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욥기4강

아빠와 함께 2017. 9. 2. 17:07

욥기 제 4강 


욥이라는 무대는 층이 두 층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오페라 극장에 보면 2 층에 베란다 층이 있습니다. 여기는 하나님과 사탄이 이야기하고 있는 윗동네가 있고, 여기는 윗동네의 사정을 철저하게 모르는 아랫동네가 있습니다. 아랫동네에는 욥과 욥의 가족, 특히 욥의 아내와 친구들이 등장합니다. 욥의 가족 중에서 한꺼번에 죽지 않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가족이 아내였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가족인 아내가 하는 소리가 “에라! 욕이나 하고 나가 죽어라”였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 하면, 욥을 철저하게 고립시키는 역할이 아내와 친구들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과 사탄의 주제가 뭐냐? 욥 개인에 관한 문제입니다. “욥 어떠냐? 괜찮지?” “괜찮기는 뭘 괜찮아.” 이렇게 욥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하나님과 사탄이 욥 개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을 아랫동네에서는 모르고 있지요. 아랫동네에서는 ‘하나님은 온전하시다. 선하시다. 공의롭다. 주신자도 가져가시는 자도 여호와시다’ 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윗동네에서는 안하는 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윗동네에서는 이야기가 끝난 상태지요. 표적수사라 하지요. 노리고 들어가거든요.




윗동네에서는 욥을 노리고 들어가고, 아랫동네에서는 ‘우리는 친구 아이가!’라고 하면서 잘 믿고 있는 친구들과 아무 일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윗동네에서 욥을 가지고 내기를 하니까 아랫동네에서는 점점 더 윗동네의 영향을 받는데, 욥 하나 남겨두면서 점점 더 거리를 두고 떨어져 나가는 전개과정이 필요했던 겁니다.




학교에 그런 유머가 있지요. 애들이 죽 운동장에 있는데 선생님이 “여기서 축구 시범 보일 사람?” 하니까 애들이 축구 수비수 들이 사용하는 오프사이드작전을 써서 왕따 시킬 학생 한명 남기고 뒤로 다 한꺼번에 빠져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오! 네가 시범보인다는 말이지?” 이렇게 되거든요. “예? 저는 아닌데요” 하고 보니까 친구들이 다 뒤로 물러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놈 하나, 조지자. 한 놈만 조지면 된다’고 해서, 이미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서 욥은 유명인사가 되었지요? 그런데 아랫동네에서는 아직 섞여 있습니다. 확실하게 그 주체가 주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의 이야기전개를 통해서 우리는 뭘 알아야 하느냐 하면, 욥 한사람에 하나님께서 사탄과 이야기하는 모든 것을 다 담아내는 전략을 이미 하나님이 챙겼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 들여야 합니다.




욥 하나에 이 우주의 모든 비밀을 담고자 하는 여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처음에는 욥과 욥의 친구들이 공통적으로 다 아는 이야기가 화제가 되어서 주고받고 합니다. 그런데 점차점차, 뒤로 갈수록 욥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를 도데체 어디서 얻느냐?”




보통 광산에 가면 땅을 깊이 파잖아요. “깊이 파도 너희들(욥의 친구들)이 이야기 하는 것은 마치 깊이 파고 난 광산이 이미 매장물을 다 상품화 시키고 빈 껍데기만 남아 있는 광산과 같다” 이말 입니다. 되풀이해서 잔소리를 잔소리대로 하는데, 새로운 알맹이가 정보로 담겨 있지 않는, 맨 똑같은 소리만 되풀이해서 더 이상 얻을 것이 없고, 지혜가 완전히 바닥이 나버린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왜 지혜가 바닥이 났습니까? 욥 중심으로 지혜를 재편성해야 하는지 모르고, 욥의 친구들은 ‘욥, 너와 내가 공통적으로 묶을 수 있는 공통된 지혜체제 안에서만 이야기’를 해 대니까 욥은 ‘너나 나나 다 알고 있는 지혜로서는 백날 이야기를 해 봐야 이미 바닥난 폐광과 마찬가지다’ 이말 입니다.




그리고 욥이 이런 표현을 해요. “너희들이 이야기 하는 것은 맛없는 계란의 흰자와 같다”고 합니다. 맛이 없다는 겁니다. ‘아! 그게 그렇게 깊은 뜻이 있었구나.’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저런 저 또 그 소리. 맨 다 아는 소리. 싱겁다’는 겁니다. 싱겁다는 말은 기대는 잔뜩 했는데 기대만큼 양이 안찰 때, ‘참, 사람 싱겁네’ 하잖아요.




처음에는 “계란, 참 싱겁다”고 좋게 나오지만, 나중에는 “너희들은 악한 놈이다”고 하니까 그들이 “욥, 네가 악한 놈이다” 하고 나옵니다. “욥, 네가 가난한 자의 팔목을 분지르고 가난한자들을 착취한 놈이 아니냐” 하고 나옵니다. 이것이 엘리바스의 말인데, 엘리바스가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어요. “욥은 남을 훌륭하게 잘 도와주고---.” 이랬어요.




나중에는 독이 받쳐 올라오니까 “에이! 너는 나쁜 놈이다”고 해버립니다. 왜 그렇게 ‘나쁜 놈’으로 가야 하느냐면, 지금 욥이 받는 그 고난과 형벌이, 죄의 분량만큼 주어진 형벌이어야 한다는 그 공식을 맞춰야 하니까, 자기들이 욥처럼 지금 이렇게 고난을 받지 않는 것은 욥보다 그만큼 죄를 적게 지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그들 생각에. 그래야 온전한 하나님이니까. 그래야 정의로운 하나님이 되니까요.




‘많이 죄지으면 벌이 많이 오고, 적게 지으면 벌이 적게 간다’고 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욥이 강하게 반발하지요. “죄지어도 떵떵거리면서 잘 먹고 잘사는 놈이 있더라. 그것을 반박해 보아라” 하니까 빌닷이 있다가 “너는 왜 자꾸 특이한 경우를 들이 대느냐? 우리는 보편적인 진리를 이야기 한다”고 합니다.




욥이 하는 말이, “그 보편적인 진리, 지혜라는 것이 폐광이라니까!” 더 나올 것이 없어서 비빔밥 그릇 긁어 보세요. “더 주이소. 더 주이소” 하고 계속 긁어 봐야 금속 긁히는 소리만 요란하게 나는 것 아닙니까? 욥을 통해서 아는 것은 사람의 한계입니다. 욥과 욥의 친구와 하나의 구성으로 짝이 되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소위 지혜라는 것으로는 하나님과 사탄이 인간을 장난삼아 내기를 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사탄이 하나님과 내기를 한다고 해서 양자가 속이 쓰리다든지 아프다든지 이런 것이 없잖아요. 그냥 내기 아닙니까? 그런데 밑에 있는 욥은 죽을 지경입니다. 이런 지경 속에서 과연 기존의 온전함이 깨어지면서도 그것이 다시 어떻게 온전함으로 회복될 수 있는지 욥기에 본격적으로 들어가 봅시다. 어쨌든 욥이라는 한 인격체에 모든 초점이 모아지는 겁니다. 결론은 뭐냐? 욥 자체가 지혜이며, 욥의 지혜를 완성한 것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욥이 예수 그리스도고, 베드로전서 1장 17절에 의하면 욥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미리 들어가 있다고 볼수 있죠. 그러니까 욥은 본인도 모르게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연기를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연기가 너무나 실제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단지 연기가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수난을 당해야 되는 겁니다.




우리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나옵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주체가 어떻게 형성 되느냐’ 하는 그 문제가 나옵니다. 아까 이야기 한 것을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욥기 1장에서 하나님과 사탄이 이야기 한 주제가 뭐였다? 욥이었다. 그러면 하나님과 사탄의 의견의 차이는 뭡니까?




하나님의 의견 - 욥이 갖고 있는 순전함, 의, 신앙이라는 것은 기존의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러한 주체에 의해서 생성된 것이 아니고, 욥 자신의 것도 아닙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지킨 것이 되는데 하여튼 욥이 갖고 있는 인내와 온전함과 순전함과 정직함은 기존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세상것들이 뭉쳐져서 된 주체로서의 신앙은 아니라는 겁니다.




신약으로 이야기하면 쉬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선물이다.’ 그러면 돼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는 것은 유대인들도 다 아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체적인 인물로부터 나온 신앙. 이 신앙은 이미 욥의 인내를 겪고 난 뒤에 욥의 위치에서 주신 신앙이기 때문에 우리가 평소에 생각했던 것과 이질적인 신앙이 성도 안에 파고 들어오는 겁니다.




그 신앙은 옛날에 가졌던 우리의 기존 신앙과의 갈등을 일으키면서 ‘아! 내가 바로 주님을 가해한 가해자며 주님은 나로 인한 피해자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사탄이 이야기 하는 것은 뭡니까? 사실은 하나님이 욥의 신앙이 어떠냐고 이렇게 직접 이야기를 하지는 않아요. 사탄이 이야기하는 것을 반대로 하면 되니까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지켜보자는 식이죠.




사탄이 이야기하는 온전함이라는 것은 돈과 자식이 만들어 내는 온전함이 ‘의’라는 겁니다. 돈과 풍부한 재산과 많은 자식으로 인하여 얻었던 신앙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탄아! 그것은 우리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그게 아니야”라고 여러분은 이야기 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사탄에게 시험을 한번 당해야 합니다.




“좋다. 네 신앙은 진짜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지, 재산이나 건강 같은 것으로 융합된 그런 믿음이나 의가 아니라 이 말이지?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것은 돈, 건강, 자식 같은 것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니라 이 말이지? 그래. 그럼 한번 진짜 그런지 해볼까? 해보자 그럼. 이제부터 너를 한번 조져볼게.”




사탄이 하는 이야기는 뭐냐? 평소에 두루 다니면서 봐도 만나는 사람마다 돈과 건강과 자식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만 만났기 때문에 사탄은 자신만만한 거예요. ‘인간? 그거 뭐 별거 있나? 한방이지. 뭐. 부르스 한 방.’ 그거 인생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신앙, 그거 취미 아닙니까? 종교라는 것, 그것은 하나의 놀이죠. 중요하지 않지요. 여유있는 사람의 한가로운 재미죠.




교회라는 친목단체에서 수련회 가서 놀기도 하고요. 얼마나 좋습니까? 문제는 돈이죠. 돈이 없는 교회라서 문제지요. 돈 많은 교회에 가보세요. 공짜로 얼마든지 수련회를 가는데요. 비싼 돈 내고 안가고요. 그런 교회를 얼마나 그리워합니까? 그러니까 사탄이 아주 자신 만만 해요. 대다수가 그러한데 ‘욥, 저가 별거냐?’ 하는 겁니다.




자꾸 하나님께서 욥을 특별대우 하시는데 하나님은 아브라함 언약식으로 지목하겠다는 겁니다. 지목을 하는데 사탄은 결국 하나님의 선택을 무화시킨다는 거죠. 하나님의 선택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사탄의 발상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내가 선택받았다’하는 그것이 무슨 중요한 문제가 되겠습니까?




평소에 ‘내가 선택받았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 선택으로 인해서 돈이 한 푼 더 생기느냐? 그러면 선택의 의의가 없잖아. 아무것도 아니네.’ 이렇게 되겠지요.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살아간다.’ 이거하고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살아가지만 어쨌든 기어이 선택을 받아야 돼’ 이거하고는 서로 전혀 상관없는 논리입니다.




이것은 전혀 방향이 다릅니다. 우리가 신앙 때문에 고민을 해도 선택되었기 때문에 고민을 하는 것이지, 고민한다고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일러 줬습니다만 (저 자신도 그렇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자꾸 신앙생활 하면서 자기에게 일어나는 사태를 수집해서 내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지, 혹은 못하고 있는지 그 수집된 증거물을 가지고 확증을 내려는 그런 오류를 참 많이 범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하지 말라고 ‘칼 바르트’가 이렇게 했지요. “선택은 당신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선택했는데 왜 당신들은 자꾸 당신들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느냐? 그것이 칼빈의 오류였다. 칼빈은 성경을 잘못 알았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이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4:3)




요한복음 5장에도 나오죠. ‘아들에게 심판의 모든 전권을 일임했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시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한복음 5:21-23)




폭포가 한꺼번에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두 단계로 폭포가 떨어지죠. 1단계는 하나님의 모든 선택의 전권이 그리스도에게 떨어져서, 그 다음에 2단계로 그리스도가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이 칼 바르트의 생각입니다. 폭포가 단계가 두 단계입니다. 예수님이 알아서 선택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 생각은 어떤 것인가? 두 단계가 아니라 한 단계입니다. 이 단계를 두 단계로 만들지 말고 밑에 있는 이 단계를 위로 올리면 돼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했다.” 이것이 성경 에베소서 1장 4절이잖아요. 아마 ‘칼 바르트’가 하도 기존교회가 예수그리스도 복음을 빼놓고 ‘선택했다’는 것을 복음으로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한 것 같아요.




‘선택했다. 누가? 하나님이.’ 이것은 유대인의 특수주의 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유대인의 선택사상'하고 다를 바 없이 똑같아요. 유대인의 선택사상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이것은 또다시 예수님을 죽일 위험성이 있어요. 예수님 안에서 선택한 것과 (에베소서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한 것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한 것과) 하나님 안에서 선택한 것과 달라요.




하나님이 선택하면, 선택받은 나는 그대로 있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면 내 운명이 그리스도의 운명으로 바뀌기 위해서 선택된 거예요. 나라는 것은 없어지고 (처음부터 없었는데), 그리스도의 인생으로 바뀌기 위한 목적으로 선택한 거예요.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고, 하나님의 선택은 나를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고, 나를 살리기 위한 선택입니다. 이렇게 달라요.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을 찌어다.”




사람이 원래 구원받기 위해서 환장한 놈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까 뭔가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 있으면 껌뻑 껌뻑 죽는 거예요.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면서 하나님께 엎어지고 ‘항상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는데, 그게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했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께 참 고맙다.’ 이것은 깨어져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선택되었지, 나 잘되라고 선택된 것이 아니다’

라는 쪽으로 바뀌어져야 한다는 말이죠. 

그리스도가 내 주인이 되어야 해요. 그리스도가 내 쫄따구 되지 말고. 

‘그리스도가 내 주인이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일에 나는 마음껏 활용되어야 될 그런 대상’

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욥은 그것을 몰라요. 욥은 그냥 ‘좋으신 하나님’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가지고 내기 하시는 일을 아랫동네에서는 낌새조차 못 차리고 있어요. 끝까지 몰라요. 다만 ‘참, 지혜가 없구나. 정말. 도대체 지혜가 있어야 말이지. 내가 왜 고난을 받는지에 대한 고난의 토대, 고생의 토대를 누군가 이야기를 해줄 사람이 없을까?’ 이렇게 탄식만 하고 울부짖을 뿐이지 그 내막을 알지 못해요. 하나님께서 장난삼아 내기 한것은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냥 장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제안한 것들, 돈과 건강과 화목한 가정. 그러한 것들이 없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믿는다면, 그렇다면 ‘그 믿음은 대체 욥에게서 나왔는가?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나왔는가?’ 하는 그 문제. 하나님은 욥을 가지고 두 가지를 건져내야 될 의무를 가지고 있었어요. (이런 것들이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이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이해한다는 것이 참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 두 가지를 건져내려고 하는 거예요. 첫번째는, 

사단이 말하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두 번째는 욥이 생각하는 신앙도 신앙이 아니다. 

욥기 끝부분에 가서 욥이 회개하죠. 재를 뒤집어쓰고서 ‘나는 이제 말도 안 하렵니다. 나는 이제 입을 다물겠습니다. 나는 죄 속에 파묻혀야 합니다. 나라는 인간이 왜 있는지 몰라? 있을 필요도 없는 인간이고 나쁜 놈입니다.’ 이런 식으로 한다고요.




사탄이 말하는 이것은 욥의 신앙고백으로 충분히 해결됩니다. 욥의 신앙고백으로 첫 번째 문제는 해결돼요. 그런데 욥의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이것은 욥의 주체 문제를 건드리지 아니하면, 다시 말해서 욥이라는 주체가 깨어지지 아니하면, 욥 속에 들어 있는 그리스도가 나오지 않도록 되어 있어요.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욥 안에 들어 있는 장차 올 그리스도를 찾아내기 위해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를 다 하고 있는데, 욥은 아직 거기까지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나는 왜 깨어져야 하는가? 나는 이유 없이 왜 죄인이 되어야 되는데? 그 이유를 누가 좀 이야기 해 달라’고 합니다. 주체자가 품고 있는 주체의 한계를 여과 없이 토로하고 있어요.




“그러면 목사님! 1번에서는 욥의 신앙이 옳다고 해놓았는데, 2번에서 욥의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욥의 신앙은 잘못되었다는 말입니까? 옳다는 말입니까?” 욥안에 뭐가 들어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왜 안합니까? 욥에게 다가서면서 욥이 전부라고 보지 않고, 욥의 신앙을 신앙되게 하는 그 무엇이 욥 본인도 모르는 상태에서 들어 있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상대할 때 ‘왜 하필이면 나에게, 왜 하필이면 내가 아는 사람에게, 아프가니스탄의 인질로 잡히게 하는 일이 생기게 합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내가 아는 목사가 왜 그런 식으로 죽어야 합니까?’ 이런 식으로 내가 하나님을 상대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자꾸 비켜가는 식으로 해요. “하나님! 저하고 상대 합시다” 하는데 또 비켜가네. “저하고 상대하자니까요?” 또 비켜가요.




욥기를 읽어 보시면 “하나님이여 욥의 친구들이 옳은지 욥, 제가 옳은지 재판장이 되셔서 양쪽에 대해서 좀 판정을 해 주세요. 중재자가 되어 주셔서 좀 판결을 내려 주시옵소서.” 이렇게 ‘재판을 열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대답을 안 해요. “재판날짜가 언제입니까?” 그래도 이야기를 안 해요. 계속 피해가요. 그러니까 욥이 “애라 씨! 내가 하나님이 되어서 내가 재판한다. 내가 옳다. 하나님은 잘못되었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때는 욥의 주체가 아직도 온전히 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자기 안에 뭐가 들어 있다는 것을 미처 발견 못하는 겁니다. 복숭아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단단한 복숭아씨가 들어 있지요. 그런데 복숭아는 그것도 모르고 자기가 물렁물렁한 것만 있는지 알고 착각하고, 그 안에 단단한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몰라요.




그때 네 번째 친구인 엘리후가 등장해서 깨버리죠. 욥의 세친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욥이 하나님에 대한 가해자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욥의 세친구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욥 2:11)은 욥을 향해서 “네가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욥아! 네가 우리 친구들의 말을 안들으니까 네가 잘못된거야” 라고 계속해서 인간들 수준에서 ‘옳다, 그르다’를 다투는데, 네 번째 친구인 엘리후는 “욥아! 너는 하나님의 대적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피해자로 만들었다. 피해자가 누군지 아느냐? 너 때문에 하나님은 피해자가 되었다.” 하나님을 피해자로 언급하는 경우는 네 번째 뿐입니다. 그것까지는 미처 욥이 생각 못한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고 난 뒤에 “욥 너는 악한 자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똑같이 악하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주석가들이 욥기를 보면서 헷갈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누구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를 몰라요. 욥의 주석가들이 욥을 보면서 난감한 것이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는데, 만약에 네 번째 친구가 제일 낫다고 편들어 버리면 1번, 2번, 3번 친구를 위해서 대신 제사 드리고, 기도하는 사람은 욥은 빠져버리고 대신 누가 해야 합니까?




네 번째 괜찮은 친구인 엘리후가 그 자리에 들어가야 하는데, 나중에 보니까 네 번째 친구는 이름도 없이 날라가 버리고, 하나님께서 엘리후에게 욕을 얻어먹은 욥으로 하여금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친구를 위해서 대신 기도하는 사람 되게 합니다. 그것을 결론으로 잡아서 욥을 재편성 해보면 네 번째 친구는 안 나타나야 맞습니다.




만약에 나타나도 이렇게 말해야죠. “욥아! 네가 왔다다. 너 아니면 희망이 없어. 역시 하나님은 너를 최고로 봐. 역시 하나님은 너를 위해 승리했어.” 이런 칭찬 일변도의 말이 네 번째 친국에게서 나와야 하는데 그 반대의 말을 합니다. “욥아! 너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악한 놈이다.”




그런데 네 번째 친구의 말처럼 “욥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악하다”가 되어 버리면 (여기서 주석가들의 고민이 나오는데, 첫 번째 이야기한 사탄의 주장이 무엇이었습니까?) “욥은 어떤 경우가 와도 하나님을 욕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하나님과의 내기에서 누가 지게 됩니까? 하나님이 지는 경우가 생긴다고요.




이것을 살리려니 이것이 죽고 이것을 살리려니 이것이 죽고요. 그래서 욥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르도록 지혜를 막아 버려요. 마치 양수겸장(兩手兼將)처럼 포장을 받으려니 차장을 받아야 하고 차장을 받으려니 졸장을 받아야 하고, 온 사방에서 공격이 들어오니 피할 곳이 없어요. 주석가들이 뭘 모르냐 하면, ‘욥의 믿음’, ‘욥의 믿음’, 하는데 욥에게 믿음을 주신 분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줍니다. 욥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욥을 죄인 되게 만들어서 주십니다. 그런데 죄인 되게 만들어 놓고 욥에게 주었다고, 해서 욥이 무가치한 존재는 아니다 이 말이죠. 똑똑한 일류보다 겸손한 욥을 하나님은 처음부터 원했던 겁니다. 휼륭한 바리새인보다 십자가진 강도가 내뱉는 고백이 더 훌륭하고 바리새인보다 예수님께 울면서 기름붓는 막달라 마리아의 그 사랑모습이 하나님은 더 귀한 겁니다.




결국 하나님은 자기가 주신 사랑에만 도취돼요. 우리의 행동에 깜박 반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기가 주신 사랑에 의해서 자기가 반해버리는 겁니다. 이것 했다고 결론 다 내렸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제 본격적으로 더 깊이 들어갑니다. 다시 정리해 봅시다. 첫 번째, 사탄이 욥을 가지고 내기건 사탄의 생각이 일반적으로 보편적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특이성을 주죠.




하나님은 “네 말이 맞는데 욥은 다르다”는 겁니다. 사탄의 말이 “다르기는 뭐가 달라요? 같은 인간인데. 같은 인간인데 별수가 있습니까? 돈 빼앗아 가고, 자식죽게 하고, 몸 아프면 어느 인간이든 다 하나님을 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 몰라요? 이 사탄도 이렇게 잘 아는데요. 인간은 다 그렇고 그런 인간입니다”라는 이야기가 욥에 나온 이유가 뭘까요?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의 마음상태가 어떤 마음상태로 바라보느냐를 사탄이 대변해서 이야기 해주는 겁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생각할 때, 우리는 뭘 하나 얻어 건질까 싶어서, 내가 원하는 욕망하나 달성할까 싶은 마음으로 다가섭니다.




‘돈이나 좀 주고 자식 잘되고 몸이나 튼튼하게 되는 그 정도, 다른 욕심 안 챙기고 그 정만 하면 제가 감사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십자가를 믿으면서 속으로는 뭐라고 합니까? ‘주여! 욥처럼 건강을 빼앗길지라도 저는 주님만 사랑합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아까 이야기한 세 가지 조건들을 다 건지겠다는 겁니다.




욥처럼 내가 그대로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훌륭한 고백을 다 하다니’라는 것에 대한 성과급으로 평소에 내가 은근히 노렸던 세 가지를 몽땅 챙길 수 있는 그런 로또 당첨이 될 줄을 어떻게 알겠냐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들의 은밀한 노림수인데 그것마저 사탄이 잘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탄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자리까지 완전히 욥을 밀어부칩니다.




은밀하고 뭐고 간에 아예 탈탈 털어버립니다. 애들이 손도 안 씻고 과자 같은 것 숨기고 모래장난 하고 있으면 엄마가 와서 ‘털어라!’ 하는데도 말을 안 들으면 바짝 들어서 거꾸로 들고 털면 다 끄집어져 나오죠.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뭘 허용하셨는가 하면 ‘털어라’는 겁니다. 두 번다시 욥에 대해서 ‘욥도 뭐 똑같은 인간이지’라는 말이 안 나오도록 다 털어버리는 겁니다. 건강이고 사랑하는 아내이고 뭐고, 친구까지 원수 되어 버리고 다 털어 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이것을 “자기를 부인하고”라고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냥 놔두면 불교가 되어 버리죠. 그 다음에 뭡니까? “자리를 부인하고” 뭘지고?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를 어떤 경우에 집니까? 나는 뭡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욥이 재를 뒤집어쓰고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그것을 하고 가라 이 말입니다.




“가라!” 명령이죠? 이 명령은 누가 지킵니까? 명령이라는 말은 이 명령대로 우리는 절대로 못 지키는 겁니다. 이 명령은 명령대로 성령께서 그대로 집어넣지요. 제가 지난시간에 이야기 했죠. 우리가 책장에 집어넣은 책을 다 빼버리고 주님께서 원하는 책을 다 집어넣어 버려요. 혼돈이야기를 좀 해봅시다. 처음에 세상은 혼돈이었습니다. 혼돈이 질서 잡히는 경우는 명령밖에 없어요.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더라.” “있으라” 자체가 능력입니다. “있으라” 해놓고는 “아~! 없네. 내가 말한 것 안먹어 주네.” 이런 경우는 없어요.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화가 있을찌어다”라고 했으면 그냥 화가 있는 거예요. “저주가 있을찌어다” 하면 그냥 저주가 있는 거예요. 무화가 나무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무화과 나무야! 네가 열매가 없구나. 저주 받아라” 했더니만 무화가 나무가 말라 죽었잖아요(마태 21:10).




그게 예수님께서 창세기 1장을 보여준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하기를 “무화과나무 그것을 뭘 그렇게 갈굴 일이 있다고 그것을 갈구는가?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을 때가 되었는데도 열매를 맺지 않았으면 나쁜 무화과나무라고 하겠는데 열매 맺을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열매가 없다고 저주해 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라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누가 대처하라고 하더냐?”




그러니까 신앙의 문제가 뭐냐? 대처할 필요가 없는데 자꾸 자기가 신앙생활 하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지 마세요. 유혹에 대처하고 어떤 상황을 극복하려고 한다는 것은 뭐가 빠져 있을 경우입니까? 주체, 자아, 자기가 살아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욥은 갈수록 친구들이 약을 올리니까 점점 더 약이 올라가지고 점점 더 주체가 강렬하게 되면서 그 강렬한 주체에서 나온것이 뭐냐? r그것이 하나님을 피해자로 만들었어요.




“하나님, 당신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으니 당신은 잘못되었고 내가 옳다”는 겁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하는 말이 “네가 악어 한 마리 낚시 해 볼래? 악어 낚시 할 줄 아나?”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아무리 용맹스럽고 성질 더러워도 주님께서 안 다루시는 악어(피조물)가 없어요. 인간들 보기에 ‘저거는 안 다뤄질거야. 저 성질 그대로 된다’하더라도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면 그것이 순하게 되고, 새끼 낳을 때는 새끼를 낳습니다.




손에 안 잡히는 날아다니는 까마귀도 새끼 낳을 때 되면 새끼를 낳고요. 염소도 제 마음대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새끼를 낳을 때 되면 알아서 새끼를 낳습니다. 이것은 전부다 하나님의 관리 하에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관리하는데 있어서 “욥이 네가 조력자로 혹은 보조자로 아르바이트 한 적이 있느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지금 욥은 ‘나에게, 나에게’ 자꾸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려고 하는데, 주님은 비켜가요. 비켜간다고요. 욥 본인의 문제가 뭐냐 하면, ‘왜 하필이면 나에게?’ 할 때에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생각해 주지 않는 그 자아가 하나의 뭉태기로 암덩이처럼 뭉쳐서 퍼지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욥을 살살 약을 올립니까?”




하나님께서 자꾸 약을 올려서 자꾸 자기 자아를 포기 못하게 만드는 것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실 때 예수님의 자아상이 점점 더 굳어지면 굳어질수록 그 예수님의 자아상에서 영이 무엇이며 육이 무엇인지 더욱더 분명해 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 믿습니다’ 할때 흔히 사람들은 자기가 벌이는 여러 가지 일들, 예를 들어 세무공무원이라면 직장에 가서 세무에 관련된 일을 하면서도 교회 가면 ‘예수 믿습니다’라고 하잖아요.




세무일 보는 ‘나’ 따로 있고, 예수 믿는 ‘나’ 따로 있습니다. 여기 일할 때는 여기에 매진하고, 교회일 할 때는 교회 일에 매진합니다. 이처럼 내 자아는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잖아요. 주님 보시기에 그러한 왔다 갔다 하는 자아의 모습은 주님 앞에서는 안 통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예수님 자아한테 관심을 두게 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예수도 잘 믿고, 세무공무원 일도 잘한다’고 자아를 내세울 수 있다고 여기는 그 여지를 십자가 앞에 딱 세웁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세무공무원이 되었든, 농사를 짓든 나는 죄인 맞습니다’ 하고 죄인 하나로 굳히도록 하기 위해서 욥을 더욱더 단단하게 매는 거예요. 욥이 언제부터 자아에 대해서 그렇게 주장을 하느냐 하면, 마지막 자기의 변명 대목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고아를 돌보고, 과부를 돌보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남 상담거리 있으면 상담 다해주고, 남에게 해코지 한적 없고, 힘들고 아픈 사람과 함께 하면서 도왔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나에게?”라고 했다고요.




그것은 결국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쳤지요, 귀신도 쫒아 냈지요. 오병이어도 행했지요. 그런데 하필이면 그런 예수님이, 택함 받은 분이, 왜 모든 사람의 대표자로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아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자아상에 거기에 비밀이 있어요. 여러 가지 일 벌리고,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필요 없어요.




제가 전 시간에 이야기를 했잖아요. 18만 5천명의 군대가 직업이 다양하고 군대에 들어오기 전에 여러 가지 일을 했어도 그 18만 5천명이 군에 가서 유대나라와 전쟁하면서 예루살렘을 포위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한꺼번에 하루아침에 다 죽어 버렸어요. 천사가 와서 작살내 버렸어요. 지난주에 제가 주일학교 애들에게 물었어요.




“천사 하나가 이깁니까? 사람 백명이 이깁니까?”


“천사 하나”


“그러면 사람 1000명이 이기나요? 천사 하나가 이겨요?”


“천사 하나”


“옳지!”




애들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지만 하여튼 정답은 정답입니다. 2가 나오는 이유는 모르지만 하여튼 2가 나왔고, 8이 나오는 이유는 모르지만 어쨌든 정답인거예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를 질적으로 구분하는데 자아가 되어 버리면 내가 뭡니까? 내가 1이 되어요. 1이 되면 그 옆에 있는 사람은 2가 돼요.




“너희 가정은 어떻게 되는데?” “우리는 다 한 가족이야” 이러면 하나가 되잖아요. 그런데 부부싸움을 하게 되면 “우리 식구? 나하고 내 바깥사람 있고.” 갑자기 나를 하나로 치고 그 나머지를 2차 3차로 돌려버려요. 그걸 하나님께서 더욱더 철저하게 규명해서 욥으로 하여금 결국은 자기 문제로 굳히게 하는 겁니다. 윗동네 하늘나라에서 이미 처음부터 욥의 이야기였습니다.




그 여파로 인하여 아랫동네에서는 욥 자기 문제로 굳혀 가게 됩니다. 굳혀 가는데 완전히 윗동네의 욥에 의해서 결국 마지막에 주님께서 욥에게 축복을 주고 제사 드리게 하는데 까지 갑니다. 제사 드리도록 하는 것이 욥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가 떨어지면 욥은 명령대로 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장차 오실 예수님이 대신 용서하시는 그 일을 하는 거죠.




그 이야기를 좀 더 해봅시다. 아까 혼돈에서 질서가 있기 위해서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이 있지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이게 아브라함시대에서는 뭐가 돼요? 아브라함언약이 되죠. 언약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 언약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을 가지고 욥처럼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숨겨가지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여러 가지 것을 펼치는데 그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창세기 18장에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는 사건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할 때, 먼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를 하죠.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만 있으면 심판을 철회 하시겠습니까?” “철회할게.” 이렇게 되거든요. 그때 아브라함의 역할이 뭡니까? 이것이 바로 욥기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해야 할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미리 정답부터 일러 드릴께요. 의인이란 중재자입니다. 욥이 자기 자식을 위해서 제사 드리는 것을 우리가 보았지요?




의인이라면 자기보다 못난 사람을 위해서 “에이! 너같이 못난 놈 벌 받아 죽어라.” 이것이 아니라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을 위해서 대신 기도해주는 그러한 역할을 의인이 했습니다. 욥이 그런 위치에 있다는 것을 욥의 친구들이 인정했어요. 그런데 공식을 잘 보세요. 의인을 무엇으로 바꾸느냐 하면, 이 땅에서 죄인으로 바꿉니다. 욥의 친구들이 왁 달려들어서 죄인 만들어요.




이미 윗동네 하늘나라에서는 욥이 의인이라는 것을 알아요? 몰라요? 하늘나라에서는 이미 알지요? “욥 같은 의인은 내가 못 봤다.” 이미 알아요. 그런데 사탄은 거기서 시비를 걸고 나옵니다. “의인은 맞지만 의인이 아닌 경우를 생각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게 시험하는 겁니다. 아랫동네, 땅의 동네에서는 욥 의인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죄인 되게 만듭니다.




의인이지만 죄인 되게 만들었다는 것을 욥 본인이 알아요. 의인인데 잠시 죄인되었다가 아니라 “나는 죄인입니다”가 돼요. “나는 사실은 죄인이 아닌데 의인이 맞는데”라고 하다가 “갑자기 맞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할 그때에 하나님께서 욥을 가지고 어떻게 합니까? 의인되게 하는 겁니다. 이 공식이 십자가 공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올 때, 죄인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었는데 하나님이 사흘만에 부활시킴으로서 “진정한 의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이 의인은 무슨 역할? 중재자. 따라서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죠.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그 뉘앙스를 잘 이해를 못하시는것 같은데요.




이런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죄인인 우리가 구원을 받느냐’ 이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욥이 죄인인데 어떻게 축복을 받습니까? 죄가 있는 곳에는 뭐가 있어야 합니까? 축복이 아닙니다. 형벌이 있어야 돼요. 그런데 죄가 있는 곳에 축복이 있고, 의가 있고, 구원이 있다면, 죄와 의가 하나가 된다면, 죄가 곧 의고 의가 곧 죄라면 이것은 미친놈이죠.




무조건 죄짓고 ‘의인 되었다’고 하면 되겠네요. 실컷 죄짓고 ‘하나님의 뜻이다’ 하면 되겠네요. 이것을 수용할 수 있는 신학시스템, 체제를 우리가 갖추어야 합니다. ‘죄인인데 의인이고 그래서 벌을 받아야 하는데 복을 받는다.’ 이것을 포함시켜서 해명할 수 있는 체제가 있어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기는 더 들어가 봐야 할 것을 우리에게 요청하죠.




그냥 피상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 봐야 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의인인 것이 죄인’ 할 때에 욥이 독이 오르고 약이 오릅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야. 친구들아! 너희들이 오해를 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자꾸 이야기를 하다가 졸지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잘못없고 하나님이 잘못”이라고 했던 그것이) 어떻게 졸지에 “맞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말을 안하렵니다. 나는 이제 입을 다물렵니다. 재를 뒤집어 씁니다”하고, “회개하니 복준다” 이렇게 되거든요.




욥이 “죄인이 아닙니다”에서 어떻게 “죄인 맞습니다”로 어떻게 바뀌냐 이말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바뀌었어요. 십자가 믿지, 언약 믿지, 복음 있는 교회 믿지, 왜 죄인인데요? 하는 것마다 착하고 복음 되는데, 왜 죄인입니까? 남들 안 믿는 십자가 믿지, 남들 안 믿는 십자가의 피 흘림을 믿는데 얼마나 착하고 대견스럽습니까? 그런데 왜 죄인입니까?




‘나는 이렇게 훌륭하게 예수 믿어’라고 아는 내 마음과 ‘나는 죄인 맞다’고 나오는 이질적인 두 개의 자아가 내 내면에서 공격을 한다는 말도 안 되고 웃기는 억지를 쓰는 것밖에 더 됩니까? 그런 이야기를 남에게 하면 욕을 얻어먹지요. “둘 중에 어느 것이 진짜야? 둘 중의 하나만 이야기해. 이게 왜 퍼져서 왔다 갔다 하나? 어느 거야? 내가 어느 것을 잡아서 너라고 할수 있어? 왜 왔다 갔다 해?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고 왜 달라? 하나만 이야기를 해. 두가지 이야기 하지 말고. 너는 둘중의 하나야. 정체를 밝혀라.”




이렇게 나오면 어느쪽 카드를 내밀어야 합니까? 죄인카드를 내밉니까? 의인 카드를 내밉니까? 이것을 아직 신학적으로 해명을 못했어요. 예수님이 내 대신 죽었으니까 의인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별 뾰족한 해답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림으로 그려 볼게요. ‘내가 시커먼 죄인인데, 이렇게 빨간 죄인인데, 내가 이렇게 하얀 의인되었다고 할 때에,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예수님이 대신해서 내 죄를 없게 해서 예수 안에서 의인 되었다’ 할 때에 뭐가 남느냐 하면 그런 예수님을 내가 믿을때 믿는 그것은 의로운 행동이 아니냐 이말이죠.




지금 예수님이 내 앞에 나타나셔서 “어이! 이근호! 내가 너 대신 죽었다”고 할 때에 그 다음부터는 내가 착한 행동을 보일수가 있지요. 뭡니까? “아이고! 주님이여! 제가 죄인입니다” 하는 이 행동은 얼마나 착한 행동이냐 이말 입니다. 내가 죄 지은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러면서도 빠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뭐가 있었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이 내 대신 돌아가셨다는 그런 고백을 한다’는 그 착함 하나는 여전히 남아 있잖아요. 그러면 나는 온전한 죄인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잖아요. 2프로 모자랍니다. 2프로가 남아 있잖아요. 예수 믿는 착한 행동은 2프로 남아 있잖아요. 그러면 나는 온전한 죄인이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98퍼센트의 죄를 2퍼센트의 착함이 충분히 커버 하고도 남지 않습니까?




그러면 성경 말씀대로 “나는 온전히 죄인이기에 죽어 마땅합니다”라는 말은 전부다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변명에 해당되는 거죠. 하나의 연출이죠. 부흥사들이 하는 “부족합니다”하는 그 연출과 똑같은 소리란 말이죠. 뭐가 부족한데요? 애 아프면 감사 헌금 잔뜩 올리고요. 애가 아픈데 왜 감사헌금을 하나 몰라? 저는 이해가 안돼요. 애가 아픈데 왜 감사헌금을 하는지 몰라요. 애가 아픈데.




이걸 받고 낫게 해 달라는 이야기인지? 무슨 이러한 가식적인 행동이 있습니까? 욥은 가식이 없어요. 아프면 아픈 대로 그대로 이야기를 했고,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서 원망스럽다고 이야기를 다 했어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의 관계에 놓여 있는 사람의 본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감이 오십니까? 아멘? 나는 때려 죽여도 신앙생활 못한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은 어떤 때인가? 여러분이 가진 것을 다 빼앗겼을 때입니다.




교회에서도 이단소리 듣고, 직분도 다 빼앗기고, 이젠 하다가하다가 ‘예수 믿기도 정말 지쳤다’ 하고 나가떨어질 때, 주님께서 “앗따! 그놈 착한 놈! 참 훌륭해. 저건 다른 사람 못하는 거야. 맞아! 저래야지. 인간이 저래야 된다고” 이렇게 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2프로 자기의 선한 것을 어느 정도 남기는 이유는 내일 또 써먹으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내일 것은 내일 또 내려오는 거예요. 오늘 것을 그대로 내일로 가져가면 안 됩니다. 오늘 치는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리세요. 오늘 염려는 오늘로 끝내야지 내일의 것으로 잇지 마세요. 사람은 자기 장점을 남겨 두어서 그것을 미화 시키는 경향이 있어요. ‘이것은 장점이니까 그냥 있고 이것은 단점이니까 폐기 처분해서 장점과 장점을 남기면 더욱더 큰 장점이 되겠지.’




그것은 ‘칼 포퍼’라는 철학자가 이야기 했잖아요. “항상 과학에서 진리를 규명할 때, 오류를 규명해서 다시 오류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 점점 더 과학이 진보된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공장에서 품질 관리 할 때도 그렇게 하잖아요. “사고율 제로! 사고율 제로!” 이런 구호 외치잖아요. 공장 안다녀 본 분들 압니까? 표어를 만들잖아요. 우리 공장은 품질 관리를 너무 철저히 해서 제품이 100퍼센트 완벽하게 빠진다는 겁니다.




그런 것 할 때 목적을 정하고, 다시 검토를 하고 보완을 해서 처음보다 더 낫고 발전된 상품을 염가로 내자는 그것이 인간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장점은 키우고 단점은 줄이자.’ 그것이 ‘도덕적인 진화’ 아닙니까? 곧 ‘성화’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게 성화되고 어떤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면서 점점 진보되고 나아진다는 것이 있는 이상은, 그 진보된다는 미련이 있는 이상은 소급해서 우리는 의인이 되어 버려요.




비록 지금은 부족하지만 나중에는 완벽해 진다는 겁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어떻게 된다? “창대하리라” 그것이 빌닷이 이야기를 한 것 아닙니까? 그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온전한 인간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지금 욥이 그것을 고발하려고 하는 거예요. 욥은 있는 대로 그냥 하소연 할 것 다 해버려요. 그냥.




이왕 망가진 것 더 이상 예의를 차릴 것이 더 뭐가 있어요. 이왕 망가진 것 다 끄집어내는 거죠. 한마디로 말해서 “나보고 우짜라고! 나보고 우짜라꼬!” 차라리 죽여 달라는 겁니다. “차라리 죽여 버리지 왜 살려 줬어? 하나님이 왜 살려 줬는데? 나 잘못 없잖아요. 하나님이 중재자를 보내 주시든지 아니면 직접 중재자가 되시든지.”




처음에는 중재자를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내가 진짜로 잘못 되었는지 재판해 달라고요. 나중에는 그게 안 되니까 “하나님이 직접 오시면 그 때 이 몸이 죽고 난 뒤에, 내 몸을 벗은 후에는 그 때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그분이 나를 알아주실 것이다.” 이렇게 오기를 부렸습니다. 이것이 욥기에서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런 말을 해도 소용없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자기가 그런 이야기를 해놓고서 “아이고! 그런 것도 다 소용 없구나. 나도 몰라. 맘대로 하세요. 하여튼 나는 잘났어.” 그것이 욥의 마지막 주장입니다. 그 때 욥의 친구가 와서 “네가 주님을 피해자로 만들었구나.” 그런데 욥이 하나님을 피해자로 안 만들려고 할 때는 또 뭐예요. 욥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피해자로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고 자기는 솔직하게 이야기를 한 거예요.




욥은 뭘 알았어요? ‘솔직’이죠 ‘솔직.’ ‘솔직’이 뭐냐? 욥은 십자가 안에 있는 육의 솔직함을 욥을 통해서 다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해서 복음을 제대로 안다고요? 재산 날라가고, 자식 죽고, 기왓장으로 우리 몸이나 긁고 있어 보세요. 우리도 욥 못지않습니다. “에이! 죽이려면 죽여라. 뭘 어쨌다고. 왜 하필이면 나에게. 다 나옵니다.” 그렇게 할 때에 책꽂이에서 내 이름을 빼버리고 욥을 집어넣어 버립니다. 증거물로.




"그래 네가 바로 욥이었다." 그런 사람이 만약에 예수를 믿는다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나의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내 행위가 아니라 아버지로 말미암아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럴때 만이 온전히 그리스도만 증거할 수 있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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