지만 새 언약은 아예 우리 속에 들어와 버려요. 호소한 것도 우리한테 기대를 걸어서 호소 한 것이 아니고 네가 네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그냥 호소 한 거예요. 호소하면서 그들의 호소에 부응한다고 나름대로 지키는데 지켜봤자 주의 이름의 기능이 아니라 자기 죄의 기능으로 나오기 때문에 결국 그 결과는 멸망입니다. 

멸망하는데 큰 보탬이 되었고 기여자가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벨론입니다. 이 바벨론의 특징은 뭐냐? 십자가와 똑같아요. 특징이 뭐냐? 바벨론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민족도 모압, 암몬, 블레셋, 모든 것은 바벨론 정점에서 종합이 되고, 그 후에 바사, 헬라, 마케도니아, 로마, 그리고 지금 229개국의 모든 나라, 평창올림픽에 출전하는 모든 나라 전부는 백날 해봐야 바벨론 제국의 우상의 긴 그림자에 불과하지요. 

결국 전에 있는 나라와 새로운 나라, 애굽부터 해서 모든 나라는 정점에서 하나로 통합이 되는데 바벨론 나라로 통합이 됩니다. 이렇게 모든 나라가 오직 하나의 나라, 아담이었고, 동일한 인간들이었다. 모두 다, 예수님 빼놓고는 모두 다 이방민족이었다. 그것을 들통 내는 그 사건은 바로 성전이 완공되면서 새로운 사건이 주어지게 되면 영원히 이세상은 시간이 흘러가도 영원한 바벨론의 현재가 되는 겁니다. 

제가 아까 했지요. 공백에 사건이 터지면 사건이 무엇을 만들어낸다? 현재를 만들어내요. 그래서 의도적으로 주님께서는 바벨론에 잡혀가도록 주의 이름으로 자기 백성을 데려가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주신 온실효과죠. 비닐하우스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겁니다. 

이번에는 역대하를 봅시다. 역시 왕에 관한 이야기인데 역대하 36장 21절, 누가 큰 소리로 읽어보세요.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토지라고 하는 것은 세상, 지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땅을 말합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굉장히 답답해 하셨다는 거예요. 약속이 약속대로, 율법이 율법대로 시행되어야 할 그 땅이 아주 엉망이 되었으니까 언젠간 한번 밭갈이를 해야 됐어요. 완전히 뒤집어서 깨끗하게 하고 난 뒤에 그 땅에 들어가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땅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새 언약의 입장이 되게 되면 그 원천이, 성전이 그 완성을 보게 되면 여기서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이 출현 되거든요. 따라서 여기서 새 땅이라 하는 것은 이 지상의 망할 땅, 유황불 받는 땅이 아니고 하늘에서 마련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새로운 공간이에요. 

새로운 공간이고, 시간도 거기에서는 영원히 지속되는 묵시적 시간으로 되는데, 이 시간을 그냥 이런 시간이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또 자아이상 되겠죠. 그 땅도 상상하겠죠? 그래서 이런 상상 하지 말고 실제로 팩트, 실제로 주어졌다는 것을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변화산을 통해서 모세하고 엘리야 하고 동급으로 같이 살아요. 

엘리야는 BC 800년경, 모세는 BC 1400년경, 무려 선배와 후배 사이가 600년인데 창세전의 예수님하고 전부 같이 있어요. 그것도 모르고 베드로는, 자기가 빌라 좋아하는 모양이죠. “빌라 세 채 더 지어드리겠습니다. 뭐 여기서 삽시다.” 하고 지상의 땅으로 막 당기는데 주님께서 여기서 살려고 오신 거 아니잖아요. 새로운 땅으로 갈아치우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성전이 완성되는 그 세계와 그리고 멸망해야하는 그 세계를 같이 묶어 버립니다. 이쪽에는 바벨론, 하나의 도성에 소속되어 있는 다 같이 멸망할 바벨론, 저쪽은 하나님의 천국. 천국인데 이 바벨론 세상은 여기에 비해서 뭐가 되냐? 음녀. 음녀라 하는 것은 진정한 신부에 대해 대드는 나쁜 여자라는 뜻이에요. 주님의 교회에 대해 적대관계를 가지고 있는 쪽을 음녀라고 일괄적으로 처리해서 이들은 유황불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역대하에 나오잖아요. 그러면 열왕기하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인간들이 보기에 그렇게 요란스러워도 아무 차질 없이, 오히려 그런 요란스러운 과정을 겪어서 더 치밀하고 더 분명하게, 더 확실하게 점점 더 현실에 가까이가까이 진행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열왕기상, 열왕기하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도대체 이렇게 언약이 바뀌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쫓겨나고 하는 그 원인을 다시 한 번 보자는 거예요. 그 원인을 보게 되면 인간들이 무엇을 원했냐 하면, 왕을 원했던 거예요. 그런데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왕 되었으면 왕이 필요치 않는 거예요. 

그것은 대전강의에서 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하지 않겠습니다만, 왕이라 하는 것은 인물이 아니고 왕이라고 하는 자리입니다. 어떤 자리? 인물이 아니고 자리인데 왕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왕 됨에 언약을 실현할 수 있는 그 자리, 그 지위가 왕의 자리이기 때문에 그 기능에 합한, 주의 이름의 기능에 합한 사람이 와서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울이 처음에는 괜찮다 싶은데 뒤에 그게 아니니까 다윗으로 바꾸고, 다윗이 위에 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마찬가지고, 계속해서 이 자리에 적합한 분이 누구냐는 것을 계속 보는데 그것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만이 이 자리에 합한 존재가 되게 되면 왕의 기능은 완성이 되면서 언약은 모든 것이 종결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쭉 진행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결국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님, 예수님 빼놓고는 모든 나라가 뭐가 된다? 이스라엘과 모든 나라가 이방민족이 될 수밖에 없어요. 모두가 이방민족입니다. 그러면 아까 제가 이방민족의 특징을 뭐라고 했습니까? 이방민족의 특징은 성전이 없는 거죠. 성전이 없으니까 공백입니다. 공백에서는 뭐로 메운다? 신체로 메우고, 신체는 무엇을 요구한다? 힘을 요구하고. 힘을 더 키우기 위해서 그들은 왕을 찾았던 겁니다. 

나에게 힘을 보태줄 수 있는 왕, 이 백성에게 그냥 잘되게 하는 왕. 그런데 현재 이 왕을 구약이 아니고 왕을 인정하지 않는 이 새 언약 시대, 이런 시대에서 이 공백은 본래대로 자기 신체가 이것을 메우게 되어있어요. 신체로 메우게 되면 이것은 뭐가 되는가 하면, 바로 n분의1이 되는 겁니다. 오직 나 밖에 모르는 그런 시대에 빠지는 겁니다. 

교재를 봅시다. 교재를 보게 되면 여기에 “2. 일상이라는 말의 왜곡”이라 되어있는데 일상이라는 말을 할 때 “1. 일상생활”부터 제가 먼저 언급을 했거든요. [우리는 나치가 유대인 500만 명을 학살한 아우슈비츠를 하나의 모임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안에서 행위자들은 나치의 형 집행장들 뿐 아니라 유대인들, 열차들의 복합 네트워크, 신체 소각실, 수감자들에게 음식을 공급하는 병참술, 의복의 분류와 배급, 금이빨 뽑기, 머리카락과 유골 수집하기.] 

우리가 보기에는 이 아우슈비츠가 굉장히 살벌하고 지옥 그 자체로 보지만 막상 아우슈비츠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처음에는 충격이어도 며칠 있다 보면 차분해지고 거기 일상생활 돌아가는데 잘 맞춰서 삶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희한하죠. 활기가 넘치고 생기 넘쳐요. 그 유대인들이 독일 군병을 욕하지 않습니다. 

욕한다면 누구를 욕 하는가? 자기보다 더 독일군병에게 예쁨 받는 자기 동료를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면 인간에게 이 세상 자체가 수용소인데 수용소 자체는 안 보여요. 수용소에서 분산하게 움직이는 인간들인데 처음에는 ‘내가 이 자리가 맞나?’ 하다가 조금 지내보면 어떻게 그렇게 또 잘 적응하는지. 

그 밑에 보면 “흔히 군대의 일상…….” 처음에 장정들 발악합니다. “엄마가 보고플 때……” 찔찔 초코파이 빨면서 울고불고 난리 나는데 조금만 지나면……, 또 멋모르고 어릴 때 시집와가지고 혹독하게 시집살이 하면 “고추 당초 맵다 한들 시집살이 보다 매우랴~” 그 노래 있잖아요, 시집살이로 그렇게 고생해도 의외로 나중에는 밋밋하고 차분하게 돌아갑니다. 부산 떨 필요도 없고 사창가의 일과나 수녀의 일과나 동시대에 같이 돌아갑니다. 

밥 먹고 살고, 잠자고, 긴장은 어느새 수그러지고, 소멸되어 있고, 모두 그렇고 그런 세월이 차분하게 돌아가요. 무엇이 옳고 무엇이 나쁜가, 무엇이 귀하고, 그런 거 없어요. 내가 있는 곳이 귀하고 내가 있는 곳이 중요할 뿐이지요. 이게 공백을 메우는 자기의 신체성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왕을 원했던 이유가 자기 신체를 위해서 왕이 필요했지 왕에게 충성하기 위해서 왕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는 것이 이 마지막 때에 이렇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 교재 쓴 이유가 뭐냐 하면, 이 마지막 때에 왕의 역할을 하는 게 무엇이냐? 다시 말해서 오늘날의 이방민족은 어떠한 모양새를 가지고 살아가느냐? 

그것을 교재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교재를 읽어보게 되면 알 듯 모를 듯 그렇게 하고 있는데 이 교재의 핵심은 이겁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서 우리 가족 열심히 잘 사세.’ 이것은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해왔던 거예요. 자본주의는 그런 게 아니에요.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서 시장가서 물건 사서 우리끼리 잘 살자’ 그런 세상이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소비하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게 아니고 돈을 일단 벌어놓고 그 다음에 어떻게 소비할 것이냐는 뒤에 가서 결정하는 거예요. 그 결정을 할 때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돈을 쓰는 것이 아니고 그 물건을 구입하면서 다시 돈이 돈을 재생산 할 수 있는 가를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서 돈을 쓰게 되어 있어요. 

아껴가면서 먹을 거 안 먹고, 살 거 안사고, 밥도 아껴가면서 김밥 천국이나 사먹고, 그렇게 살면서 계속 뭘 모으냐 하면 돈을 계속 모으는 거예요. 돈을 계속 모으는 겁니다. 이것은 본인이 빠져나올 네트워크가 아니에요. 어떤 물건을 소비할 때 그림이 좋아서 사는 게 아닙니다. 이 그림이 다음에 더 많은 이윤이라는 재생산을 남기는 경우에만 이 그림을 사는 거예요. 10억 주고, 20억 주고 사는 겁니다. 화가가 누군지를 몰라요. 마티스가 누구고 세잔느가 누군지 몰라요. 무조건 돈 된다 하니까 경매 붙여서 사는 겁니다. 

집을 살 때 거기 살려고, ‘열심히 돈 벌어가지고 발 뻗고 마음대로 내 집에서 살고 싶어.’ 해서 사는 이것은 처음 첫 집 살 때 그렇고, 그 다음에 집 살 때는 ‘돈 되는 집인지, 투자가치가 있는지.’를 따지는 겁니다. 신동탄, 이런 집 사면 안 돼요. 동탄은 안돼요. 투자가 현재 소비를 절약하게 만드는 동기가 된다니까요. 쓰기 위해서가 아니고 돈부터 먼저 벌 수 있는 그 조건하에 과연 내가 소비를 할 수 있느냐, 그것을 보는 거예요. 

인간이 왜 그렇게 변했어요? 그것은 인간이 신이 아니고 인간보다 더 우위에 있는 네트워크가 있어요. 그 네트워크를 정신분석학에서 ‘대타자’라고 합니다. 타자라는 것은 남, 대타자, 큰 남, 큰 형님이죠. 이 대타자는 뭐냐? 신을 대신한 것인데 무엇이 신이냐? 네트워크 자체가 신이에요. 네트워크 자체가 신이어서 이 네트워크에서 못 벗어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이 태어나면서 부모로부터 계속 휘둘리는 게 뭐냐면 ‘너는 경제인이 되지 않으면 살수가 없다.’가 아니라 ‘경제인이 되지 아니하면 너는 사람이 아니므니다.’ 인간은 자본에 예민하지 않으면 아예 사람이 아니에요. 교회 목회를 하든지, 목사를 하든지, 농사를 짓든 간에 모든 것이, 자본 네트워크에 어떻게 내가 한 발을 끼워 넣을 수 있느냐, 그런 자질과 능력이 있느냐, 로 결정하는 거예요. 

공무원을 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교사를 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이 자본 네트워크를 부정하고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 세상이 그렇게 달라졌는가? 그것에 대한 설명이 교재 “2. 일상에 대한 말의 왜곡” 그 내용이에요. 

왜 그렇게 인간이 괴물이 될 수밖에 없는가? 우리가 과연 인간인가? 인간은 신체가 있으니까 무에서 뭘 집어넣는가? 노동을 집어넣습니다. 모든 인간은 노동자에요.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창녀다 이 말이죠. 몸 팔아서 산다 이 말이죠. 모든 인간은 노동자인데 그 노동을 해서, 자기 몸 팔아서 무엇을 얻느냐 하면 사유 재산을 확보합니다. 

이게 문제에요. 사유재산을 확보합니다. 사유재산을 확보할 때 이렇게 패턴이 좁게 되면 이것은 ‘나의 것’이라고 해서 내 것이라고 여기게 되면 그 내 것이라고 여기는 그것이 막상 시장에 내다 팔 때 내가 생각한 내 것이라는 것의 가치를 남들이 알아주지를 않죠. 뭐라고 하냐면 “한 물 갔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20년 전에 노동에 관한 책들을 많이 봤는데요. 데모하려고 본 것은 아니고 데모를 왜 하느냐를 알기 위해서 책을 봤어요. 무엇이 그리 불만인데 데모를 하느냐, 촛불집회 하느냐, 그걸 알기 위해서 노동 책을 많이 봤는데 그 노동 책을 보니까 이것과 관련되어있어요. 

무엇이냐면, 어떤 여공이 반도체 회사에 입사를 했는데 거기서 한 3년간 일하면서 그 회사의 설비에 맞는 기술들을 습득을 했어요. 습득을 하고 난 뒤에 옆에 있는 공장에서 숙련공을 뽑는다 해가지고 지원을 합니다. 여기서 120만 주는 거 거기서 140만 준다고, 20만원 더 준다고 오라고 해서 지원해서 갔어요. 

가고 난 뒤에 그 회사에서 뭐라고 하냐면, 회사의 설비 프레임을 새로 바꿨기 때문에 네가 알고 있는 노동의 기술은 이미 한 물 갔다는 거예요. 이미 한 물 가서 우리 공장에는 안 맞는다는 거예요. 그 여공이 쫓겨나서 데모해요. 누구한테 데모합니까? 누구한테 할 건데? 왜 산업 환경 바뀌는 것에 미처 대처를 못했느냐 이 말이죠. 

그러면 산업 환경 바뀌는 것에 대처 하려면 새로운 공장에서 필요한 노동의 질이 어떤 것인지를 미리 공부를 하든지해야 하는데 일 한다고 공부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이건 뭐냐? “필요할 때 쓰다가 필요 없을 때 갖다 버리는 소모품이냐?” “소모품이다 왜!” “내가 왜 소모품이냐?” 너한테는 소모품이 아닌데 이 돌아가는 네트워크에게는 소모품이 되는 거예요. 한물갔다고. 

그러면 누구에게 데모해야해요? 또 문 재인한테 달려들 거예요? 항의를 누구한테, 국회의원에 해야 합니까? 누구한테 해야 해요? 항의할 데가 없어요. 왜냐하면 본인이 알고 있는 패턴 내에서 이 네트워크가 자기의 대타자 ‘신’이거든요. 그동안 그 신에 맞춰서 본인은 신에 충성하고 복종해서 신의 백성으로 살아온 겁니다. 

네트워크, 이 신이 자기의 왕이었고 자기는 그 신하, 종이었어요. 네트워크가 바뀌어버리면 자기는 살 수가 없는 겁니다. 촌에서 농사짓다가 서울에서 누가 성공했다는 소리 듣고 무조건 봇짐 싸가지고 서울역에 딱 내리자마자 “자~, 여기 ‘오라이!’(차장) 할 사람!” 이게 1970년대에 <영자의 전성시대> 영화에 나오는 내용이 있어요. 

가발 공장 갈 사람들, 차타고 가게 되면 숙식 제공하고 촌에서 얻는 수입보다 많죠. 그래서 번 돈 절약해서 반 이상은 효도한답시고 촌에 있는 집에 보내고 남은 거 가지고 생활 하면서 살아가는 그 모습이 염복순이 주연했던 <영자의 전성시대> 염복순이는 지금 어디서 사는지 소식도 없고 내 알 필요도 없고. 미국 이민 갔단 소식은 들리는데.

다 소모품이에요. 큰 수레바퀴를 돌리기 위해서 이런 자갈들이 필요한 겁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됐는가? 왜 개인은 없는가? 이 개인 자체가 처음부터 없었어요. 처음부터 개인이라는 것은 본인한테는 개인이 있지만 전체적인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이 세상에서 그런 개인이라는 주장을 할 수가 없어요. 개인이라는 것은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위로한답시고 “저는요!” 하고 부르짖을 뿐이지. 

만약에 큰 기업체, 대기업체에 가게 되면 데모하는 사람들을 막아서야 될 회사의 ‘구사대’의 일원으로서 자기 동료, 친구하고 원수가 되어가지고 맞서 싸워야 해요.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주체하고 뭐가 일치가 안 된다? 실체. 현실하고 일치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과장까지 올렸다가 “책상 빼” 하면 또 나오는 거예요. 책상 빼고 또 데모 할 거예요.

그래서 내가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요. 지금 당신은 누굴 항하여 데모를 하고 있는지 그게 궁금해요. 촛불집회 참석하시는 분들 좀 이야기 해주세요. 그 대상, 그 대상이 뭐냐, 그 대상이? 추상적인 신이에요. 본인을 먹여 살렸던 그 신보고 지금 데모하고 있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데모 받는 대상으로 전락합니다. 

데모했던 그들이 어떤 권력 체에 들어가게 되면 오히려 옛날에 자기가 했던 그 행세를 반대로 대우받게 되어있어요. 남편 데모하는데 도시락 싸주고 라면 끓여주면서 도와주던 그 아내가 막상 남편이 귀한 자리에 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옆을 쳐내기 바빠요. “어디서 내 남편을 욕하노?” 막 쳐내고 악플도 대신 다 지워주고 그래요. 

왜 세상이 그렇게 변했냐, 하는데 사실은 변한 게 아니고 노골화된 거예요. 처음부터 그랬었어요. 처음부터 그랬었는데 신이 사라지고, 종교가 무능해지고, 모든 덮쳤던 것을 다 걷어내니까 달랑 뭐가 남았다? 이 개인만 남아요. 나만 남았다. 그 나만 남은 내 모습가지고 무엇을 봐요? 성경을 봉독한다 한다고요? 큐티를 한다고요? 묵상 하면서. 누구 좋으라고? 있지도 않는 개인을 위해서 한다고, 있지도 않은 개인을 위해서. 

‘주님은 어떻게 세상을 돌아가게 하십니까?’를 생각안하고 ‘나는 어떻게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자기 이익 중심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자,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2장부터 나오는데 시간관계상 다 못 봅니다. 2페이지 밑에서 12번째 줄부터 제가 읽어볼게요. 

[자본주의에서 가치는 단지 추상적인 침묵의 보편성, 수많은 상품들 사이의 신체적 연결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가치는 수동적인 교환의 매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전 과정의 능동적인 요인이 된다. 자본, 곧 돈의 가치는 현실적으로는 화폐/상품을 수동적으로 취하는 것에서 시작되지만 그 자신이 탄력을 받아 스스로 생명을 가진 주체처럼 행세한다.]

그 자본 자체가 하나의 괴물처럼 행세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가치 자체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게 있습니다. 무엇을 요구 하냐? 데이터를 요구합니다. 이것을 데이터이즘(data-ism, 데이터주의)이라고 해요. 지금의 인간들은 뭘 보냐 하면, 키는 몇 센티 돼야 하고, 몸무게는 얼마여야 하고, 모든 것을 데이터화 시킵니다. 

빅 데이터에 그 정보를 다 담아서 너는 대기업에 몇 번 면접 보고 몇 번 떨어졌는지, 그 데이터가 다 나와요. 인간은 무엇으로 분류되느냐? 데이터의 정보의 자료로 전부다 분석이 되고 다 분해가 되는 겁니다. 스펙을 쌓는 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개인은 없는 거예요. 그 데이터를 조종하는 것은 누구냐? 대통령이냐? 아니에요. 그러면 국무총리 책임? 책임질 사람이 없다니까요. 

왜냐하면 그 네트워크 자체가 신으로서, 우리는 그 신에 속한 신하로서 그냥 큰 수레가, 네트워크 자체가 돌아가요. 데이터 자체가 돌아가는 겁니다. 항의할 주체가 없으니까 항의를 누구에게 하느냐? 그 데이터가 요구하는, 사회가 요구하는데 부응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가 자책하고 질책을 하게 되요. 

그러니까 갈수록 우울증 환자가 늘어나는 겁니다. ‘이 못난 놈!’ 자기 자신보고 못났다는 거예요. ‘머리가 그것밖에 안 돌아가? 이 못난 놈!’ 3페이지 중간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노동자의 대상으로부터 소외는……” 소외는 배제되는 것을 소외라 합니다. 노동자가 힘을 가지고, 나는 무엇을 가지겠다고 대상화 하지만, 이것을 마르크스가 발견했는데, 노동하면 노동할수록 그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구매력은 자꾸 떨어져요. 

왜? 그것이 나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남들도 필요하니까. 처음에 그 상품의 사용가치가 50이라면 시장에서 귀하다 보니까 이게 100으로 올라서 50가지고는 100을 구매를 할 수 가없어요. “나는 서울 강남에 있는 복층아파트 제일 꼭대기에 살고 싶다.” “너만 살고 싶나? 나도 살고 싶다.” “한 평에 얼만데?” “평당 10만원해서 35평이니까 350만원에 주고 사고 싶다.”라는 꿈같은 이야기 있어요? 

안 팔리면 모르겠어요. 다들 원하는 순간에 350이 35억으로 변한다니까요. 갖고 싶지만 그걸 못 갖는 거예요. 그 사람은 다른 허름한 아파트, 이제 동탄 이야기는 그만하겠습니다, 허름한 35평에 살면서 무엇을 그리워 하냐면, ‘나는 지금 여기를 원한 게 아닌데. 저기 저 강남의 고급 복층 빌라를 원했는데 내가 이게 뭐냐.’ 하고 스스로 자기 가치를 다운 시키니까 노동자가 보람을 적게 가지는 거예요. 

전에는 보람을 가졌었는데 그 보람만큼 점점 잘려지는 겁니다. 그러면 집착을 누구에게 합니까? 본인이 본인보고 데모하는 거예요. ‘이 못난 놈, 평생 동안 뭐했어, 이 나이에.’

내가 나보고 집착하는 거예요. 그걸 달래기 위해서는 술, 술 안 되면 담배, 담배 안 되면 마약, 마약 안 되면 도박. 중간에 낚시 하나 끼워 넣읍시다. 낚시에서 노선이 사냥으로 가요. 사냥하다가 멧돼지 쏴야 하는데 자기 친구를 쏘아가지고……. 조금 완화된 게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트, 한화, 기아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이런 거. 좀 완화해서 순화된 것들. 

본인을 본인이 감당이 안 됩니다. 이 현재 사회에서. ‘산으로 가면 되지.’ 산에 가면 5일장은 내려와야 될 것 아닙니까? 약초 캐러 가서 약초 캐고 10만 받았는데 다음에 가니 5만 밖에 안 쳐주는데 벌써 이거는 지리산도 예외가 아니에요. 모든 산하 천하가 자본주의 속에 다 있어요. 별, 햇살, 바람 그리고 사랑, 이 모든 게. 

무슨 소린지 모르지요? 김종국이 불렀던 노래 제목입니다. 그 모든 게, 아름다웠던 별,m 바람, 햇살, 그리고 사랑마저 전부 다 자본주의의 수레바퀴에 통용되는 겁니다. 내가 그거 가지려면 그만큼 노동을 더 해줘야 옛날 알던 그 햇살, 옛날 알던 바람, 옛날에 알던 별, 그것도 뭔가 배에 들어가야 별이지 배고픈데 무슨 별이 나오겠습니까? 사랑도 마찬가지에요. 

이거 누구한테 데모할겁니까? 누구한테 책임지라 할 겁니까? 책임지겠다고 하는 그 사람이 수상합니다. 그래서 경제라고 하는 것은 생성할수록 더욱더 소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적어지고, 그 다음에 아까도 이야기한, 노동 현장이 바뀜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 노하우, 전문직이 아무짝에도 소용없게 되고, 따라서 질이 떨어지는, 기술이 적은 데로 몰리게 되고 경쟁이 심해지고 육체적인 고통은 더 강화되고. 

이게 무엇이 문제냐? 여전히 그러면서도 이 개인주의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결론이 뭐냐? 내가 나를 안 놓아준다는 게 결론이에요. 그래서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제발 여러분 자신을 놓아 주세요. 자본주의든 무슨 개인주의든 전부 다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꼭 필요한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너 없지? 성전 없지? 너 이방인이지? 너는 죽어도 마땅한 거야.” 하면서 우리의 죄를 주께서는 주님의 의를 이루는 원료로서 지금도 찾고 있습니다. 비싸게 받기 전에 너무 뻗대지 마시고 헐값에 주님께 넘깁시다. 넘기고 우리는 저녁이나 먹으면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