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진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박윤진)2006.11.16

아빠와 함께 2013. 1. 28. 11:15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 
박윤진   2006-11-16 07:40:58, 조회 : 98, 추천 : 7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다!(고후 13:10 하)

 

사도바울은 여러 곳에서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쌩뚱맞은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강함을 자랑합니다.

치열한 경쟁과 높아져만 가는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유없는 목적이

더 강해져야 한다, 더 알아야 한다, 더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를 부추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생존을 가장 확실하게 편들어 줄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가족조차도 자신의 강함을 위해서라면 살해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은

철없고 글 좀 쓸 줄 아는 아이의 낙서 같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강함'의 적(敵)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존을 가장 확실하게 위협하는 존재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도대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 까요?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후 13:9)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이르신 말씀이 엄연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바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하신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바로 내 은혜가 족하게 된 유일한 이유가

"내 능력의 약함에서 온전하게 하신 하나님의 강력"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내 은혜가 네가 족하도다 하신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내 은혜가 족하도록 열심히 움직여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결핍만이 생산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속성말입니다.

열심히 움직이고 발전하고자 하는 자에게 약함이 강함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열심이 부족한 강함을 낳고 부족한 강함이 더 부족한 강함을 부추길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여러 약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숨기고 개선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랑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이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는 방식으로만

자신에게 머무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에게, 그리고 성도에게 가장 약한 점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성도됨을 이야기 할 수 없는 정도로

나를 부끄럽게 하고 나의 존재까지 저주토록 만드는 그 약점이 무엇일까요?

주신 은혜 조차 덤석 받아 챙길 수 없도록 하는 그 약점!

용서해 주셨으니까 이제 누리자는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도록 만드는 그 약점이 무엇입니까?

성도에게는 이러한 약점이 있습니다.....

 

바로, 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을 잡아 죽인 장본인이라는 약점 말입니다.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는 약점!

 

하나님을 죽인 것은 이천년 전 어떤 로마병사가 아니라 바로 나라는 약점!

그런 주제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장본인임을 항상 거부하고 있다는 약점!

 

나는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한 장본인입니다라는 고백이 자신의 의가 될 수 있습니까?

이러한 실토가 나를 구원하게 해 줄 것이라는 계산이 성립됩니까?

 

살인범이 재판장에게 달려가

"내가 당신의 아들을 죽였으니 나 참 의롭지요? 벌하지 마시고 오히려 용감한 시민상을 주세요!"

라고 말하는 광경이 과연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에게 있다던 "예수의 흔적"은 자신이 직접 예수님의 몸을 찌른 창자국이요 못자국입니다.

그는 예수 죽인 장본인의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능력이 바로 그 곳에 머물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는 방식으로

또한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십니다.

 

살았다고 환호하는 성도를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시면서,

예수 죽인 장본인의 자리에 머물게 하시면서,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십니다.(고후 4:10-11)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의 새언약 방식입니다.

 

당신도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습니까?

당신이 살인자라는 피할 수 없는 증거물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인자라는 증거물인 그 십자가의 피로 용서받았습니까?

이상하지요? 하나님의 용서하심의 확증 또한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처럼 고백하는 것에 대해 무엇을 더 주저하십니까?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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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 
곽진계   2006-11-16 23:45:09, 조회 : 27, 추천 : 0

너무나 공감되는 말씀입니다.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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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이준   2006-11-16 08:53:42, 조회 : 128, 추천 : 4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연한도 없이 계속 복무한다는 말이 아니지요. 일정 기간 동안 국가를 위해 생명을 담보로 젊음과 열정을 고스란히 바친 봉사의 기간은 "영원"이라는 상징적 기간 속에 자타에 의해 언제고 추억되며 기려질 것이라는 여망이 담겨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문구입니다.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비해 그분들이 지니는 자부심은 사적인 장소든 공공장소든 여지없이 '언제고' 발휘됩니다. 죽을 때까지.
이것을 용인하기에 이 사회는 보무도 당당한 그들의 선글래스 너머 시선 앞에 주눅이 들기도 하는 것일테지요.

그렇다면, 사건으로서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 사건의 효력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죽으신 것은 한 번이나 죽이시는 효력은 지속적이라는 점입니다. 그 죽으심에 동참된 자가 그 효력을 언제고 의식하느냐의 여부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십자가는 기존 인간상에 대한 죽음(끝장, 종말)을 결정지은 단회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분께 의해 포획(예정 선택)된 이라면 어김없이 그 단회적 죽음이 띤 성격의 끊임없는 '대상'이 됩니다. 그 죽음성의 작용이 포획된 자의 입장에서, 의식적으로 감지되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좋은 물고기냐 나쁜 물고기냐를 최종 감별해내는 권한은 선장님(포획하신 분)의 명을 받아 실제 포획 작업에 투입된 선원들(천사들, 마 13:49-50)의 몫입니다.
그물 안에 놓인 물고기들은 언제든 그물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방종'의 경향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본능이 없다면 포획 대상조차 되지 못했겠지요. 처음부터 살아 있는 물고기가 아니었기에...죽어서 둥둥 떠다니는 물고기를 누가 잡으려 하겠습니까. 또한, 그물은 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불가사리나 독을 뿜어내는 해파리 따위를 포획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물 속에 들어온 물고기'란 어디까지나 '그물 속에서 최종 운명을 맞이 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해 꼼짝 없이 '죽은' 목숨입니다. 그물 속에 들어온 물고기들은 더이상 자신이 살아 있는 듯 활개쳐도 선장의 입장에서 봤을 때 죽은 목숨임을 쉽게 감지해내지 못합니다.

이 와중에서, 어떤 이들에게 있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음'을 역설하는 것은 오히려 그물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몸부림이라는 역설적인 현상이 발생됨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현상입니다.

그물 안에 들어온 물고기들을 뭍에 끌어다 놓고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거기서 좋은 물고기냐 나쁜 물고기냐에 대한 구별 작업이 최종적으로 실시된다고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혹시라도 그물에 끼어 있는 해파리와 불가사리 따위에 대한 제거 작업도 아울러 실시됨은 물론입니다.

너나 없이 방종을 일삼으려 했던 물고기들 중에서도 운명이 엇갈립니다. 최종 결정(선택)의 몫은 물고기 자신도, 활어 시장 중개인과 상인들(이들 중에는 아래에서 언급될 도색자들도 포함되어 있음)도 아닙니다.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나아가는 여정에 동참된 것은 좋은 물고기만 있었던 게 아님을 아울러 유념하십시오. 또한, 좋은 물고기들로 여겼던 자신들도 가나안 정복 과정에서 우상 숭배에 빠져 좋은 물고기 아님이 드러났던 사실도 함께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현상들이 구속을 비롯한 언약적 섭리에 대한 예수님의 주도적인 활동을 보여주심과 더불어 인간 쪽의 실상을 여지 없이 폭로시키는 증거물들입니다. 그렇다면, 소위 '성령 받았다'는 신약 성도들은 다릅니까? 사도는 분명히 한 구약의 인물과 우리들의 성정이 같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약 5:17, 이러한 저의 언급은 해당 구절의 문맥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해당 표현이 지니는 폭넓은 의미를 이 글의 전개 과정에 적용시키려는 취지에서 입니다).
성정이 그 옛날 유태인과 같은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그 원래의 성정이 어디론가 사라지던가요? 그렇다면 성령의 능력만 필요하지, 그 성정을 띤 인간이라는 실존의 종말을 결정적으로 못박아버린 십자가 사건은 굳이 필요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하늘에서 능력만 내려주시므로 이런저런 말씀들의 요구사항을 실천해나가기만 하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물고기들의 '방종'을 보면서 마음이 상하여 모두들 좋은 물고기로 환원시키려는 안타까움을 여러 모로 실천에 옮기려는 처사는, 이미 선장과 선원들이 분류 작업을 끝내고 나쁜 물고기로 처리된 것들에게 색깔을 입혀 좋은 물고기로 둔갑시키려는 짓을 자기도 모르게 저지르고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될 것입니다. 마치 부새(민어조기)를 참조기로 둔갑시키려는 짓을 (의도적으로는 아니지만) 감행하고 있음입니다.
잇속 챙기기에 급급한 어시장의 일부 장사치들과는 달리, 칼빈과 그의 후예들은 참으로 순수한(!) 열정으로 이런 짓을 저지르면서 급기야 사람의 몸에서 피가 흘러나오게 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천재 신학자는 자신의 손으로 저술한 글귀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온 것이라 간주하면서, 그 옛날 자신이 공격했던 율법주의자들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과 똑같은 상황들을 자신마저 주변인들의 방종에 대한 거룩한 분노의 표시로서 폭발시켰던 것을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히려 이러한 모순적인 역사에 대한 고발 정신은, 성령의 분별력이 작용하는 일부 그리스도인들보다는, 상당수의 안티기독교도들의 뇌리 속에 서릿발처럼 살아 있습니다.

권면은 권면일 뿐, 그 권면이 어떤 물고기들에 있어서는 '좋음'의 등급을 '나쁨'의 등급으로, '나쁨'의 등급을 '좋음'의 등급으로 환원시킬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결코 양보하지 않으시는 선택 예정을 근거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 와중에서 권면은 좋은 물고기에게는 그야말로 권면의 몫을 효과적으로 반영시킬 것입니다(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 왜냐하면, 십자가 복음이 말씀하시는 물고기는, 물고기 자체의 질이 좋아서 좋은 물고기가 아니라, 선택된 물고기이기에 좋다는 판정을 받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자체적 품질이 좋아서 선택된 것이 아님을 상기하시면 될 것입니다.
아울러, 나쁜 물고기의 뱃살을 노랗게 칠한다고 해서(권면이나 명령법, 경고 같은 것) 좋은 물고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색 작업의 취지는 동종 업계에 종사하는 다른 이들에게 생존 비결을 공유하는 귀감(?)이 되거나(대표적인 것이 기성 교회의 성화 설교지요), 아니면 도색자 자체적으로 자기 생업 활동에 대한 만족감을 발생시키기에는 충분한 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선장님과 선원 분들의 피땀어린 작업을 우롱하는 결과를 낳는 것밖에는 안 됩니다.

두 명의 농부의 비유를 들어 볼까 합니다.
'아담'이라는 농부(와 그에에 속한 모든 농부들)는 자신의 농사 기술을 안내하면서 "잡초는 제때 제때 뽑아주어야 곡식들이 제대로 영그는데 필요한 양분을 빼앗아 먹지 않는단 말야..."라는 입장을 내보입니다.
이에 반해, 예수(라는 둘째 아담 딱 한 명)라는 농부는 "내 앞에 와서 이런 저런 농사기술들을 전수한 자들은 모두 엉터리야(요 10:8). 내가 하는 말만 맞다니깐. 일단 신경 끄고 곡식 추수할 때까지 잡초들도 무성하게 자라도록 놔둬. '그때' 가서 확- 뽑아버릴테니깐..."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들을 대하면서 '십자가신학' 주변을 얼쩡거리는 나쁜 물고기들이나 잡초들과 조우하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중에도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었던 것처럼). 또한, '십자가복음'이라는 그물에 끼어 선장님과 선원 분들을 성가시게 하는 일단의 불가사리와 해파리떼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물론 이것들이 성가시게 한다 해도 이것들의 원래 역할이 그러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또 이들이 열과 성을 다해 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 줄수록 스스로가 물고기 아님이 보다더 활발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근래에 우리네 근해에서 포획된 어획량 중 상당수가 기대했던 활어들이 아니라 대부분 해파리였다는 사실을 고단한 표정의 어부와 몇몇 자료 화면들을 통해 TV로 접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또하나 어처구니 없는 일은, 물고기 자체가 나쁘고, 식물 자체가 (곡식 아닌) 잡초임에도 혹자는 ' 생뚱맞게 '그물' 탓을 하더라는 점입니다(정낙원 목사님의 지적이 맞다면 말입니다).
이들의 입에 곧잘 회자되는 '방종'이라는 단어가 소위 '이근호표 십자가 신학'이라는 '브랜드'(제 의사가 아니라 십자가신학이 담지한 내용을 십자가복음과는 거리가 있는 별개의 것으로 치부하려는 자들의 의식을 반영하여 굳이 표현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의 부작용으로 간주하려는 것은 참으로 그러한 어처구니 없는 발상의 극치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나쁜 물고기나 잡초 따위는 '십자가신학'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들 주변에도 얼쩡거릴 수 있는 자체적 활동성(아담 안에서 생래적으로 타고난 죽음성이 활개를 치는 듯 보이는 것)을 띠고 있습니다(쉽게 말해, 방종을 일삼는 듯이 보이는 자들은 '대구우리교회'나 여타 교회들이 소속된 '개혁노회'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근원적인 부분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물(여기서는 이른바, '이근호표 십자가신학')' 탓을 하는 것은, 그가 처음부터 동종 업계에서 종사하면서 20여년 동안 아담의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모진 풍랑과 세파를 함께 견디며 동고동락해온 형제(십자가에서 처절하게 피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함께 나눈)였을까라는 근원적인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자, 두서없는 이 글을 통해 몇 가지 비유들을 동원하여 작금의 상황에 대하여 다시금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제 여러 분들의 반응을 기다려 보겠습니다. 해파리, 불가사리 따위들의 어설픈 치고빠지기 식의 잡설들은 사양합니다. 그들은 여지껏 제가 올린 몇 편의 글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조목조목 논박하기 보다는, 이근호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어설픈 공격을 감행하면서 "이근호 추종자들의 글"이라는 도매금 취급이라는 일종의 변형된 '침묵'으로 일관해 왔기 때문입니다.
제 글이 그만큼 상대할 가치가 없는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제 글에 나타난 취지에 대해 논박할 용기가 없어서 일까요. 저의 이러한 사뭇 도발적인(?) 표현에 대해 발끈하시는 분(다시 말씀드리지만, 해파리, 불가사리들은 사양)이 계시다면 얼마든지 답글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들을 귀 있는 분들"은 들으시기 바랍니다.

해파리, 불가사리 따위들로부터 한때 '형제'라는 천상적인 취급을 받다가 '소경에 의해 인도되는 소경들' 중의 한 명이라는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이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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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김효은   2006-11-16 09:53:33, 조회 : 102, 추천 : 1

해파리, 불가사리 따위들의 어설픈 치고빠지기 식의 잡설들....
정말 적절한 표현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해파리 불가사리 들의 역할을 통해  십자가 복음을 더욱 더 선명하게 드러내시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요...

해파리, 불가사리 따위들의 헛된 속임수에 반박하는 복음의 글들을 대할 때마다 가슴이 저려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