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겨울수련회 제 4강(엘리야의 기적 : 이 근호목사)
엘리야와 엘리사의 그 관계 속에서 그냥 정상적으로 선지자의 활동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선지자가 등장했다는 것은 망쳐버렸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망쳐버렸다. 그러면 망치지 않도록 하나님이 사전에 조치하면 될 것이 아니냐.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망쳐져야, 죄악으로 물들어야 됩니다. 죄가 없는 곳에는 결코 하나님의 의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어디서 생기는가 하면, 죄 속에서 나와요. 왜냐하면 죄나 의나 그 원천이 있어야 되거든요. 진정한 죄, 진정한 의, 그 원천에서 같이 나와 줘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죄나 의를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서 이 세상에 만들어진 거예요. 죄를 보여주기 위해서 지옥이 있고 의를 보여주기 위해서 천국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인간을 배제하는 하나님과 하나님만의 세계에요. 성부와 성자만의 세계입니다. 모든 것이 주로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 돌아가는데 처음에 천지창조 할 때부터 예수님을 위해서 천지창조 했기 때문에 인간은 빠져 있어요. 인간이, “이것, 이것 해주세요.” 창조할 때 “예쁜 꽃 주세요.” 이렇게 요구할 수가 없어요.
자식이 부모한테 태어나기 전에 “키가 178되게 해주세요.” 이런 요구를 못하잖아요. “기저귀는 빨간색을 해주세요.” 그런 것을 요구 못하듯이 피조물이라 하는 것은 이미 인간보다 먼저 있는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인간이 피조물로 만들어진 겁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온통 죄로 덮치도록 유도하신 겁니다.
죄로 덮쳐서 그 죄를 죄로 지적할 때 무슨 자격으로 심판하느냐? 의의 자격으로 심판한다. 죄가 만들어져서 죄가 있는 곳에서만 의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죄나 의를 본인입장에서 선택하려고 해요. 나는 죄를 선택하지 않고 의를 선택할래, 거룩 선택할래, 경건 선택할래, 그렇게 되면 뭐가 문제냐?
네가 그럴 자격이 있느냐의 문제를 아예 입 닫아버리는 겁니다. 나에게는 이렇게 의를 가질 자격이 없어요. 의를 가져버리면 그 의는 주님의 의가 아니고 내가 소유한 나를 위한 의가 되어버리지요. 이것은 자기의 실익, 이익을 위해서, 자기의 행복과 편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는 것이 되기에 이 죄에 대해서 먼저 심판이 주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엘리사가 해야 될 일이 뭐냐? 엘리사가 하는 기적들이 있는데 엘리사의 일들은 왕이 한 그 일의 독소를 제거하고 그 제거하는 방식이 기존의 어떤 방식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해요. 예를 들어서 엘리사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다 선지생도들입니다. 백퍼센트 그렇지는 않지만 선지생도들인데 그들에게 엘리야가 갖고 있는 기적을 베풉니다.
독소가 있는 채소에서 독을 제거하는 방법, 밀가루로 해서 없애는 것, 도끼 빠트리는 것도 선지생도, “어, 도끼!” 하니까 나뭇가지 하나 던져서 도끼 떠오르게 하는 것, 그리고 기숙사에서 음식이 모자랄 때 백 명 분의 음식을 준비하는 그것도 선지생도가정이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애 둘 낳고 남편이 죽은 그 집도 선지생도고, 그 중에서 선지생도 아닌 사람이 있는데 수넴여인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과부가 아닙니다. 늙기는 했지만 남편이 있어요. 수넴여인의 집안이 괜찮은 집안으로 보입니다. 사자성어로 하면 ‘정경부인’이라 합니다. 정경부인 같으면 하얀색 쇼올로 둘러줘야 돼요. 그리고 막 미장원에 다녀온 것처럼 머리모양이 그래야 돼요. 그 부부가 엘리사를 대접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마치 요한복음에 나오는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의 집안처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수시로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면서 편리를 도모했는데 문제는 이 집에 아기가 없어요. 너무 잘해주는데 아기가 없으니까 소원하나 들어줄까 해서 아기가 생길 것이라고 엘리사가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부부가 갑자기 무슨 기대를 하느냐? 아기를 가진다는 기대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소유지요.
그런데 아기가 태어나서 잘 크다가 어느 날 “아야, 머리가 아프다.” 하더니 그만 죽어버렸어요. 죽었을 때 누가 화를 내느냐 하면, 수넴여인이 화가 나서 엘리사를 찾아옵니다. 찾아오면서 하는 말이 “왜 쓸데없이 아이에 대한 허망한 기대를 줬습니까? 누가 애 달라고 했습니까? 애를 줬으면 안죽어야지.”
그냥 자연적으로 생긴 애가 죽은 것이 아니고 선지자가 의도해서 준 아기가 죽었다는 그 말이지요. 그러니 책임지라는 거예요. 아기를 살려내라는 겁니다. 참 이 서사구조를 보게 되면 정상적인 좋은 사이인데 갑자기 아기가 생기면서 좋은 사이가 나쁜 사이로 전환되었습니다. 이게 뭐냐? 엘리사가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주는 방법이, 하나님이 은혜를 주는 방법이 그 방법이에요.
인간적인 좋은 관계를 일부러 틀어지게 만들어요. 일부러 틀어지게 만들어서 좋은 관계라는 그 막 뒤에 감춰져 있는 인간의 더러운 속성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겁니다. 겉은 안으로 집어넣고 그렇게 끄집어내서 선지자에게 분노를 유발하는 계기를 아주 친절하게 마련해 주십니다. 당신이 뭔데 나를 이렇게 추하게 만들었느냐, 그 말이지요.
수넴여인이 어떤 부인? 정경부인이에요, 정경부인. 항상 머리를 손질해서 부풀어져 있는 분, 밖에 함부로 외출도 하지 않고. 그야말로 정경부인입니다. 젊은 분들은 정경부인이 무슨 말인지 몰라요. 재원이 아나, 정경부인. 서울에서도 종로 그 뒤쪽에 사는 사람들, 청담동 쪽이에요. 지금 강남으로 다 내려왔지만 청담동쪽이지요.
옛날부터 귀한 가문의 부인인데 졸지에 추한 부인이 되고 말았어요. 화를 내게 되었지요. 나는 선지자와 잘 통하기 때문에 특별히 나는 그런 레벨에 있을 것이다, 순수하고 귀한 분과 함께 있기 때문에 순수한 마음씨를 가졌다는 착각, 가장 의롭게 보이고 가장 고상해 보이는 거기에다 사랑보다 더 깊은 상처를 팍 내버립니다. 거기서 화를 냅니다.
그렇게 화를 낼 때 수넴여인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이 뭐냐?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은 쉽지만 이미 한 번 죽은 것이 살아나는 것은 당신이 천하에 엘리사라도 불가능합니다.’라는 의식을 갖고 있어요. 그것은 어디서 잘못되었는가? 현실세계가 산자들의 모임이거든요. 산자들의 집합이지요.
그런데 죽은 자가 산자를 살린다는 이 원칙을 몰라서 그래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은 항상 죽음의 형식이지요. 죽음의 형식이 살았다고 우기는 우리를 생명으로 살려준다는 겁니다. 죽은 자가 없으면 산자는 이미 희망 없어요. 종치는 겁니다. 우리에 의해서 밀침을 당해서 억울하게 죽었던 그 분 때문에 우리가 영생으로 통하는 숨통이 열리는 겁니다.
내가 미워해서 떠민 그 분, 내가 밀고 그분은 내 힘에 떠밀려서 맥없이 돌아가신 그 자리에서 비로소 구원이 생기는 겁니다. 영생으로 통하는 구멍이 그 때 생기는 거예요. 고상한 티를 내면서 계속 해봐야 그것은 지옥밖에 갈 수가 없습니다. 이 엘리사 방식이 왜 중요하냐? 유대왕들이 아무리 자기가 왕의 입장에서 선지자노릇을 백날해도 아까 제가 역부족이라고 했지요.
심지어 히스기야, 요시아 왕 같은 경우에는 평생을 바쳐서 종교개혁 했던 사람이에요. 이래서는 안 된다. 둘 다 유월절 제사 드렸고 성경에 둘 다 뭐라고 표현되어 있느냐? 히스기야에 대해서 이전과 이후에 이렇게 유월절 지키고 순종한 자가 없었다고 해놓고 요시아왕에게 하는 또 하는 말이, 이 전과 이후에 요시아만큼 훌륭한 왕이 없었다고 해서 이것은 투톱인 거예요.
중간에는 므낫세라는 더러운 왕도 끼어있는데. 왕들 외우는 방법은 지난 여름수련회 때 했는데 그 더러운 것은 다 잊으세요. 히스기야, 므낫세, 아몬, 요시아, 이런 식으로 가지요. 므낫세는 왕들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히스기야가 “이렇게 했는데 이렇게 함으로서 이 백성을 왕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축복된 땅에서 계속 살 수 있도록 해주겠습니다.”라고 다 했는데 둘 다 실패로 끝났어요.
히스기야는 15년 더 살려달라고 기도했고 15년 동안에 한 일이 뭐냐? 바벨론 사신이 왔을 때 자기 창고를 열어서 “우리가 하나님에게 복을 받아서 모든 것이 잘되었다.” 자랑질하다가 창고에 있던 것들 나중에 바벨론에 몽땅 다 빼앗기게 됩니다. 그 때는 이사야 때고요. 이사야는 미가와 같이 등장합니다.
요시아 이 사람도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힐기야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가서 율법책 발견하고 난 뒤에 그걸 옆에 두고 옷을 찢으면서 회개하면서, 우리가 이렇게 안 살아서 나라가 망했다는, 그래서 우리는 이대로 살아야 다시 옛날 다윗 같은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대로 살기를 요청했습니다.
했는데 마지막에 느고라는 왕이 애굽에서 올라와서 이스라엘을 칠 때 느보왕이 이야기 했거든요. “여호와가 이야기했으니까 저 바벨론을 치러 내가 가는데(갈그미스 대전이라 해요) 내 앞길을 막지 말라. 당신하고는 관계없다.” 하니까 기어이 요시아가 바벨론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네가 나와 먼저 상대하지 않으면 바벨론 못 이긴다.” 이런 식으로 나왔는데 그것도 비겁하게 변장을 했어요.
그랬다가 느고한테 죽고 말았어요. 그런데 훌다라는 여선지자, 이 사람은 결혼한 사람입니다, 훌다라는 여선지자가 이야기하기를 “요시아야, 너는 앞으로 유다에 일어날 바벨론의 큰 재앙을 안보고 죽는 것이 너에게 큰 행운이다. 다행스럽다, 이 사람아.”라고 미리 예언을 했어요. 15년 오래 사는 것이 행운이 아니고 안볼 것 안보고 죽는 것이 최고인 거예요.
작년 12월 23일에 92세로 돌아가신 분이 우리나라에 많아요. 병원마다. 이분들은 2018년도 독감유행 하는데 안 걸리고 돌아가는 큰 행운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게 최적화거든요. 적절할 때 잘 죽은 거예요. 쓸데없이 더 살려고 꿇어앉아 기도하지 마세요. 더 산만큼 그 사람은 추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어차피 떠날 곳, 어차피 언젠가는 떠나잖아요. 앞서가나 뒤서가나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어차피 인간은 다 죽어야 돼요. 히스기야나 요시아왕이 역부족이라는 말이 그런 뜻이에요.요시아 뒤에 나오는 여호와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저희 집안끼리 다 해먹었는데 1, 2, 3차 바벨론의 침공으로 성전에 있던 것 다 빼앗기고 성전도 불타버립니다.
이것은 철수입니다. 약속의 땅에서의 철수지요. 약속의 땅에서 철수가 되면서 그 땅이 엘리야가 갔던 하늘에서 새로운 땅을 마련합니다. 먼저 성전부터 준비하기 때문에 성전이 먼저 있고 성전에서 땅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그 예언을 누가 하는가? 에스겔 예언자가 하게 돼요. 요시아 이후에 여호야김, 여호야긴, 그 다음에 시드기야 왕 때 에스겔, 다니엘, 예레미야가 같이 등장합니다.
나훔, 하박국, 스바냐도 그 전에 등장하는 선지자고요. 스바냐는 요시아 때 선지자인데 이 나라는 망했다고 했고 하박국도 마찬가지에요. 이 땅은 망해야 된다는 겁니다. 나훔은 니느웨, 앗수르 나라의 멸망에 대해서, 오바댜는 에돔이라는 형제국가의 멸망에 대해서 예언했어요. 이렇게 죽 나오는데 어쨌든 간에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왕이 할 일이 역부족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되느냐? 핫도그를 그리면 쉬워요. 핫도그가 작대기가 꽂혀 있고 이렇게 생겼습니다. 속에 소시지가 있고 그 위에 소시지를 둘러싼 밀가루가 있고 겉에는 튀김옷이 입혀져 있습니다. 보통 애들은 먹다가 한두 번 바닥에 떨어트리지요. 대충 털고 다시 먹습니다. 맛있으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유대나라, 이스라엘은 이미 망했으니까 이스라엘은 제키고, 하나님의 약속이 유대나라 안에 소시지처럼 있다는 말이지요. 이것을 엘리야, 엘리사가 담당을 했어요. 엘리야 괄호열고 엘리사입니다. 왜냐하면 엘리사는 죽은 엘리야가 살아 있는 엘리사보다 더 생생하게 일하고 있음을 증언한 사람이거든요.
엘리사가 마지막 죽을 때가 요아스왕 때입니다.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다가 모압 도적떼가 오니까 급하게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던졌더니 엘리사는 안 살아나고 엘리사의 시체에 접촉이 된, 엘리사의 시체에 스킨십 된 그 시체가 살아났어요.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은 안 살아나고 그 십자가에 달린 그 순간 예루살렘의 무덤에서 사람들이 살아나서 돌아다녔어요.
이게 뭐냐? 죽은 자만이 살릴 수 있다는 거예요. 죽은 자만이 이 불가능한 것을 살려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엘리야 엘리사가 죽고 난 뒤에는 이 핫도그의 소시지가 빠져버립니다. 그러면 이 빈자리에 구멍이 생기고 공백이 생기는데 그 빈자리를 뭘 로 메우는가? 히스기야와 요시아왕이 메워보려고, 그래서 나라를 지탱해보려고 애를 쓰는데 이들이 한계라.
그래서 약속이 없는 나라는 약속의 땅에서 못살아요. 그래서 약속은 있고 약속의 땅에서는 살 수 없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 퇴거조치를 하는데 여기에 달라붙어서 퇴거하라고 “퇴고해! 쫒겨나! 쫓겨나!” 쫓겨나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하는 것이 대표적으로 예레미야, 에스겔, 이사야, 하박국, 모든 선지자가 달려들어요.
선지자가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엄청나게 달려들어서 끊임없이 망할 때는 망해야 된다고 합니다. 이 구멍이 찌그러들어서 망해야 돼요. 망해버리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디에 갔느냐? 엘리야, 엘리사 이후 이들 선지자들이 남긴 것이 있어요. 율법 그 이후에 등장하는 것이 선지자의 글이에요. 문서로 된 선지자.
문서로 된 선지자의 원형은 뭐냐? 문서를 안 남긴 선지자, 기적으로만 계시한 선지자는 엘리야, 엘리사. 이들은 기적으로만 끝나는 거예요. 기적을 통해서 하다가 더 이상 기적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은 나라 자체에 이제 아예 미련을 없애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2018년도는 어떤 시대입니까?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조찬기도회 할까요?
우리의 나라는 다른 나라에 속합니다. 하나님나라에 속합니다. 하나님나라에 속하기 때문에 이 나라는 우리는 이방인이고 나그네처럼 살아야 돼요. 그 근거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왔다가 밀어내가지고 떠나버린 세상이 이 세상이잖아요. 예수님이 모델이니까, 예수님이 원형이니까 왔다가 떠나버리지요.
자 그렇다면 이걸 전체적으로 봤으니까 수넴여인으로 가 봅시다. 수넴여인이 말하기를, “제가 언제 아들 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왜 아들은 줘놓고. 아들 줘서 감사하게 키웠다는 말이지요. 감사하게 재미있게 살았는데. 애들 키울 때 정성이 보통정성이 아닙니다. 엄마의 간 쓸게 다 들어가요. 애는 예쁜데 비례해서 엄마는 망가져요. 잘 때도 같이 자고.
애 낳기 전에는 열심히 교양도 쌓고 공부도 하고 수필집도 보고 시집도 읽고 하는데 애 낳고 난 뒤에는 시집이 어디 있어요. 틈만 나면 비상이거든요. 5분대기조. 앵, 하면 또 뭐 해줘야 되고. 자기시간을 몽땅 다 빼앗아가요. 그러니까 엄마로서는 손해 본다는 느낌이 들면 안 되겠지요.
그러면 뭐냐? 전에는 자기 증언, 자기자랑 하다가 애 낳고 난 뒤에 젊은 엄마끼리 모이면 이제는 자기자랑 안 해요. 자식자랑해요. “우리 애 천재다. 벌써부터 구구단 외운다.” 이런 식으로. 자기 애 자랑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제는 너에게 모든 것을 다 퍼부어줬다는 거예요. 혼쭐나게 만든 거예요. 자기는 망가지고 애한테 모든 것을 다 퍼부은 거예요.
그러면 엄마의 모든 위신과 체면과 명예와 자기에 대한 가치 의미가 애로 전달되었는데 주님께서는 그 애를 죽여 버린 겁니다. 부부가 애 없다가 애가 생겨서 너무 좋았는데, 애한테 모든 정성을 다 바쳤는데 그 애를 하나님께서 죽여 버렸어요. 그 당시 사회, 요새도 마찬가지지만 죽었으면 끝난 거예요.
끝났으니까 화냅니다. “당신이 섬김을 받을 때는 기분 좋았겠지만 그 섬김의 대가가 이 정도밖에 안됩니까? 그 보상이 이 정도밖에 안됩니까? 왜 이렇게 우리를 흔들어놓습니까?” 이렇게 합니다. 그럴 때 누가 난감하겠어요? 항상 난감한 것은 선지자에요. 본인이 안 죽였거든요. “저 안했어요. 제가 애 놓지 않았습니다. 애를 갖게 하지도 않았고 죽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죄와 그리고 하나님의 준비된 의 사이의 경계선에 누가 있느냐? 애매한 고난, 고통, 억울함을 한 몸에 받아야 될 역할을 하는 선지자가 하는 겁니다.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을 모르면 되는데 아는 순간 모든 세상, 가까운 일가친척의 모든 비난은 여러분들이 다 받아야 됩니다.
하지만 산상설교에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복이 있다는 말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을 아무나 받는 게 아니에요. 이것은 신분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나님 편에 섰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엘리사에게 맡겼는데 엘리사의 방식은 뭐냐? 이것은 엘리야의 연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엘리사가 했던 대로, 엘리사가 사르밧과부의 애가 죽었을 때 살려냈던 그 방식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전에 사르밧 과부 때(왕상 17장)는 참기름 그릇 준비부터 죽은 애를 살림, 이렇게 내용이 두 개였는데 엘리사에 가게 되면 내용이 따로따로(왕하 4장) 나와요.
하나는 선지생도와 살다가 남편이 죽었던 과부이야기고 또 하나는 수넴여인의 이야기, 이렇게 두 개로 나눠졌는데 그만큼 능력이 두 배니까요. 그 내용을 점점 더 세밀화 하는 거예요. 여기서 첫 번째,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참기름 그릇 준비하게 함으로써, 내가 아는 범위 내의 하나님의 그 선지자의 경계를 진짜 선지자가 와서 그것을 넘어서게 하는 겁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이 나를 절대로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 왜? 문제는 내게 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하나님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하나님은 백 프로 우상이고 가짜입니다. 내가 미처 몰랐던, 오히려 내가 화를 유발했고 “무슨 이런 하나님이 다 있어?”라고 내가 떠밀 수밖에 없었던 그 하나님, 떠밀었다는 그 손자국이 그대로 새겨진 채로 다시 찾아온 그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는 겁니다.
도마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부활했느냐 하는 것은 인물보고 ‘맞네. 얼굴도 그렇고 키를 보니 예수님 맞네.’ 이게 아니지요. 손자국과 못자국을 보면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어요. 단순히 ‘주’가 아니고 나의 하나님이에요. 지금껏 내가 믿은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그 말입니다. 멀리 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코앞에 나타난 하나님은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고난 받는 그 모습의 하나님이 하나님이에요.
이로써 성도에게 하나님은 두 종류에요. 멀리 보이는 하나님, 가짜입니다. 그 멀리 있는 하나님이 왔을 때 진짜 하나님이에요. 12월 24일에 그것을 제가 설명하면서 설교한 기억이 나요. 별은 그냥 하늘에 처박혀 있지 뭐하려고 땅에 내려오느냐는 말이지요. 별은 보라고 있는 거예요. 별은 하늘에 계시고 땅에는 우리가 계시고 사이좋게 지내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별이 땅으로 내려와 가지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습니다. 별 따라 동방박사가 왔잖아요. 동방박사가 와서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났지요. 누가 화를 냅니까? 헤롯왕이 화를 내지요. 아무 잘못도 없고 젖 잘 먹고 자라고 있는 베들레헴의 두 살 밑의 애들 다 죽었습니다. 그 설교 하면서 ‘천만다행이다. 우리 외손녀는 두 살 넘었으니.’
두 살 밑의 애들을 다 죽였습니다. 통곡을 누가 하느냐? 라헬이 통곡하는 거예요. 라헬은 누구의 아내, 본처인가? 야곱의 본처입니다. 야곱의 새로운 이름이 뭐냐? 이스라엘이에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런 식으로 만듭니다. 사랑보다 먼저 상처를 내요. 사랑을 먼저 주는 것이 아닙니다. 달랑 사랑을 주는 게 아니에요. 상처를 줘버려요.
나중에 한 번 들어보세요. 물론 그 가사 내용과는 아무 관계없습니다만. 뭐, 원한다면 보내주겠다는 그런 내용이에요. 엘리야가 받은 방식이 뭐냐 하면, 죽었던 아이 위에 자기 몸을 세 번 얹었더니 애가 숨을 쉬면서 살아났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아가 있기 때문에 자꾸 열매를 따먹으려고 해요. 어떤 결과를 따먹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열매를 따먹게 하려고 성도되게 한 것이 아니고 이런 열매가 나오는 그 과정 속에 이 사람을 죄인의 역할로 집어넣는 거예요. 그래서 애가 없었는데 생겼다. 그래서 좋아하다가 애가 죽었다.
그런데 선지자 엘리사가 와서 그 죽은 애를 살려냈다는 일련의 과정 자체가 앞으로 오셔서 하나님이 육신이 되셔서 인간도 아닌 우리를 그냥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어처구니없도록 천국을 보내시는 그것을 통해서 ‘나는 천국 간다.’ 이렇게 까불지 말고 ‘왜 이렇게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고 붕붕 뜨느냐?’ 좀 몸이 붕붕 뜨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자꾸 천국으로 갈 수밖에 없는 그 과정 속에 우리가 죄인으로 참여하는 겁니다.
죄인으로 참여하면 할수록, 많이 용서받은 곳에 많이 사랑이 되는 거예요. 상처가 많은 곳에 많이, 더욱더 사랑이 확대되는 겁니다. 그 상처는 내가 남에게 준 상처가 아니고 내가 주님한테 퍼부은 분노와 분통, 그게 주님에게 있는 따가운 내 손자국의 양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조금만 불편하면 화내고, 분노하고, 짜증내고. “이러려면 헤어져, 우리!” 하고 예수님에게 대들고. “이런 식이면 안 믿겠습니다.” 하는 그 정도만 되도 참 믿는 사람이에요. 왜? 귀신 보고 그런 소리는 안하거든요. 귀신 아닌 줄 알고 그런 소리 한다는 말이지요. “왜 당신이 내 인생에 개입해서 도대체 풀린 것이 뭐가 있습니까?” 잘 풀리는 집이라고 누가 휴지는 사주지만 주님 오셔서 개코나 잘 풀린 것이 뭐가 있어요. 안 믿는 것보다 더 못하잖아요.
엘리야가 자기 몸으로 죽은 애를 덮어줍니다. 자, 밑에 깔린 사람은 누구라? 죽은 아기죠. 그 아기에 뭐가 담겨있다 했습니까? 부모의 세상사는 즐거움과 보람이 다 담겨 있어요. 이걸 죽여 버린 겁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없을 때는 그게 좋은지도 모르고, 아기 있다는 것이 그렇게 귀한 줄도 모르고, 그냥 마음 낮춰서 ‘아기 없는 채로 그냥 살자’ 이렇게 자기 딴엔 겸손한 체 했는데 막상 주니까, 그리고 없다가도 빼앗기니 환장하는 겁니다.
차라리 애초부터 주지를 말든지. 줘놓고 빼앗아버리지요. 사랑은 상처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사랑이 오고, 그 사랑이 우리에게 뭘 남깁니까? 상처를 주고 그 상처가 화를 내고, 분노를 내고, 그 때 그것을 덮어주는 사랑, 그 사랑이 처음부터 찾아온 그 사랑이었다는 말이지요. 한 번씩들 다 해봤지요?
사랑했기에……, 사랑했기에 헤어지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요. 사랑하는데 왜 헤어지나. 사랑 안하니까 헤어지지. 사랑했기에 헤어지고, 헤어지면 못 잊겠다고 난리치고, 그래놓고 또 갈아타기하고. 주님의 사랑은 우리라는 이 죄 안에다가 동그라미, 하나님의 의의 자리를 친히 만들어내십니다.
이 의의 자리, 예수님이 상처받은 자리에 우리를 초청해요. 네가 저지른 네 일에 우리를 끌어당겨 안아버려요. 안아버리고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해서 위에 덮쳐버립니다. 덮쳐버리면 그 선지자에게 있는 온기가 이쪽 죽은 자에게 전달이 되면서, 물리학의 전도의 법칙이죠, 전달이 되면서 애가 죽은데서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애가 산 것이 아니고 여기 있는 부모들이 새로운 선지자의 세계를 인식하게 되는 겁니다.
사르밧과부의 경우는 그 때 3년 가뭄이 들었을 때에요. 이 약속의 땅이 젖과 꿀이 흐른다고, 가뭄 같은 것은 일체 없다고,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우리에게는 일체 저주가 없다고 알고 있던 그 땅에 왜 저주, 가뭄이 이렇게 있어야 되는가?
변화를 유발하는 거예요. 그 변화, 과정 속에서 새롭게 찾아오시는 진짜 과정 속에 들어온 하나님,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혼자서 다 해내신 것, 그래서 “다 이루었다. 네 인생 손대지 말라. 네 것 아니고 이젠 내꺼야.”라고 모든 것을 주의 것으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엘리야, 엘리사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이렇게 덮쳐서, 눌러서 온기 줘서 살리는 방법을 엘리사가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 때 매니저가 있지요. 게하시. 하여튼 인간 되도 않았어. 그 게하시가 먼저 가서 엘리야가 했던 방식대로 지팡이를 애 얼굴 위에 두어라. 그래서 지팡이를 두고 엄마 아빠는 다 나가라고 해요. “엄마도 아빠도 다 나가.” 이것은 엄마 아빠 것도 아니에요.
다 나가고, 엘리야의 하나님의 기능의 연속이기 때문에 다 나가고 “엘리야가 했던 방식을 나는 그대로 따르고자 합니다.”라고 신고하고 이제 매니저도 나가고 혼자 남아서 그대로 온기를 주니까 애가 일곱 번 기침하고 깨어났다는 겁니다. 팩트입니다. 실제상황이에요.
이 엘리사가 꾸준하게 이렇게 일할 때 많은 사람들은 엘리야 따로 엘리사 따로 노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람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그 때 그 이스라엘 왕 이름은 요람, 또는 여호람이라고 해요. 같은 사람인데 이름이 두 개에요. 그 왕 시대에 아람나라가 쳐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에 북쪽이니까 시리아 이쪽, 아람의 공격을 많이 받아요.
전쟁을 할 때에 아람나라가 전쟁이 잘 안되거든요. “누가 이렇게 우리 전략을 미리 다 알아채느냐?” 하니까 “엘리사 선지자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러면 엘리사부터 먼저 잡으면 되겠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마치 삼국지에서 제갈공명 먼저 잡으라는 식으로. 그래서 엘리사 있는 곳을 군대가 포위했어요.
“엘리야야! 너는 이제 죽었다!” 할 때에 게하시가 “우리는 죽었습니다. 어떡하면 좋습니까?”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게하시의 이런 고백들을 우리는 욕하지 마시고 우리가 엘리사에게 우리를 대입하기 이전에 먼저 게하시를 거쳐서 대입해야 돼요. 우리가 매일같이 스물네 시간 걱정하는 것을 그대로 게하시가 걱정합니다.
“우짜노, 우짜노. 어떡하지?” “뭘 어떡해? 왜 그런데?” “이제 우리가 생존을 못하게 되었어요.” “생존 안하면 되잖아.” “그러면 우리는 죽지 않습니까?” “죽으면 왜 안 되는데?” 거기서 질문이 그치지요.
예수님도 죽은 세상인데 우리가 뭐라고, 우리가 통뼈도 아니고. 예수님도 죽었는데 우리는 왜 죽으면 안 되느냐 그 말이지요. 걱정들을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이 게하시의 사고방식과 똑같이 동일한 사고방식이 누구냐 하면, 자기를 포위한 아람군대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들은 알아요.
마귀에 속한, 믿음도 없으면서 믿는 체 하는 것을 누가 먼저 눈치 채느냐 하면, 마귀나라에서 먼저 눈치를 채요. 너는 우리하고 같은 급이라는 거예요. 같은 질의 사람인데 상대방을 갈불 수도 없지요. 여호람 왕 때 아람 이전에 나아만 장군이 왔을 때도 마찬가지지만 어쨌든 이렇게 했을 때 엘리사가 기도를 해줍니다.
기도를 해주니까 이쪽 편에 있는 아람군대보다 엘리사가 있는 쪽의 하늘의 천군천사의 숫자가 더 많았어요. 그런데 게하시 눈에는 안보이다가 기도해주니까 이게 환하게 눈에 보인 거예요. 숫자가 너무 많아서 게임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대목을 보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합니까? 또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진즉에’지요.
그러면 진즉에 알려주지. “우리 편 많다.” 이렇게 우리를 걱정 안하게, 초조하지 않도록, 불안하지 않도록 진즉에 보여주지, 하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가 지금 적들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고 네 사고방식이 문제에요.
평소 사고방식이 자기의 생존에 급급하고, 그리고 힘으로, 숫자 많은 힘으로 생존을 계속 영위하려는 극히 자기소유의식의 비언약적 사고방식, 이것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일부러 눈을 가린 채로 안보여주고 난감한 상태가 왔을 때 눈 뜨게 해서 보여주고 나중에 그들을 다 장님 만들어서 엉금엉금 기게 해서 사마리아의 여호람 왕에게 가게 하니까 왕이 다 죽일까 하니 엘리사가 그냥 보내라고 해서 그냥 보냈던 겁니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팩트에요. 그러면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어떤 사람, 성령 받은 성도가 가게 되면 남들 눈에 보기에도 천사가 한 열 댓 마리, 마리라고 하면 안 되지만, 천사가 권총차고 ‘누가 감히 건드려.’ 하고 호위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면 우리는 얼마나 신납니까?
그렇게 해서 나이트클럽에 가도 신날거예요. 춤출 때 천사들도 같이 춤추면서, 왜 그렇게 살도록 안하느냐 그 말이지요. 그러면 뭐가 없느냐 하면, 상처가 없는 곳에는 뭐가 없습니까? 상처 없는 자는 사랑도 몰라요. 나 때문에 뭔가 망가진 것이 있어야 돼요. 주님 쪽에서. 그런데 나는 안 망가지면서 구원받으려고 하는 시도, 그거 아람사람입니다.
식사해야 되겠지요. 오늘 여기까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