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 15장 18절(투자와 희생)171121a-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8절, 15장 18절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이렇게 되어있죠. 미움이란 말이 나오지요. 그런데 이 말 자체가 안되요. 세상이 너를 미워한다는 말이 왜 안되느냐 하면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는 자연과학적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이 과학적인 대자연을 세상이라고 봐요.
인간뿐만 아니고 원숭이 뭐 해서 산과 들 이런 것 모든 걸 포함해서 세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그 돌이 우리를 미워할리가 있습니까? 그렇잖아요. 해가 우리를 미워해요? 말이 안되지요. 그래서 세상이 너를 미워한다 할때에 이 세상이라는 그 뜻을 여기서 우리가 자연과학적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전체를 세상이라고 보는 개념을 바꿔줄 필요가 있습니다.
미움이 가능한, 미움이 가능한 어떤 집단 그것을 세상이라고 하자 이말이죠. 그럼 미움이 가능한 집단인데 여러분 자신 저나 여러분 자신들을 미워하는 집단은 없어요. 여기서 이야기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미워했던 집단, 점점 더 개념이 좁혀 가지요? 예수님을 미워했던 집단.
그런데 예수님이 떠나가버리면 예수님 자체가 우리속에서 사라져 버리면 그 세상도 동시에 같이 사라지죠. 왜냐하면 여기서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결부할 때 세상이라는 개념이 정립이 되니까. 지금 말이 참 어렵지요? 어려울 수밖에 없어요.
세상이란 뭐냐? 예수님을 미워하는 그 반대세력이 세상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버리면 뭐도 같이 날라가 버립니까? 미워했던 그 개념도 예수님이 떠나버리니까 같이 날라가버리고 없는거예요. 그러면 요한복음 15장에 세상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가 지금 규정할 수가 없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미움이라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미워했던 그 세력을 두고 이야기 하는겁니다. 그 세력을 예수님은 뭐라고 하냐 하면은 세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예요.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그런데 예수님이 만약에 우리 세상에서 떠나버리면 이것도 조직이 해체 되잖아요. 없잖아요. 그러면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계셔야 규정이 되는데, 예수님 떠나버리면 세상이라는 것이 없게 되고, 없게 되버리면 뭐가 안되느냐 하면은 요한복음 15장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이라는 것이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을 미워했던 그 세상이 계속 자기정체를 노출 시킬려면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집단이 또 생겨나야되요. 원리가. 집단.
예수님한테 사랑받는 어떤 특정 집단이 생겨 버리면 예수님을 미워했던 그 속성이 어디 가겠어요? 이번엔 누굴 공격 하겠습니까? 예수님에 의해서 사랑받는 그 집단을 공격 하면서 이 세상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항변적으로 드디어 계속 종속 되겠어요? 있겠죠? 종속 될수 있겠죠?
그런데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성경 해석을 이렇게 해야된다는 거예요. 뭐냐하면은 성경해석을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성경해석대로 우리가 그 연극에 출연, 영화나 연극에 드라마에 우리가 역할맡는걸로 출연, 역할맡는 것, 등장하는 것.
모든 시나리오는 말씀대로 돌아가요. 이 세상의 모든 풀이고 꽃이고 다 없어져도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했잖아요 말씀은. 그러면 말씀이 영원히 성립하기 위해서 우리는 뭐가 되냐하면은 출연진이 되는 거예요 출연진.
그러면 자, 우리가 있고 말씀을 지키는 것 즉 기존의 성경 해석식으로 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이유가, 내가 없어지면서 성경말씀도 지킨것도 날라가 버리기 때문에 이러면 안되거든요. 말씀은 지킨 사람 없으면 같이 날라가는 겁니까? 그런겁니까? 아니죠.
말씀을 지킨 사람이 있던 없던 간에 처음부터 세상을 말씀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있던 없건 간에 말씀은 다 그대로 말씀세계는 그대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중지됨이 없습니다. 이거는 멈추는게 아니예요. 계속 가는 거예요.
강물에 무슨 스티로폼 하나 빠졌다고 강물이 스톱하는 그런거 없잖아요. 강물은 그냥 밀어붙이고, 그냥 뭐 쓰레기통 빠지면 그냥 빠지는거고 관계없이 강물은 위에서 흐르듯이 말씀이 이렇게 하게되면 우리는 이 말씀을 말씀대로 드러나기 위한 출연진으로서 2017년도에 여러분들을 뽑아 세운겁니다. 뽑힌겁니다. 이 시대에.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 당시에 뽑힌 출연진들이고, 그리고 그 말씀은 말씀을 증거하는 자들은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모든 말씀은 누구를 증거하는거죠?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죠. 왜? 예수님은 창조주니까. 창조주를 증거하는 겁니다.
창조주를 창조해놓고 그 창조에 누가 했느냐를 알리기 위해서 이 세상을 이 대자연을 이렇게 말씀의 대자연을 만들 때 말씀으로 만든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과 이 우주 사이에는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습니까? 말씀으로 연결되어 되있다 말이죠. 말씀으로. 말씀으로 연결되어 있지요.
그 연결된 중에 지금 하나를 그 힘줄 하나 이렇게 힘줄 하나 딱 뽑듯이 우리는 그 중에 하나 뭘 뽑았냐하면은 요한복음 15장 18절을 뽑은겁니다. 연결된 그 뭉치중에 다발 그 근육다발중에서 한 연결을 이렇게 뽑은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하면 뭡니까? 우리가 말씀지킨다는게 성립 됩니까? 안됩니까? 우리가 말씀을 지킨다는게 성립이 안되지요?! 우리가 말씀을 지켜서 말씀이 되어 버리면 말씀이 자기 진행방향에서 사람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되는게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말씀 지키든 안지키든 관계없이 말씀은 예수님과 세상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키든 안지키든 말씀은 말씀대로 전혀 지장없이 말씀이 모든 것이 구체화 되고 현실화 되는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 성립이 되요? 안되요? 성립이 안되잖아요. 감독이 있고 연출자 있는데 왜 배우가 자기가 와서 시나리오 다 고치고 할 수 있습니까? 안되지요. 작가 있잖아요. 작가 있고 감독 있고 다 있잖아요.
작가 예수님, 연출 예수님, 감독 예수님, 다 예수님이 하시는데 우리는 그때 그때 마다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호출되고 출연된거예요. 뭐 계약금도 없습니다만. 그냥 부름 받아서 된거예요. 이 부름 자체가 사도바울은 그것을 계약금이라 해서 내가 부름받은 소명 자체를 뭐로보느냐 하면 상급이라고 본겁니다. 사도바울의 그 서신에 보면 나와요.
일을해서 상을 받는게 아니고 일을 맡긴 그 자체가 상이라는 겁니다. 일을 맡긴 그 자체가. 우리의 인식의 변화가 또 필요할 대목이죠. 사람이 일을하고 뭔가 다시 상급을 내가 또 따로 받게 되게 되면 내 존재가 계속 살아있어야 되고 그게 소유로서 증강되야 되요. 증가 되거든요. 그렇게 되면 이게 천국에 주님의 나라가 아니고 누구 나라 되느냐 하면은 내 나라가 되요. 내 나라가 된다고요.
따로 하나의 박스처럼 나만의 그러한 고유한 영역을 텐트처럼 쳐가지고 거기에다 무조건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천국 중에서 천국을 파트로 나눠가지고 이건 니 영역이고 자기 천국에 부동산 마련해가지고 이것은 나하고 나 가족들 천국중에서도 내 가족들 사는 곳이다. 따로 챙기는 셈이 된다 이말이죠. 천국이 그런거예요?
자기 영토 따로 가질수 있는 곳이 천국일까요? 아니죠. 왜 이유가 뭐냐하면 에덴동산에 낙원 에덴동산에 아담의 영역이 어디있습니까? 따로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아담의 영역은 따로 없어요. 아담은 주변에서 놀았어요. 중앙에는 따로 있습니다. 아담이 아니고 두 개의 나무가 중앙에 있었어요.
아담의 운명은 하와의 운명은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나무 선악과에 의해서 결정되는 겁니다. 생명나무 보호하기 위해서 아담과 하와를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과감하게 퇴출시키는 거예요.
하나님은 생명나무가 뭐 보다 더 중요하다? 인간보다 더 중요한겁니다. 이게 성경에 나오잖아요. 창세기 3장에. 도대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다고요? 말도 안되는 이야기예요. 하나님은 주 예수그리스도 아들을 사랑해요. 인간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인간은 나중에 예수님의 소원에 의해서 재림 가운데서 간택을 입은사람, 택함을 입은 사람들만 그 자들만 예수님이 사랑하는 조건하에 아버지가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있어요.
예수님의 영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속에 예수님의 영이 있는가를 보고, 예수님의 영이 있을 경우에만 그 사람으로 하여금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권한을 허용한겁니다. 로마서 8장.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누구도 뭐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예요.
사람이라는 말 하지 마세요. 사람이라는 말 앞에 조건이 붙어야되요. 그리스도의 사람만 사람이예요. 그리스도의 영이 임해서 그리스도의 사람만 사람이고 ,앞에 그리스도 빠지고 성령이 빠진사람은 사람이 아니므니다! 인간이 아니므디나! 인간이 아니예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평가나 인간의 반응이나 인간의 호응이나 그런데는 신경을 뚝 끄세요. 인간도 아닌 짐승이 뭐라고 궁시렁 궁시렁 뭐라는 거야. 이렇게 개무시하고 말아야지. 언젠가 제가 수요일날 그런 얘기 했잖아요.
사람의 그 평가를 개무시하지 않으면 신앙이 아니라고. 제가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지난 낮 설교에도 사람의 시선 같은 것 그것 의식하면 평생을 그렇게 남들 평가에 놀아나면서 평생을 그렇게 피곤하게 사느냐 이말이죠.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면 사람이 아니예요.
그리고 그런 사람은 성령을 받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고요.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성령을 받게되면 예수님을 주 시라고 이야기해요. 예수님이 자신의 주인이 되요. 예수님이 중심이고 자기는 변두리.
예수님이 감독이고 자신은 뭐냐? 그냥 감독에 호출당한 그냥 출연진이라고요. 출연진 이기 때문에 이미 호출당한 사람치고 자기 영광, 자기 명예, 자기 자존심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없어요. 왜냐하면 주인이 호출했기 때문에. 주인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되어있다고요. 주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이 평소에 살았던 것은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데, 출연하게 되면 이 영화가 되야 되거든요. 만약에 예수님한테 출연을 안 당하면 그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뭐를 만드냐 하면은 그 사람 나름대로의 자기 영화가 만들어져요.
영화 만들어지는 것을 이번 월요일날 대구 강의에서 이걸 뭐라했느냐 하면은 이것을 세자로 이야기 했습니다. 개인사. 개인의 역사예요. 개인의 인생 스토리. 인간은 어려분들이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들고 이야기 해보세요. 뭐가 나옵니까? 개인사가 나와요.
‘나는 어느 학교 나왔고, 나 대학은 공부 이렇게 했고 나 취직해가지고 이렇게 잘 나왔고 지금은 내가 연금 얼마 타고...’ 뭐 이런식으로 자식 5명 있는데 5명 다 잘키워서 하나는 지금 교수되고 내가 택시 탔는데 택시 운전사가 내가 알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 해요.
하나는 공무원 되고 하나는 교수되고 하나는 의사되고 이랬다고요. 누가 뭐라 했어요? 그래도 또 맞춰줘야 또 5500원 나왔는데 5000원만 내고. 맞춰주니까 500원 깍아주더군요. ‘아이고 훌륭하십니다. 잘 키웠습니다. 그 나이에 운전하시니까 70넘어도’ 했더니만.
모든 인간은 본인이 감독이고 본인이 연출자고 그래요. 본인이 주인공이고. 감독 아무개, 연출 아무개, 그런데 그 영화 마지막은 뭐로 끝나느냐. End. 끝이 있는데. 끝과 동시에 예수님의 이야기의 시작. 지옥 이야기가 시작되는 겁니다. 인간의 개인사.
그런데 만약에 성령이 왔다. 그 사람의 인간의 개인사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소급해서 보니까 이것이 누구의 영화냐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주인공으로 한 그 영화의 자신도 모르는체 어릴때부터 출연당하고 있었던 겁니다. 출연당하고 있었던 거예요.
성령이 오기전까지는 그걸 몰랐죠. 알고 보니까 성령이 오게되면 소급해서 과거의 지난것까지 소급해서 되돌아 보니까 다 이거 주님께서 이 때를 위함이다. 구원받기 위해서 천국가기 위해서 계속해서 거기서 이끌어 온거예요.
그래서 지난 오후설교 때 그런 이야기 했지요. 미래라는 것은 가보면 전부 다 과거 된다고 했어요. 미래를 산 만큼 그것이 어디에 누적이 되느냐 하면은 만약에 내일은 몇일 입니까? 11월 22일 이잖아요. 그렇죠? 22일이 딱 되게 되면 오늘은 과거가 되요.
또 23일 되면 22일은 과거가 되요. 그러면 그렇게 평생을 다 산다 칩시다. 그러면 쭉 모아논 것이 뭡니까? 전부 다 나 살아온 과거가 되지요. 그 모든 것을 과거로 과거라는 창으로 집어넣으시는 그 현재적 존재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이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지금 안죽고 살아 있으니까 과거 현재 미래를 따지지만 결국은 우리가 어디에 끌려가고 있는데, 어디에 끌려가느냐 하면 오직 영원한 현재는 예수님 만이 영원한 현재이고, 우리는 항상 그 현재 앞에서 지나온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결국은 그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일본을 가든 어디를 가든 마찬가지로. 결국은 우리는 어디를 돌아다녀도 결국은 주님이 만들어 낸 과거의 일부로서 인생을 끝내게 되지요. 끝내고 천국가면 영원한 현재에 같이 영원한 주님의 천국 현재에 영원히 동감하게 되면 거기는 시간도 없고 시간도 없어요. 영원한 복락을 누릴뿐입니다.
천국의 생활이 좀 지루하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이 들수는 있는데, 그것은 평소의 우리의 생활이 현재 과거 이렇게 따지다 보니까 지루해 보이는데, 예수님 한테 물어보세요. 예수님 천국 생활하는데 좀 많이 지루했지요? 물어보세요.
예수님은 전혀 안 지루하지요.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처럼 마음으로 바뀌어 지면 천국이 그렇게 지루하지 않고 늘 기쁩니다. 주님의 마음이 되기 때문에 늘 기뻐요. 그런 걱정은 안하셔도 되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지금 제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중요한 이야기인데.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요지가 뭐냐? 말씀을 말씀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 말씀을 구체화하는 재료들을 그 시대에 전부 다 뽑아낸다는 겁니다. 뽑아내는데 그 뽑아내는게 뭐냐하면 바로 여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미워한 그 미움이라는 것을 언급했어요. 예수님께서 미움.
자, 그러면 한번 물어봅시다. 예수님의 논리에 의하면 요한복음 15장 18절 논리에 의하면 미움이 없이 예수님을 사랑할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 논리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하면은 미움이라고 이야기 했잖아요 미움이라고.
그런데 예수님을 미워하는자가 누구라고 했어요? 세상이죠. 그러면 모든 심지어 12제자마저 12제자마저 전부 다 예수님을 부인했잖아요. 나 저 사람 모른다고. 그렇다면 예수님 홀로 미움을 받아요.
그러면 12제자들도 예수님을 부인했기 때문에 그들도 어디 속하냐 하면은 예수님을 미워한 측에 속합니다. 미워한 편과 한 통속 이예요. ‘당신도 예수님과 한패라며!’ ‘나 한패 아니야. 나 저 사람 저주한다.’ 라고 베드로가 이야기 했잖아요.
그만큼 세상의 세력이, 세상의 평가가 무서운 거예요. 살아온 몸 자체가 남들의 평가에 맞춰서 몸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 몸의 속성을 하루 아침에 딱 외면하고 떨칠수가 없어요. 살아온 가락이 그 가락이기 때문에 그래요. 살아온 가락이.
그러니까 모두가 예수님을 미워했으니까 그 중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뽑아내는 거에요. 이 세상속에서 12제자를 뽑아내는 겁니다. 물론 성령으로 뽑아내지만. 성령이 와야 그리스도 사람이니까. 뽑아내는 거예요. 뽑아내니까 결국 우리는 뭐냐하면 예수님을 미워했던 자인데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공식이 성립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성령이 왔으면 우리는 소급해서 자기 자신이 누구 인가를 알아야 되는데 ‘저는 예수님을 미워했던 육신을 갖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해야 되고, 예수님을 계속 미워하는 육신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지속적으로 계속 이 미움을 오히려 극복하면서 그것을 뭐로 바꾸냐 하면은 사랑의 근거로서 미움을 예수님이 가져가는 거예요.
‘니가 나는 미워했지만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나에게 가해자가 되고 나는 피해자가 되지만 피해자 입장에서 가해자를 일방적으로 나는 용서한다.’ 그게 죄 사함 아닙니까? 뭐 죄가 있어야 죄사함이 있지. 죄가 발생되야 사함이 성립 되는거예요.
그래서 천국가는 사람은 입이 100개라고 할말이 없는거예요. 어떤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계속 예수님에 대한 미움이 계속해서 튀어나오는 육신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육신이 천국을 가니까. 물론 천국 갈때는 육신이 바뀝니다.
어쨌든 그 육신 가지고도 주님의 사랑을 일방적으로 받고 있으니까 이거 참 입이 100개라도 할말이 없는거죠. 그렇다면 이 공식에서 어떤 문장이 형성되는지 그 문장을 한번 제가 길지만 한번 써 보겠어요. 그 문장을 제가 한 번 적어와 봤습니다. 굉장히 길어요. 긴데 길다고 해서 이해가 쉬운건 아닙니다. 한번 적어 볼께요.
내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는 조건하에 믿었는데, 믿었는데 는데 하니까 수상하지요? 믿었는데. /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았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면 더 이상 하나님께 내세울것이 뭐가 있습니까?
다시 한번 읽어 볼께요. 내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누가 알고? 이게 중요합니다. 누가 알고? 내가 안다는 거예요. ‘하나님 저 많이 사랑하고 십일조 하고 헌금하고 주께서 다 눈이 계시니까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못하리요. 귀를 만드신이가 듣지 못하리요. 지금 제 행동 다 알지요?! 얼마나 내가 순수하게 주님만을 사랑하는거 다 아시지요. 아 기분좋아. 주께서 내가 사랑하는거 알아 주다니.’ 조건하에 믿었는데,
이게 왜 중요하냐하면 내가 만약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내가 아는 것이 한 5년동안 알았는데 6년째 집안에 우환이 있어가지고 ‘이럴거 같은면 내가 예수 안 믿는다!’ 라고 내가 선언을 하고 베드로처럼요. ‘나 예수 안 믿어! 나 예수님 부인한다!’ 이렇게 했을 때 그 사람은 이것만 딱 끊어서 보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안다는 조건하에 예수님을 사랑했는데, 자기 힘으로 자기 뜻에 의해 결심에 의해서 ‘나 예수 안 믿어!’ 이러면 그 사람은 자기가 구원 된다고 생각하겠어요? 구원 안된다고 생각하겠어요? 안 믿었으니까 구원 안된다고 나는 지옥간다고 확신하겠죠.
왜?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 예수믿을라고 성경에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했잖아요. 예수님을 본인이 안다고 생각해요? 모른다고 생각해요? 내가 예수 믿는데 낸가 모를 리가 있습니까.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을 내가 알고 나만 알겠어요? 나만 아는데 주님은 모르겠어요?
주님도 알고 나도 아니까 지금 신앙생활 지금 정상으로 잘되고 있다고 지금 기분 좋았는데, 가정에 우환이 있고 뭐 세상만사가 자기 뜻대로 안되니까 자기가 화를 내면서 ‘내가 진짜 예수 믿으면 개다!’ 이렇게 나와버릴때에 그 사람은 자진해서 예수 믿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자진해서 예수 안 믿는게 되죠.
그럴경우에 그 사람이 뭘 빠트린겁니까? 뭘 빠트린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았을 때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우리를 구원했다는 사실을 빠트린거예요. 그러면 만약에 아까 선을 그어 놓았는데 (위의 내용)이것만 알고 (아래내용)이것을 모르는 사람을 결국 위에것만 아는 사람은 결국 뭡니까?
사랑하고 믿었다 하지만 그건 전부 다 사기죠. 불신자죠 불신자.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믿을려고 한다 말이죠. 얼마나 사랑 못하면 사랑한다고 그렇게 남한테 광고 광고 하겠어요. 남 들으란 듯이.
열심히 믿겠다는 것은 그 만큼 믿음이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제말은. 결국 이 긴 문장의 뜻이 뭐냐 하면은 ‘나 예수 믿습니다. 예수 사랑한다.’ 는 말 자체가 나는 엉터리 입니다라는 티를 내고 있는거라 이 말이죠.
이런 소리를 하니 기존의 믿는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못알아 듣지요. 못 알아 들어요. ‘아 믿어야지요. 하나님 우리를 만드신 분인데 사랑해야지요.’ 지금 이렇게 이야기 하잖아요. 문제는 내가 언제부터 사랑하고 구원 언제부터 믿었고 언제부터 사랑했다는 것을 누가 알고 있어요? 내가 아는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내가 아는게.
내가 알아버리니까 철회도 누가 해요? 믿는게 뭐다를 내가 아니까 뭐가 안 믿는것도 누가 안다? 내가 아니까 이게 믿는 것이고 이게 안 믿는 것이고 결정을 누가 하는 거예요? 본인이 하니까 결국은 하나님 믿는게 아니고 누구를 믿는거예요?
자기의 느낌. feeling. 자기의 feeling, 자기의 감정을 믿는거예요. 감정을 믿는 거예요. 정말 믿는 사람이라면 이 선 믿을 내려 가야죠. 정말 성령이 왔다면 밑에 내려가게되면 어떻게? 내가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하기 전부터 창세전부터 주님은 나를 구원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주께서 사랑한다는 그러한 출연진, 사랑해야될 출연진을 믿는자로서 뽑아 세우셨군요 라고 생각하는거예요.
그렇게 되게 되면 제일 마지막 문장 더 이상 하나님께 내세울것이 있어요? 없어요? 더 이상 내세울게 아무것도 없지요. 십일조 해서 구원받았다. 착한 일 해서 구원받았다. 순종해서 구원받았다 라고 내세울게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이게 뭐냐하면 바로 주께서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셨잖아요, 주께서. 주께서 하셨잖아요. 종인 주제에 무슨 대접을 받겠습니까? 벌써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주께서 나를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나중에 베드로가 그런 이야기 하잖아요. 그 고백이다 이말이죠.
그래서 선 밑에 위 아래 다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자체를 위해서 우리를 말씀이 진행되는데 안뽑아줘도 되는데 말씀이 진행방향을 향하여 뽑아서 그 다음에 나 구원받았다를 자랑질하라는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 15장 8절이든 9절이든 모든 성경말씀은 이렇게 지장없이 지금도 아무 자격없이 잘 지금 매끈하게 매끈하게 지금 흐르고 있습니다.
깔끔하게 아무 지장없이 진행된다는 거죠. 그러면 그 성령받은 성도의 특징이 뭐냐하면 걱정이라든지 근심이라든지 불안이라든지 두려움, 있을래야 있을 건덕지가 없지요. 근거가 없지요. 왜냐면은 내게 주어진 그 모든 상황이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 내게 주어진 일어난 모든 상황 그게 뭐냐하면은 성경말씀이기 때문에, 성경말씀.
내게 일어난 모든 성경말씀은 주께서 감독이 우리보고 그 역할 하라고 맡겨준 하나님께서 그걸 맡아야 우리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하면은 성경말씀이 실효성을 가지고 나올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것.
그래서 제가 이야기 하잖아요. 자기가 하는 일에 책임지지 말라고요. 졸음이 와도 할 수 없어요. 이건 주께서 말씀대로 졸음이 온거예요.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도다 뭐 이렇게. 그게 맞는가 안 맞는가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 그런 이야기 했지요. 사람이 걱정하는 것은 사람이 마태복음 6장 마지막에 나와요. 산상설교 6장 마지막에. 사람이 걱정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것인데 왜 이방인들이 하느냐 하면 무엇을 입을까? 내일은 무엇을 입을까? 내일은 무엇을 마실까? 내일은 무엇을 먹을까? 그것을 내일 되기 전에 미리 당겨서 걱정한다고 해서 걱정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도는 관심사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그 주인공이 누구예요? 누가 먹나? 내가 먹고 내가 마시고 내가 입어야 내가 주인공이 되잖아요. 이게 바로 이방인이고 불신자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도의 특징은 뭐냐하면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고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자기가 부름을 받은거니까 내일 염려는 내일 하고 오늘치 역할은 오늘 하고 역할 끝났으면 잠자는 역할로 들어가는 겁니다. 잠자는 모드로 들어가라 이말이죠. 밤되면 쳐자라 이말이죠. 이불 덮고 자라 이말이죠. 드라마 보지말고 12시까지.
밤은 자라고 있는거고 낮은 깨어나서 이야기 하라는 거예요. 성경말씀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말씀이예요. 그러면 이것은 말씀을 지키는 것이 되는 겁니까? 말씀이 우리를 가지고 움직이게 되는 거예요? 어느쪽이예요? 말씀이 우리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되죠.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볼때도 ‘목사님 뭘 지킵니까?’ 자꾸 지킬려고 하지 말라 이말이죠. 말씀은 지키는게 아니고 주께서 하라고 하시는 저를 가지고 사랑해주시는군요 라고 감사하고 영광돌리면 되요. 이게 피조물이 해야되는 것이 뭐냐하면 새삼스럽게 뭘 설치지 말고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초대교회 때 헌금내라고 하니까 아나니아와 삽니라가 헌금내야 하는데 뭐 집을 팔았는지 땅을 팔았는지 남들 베푸니까 자신도 하고 싶어서 작정한 헌금의 반을 냈잖아요. 그래서 둘다 다 죽었지요.
사도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 했어요. 니가 나를 속이는게 아니라는 거예요.이게 나를 속임이 아니고 니가 악마의 사탄에 속아서 사탄이 들어가지고 누굴 속임이라? 성령을 속임이라. 사람같으면 좀 속이면 어떻습니까? 둘 다 못난 인간인데. 문제는 사람 죽이고 살리고는 사람 속였다고 죽이고 살리는게 아니예요. 성령을 속였을 때 하나님에 대해서 도전할 때, 그 다음부터는 주님께서는 뭘 보여주느냐? 얼마든지 너를 지금이라도 죽일수 있는 권한이 주님한테 있음을 철저하게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한테는 죽는 역할을 맡겼습니다.
그것도 사이좋게, 하나 죽고 오래살면 그리워 할텐데 한날에 사이좋게 부부가 다 죽었어요. 살다가. 졸혼도 못해보고. 한날에 다 죽었습니다. 이유는 명확합니다. 둘다 성령을 속였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그 사건을 보고 깜짝놀랬지요.
깜짝놀래면 다행인데 만약 어떤 사람은 또 누굴 비난하겠습니까? 베드로를 비난할 가능성이 있어요. 베드로를. 실제로 고라 자손할 때 백성들이 누구를 비난하느냐 하면 모세를 비난하듯이 왜 그렇게 백성들을 이 광야까지 끌고 와가지고 왜 죽일려고 하느냐 오히려 모세는 주님이 시키는데로 했는데, 막 모세보고 죽일려고 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걸 보고 이거 다 죽이자 나서니까 모세가 중간에 끼어가지고 ‘하나님 다 죽이지 마옵소서.’ 이렇게 하고 있고, 백성들은 모세 죽이라고 하고 참 모세 역할도 참 보통 연기가지고는 못할 연기를 했어요.
하나님은 다 죽일려고 하고 모세가 ‘하나님 다 죽여버리면 다른 민족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다 불러 놓고 광야에서 다 죽였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살려주세요.’ 백성들은 모세 보고 죽일려고 하고.
이게 복음 속에 있을때나 이게 납득이 되고 어떤 공감이 되지요. 그들 세상살이 아까 자기 세상을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 개인사에 여기에 완전 푹 빠져 있으면요 이게 성경말씀이 하나도 느낌이 안 온다니까요.
하루 온종일 24시간이 반짝반짝 빛나는 자기 개인사 자기 개인의 인생사를 빛내기 위해서 거기에다가 온 정신을 다 팔아 버리면 이런 말씀을 말씀이 주는 느낌이 못 오지요. 개인사라고 하는 것은 누구를 의식하는 겁니까?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바로 타인의 시선이죠.
내 인생 너 못지않게 잘났어. 이런걸 과시하기 위해서 허풍 허세 떨기 위해서 남들 의식하면서 자기만의 괜찮은 개인사를 구축할려고 24시간을 거기에다가 아침 눈뜨자 마자 밤될때까지 그것만 생각하는거예요.
남들보기에 내 인생 어떻게 마감되야 아름다운 인생이 될것인가? 그런데 아까 남이란 뭐라고 했습니까? 남은 인간이라고 했습니까? 인간 아니라고 했습니까? 짐승이죠. 인간도 아니죠. 인간도 아닌것에 거기에 편승해가지고 그들이 뭐라 하는데로 같이 벌벌 떨고 걱정하고 근심하고 그런다 이말이죠.
자, 그렇다면 이제 무슨 이야기 할려고 쉬운 이야기 했냐면, 지금 쉬운 이야기 했거든요. 무슨 이야기 할려고 쉬운 이야기 했냐 하면은 이겁니다. 왜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미워하는 자 속에서 뽑아내는 이유가 뭐냐? 하는 겁니다.
질문을 다시 하겠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 따로 만들어 놓고, 이 사람들하고 제자들하고 예수를 미워했던 세상하고 좀 분리를 시키면 되는데 왜 제자들로 하여금 제자들도 예수님을 배반하는데 같이 동조하게 해놓고 거기서 뽑아내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그냥 우리가 제자되서 주님 사랑하면 되지 않겠느냐? ‘주님 최고입니다. 주님 끝까지 사랑하겠습니다.’ 이러면 될텐데 왜 미움이라는 절차를 꼭 거쳐야되는 이유가 뭐냐?
사랑은 죽음이기 때문에.
그게 어디 나오냐 하면은 14절에 나옵니다. 13절에 나옵니다.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15장 13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사랑안에 사랑을 톡 깨어보면 사랑을 하나의 열대과일 이라면 톡 깨어보면 그 안에 뭐가 들어있다? 죽음이 들어있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어느누구도 인간이 특정인 예수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은 뭐가 없다? 사랑이 없는 거예요. 사랑이 없다면 사랑의 반대말은 뭡니까? 미움이죠.
결국 뭐냐하면 인간은 주님을 미워하는 겁니다. 주님을 미워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난 주님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보세요,주님을 미워하는것과 같은 말이 뭐냐하면 나를 사랑하는 거예요.
나를 사랑하는 것이 곧 뭐다? 예수님을 미워하는 거예요. ‘어째서 그렇게 억지 논리를 폅니까?’ 하는데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그냥 죽은게 아니고 자살하신게 아니고 미움을 받아서 죽었기 때문에 그런거예요.
모든 진리에 근거는 오직 예수그리스도가 보여준 그것이 유일한 근거여야 됩니다. 예수님이 죽었다 자체가 모든 진리의 근거가 되야되요. 그렇게 되면 예수님처럼 죽지 못한 것은 전부 다 이것은 미움이 되는 겁니다.
그 미움이 되고 그 미움이 있는 한 통속이 뭐냐? 우리는 세상이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세상. 예수님께서 그렇게 규정하신거예요.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예요. 그래서 세상에 속했기 때문에 예수님만 등장 안했으면 세상안에 있는 자기들 끼리는 아주 친하고 사이 좋고 두레마을 하고 상부상조하고 계모임하고 너무너무 친하게 지내요. 아무일 없어요.
문제는 예수님이 여기 들어왔다가 나오면서 살해당했기 때문에 지금 사단 난거예요. 하나님보시기에. 그러면서 예수님 죽으면서 다 이루었다 했거든요. 모든 말씀을 다 이루었다 이말이죠. 이러한 외부적에서 새삼스럽게 알려주는 이 정보, 이 정보가 우리가 그걸 못들은걸로 여긴다면 그것은 예수님은 그냥 하나의 정치범에 지나지 않고 아무 우리 메시아도 아니고 구세주도 아니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버리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뭐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고 아예 사람이 아니예요. 그리스도의 성령이 오고 난 뒤에 오고 부터는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속에 훅 들어오니까 ‘뭐지? 예수님이 왜 죽었지?’ 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아! 내가 나 사랑하는 것 조차도 주님한테는 미움의 원천이 되고 미움의 진원지가 되는 겁니다.
요새 진원지 유행되지요 진원지. 포항 흥해라는 읍이 있어요. 그 읍에 얼마나 자주 갔는지, 그 읍에 보면 벌판이 있는데 그 벌판이 진원지입니다. 지진이 일어난 진원지. 예수님은 십자가가 이 세상의 모든 세상을 부정적 세상으로 흔들어 규정하는 진원지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다 한거예요, 십자가 외에는. 성령이 아니고서야 십자가를 알 수 없다고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옵니다. 2장 8절에 나옵니다. 니가 십자가를 이 세상은 십자가를 알았으면 죽이지 않았으리라. 십자가를 모른다는 말은 그들에게 성령이 안와서 그렇다.
이 말은 성령이 온 사람만이 십자가를 알게 되고 그 사람만이 뭐냐? 영에 속한 사람이다 라는 말을 고린도전서 2장 맨 끝부분에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거기에 나와요.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니면 모든 사람은 뭡니까? 육에 속한 사람이죠. 육에 속한 사람. 그건 이미 죽기 전에 이미 운명으로 결정 난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진도를 한번 더 나가 볼께요.
그러면 세상에 있는 예수님 때문에 생긴 두가지 마음, 하나는 뭐냐하면은 첫 번째는 우리가 방금 알았듯이 희생이죠 희생. 그러면 희생이 아닌 것은 뭐냐? 자기 사랑하는 것 뭐라하냐 하면 제가 이런 개념을 만들어봤습니다. 투자.
인간은 끊임없이 투자. 투자를 아까 동영상 찍을 때 했는데 ‘자기 지시적 순환 원리’ 자기 지시적 순환원리 손가락 가지고 자기를 지시하는거예요. 그러면 자기가 아무리 남한테 희생하고 뭘 하고 해도 그게 뭐냐하면
자기 지시적 돌아돌아 다니면서 부메랑처럼 휙 돌아도 결국 뭐로 돌어옵니까?
나에게서 난 것이 어디로 돌아와요? 나에게로 다시 회수가 되지요. 아까 그 저 유투브 할 때 두 번째 강의 했잖아요. 사랑한다고 결혼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 만큼 사랑했는데 너는 나한테 뭐 해 줬는냐? 이렇게 나오지요.
자기는 일방적으로 무조건 사랑한다고 한 그것이 휙휙휙휙 돌아가지고 결국은 뭐냐? 나만 쪼다 병신되었네. 전에 남자는 여자를 사귈 때 그렇잖아요. 20대 때 여자가 명품 사달라 뭐 해달라 뭐 해달라 커피 값도 니가 내라 해가지고 여자가 남자 다 해놓고 뭐 말 한번 잘못하게 되면 ‘이럴거 같으면 헤어져!’ 이런다고요.
그러면 이럴거 같은면 헤어지게 되면 남자가 해준게 저쪽에 다 넘어가 있다. 여자한테. 그러면 헤어지게 되면 그 순간 그 여자가 다른 남자를 만날 때 내가 준 가방들고 내가 준 시계들고 내가 준 옷 들고 백화점에서 사준 것 가지고 헤헤 거리면서 만날 때 그 꼴을 어떻게 봅니까?
그 꼴을 볼려고 하면은 그 꼴 마저 감사하다 뭐 사랑하기 때문에 뭐 헤어졌다 이렇게 나오면 되는데 그런 남자 있습니까? 그걸 뭐라고 한다고요? 자기 지시적, 자기를 겨냥해서 순환구조를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돌아온다. 이게 투자 원리입니다.
그래서 투자를 어떻게 하느냐 투자 논리는 제가 한번 미리 적어봤습니다. 투자논리는 이렇게 되요. 순서가 처음에는 무지에서 앎으로 나옵니다. 뭘 알아야 투자를 할 것 아닙니까, 뭘 알아야.
여자와 사귈 때 ‘실례지만 어느 학교 나왔습니까? 부모님은 계십니까? 오빠는 계십니까?’ 묻잖아요. 사랑은 알아가는 거니까. 그렇지요? 알아가는데 어떤 사람은 7년 어떤 사람은 9년 어떤 사람은 3개월 어떤 사람은 일주일. 미국에 라스베가스는 일주일하고 결혼식을 올린다 하던데.
왜 상대방에 대해서 알아야 되겠어요? 뭐가 되기 때문에? 투자 가치가 있는지 알아야 되기 때문에 알아야될게 아닙니까? 무지에서 앎, 앎에서 그 다음에 뭐냐하면은 거기에 대한 아는것을 획득을 해야되요. 소유. 소유자. 획득. 아는 것을 소유하는 겁니다.
소유를 하게 되면 소유가 늘어나면 뭐가 되느냐 하면 권력자가 되요, 권력자. 상대방을 알면 알수록 상대방을 그 사람을 내가 다룰 수 있고 내 손아귀에서 갖고 놀수 있다고 생각 할때는 자기가 갑이 되고 저 사람은 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권력자가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자기 종이되면 자기는 뭐냐? 자존자, 절대자가 되죠. 최고 절대자. 모든 인간은 다 그래요. 모든 인간은 자기한테 자기가 투자하는 식으로 살아가요.
이 투자를 누가 시키냐하면 부모들이 어릴 때부터 양육시킵니다. ‘놀지말고 공부 좀 해라. 놀지말고 공부 좀 해라.’ 자 그대로 하겠습니다. 누구 가정을 예를 드는건 아니지만. ‘공부 좀 해라 성적이 이게 뭐냐! 방학 때는 너는 학원 다녀야해.’
자, 무지에서 그 다음 뭐가 나온다? 앎이 되지요. 앎이 되고 그 지식에 대해서 어떻게 한다? 맨날 하는거 예습 복습을 해야지 그 지식을 정보를 내가 획득자 소유자가 되지요. 아는 만큼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 세상에서 안 만큼 그 만큼 많은 권력을 확보할수 있는 획득자가 됩니다.
그러면 어느 직장에 가더라도 그 직장에서 승진이 빠르게 됩니까? 어떤 가능성이 높아요? 최고 자리에 오를수 있는 절대자가 되지요. 그러면 부모가 어릴 때부터 자식을 이렇게 키웠다면 부모는 자기한테 자기 자식한테 뭐가 되요? 투자자가 되는 겁니다. 투자자.
어떻습니까? 뭐 전혀 이해안될게 하나도 없지요? 확실하게 이해 되시죠? 지금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희생은 약간 보류 했습니다. 없다칩시다. 없다 쳤으면 이걸 한번 지워보겠어요. 희생부분을 지워버리면 이것만 남는거예요. 이것만 남는 거예요.
또 예를 듭니다. 자, 어떤 사람이 자기한테 투자를 합니다. 자기 지시 순환적 이니까 투자를 합니다. 처음에는 성경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해요. 그러면 교회에서 제자훈련해서 알게되요.
아는데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더라.’ 믿음 하나 건지고, ‘믿었으면 염치 없지 구원받았으면 내놔야 될거 아냐. 십일조 해야 복을 받는다. 믿는 것은 예수 피로 십자가로, 이 세상에 복 받는 것은 십일조로, 또는 십일조 돈 없으면 기도, 그것도 없으면 봉사로 교회에 때워라.
그러면 하나님의 집을 섬기기 때문에 하늘나라 확장에 기여한 보람으로 하늘나라 상급을 챙길수 있다. 그리고 너만 잘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자식들도 잘된다.’ 라고 교회에서 이야기 하더라 이말이죠. 그리고 그런 사례들을 막 강단에 세워가지고 ‘역시 헌금 많이 했더니 30배 받는게 진짜 성경 말씀대로 그대로 되는구나.’ 해가지고 진짜 사람들 은혜받고 난리도 아니라 이 말이죠.
이게 믿음을 천국가는 정보를 뭐가 되요? 내가 획득하게 되면은 이 사람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천국 가는데 필요한 정보를 소유한 사람이 되지요. 그렇잖아요. 소유한 사람이 되죠. 소유한 사람이 된다면 자기가 교회에 20년 다녔는데 어떤사람이 새벽기도 2개월 짜리 왔다, 그러면 자기는 뭘 가르치겠습니까?
자기가 획득한 정보를 그 사람한테 가르치겠죠? 그러면 자기가 무슨 사명이 있는지 없는지 신학교를 갔다. 목사됬다. 안수 받았다. 그러면 교인들에게 집사에게 뭘 가르치겠습니까? 천국가는 방법을 가르치겠죠? 그러면 이 사람은 뭐가 되요? 그 교회에서 실력자가 되는 거예요. 실력자, 권력자가 될 수있습니다.
그리고 아는 만큼 천국 가게되면 적게 아는 사람과 천국 가게 되면 천국가도 높은 계급에 예수님 성전에 보다 더 3m, 5m 더 근접한 거리, 소위 임원진에 이사급에 가까이 갈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고 자기한테 성경공부하고 기도 열심히 하고 헌금 많이 했어 이런 어떤 하나님의 복도 많이 획득자 획득자, 소유 했으니까 이게 결국은 자기가 자기한테 뭐 한게 됩니까? 투자한게 되죠.
그러니까 교회적으로 종교적으로도 기독교 적으로도 투자가 맞는 이야기 이고 세상사는 것도 투자로 시작해서 투자로 마치고 영육간의 전부 다 개념은 하나밖에 없어요. 뭡니까? 개념은 오직 나 사랑이예요.
나 사랑한만큼 투자하는거예요. 그런식으로 성경을 100독 1000독하니 무슨 소용있어요. 이런식으로. 자기에 대한 투자개념으로 생각하는데. 10분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