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 15장 13절(친구)171107a-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복음 15장 13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렇게 되어 있죠. 친구란 말을 누가 끄집어 냈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끄집어 냈어요.
그러면 친구라 끄집어 냈을 때 그 친구란 그것은 형식이고, 그 안에 내용이 뭐냐 하면은 사람이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렇게 되어 있지요. 친구인데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그런 내용을 포함해서 너희들은 나의 친구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친구라는 말을 우리가 예수님께서 이런 단어를 사용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단어가 주님께서 단어를 사용할때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친구라는 단어와 대치가 배치가 되고 대치가 된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을 해야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사용하는 그런 용어의 친구 개념이 아니죠.
그러면 그 친구개념을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식으로 친구개념이냐 하면은, 보통 친구라 하는 것은 우선 내가 먼저 있고 내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친구, 1번 내가 있고 2번 친구가 있고 순서가 그렇게 되잖아요.
내 친구라 할때는 내가 먼저 있고 내가 있고 그 다음에 저 사람은 내 친구라고 소개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친구라 할 때는 뭐냐하면은 내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고 친구가 먼저 있어요.
여기서 친구는 누구를 이야기 합니까? 예수님을 이야기 하죠. 예수님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친구라 불리우는 사람은 예수님의 의해서 나중에 나타나면서 둘 사이에는 무슨 관계냐 하면은 친구 관계가 되는 겁니다.
이걸 이렇게 설명이 되요. 방금 이렇게 한 설명을 이렇게 하나의 단촐하게 문장으로 만들수가 있는데요.
친구란 비역사적 개념이고,
친구란 비장소적 개념이다
이렇게 됩니다.
방금 친구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있다 라는 이 간단한 말을 하나의 명제로 이렇게 규격화 시키면 예수님이 말한 친구란 비역사적 개념이고 비장소적 개념이다 이렇게 풀이를 할 수 있거든요.
이 말 상당히 어렵다 이말이죠. 그런데 이 어려운 말을 아주 쉽게 하게 되면 내가 너의 친구다라는 말은 한 마디로 이겁니다. 걱정말라는 거예요. ‘걱정말라.’ 왜냐하면 보통 세상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우선입니까? 친구가 우선입니까?
자기집안이 우선이고 친구집안은 나중이잖아요. 자기집안 놔누고 친구집안 하는 것은 그건 오지랖이 너무 많은 사람입니다. 그렇죠? 항상 자기 위주다 이말이죠.
항상 자기위주인데 아까 강의 뭐라고 했습니까? 나보다 뭐가 있다? 친구가 먼저 있다고 했지요. 나 너의 친구다 라는 말이 뭐냐하면은 아까 여기 나오네요. 걱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하면은 너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되고 나는 어떤 인간이냐 하는 것을 니가 규정하지 말아라는 거예요. 니가.
나는 도대체 어떤 인간이야? 나는 죽어서 어디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껀데? 라고 할 때, 이미 예수님께서 이미 친구라고 딱 개입한 순간부터는 그 걱정을 멈춰라 그 걱정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아 친구가 있는데 왜 니가 걱정하느냐 이말이죠. 예수님이 너보고 친구라고 했는데 친구는 폼으로 있는 거예요? 지금 세 번째 이야기 하는데 또 할께요. 친구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우리가 있는 거예요. 친구가 먼저 있고. 세상하고 반대예요.
세상은 내가 먼저 있고 친구가 나중인데 예수님은 친구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우리라면 내가 나는 이렇다 내 인생은 이렇다 나는 왜이리 불쌍하냐 라고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규정하거나 단정 짓거나 자기 인생에 대해서 책임지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친구는 폼으로 있습니까? 아마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 같으면 ‘아이고 목사님 친구는 나부터 있고 난 뒤에 나중에 친구가 있는거 아닙니까?’ 라고 한다면 그게 바로 세상적인 친구 개념이고, 주님께서 친구라 할때는 그 개념이 아니고 비역사적 개념이고 비장소적 개념이예요.
만약에 우리가 미국간다. ‘아이고 주님이여 미국 왔습니다.’ 할 때 ‘니가 미국온 것이 아니고 친구인 내가 너를 미국에 보낸거야.’ 하는 거예요. 한국에서 떠나서 미국간다고 해서 장소가 달라졌다고 해서 친구를 한국에 놔두고 온게 아니다 이말이죠.
왜? 친구는 나보다 먼저 미국에 자리 마련해 두고 오라했으니까. 이게 바로 비장소적 개념이예요. 또 무슨 개념이냐 하면은 비역사적 개념이죠. ‘아후 내가 10년후에 어떻게 될것인가?’ 하고 걱정하는데 ‘10년후에 내가 어떻게 되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그런 소설도 있지만 도대체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되지?
그때는 주께서 뒤통수를 뒤통수를 패면서 내가 친구라하는데 걱정은 왜 니가 하느냐 말이죠. 친구 있고 나의 친구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너가 친구라고 관계를 성립 시키는데 너하고 나하고 친구라는 그 관계를 니가 지금 모독하면 안되지 그걸 니가 개무시 하면 안되잖아. 친구가 왜 있는데? 그런 걱정하라고 내가 친구라 했는지 알아? 그런 걱정은 일체 하지 말라고 친구가 있는 거예요.
‘그래도 내가 외국에 가면 안되잖아요.’ 외국을 가던 장소에 관계없이 20년 뒤에도 시간에 관계없이 비공간적 비시간적 친구는 묵시적으로 영원한 친구입니다. 영원한 친구예요. 그래서 제가 그래서 아까 그랬잖아요. 친구란 말은 4자로 이야기 하면 걱정말아요 그대. 걱정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이 말은 걱정하지 말라는 이 말은 우리가 친구란 말 하기 전에 친구란 말은 예수님께서 처음 썼는데요. 그 전에는 뭐라고 썼냐하면은 나는 목자요, 나는 메시아요, 인자, 너의 메시아요 뭐 여러 가지 이야기 했는데 갑지가 여기 요한복음 15장에서 친구란 말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아마 성경에서도 친구란 말은 여기 요한복음 15장이 유일하지 않는가 제 기억으로서는 뭐 딴데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제 기억으로서는 여기 처음이고 마지막 아닌가 그런 생각 들어요.
그러면 주님께서 왜 친구란 말을 썼을까? 그걸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까지 여러분 이해되시죠? 나보다 친구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친구를 친구답게 증거하라고 우리가 주님 앞에 부름 받았다 하는 것을 아시겠죠?
그러면 왜 평소에 처음부터 ‘어이 친구야, 베드로야 고기잡지말고 나랑 가자.’ 왜 처음부터 친구란 말을 사용 안했는가? 하는 거예요. 제가 지금 문제 던지는 것은. 그리고 이 친구란 말은 자주 나오지 않아요.
여기 처음 나오고 그 다음 부터는 모르겠어요. 저는 또 다른 대목에서 나오는 대목을 저는 본 기억이 없는데 유일하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왜 여기서 친구란 말을 사용했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에게 관계를 이렇게 성립 시킬때는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 구원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말씀이 아니예요. 이것도 어렵기 때문에 쉽게 갑니다. 그냥 오늘 쉽게 쉽게 갑니다.
보통 세상 친구는 이렇습니다. 개인과 개인이 그냥 친구 먹자 하면 친구 되는 겁니다. 개인 개인이. 이쪽 A란 사람이 B란 사람과 친구할 때 ‘우리끼리 친구하면 친구 아니니까 당신 집안식구 다 들고 오너라.’ 뭐 이렇게 이런 식으로 친구 먹는거 아니지요?
그냥 뭐 뒤에 가가지고 마음 맞는다고 이야기 통한다고 친구하자면 친구 되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친구라 할 때는 개인구원을 위함이 아니라 둘러싼 이 환경을 봐요. 환경이 그 사람을 예수님의 친구되게 하는 겁니다. 환경이.
그러면 친구란 말을 뒤늦게 돌아가시기 직전에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그 동안 주님께서 친구란 말을 쓸 만큼 환경이 충족된거예요. 충족. 충분하게 만족한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 환경이. 그러면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그렇게 충족됬다는 평가를 누가 내립니까? 우리가 내립니까? 주님이 내리십니까?
주님이 내리시고 주님 보기에 너는 이제 친구야 라고 할 때 그 만큼 환경이 무르익은 거예요. 환경이 무르익었다는 것은 주님께서 무엇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개인의 역량과 개인의 솜씨와 개인의 결심과 개인의 의지와 개인의 지식같은 것에 기대 한다? 안한다? 기대를 안하지요.
기대 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베드로 고기잡을 때부터 어이 친구야 우리 친구먹자 일대일로 흔히 세상에서 친구 먹는 것처럼 일대일로 야 너 고기잡는 폼 보니까 나 너 맘에 든다. 하겠는데 처음에는 그렇게 하지 않아요.
그냥 이름 부르면서 할 때 뭐로 불렀습니까? 친구라 부른게 아니고 뭐로 불렀습니까? 제자지요. 듣고 보니 쉽지요. 처음에 제자로 불렀잖아요 제자. ‘어이 친구야!’ 이렇게 안불렀지요. 너는 사람 낚는 내 어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친구라 했습니까? ‘어이 친구야!’ 이럽니까?
스승, 선생님, 랍비, 선생님이라고 했지요. 그 선생님에게서 자꾸 메시야 냄새가 나고 낌새가 나오지만 그런데 이 선생님에서 갑자기 맞먹을수 있는 친구가 되어 버렸지요? 왜 끝까지 선생님 아니고?
그렇다면 이 뭐냐하면은 여기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결정적인 것은 뭐냐하면은 친구라는 호징은 절대로 제자들 머리에서는 나올래야 나올수가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선생님하고 이렇게 3년동안 동거동락 했으면 제자들끼리 모여서 ‘선생님 잠깐만 빠져 주세요. 우리끼리 지금 회의 해야됩니다.’
‘야 우리 이제 선생이라 하지말고 친하게 이제부터 예수님을 친구라 해가지고 맞먹자.’ ‘그래! 그러세.’ 이래가지고 ‘우리 12제자가 의견 통일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친구라 하겠습니다.’ 뭐 이렇게 된거예요? 아니죠.
결국 친구란 용어 자체가 나타난 것은 뭐냐하면은 절대로 제자들에게는 이 친구라는 개념의 접근할 수 가 없었음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이 친구란 단어 자체가. 주님께서 친구라 불러준 것은 맞지만 제자들이 예수님보고 친구라고 할 수는 없는 입장이예요.
성경에서 예수님 친구 말고 다른데 친구란 말이 나와요. 어디냐하면 아브라함과 천사가 친구처럼 이렇게 했다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나오지요?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친구처럼 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어이 친구 하나님 잠깐 보자.’ 이런식으로 나올수가 없는 거예요. 죽었던 우리나라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이 천주교 다니거든요. 그 사람이 성경을 봤던 모양이예요. 요한복음 15장을 본 모양이예요. 15장을 보면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예수님하고 나하고 친구니까 이제부터 내가 소개한 사람은 예수님이 구원할걸. 이렇게 나온거예요. 세상친구하고 맞먹는 것처럼 그렇게 한겁니다. 이 사고 방식이 김대중 대통령은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 했는데, 그 솔직하다는 말은 순수하다는 말이지만 그게 진리는 아니잖아요.
진정성 있게는 이야기 했지만 그것이 진리는 아니지요. 솔직하게 이야기 한다고 진리입니까? 까놓고 이야기 한다고 그게 진리되는거예요? 진리는 무엇이냐가 아니라 진리는 누구십니까 라고 물어야되요. 그래야 나는 진리 아닙니다 전제로 하고 묻는 질문이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일단 진리가 나올 리가 없고, 나는 일단 진리가 아니고 그럼 진리는 누구십니까? 이렇게 되야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고 뭐라고 합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여 누구십니까?
다시 이야기 해봅시다. 친구라하는 그 단어 자체가 우리를 일대일로 상대한다는 뜻이 아니예요. 다만 베드로 이 12제자를 둘러싸고 있는 이 환경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주님 보시기에 친구라고 대할 만한 그러한 환경이 무르익은 걸로 주께서 아셨기 때문에 친구라는 말을 붙인겁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계속 주님의 친구가 될려면 제자들이 잘하고 똑똑해서 아니라 뭐가 되야되요? 이 환경이 제자들을 둘러싼 이 환경이 계속 유지되어야 되는 겁니다. 자꾸 환경 이야기 하니까 여러분들이 이해를 안하시는 눈치인데 여러분 인생을 이렇게 여러분 나름대로 살잖아요. 그러면 여러분 인생을 누가 놨습니까?
만약 여러분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에 가만 있었으면 여러분 인간성 어떻겠어요? 그냥 인큐베이터에 30년 살면 말도 못배우고 하는 것은 응애응애만 배웠을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만약에 인큐베이터에서 금방 튀어나와가지고 이 세상에서 30년 살게 되면은 그 사람의 안에 마음에 들어있는 모든 것들은 어디서 온겁니까? 다 어디서 온거예요?
이 세상에서부터 온거죠? 그것을 로마서에서는 이 세대로부터 온 것, 이 썩어질 이 세대로부터 온겁니다. 그래서 저도 이것을 생각하면서 친구라 생각하면서 어떻게 생각했는데 마침 어제 뉴스에 적절한게 있어요. 변 검사. 변을 검사한다는 뜻이 아니고 투신 자살한 검사 이름이 변씨예요.
그 변검사가 변호사 사무실에서 화장실 간다고 하고 자기 아내도 있고 변호사 있는데 뛰어 내렸지요. 댓글 수사를 방해했다는 것 때문에 소환받은 검사가 뛰어내렸습니다. 자, 그 검사의 사고방식을 한번 분석을 해봅시다.
이 검사가 뛰어내릴만한 그 만한 마음이 위축되어 있는 그 위축된 마음은 검사 시험칠 때 그 시험 문제 때문에 그렇게 신경쓴거예요? 그 검사가 그렇게 뛰어내릴 만하도록 누가 거기서 그 사람 마음속에 그런 위축된 마음을 어디서부터 왔습니까? 누가 준거예요?
자기가 취직해서 검사로 일하면서 듣고 배운 것이 자기를 자살하게 만들었죠. 그러니까 오늘 이 친구의 예로 얼마나 적절해요. 지금 우리가 혼자 공부했고 혼자 똑똑해서 이 맘 가진게 아니예요.
지금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모든 것은 그 동안 살아오면서 뻑뻑하게 팥죽처럼 동지 팥죽처럼 뻑뻑하잖아요. 뻑뻑할때 그 동글동글 한걸 그걸 뭐라고 합니까? 그 하얀 새알. 그 새알있죠. 새알처럼 그 새알이 팥죽에 들어가면 그걸 누가 포위합니까? 누가 둘러싸가지고 그 하얀걸 팥죽이 시커먼 걸로 매꿈니까?
세상이 그렇게 하지요. 가만 놔두지 않잖아요. 검사가 죽었다. 자기가 그 사법고시 합격할 때 좋다고 뛰어내렸습니까? ‘난 합격했다 죽어도 좋다.’ 그래서 뛰어내렸습니까? 아닙니다. 뭔가 묻을대로 묻었지요. 온갖 세상 다 묻어가지고 그 묻은 것이 자기를 화장실에서 뛰어나가게 만든 거예요.
정치권에서 로비활동해서 잡혔던 사람 관악산에 목대달아 죽은 사람 있잖아요. 김성수 목사가 자살했잖아요. 누가 그 사람을 그렇게 자살하게 만들었습니까? 자기가 몸 담았던 그 환경과 그 교회가 그 사람을 자살하게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12제자 다 자살할까요? 자, 문제는 변검사 자살한 그 검사 있는데 제가 답답한 것은 그 검사가 얼마나 머리가 똑똑합니까. 책 서른권을 다 외워야 되니까. 그 만큼 공부 많이하고 그 만큼 한사람이 어디 하루 세끼를 못 먹어서 뛰어 내렸어요? 아니죠.
그 뛰어내린 이유가 있을거 아닙니까. 이유가. 갑자기 귀신이 밀어서 그런것도 아니고, 이유가 있을거 아닙니까. 너무 괴로워서 뛰어내렸잖아요. 누가 그를 괴롭게 했냐? 누가? 죽을만큼 죽을만큼 누가 그렇게 괴롭게 만들었냐? 죽을만큼. 누가 그렇게 죽게 했냐 이말입니다 뭐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이런 관계가 아니예요.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의 친구관계를 설명하면서 이런 관계가 아니고 아까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어떤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친구 맺는 것이 아니고 뭐가 있다 했지요? 환경이 있다 했지요.
그러면 그 죽은 변검사는 어떤 환경이냐? 이런 환경입니다. 자기 여기 있고 그 사람 주변에 있잖아요. 주변에 있는 사람 전부 다 인간 대 인간, 개인 대 개인, 일대 일 관계, 이걸 변검사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자기를 기대하는 가족들, 자기한테 희망거는 그 부모님들, 그리고 나에게 그 범죄를 찾아내려는 수사팀 동료 검사들, 그리고 욕할려고 준비되어있는 모든 국민 많은 국민들, 그런것에 압박감을 느껴서 뛰어내린거예요. 이사람은 분명히.
그러니까 이 사람은 본인의 환경이 무슨 환경밖에 없어요? 자기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이 환경이 본인의 전부인겁니다. 이 압박감에서 본인이 도피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자기가 사라지는 방법. 자기가 죽는 방법외에는 다른 것이 없어요. 이 방법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아까 그림하고 뭡니까. 아까 그림에는 누가 있었어요? 친구라고 부르시는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있지요. 변검사는 누구밖에 없어요? 천상천하 유아독존 누구 밖에 없어요? 자기 밖에 없지요.
둘 중에 어느것이 현실을 아는 사람이예요? 지금 이 변검사는 세상 하늘에 별이 떠있는 이유를 압니까? 지금 별 떠있는 이유를 몰라 자살했습니까? 예? 달이 지는 이유를 몰라서 자살했습니까?
이유는 딱 한가지예요. 왜 세상이 내 뜻대로 안되는냐 때문에 죽었잖아요. 그럴거 같으면 달은 니 뜻이 아닌데 달은 왜 뜨는데? 다시 말해서 이것은 뭐냐하면은 한마디로 뭐냐하면은 바보예요. 바보. 바보라니까요.
자기에게 필요한 자기 생존에 필요한 것만 골라놓고 그 골라놓은 것이 자기를 환경으로 딱 굳어 놓고 그 환경이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니까 그것이 너무 괴로워서 너무 괴로워서 화장실 7층인가 거기서 뛰어내려 죽은거예요.
만일 어떤 미국에 NASA, 우주항공 NASA 어떤 직원이 자기 위에서 상부에서 맡겨진 그 프로젝트 과제를 푸는데, 수학공식이 잘 안풀린다 무슨 수학 공식이냐. 뭐 화성에 갔을 때 지구에서 화성까지 걸리는 시간과 거기에 필요한 로켓의 무게를 계산하라 했는데 그것을 만약 계산 못해가지고 이제 직장에서 쫓겨날 판이다.
실력이 그것밖에 안되서 실력이 그만큼 안된다 할 때, 그 사람이 만약에 NASA 본부에서 뛰어 내려 자살했다면 그 자기 죽은거하고 화성이 거기 있는거 하고 무슨 관계 있습니까? 목성이 거기 있는거 하고 결국 목성이 없었으면 자기 죽었어요? 안죽었어요? 목성 화성 없었으면 안죽었지요.
목성이 ‘너 죽어라!’ 이랬습니까? 아니 이 세상이 이 세상이 나를 죽입니까? 내가 나를 죽입니까? 어느 쪽이예요? 세상은 가만있는데 누가 죽어요? 본인이 본인의 성질 못 이겨 죽잖아요. 이게 바로 foolish 바보 아닙니까? 바보라고요. 바보등신, 바보등신.
자, 이 문제를 그러면 이 바보등신 12제자도 바보등신인데 그걸 하기전에 먼저 이 논리부터 하겠습니다. 창세기를 보세요. 제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인간이 먼저 입니까? 짐승이 먼저 입니까? 물어보겠어요. 이 땅에 인간이 먼저 있었어요? 짐승이 먼저있었어요? 짐승이 먼저 있었죠.
이 말은 뭐냐 인간이 없을때도 있었지요. 틀리면 틀렸다고 하세요. 인간이 이 세상에 없었을 때도 있었지요? 인간은 빠지고 해, 달, 별, 그리고 바퀴벌레 있었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러면 인간 없는데 이 세상 왜 있습니까? 인간이 없는데 이 세상 왜 있는 거예요?
현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이 세상은 누구를 위해서 있어야 되는 것처럼 우깁니까? 고집합니까? 인간을 위해서 있어야 한다고 고집하지요. 그런데 막상 창세기에 보면 진화론 과학도 마찬가지예요.
인간은 500년전에 진화론에 의하면 500년 전에 있고 지구는 57억년전에 있어요. 그러면 인간이 없을때가 더 많지요? 그러면 그 인간이 없을 때 그 암모나이트라든지 그런 옛날 고대 진화론에 의하면 그런 것들 원숭이. 원숭이는 왜 있는 겁니까?
진화론에 의하면 진화론아니고 성경도 마찬가지이지만 원숭이가 먼저 있고 인간이 있잖아요. 그렇죠? 맞지요? 원숭이가 먼저 있고 인간이 있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과학은 어떠냐하면은 인간해부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원숭이 해부학이 있어요. 생물학에서. 제 말 맞죠? 제 말 맞잖아요.
인간이 해부를 해보니까 이제는 슬슬 원숭이나 해부 해보자 이렇게 나온겁니다. 인간이 원숭이 해부 왜 합니까? 혹시 원숭이 해부 해가지고 간이나 쓸개 가운데서 누구한테 몸에 좋으라고? 인간 스스로에게 혹시 귀한 약재라도 있을수가 있고, 있을수 있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이 세상은 하나님이 주어진 그 현실 환경이 아니고 인간이 어떻게 만들었어요? 모든 해와 달 모든 것을 누굴 위해 존재해야 해야 한다고 우기는 겁니까? 예? 인간들을 위해서 있어야 한다고 우기지요. 그게 현실이라 이말입니다. 그게 현실 맞습니까?
그것 때문에 인간들 마음 맞춰주라고 돌아가는 겁니까? 답변해보세요. 그런거예요? 자 인간보다 원숭이 먼저 있었습니다. 원숭이 보다 물고기 먼저 있었죠? 물고기보다 공중에 독수리가 먼저 있죠? 독수리 보다 해와 달 먼저 있었죠?
그보다 먼저 있었던게 뭡니까? 성경에 의하면 우리 주님이 있잖아요. 우리 주님이 계시지요. ‘너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게 바보 아닌거예요. 그 나라 의, 그 나라의 의되시는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나는 너의 뭐라고 합니까? 너의 친구라고 한거예요. 너의 친구다.
나는 너의 친구라고 이야기 한거예요. 우리보다 먼저 계신분이 친구라고 한거예요. 그러면 그 순간 우리는 뭘 포기해야 되냐하면 내가 나만 잘되기 위해서 구성한 현실을 대충 꾸려서 구성한 이 세계안에서의 내가 아는 친구를 우리는 포기해야 되겠어요? 포기 안해야되겠어요?
마땅히 포기해야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정한 친구는 누구 좋아라고? 친구 좋아라고가 아니고 누구 좋아라고? 나 좋아라고. 그러니까 오늘 이 친구란 이 말씀은 조건이 있어요. 친구란 조건은 뭐냐? 친구를 위해서 죽는 것이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하면 내가 너를 친구라 부른 즉시 너는 이제부터 나를 위해서 죽어야 될 그런 상태 죽어야 될 존재다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보다 먼저 있었던 원숭이가 그런 소리해도 들어야 되요. 그런데 원숭이 보다 먼저 계신 예수님이 우리보고 그런 이야기 했어요.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제자들은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요. 무슨 뜻인지도 모릅니다. 왜 뒤늦게 와서 뒤늦게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라 하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 뜻은 뭐냐? ‘너 나를 위해서 죽게 될 것이다.’ 그런 뜻이예요.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은 이걸 어떻게 생각했냐면 반대로 생각한거예요. 나 좋아라고 예수님 죽는다고 생각한 거예요. 왜? 친구를 위해서 희생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 만큼 좋은 친구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김대중 대통령은 여전히 자기가 끌어모은 것 가지고 자기 위해서 있는 그 환경이 주님이 거기에 대해서 인정해주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겁니다. 나를 위해서 만든 삶의 환경을 하나님도 아이고 수고했다 라고 인정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거예요.
제가 아까 다시 이야기 해봅시다. 주께서 우리보고 친구라고 하는 것은 기존에 우리가 알던 친구있잖아요. 나 좋아라고 너 내 친구 되야되 라는 그 사고방식을 이제는 완전히 박살 내야되고 파괴되야 되겠죠.
그렇다면 주님께서 친구라 할 때는 그냥 ‘예, 친구 먹읍시다.’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부터는 나를 위해서 모집했던거 나를 위해서 끌어모았던 모든 것은 주님의 친구란 이 원리에서 자근자근 다 떨어져 나오고 부서져 나갑니다. 심지어 가족까지.
이제부터 중요한데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친구라고 하면서 조건을 걸었다 했습니다. 그 조건이 뭐라고 했습니까?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조건이 뭐라고요? 친구를 위해서 뭐한다고요? 목숨을 버리라했죠.
자 여기서 질문 들어갑니다. 목숨 누가 줬습니까? 주님이 줬지요. 주님 줬는데 이건 내거 하라고 준게 아니란 뜻이죠.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생명이 끝까지 내것 하라고 쥐고 있으란 뜻이 아니고 친구라고 하는 관계, 그 관계에 실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친구라는 관계만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나도 목숨 받칠테니까 너도 너의 목숨을 바치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친구가 친구란 말을 그렇게 쓰는 이유가 여기 앞에 12절에 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여기 사랑이 나오죠.
첫째 시간에 여기에 대해 설명하게 되면 첫째시간 마칠 듯 싶은데, 창세기 1장에 창조가 나옵니다. 7일동안 천지를 창조했지요. 7일동안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창세기 1장을 어떻게 설명했습니까?
7일동안 창조했다가 아니라 아까 강의할 때 이야기 했는데 이것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겠지요? 제가 분명히 여러분 질문할때는 뭐가 누가 창조 그게 아니고 누구십니까로 했지요?
사도바울이 성령받고 난 뒤에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는 이 창조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 합니까? 모든 피조물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은 누굴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있다 했지요.
그게 창세기 1장에 대한 신약적인 최종적인 답안입니다. 뭐가 만들어졌냐? 첫째는 무슨날? 둘째는 뭐가 만들어 졌다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만들어 졌는가? 누굴 위해서 만들어 졌는가가 드러나지 아니하면 창세기 1장 천독 만독을 해도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이야기 했고 그 이야기 들은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나중에 성령이 오고 난뒤에는 참으로 그 말이 맞구나 모든 것은 예수님 위해서 만들어 졌다 이말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 졌다면, 그러면 그 모든 것 안에 저와 여러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그렇다면 나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계시다는 말이 되요? 안되요? 그런 소리 하면 안되지요.
나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있는게 아니고 이게 반대가 되야되죠. 누구의 구원을 위해서? 주님의 구원하심 주님의 구원되심을 주님도 구원받습니까? 하는데, 주님도 이 땅에 들어왔잖아요.
여러분 박태환이가 처음에 수영장 풀장에 박태환이 뛰어내릴 때 어디에 뛰어내립니까? 1,2,3,4,5번 8개인가 있잖아요. 그때 선수들이 수영복입고 뛰어 내리잖아요. 처음에 그 물속에 들어가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입수라 하지요.
예수님 요단강 세례받을 때 뭐했습니까? 물속에 입수 하듯이 예수님은 물이 아니고 뭐냐하면 이 세상의 죄속에 입수한거예요. 박태환은요, 물속에 들어가가지고 헤엄도 안쳐요. 그냥 발만 이렇게 해가지고 50m를 간답니다. 그러니까 마린보이죠.
주님은 부활될때까지 박태환보다 더 심해요. 죄 속을 계속 가다가 죽고 난 뒤에 사흘만에 부활로 나온거예요. 부활로.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이 세상은, 이 세상은 여기 있다 그런거 의미 없어요. 왜 있는냐? 누굴 위해 있느냐? 가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위해서 이 세상이 만들어 졌잖아요. 원숭이든 귀뚜라미든 해바라기든 해와 달, 그런데 그 중에 누가 포함되어 있다고 했어요? 우리도 포함되어 있지요. 그러면 나를 위해서 주님께서 죽었다 하면 안되죠.
주님의 구원. 주님의 구원이 뭡니까? 죄로 들어가서 죄의 노예로 들어와서 의의 노예로 나오는 거예요. 죄의 지배하에 있다가 이제는 의의세계로 나올 때 그 예수님께서 그렇게 했다 이말이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할 것은 뭐냐하면 바로 예수님과 우리 관계가 중요하잖아요. 그러면 이 세상이 만물이 예수님을 위해서 있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땅에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은 죄 짓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죄 짓는 역할.
예수님이 새알이라면 팥죽의 새알이라면 우리는 무슨 역할이냐면 벌건 팥죽 역할 되는 겁니다. 새알이 팥죽에 입수했다가 새알로 영광스럽게 하나님의 영광됨을 포기하고 오셨다가 나중에 주로써 영광받아 튀어 나올 때 우리는 거기서 무슨 역할 합니까?
다른 피조물과 더불어 함께 주님의 주 되심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그 죄아래 있는 죄의 노예가 된 역할을 충실히 한거예요. 그래서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이 감히 저를 구원해주세요 하면 안되요.
주님만 우리를 통해서 구원된다면 우리는 제 역할 다한겁니다 라고 고백하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수로보니게 여인 아닙니까? 10년동안 귀신 들렸지요. 이건 자기 역할 다 한거예요. 그리고 날 때부터 소경된자, 날 때부터 소경된자가 왜 소경됬다 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소경됬잖아요. 자기 역할 다 한거예요. 아까도 자살했던 변검사 아니죠. 자꾸 변검사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그 변검사가 그렇게 자살할 누가 그렇게 그 사람 마음속에 그러한 사고방식을 집어 넣었느냐 이말이죠.
그것은 자기가 살아온 이 세상이죠 이세상. 그런데 그 세상에 지금 누가 살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변검사가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하고 우리 사고방식하고 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니까 우리 입에서 ‘똑같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 고백을 할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죠. 변검사는 죽을 때 누구한테 물어보고 죽었습니까? 자기자 자기한테 물어보고 죽었지요. 자기 안에 마귀들었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우리 행동할때는 우리 자신 마귀보고 하겠지만
성령께서 가만두지 않고
다시 소급해서 뒤돌아서 생각해보니까 그것 조차도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피의 공로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리기 위해서 우리한테 그런 죄 짓는 일이 발생되도록 했다
는 이러한 고백을 쏟아내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12제자가 예수님 버렸다는 사실이 얼마나 우리한테 감사와 위로가 되는지 몰라요. 제자라 할지라고 결국은 버렸잖아요. 우리가 예수님 버리나 그들이 버리나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그들에게 오순절 성령이 와서 그들을 데려가잖아요.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도 성령이 오셔가지고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그 원칙에는 변함이 없어요. 어떤 인간도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이 없어요. 예수님이 죄에 입수해가지고 나올 때 까지 확인된 바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알아본자가 없어요. 다만 주님의 예시된 사람 주님이 어떤 분이라는 예시를 일으킨 사람있죠. 수로보니게 여인이나 백부장 같은 사람들있죠. 지금 그 이야기를 환경이야기를 제가 자주하는 이유가 아까 던진 질문에 답변하는겁니다.
인간이 없을때가 있다 했죠. 인간이 없을때가 있다 했죠. 그러면 인간이 다른 피조물보다 제일 마지막 막내인데 그 막내이면 꼴찌인데, 꼴찌면 계급이 제일 낮은게 아닌가 이런 생각할거예요. 하지만 창세기 2장에 보면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그 형상이 해야될 기능이 있어요.
그 기능이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야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야되요. 만약에 따르지 아니하면 로마서 8장에 의해서 인간이 범죄하게 되면은 덩달아서 모든 자연세계가 다 신음하게 되고 고통받게 되는 거예요.
그 선악과 나무를 과실을 따먹지 말라고 했다고요. 천지창조 일어나고 첫째날 둘째날 계속 만들고 마지막 여섯째날 인간을 만들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말은 이 앞에 인간이 없을 때 모든 것의 운명이 이 형상에 의해서 운명이 결정되는 거예요.
만약에 형상이 형상을 유지되게 되면 이것은 복을 받지만 형상이 유지되지 않으면 여기서 고통과 괴로움과 온 우주가 다 탄식하게 되어 있어요. 로마서 8장에 보면. 그러면 이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형상됨이란 형상되었다 하는 말은 말했지만 실제로 형상되었다는 그 구체적인 모습은 뭐냐?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실과를 따먹지 마라.
그러면 따먹으면 어떻게 되는가? 따먹으면 뭐한다 했습니까? 정녕 죽으리라 했어요. 그 죽으리라는 뜻이 이 아담이 안 죽어봐서 죽는다는 뜻을 몰랐어요. 보니까 3장에 보면 죽는다는 뜻이 나옵니다. 이게 뭐냐하면은 버림받는 거예요. 죽는다는 것이.
내침을 당하는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두가지의 버림을 당했어요. 세상에서 버림받으시고 하나님 아버지에게 버림 받았어요. 예수님의 생애가. 따라서 성도의 세계라하는 것은 이 길을 그대로 밟아야되요.
성도라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은 세상에서 버림받고 아버지한테 버림받아야되요. 그런데 아버지 한테 버림받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뭐냐하면은 이 원칙 하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앞에서는 반드시 절차가 뭐냐하면은 따먹지 마라는 지시가 있지요. 그렇죠? 따먹지 마라는 지시가 있잖아요.
하나님이 따먹지 마라는 지시처럼 따먹지 마라는 지시의 벌칙이 뭐라고 했습니까? 죽으리라 되있잖아요. 그러면 죽음이라는 결과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는 어떤 조항이나 법칙이 하나님께서 하니님의 자기 백성이든 누구든 간에 인간에게 계속 제공되는 겁니다. 왜? 인간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반드시 죽음을 야기 할 수밖에 야기 할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형상이라는 이유 때문에 계속 중간에 집어 넣는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말이냐하면은 하나님의 형상의 본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죽음을 경유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형상됨의 완성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걸 다시 오늘 요한복음 15장으로 돌아와 봅시다. 하나님의 계명이 뭐라고요? 사랑이라고 했지요. 사랑. 좋은 말이죠. 사랑하죠. 그런데 그 사랑의 구체적인 내용이 요한복음 15장 오늘 본문 14절에 보니까 사랑의 내용이 뭡니까? 죽어야 되는거예요.
그럼 아무나 보고 죽을까요? 마귀보고 죽을까요? 누구보고 죽으라고 합니까? 누굴 위해 죽으라고 합니까? 친구. 친구니까. 친구를 위해서 죽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될려면 친구가 있어야 되요? 없어야 되요? 친구가 있어야 되겠지요. 그 친구로 등장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 이잖아요. 논리가 그렇게 되는거예요. 이래나 저래나 살아야 되겠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죽으라고 만드신거예요. 처음부터. 죽지 않는 인간은 없습니다. 제가 지난 오후 설교에 그런 이야기 했지요. 오묘한 것이 무엇이냐를 설명했잖아요. 오묘한 것. 오묘한 것이 뭐냐하면 바로 낙엽이 떨어지듯이 모든 인간은 우수수 다 낙엽처럼 언젠가는 다 떨어지게 되있다는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오묘한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낙엽은 떨어져야 낙엽이잖아요. 그렇죠? 안떨어지면 고집센거지 낙엽이 아니잖아요. 떨어지는 것이 낙엽의 자연이치인 것처럼 인간은 죽는 것이 자연의 이치고, 죽기 위해서 인간은 만들어 진거예요. 죽기위해서.
그런데 아까 변검사는 진짜 죽기위해서 죽은게 아니고 자기 성질 못 이겨 죽은거예요. 자기가 죽은거예요. 자기 성질 못 이겨서.
예수님께서 친구라 하는 것은
내가 이 코스 밟아서 죽는것처럼
너희들도 나 따라서 니가 내 친구이니 나 따라서
그 코스 밟게 되어 있어. 이 인간아
이런 뜻이예요.
맞먹자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 맞먹자 그런 개념이 아니고 전에는 너 밖에 없었기 때문에 죽고 싶어도 내가 누구한테 죽어야되? 했는데 이제는 죽어야 될 이유가 생겼다는 거예요. 왜? 내가 니 친구이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주를 위해서 너는 죽을 수 밖에 없도록 내가 그렇게 조치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위해 죽는다는 말은 자기 명대로 못산다는 뜻일까요? 어떤 뜻일까요? 아까 그래서 제가 아까 친구란 개념이 뭐라고 했습니까? 비역사적이고 비장소적이라고 했지요. 이것은 뭐냐하면은 그냥 시도때도 없이 매일같이 우리 자신을 죽이는 겁니다. 매일같이.
그런데 매일 같이 죽이는데 선악과 이야기 다시해봅시다. 선악과 할 때 아담이 선악과 따먹을 뻔 했는데 죽었습니까? 따 먹었을 때 죽었습니까? 하와가 따 먹을 뻔 했을 때 죽었습니까? 따 먹어서 죽었습니까?
이미 아담이나 하와가 따 먹고 난 뒤에 죽었지요.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담과 하와보기에는 내가 선악과 따먹은 걸로 되어 있지만, 내 속에 선악과 과실이 들어왔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주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마귀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아담과 하와의 죽음이라는 것이 아까 이야기한 환경으로 조성된거예요. 환경으로.
따먹는 순간 죽음이 너를 새로운 너를 죽게하는 너를 저주받게 하는 새로운 환경 너를 하나님께 버림받게하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새로운 환경이 그 선악과 속에서 쏟아져 들어온 겁니다.
자, 이럴 때 아까 창세기 1장을 설명한 이유를 알겠지요. 자 창세기 1장을 다시한번 생각해 봅시다. 창세기 1장에서 천지창조 했지요. 인간을 제일 마지막에 했지요. 그럼 이 앞에 있는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이 생겨나는 환경이라고 했지요. 환경.
인간이 하나님과 결부해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것을 귀뚜라미보고 이야기 한게 아니예요. 귀뚜라미보고 이야기 한게 아니고 인간보고 이야기 했잖아요. 그러면 이것은 왜 있느냐? 인간에 따라서 환경이 완전히 쑥대밭이 되거든요. 이게 환경이예요.
다시 말해서 창세기 1장은 있음 자체가 있음이 아니고, 거기에다 뭐가 심어졌나? 선악과 따먹지 마라는 계명이 심어졌을 때 이 환경은 누구누구를 위한 환경이 되요. 이것은 누구를 위한 환경일까요? 신약에 의하면 천지창조는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환경이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그리스도예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서 천지창조가 만들어 졌고 그 중에 부분으로서 누가 만들어졌다? 우리가 만들어 지는거예요. 그래서 친구니까 너는 나를 위해 죽어야되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과한 윤리도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니가 싫든 좋든 너는 그래야만 되고 내가 그렇게 하도록 기어이 만들겠다는 겁니다.
나는 죽기 싫어요 한다고 안죽는게 아니고
니가 뒤돌아보게 되면
‘아 이 발자국이 친구를 위해서 목숨 바치는 경유를 그 경과를 주께서 이끌어 가고 있구나.’
라고 해서 오직 친구되신 주님에게만 친구란 관계를 새롭게 형성해주시는 마무리 지어 주시는 주님께만 감사하라고 이 말씀 주시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가락-요한복음 15장 13절(친구)171107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합시다. 첫 번째 시간에 강조한 것은 환경입니다. 이 세상 환경에서 다 물 다 들었어요. 환경이 어떤 환경이라고 했습니까? 세상 돌아가는 것은 누구 중심으로? 나 살고자 하는 중심으로 돌아간다. 나 살고자 하는 중심으로.
나 살고자 하는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것은 뭐를 놓치냐 하면은 처음부터 인간은 죽기위해서 만들어 졌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애써 부정하는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주께서 만든 이유가 뭐냐하면은 이 세상을 만드신 그 분,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죽으셔야 주가 되시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친구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나라고 했잖아요.
우리의 모델이 우리의 모델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예수그리스도가 모델이고, 우리는 그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피조물로서 만들어 진겁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됩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하면 안되지요.
주님은 어떻게 됬던가요? 주님은 어떻게 되었던가요? 그분의 그 코스가 그분과 친구 관계 성립되어 있으면 그대로 우리는 답습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 친구니까. 자, 친구와 친구사이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14절에 친구와 친구사이에는 12절에 친구와 친구 사이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하나님의 계명이 연결되어 있지요. 그 계명이 무슨 계명이라고 했습니까? 사랑이죠. 말로만? 입으로만? 아닙니다. 죽는거예요. 서로를 위해서 죽는겁니다.
서로를 위해서 죽는 그 죽음이 그 죽음을 두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그걸 가지고 사랑이죠. 그러면 안 죽고 할 수 있는 사랑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안죽는 사랑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러면 사랑을 할려면 상대가 있어야 되거든. 상대가 있어야 될게 아닙니까? 죽어야할 상대가.
집에 강아지보고 죽을까요? 누구보고 죽어야 됩니까? 주님께서 지정해 줬어요. 나를 위해서 죽어야된다. 친구를 위해서 죽어야 되요. 친구를 위해서 죽기 위해서는 우리는 정리를 해야됩니다. 세상 친구를 정리를 해야 되요.
세상 친구는 내 이익 때문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 친구는 정리해야되요. 그게 있으면 쓸데 없이 진짜 친구 되신 주님위해 죽는 것에 지장이 되요. 그렇다면 예수님을 위해서 죽는다면 그럼 예수님이 어디 계신데요? 예수님이 안보이는데요.
주님께서 저기 있으면 주님 저 달려갑니다 하고 달려가다가 떨어져 죽으면 주를 위해서 죽은게 되는데, 주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어떤 뭐 이렇게 환경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환경은 우리가 만드는게 아니고, 주께서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을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제자들에게 제공됩니다.
그게 뭐냐하면 바로 사도바울이 마지막에 이 세상 끝에 우리를 죽을 자로 주께서 데리고 다니신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사도바울의 엄살이예요. 엄살인데 엄살 맞습니다. 죽는다 해도 보면 숨쉬고 있고 분명히 우리가 말하는 숨 끊어지는 것은 아닌데, 엄살 일수가 없는 이유가 사도가 자기 주어진 환경을 성경에 의해서 하나님의 십자가에 의해서 해석을 새롭게 해석해버려요.
주변에 있는 이런 커피나 이 모든 것을 나를 죽게하는 하나의 사약으로 세상이 주었던 모든 것을 주를 위해 죽으라고 제공된 조건들이라고 보는 거예요. 이 사람이. 어떻게하면 내가 사는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죽는것도 아니고, 주를 위해서 죽기 위해서 교회 취직도 하게 하고 결혼도 하게 하고 죽기 위해서 하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될려면 그 전에는 뭐냐?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그 나쁜 환경을 거치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 계명이라는 말을 하는데, 두 번째 시간에는 계명에 대해서 다시 해보겠습니다.
계명이 있고 그 다음 우리가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께서 줄곧 계명을 주셨어요. 율법을 주셨다 이말이죠. 말씀을 주실 때 우리는 우리가 단독으로 있다고 생각했지 우리 환경이 나쁜 환경이 나를 나쁘게 물들었다고 생각 추호도 못하고, 괜찮은 내가 건전한 내가 경건할 가능성이 있는 내가 하나님이 예수님이 계명을 주셨으니까 우리는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뭐냐 산상설교 같은 것이죠. 산상설교. 그런데 산상설교를 이렇게 보시게 되면 도저히 우리가 지킬수 있는게 아니예요. 오른 손이 범죄하거든 어떻게 하라? 찍어버리라. 손목 날라가고 요것만 남았으면 이것도 찍어 버려야해요. 다 찍어버려야해요.
너무 오래 걸리면 도마에다 다 짤라야 되요. 우리 몸을 산산조각 다 잘라야되요. 그래도 영 성에 안 차. 왜냐면 우리는 환경이 문제이기 때문에, 오늘 강의에 이것 놓치면 안됩니다. 환경에 의해서 우리가 그렇게 물드는 거예요. 환경에 의해서. 어떻게? 내 중심으로.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으라고 쫓아 냈는데, 쫓아나온 뒤 우리가 토지된 땅에서 살려고 덤벼드니까 어떻게 하면 살수 있습니까? 말을 반대로 하는 거예요. 여러분 가인과 아벨의 차이점이 어디 있어요? 가인은 제사드리고 살았고, 아벨은 제사 드리고 죽었지요. 그렇잖아요.
제 삼자로 봐서는 누가 승자 같아요? 가인이 승자이지요. 가인의 자손들은 번창했고 아벨은 끝났어요. 자기 대에서 끝나버렸어요. 셋이라는 다른 사람이 있긴 있지만 나중에 하나님이 만들었지만 자기의 직접 관계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뭘 알아야되냐하면 이걸 알아야 되요.
사랑이라는 것이 사랑의 계명이 뭐냐? 사랑의 계명이. 사랑의 계명이 뭐냐하면 기존의 계명의 완성이 사랑이거든요. 그런데 기존의 계명은 뭐냐하면은 나를 살리고자 하는 계명이 기존의 계명이라면 이 사랑은 어떤 계명이냐 하면은 죽어도 상관없어요예요. 죽어도 상관없어. 죽어도 괜찮아를 유도하는 것이 사랑의 계명입니다. 죽어도 괜찮아.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서 계속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계속 말씀드리는 마지막 계명, 최종 계명은 오직 하나의 계명 사랑 계명은 자꾸 너희들이 형제를 위해서 또 나를 위해서 죽으라는 겁니다.
요한 일서 3장 16절 한번 보겠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 여러분 설교 기억한 사람은 기억날거예요. 요한일서 3정 16절에 보게되면은 누가 한번 읽어볼까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아멘. 그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으니, 제가 풀이하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려서 새로운 환경을 조성했으니. 왜냐? 인간은 본인이 결정한 것이 아니고 환경이 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에, 새로운 그 환경을 조성한게 뭐냐? 죽어도 괜찮다는 환경을 조성한거예요.
우리가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그 다음에 뭡니까? 그 환경입장에서 환경에 휩싸였으면 그건 당연한 것이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위에 나온 말로 하면 마땅하니라 되어있어요.
마땅하니라 이 말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는 그런 환경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이 다만 하나의 모범으로 보여줬다면 우리는 주춤주춤합니다. 주님께서 너를 위해서 죽었다 이렇게 하면 시범조로 보여줬다면 우리는 그냥 주춤주춤할 수밖에 없어요.
주님께서 절벽에서 뛰어 내렸다. 너도 절벽에서 뛰어내리라고 하면 주님 뛰어내린것에 박수는 칠수 있는데, 그 다음에 너 차례 너 나와 하면 우리는 아무리 주님이 뛰어내려도 주님은 주님이고 나는 나이기 때문에 주님은 하나님이니까 뛰어 내렸지 우리는 못하는데 이렇게 되지요.
그 말씀이 아니고 이미 니가 나를 알기 전부터 세상 나쁜환경이 니가 나쁜환경을 골라서 나쁜 환경이 물들었기 때문에 나빠진게 아니고, 이거는 나쁜환경이 너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냥 밀어부친거죠.
스폰지에 물들 때 스폰지가 강력하게 반대합니까? 스폰지를 물에 넣는 순간 스폰지 구멍구멍 사이에 다 뭐가 다 들어갑니까? 환경을 조성하는 물이 다 들어가듯이 세상이 악한 것은 그 악한것이 우리는 그냥 보자마자 다 흡수가 다 되잖아요. 흡수가.
여자분들 백화점에 가가지고 안대하고 백화점 갑니까? 안대하고 소경 지팡이 들고 이렇게 백화점 일층부터 10층 다 돌아다닙니까? 눈 부릅뜨고 다니지요 눈 부릅뜨고. 신상 나왔는가? 예? 새로운 상품 나왔는가 보잖아요. 보는 즉시 어떻게 됩니까? 쫙쫙 당기지요.
‘아휴 저거는 1년치 저거는 6개월치. 아이고 내 팔자야 내 팔자야. 내가 저 옷도 하나 못하는 팔자가 됬나.’ 괜히 옷 있는데 자기 남편 욕하고 저 옷도 못입는 신세타령하고 이렇게 하잖아요.
남자도 마찬가지예요. 남자들도 어디가냐 하면은 벤츠차량 외제차 전시장에 가면 남자들 이제 눈 돌아 갑니다. 나의 애마 이러면서 아이고 새로운 만지면 안되 또. 번쩍 번쩍하는데 기념 사진 찍고, 트렁크인가 그 프로 보면 차를 고쳐가지고 경매 붙여가지고 프로가 있어요. 거기보면 대부분 남자들이예요.
남자들이 괴물같아요. 전부 다 손 들고 오천만원, 오천오백 막 손 막 들거든요. 자동차가 로망이예요 로망. 그러니까 좋은게 있으면 쫙쫙 빨려온다고요. 좋은게 있으면. 이걸 누가 말립니까? 그만큼 우리가 환경와 우리가 그만큼 한통속으로 친화적인 관계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죽으라고 계명을 준거예요. 이 계명을 지키라고 이 죄악된 세상에다가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집어 넣어버리면 오른손이 범죄하면 어떻게 하라? 찍어버리라. 이 말은 뭡니까?
나는 너희가 어떤 인간인지를 나는 묻지 않겠다. 내가 묻는 것은 절대로 세상죄를 묻어서는 이 천국에 오지 못한다는 그 분명한 그 사실을 나는 분명히 이야기 한다는 겁니다.
오른손이 범죄하면 찍어버리란 말은 이게 이미 물든거예요. 잉크 물에 손 언지면 스폰지 오듯이 우리는 온 몸을 이 죄악속에 푹 잠기고 있는겁니다. 예수님이 입수한 그 세상에. 모든게 잠겨 있기 때문에 심지어 모든 율법을 지켜도 하나 어기면 다 어긴거예요.
부자 청년이 그렇게 십계명 잘 지켰지만 주께서 새로운 계명하나 더 추가 해버리니까 어떻게 됩니까? ‘oh, no.’ 해가지고 다시 세상 가잖아요. 그정도로 우리는 이 세상과 나를 분리시킬수 없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계명을 주신 이유를 알겠지요? 계명을 주신 이유는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세상에 물든 너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못 빠져 나온다는 겁니다. 못 빠져 나와요.
전도사님이 교회를 이렇게 있는데 그 어떤 장로 복음은 하나도 모르는 장로가 건방진 장로가 있는데, 그 장로가 목사님 밀어내고 전도사님 당회장 하시기 바랍니다. 월급은 600만원 드리겠습니다. 차는 뭐 외제차 랜드로바 하나 바꿔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그전까지 속으로 ‘이 뭐 교회도 아니고 저리가.’ 하다가 갑자기 ‘오!! 나를 알아주네. 나를 알아주네. 있어야지. 이 교회에 충성하겠습니다. 이 교회 키우겠습니다.’ 뭐 이렇게 한단말이죠.
제가 얼마전에 들었던 이야기인데. 어느 부산에 있는 초량에 있는 어느 교회인데 목사가 와가지고 구호를 외치는 거예요. 뭐냐하면 ‘목사는 위대한 종이다. 목사는 찬양하라.’ 뭐 이렇게. 그거하고 ‘모든 성도는 십일조를 하자.’ 예배시간마다 그걸 선창하고 그걸 따라하게 하는 겁니다. repeat after me 해가지고
목사를 섬기자. 목사를 섬기자. 십일조를 하자. 십일조를 하자. 세 번째가 뭐냐? 700명을 채우자. 700명을 채우자. 그거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목사를 초빙할 때 투표를 누가 했겠어요? 그 교인들이 한거예요. 그 교인들이 한거예요.
그런데 그런 목사에 대해서 만약에 지금 반대하는 교인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반대투표 하게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쫓겨나겠어요? 안 쫓겨나겠어요? 안 쫓겨나가죠. 왜? ‘목사를 건드리는 것은 주께서 하나님이 직접 건드려야지 우리 미천한 교인이 건드리면 안되잖아.’ 라는 것을 그것을 전임자부터 이미 쫙쫙 빨려들어서 한거예요.
그러면 그게 진리라서 그 말을 믿습니까? 아니면 내것 다치면 안된다고 해서 건들지 않는거예요? 목사가 됬든 교인이 됬든 제일 중요한 것은 뭡니까? 자기 자신이 살고자 하는것에 지장이 되기 때문에 ‘아이고 내가 뭘하노 하나님이 알아서 하겠지.’ 하고 목사 개판되든 벌써 돈다 써먹고 있어요. 모아논 헌금 다 날리고 있어요. 그 교회를 욕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제가 지난 낮설교에 했잖아요. 그 복음 모르는 교회가 복음에 반대편에 있는게 아니고, 복음 아는 내가 복음의 반대편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되요.
내가 복음에 반대편에 있다는 것을 내가. 어느 교회있고 뭐 저 우리교회 뭐 그런 소리 하지말고 현재 복음 안다는 내가 매일같이 주님의 복음에 반대편에 있는거예요. 왜? 복음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복음으로 살겠다는 것은 이제부터 슬슬 어렵게 되는데 걱정입니다만은 해봅시다. 주님으로부터 우리에게 계명이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내가 어떻다가 아닙니다. 내가 속한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냐를 드러내요. 내가 속한 이 세상이.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기존의 내가 속한 그 당시에 속한 바리새인 세계아닙니까? 바리새인 사두개인 세계아닙니까? 그 세계와 예수님의 이야기가 합체 된다면 예수님은 죽었게요? 안 죽었게요? 안죽었지요.
그러면 예수님 죽었던 이유는 뭡니까? 지금 그 당시에 제자들에 속해있고 바리새인에 속해있던 이 계명과 이 생각하는 율법 모세의 율법과 예수님의 모세율법이 이게 같아요? 달라요? 완전히 다르겠지요. 완전히 다르겠지요. 잘들으세요. 다르지요.
다르니까 바리새인이 주동되어가지고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죽였지요. 제말 거짓말 아니죠?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죽인 이것이 뭐가 되냐하면 이것이 새계명이 되는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이 코스를 밟아야되요. 이 코스를.
코스를 밟는 방법이 뭐냐하면은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그 다음에 뭐냐? 예수님을 사랑해야되요? 미워해야되요? 미워해야되요. 미워해야되요. 미워! 미워! 미워! 그런데 미워할 때 주께서 그냥 미워하라는 법은 없어요. 왜? 우리는 너무나 믿음이 좋아서 주님을 늘 사랑해요. 절대로 안 미워해요.
그런데 내 뜻대로 세상이 안되게 만들어요. 내 뜻대로 나 하는 일 뜻대로 안되게 되있어요. 내 아내가 예수 복음 받아 들이는데 미워해요. 내 성질. 내가 성질나. 세상 모든일이 어쩌면 그렇게 내 뜻대로 안되는지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도 그렇게 이야기 했거든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화요일날 대구 공부하면서 내 뜻을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주체가 아니고 자아라고 했죠. 자아에서 뭐로 바뀐다? 주체로 바뀌고 자아는 존재고 주체는 사건이고 제가 분명히 언급했지요. 바빠서 살기 바빠서 안들었겠지만.
지금 우리를 구원하는게 내가 나를 구원하는게 아닙니다. 내가 나를 구원하는 것 때문에 예수님은 계속 나에게 미운털 박힌거예요. 왜 내가 하고자 하는 내 구원을 주님이 왜 방해하냐 이 말이죠.
나는 이제 구원되고자 애쓰는데 주께서는 도와 주기는커녕 왜 그걸 막느냐? 이유가 뭐냐하면은 이 예수님 가는 코스 있잖아요. 그 코스에 접어들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래가지고는 잘 이해안되지요. 그러면 더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오늘 강의의 결정적 예인데, 집에서 남자들은 보통 늘 하던 빨래나 밥은 부인이 하지만, 남자들이 해야될 일이 있어요. 형광등 가는 것, 그리고 특별히 또 뭐 만지는 것, 여자들은 기계 기술이 없어서 그 중에 하나가 창틀 문이나 창문 틀이나 베란다있으면 큰 긴 문 있잖아요. 문짝을 청소한다고 바꾸고 뺄 때, 그 빼는 일 그 때는 힘쎈 남자가 해야되요.
문틀이 이렇게 있으면 문틀앞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문틀 앞에 서 있으면 문틀아 빠져라 빠져라 하면 안 빠져요. 참깨야 열려라 하면 안 열리듯이. 문틀아 빠져라 하면 안빠지거든요.
왜그러냐하면 여기에 뭐가 있느냐하면은 여기에 홈이 파져있고 홈이 하나의 궤도처럼 되어 있어가지고 문틀을 뺄 때나 넣을때는 반드시 이 궤도 밖을 튀어 나와야 문이 빠지고 문틀을 넣을때도 궤도에 맞춰야 이게 앞뒤로 자유롭게 되잖아요.
지금 우리는 뭐냐하면 제3의 영역, 제3의 위치에 서 가지고 구원받을려고 있는거예요. 주께서 만든 궤도에 들어갈 생각은 안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께서 만든 궤도가 뭐냐하면은 나는 세상으로부터 밉상 받아서 죽었다.
그런데 그 죽음이 바로 뭐냐하면 친구를 위해서 죽는 죽음이였다 라고 궤도를 만들어 놨어요. 그러면 우리로 하여금 제3의 지역에서 말씀만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이렇게 나오는 것은 이렇게 하는것은요 창틀아 열려라와 똑같은 거예요. 참깨야 열려라.
그렇게 해서는 안되고 주께서는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그 당시에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스스로 구원받고자 하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미워했잖아요.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왜냐하면 그 당시에 유대인이 갖고 있던 환경이나 지금 우리 이 세상이나 다 유황불 맞아야 마땅한 똑같은 어두운 세계이기 때문에 똑같은 사고 방식이 뭐냐하면은 세상의 하늘과 별 모든 것이 누구 중심의? 나 잘되기 나 살기 위한 중심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우기는 겁니다.
이거 없었으면 이거 아니면 변검사 창문밖으로 뛰어내릴 이유가 없잖아요. 그 사람이 혹시 교회다녔는지 그건 모르겠어요. 교회 안다녔겠지 교회다녀도 마찬가지겠지만. 교회 다니는 장로도 관악산에서 나무에 비자금 때문에 자살, 장로도 자살해요.
장로라고 믿음이 장로라고 믿음이 있으면 애초부터 장로가 안되겠지요. 교회에서 장로를 안시켜주지요. 믿음있는데 왜 시켜줍니까. 돈을 빼내는 돈은 안주고 난 예수만 믿겠다하는데 장로를 시킬수가 있겠어요? 안되지.
우리는 자꾸 나 구원받겠다. 죽어서 천당 가겠다하니까 이 궤도 속에 생각 안하고 이 궤도가 뭐냐 예수님 공생애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입수해가지고 어떠한 수모를 당하고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주고 받고 하는 가운데서 이 세상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으며 배후에 악마가 있으며 그 악마에게 어떤 인간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다 노출되잖아요.
일부러 노출시키라고 예수님께서 멘트를 그렇게 날린겁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에게 영생이 없느니라.’ 말을 왜 그런 멘트를 날립니까? 결국은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온 사람들은 다 가라 이말이죠. 진짜 다 갔잖아요.
가고 난 뒤에 보니까 12제자 남아 있거든요. ‘너는 왜 안가냐?’ 라고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뒤에 무슨 말이 있죠? 없다죠 없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생각하는 선교나 전도는 애초에 성립될수 없다가 되는거예요.
인간이 되어서 죽어서 천국가고싶은 사람 모든 인간은 다 그런 소망을 갖고 있는데, 그런 소망자체가 어디서 온 겁니까? 사단에서 온거예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추방할 때부터 그건 하나님께서 큰 실수 했다는 겁니다.
인간을 추방시키지 말아야했지. 그 선악과 하나 심으면 되지 그거 하나 따먹었다고 그렇게 닦달내는가 이렇게 되는거예요.
개인적 구원에서 봐서는 선악과 따먹었다고 그게 뭐가 대수냐 하겠지만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피조물들은 피조물들이 해야될 일은 개인이 어떻게 행복하냐가 목적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가 앞에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구조가 됬느냐?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피조물이 있는겁니다.
제가 설교시간에 강의 시간에 벌써 두 번이나 이야기 했는데 세 번째 이야기 합니다. 이사야 6장에서 천사가 날개 6개있지요. 2개는 발을 가리고 2개는 몸을 가렸다 이말이죠. 이것을 뭐라고 설명했던가요?
모든 피조물들은 자기 수치됨을 자기 존재됨을 가리지 않으면 세 번째 날개가지고 뭡니까? 영광을 돌리죠. 자기를 가려야 영광이 되고 자기를 안가리면 영광이 안되요.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뭐 가릴게 있어야지요. 파닥거릴게 없는거예요.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화로다 나로 망하게 되었다.’ 완전히 그대로 벌거벗게 노출된거예요. 자기만 그런게 아니고 이 백성 전부가 다 망한겁니다. 주님께서는 딴 것은 안 입혀주고 입술만 거기에다가 추가적으로 이미 죄 용서 했다는 제단에서 나온 숯불 가지고 찍어서 입만 살아서 이사야가 할 것은 이제 입만 살은거예요.
아랫도리 잡아죽이던 창에 찔려죽이든 관계없어요. 입만 죽을 때 까지 입만 살은 거예요. 입만 살았어요. ‘제가 가겠나이다.’ 이사야 죽으면 물에 입만 둥둥 뜨는거예요. 이 악한 세계에서 이사야는 계속 말씀만 하나님 언약만 외치는 겁니다.
그 이사야의 모습이 누구의 모습입니까? 예수님의 모습 아닙니까? 그 예수님의 모습이 여기에 하나의 창틀에 홈을 파서 궤도를 구성해요. 그럼 주님께서 성령께서 우리를 제3의 자리에서 ‘하나님 저 예수 사랑할께요! 저 예수 믿습니다!’ ‘이리와!’ 해가지고 아예 궤도 속에 집어넣어버리면 그 바리새인이 누구란 말입니까?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내가 바리새인인고 서기관이고 사두개인이란 사실을 그걸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그걸 느끼게 만들어요. 인간이 살기 위해서 무슨 짓도 다 합니다. 주께서 계명을 주게 되면 그 사람은 결산 장부가 있어요.
장부가 마음속에 장부가 있어가지고 ‘오늘은 착한 것 7개, 나쁜거 한거 3개, 어휴 잘했어 잘했어 잘했어~~’ 자기가 자기한데 막 잘했어. ‘오늘 어떤 유혹이 와도 이겼어. 잘했어 잘했어 잘했어 잘했어.’
그런 짓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겁니다. 그리고 본인이 스스로 잘했다고 하면 좀 미친사람되겠지만 교회가니까 목사가 잘했다고 하네. 온 교인들이 전부 다 서로서로 칭찬하기 바빠요.
칭찬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뜻이 그런 뜻이라고 막 우겨가면서 서로 칭찬해주고 뭐 로마서 갖다 대면서 서로 위하라고 하니까 여기가 친목단체인지 교회인지 구분을 못해요. 전부 다 서로 사랑한다고 바빠. 서로 사랑하기.
주님은 사랑 하나도 안하고 서로 사랑하기 바쁜데 그 짓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그들이 원수였으나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는 그들이 뭐가 됬습니까? 친구! 친구아닙니까. ‘우리 친구아이가.’ 이렇게 되버리는 자기들끼리 친구가 되버리는거예요. 12제자들은 도망 다 가버리고.
제가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하면은 인간이 구원받고자 하는 그 모든 것은 사탄의 생각이고, 그리고 그 사탄의 생각에서 인간은 결코 자유로울수가 없고, 이것은 주님께서 그런 모습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 궤도위에 올려놓는 작업이 필요한거예요.
그러면 궤도에 올려놓을려면 궤도가 완성되야되요? 미완성되야되요? 완성이 되어야 올려놔요. 실컷 완성됬다하니까 공사중 그러면 안되잖아요. 그 인디아나존스 영화보면 나오잖아요. 그 탄광촌에 궤도가 있는데 신나게 이제 인디아나존스 그 주인공이 달립니다.
달리다 보니까 끊어졌어. 관객들은 이제 탈출 성공했다 했는데 탈출 성공 못했어요. 중간에 막 끊어져가지고 나중에 튀어나오는데 절벽으로 튀어나와가지고 아 그때 볼 때 아슬아슬 했어요.
교회가서 목사 시키는데로 했는데 궤도에서 끊어져 버렸어요. 제자 훈련 10단계 다 했는데 그 다음부터 지옥이다. 기가 막히지. 이 궤도가 뭐냐하면은 너 잘났다 궤도가 아니라 예수를 죽인자가 누구다? 내가 예수를 죽인자와 한통속이다라는 것을 갈수록 느끼는 내가 죄인중에 괴수라고 느낄 때 그 궤도에 뭐가 있느냐 바로 십자가 있는거예요. 십자가.
다시 말해서 우리보고 주께서 이루신 그 계명, 주께서 홀로 이룬 계명에 합류케 해서 모든 계명을 다 이룬 뭐로 간주해줬어요?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랑은 누가 이루게 하십니까? 누가 합니까? 우리가 이루게 하십니까? 누가 이루게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궤도로 완성되게 누가 찾아오신 분이 있어요. 완성되었다 해서 프랜카드 ‘축! 구원 완성’ 프랜카드 들고 성령님이 찾아옵니다. 성령이 찾아와가지고 구원완성의 그 도장을 가지고 우리 마음속에다가 도장을 팍! 찍는데 성경은 그 도장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도장을 도장이라고 해요.
‘인’ 성령의 도장을 팍 찍어버리면 그것은 수시합격이 되는 겁니다. 수시합격. 수시합격의 뜻이 뭐냐하면 시험안치고 실습으로 합격되는거예요. 실습 실기로. 하여튼 공부 못하는 것들은 수시 되야되요. 시험치면 안되요. 불리해. 실기로서 합격시키는 것.
도장을 찍어 놓으니까 이 도장 찍은 동시에 뭐가 완성되었습니까? 친구를 위해서 목숨 바친 사랑이 완료가 되어 버렸어요. 완성이 되었으니까 어떻게 되느냐? 그 다음에 완성이 되었으니까 이 궤도 틀에 홈틀에 이제 올라왔습니다.
서서히 이 문틀을 주께서 밀겠지요. 밀면 전에는 멀리 보이던 그 십자가가 점점 문틀 가까이 가게 되면 뭐가 크게 보입니까? 십자가가 크게 보이겠죠.
십자가가 크게 보이면 동시에 크게 보인다는 말은 나는 내가 죄인중에 괴수라는 것이 크게 느껴지면서 동시에 십자가가 크게 느껴지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해놓고 그 다음에 뭡니까? 그러니까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아 사랑이라는 것이 이게 바로 사랑이군요. 천하 죄인을 죄인을 이렇게 아무 댓가 없이 예수님의 자기 피로서 생명으로서 이렇게 건져주신 이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군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 에베소서 3장 한번 봅시다. 사도바울이 기도를 어떻게 하는가 한번 보세요. 3장 17절 사도바울이 기도한 것을 우리가 약간 컨닝합시다. 사도바울 지는 무슨 기도 잘한다고 할 때 에베소서 3장 사도바울의 기도라 합니다. 꿇어 내가 무릎을 꿇고 비노니, 무릎꿇고 비는 기도 내용 누가 다른분이 한번 크게 읽어보시렵니까.
3정 17절 :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예 이것을 간단하게 하면 ‘주여 저들이 풍선이 되게 하옵소서.’ 빈 풍선이 되게 하옵시고 그 풍선속에 누가 들어간다? 그리스도의 완성이 사랑이라는 계명으로 들어가게 해가지고 그 다음에는 뭡니까? 그 풍선에 들어간 바람을 휘이~휘~ 계속 불으시는 거예요.
불면 뭐가 커지겠습니까? 넓이가 넓어지고 길이가 길어지고 높이가 높아지고 깊이가 깊어지겠죠. 그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어떻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존재 어떤 식으로 살아왔다는 것이 더욱더 알아지겠죠.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성령의 죽으심과 우리 앞에 등장하기 때문에 십자가가 복음이거든요. 왜 죽었는 지를. 전에는 희미한데 아 죽지아니하면 살과 피가 없었으면 나는 아버지께 갈 수 없는 천국에 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늘 이렇게 깨닫게 해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작업을 위해서 뭐가 필요하냐하면은 우리가 생각하는 환경, 그 환경을 누구 손에 이미 넘어갔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움직이시는 환경으로 이미 넘어간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환경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어떤 면을 드러냅니까?
우리가 죄 됨을 드러내겠죠. 그러면 우리의 죄가 뭐냐하면 내 힘으로 내가 나한테 내가 관리해서 내 힘으로 바르게 살아서 경건하게 살아서 내가 그동안 모아놓은 비축해놓으 나의 잘남과 의로움과 이것가지고 구원받고자 하는 예수님을 죽였던 그 바리새인의 환경있잖아요. 그 환경을 우리는 답습하고 답습하겠지요.
왜? 같은 인간이니까. 우리는 같은 육이니까. 제가 지난 그 낮에 낮 설교때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마귀가 결정타를 먹이는 마지막 우리의 발목을 잡는 마귀의 결정적 무기가 뭐라고 했습니까?
‘너는 이 땅에 살면서 절대로 남한테 수치스럽게 살아선 안된다.’ 그게 우리의 빠져나갈려고 하면 기어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 그 무기예요. ‘너 그러다 우사당한다. 웃음거리 되는거야.’ 그래서 제가 그런말을 했잖아요.
여러분 평소에 어떻게 뭐 때문에 살아갑니까? 어떤 뭐 때문에 행동하십니까? 그 행동하는 것 연관해보니까 다 무엇과 연관되어 있어요? ‘나는 절대로 남들 평가에 수치스럽지 않도록 해야지.’ 이게 모든 매사에 우리 생각과 행동과 의지와 결심에 속속들이 다 들어 있어요.
‘이정도하면 나도 뭔가 세상에 나갈만하지.’ 그걸 계속 견제하는 거예요. ‘이러면 남한테 웃음거리 안되지.’ 그걸 견제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누굴 구원합니까? 세리와 창기, 이미 나락으로 떨어져서 더 이상 웃음거리 될 것도 없는 세리와 창기와 강도 살인 강도 그런 사람들을 저주 받아서 피 흘리고 있는 혈루병 여인들, 그런 사람들 또 기생 라합 그런 사람들을 굴비 꿰듯이 보란 듯이 굴비 꿰가지고 쫙 보이잖아요.
‘봐라! 이들이 구원받았다.’ 그럼 사람들은 뭐라 합니까? 우우~~~~~놀리겠죠. 문둥병자, 소경된자, 날 때부터 소경된자. 누구 때문에 저주 받았습니까? 그렇게 유명한 사람들. 굴비 꿰듯이 딱 올려버리면 심지어 간음하다 현장 잡힌 여인들. 올려버리면 다른 사람들 뭐라고 합니까?
다른 사람은 오늘 제목 이걸로 할까요? 우~~~우~~우~~ 막 놀리는 거예요. 상대방 타자가 칠려고 하면 이쪽에서 우우~~ 상대방이 자유투 넣을라고 하면은 우우~~~막 놀리듯이 우~~~놀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 놀리는 그 놀림속에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그런 나를 비웃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못되처먹은 거예요. 우리자신이. 그 정도로 우리 자신은 주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항상 잊어버리고 남들 평가에 신경 더 쓰고 ‘적어도 목사 내가 이 정도는 되야되.’ 자꾸 이 정도는 되야되 이것을 놓을 생각을 안해요. 참 못되처먹었어요.
이 말은 뭐냐. 옛날에 유대인들이 이방인 무시했잖아요. 그런데 백부장 구원하잖아요. 이방인 무시하니까 백부장 구원하지요. 이방인 무시하니까 사마리아여인 구원하지요.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얼마나 우리가 그동안 속아왔다.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은 내가 남보다 더 못되서 아니라 한 통속으로 통이 돌아가면 그 오크통 술통 돌아가면 같이 돌아가잖아요. 우리는 이미 이 세상과 더불어 한통속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아이고 검사님 영감님 영감님 얼마나 나이 어린게 영감 소리 들으면서 살았겠습니까? 검사될려면요 공부 잘해야되요. 요새는 점점 비율이 8%인가 10%아니면 검사 판사 끼지도 못해요. 사법연수에서. 그야말로 천재중에 천재입니다. 우병우처럼 소년천재.
천재니까 그 고향 사람들 일가친척들 얼마나 가문의 영광이겠습니까? 뭐 나라살리기 위해서 뛰어내리는게 아니고 그것도 화장실에서 떨어져가지고 완전히 그 시체가 얼마나 몰골이 끔찍했겠어요.
다시 이야기 합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본인이 그렇게 성질드러워서? 아닙니다. 누가 만들었어요? 뭐 JTBC가? 예? 그놈의 조선케이블이 그렇게 만든거예요? YTN이 만들었어요? MBC가 만들었어요? 세상이 그렇다 해도 왜 그런 세상을 왜 의식합니까?
제가 끝으로 묻고 싶은거예요. 세상이 그렇다 해도 좋은데 왜 우리는 그 세상의 평가를 왜 들어야하느냐. 그래서 제가 주일 낮에도 했고 지난 수요일에도 이야기 했잖아요. 믿음이 있다는 말은 뭘 무시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평가를 개무시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있는게 아니예요. 수요일날 야곱이 뭘 봤습니까? 사다리를 봤다고 했지요. 그 순간 야곱은 세상의 모든 잘났다 하는 것은 완전히 이건 인간도 아니다. 시끄럽다 나는 본게 있다는 거예요. 사다리를.
주님의 그 하신 것을 이렇게 정말 은혜를 받아버리면 이제는 그동안 내가 살았던 주변 사람들의 관계가 이건 문젯거리가 안되고 주님이 나한테 뭘 해주었는가를 생각해야되요. 이게 뭐냐하면 문틀에 있는 이 궤도예요. 궤도. 홈파인 궤도 있죠?
여기 올라가서 이렇게 주께서 십자가 보이는 쪽으로 밉니다. 밀면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가 점점 더더 많아지겠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하든지 부활에 참여하기위해서 어디로 달려간다? 부활에 참여하기위해서 어디로 달려간다? 십자가로 가는 거예요.
자, 십자가 얘기 다시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라 하는 것은 어디서 버림받고 어디서 버림받았다고요? 세상에서 버림받고 또 누구한테 버림받고? 아버지한테 버림받고. 버림받고 버림받고. 왜냐하면 예수님도 이 세상에 입수했기 때문에. 오늘 제목입니다. 입수. 죄의 입수.
예수님이 죄에 입수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예수님은 이미 죄인의 한 사람이예요. 죄된 육신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태도는 단호했습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버림받는게 주의 뜻이예요.
그런데 우리는 뭐라고 버림을 안 받을려고 해요. 세끼 다 챙겨야되고 뭐 먹을래? 짬뽕 나는 짜장면. 탕수육 대자하나 시켜서 우리가 뭐 잘났다고 더 살아야되고 월급 올려 달라고 촛불하고 대모하고 비정규직 되면 어떻고 정규직 되면 어떻습니까?
내가 대통령되면 모든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다 만들어 버릴텐데. 어떤 사람은 정규직 되고 어떤 사람은 비정규직 되니까 이게 불편한데 아예 처음부터 다 비정규직 만들어가지고 각자를 전부 다 개인의 경영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다 경영자, 경영자들만 만들어요. 경영자들. 내 노동력 제시하는 나의 경영자. 집사님 제 생각이 어떻습니까? 괜찮지요? 계약직으로 만들어야지요. 정규직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 정규직은 일본식 경영방법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정리해 봅시다. 현재 우리의 입장이 뭐냐하면 이미 마귀 이후예요. 이미 마귀가 우리의 육신을 잡고 있는 이상은 우리 자신을 알아야됩니다. 나는 어떻다? 나는 무조건 내 중심으로 내가 사는게 최고다! 그걸 분명히 수긍해야되고 동의 해야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 삶이 최고 아닙니까? 예? 남 사는게 최고입니까? 내 사는게 최고이고 그리고 세상의 해와 달 별 심지어 놀러갈 때 비오면 안되요. 왜? 내가 놀러가는데 내가 골프 치러가는데 왜 비와! 무조건 비 멈춰야 되요.
내가 천자야. 내가 천자. 내가 황제예요 황제. 요즘 우리집에 황제가 등장했습니다. 뭐 할아버지 이제 공부도 못해. 컴퓨터로 공부할려면은 손주가 와가지고 이 자리 자리도 지정해줘요. 이 자리 앉아야되고, 밥 먹을려고 하면 숟가락 뺏어가지고 밥을 자기가 먹여주겠데. 다 쏟아버리고.
진짜 설교 말씀처럼 예수그리스도 중심이 됬다가 완전히 외손주 중심, 우리 가족이 외손주 중심으로 다 돌아가요. 전부 다 자기 마음대로예요. 자기 마음대로. 아마 그 모습을 보고 우리도 옛날에 그랬다가 아니라 지금 우리도 그렇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외손주나 여전히 우리도 그것의 연장, 존재의 증대, 그대로 연장되어가지고 우리도 역시 말은 안하지만 굽신굽신 거리지만 복종은 안해요. 돈 때문에 굽신거리지만 역시 내 중심, 모든 것이 내 중심밖에 모르는 여기서 우리는 탈피한적도 없고 내가 탈피하기 싫어. 주님 위해서 살기 싫어요 우리는.
왜? 내가 나를 위해서 살아야지 왜 주님을 위해서 삽니까? 따라서 우리는 끝까지 우리는 점점 더 나는 나 밖에 모른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구원받는 계명은 우리가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늘 본문대로 주께서 본문대로 친구로 주께서 간주해 주셨기 때문에 그 간주한 후 절차에 의해서 이렇게 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가 와서 그 십자가의 작용으로 십자가만 드러내고 우리는 철천지 십자가의 원수였음을 세리처럼 보게하는거예요.
‘주여.’ 고개도 못들고 ‘죄인은 제가 죄인입니다.’ 라고 할 때, 우리는 수시합격이라는 도장을 이만한 도장 가지고 우리를 이미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이 존재하시는 계시다는 티를 내는겁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나는 여러분들에게 예수님 십자가에 죽은 것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도바울의 말을 한번 보세요. 말이 ‘이것 알아라.’가 아닙니다. 이거 뭡니까? 이거 외에는! 얼마나 강조해요.
이것 외에는 그 다음에 No, 단호하게 No예요. 이것외에는. 니가 귀신을 쫓아내고 선교를 하고 헌금을 하고 십일조 하고 그딴거 다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 딴거 말고 이거 이거! 이거! 달랑 이거 외에는 다 버려라.
이게 뭐냐하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이예요. 그걸 줄이면 뭡니까? 죽음이예요. 특이한 죽음이예요. 우리의 죽음은 죄 때문에 죽는데 주님의 죽음은 뭡니까? 죄 때문에 죽는게 아니고 우리의 환경을 새롭게 조성하기 위해서 전에는 무슨 환경? 죄의 노예가 되는 환경인데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무슨 환경으로 바뀌었습니까? 의의 노예예요.
이래나 저래나 우리는 노예라니까요. 노예란 말은 이 환경에 대해서 우리가 환경에 대해서 입댈거 없고 말걸거 없어요. 주어진 환경이 나를 의인되게 만드는 환경으로 조성한거예요. 어떤 방법으로? 우리로 하여금 뭐되게?
죄인되게 하고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환경을 조성하시는 그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친구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에 참 좋은 친구죠. 친구로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분명히 죄인데 주님의 계명에 입각해서는 그게 의가 되는거예요.
멋진 의의 인큐베이터가 되는겁니다. 의를 만들어내는 생산하는 사랑을 생산해내는 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죄 짓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가 죄 짓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다. 어찌 이 죄를 안 지을 수 있으랴.
다른 교회 들으면 기절합니다. 결국 저 양반은 성경에서 나가지 말라했더니 밖으로 더 튀어나갔구나. 제가 성경 밖에 나간게 아니고 성경 속으로 더 들어간거죠. 왜? 뭐 외에는? 뭐 외에는 이니까 십자가잖아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했다 라고 했기 때문에 십자가 말고 다른 이야기 많잖아요. 성령의 열매 뭐 부활 있잖아요.
그걸 지금 다 구겨서 다 어디가 집어 넣었습니까? 전부 다. 구약 여리고성 함락, 천지창조, 선악과 그 모든 것을 그냥 나둬버리면 이것도 알아야되고 저것도 알아야되고 알아야 될것이 두가지 세가지 네가지 계속 생기잖아요.
그래서 그것은 사도바울 뜻이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 안에다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까지 다 구겨 넣어가지고 잘 구겨가지고 어디다가 집어넣어요? 십자가에다가 확 집어 넣어버리면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오죠.
나는 뭐만 자랑한다고요? 나는 오직 십지가만 자랑한다. 십자가만 자랑한다. 내게는 십자가 외에는 아! 그것도 외에는 이네. 나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것이 없노라. 이제 사도바울의 성령받은 사도바울의 귀신도 아는 사도바울의 그 취지를 아시겠지요?
그렇게 많은 말을 편지를 그렇게 해 놓고는 뭐로 다 규격합니까? 오직 십자가로 딱 해버리는 거예요. 어떤 목사는 뭐 피만 증거한자는 이단이라고 나를 겨냥해서 그런 소리 했겠죠. 피만 증거하는 것은 이단이다.
그 사람이 그 주장하는 이유가 뭡니까? 성경에는 피가 없다는 말이 있는데 다른것도 있잖아 이거거든요. 그 말 맞아요? 계명은 몇 개인가? 한 계명밖에 없지요?! 피 사랑 그것 밖에 없지요.
왜 그렇게 계명들을 많이 늘어놓느냐 하면은 자기가 제3의 관찰의 자리에 서 가지고 문틀보고 참깨야 열려라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성령께서 집어다가 그 문틀 궤도에 안집어 넣으니까 자기는 바리새인하고 똑같애 바깥에 서 가지고 ‘보자 어느 계명이 필요하나?’
십자가도 필요하고 십자가 믿습니다. 어 부활도 있네. 부활도 믿습니다. 십자가 믿고 부활도 믿고. 어 재림도 있네. 재림 놓치면 666박아서 안되지. 재림도 하고, 주워 모아서 마트에서 물건 이 만큼 사듯이 이 만큼 사가지고 감당을 못해.
성부도 섬겨야되지, 성자도 섬겨야되지, 성령 섬겨야되지, 삼위일체 다 섬겨야 되니까 시어머니가 세분이다. 제3의 중립지역은 없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가 우리를 죄인의 자리에 완전히 궤도에 올려가지고 우리 가는 길이 예수님이 가는 길로 만들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로만 친구 아니라 친구 가신 그 길을 친구 답게 주를 위해서 목숨 바칠 수 있도록 십자가만을 기뻐할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이 계명이 성령을 통해서 완성되었음을 계속 돌아보면서 추후로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