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강-YouTube강의(복음문화재)1701121-이 근호 목사
오늘은 제 210강, 제목은 ‘복음문화재’입니다. 보통 문화재가 눈에 보이는 유형문화재가 있고, 또 눈에 안 보이는 무형문화재가 있습니다. 문화재라고 하는 것은 옛날에 집들이 그렇게 많더라도, 그 집들이 다 문화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시대의 성격을 대표할만한, 특징지어줄만한 그런 요소가 압축이 되어 있을 때, 집약이 되어 있을 때, 그 집 하나만 봐도 다른 집보다 그 시대를 설명이 가능한 그런 집을 문화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형문화재, 인간문화재 같으면 이거는 그 사람이 아니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기술을 이전해 줄 수 없는 중요한 사람, 그리고 나라에서 생활보조비를 대주고 거기에 대해서 전수할 기술자들, 제자들, 후계자들을 키울 수 있도록 나라에서 배려를 하죠. 역사라는 전통성이 이어가도록 나라에서 예산을 들여가면서 지켜야하는 것이 문화재입니다.
그러면 뭘 지키려고 하는가? 그것은 보통 국가에서는 나라 정체성이라고 이렇게 해서 그 나라가, 민족이라는 나라가 다른 민족과는 독특하게 다른 특징적인 요소를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로데오거리 지키려고 하는 것은 문화재가 아니죠. 그것은 다른 나라에도 다 있으니까. 이 나라, 이 민족을 대변할 수 있는 우리 고유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문화재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를 한 번 보자 이 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주인은 누구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숱한 사람들이 태어나서 죽고, 태어나서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시대를 대변할 수 있는 특징적인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특별히 거기에다가 담아서 남들하고 다른 독특한 인생을 살게 하죠. 이거는 무형문화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형문화재.
이 무형문화재를 가지고 선지자라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선지자를 특별히 기억을 하겠죠. 하나님께서 기억을 한다면, 그러면 그 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누구를 만나야 하냐면 하나님께서 집중해서 기억하는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야 됩니다.
이걸 구약에서는 선지자라고 하고, 신약에서는 성도라고 해요. 성령 받은 성도의 위상이 대단하죠. 하나님 보시기에 문화재입니다. 걸어 다니는 문화재에요. 서울 중심에 집들이 많지만, 언덕 밑 정동 길엔 아직도 남아 있는 게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이라는 거예요. <광화문연가>라는 노래가사에 있죠. 그 노래를 만든 작사가 이영훈씨가 언덕 밑 정동 길에 눈 덮인 교회당을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 하면 거기에 자기의 추억이 있고 기억이 있거든요.
하나님께서 성도를 만드시는데, 성도가 성도 되고 싶어서 성도가 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가 그걸 거부해요.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서 된 거예요. 결정해서 되는데, 그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헤헤거리면서 다시 자기 길로 갈 수가 없어요. 일본 소용없어요. 미국 소용없어요. 가더라도 주께서는 계속 거기다가 하나님의 기억을 담아버립니다.
그걸 예를 들면 이사야 20장 2절에 보면, “곧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이래 되어 있어요. 그게 어디냐 하면 애굽에 가서 해야 하는 거예요. 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 이래 되어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선지자 입장에서는 개인적인 행복 같은 것, 가정생활 같은 것은 애초부터 포기를 해야 하는 겁니다. 내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면 내 몸에는 뭐가 남아 있느냐 하면 나의 기억이 남아 있고 나의 추억이 남아 있잖아요. 사적이다 이 말이죠. 개인적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웃통 벗게 하고 신발 벗게 했다, 그것도 삼 년 동안이나. 남자들에게 있어서 참 삼 년 동안이라는 것은, 군에 갔다 온 사람에게는 영원히 꿈속에서도 다시 재현되는 아픈 기억이죠. 군에 갔다 왔습니까? 군에 안 갔다 온 사람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남성들의 영원한 트라우마에요. 빼앗긴 삼 년이거든요. 인생이 두 동강난 순간, 단절된 순간에 내 인생이면서도 내 인생이 아니고 강제적으로 갖다 바친 인생, 내 쪽에서 자꾸 밀어내고 싶죠. 그것을 추억하는 경험이 군대라는 겁니다.
근데 여기에 이사야 같은 경우에는 삼 년 동안 군대생활을 한 게 아니에요. 이거는 삼 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토록 선지자 노릇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무형문화재가 되는 거예요. 이사야에게는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기억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듬뿍 담겨있습니다.
그거는 왜 그러냐 하면 앞으로 이사야 신체에 일어나는 변화가 역사의 장래를 결정하는 겁니다. 그 시대의 미래를 결정하는 거예요. 성도라는 것은 뭐냐 하면 로마서 6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가 성도라고 되어 있어요. 로마서 6장에.
그렇다면 성도가 이미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에 살아있는 자라면 앞으로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의 저주에 의해서 다 죽게 된다는 사실을 성도를 통해서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그것을 유포하는 임무를 갖고 있는 겁니다. 앞으로 일본비자가 나올 때는 그런 임무로 받아들이세요.
어차피 이 땅은 불로써 멸망당한다는 것을 그 성도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는데, 성도가 성도 된 것이 본인의 뜻이 아니듯이 그 작업과 그 업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의 본인의 의지가 동원돼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 듣고 나는 믿습니다, 라고 한다고 해서 성도가 아니라 앞으로의 추이를 보자 이 말입니다. 앞으로의 인생을 살면서 주님께서 십자가복음 쪽으로 이끌면 성도고. 이 이사야처럼 되면 성도고. ‘십자가 괜찮네. 용서도 해주고. 나도 믿어야지.’ 이렇게 혼자서 믿는다고 다짐에 다짐을 백날 해봤자, 인생이 세상 사람과 똑같이 돼버리면 이거는 넓은 길, 멸망의 길로 가는 거죠.
하나님께서 다루셔야 되지, 본인이 하나님 앞에서 시험 치듯이, 수능 치듯이, “이거 정답이죠. 나는 이 정답을 고백합니다.” 이런다고 성도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성경지식이 그 사람의 업무를 방해하고 있는 겁니다. 지식이.
지식이 아니고 삶에서 나오는 고백이 나와야지, 성경 몇 장 몇 절에 있다는 그거 알아차린다고 해서 “아이고, 성도구나!”라고 다른 사람들은 속아 넘어가겠지만, 주님께서 속아 넘어가겠어요? 안 속아 넘어가죠.
이사야가 성경을 모르겠습니까? 구약을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사야가 선지자가 된 것은 바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천사도 만나고 주님도 만나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라는 고백도 하고, 그리고 실제로 이사야 20장에서 벗은 몸으로 벗은 발로 애굽에게 선포를 하는 거예요. “애굽 너희들은 나중에 포로 잡혀가는데 나처럼 벌거벗은 몸과 나처럼 신발도 못 신고 처참하고 비참한 포로가 되고 나라가 망할 것이다.” 그럼 애굽사람들이 “니가 어떻게 장담하는가?” “내 모습을 봐라! 내 모습이 당신들의 미래상이다.”
그렇다면 성도의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성도가 이 세상을 포기해야 되고, 탈출해야 되고, 나그네가 되어야 될 이유가 어차피 이 세상은 심판의 대상자로서 있는 세상이기에, 주께서 우리를 천국 데려가기 전에 그 속에서 활약하도록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211강-YouTube강의(사랑이란)1701121-이 근호 목사
제 211강, 제목은 ‘사랑이란’ 이런 제목입니다. 사랑이라는 개념이 성립되려면 혼자서는 안 되고 상대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쉽게 말해서 상대한테 홀딱 반한 것을 이 세상에서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홀딱 반했다는 뜻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분은 나이가 들어서 40대인데도 결혼 안 한 분도 있는데, 결혼하고 싶다고 그렇게 간절히 원하는데, 말을 바꾸세요. 결혼하고 싶다고 하지 말고 사랑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세요. 누군가에게 푹 빠지고 싶다고 해야 돼요. 그러면 누군가에게 푹 빠지려면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자기 자신한테 푹 빠지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아낌없이 헌신하고 아낌없어 희생할 때, 그 관계를 가지고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상대방이 그걸 가지고 이용하면 어떻게 하느냐? 라고 하는데, 상대방이 나의 이 헌신을 이용하려고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거는 아직도 자기 이익을 챙기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이라고 볼 수 없어요.
내가 한만큼 저쪽에서도 잘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죠. “나를 실컷 이용해도 나는 상관없어요.”라는 정도가 돼야 그게 사랑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결혼하기 전에 사랑해야 한다면 결혼도 한 번 다시 생각해봐야 해요. ‘꼭 그렇게 해서 결혼해야 되는가?’라고 한 번 생각해봐야 해요. 그 정도까지 손해를 보면서, 일방적인 손해를 보면서 그렇게 해야 되는가를 한 번 고려해봐야 되죠.
나이가 40대가 되었으니까 그런 것을 고려해본다고 하지만, 20대에 결혼한 사람은 둘 다 착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착각을 했고, 상대방도 나를 사랑한다고 착각을 했는데, 막상 만나보니 거래였던 것을. 흥정이고 일종의 상호이익을 위해서 동업하는 식이 돼버리죠. 사랑이라는 빌미 하에.
이 세상이 이렇게 사랑을 찾는 것은, 본인은 사랑할 생각 없이 일방적으로 그 이상적인 개념, 사랑을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고 싶은 그 욕망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에게는. 그러니까 거래가 되는 거예요. 나는 쪼끔 사랑할 테니 너는 나한테 많이 사랑해야 된다는 그런 노림수가 있어요.
그런 노림수가 없더라도 결과적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게 되면, ‘나는 바보 아니야.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고 받는 것은 쪼끔 받았다. 나는 이제 정신 차려서 더 이상 바보 되기는 싫어. 나도 챙길 것 챙겨야지.’ 이렇게 사랑한다고 해서 결혼해놓고 나중에 자기 이익만 따로 챙기는, 그게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세상에는 사랑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그 사랑을 원한다는 그것이 이제 골칫거리가 되는 거예요. 사랑이 없으면 사랑을 기대 안 하면 될 텐데, 사랑은 없다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누군가 나를 지독하게 사랑해주면 좋겠다는, 사랑받고 싶은 욕구는 또 생기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것이 욕망이 있기 때문에 매사를 참 비현실적으로 살아가요. 자기 욕심만 챙긴다 이 말입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환상이라고 합니다. 이 환상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절대자로 만드는 식으로, 그걸 ‘자기 지시적 순환’이라고 하는데, 나를 지목해서 끊임없이 모든 게 나 위주로 잘 돌아가기를, 내가 기대한대로 잘 돌아가기를, 현실이 그렇게 되기를 바랄 때, 그 현실은 환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경우에만 그런 뜻을 펼칠 수 있느냐 하면 본인이 세상을 만들면 돼요. 처음부터 세상을 만들 때부터 자기 지시적 순환 쪽으로, 내가 뭘 내놓더라도 나의 영광을 위해서 되돌아오는 식으로, 자기가 창조에 관여를 했으면, 나만 사랑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그만한 권한이 있습니다.
근데 어느 인간이 이 세상에 창조를 하는데 관여를 했습니까? 자기가 별을 만들었습니까? 달을 만들었습니까? 자기가 시간을 만들었습니까? 공간을 만들었습니까? 뭘 만들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욥보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내가 만들 때 니가 기여한 게 뭐 있느냐? 욥아! 한 번 대답을 해봐라.”라고 추궁하는 겁니다. “내가 다 판 짜고 내가 다 만들어놓은 마당, 무대에 니가 얼른 뛰어나와서 거기서 놀아날 뿐이지. 니가 인생 무대를 니가 만들었느냐?” 이 말이죠.
욥이 입은 있어도 할 말이 없죠. 유구무언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냥 인간하고, 친구들하고 대결할 때는 내가 잘났네, 네가 잘 났네, 라고 했는데, 막상 친구들이 퇴장하고 하나님이 등장하니까, 할 말이 없는 거예요. 만만한 게 인간이라.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는데, 자꾸 하나님 말씀 앞에 나오지 않고 만만한 게 인간이라고 자꾸 인간들 붙들고, 니 잘났다, 나 잘났다, 라고 하면서 인생이라는 것을 허송세월하고 있어요. 조금이라도 잘난 기분으로, 잘난 느낌으로 한 번 살아보겠다고 버티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이 세상의 어두움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두움. 그리고 요한일서 1장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하는 하면, 8절에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뭐냐 하면 요한일서라는 편지 자체가 우리에게 배달이 될 때는,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니가 너를 속이는 그 헛된 짓을 멈추라는 뜻입니다. 니가 맨날 너 자신을 속이는 그런 잘못된 짓은 이제는 이 말씀 앞에서 스톱을 하라는 겁니다.
이 요한일서의 편지가 배달이 되도, 듣고도, “난 안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이래가지고, “뭐 바빠서 요한일서 못 봤습니다.” 이래 돼버리면, 그 사람은 너는 너를 속이고 있다는 지적질 하는 편지를 덮었으니까, 그 사람은 지금 뭐하고 있는 중입니까? 날마다 남들 앞에서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도 안 속이는 척하는 위선을 떨고 있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어두움이고, 주님 앞에 죄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 죄가 있으면 뭐가 당연히 있어야 합니까? 벌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평소에 위선자고 죄 있는 인간이라면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되리라고 기대하는 자체가 이것은 터무니없는 사탄이 심어준 배역이고 반발이고 반항심입니다.
죄는 지어놓고 벌은 안 받겠다? 이거 무슨 이런 더러운 심보가 다 있어요? 그것도 하나님께서 만든 이 깨끗한 세상에서, 거기에서 혜택을 입고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나는 하나님하고 상관 안 하겠다. 내가 이제부터 예수님 믿나봐라.” 뭘 잘했다고, 그것도 자랑이라고 큰소리를 치냐 이 말이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피조물의 마땅한 도리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거 요청했다고 마지못해서 교회 기어 나오고, 교회 기어 나오지는 않지만. 교회 나와 가지고 그것도 후다닥 집에 가기 바쁘고. 그것도 안 들을란다, 해서 인터넷만 듣고. 인터넷으로 들으면서 맨날 딴 짓하고. 화장실 왔다 갔다 하고. 도대체 뭐가 불만입니까?
인간의 본성이 뭐냐 하면 마귀의 자식이 되어놓으니까, 뱀의 새끼가 되어놓으니까, 나는 나만 사랑하겠다고 말도 안 되는 우격다짐을 부리는 겁니다. 성경은 사랑이란 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을 밝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앞에서 우리가 죄 없다고 속이지 말자, 라는 이 소식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