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겨울9강-하늘의 징조 18010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 16. 16:18
2018-01-13 12:06:25조회 : 63         
2018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9강–열왕기하 강해 : 하늘의 징조이름 : 이미아 (IP:122.43.178.64)

2018 겨울수련회 열왕기하강해 제 9강 하늘의 징조 -이 근호 목사

 

열왕기하 17장을 봅시다. 17장이 어떤 상황이냐 하면 북이스라엘이 앗수르한테 722년에 다 망하고 맙니다. 망하고 나게 되면 거기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딴 곳으로, 현재 이라크 지방인 바벨론 남쪽으로 다 이주를 시킵니다. 괜히 거기 살던 사람들이 고향이라고 텃세를 부리기 때문에 이주를 시키고, 다른 종족을 거기다가 다 심어버렸습니다. 앗수르 정책이 그거에요. 심을 때, 다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오면서 그들이 믿던 종교도 같이 오게 되죠. 30절에 보게 되면 “바벨론 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었고 굿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고 하맛 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고” 여기 바벨론은 아직까지 앗수르 치하에 있는 바벨론을 말합니다.

 

31절,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32절, “저희가 또 여호와를 경외하여 자기 중에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여 그 산당에서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니라” 33절,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원래 이라는 것은 다시 원위치하는 겁니다. 원래 위치로 옮긴 거예요. 그동안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라엘을 만들었고, 이스라엘이 700년 동안(B.C.1400-B.C.722)에 이 땅을 차지했는데, 그들을 제거하고 난 뒤에는 다시 맨 얼굴이 나타난 거예요. 그 맨 얼굴이 나타났는데, 이게 뭐냐 하면 인권입니다. 인권. “내가 무슨 종교를 믿든 인간에게는 자기가 종교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 이게 인권주의 아닙니까? 인권주의. 인권주의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종교를 가지든 안 가지든, 어떤 신을 믿든 다 용납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인권에는 어떤 사상이 있느냐 하면 관용이죠. 그런데 관용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확신 없는 사람들의 미덕이에요. 확신 없는 사람들의 미덕. 인간은 절대로 관용할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절대로 인권을 주장할 자들이 아니에요. 자기의 절대성을 교묘히 감추면서, 남들에게 그 감춘 것을 설명하는 방식이 인권주의입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죠. 신명기에 보면 인권이라는 것이 없다고요. “여호와를 모르는 사람은 깡그리 갓난아이들까지 다 죽여 버려라.”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참 하나님의 정신입니다. 참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시한 거예요.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들었고, 거기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언약대로 만들었고, 그들이 잘 살고 있는 토착민들에게 쳐들어와가지고 그들을 죽여서 다 쫓아내버리고, 그 중에 쫓아낸 사람이 지금 팔레스타인들이잖아요. 팔레스타인들이 이스라엘에게 인권을 보장하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어긋나는 겁니다. 지금은 뭐 정치적인 힘이 좀 부족해서 예루살렘을 4구역으로 나눴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성명에 의해서 예루살렘에다가 아예 수도를 만들겠다는 거예요. 이 말은 황금돔 성전부터 해서 예루살렘 전체를 이스라엘 나라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거기에 동의한 나라는 미국과 이스라엘뿐입니다.

 

그들에게 인권이라는 것은, 인간의 권리라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가 없어요. “너 죽고 나 죽자”입니다. 성경이 원래 그런 거예요. 인권위원회에 의하면 천국과 지옥이라는 이것도 사실은 말도 안 되는 겁니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은, 이것은 유대교에 뿌리를 둔 기독교 그들만의 소리에서 나오는 것이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에 위반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제가 묻고 싶어요. “보편적인 가치를 네가 진정 원하고 싶으냐?”라고. 아닙니다. 인간은 오직 자기만의 가치를 인정할 뿐입니다. 보편성이라는 것은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만의 가치를 보편성이라는 말로 이렇게 슬쩍 때우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맨얼굴이 나타났어요. 북쪽 이스라엘 땅부터 이렇게 제거되어가지고 앗수르에 잡혀갔습니다.

 

그래서 눈 녹고 난 뒤에 맨 땅이 나오니까, 그 맨 땅에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겁니다. ‘아, 인간은 각자 자기를 위해서 살 뿐이구나. 하나님이라는 것도, 이거는 그냥 필요에 의해서 요구된 것뿐이구나.’라는 그 맨얼굴이 열왕기하 17장에서 드러난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이 이야기는 우리한테 해당되지 않습니다.”라고 하는데, 40년, 50년 예수를 믿다가 60대 후반이나 뭐 40대의 어느 날, ‘예수가 있기는 있나? 하나님 본 놈이 있나? 이거는 괜히 혹시 있을까 싶어서 걸쳐놓는 것이지, 이거 뭐 꼭 내가 믿을 필요가 있어? 인간은 각자 사는 거 아니야? 인간은 각자 자기 좋을 대로 사는 거고, 그리고 그 미래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모르는 거야.’라는 생각이 어느 날 화들짝 들 수가 있어요. 사실은 그게 늘 들어야 되는데, 성령께서 그저 말리시죠.

 

그러니까 성령이 없으면, 결국은 종교라는 것도 실익, 나한테 얼마나 이익이 되고 가정화평에 도움이 되느냐, 그런 공리주의적, 실익적인 차원에서 종교라는 것을 뭐 버릴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목숨 내놓고 그 예수한테 모든 것을 올인 하겠다는 그거는 좀 고려해 봐야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늘 이야기합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이야기하죠. “언제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겠는가? 바알이면 바알, 여호와면 여호와, 하나만 택하라!”(왕상18:21). 그러나 인간은 자기를 위하기 때문에 항상 그때그때마다 달라지겠죠.

 

자, 열왕기하 17장 30절에서 그렇게 된 것이 이스라엘의 맨 얼굴이 나타났다는 그 이야기고. 열왕기하 18장에 보게 되면 거기에 히스기야 라는 왕이 등장합니다. 이 히스기야 왕이 등장하는데, 이 히스기야 왕을 하면서 우리가 꼭 알아야 되면서도 굉장히 힘든 연결고리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18장 6절에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7절,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8절, “블레셋 사람을 쳐서 가사와 그 사방에 이르고 망대에서부터 견고한 성까지 이르렀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지금까지 우리가 강의에서 배웠던 논리에 의하면, 공식에 의하면 성전을 지키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성전중심으로 산다는 이유 때문에 만사가 성전에서 나오는 그러한 혜택을 왕이 입도록 하고, 왕이 이렇게 혜택을 입게 되면, 왕이 이렇게 인정을 받게 되면 덩달아 백성들도 아무 한 것도 없이 왕 때문에 절로 괜찮은 나라에 속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유다야! 성전만 제대로 지켜라. 성전에만 제대로 관심 있게 하게 되면 너희는 저절로 잘 된다. 만약에 성전에 대해서 눈 돌리고, 왕이 나라를 왕 본인의 나라, 본인의 교회, 본인의 백성이라고 여긴다면 이 성전이 가만히 두지 않고 너희를 벌할 것이다.” 이게 우리가 공부했던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아까 읽었던 열왕기하 18장 6절, 7절에 의하면, 이런 논리라면 지금 히스기야 왕이 제대로 하고 있는 거죠. 그러면 성전의 혜택과 효과를 보겠죠. 성전의 효과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어떤 적들이 오더라도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게 되면 내가 그 적들을 물리쳐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이곳은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그냥 사람 사는 일반적인 땅이 아니고, 약속이 분명하게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특별구역으로 하나님께서 지정한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이란 신명기 12장에 보면, 근데 자꾸 약속의 땅이라고 하면 옛날에 KBS드라마로 했던 김진홍 목사의 두레마을이 생각이 나요. 그들은 그곳을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데,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곳은 사람의 이름이 있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름이 임재하고 있는 곳이에요. 여호와의 이름이 거기에 오겠다는 거예요.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을 친다는 것은 사람 대 사람의 전쟁이 아닙니다. 감히 인간들이 누구를 향하여 전쟁을 하느냐, 하나님을 맞상대로 해서 공격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기적을 베푸는데,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지게 하고 해가 멈추게 해서 이 땅을 지켜낸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의 공식에 의하면 히스기야가 제대로 하기 때문에 두 번 다시 이 땅에 적들이 쳐들어  올 것이다? 안 올 것이다? 이 공식에 의하면 안 오게 되어 있죠. 그런데 말입니다. 옵니다. 열왕기하 18장 13절에, 히스기야 왕 십사 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취하매” 자, 여기에서 멈추고 한번 생각해봅시다. 공식대로 한다면, “실제로 앗수르 군대가 쳐들어올지라도 우리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와 함께 해서 물리쳐줄 것이다.”라는 이 공식이 맞잖아요. 그런데 안 물리쳐줍니다.

 

그 뒤에 14절에 보면, “앗수르 왕이 곧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정하여 유다 왕 히스기야로 내게 한지라” 15절, “히스기야가 이에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었고” 성전 곳간에 있는 것은 어떤 용도였습니까? 이걸 성물이라고 하는데, 거룩한 물건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서서 한 전쟁에서 승리한 전리품입니다.”라는 증거로 하나님의 성전 창고에 넣어놓는 거예요. 그것을 내놓았다는 것은 우리 하나님이 졌다는 거예요. 분명히 만사형통하게 되면, 복음을 알고 이렇게 온 식구가 예수님 십자가라고 하게 되면 아무 일이 없어야 되잖아요. 아무 일이 다 일어나요. 아무 일이 없는 게 아니고.

 

16절을 보면, “또 그 때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라” 금까지 벗겨서 모두 앗수르에게 주었어요. 원래 금이라고 하는 것은 솔로몬 때 하나님께서 성전 짓겠다고 하니까 착하다고 해서 준 복이에요. 그 복을 앗수르한테 다 내주었다는 말은,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원래 왕이라고 하는 것은, 다윗 때는 성전과 바로 직결이 되는데, 솔로몬부터 시작해서는 왕과 성전 사이에 선지자가 개입합니다.

 

제가 이번 강의에서 몇 번을 이야기합니다. 왕은 “살려주세요!”라고 하지만, 선지자는 아무 말이 없죠.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이거다 이 말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선지자는 본인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에요. 왕은 자기 자존심을 위해서 살지만, 선지자는 자기 자존심을 용납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여기 선지자가 개입했다는 말은 이 관계 체계(왕과 성전관계)가 붕괴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여기에 관계된 선지자가 엘리야, 엘리사인데, 이 선지자들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관계에 들어가면서 어떻게 해서라도 왕 체제를 유지하게하려고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기한을 주고 기회를 줬던 그 흔적이 엘리야, 엘리사입니다. 백성을 살리지 못하는 것을 선지자가 와서 살려낼 자를 살려내는 그 작업을 해왔던 거예요.

 

그런데 엘리야, 엘리사 다음에는 후계자가 없어요. 후계자가 없다는 말은 이제는 왕 제도에 대한 철폐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엘리야, 엘리사의 용도는, 이 성전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취지를 엘리야, 엘리사가 담당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담당하느냐 하면 이사야, 예레미야 등등의 선지자들로 이동하게 돼요. 엘리야, 엘리사를 기적선지자라고 하고, 이사야, 예레미야, 등등의 선지자를 문서선지자라고 합니다. 기적선지자는 단회성이에요. 기적주고 두 번 다시 동일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홍해는 가르고 요단강은 갈라지지 않은 가운데서 들어가야 돼요. 똑같은 방식이 아니에요.

 

그런데 문서선지자는, 이미 문서화됐다, 언어화됐다, 라는 이 말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확정된 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서선지자는 미래에서 보는 시선을 갖고 있고, 기적선지자는 그때그때 소모성 기적으로서 나라를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미래에서 보는 시선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왕 체제는 멸망해도 당연하다는 거죠. 멸망하는 것이 주의 뜻이라고 하는 겁니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고 그 멸망 속에 우리 자신이 망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게 당연하다는 거예요. 그게 당연한 이유에 대해서 문서로 이렇게 확고하게 정립이 된 선지자가 문서선지자에요.

 

그러면 인수인계를 해야 돼요. 인수인계를 하면서 왕 체제의 자체적인 한계를 보여주게 됩니다. 그래서 히스기야에게 만사를 형통하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앗수르가 왔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전혀 도와주지 않습니다. 왜, 다 빼앗길 수밖에 없게 되느냐, 그것은 왕이 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다른 체제로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왕 체제에서 선지자 체제로 갑니다. 선지자 체제로 넘어가면서 선지자에게는 더 이상 왕은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왕이 없는 나라. 왕이 없다는 말은 그 나라 백성도 없는 거예요.

 

나라 없고 왕 없고 백성 없는 나라! 선지자가 꿈꾸는 세계입니다. 선지자의 세계에요.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왕이고 백성은 예수님이 새로 만들어내고. 그 시공간, 하늘과 땅도 예수님 중심으로 새롭게 조성됩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기존의 백성과 왕 그리고 눈에 보이는 기존의 모든 나라는 없어져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권세까지 모든 것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으로.

 

그러나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나 교회라고 하는 것은 항상 보이는 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어떤 교회가 있는데, 전도사가 교회 참석 숫자를 셌는데, 오늘 교회에 몇 명 참석했는가 하고 세면서 거기에 천사 숫자를 고려합니까? “목사님, 오늘 교인 70명 왔고 천사 180명 왔습니다.”라고 이렇게 보고합니까? 안 하죠. 보이는 사람만 계산했다는 말은 그 교회가 추구하는 바가 이미 틀려먹었다는 거예요.

 

그것은 옛날 왕 지도자 중심으로, 왕 체제 중심으로, 보이는 인간왕의 중심으로 그걸 계속 고수하고 붙잡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보이는 것으로 전부 다 쇼부(어떤 일에 대해 확실히 결정지음을 속되게 이르는 말)를 내겠다는 거예요.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겁니다. 이것은 과학적 인식 때문에 그래요. 보이지 않는 것 까지 포용하고 포섭할 수 있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이 세상에서는 어느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령만이 이야기해요.

 

빌라도가 그렇게 예수님 앞에서 큰소리치면서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다”라고 했죠(요19:10). 주께서는 보이지 않는 천사가 함께 있다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위에서 주지 아니하면 너는 나를 해할 권세, 재판할 수도 없다는 겁니다(요19:11). 보다 더 포괄적인 범주, 그 포괄적인 범주만 있으면 안 돼요. 그 포괄적인 범주가 왜 있어야 하느냐의 그 정당한 해석의 범위도 같이 넓어져야 해요. 세상 보는 눈으로 ‘저 안 보이는 세계가 있겠지.’라고 끝나버리면 안 되고, 그 안 보이는 세계는 어떤 식으로 운영이 되는가, 그 원리원칙까지 우리가 알고 있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리고 그 원리원칙이 어떻게 돌아가기에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왜 그렇게 미워하고, 그걸 배척하고, 결국 십자가 사건이라는 그 참사, 예수님이 살해당한 사건을 가지고 서로 등 돌리고 대치되어 있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그게 복음이거든요. 그 틈새가 복음이라고요. 왜, 우리의 이런 사고방식으로는 저 세계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너는 이제 너를 그만 생각하라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여 버려야 우리가 구원되는 이유를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로마서에 나오는데 상당히 어려운 대목이거든요. 그걸 구약에서는 쉽게 풀어주는 겁니다. 구약은 십자가의 앞선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 이렇게 선지자가 교체가 됩니다. 교체가 되면서 엘리야가 불말 불수레를 타고 올라갔지만(왕하2:11), 엘리사의 경우에는 게하시와 함께 있을 때에 불말과 불병거가 함께 있다는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잠시 보여줬어요(왕하6:17). 그럴 때 우리는 생각하기를, ‘왜 하나님은 그걸 잠시 보여줄까?’라고 하죠. 줄곧 보여주면 좋겠는데. 막 생중계해가지고. 그런데 줄곧 보여주게 되면 그걸 본다는 나 자신이 괜찮은 존재로 인식하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사랑보다 깊은 상처 속에 있어야 되는데 자기는 멀쩡하다는 겁니다. 멀쩡하니까, 멀쩡한 인간으로서 볼 것 다 보면서, 보게 되면 자기가 선택하게 되어 있고. ‘나 천당 갈래, 나 예수 믿을래.’라고 본인이 선택해서 본인이 가게 되면 본인은 멀쩡한 사람이 되니까, 이거는 십자가 피가 의미 없게 돼버려요.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서 죽었는데 자기는 죄인에게서 빠져있는데요. 뭐. 그거는 결국 혜택이 없는 거죠.

 

어떤 모임에 가면 그런 사람이 있어요. 차타고 어디에 가려면 자기가 먼저 차타면 되는데, 자기는 안 타고 “타세요! 타세요!”라고 해요. 본인부터 타라니까! 본인은 안 타요. 꼭 이렇게 위에서 지도해야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제발 본인부터 타세요. 본인부터. 남 간섭질 하지 말고. 너나 잘하세요! 너나! 목사의 할 일은 딴 게 없어요. 자기나 구원받으면 돼요. 구원은 주님소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을 하나도 놓치지 않아요. 괜한 걱정을 목사가 하고 있다고요. 교인 빠졌다고 천당 가는 사람이 빠진 줄 알고 있어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실패로 끝나야 됩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레미야의 내용에 보게 되면, 나라멸망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정된 뜻이라고 보는 겁니다. 바벨론이 너희를 망하게 하거든 바벨론 그 뒤에 나오는 바사나라 왕을 메시야로 여겨라. 고레스에게 기름을 부어서 내가 메시야기능을 하겠다는 겁니다. 나를 망하게 하는 그 분이 메시야에요. 김정은이가 메시야인가?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 메시야에요.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 왜? 주제파악이 안 되니까. 자기가 자기 자신을 관리해서 지키려고 하니까.

 

지금 모든 계시는 선지자 쪽으로, 미래 쪽으로 바뀌었는데 아직도 자기는 현재에서 살고 있어요. 미래에서 메시야가 오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이 오게 되면 새로운 시공간이 나옵니다. 새로운 시공간이라는 것은 기존의 시공간에 갇혀있는 것에서 벗어나야 돼요. 그런데 히스기야는, 뭐? 15년을 더 살게 해달라고? 아직도 사태파악이 안 된 거예요. 더 살 이유가 없는 거예요. 문서선지자로 바뀌면서, 전에는 왕-백성-하나님(성전)이었던 이런 관계를 주님께서는 가위를 가지고 잘라버려요. 다 잘라버려요.

 

백성 잡혀가고, 왕 잡혀가고, 하나님 자체도 잡혀갑니다. 어디로? 바벨론으로. 하나님의 성소가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요. 하나님이 자기영광을 포기하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가지고 죽기까지 복종한 겁니다. 이게 주님의 프로젝트에요. 이게 계획이에요. 이게 복음이에요. 주님은 아파트 하나 없습니다. 머리 둘 곳이 없었어요. 그래도 하나님께서 기뻐하고 사랑하는 아들이에요. 하나님이 얼마나 변변치 못했으면, 자기 아들 집 한 채 마련해주지 않은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뜻입니다. 결혼했는데 전셋값도 못 챙겨주는 아버지. 그 훌륭한 아버지. 이건 좀 곤란하겠지만.

 

그게 참 믿음이고 자기 아들을 잡아 죽이는 게 하나님의 믿음인데, 우리는 워낙 믿음이 없어놓으니까, 말로는 “결혼했으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살아라. 숟가락만 있으면 되지.”라고 해놓고, 뒤에 가서는 “통장 줘라. 한 일억 오천이면 전세는 되나?” 워낙 믿음이 없어서, 워낙 믿음이 없어서 그놈의 혈육의 정을 끊을 수가 없어요.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천국에 못 온다고 했는데, 뭐, 천국 갈지 못 갈지는 그건 나중문제고. 지금은 그 자식한테 못 퍼줘서 난리에요.

 

큰소리는 치면서도 뒤에서는 못 퍼줘서 난리에요. 가만히 보면 뒤에서 쌀 다 퍼주고, 고기 다 주고, 마트에서 사먹으면 되는데 기어이 김장해가지고 올라와서, 아파트 영어로 되어 있어서 못 찾아가지고. 나중에 며느리한테 전화 왔는데, “어머님, 나 없는데 허락도 없이 왜 왔어요? 비밀번호 언제 알아놨습니까? 아들한테 알아냈습니까?”라고 따지고. 김장은 김장대로 해주고 욕은 욕대로 얻어먹고. 장 다 봐다주고 욕 얻어먹고. 애를 봐주면서 초콜릿 줬는데 그걸 알아가지고 “초콜릿 먹으면 아토피생기는 거 모릅니까?”라고 혼나고. 애는 봐주면서 욕은 다 얻어먹고.

 

참내! 봐준 값이 아르바이트 값보다 더 안 되고. 아이 봐주고서는 최저생계비도 안 나와요. 최저생계비도. 워낙 믿음이 없어서 세상을 떠날 생각은 안 하고 자꾸 여기에, 백성-왕-하나님(성전)에 엮어질 생각을 해요. 주님께서는 이걸 잘라버립니다. 바벨론을 이용해서 이걸 잘라버려요. 잘라버리면 이 바벨론은 뭐냐 하면, 바벨론 안에 앗수르, 모압, 암몬, 그리고 아람, 블레셋 등등의 모든 나라가 바벨론에 통합되면서, 바벨론이 세상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기능, 메시야적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앗수르와 히스기야가 일대일로 붙어요. 일대일인데, 그 내용이 이사야에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왕기하를 하면서 이사야를 봐야 해요. 이사야 안에서 이 히스기야가 어떻게 이해가 되는지를. 이사야 36장 1절, “히스기야 왕 십 사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취하니라” 그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이게 아까 열왕기하18장 13절하고 똑같은 이야기에요. 이사야에는 무지무지하게 길게 아주 상세하게 쭉 나옵니다.

 

그래서 앗수르 장군 랍사게가 아주 심도 있게 이야기를 합니다. “히스기야 왕이여, 당신은 세상 물정을 몰라도 왜 그렇게 모릅니까? 지금 모든 나라가 힘으로 구조개편을 하는 이 시대에 어떤 민족의 신도 우리 앗수르 제국의 군대를 이겨낸 신은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논리대로 이야기하겠는데, 당신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서 당신을 치라고 했기 때문에, 당신이 정말 하나님 앞에 순종한다면, 이 하나님의 사자로 온 이 앗수르 군대 앞에서 순순히 성문을 열고 순종하세요.” 이게 논리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인권이죠. 인권.

 

그래서 히스기야가 여기서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는지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신하들을 이사야에게 보냅니다(사37:1-2). 그런데 처음에 앗수르 군대가 와서 포위했다가 잠시 문제가 있어서 다시 가면서 사자를 통해서 편지를 보냅니다(사37:8-9). 그 편지가 사자를 통해서 그대로 전달되어서 그 편지를 앞에 놓고 히스기야가 기도합니다(사37:14). “하나님이여, 지금 저 앗수르 군대가 이런 조로 여호와를 조롱하는데 주께서 어떻게 대책을 세워주시옵소서”라고 할 때에, 이사야 37장 3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아, 시체뿐입니다.

 

시체가 살아있을 때는 185,000명이지만, 시체가 되면 전부 다 시체의 보편성입니다. 전부 다 하나의 시체들이에요. 동일한 시체들입니다. 이게, 죄의 보편성=죽음의 보편성=1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수가 아니고, 다수는 하나에 응축이 되고, 응집이 되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뭐냐 하면 히스기야가 앗수르 군대를 대적하면서 뭘 알아야 하느냐 하면 본인이 본인을 상대로 아직 버티기에 나섰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본인의 적이 본인이에요. 왕이라는 지위에서 안 떨어지려고 붙잡고 있는 본인이, 문서선지자가 한 하나님의 예언에 의하면 그것은 자기가 자기의 적이에요. 마지막 적은 납니다. 나.

 

기존의 나에서 안 떨어지려고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붙들고 기도하는 이 히스기야 왕의 이 지위, 세상적인, 세속적인 이 왕적인 지위를 제거하려는 것에 그 제거에 발악하면서 기어이 오너로서 왕답게 해보겠다고, 백성을 내가 지도해보겠다고 붙잡고 있는 이 고집스런 육적인 모습. 그 육적인 모습이 바로 “하나님 죽기 싫습니다. 더 살게 해주시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왜 살게 해달라는 히스기야의 기도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이사야 7장을 한번 봅시다. 거기에 아람나라의 르신 왕, 그 다음에 북이스라엘이 망하기 직전의 베가 왕이 있어요. 르신, 베가가 연합해서 누굴 치느냐 하면 유다를 포위해요. 거기다가 앗수르까지 와서 포위해요.

 

그러니까 유다는 사면초가입니다 아람 공격하죠. 북이스라엘 공격하죠. 앗수르 와서 공격하죠. 이렇게 공격할 때, 여기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6장 5절에 보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내가 망하게 될 백성들 중의 일원입니다.”라고 해요. 그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본 거예요.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 나라는 필히 망해야 된다는 그 언약의 고유원칙을 하나님은 드디어 실시하려고 합니다.

 

실시하려면 망하게 될 증거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람 왕 르신, 북이스라엘 베가 왕, 앗수르 왕을 보내서 유다 왕이나 백성이, 백성은 왕과 결탁이 되었으니까. 유다 왕과 백성이 어떻게 대치를 하는가를 보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 유다나라마저 싹쓸이 할 이유의 정당성이 확보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사야가 하는 말이, “아하스 왕이여, 하늘의 징조를 구하소서.”라고 하니까, 아하스가 하늘의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해요.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의 약속을 믿으세요.”라고 하니까, “나는 눈에 보이는 것만 챙기겠습니다.”라는 뜻이에요.

 

그렇게 할 때, 하늘의 징조가 눈에 보이는 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뭐냐 하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이사야 9장에 보면 그 임마누엘 안에 뭐가 포함되었느냐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담겨있습니다(사9:6-7). 이 분이 바로 전능하신 왕이요, 왕의 교체작업에 나서는 겁니다. 미래의 왕이 벌써 예고가 되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은 현재 눈에 보이는 왕은 제거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그 인간의 왕이 제거대상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백성들이 눈에 보이는 영웅을 구현하고, 영웅을 찾아서 자기가 그 영웅(지도자) 덕분에 덤으로 잘 먹고, 잘 살면서 이 땅에서 생존하겠다는,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겠다는 그 의식조차 화로다 망하는 대상임을 이사야가 알려주는 거예요. “제거당하라! 소모당하라! 떠나라!” 이게 이사야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준비되었다. 하늘에서 왕이 내려올 것이다.”

 

하늘에서 왕이 내려온다는 것은 처녀가 잉태하는 거예요. 처녀가 잉태한다는 말은 완전히 차별화입니다. 어떤 인간도 처녀가 잉태해서 아들을 낳은 적이 없어요. 그거는 유성생식의 법칙(암수 생식세포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개체를 만드는 생식 방법)에 어긋나는 겁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장차 진정한 마지막 영웅, 불멸의 나라 백성들은 뭐냐 하면, 처녀가 낳은 자식이라야만 그 천국에 들어가는 거예요. 처녀의 자식으로.

 

그러면 진짜 처녀의 자식이냐? 아니죠. 처녀라는 것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고. 임신은 환경에 불과하고. 잠시 태를 빌리는 것하고 똑같은 겁니다. 그게 아브라함의 언약입니다. 사라는 태가 죽었어요. 죽은 데서 자식이 태어나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하여 얼마나 미련 갖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죠. 그게 아브라함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마지막에 새 언약으로 구체화되어 우리 눈에 보이는데, 그게 예수 그리스도고, 만왕의 왕으로 오신 겁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겁니다.

 

다윗의 교체입니다. 과거지향적인 다윗은 끝나고,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다윗은 처녀가 잉태한 자식이라야 다윗의 자손이 되는 거예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그러면 처녀로 태어난 자식이 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처녀의 자식으로 돌변해서 천국에 입성할 수가 있습니까? 라고 질문이 저절로 나오죠. 그런데 그런 질문을 한다는 말은 기존의 내 육을 아직도 못 버리겠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못 버리겠다는 마음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도 무리한 요구죠.

 

너 자신을 부인하라는 것을 우리에게 하나의 제안으로 해버리면, 나는 내 자신을 부인한다, 내 자신을 부정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부인하는 거기에서 또 발생하는 이상자아를 무슨 수로 제거할 수가 있습니까? 나는 지금 마음을 낮추고 있다, 9시 10분 마음을 낮추고 있다, 낮추고 있다고 관찰하는 그 자아는 또 어디서 생긴 거예요? ‘그래, 낮추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지.’라고 한다면, 생각 안 하는지, 생각하는지를 판단하고 있는 자아는 새로 또 만들어야하는데요?

 

우리가 기도하면서 시간을 오래 끄는데, 기도내용을 뜯어보면 이런 잡생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도 끝내고 나면 다 잡생각 했어요. 자기 혼자 최면상태에 빠진 거예요. 나는 지금 부인한다, 나는 지금 모든 것을 버렸다, 나는 십자가에 죽었다, 죽었다, 죽었다, 죽었다... 근데 죽었다고 외치는 너는 왜 멀쩡하게 살아 있느냐? 문제가 해결이 안 되죠. 마음을 내려놓자, 마음을 내려놓자, 내려놓기, 또 내려놓기... 어떤 사람이 책을 지었는데 <마음을 내려놓기>라고. 근데 마음을 내려놓았는지, 덜 내려놓았는지, 그것을 판단하는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놓고 거기다가 제2의, 제3의 주체라고 갖다 붙여놓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건데요? 귀신을 속이세요. 어디서 도를 닦으려고.

 

이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한 기독교고 자기를 위한 신앙이잖아요. 그냥 자기를 좀 방치하세요. 방치하라고 하면 이게 또 명언이 되어서, 나는 방치한다, 방치한다, 방치한다가 되어가지고. 그냥 사세요. 그냥 막사시라니까요. 그냥 막사세요. 무슨 꼼수를 쓰고 있어요? 주체는 실체와 합치되지 않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내가 돌아가고 챙기는 것은 나를 위하여. 이 둘이 일치가 됩니까? 안 되죠. 백날 기도하고 헌금해도 소용이 없어요. 하늘의 징조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일관되게 하늘의 징조가 다 해버리는 겁니다.

 

히스기야는 자기가 더 살게 해달라고 해서 살았어요. 이사야 37장 8절을 봅시다. “보라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도를 물러가니라”라고 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궁전에 해시계가 있으면 거기에 계단이 있습니다. 계단의 그림자를 보고 몇 시 인지를 알려줍니다. 이 해 그림자를 십도나 거꾸로 한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이 지금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신기하다가 아니고, 기적이다가 아니고, 무의미하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지금 망하는 입장에서, 시간도 망하고 공간도 다 같이 망하는 겁니다. 시계가 자기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합니다. 새로운 메시야가 오고 새로운 신체가, 몸이 등장하게 되면, 십도 물러가고 당기고 하는 이런 번잡스러운 것들이 필요치 않은 거예요. 히스기야가 아직도 이 세상에 미련 갖고 자기 목숨에 연연하니까, 그렇다면 이 우주공간도 너의 몸 따라서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이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제 이거 폐기처분해야 돼요. 폐기물처분업자가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모든 것을 삼키는 바벨론이 나오고, 요시야 왕이 나옵니다.

 

다시 성경 열왕기하로 돌아가 봅시다. 히스기야가 열왕기하 18장에서 대단하게 했지만, 히스기야 못지않게 또 대단한 분이 나오죠. 요시야가 8세 때 왕위에 올라서 수렴청정 하다가,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다윗의 모든 길로 치우치지 아니하고(열왕기하 22:1-2). 이렇게 했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결국은 이 후손들이 바벨론에 잡혀갑니다. 바벨론은 뭐냐 하면 폐기물처리업자에요. 어차피 눈에 보이는 세상은 하나로 뭉쳐져서 전부 다 쓰레기처리업자에게 처리되는 겁니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진공청소기라고 합니다. 등번호 5번 김남일. 모든 것을 다 빨아먹는 진공청소기에요. 모든 나라는 바벨론에 다 집합하니까.

 

일대일이에요.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냐? 아니면 그 외 바벨론이냐? 바벨론에 살래? 하늘나라에 살래? 일대일로 대응하는 입장에서 그 작업을 이사야나 예레미야 문서선지자들이 합니다. 그래서 하늘의 징조가 모든 것을 그런 쪽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라고 되어 있고, 골로새서 3장 3절에,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땅에서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보관되었기 때문에, 땅에 대해서 미련 갖는 모든 것이 우상숭배며 탐심이 되는 겁니다.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우상숭배라고 할 때, 그게 왜 우상숭배일까? 라고 하는 것은 구약을 공부할 때, 우상을 섬기는 것과 땅이 멸망한 것과 결부시켜버리면, 우상숭배가 어디서 나오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땅에 대한 집착에서 나오는 거예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거기에 집착해서 그런 거예요.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는지라”(히11:16). 우리의 본향은 여기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분명히 믿음의 선진들이 보여줬던 겁니다. 그 모습 자체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고.

 

왜 그러냐 하면 주님께서 하늘에서 왔다가 땅을 경유해서 올라가므로 말미암아 길을 만들었어요. 이 길 따라서, 하늘의 엘리베이터라고 보면 돼요. 이 길 따라서 가는 거예요. 딴 길로 가면 안 되고. 다른 딴 길은 없어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요14:6). 예수님이 만든 그 홈이 파인 길. 홈이 파인 길은 이 세상에서는 없는 길인데 성령을 통해서 보여줄 때만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인디아나 존스 제 3탄, 최후의 성전-‘잃어버린 성궤를 찾아서’에 나옵니다. 마지막 장면에 성궤가 있는 동굴에 가는데, 계곡이 저쪽으로 건너갈 수 없도록 벌어져있습니다. 가는 길이 없습니다. 뛰어넘어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숀 코너리)가 그 성궤를 찾아 갈 때에 참고하라고 힌트를 준 성경구절이 뭐냐 하면 “니가 믿음으로 발을 내딛어라”는 그런 대목이 있어요. 그런데 발을 내딛을 수가 없어요. 절벽이에요. 허공이에요. 주인공 해리슨포드가 지금은 늙었지만 그때는 젊었어요. 벌벌 떨면서 안 되는데 하다가, ‘그래 죽자!’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딱 내딛으니까, 거기서 똑같은 바위색깔의 다리가 나왔어요. 그래서 해리슨포드가 건너가고 난 뒤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참고가 되게 하기 위해서 흙먼지를 확 뿌리니까, 비로소 보이지 않는 곳 위에 흙먼지가 덮여서 보이는 다리가 된 거예요.

 

감추어진 보이지 않는 세계에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만 흙먼지가 되어가지고, 그 십자가 피로 걷는 사람은 천국에 도달될 수가 있다 이 말입니다. 이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뭐, 영화 하나 보고 은혜 받았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 피가 뭐라고! 사실은 그 피 밑에 이 땅에 왔다가 무사히 다녀가신, 성공하신 분, 예수님의 흔적이 있잖아요. 흔적은 증언이 되어야 해요. 흔적이 흔적으로 끝나면 역사에 파묻힙니다. 이게 증언이 되어야 해요. 증언이 될 때, 성령께서 와서 증언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늘에 속한 백성으로서 아직도 이 세상에서 같이 살고 있습니다. 망하라고. 망해버려라. 잘 망해버려라.

 

그래서 요시야 왕이 그렇게 잘 했어도 결국 바벨론에 몽땅 잡혀가는데, 1차포로, 2차포로, 3차포로 때, 다 잡혀갑니다. 그러면 요시야 왕이라는 그런 훌륭한 왕이 마지막에 등장해야 될 이유가 없잖아요? 다 망할 때 왜 등장해요? 그것은 바로 말씀 발견입니다. 힐기야가 성경책을 찾습니다(왕하22:8). 말씀입니다. 선지자는 “장차 이 말씀은 인간이 아무리 개판이라도 절대로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되지 않는다. 너희들이 아는 그 이스라엘이 아니고 오실 분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온 것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발견하고 그 말씀의 가치를 진행시켜버리면 세상의 그 와류(물 따위가 소용돌이치면서 흐름)속에서, 말씀이 진행하는 그 양적으로 어떤 변동이, 어떤 변화가 생기는데, 어떤 변화냐, “세상의 모든 육은 풀이요 그 영광은 들의 꽃 같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설 것이다”(사40:6-8). 이게 로마서 9장에 가면 사람의 행함으로도 구원받지 못하고, 사람의 뜻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창조부터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사랑받을 자는 사랑받고 저주받을 자는 저주받아야 된다는, 그 하나님의 고유의 뜻은 변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못하지만, 주께서 친히 왔기에 친히 오신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갑니다(로마서11:36). 어느 누가 받쳐서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충성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먼저 드려서 그 대가로, 보상으로 구원을 챙기겠는가. 그런 것은 아예 없다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기도를 하든, 뭘 하든 간에 뒤에서 떠밀어서, 성령께서 떠밀어서 너로 하여금 이렇게 성도되게 하는데 차질 없이 진행된다는 말씀을 믿으라는 이 말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작동하고 완성하고 십자가가 작렬해서 우리는 그냥 껍데기에 불과한 거예요. 그 껍데기를 위해서 우리는 공부를 해야 하는데, 구약에 나오는 우상숭배자, 망치는 자, 뭐 배반하는 자가 나오는데, 그것이 지금 우리가 육을 갖고 이 세상에서 살면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걸 세자로 배설물이라고해요. 계속 나와요. 끝도 없이 죽을 때까지 계속 나옵니다. 심지어 치매 걸리면 더 많이 나옵니다.

 

오직 죽을 때까지 자기밖에 모르는 그 모습 앞에서 우리는 뭐라고 해야 합니까?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 받기만 했을 뿐. 그래서 미안해. 나 같은 존재(여자)를 왜 사랑했는지...” 그렇다고 떠나면 안 되겠지만. 왁스의 ‘화장을 고치고’라는 노래 가사에 나옵니다. 여러분! 화장을 고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행위의 보상을 떠날 수 없는 우리 자아를 성령께서 일방적으로 파괴하시고, 새롭게 취급하시고, 그 속에서 망해야 될 수밖에 없는 우리 존재를, 예수그리스도의 새로운 잉태치 않는 분의 영으로 주님의 속한 백성으로 만들어주시니 이것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만방에 가면 갈수록 우리 죄와 더불어서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