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강-갈 2장 1-5절(복음의 자유)1801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2장 1절-5절입니다. 신약성경 303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2:1-5
“십 사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 하는 것이나 달음질 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이 편지를 쓰게 되면 그 때 사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무슨 취지로 이런 글을 남겼는지 선뜻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 성경 내용에서 단어와 단어가 연결이 되어야 되는데, 함께 한 디도라는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지 아니한 이유가 뭐냐 하면, 거짓 형제가 가만히 들어온 것 때문이라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그러니 이것이 어떻게 되느냐? 어떤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지 아니했는데 그 할례 행하지 아니한 그 내용과 거짓형제의 출현, 거짓형제라는 존재가 부각되는 것, 그 둘 사이도 현재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연결이 잘 안 되는 거예요. 할례 행하는 것하고 거짓형제가 갑자기 돌출하는 것 하고 무슨 관련성을 설명해줘야 되고, 그보다 더 어려운 이야기가 있어요.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거짓형제가 어떤 존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자유를 폐기해버리고 종으로 삼고자 하는 취지, 그러한 분위기형성을 시도하는 쪽이 거짓형제라는 거예요. 지금 이 세 가지를 다시 이야기할게요.
‘할례를 행한다, 안한다.’는 그 여부와 ‘우리 가운데 지옥 갈 거짓형제가 있다, 없다.’와 관련이 되어 있고, ‘우리 가운데 거짓 형제가 있다, 없다.’는 어떤 식으로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현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이 자유를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그것을 덮어버리고, 취소시키는 작전, 그런 작업을 획책하는 자들이 곧 우리 가운데 있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라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가 확 다가올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한테 관심이 있고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에 푹 젖어 있을 경우에만 “누구야? 이 자유를 빼앗는 게 누구야?” 이렇게 되는데 오늘날 우리 일상생활은 하나님 생각하고 사는 것이 아니잖아요. 돈 생각하고 살아가잖아요.
가족건강 생각하고, 자기 미래 생각하고, 돈 생각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고, 건강한 것, 안 아픈 것, 그것만 생각하는 우리들에게는 어쩌면 우리 자신이, 노골적으로, 시끄럽게 들어왔건, 조용하게 들어왔든 간에 우리 자체가 거짓형제로 분류될 수 있는 종류가 아닌가를 생각해 봐야 됩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우리 앞에 갈라디아서 2장 1절에서 5절이 펼쳐졌지만 이 펼쳐진 것이 ‘뭐야, 이거? 무슨 내용이야? 내 관심사 아니네.’라고 자기관심사에서 빗나가는 내용으로 적혀 있다는 사실, 이것은 낯설기 짝이 없는 그런 뜻으로 다가온다는 자체가 우리가 지금 정신을 엉뚱한데 팔고 있는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자칫 하면 들통 날 수가 있어요.
사도는 지금 몸이 달아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몸이 다는데 우리는 남들만큼 살려고 몸이 달고 있습니다. 남 따라 붙이려고. 그런데 복음을 위해서, 천국을 위해서, 영생을 증거하고 천국 보내기 위해서 몸이 달은 사도가 화를 바짝 내고 있는 겁니다. “어디서 천국 가는 사람을 훼방하려고 지옥형제들이 설치고 있어!”라고 화를 내는데 오늘날 우리의 삶은 ‘저분이 왜 화를 내지? 저분은 화낼 자리도 아닌 것을 가지고 화를 내고 있네?’
이렇게 남의 이야기 하는 것처럼, 다른 동네 이야기처럼 들려올 때 과연 우리가 이 본문 속으로 어떻게 들어갈 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 문제부터 먼저 거론되어야 돼요. 우리가 어떻게 사도가 갖고 있던 심각함, 사도가 갖고 있던 이 마음의 절실함, 어떻게 그 절실함이 우리에게는 빠져 있느냐는 말이지요. 맨날 날씨 추운 것만 생각하고 왜 이 절실함이 없느냐는 말이지요.
사도 보기에 우리의 모든 것이 다 사소한 일입니다. 사도가 보기에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은 심각하지 않은 문제고, 시시한 문제고, 우리에게 어떠한 낭패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것은 낭패꺼리도 안 되는 것들인데 우리는 그걸 가지고 울고불고 하고 있어요. 정말 중요한 것은 사도본인이 따로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우리로 성경을 보게 하셨으니까 바라기는 이 사도의 심각함이 이제는 우리들의 심각함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 설교 끝나고 난 뒤에. 2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여기에 현대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두 개 나옵니다. 세 개가 될 수도 있는데 하나는 ‘계시’라는 겁니다. 요즘 사람들은 계시 인정하지 않습니다. 현대인에게는 과학이 진리를 대신하기 때문에 계시라는 것은 일체 거부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성경을 보면서 어떻게 보느냐?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골라서 봐요. 내가 행함으로 가능한 것만.
그런데 성경에서 인간이 행함으로 가능한 것만 골라서 봐가지고 그것으로 성경을 관통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성경을 통째로 뚫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너무나 일방적이잖아요. 뷔페 주방장이 10년 걸려서 개발한 특별음식을 따로 마련했는데 사람들은 촌에서 올라왔는지 김밥만 먹고 진짜 주방장이 공들여서 만든 음식은 다 놓치고는 하는 말이 “야, 뷔페 음식 맛있더라. 김밥하고 찹쌀 모치 참 맛있더라.”
유튜브에서 보니까 뷔페 가서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이 찹쌀모치하고 회라는 거예요. 다 중국산이라는 거예요. 진짜 주방장이 공들여 만든 음식은 먹지도 않고 “맛있더라.” 하면 이것은 뭔가 잘못된 거예요. 성경을 보면서 ‘그래, 하나님 믿는 사람이니까 지켜야지.’ 해놓고 자기가 행할 수 있는 것만 뽑아가지고 ‘성경 지켰다.’ 이렇게 나오면 이게 반칙 아닙니까?
그래놓고 ‘나는 성도다. 나는 거룩하게 살았다.’ 이게 무슨 일방적인 주장입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성경을 예로 들 테니까 행해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2장 41절에서 44절까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아줌마 둘이 임신을 했는데, 아줌마는 가만있는데 태중의 애들이 서로 먼저 알아보고 태중에서 뛰어놀고, 기뻐하고, 찬양하는 소리가 들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찬양은 엄마가 대신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애들이 그렇게 하더라는 말이지요. 이거 한 번 실제로 해볼까요? 애 임신하고, 그 다음에 만나서 서로 뛰어노는지.
우리가 못하지요. 못하니까 이걸 빼고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누가복음 2장에 목동이 하늘에서 천사의 찬양소리를 듣지 않습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것은 안 들었으니까 빼고 그냥 넘어갑시다. 이렇게 이것 빼고 저것 빼고 다 빼버리면 그래놓고 무슨 성경을 알아요? 그쪽세계, 영적세계를 어떻게 알아요?
내가 가능한 것만 뽑아서 해놓고 최선을 대했습니다, 이런 비겁한 변명들은 하지 맙시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지켜서 대비하라고 경고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확정지어진 책이에요. 너는 이대로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 지키고 저것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너의 운명은 이미 확정적인 겁니다.
구약에서는 이것 하라 저것 하라가 되는데 그것은 실험용이고요, 신약에 오게 되면 이미 실험은 끝났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어요. 성전 줬는데 실패했지요. 십일조 하라고 했는데 실패했지요. 안식일 지키는 것 실패했지요. 실패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성공한 것이 없어요. 어떤 것도 성공 못했습니다. 모든 율법 지키더라도 하나를 어기면 몽땅 다 어긴 거예요.
야고보서 2장 1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랬으면 끝내야 되는데. 구약에서 사실은 끝나야 돼요. 그래서 몽땅 모든 인간은 지옥 갔다. 이렇게 끝나야 되는데 신약성경이 또 있다는 말은 “다들 지옥인지 알고 있지? 자, 이제부터 내가 건질 자는 건지고 내가 안 건지더라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라. 그것은 너희들이 마땅히 받을 처벌이니 원망하지 마. 자, 건질 자만 건지겠다.”
이것이 신약이에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하는 소리가 있어요. 어? 하늘로 올라가면서 “내가 이럴 잽이 못되는데? 저 사람과 똑같은 죄인인데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왜 저를 천국으로 데려가지요? 너무 가볍네, 몸무게가.” 이렇게 떠오르는 거예요. ‘왜 내가 구원받지?’ 오히려 구원받는 게 이상하고 천국 가는 게 날마다 이상한 거예요.
그럴 때 주님의 음성이 계속 들려오는 겁니다. 이것은 네 행동과 관계없이 확정되었기에 그러하다.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의 예정이 되었고 간택이 되었고 선택되었고 확정된 그 조치를 취하다 보니까 네가 당첨되었어.” 네가 당첨으로 구원된 것이라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세상에서 창피스러운 거 너무 창피스럽게 여기지 마세요.
구원 안 받은 것 보다 더 창피스러운 것이 없고요, 구원받았으면 모든 창피를 이겨낼 줄 알아야 됩니다. 사람들이 창피를 못 이기니까 사소한 일에 울고불고, 심지어 사소한 일에 자살까지 하잖아요. 아무것도 아닌 일에. 그중 한 사람, 신약의 복음의 의미가 뭐냐를 제자들보다 먼저 안 사람이 있었어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이 열 두 제자에 포함이 안 되어 있습니다. “열 두 제자에 포함도 안 되어 있는데 어디 건방떨면서 네가 제자들을 가르쳐? 예수님이 선택해서 제자삼아 3년 동안 따라다닌 그 열두 제자를 제쳐놓고 어디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려 해?”라는 비난을 사도바울이 온 몸으로 받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온 이야기에요.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그게 2장 6절에 나옵니다.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본래 어떤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라고 했어요.
그 유명한 자들이 누구냐? 그 열두 제자가운데 임원진들 아닙니까? 베드로, 요한, 야고보. 유명한 사람들이잖아요. 예루살렘에서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에요. 복음에 대해서 내게 배우라, 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말주변만 있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 사람은 앉은뱅이를 낫게 했다고 소문난 사람이에요. 물론 주님이 했겠지만 소문은 그렇게 도는 거예요.
갇혔을 때 옥문이 열린 사람입니다. 천사가 도와줬던 사람이에요. 많은 기적을 행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있다고, 그 사람을 건드리면 주님을 건드리는 것이라고 소문난 사람이에요. 그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유명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 그 사람들에게 안 배운다.”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나는 사람이나 누구에게도 배운 적이 없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전에 이야기했듯이 예수님한테도 배운 적이 없어요. 예수님한테 배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된 거지요. 예수님한테 배운 것 하고 예수님이 함께 계신 것과 달라요. 한 수 배우는 것하고. 본인의 움직임은 본인의 움직임이 아니에요. 주님의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사도가 왜 이렇게 유명한 제자들 그룹과 달리 혼자면서도, 열두 제자하고 맞상대하면서도 밀리지 않고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생각을 갖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시간의 정점을 찍고 반환점을 돌아서 시간의 마지막을 향하여 가는 사람과 마주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미 죽을 것 다 죽었어요. 죽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이 받은 심판에 함께 참여한바 되고, 십자가에 내가 함께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이미 정점을 찍었어요. 영원히 그대로 천국가도 돼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안 보내줍니다. 거꾸로 반환점 돌고 마주 오는 사람들의 율법해석과 모든 것이 다 밝혀진 복음적 해석과 어떤 차이가 나는지, 그 차이 속에서 예수님이 왜 피를 흘려야 되는지를 마주보면서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저쪽에서 시간을 향하여 거슬러 올라오는 사람들은 ‘구원 받아야지, 구원받아야지. 천국가야지. 천국가야지.’ “목사님, 어떻게 하면 천국 갑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영생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온 가족이 다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이런데 다 매진해서 성경해석을, 온갖 지킬 것 다 지키고, 성실할 것 다 성실하고, 순종할 것 순종하고, 교회에 충성하고, 말씀을 지킨다면서 체크하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미완료된, 이 성경이 하나의 경고인줄로 착각하는 사람, 성경말씀이 “너 이거 안 지키면 지옥간대.” 이런 경고용, “예, 알겠습니다. 정신 차리겠습니다. 기름 준비하겠습니다. 달란트도 썩히지 않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 살리기 위해서, 심판에 대비하기 위해서 666바코드 안 받는 그런 식으로 자기 살기 위해서 허겁지겁, 안절부절, 마귀에게 늘 시달리면서, 쫓기듯이, 불안불안 하면서, 두려움 속에서, 공포 속에서 살아오는 그 사람을 사도바울은 이미 정점을 찍고 마주보면서 그들에게 다가섭니다.
“나 정답 알거든. 나 정답 알고 있어.” 그게 바로 자유라는 겁니다. 이게 자유에요.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 그들이 바로 지옥가고 있는 자들이라는 거예요. 지옥 가는 모습이 뭐냐? 천국 가야지, 라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지옥 가는 사람들이에요. 정작 사도바울은 이미 천국을 찍고 천국 된 신분으로서 파견근무 합니다. 본사에서 파견했거든요.
요새 본사파견근무 문제 있지요? 본사에서 파견해서 그들의 짓이 무슨 짓인지 아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이거예요. “하지 마라. 그 ‘하지 마라’가 안 되지? 그렇다면 내가 말 바꿀게. 해라. 의미 없다.” 이겁니다. “하지 말라. 구원은 안 해도 돼. 천국은 아무것도 안 해도 가. 그런데 안 되지? 왜? 육이니까.”
육은 아무것도 안하게 되면 본인이 못 견뎌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말을 바꿉니다. “해라. 하는데 그것은 의미 없어.” 성령께서 그걸 없애버려요. “그걸 박살내서 무너뜨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정점을 찍고 뒤돌아서 마주 오는 것과 그 차이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 차이 중 하나의 결과물로 누굴 데려가는, 사도바울이 디도라는 사람을 데려갑니다.
디도라는 사람이 나중에 그레데의 목회자가 되는데 바나바와 디도와 사도바울과 첫 번째 전도여행을 하고 난 뒤에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를 만나는 그 장면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13장에서 파견해서 전도하고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2년 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됩니다.
보통 AD 35년이라고 정리할 수 있는데 2장 1절에 보면 “14년 후에”라고 되어 있고 그 14년 후란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고 난 14년 후입니다. 전도하고 난 뒤에는 바로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갈 때 디도를 데려갑니다. 사도바울이 같은 구약을 보는데 다른 해석을 한 거예요. 무슨 해석이냐? “율법의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합니다.”
안식일 지키는 것, 십일조 하는 것, 전부 다 포함돼요. “전도하는 것, 기도하는 것, 제사하는 것, 예배드리는 것, 어떻게 예배드립니까, 어떻게 찬양합니까, 모든 것, 어떤 것도 그것으로 우리는 그것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합니다.”라는 이상한 구약해석을 내세운 거예요. 사람이 어떤 말을 할 때 기분 나쁜 경우가 어떤 경우인가? 다른 해석을 낼 때는 기분 나빠요.
왜 기분 나쁘냐? 지난 시간에는 많이들 못 오셨는데 지난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모든 언어는 명령어라고요. 왜 명령어가 되느냐 하면, 내가 말을 했으면 나를 인정해주고 나를 사랑해달라는 거지요. 그런데 내 해석과 다른 해석을 해버리면 동시에 다른 해석이 있다는 자체가 나에 대한 개무시로 여겨지는 겁니다.
“다른 의견 없지요?” 하는데 다른 의견 있다고 손드는 자체도 기분 나빠요. 인간은 원래 그래요. 나와 다른 의견 자체가 기분 나빠요. 아니요, 가 기분 나쁘다니까요. 사도바울이 전도하고 난 뒤에……,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배가 호숫가에 들어가면 배만 조용히 가는 것이 아닙니다. 배가 모터 돌려서 가게 되면 거기에 와류가 생겨서 변동이 생겨요.
사도바울이 전도여행 한 것은 맞는데 구원여행은 아니에요. 구원될 자는 구원되고 가만 있다가 ‘아,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지옥 갈 자를 지옥 가도록 드러내는 작업도 병행해서 이루어진 겁니다. 복음을 전하면요. 예수 믿는 사람이 구원 받는것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지옥 갈 사람도 티내게 되어 있어요. 사도행전 마지막 대목에 그게 나옵니다.
이번 여름수련회 사도행전 할 거예요. 사도행전 마지막에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행 28:26)게 되어 있어요. ‘교인들 안모이면 어떻게 하지?’ 교인들 모이기 위해서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태파악 하라고 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경고용이 아니고 확정이에요. 사람 행함보다 예언이 먼저입니다.
이번 수련회에 한 것 이야기해 볼까요? 유다에 여호람이 있었는데 엘리야선지자가 여호람왕에게 “너는 죽을 때 창자 터져 죽는다.” 이것은 경고용이 아니고, “알겠습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그게 아니고 너는 뭘 해도 창자 터져 죽게 되어 있어요. 과연 창자 터져 죽었어요. 그리고 여호람이 한 짓은 창자가 터질만한 짓거리를 예고에 따라서 하게 되는 겁니다.
미래가 확정되어 있으면 과거는 그 미래를 위해서 충실하게 따라가게 되어 있어요. 이게 신약시대에서 비로소 밝혀진 인간의 운명이고 팔자입니다. 팔자는 자기가 고치는 것이 아니에요. 운명은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운명이 아니지요. 그것은 따를 수밖에 없는 거예요. 따를 수밖에 없는데 운명의 종류가 하나밖에 없어요.
모든 만물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위해서 있는데 또 하나의 운명관이 있어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충성하고, 얼마나 순종하느냐 따라서 내 운명이 결정된다는 인식이 이미 사도이전에 세상에 쫙 퍼져 있었던 겁니다. ‘내가 결심하고 내가 선택하는 것에 따라서 내 운명은 만들어지고 확정된다. 내가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미래도 결정된다.’라는 분위기가 퍼져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만약에 어떤 벌판에 뭐가 있는지를 모르는데 똥파리가 시커멓게 덮여 있다 합시다. 제가 가서 ‘뭐가 있는데 이렇게 똥파리가 꾀었지?’ 하고 손으로 휘저으면, 그래서 거기서 십자가가 나온다면……, 제가 하나의 예를 드는 겁니다. 십자가가 거기서 나온다면 아, 십자가가 똥파리에 가려진거지요. 그 똥파리가 뭐냐? ‘인간은 자기가 하기 나름이다.’가 똥파리고 십자가는, 그것조차 이미 시효가 끝났다는 거예요.
모든 심판이 끝나버린 상태에서는 “누구야? 구원에 합격된 자가.” 그것을 찾으러 가는 것이지 “똑바로 행동해.” 그것을 찾는 것이 전도가 아니라 그 말이지요. 사도가 전도할 때 그거 한 거예요. 왜? 사도에게는 십자가가 있으니까. 주님이 있으니까. 가니까 똥파리가 왁 몰려와서 고소고발하고 난리 난 겁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첫 번째 사도회의가 있을 때에 사도도 아닌 게 사도라고 우긴다고 소문난, “사울? 저사람 누구야? 열 두 제자인 우리 본부에서 지정하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사도래. 뭣 때문에 사도지? 옆에 있는 저 디도라는 인간은 또 뭐야?” 할 때 따라온 사람들이 할례! 할례! 할례를 행하라고 자꾸 하는 거예요.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아무리 예수 믿어도 천국 못갑니다. 할례! 할례!” 할례를 행하라고 압박을 가하니까 사도바울이 여기서 “어이! 유명한 자들. 나 당신들 말 거부한다.” 그게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의도적으로 그들의 지시를 일시적이라지만 따르지 않았어요. 의도적입니다.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강요하니까 사도바울이 나서서 “이 사람에게 강요하지 마라. 왜냐하면 이 사람은 이미 모든 진리가 다 드러난, 확정된 그 사실에서, 그 결실물로, 주님이 십자가로, 다른 말로 하면 성령세례에 의해서 결과물로 나타난 이 사람과 너희들이 율법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하면서 그걸 유지하는 사람과 그 차이를 대조해보라.”
그 차이에서 십자가의 효과, 십자가의 의미가 드러나는 거예요. 십자가 피로만 충분해요. 충분하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치 않아요. 그런데 문제는 그 이야기를 내가 용납하지 않아요. 얼마나 우리가 육적입니까? 내가 용납하지 않고 있다고요. 할례의 의미를, 그들이 생각하는 할례의 의미와 이미 정점을 찍고, 마지막을 찍고 반환점을 돌아서 마주쳐오는 그런 해석가의 율법을 두고 두 개의 해석이 상호 충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떤 반지가 하나 있는데 그 반지 하나 낀 것 때문에 온 우주나 대자연에 변화가 생긴다. 이것은 영화 <반지의 제왕>이지요. 그 이야기 들으면 참 우리가 신나고 재미는 나지만 그걸 곧이듣는 사람은 없어요. “에이, 애들 듣는 만화 같은 이야기인데 재미는 있네.” 그 영화가 세편이나 되나 하지요.
또 머리에 핀을 꽂으니까 갑자기 뭐가 솟아오른다. 만화지요. 요술지팡이가 왜 있습니까? 요술지팡이를 가지고 신기한 일을 하니까 참 좋지요. 뭔가 하나 장착하고 뭔가를 새겨버리면 대자연의 세계를 내가 원하는 대로 맘대로 움직일 수 있고 다룰 수 있다. 참 우리의 소망이고 나에게 그런 반지나 머리핀이나 그런 요술지팡이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돈 나와라 뚝딱!”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돈이 막 생기고. “비트코인 나와라!” 하면 막 쏟아지면 좋겠지요.
모든 민족에서는 그것을 장난이라고 여기는데 유독 유대인들만큼은 장난이 아니고 “그게 너희들이 모르는, 무식한 너희들이 모르는, 특별한 우리 민족에게만 새겨진 특별능력이다.”라는 겁니다. 그것을 그들은 할례라고 생각한 거예요. 할례를 함으로 말미암아 대자연의 모든 변화는 할례라는 그 응집된 지점을 향하여 서로 연계되어서 돌아가게 되어 있다고 믿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할례를 행한 자만 구원받고 할례를 행하지 않은 자는 지옥 간다. 그들에게 크나큰 자부심이지요. 무슨 그런 자신감이 나왔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아무도 만나본적 없는 살아계신 하나님 여호와를 독대했어요. 2천 몇 미터의 그 시내산위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독대, 혼자 만나서 알게 된 천기누설, 심오한 비밀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이 유대인의 자부심이고 현재 그 자부심이 이스라엘 땅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그들이 여전히 살고 있어요. 그 자부심도 그대로 살아 있어요. 그들은 말합니다. “우린 인간 너희하고 상대 안해. 우리는 하나님하고 상대해.” 자 그러면 여기서 할례라는 것에 대해 한 가지 해석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법, 이 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만이 거룩한 백성으로 나중에 천국 백성 되고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는 구원,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백성이다. 하나 해석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석을 두고 사도바울, 사도되기 전의 사울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요. 율법에 흠이 없는 자였으니까 할례는 기본이고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사도바울을 만났다. 만나서 모든 것의 정점을 찍었어요. 모든 진리를 다 알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진리라고 우기지만 사실은 자꾸 하다 보니 진리가 뭐로 바뀌었나? 편리로 바뀌었어요. 편리하고 진리하고 구분해야 됩니다.
편리는 개인적인 문제고 진리는 보편성에 관한 문제에요. 사람이 교회 오래 다니다보면 나중에 십일조하고, 예배 참석하는 것도 진리가 아니고 편리가 되어버려요. 안가면 찝찝해. 사적인 몸에 익숙해진 거예요. 유대인들이 그랬던 거예요. 할례 하는 것이 편해요. 그리고 여호와 믿는 것이 편해요.
그런데 정점을 찍고 사도바울이 와 보니까, 너희들 속에 할례를 새긴 것, 창세기 15장에 할례 받은 자는 복이 있는 백성이라서 그들만 거룩한 백성이라 구원받는다고 그것을 복으로 해석했거든요. 사도바울은 할례를 뭐로 보느냐? 저주의 징후로 본 거예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율법가지고 해석을 할 경우에는 문자 그대로 복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하고 하나님 사이에 예수님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부터 출발한 해석, 예수님과 아버지가 알고 있는 해석을 사도바울이 성령을 통해서 부여받으니까 할례를 집어넣은 것은 복을 집어넣은 것이 아니고 유일하게 저주받을 이유를 새기기 위해서 대표적 집단으로서 유대인을 하나님이 선택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왜 저주받아야 되는가? 나는 왜 죽는가, 하는 거예요. 그것은 죄 값으로 죽거든요. 죄가 뭐냐? 율법이 가해져야 알아요. 율법은 누가 받았는가? 유대인들만 율법을 받은 거예요. 말씀을 받은 겁니다. 말씀을 받은 것은 이거 지켜서 구원받으라고 준 게 아니고 같이 지옥가고 죽으면서, “왜 지옥 가느냐? 왜 저주 받아야 되느냐의 그 이유나 알아라, 이것들아!” 해서 준 것이 이 말씀이에요.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이거 잘 들으면 구원받는다.” 하는 경고가 아니고, 구원의 어떤 기회를 주기 위해서 성경준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이 말씀에 대해서 왜곡된 해석만 내놓는 육 덩어리를 지니고 이 땅에서 사소하기 짝이 없는 것에 목숨 걸고 살아가고 있는 지옥백성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 몸을 사용하신 겁니다.
이게 얼마나 신나는 일이고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모르겠어요. 사도바울한테는. 유대인들한테는 죽이려고 달려들고 있고. 4절을 보면,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가만히 들어온 똥파리라. 요새 똥파리 굉장히 많아요. 온 교회 목사들이 전부 똥파리들이에요.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 이 단어는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에요.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것은 공간개념인데 우리가 아는 공간개념이라는 것은 내 중심의 공간개념이에요. ‘안’에 대한 설명을 어렵지만 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영화를 보는데, 예를 들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이런 고전영화가 있잖아요, 그 영화를 보는데 주인공 여자배우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질 때 가슴 아파요, 안 아파요? 가슴 아파요.
그런데 조연급배우, 다 같은 배우지요. 영화촬영 끝나면 같은 아줌마지요. 그런데 그 조연급영화배우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장면에서는 가슴이 덜 아파요. ‘너는 굴러서 팔 좀 다쳐도 그만이다.’ 그러나 주연급이 다치면 ‘어쩌지? 앞으로 영화 스토리가 어떻게 되나? 주연급이 다치면 안 되는데.’ 이렇게 되지요.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이 말하는 사랑이라 하는 것은 자기중심으로 고통의 양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누가 다치는가, 누가 아픈가, 그것을 통해서 평소에 뭐가 나에게 가장 소중한가를 양적으로 따질 수가 있어요. 그것을 통해서 내게 소중한 것을 알면 내가 지금 어떤 자리에 있는가를 알 수 있어요. 내가 어떤 사람과 사귀고,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에게 신경 쓰고 있는지 그걸 알 수가 있어요.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이라 하는 것은 고통의 양, 또는 부재의 자리가 마련될 때, 그 사람이 없어질 때, 눈으로 보여야 되는데 눈에 안보일 때, 연락이 안 될 때……, 세월호 그런 것 말이지요. 두 번 다시 통화가 안 될 때. 물에 빠져 죽었는데 통화가 되겠어요? 그럴 때 사람은 자기의 중심이 내려앉지요.
‘이래서 내가 사니 뭐하나? 살아서 뭐해?’ 유대인들이 왜 그렇게 할례를 귀하게 여기고, 왜 하나님을 귀하게 여깁니까? 그것은 정작 하나님이 마련한 중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이야기하면서 자기중심과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게 아니에요. 나를 너무나 지독히 사랑하기에 내가 나를 사랑한 만큼이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달라고 하나님께 갖은 충성과 노력을 다하고 말씀 지키려고 애를 쓴 겁니다.
이게 무식한 것이고 똥파리들에요. 그러니까 나와 하나님사이에 직통으로 통하는 겁니다. 이게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신앙관이에요. 오늘날 한국교회 보세요. 중심이 자기중심에요.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내용을 뜯어보세요. 내 애 잘되게 해주시고……, 하여튼 다 자기와 관련된 거예요.
심지어 어떤 분들은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을 작가가 죽인다고 하니까 주인공을 죽이지 않게 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조연급은 죽어도 되는데 주연급은 죽지 않게 하옵소서.” 왜 자기 나름대로 일방적으로 연극무대를 세팅합니까? 내가 운전하는 기차가 아닙니다. 내가 운전하는 차가 아닙니다. 내가 만든 세트장은 내가 죽고 난 뒤에는 그 세트장도 같이 허물어져 버려요.
내가 만든 현실관은, 내가 죽는 순간 그 현실은 없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무엇이 그렇게 심각합니까? 무엇이 그렇게 심각해요? <곡성>영화에 나오는 대사처럼 “뭣이 중헌디?” 무엇이 그리 중해요?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할례를 받은 특수한 민족인 것은 맞는데 그 특수한 민족이 구원받으라고 할례를 준 것이 아니고 왜 인간은 구원될 자격조차 없는가, 하는 거예요.
사람이 너무나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언제 드러나느냐 하면, 뭔가 일이 잘못될 때 자책을 해요. 뭐가 원인인지. 그 원인을 고쳐서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를 안 범하기 위해서 자꾸 자책을 하는데 여러분, 자책하는 그 심보를 분석해 보세요. 자책한다는 말은 뭐냐? 그런 실수를 안했으면 살만한 가치가 있는데, 라는 지독한, 독한 자기사랑의 표현일 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자책하지 말라는 거예요. 자책하는 순간 여러분 자유는 없어요. 마귀가 여러분을 조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릴까요? 성경에는 우리가 행해서 얻을 수 있는 어떤 것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구약 때나 이야기하라고 하세요. 신약에는 그런 것 없어요. 우리가 자책 안할 수가 없지요.
자책하는 순간 지독하게 나만 사랑한다는 것을 다시 티내는 순간입니다. 아, 사소하기 짝이 없는, 내가 산다는 것조차 사소한 일입니다. 내가 산다는 것이 사소한 일이라면 내 가족도 사소한 거예요. 이걸 어렵게 하면, 십자가라는 것은 내가 만든 현실이라는 세트장에 가둬둘 수가 없는 겁니다.
왜? 십자가가 들어오면 내가 수십 년 살면서 아름답게 만들어놓은 내 인생 박살내는 십자가에요. 여러분, 십자가를 아십니까, 정말? 어떤 책 제목 같은데요. 십자가는 매일같이 뭣이 중헌디? 하나님 보시기에 중한 것은 십자가가 중요한 거예요. 내 쪽에서 하나님으로 가는 쪽이 아니고 중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출발점이에요.
왜 확정되었는가? 우리는 빼놓고, 구원받은 사람 빼놓고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의논해서 끝난 거예요. 우리는 그 회의실 문에 서 있는데 “들어오지 마세요.” 해놓고 아버지하고 하나님하고 대면해서 “16번 빼고.” “알겠습니다.” “27번 집어넣어.” “예, 알겠습니다.” “36번, 이건 마지막 끝에 지옥으로 들어가야 된다.” “알겠습니다.” “48번, 그거 구원해야 돼.” 해놓고 “저도요!” 하면 “가만있어!”
문 열고 천사가 나와서 “회의 끝났습니다.” “27번, 48번, 천국입니다.” 짝, 짝, 짝, 박수쳐야 돼요. 이게 신약이에요. 그게 성령세례 받은 겁니다. 십자가가 오게 되면, 호명을 받게 되면, 예수의 이름이 오게 되면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부릅니다. 평소에는 자기 이름만 부르다가. 예수 이름이 오게 되면 자기 세트, 자기 현실관, 그게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 자책할 가치도 없는 거예요.
자기를 나무랄 가치도 없는 거예요. 거기에 반대되는 사람이 지옥 가는 사람인데 대표적인 경우가 가룟유다입니다. 가룟유다의 특징이 뭐냐? 마지막에 자기가 자기에게 형을 선포했어요. 나는 나에게 선고한다. 자살을. 이게 가룟유다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가룟유다처럼 극단적으로 나가지는 않지만 평소에 얼마나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형을 선고했습니까?
“너는 오늘 성경 석장 더 읽어. 기도할 때는 오늘은 꿇어앉아서 해야 돼. 어디서 그렇게 해가지고 복 받겠다고. 이렇게 하면 복 줄게.”라는 이 똥파리, 이미 주님 보시기에 심혈을 기울여서, 피를 쏟아서 만든 디도처럼, 할례 안 해도 구원받는 디도처럼 만들어놓았는데 이 똥파리가 계속해서 십자가에 새까맣게 달라붙어 가지고 십자가 없이 행함으로 구원받기를, 평생토록 우리로 하여금 교회 다니면서 시달리게 만들었어요.
우리는 거기에 좋다고 놀아났고. 왜? 우리의 살아온 습성에 맞으니까. 골로새서 2장에 할례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할례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미 완성이 되었다. 2장 11절에 보면,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아예 우리 손모가지를 잘라버려야 돼요. “하지 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더 이상 이 육의 행함에 대해서 더 이상 따지지 않으마. 너는 이미 죄짓게 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의도 없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너에게 기대하지 않으마.” 하고 십자가로 모든 것을,우리의 손을 잘라버리고 우리의 몸을 뭉개버리는 순간 우리가 지킬 수 있는 율법이 없기 때문에 14절에 보면,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우리를 대적한 증서, 종이, 율법체를 버리고, 제하여 버리고,
그 다음에 “승리하셨느니라.” 16절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맥추절이나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나 이런 것 가지고 너희들을 비난하지 않도록 너희들이 그것을 거부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것들은 다 그림자요, 예수 그리스도는 몸체다. 보이지 않는 몸체.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살아갑니다. 그러면 이러한 자세, 이러한 생활태도를 평소에 우리가 어떻게 갖추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보면 돼요. 아픈 것이 정상이고 안 아픈 것이 비정상이다. 몸살 걸리는 것이 당연하고……, 독감 a형 걸린 다음에 다시 b형 또 걸려도 괜찮아요. 그런 것이 정상인데 봐줘서, 많이 봐줘서 낫게 해주시고 또 건강하게 해주시는 거예요.
발상의 전환을 하는 겁니다. 착하기에 복 줘서 건강한 것이 아니고 나쁜 짓을 골라가면서 ‘오늘도 무슨 나쁜 짓을 할까’ 골라하는 인간에게 힘주어서 나쁜 짓 하게 하시고, 돈까지 벌게 하셔서 그것 가지고 네 맘껏 네 자랑질을 하게 하시는 그런 것을 아픈 순간 그 틈새에서 뒤돌아보면서 후회하네.
아, 아픈 것이 정상인데 안 아플 때 얼마나 자기자랑하고 내가 착해서, 믿음이 좋아서 안 아픈지 알고 얼마나 까불까불까불 거렸는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볼 때에 나올 것은 뭐밖에 없는가 하면, 감사와 고마움밖에 뭐가 더 나오겠어요.
그래서 제가 부탁합니다. 아플 때 감사하지 마세요. 이것은 되도 않는 연기를 또……, 아픈데 왜 감사가 됩니까? 제발 객기 부리지 마시고 아플 때 찡그리세요. 아플 때는 찡그리시고 아플 때는 하나님 앞에 원망하세요. 그리고 깨어날 때는 “죄송합니다. 객기 부렸습니다.” 하고 미안해하는 거예요. 세례 받은 우리는 연습용들입니다.
십자가를 보여주는 연습용. 어떤 분이 저에게 카톡을 보냈어요. 답변을 해줬습니다. 인간이 사는 목적은 내가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증거 하는데 누가 방해하는가? 내가, 지독한 내 사랑이 방해하는데 따라서 어떤 일을 해도 내 사랑이 방해하지 않는 일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간을 계속 살리는 것은 주께서 내 자랑하는 그 죄를 비켜가면서 계속 은혜 주시고 살려주시니 이제 우리에게 나올 것은 뭐냐? 싸인, 할례 받은, 죄인입니다, 하는 그 싸인을 바깥에 드러내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 안에서 구현이 되는 겁니다.
이제 십자가 이야기할 때는 “나 십자가 믿는다.” 자랑하지 말고 그 안에 뭐 있다? 내 죄, 죽을 때 까지 마찬가지에요, 나밖에 모르는 죄가 섞여서 만들어진 십자가다, 라고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시간을 거꾸로 거슬려서 세상을 마주 대하게 해 주옵소서. 역주행 할 수 있는 자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요, 주님, 성령이 주신 그 용기와 담대함으로 세상 어떤 일이라도 다 사소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 것을 저희들이 마음껏 자유가운데 외칠 수 있는, 디도 같은 십자가의 결과물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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