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제 6강
욥의 친구들이 처음에 욥을 위로할 때, 하나님이 위로하는 것처럼 욥에게 위로하려고 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할 때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자비하심을 가지고 인간은 나약하니까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원대하심에 맡기면, 네 고난은 한시적인 것으로 일시적인 상황이니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다시 하나님의 넓은 품에 본인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라.”
세 친구가 처음에는 좋게 이야기 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뜻을 다 모르잖아. 모르면서 하나님께 불평할 문제가 아니다. 힘든 것은 알겠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보다 더 위대하고 크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욥도 그것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욥이 당했던 그 고난이 욥으로 하여금 점점 개인문제로 방향을 틀게 되는 겁니다.
아까 물리학에서 힘의 크기가 에너지로 등장하면서 힘은 방향을 가지게 되어 있어요. 물리학에서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묻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만 생각하거든요. 과학이란 어떤 법칙을 캐낼 것만 캐내고 이용할 것만 이용하면 되는 겁니다. 물리학에서 ‘벡터’라는 것이 있습니다. ‘방향을 갖고 있는 힘’이라는 뜻입니다.
힘이 방향을 갖는다는 이야기가 참 이상해요. 우리가 상식으로서는 ‘크다, 작다, 무겁다, 가볍다, 빠르다, 늦다’하지 방향이라는 개념을 집어넣을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지 아니한가? 그런데 그런 상식적인 선에서 물리학을 해보니까, 자연법칙이 최적거리를 자기가 알아서 간다는 사실에 물리학자들은 놀란 거예요.
더 쉽게 이야기를 하면, 이 자연세계는 사람이 손을 안대도 자기가 알아서 한다는 겁니다. 이게 욥기에 나옵니다. 코끼리가 행복하냐? 우리가 행복하냐? 이렇게 물을 때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본다면 코끼리는 우리보다 불행하죠. 아메바는 우리보다 불행해요. 하루살이도 불행합니다. 개미도 밟아버리면 불쌍합니다. ‘아이고, 이것아 60도 못살면서 왜 사냐?’ 이런 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기준은 내 기준입니다. 그러나 점차점차 사람들은 (욥기에도 나오지만 우리는 욥기보다 더 못하죠) 자연물은 나름대로 행복하다는 사실을 요 근래에 와서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아! 코끼리가 우리보다 불행한 것이 아니고, 우리보다 일찍 죽는 원숭이의 생이 슬픈 것이 아니구나’하는 것. ‘태풍불어 넘어진 고목을 보면서 우리가 슬퍼할 것이 아니구나.’
짐승이 우리보다 더 불행한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뭐가 있다는 이 말은 우리의 주체 중심이 와해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내 중심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이것이 자연세계에서 추방당할 반칙성 사고방식이라는 말입니다. 레드카드 감입니다. 그것을 나중에 엘리후가 이야기하고 하나님이 그 이야기를 합니다. 그럼 인간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의 문제점은 “까닭 없이, 이유 없이는 하나님을 안 섬긴다.” 이거거든요.
사탄의 말을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이 아무리 위대하고 자비로워도 나에게 행복을 주지 못한다면 이 자비와 위대함이 아무 소용도 없지 아니한가’ 하는 그 생각을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이게 말도 안 되는 반칙이거든요. 예를 들어 어떤 소녀가 길가의 코스모를 보고는 꿇어 앉아가지고 “코스모스야! 코스모스야! 너는 왜 그렇게 청초하고 아름다우냐?”
코스모스가 하는 말이 “그냥 가는 길이나 가소.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어디 와서 남 잠자고 있는데. 빨리 가소.” 이랬습니다. 그 소녀는 자기 딴에 그 코스모스에게 자비를 베푼다고 베푼 거예요. “너는 참 모든 꽃보다 아름답구나.” 코스모스는 “빨리 가라 하니까 참 힘들어 죽겠다. 정말!” 왜 소녀 당신은 뭐든지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느냐 말이죠. “당신 볼일이나 보소. 당신 볼일이나. 행복한 코스모스 잠 깨우지 말고 그냥 가소.”
인간은 착한 일이나 악한 일이나, 좋은 일이나 선한 일이나, 내 중심이 되지 아니하면 그것이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의미론인데 그 의미론이 없으면 사람은 주체가 확립이 안 되고요, 사람이 자기정체성(Identity), 주체가 확인이 안 되면 그것이 정신분열증이거든요. 사람이 정신분열이 되어 버리면 다중인격, 이중인격이 되어 가지고 사람이 살수가 없어요.
자아형성이 안된다고요. 인간의 모든 교육의 목표는 조기에 자아형성을 시키는 것이 목표입니다. ‘존 듀이’나 ‘삐아제’가 주장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빨리 자아의식을 만드는 거예요. 하나의 시민으로서 스스로 자기 먹을 것을 자기가 챙길 수 있고 자립할 수 있는 자아형성에 들어갑니다. 그것이 미진할 때 미진아, 자폐증, 분열증이라고 하는 겁니다. ‘말아톤’이라는 영화에 나왔잖아요. “내 다리는 백만불 짜리 다리” 하잖아요.
그 말은 “너는 왜 너 스스로 못사느냐?” 그 말이죠. “왜 남들처럼 정상이 아니야?” 세상에는 의미가 있어야 되는데, 그 의미라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해서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나름대로 눈치챘다’ 할 그 때 그 의미는 우리에게 행복을 줍니다. 남의 애가 1등하는 것은 나에게는 불행입니다. 왜? 내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통해서 주체를 확립한 상태에서 그 다음에 감히 건방지게 신까지 자기 영역에다 끌어당기려고 하는 것이 종교라는 이름의 수작입니다. 기독교, 불교등 뭐든지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에게 의미되는 쪽으로 일 좀 하세요. 뭐 합니까? 나에게 행복과 소망을 들어 주는 쪽으로 일 해달란 말이죠.” 하나님은 “내가 일 잘하고 있는데. 얼마 전에 참새가 떨어져 죽은 것도 내 뜻대로 떨어져 죽었고, 코스모스도 내가 알아서 피운다.”
“아니! 코스모스 핀 것 하고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나에게 뭔가 챙겨지는 것이 있어야지 챙기는 것이 없는데 그런 신은 나한테 의미가 없잖아요.” 이것이 바로 사탄이 인간을 자신만만하게 자기 수하로 둘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아까 전 시간 끝부분에 이야기를 했지만 아브라함 언약은 뭡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 창조의 능력이 개입하는 겁니다. 이것은 시간을 초월해서 묵시적으로 침입하면 항상 ‘무에서 유’가 될 수밖에 없지요.
“없는데서 있게” 하고, 그 다음에 우리 인간들의 말로 바꾸면 “죽은데서 살리고.”(롬 4:17) “죽은데서 살리고 없는데서 있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속에 삽입되는 겁니다. “죽은데서 살린다”는 말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이죠. 욥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은 ‘예수님의 자아 절대성’입니다. 예수님께서 밑도 끝도 없이 그냥 “나 죽는다. 나 살거든” 하고 살아나서 “나 살아났다. 신난다” 이렇게 되지 않았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듬뿍 쥐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자아 속에 우리의 자아가 들어 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살면서 나에게 의미를 추구하고 내 행복만을 추구하는 그 모든 갈등이 예수님의 자아 속에 다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심히 괴로워하신 거예요. 하나님의 뜻대로 기적을 일으키면서도 마지막에 가서는 “주여! 할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는 너무나 인간적인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에게 주목하라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 주목하라는 말입니까? “정하신 사람”에게 주목해야 합니다. 왜? 이 사람이 마지막 심판의 결정권을 쥐고 있으니까. 사람 이예요. 사람. 그런데 사람에 대해서는 사탄이 자신만만 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만 챙긴다. 자기주체를 분명히 한다. 자기주체를 분명히 하기 때문에 그 주체가 깨지는 것을 제일 무서워하는 거예요.
주체가 깨지는 것이 뭡니까? 죽음이죠. 죽기가 무서워서 마귀에게 종노릇을 하고 살아가는 겁니다. 왜? 내가 죽으면 파도치는 파도소리도 의미 없고, 단풍이 들어도 의미 없고, 아름다운 해가 뜨고 져도 의미 없어요. 포항의 불꽃놀이가 내가 죽은 다음에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없잖아요. 12월 대선이 내가 죽고 나면 누가 뽑히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고요?
죽는 것이 제일 문제니까 어쨌든 안 죽으면 되잖아요. 내가 안 죽어야 신이든, 예수든, 구세주든 의미가 있는 거예요. 마귀가 노리는 것은 이겁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주체만 챙긴다.’ 그 자체가 자기중심이니까 하나님중심이 아니라는 말이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하나님 이야기를 하지만 다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인간은 인간중심입니다’라고 한다 이말이죠.
‘모든 인간은 자기중심이다. 메시아는 인간이다. 고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에 의해서) 메시아는 실패한다.’ ‘모든 인간은 실패한다. 메시아도 사람으로 왔다. 따라서 메시아도 사람이기에 실패한다.’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을 가지고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과연 그리스도는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실패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신구약 전체가 ‘과연 예수그리스도는 실패자인가? 성공자인가?’ 그 문제입니다.
신이 존재하는가? 신이 자비로우냐? 그런 문제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이 주제의 초점을 흐려놓기 위해서 밑에 연막탄을 터뜨린 것이고, 진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것입니다. “다들 실패하고 다들 죽는데 당신이 무슨 통뼈라고, 당신이 무슨 별거냐” 이말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그것을 의도적으로 밝힙니다. 요한복음이 특히 심한데요. 무조건 인간의 말은 다 틀렸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기말만 맞대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가만있다가 약이 오르지 않을 수가 없어요. 똑같은 인간인데다 허름한 옷을 입은 것이 “네가 뭔데? 통뼈인가? 니 뭐꼬? 니 뭔데 니 말은 다 옳고, 내 말은 다 틀렸나?” 이 말이죠.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화를 내는 겁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나는---이다. 나는---이다” 하잖아요. “나는 길이요. 나는 생명이요. 나는 떡이요” 하잖아요. ‘나는---’이라고 거론한다는 것은, ‘너는 아니거든! 너는 아니거든!’ 이런뜻이란 말이죠. 바리새인들이 죽어라고 달려듭니다. “네가 뭔데 차별화를 시키는가? 네가 뭔데!” 이 말입니다. “똑같은 인간인데 그래서 별것이 없는데 왜 너와 나를 갈라놓는가?” 그 말이거든요.
“나를 믿어야 살고 너의 아비는 마귀다.”(요 8장) 그러니까 하는 말이 “증거를 대라. 증거” 합니다. ‘증거를 대라’는 것이 욥기에도 나오지요. “주여! 내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렇게 고난을 받는 것을 친히 하나님께서 중재자가 되어 주옵소서”(욥 16:18-22) 요한복음 8장에도 나오지요. “나를 증거 하시는 분이 딱 두 분이 있다. 내가 나에 대해서 증거하고 (본인이 아파하니까)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아픔을 주신 나의 하나님이 증거한다(요 8:18).
이런 말이 다른 사람에게도 먹히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뭘 요구했습니까? 그 증거자에 ‘우리도 넣어 달라’는 요구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쏙 빼버리죠. “너희들은 나의 증인으로 합당치 않기에 나는 너희들을 넣어줄 수 없어. 나는 아버지와 상대하지 너희와 상대 안 한다”라고 배제시켜 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사도바울이라는 사람이 전에 뭐했던 사람입니까? 전에 예수님을 핍박했던 사람이죠.
핍박할 때는 그만한 의미가 있었고, 확신도 있었습니다. 욥기는 확신과 확신의 만남이고, 확신과 확신의 충돌입니다. 욥의 친구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물러설 의사가 없어요. 확신있게 자기들이 알고 있는 바를 다 이야기 합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그랬던 사람입니다. 그가 하는 일이 대충 감 잡아서 했던 일이 아니고, 정확하게 ‘여호와의 영광을 위한 지시’라고 여기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다가 죽였습니다. 그게 최초의 탈레반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 되는 일인 줄 알고 했던 겁니다. 그랬던 그가 “나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라고 이야기했던 것은 본인이 인격수양 많이 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반성문 많이 써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 자기와 똑같은 어떤 사람을 만나서, 그분은 피해자고 나의 확신이 그분을 피해자로 만든 가해자인 것을 알 때 사도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고백을 비로소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나는 죽어야 마땅한 놈’이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나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이, 하나님과 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줄 알았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중재자를 보낸다 해도 나를 옹호해주고 나의 일을 격려해주는 그런 중재자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하나님과 나 사이의 중재자는 오히려 나로 하여금 더욱더 죄인 되게 만들고 부끄럽게 만드는 거예요.
율법이 뭡니까? 더욱 더 죄인 되게 하는 것이 율법 아닙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율법의 뭉치에요. 율법의 완성태 입니다.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잘했다’ 하는 것도 그 앞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에 불과한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 죄의 원인이 나쁜 짓을 해서 죄의 원인이 아니고, 주체에 있다니까요. 주체에.
그것을 한국교인들이 지금 몰라요. 자꾸 “열심히 사세요. 반듯하게 사세요. 예수 믿고 나서는 새사람 되었으니까 새사람답게 합당하게 살아야지요. 그것이 성화단계입니다.” 맨 날 주체를 옹호하는 쪽으로만 나갑니다. 그러면 그 주체 안에서 욕망과 흥정이 일어나지요. ‘이것은 집구석에서 하는 짓이고 교회 가서는 그런 짓 하면 안 돼’라고 스스로 자기와 흥정을 해요. ‘좀 힘들어도 이런 이야기는 교회에서는 하지 말고 집에 가서 떠들어라.’
자기가 알아서 자기절제, 자기조절에 나서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인간이라 하는 것은 ‘진동’이죠. ‘욕망의 진동’이기 때문에 욕망의 진동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쪽을 누르면 한쪽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참고 참던 것에 대해서 항상 마일리지가 쌓이면서 보상을 요구합니다.
“내가 이만큼 주를 위해서 참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뭔가 해줘야죠. 다른 것은 내가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아들 서울대학 가게 하옵소서.” 이런 식으로 나오더라는 말이죠. 하나님께 많이 드렸으니까 이정도 원하는 것은 욕심이 아니잖아요. “하나님! 저 욕심 없습니다. 기껏해야 아이 서울대학 들여보내려고 하는 이것이 무슨 욕심이겠습니까? 애 머리 좋겠다. 그게 무슨 욕심입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남편 바람 안 피우도록 바라는 이것이 무슨 욕심이냐 말입니다. ‘이런 것 정도는 내가 받을 만하다’ 이 말이죠. 그게 바로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고, 율법에 흠이 없다고 자부했던 사울이 그 사람입니다. 주체에요. 주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주님이 물귀신이 되어서 나를 끌어안고 물에 빠진다는 사실은 모르고 십자가를 또 하나의 이벤트인줄 알았어요. ‘믿어 줄게’ 이렇게 된다 말이죠.
TV에서 머리 풀어 헤친 여자 물귀신이 나와서 우물 속에 집어넣어 버리잖아요. 링이라는 일본영화 있잖아요. 그것처럼 주님은 물귀신입니다. “십자가가 아름다우냐? 십자가를 꽂아줄까?” 십자가에서 머리 푼 귀신이 튀어 나와서 “오늘 너 잡아먹자.” 하고 십자가에 끌고 들어가서 죽여 버립니다. 그것 외에 다른 해결책이 없어요. 그것뿐이에요. 여러분! 우리 다 같이(EVERY BODY!) 물귀신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자아를 죽인다고 하는 모든 시도가, 자아를 죽인 또 다른 새로운 자아를 양산하는 거죠. 아까 말한 빈 여백처럼. ‘자아를 죽였다’ 할 때, 자아가 두 개가 있어야 돼요. 그래야 죽이는 자아와 죽는 자아의 두 자아가 성립되거든요. 아무리 자아를 죽여 봐야 그 자아를 죽이는 자아는 또 계속 새로이 발생되기 마련이죠. 자아가 안 없어집니다. 죄송합니다.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됩니다. 자아를 열댓 번 죽였다는 자아를 우수하고 보고 대견하게 보는 그 자아가 더욱 커져 있어요. 불교에서 ‘무아’(無我)라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자아는 엇어지지 않아요. 그 이유를 아브라함언약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언약에서 아브라함언약을 받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좆아서 가는 곳마다 열심히 제사 드리는 일을 합니다.
그렇지만 그때그때, 불쑥불쑥 자기가 미처 몰랐던 자아상이 어떤 사태를 만나면서 자기에게서 발생되면서 튀어 나가게 됩니다. 그림으로 한번 그려봅시다. 인간에게는 육적인 욕망이 있는데, 이 욕망은 현실세계에서 다 발휘할 수 없어요. 문제는 이거예요. 그래서 자아가 거릅니다. 흥정을 해요. ‘이것은 밤에 하고 낮에는 하지 말고’ 이런 식의 타협을 합니다. 현실세계에서 하나님의 법이 기다려요. 법, 명령. 실천을 하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법과 명령.
“이웃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기다리는 겁니다. 그러면 자아의 욕망이 끄집어져 나와서 이것을 편집에 들어가죠. 현실세계에서 편집에 들어가서 자를 것은 자릅니다. ‘이것은 내가 너무 착하다. 이것은 약간 부담 된다’ 하는 것은 빼고 약간 껄렁껄렁 한 것을 집어넣어서 ‘오늘은 요정도 하자’고 하는 겁니다.
너무 착하면 또 안 되니까. 왜? 사람이 성적이 10등이라면 9등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니까, 처음부터 20등정도 해 놓아서 그 다음에 15등정도 해도 잘했다고 칭찬을 받으니까요. 그런 계산이 있다고요. 그래서 이렇게 자아의 욕망이 법과 만나서 현실세계로 내보낼 자기행동을 흥정하고 편집을 하는데, “사랑하라”고 하면 사랑하는 흉내를 내죠. 내 봤자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육적욕망은 유황온천처럼 항상 펄펄 끓는 겁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했던 “하나님! 받으소서” 하고 “이것이 하나님께 저의 최선을 다하는 섬김 입니다” 할 때 하나님은 “비켜라. 나는 다른 길이다” 하고 직접 찾아와 버리죠. “아이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직접 오시면 ‘나’ 가 들통 나서 안 됩니다”하는 이런 사태가 유성처럼 자꾸 터집니다.
어머니께서 자식에게 훈계할 때, 처음에는 마음에 다지죠. ‘내가 어머니로서 어른답게 품위를 지키고 조신하게 훈계를 해야지. 경망스럽게 훈계하면 애가 나를 무시할거니까. (지난번에도 그래서 내가 무시를 당했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잘해야지. 그래서 품위 있게 조용 조용, “얘야! 아들아!” 그러다가 갑자기 험악한 표정과 귀청 터지는 목소리로 “똑바로 안해?” 성질나면 조신이고 뭐고 없고 발길질까지 하면서 “나가라! (화나서 씩씩 거리면서)”
사태가 터지면 자기 속에 꼬기 꼬기 감추어 두었던 것이 건드려집니다. 비켜갑니다. “하나님! 받으소서” 할 때 그것은 안 받고 직접 다가오죠.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사건들은 바로 이런 사건들입니다. 우리가 행함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을 비켜가요. 비켜가서 아브라함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사태가 자꾸 자꾸 일어납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서 꼬깃꼬깃, 숨겨놓은 아브라함의 본색이 다 탄로가 납니다.
욥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언약에서 욥과 접촉이 되면 욥은 바르게 살고 훌륭하게 살았다고 자부했던 그 모든 것을 비켜가서 친구들이 자꾸 성질을 건드립니다. 사람치고 성질 없는 놈 누가 있습니까?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는 것은, “예 제가 참지요 제가 참는다고 분명히 이야기 했습니다. 더 이상 선 넘어오지 마세요. 제가 참습니다. (그러다가) 에이!!!!!” 이렇게 되거든요. “내가 참는다켔지? 누구는 성질 없나!!” 이렇게 된 다 이 말이죠.
아브라함언약이 아브라함을 다룰 때 기존의 아브라함의 주체를 비켜가서 아브라함의 원초적인 육을 건드립니다. 아브라함의 육을 건드리면서 ‘너의 육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에 아무 쓸모가 없음’을 폭로하는 쪽으로 아브라함언약이 실시됩니다. 이것은 좀더 설명을 해야 합니다. 노아언약 가운데서는 노아에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노아는 그냥 ‘뚝딱뚝딱’ 물체만 만들어 내면 그만입니다.
노아가 뭘 만들었지요? 방주라는 물체를 만들었지요? 물체를 만들 때는 대패로 밀고, 자로 재고 그러면 되는 거지, ‘자기를 부인하고’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만들어 내면 됩니다. 물론 그 방주에 들어가는 것도 보통성의가 아니지만. 그런데 ‘어떤 물체에 있어서 공간적으로 육체를 이동시키면 달랑 구원 받는다’는 것이 노아 때 있었습니다. 있었는데 그 뒤의 언약에 들어가면 점차점차 이제는 스스로 자아의 욕망에 접근하는 쪽으로 언약이 작업이 됩니다.
새언약의 십자가는 말할 것도 없이 그렇고요. 아브라함의 가장 기본적인 자존심마저 완전히 뭉개버리고 들어올 때 그것이 바로 창조의 위력입니다. 창조의 위력은 ‘유’를 ‘무’되게 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합니다.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고 그 ‘없음’에서 새로운 ‘있음’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이것이 창조의 위력입니다.
제가 어제 이야기 했지요? 욥이 의인인데 뭐 되게 한다? 죄인 되게 하고(‘죄인 아닌데 왜 억울하게 내가 죄인이야?’ 하고 진짜 죄인으로 만들 때), 그 죄인을 하나님이 축복해서 뭐 되게 합니까? 그 전체를 의인되게 하죠. 이 공식이 아브라함 공식에 그대로 있습니다. ‘있음’을 ‘없음’으로 만들고 ‘없음’을 ‘있음’으로 만듭니다.
곧 아브라함의 육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자식을 낳겠습니다” 하는 그것을 사라의 태가 이미 죽고 난 뒤에(죽음이죠), “‘있음’은 ‘없음’이었단다. 네가 ‘있다’고 여기는 모든 기능과 실천력은 원래 ‘없음’ 이었어”로 만듭니다. 욥기 3장을 잠깐 봅시다. 1절에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하죠.
“욥이 말을 내여 가로되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그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유암과 사망의 그늘이 그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욥 3:2-5)
사람은 자기의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외부문제로 방향성을 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부터 주체는 더욱더 곤고해지기 시작합니다. 지금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겁니다. 사람에게 죽음이 임해야 출생의 의미를 재조명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그냥 건강하게 살 때에는 지난날을 잊어버립니다. 사람에게 죽음이 임할 때 비로소 소급해서 ‘내가 왜 그동안 살았지?’ 라고 자기출생과 존재의 이유를 다시 돌아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의 뜻은, 태어날 때 태어났다고 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고, (인간의 주체란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하! 인간은 죽음에 이르기 위해서 태어났구나.’ 다른 말로 하면 ‘죽기 위해서 태어났구나.’ 다른 말로 하면 ‘태어날 때부터 죽음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태어났구나’ 하는 것을 죽음이 닥쳐 올 때 그 죽음에 기초해서 다시한번 지나간 일을 재생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주제가 뭡니까? 자아의 죽음이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죠. 아브라함과 사래가 둘다 애기를 낳을 수 있을 만 할 때 왜 애기를 못 낳게 하느냐? 애기를 아예 안 낳은 것은 아니죠. 애기를 낳게 했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이스마엘 아닙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계획 아닙니다. 그것은 저주받을 계획이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축복을 약속했으면 그 축복을 만드는데 아브라함 본인의 기여도를 왜 배제하느냐’는 겁니다.
말씀을 지켰다는 그 공로를 집어넣으면, ‘하나님과 내가 합작해서 훌륭한 성과를 이룬다’고 할 수 있겠는데 왜 그걸 배제하느냐 이 말입니다. 배제하는 이유는 아브라함은 “정하신 사람”이 아닙니다. “정하신 사람”에 포함된 사람이지만 이 세상에 “정하신 사람”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어요. 그것이 로마서 5장에 나오잖아요. 아담과 대비된 사람은 예수님이에요.
첫 번째 사람은 아담이고 두 번째 사람은 아담의 아들이 아닙니다.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중간에 있는 사람은 일률적으로, 질적으로 아담에 속해 버리고, 이쪽은 그리스도안에 속해 버립니다. 실제로 아담마저도 장차 오실분의 표상이라고 했습니다. 모형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삭제, 이삭삭제, 야곱삭제, 모세삭제, 삭제, 삭제, 아담을 삭제하고 나면 나중에는 뭐밖에 안 남아요? 결국 이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안남지요.
그래서 골로새서 1장 16절에 뭐라고 합니까? “모든 만물은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그의 영광을 위해서 지은 바 되었느니라.” 아주 짧은 문장으로 나와요. 그가 누굽니까?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이방종교지요. 그가 누굽니까? 구체적으로 “정하신 사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사울이 “주여!”라고 할 때 예수님의 답변이 뭐였습니까? “네가 핍박하는 나는 나사렛 예수라.”
그 당시 ‘나사렛 예수’라는 것은 ‘강원도 돌쇠’, ‘강원도 감자바위’하고 똑같은 말입니다. 구체적인 고향을 언급하고 구체적으로 본적을 말하잖아요. ‘나사렛 예수’다 이 말이죠. 인간은 무지 인간을 무시해요. 하지만 신이라면 껌뻑 죽습니다. 알라신, 알라신 믿는 사람들의 알자즈라통신사. 자즈라지죠. 한번 씩 협상시한 발표할 때 마다 자즈라집니다. 이슬람교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어요. 그냥 신만 있어요.
신은 여백입니다. 첫 시간에 그림 그린 것 기억나십니까? 다시한번 그리겠습니다. 자꾸 되풀이해야 합니다. 인간의 기억은 감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 나오시는 어른이 맨 날 하시는 소리가 “오늘 설교 말씀 잘 알겠습니다” 하고 돌아서면 다 잊어버린답니다. 신은 구름위에 윗동네에 있고, 아랫동네의 인간들이 모여서 강강술래를 손잡고 하고 있죠. 하나의 서클이 되어서 순환되고 있습니다.
위에서(신) 밑으로(인간세계) A라는 사람이 내려 받은 은총을 A-B-C,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나누어 줄때 그냥 주지 말고 신을 거쳐서 줍니다. “이것은 신의 자비다. 내가 주는 물건이 아니고 나의 애정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했으니 나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를 사랑하는 것이다”하고 A에게서 B가 받았으면 B는 C에게 줘야 합니다.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신의 이름으로 준다. 하나님이 너에게 복주라고 나에게 시킨 거야.”
이렇게 해서 인간세계에는 사람들의 머리만 있다면 이 신의 자리는 뭡니까? 텅 빈 공간이죠(* 옆에서 보면 위는 신의 자리이고 아래는 인간의 자리인데 그것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구멍 뚫린 토큰을 위에서 수직으로 내려다보이는 그림을 연상할 것. 주변부는 인간의 자리이고 가운데 신의 자리는 구멍이 뚫려 있는 것처럼 텅 빈 공간이 된다). 여기에는 누구라도 들어가면 안돼요. 왕이라든지 국가가 들어가면 안 됩니다. 들어가게 되면 이것은 뭐가 돼요? 독재가 되겠지요.
이것은 신의 세계지만, 이것은 정식으로 국가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가짜입니다. 물론 양쪽 다 가짜지만. 양쪽 다 십자가가 빠져있습니다만. 메시아가 구체적인 인격자로 등장하는 시점이 언제냐 하면, 이스라엘이 왕을 구할 때부터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방나라를 본받아서 하나님의 자비로 살기 싫고 우리는 그냥 이방국가들처럼 눈에 보이는 사람이 통치하기를 원한다고 사무엘에게 요청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너희들이 왕을 구함은” 무엇을 버림이라? “이 하나님을 버림이라”고 합니다(삼상 8:7). 결국은 뭐냐? 여기 이 텅텅 빈자리는 계속 비어 있는 채로 계속 선물하는 식으로 살라는 겁니다. 여기 이 빈 공간에 누구라도 덜렁 들어오면 안돼요. 비어놔야 돼요. 여기를 비워놔야 한다고요.
고린도전서 12장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교회라는 것은 다 같이 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발이 손더러 ‘쓸데없다’ 하는 소리 못하고, 귀가 눈더러 ‘쓸데없다’ 소리 못한다.”(고전 12:12-27) “우리는 서로 지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손가락들이다. 손가락이 퉁퉁 부으면 뭐됩니까? 손 됩니다. 그 손은 맞아야 됩니다. 손가락은 손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붙어 있는 손가락들이기 때문에 이쪽손가락이든지 이쪽 손가락이든지 들어갈 때는 그냥 들어가지 말고 손을 거쳐서 들어가야 됩니다. 하나님이 주의 이름으로 봉사하라고 합니다. 내 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게 옛날의 엘사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적세계, 종교적 세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것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충분하게 하나님께서 적용의 배경으로 삼은 겁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여기에 뭐가 들어온다? 고난. 무슨 고난? 낯선 고난이 들어와 버리니까 이것이 깨져 버린 겁니다. 왜? 왜 하필이면 나에게. 내가 뭘 잘못했는데? 특히 욥이 억울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전에 욥의 기도는 다 응답이 되었었어요. 욥이 하는 말이 “하나님 전에는 제 기도가 다 응답 되었었습니다”(29장)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욥의 기도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그 기도 내용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고 의로운 것이라고 인정받았잖아요. 그렇게 잘 지내 왔었는데 ‘왜 지금은 응답이 안되냐’는 겁니다. 왜? 억울해도 너무나 억울하다는 거예요.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살았는데 날 버리면 나는 어떡하라고?’
욥이 처음에는 중재자를 보내달라고 이야기를 했고, 그것도 안 되니까 나를 중재자 삼으라고 이야기했고, 그것도 안되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중재자가 되어 달라고 했고, 그것도 안 되니까 하나님을 욕했어요. “하나님은 옳지 않습니다. 내가 옳습니다. 왜? 나는 현재 내 할 도리를 다 했기 때문입니다.”
중재자 문제였어요. “그동안 하나님이 제 기도를 응답 했잖아요. 왜 이제 와서 얼굴빛을 바꾸십니까? 그때에는 곧잘 응답해 주시더니만 왜 지금은 침묵을 하십니까?”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시편 22편에 뭐라고 합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신음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면 전부 다 가짜입니다. 그것은 다른 신입니다. 여호와, 언약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것은 ‘엘 샤다이’의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이 평소에 익히 알고 있는 신이 아니고, 여호와의 언약이 개입되지 아니하면 구원 못 받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심판은 “정하신 사람”인 새언약맨에 의해서 마지막 심판이 결정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고 합니다.(고후 5:10) 하나님의 심판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판대입니다.
‘대한 예수교’입니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것이지 하나님교가 아닙니다. ‘예수교’입니다. 예수를 뛰어 넘고서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것인 인간의 종교적인 본성에 불과한 겁니다. 님에 관해서는 우리가 스스로 부정하고 부인할 리가 없습니다. 왜?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문제성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면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라이벌 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죠.
이 그림을 위에서 보면 여기 가운데 신의 자리는 텅 빈 상태지요. 여기에 왕이 들어가죠. 이스라엘백성들이 왕을 요구하니까 하나님이 인간들이 요구하는 왕을 허락했습니다. 욥기에 보면 사탄이 욥을 시험할 때 하나님이 허락했지요. 다 이유가 있습니다. 허락을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평소에 얼마나 이방인처럼 살고 싶어 했는가를 여기서 폭로 당하는데 그 이방신을 섬기는 자로 등장하는 왕이 사울 왕입니다.
이 사울왕은 특별히 해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선택하고 지목한 다윗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 편을 듭니까? 사울 편을 듭니다. 여기서 터져 나온 것이 뭐냐? 시편 22편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욥에서 예수님까지의 사이에 이런 고난의 브리지(다리)들이 군데군데 놓여져 있습니다. 언약 안에 군데군데 놓여 있습니다.
특히 사가랴 라는 선지자는 참 억울해요. 평생 수십년동안 왕에게 충성을 했습니다. 몇 명 되지 않는 소수의 병력을 가지고 큰 성과를 거두는 승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왕에게 잔소리 한번 했다고 피 흘리고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걸 놓칠 리가 없지요.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 하리라.”(눅 11:51)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들의 주장 때문에 그 꼴이 사가랴의 꼴 되도 아벨처럼 억울하게 죽어야 될 그 길로 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길을 가야만 해요. 예수님이 그 길을 가야 우리 주체가 무용지물로서, 세상만사 내 위주로 살아왔다는 그 죄가 드러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는 복음이 없어요. 하나님의 존재는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했지요.
그래서 이 빈자리에 진짜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다윗이 들어갈 때, 그 진짜 왕을 사울왕이 공격을 하게 됩니다. 이때 사람들이 사울 편에 섬으로 말미암아 사울왕만 사울적이 아니고 모든 인간들이 철저하게 육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육적인 욕망 때문에 다윗이 쫒겨 다니면서 억울한 호소를 하게 됩니다. 욥의 친구들에게서 욥이 당하는 것처럼 철저하게 다윗은 당하게 되고 그리고 마치 욥처럼 다윗은 억울함에 대해서 호소를 하게 되는 겁니다.
시편 6편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시편 7편 7절에 보면 “민족들의 집회로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시편 전체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나를 의인되게 만듦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잠잠해 있던 모든 악인들이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의가 시기가 나서 와락 달려드는 그런 양상을 띱니다. 제가 아까 요한복음 이야기했지요.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함으로 말미암아 바리새인들의 화를 더욱 돋우는 그런 역할을 하시면서 십자가로, 십자가로 죽음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지금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그렇게 또 역사하십니다.
우리 약을 살살 올립니다. 제가 경험한 것은 하나님께서 일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기도에서 빼먹은 것만 들어주시는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항상 하나님이 주신 것은 예상치도 못한 감격을 안겨줍니다. 평소에 우리가 기대했던 것은 일체 다 버리고, 기대하지 않은 것만 골라서 들어 주시는 놀라운 솜씨를 발휘해요. 철저하게 우리의 존재가치를 무로 돌려버립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뭐냐? 육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바다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자식을 낳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약속받은 당사자 아브라함이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그의 힘을 보태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몸에서 자식이 태어나게 했다면 그 모든 것(공로)은 여호와의 언약이 알아서 할 일이었지 내가 알아서 할 일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욥은 자기에게 낯선 고난이 찾아오면 그 고난에게 자기를 일임해야 돼요. 욥의 친구는 자꾸 닦달을 내는 거예요. “네가 잘못해서 고난이 왔다.” 잘못해서 찾아온 고난이 아닙니다. 욥은 가만히 있는데 그냥 고난이 욥에게 온 겁니다. 그런데 욥의 잘못은 뭐냐? 그 고난에서 자기가 도망쳐 보려고 애를 쓴다는 거예요.
네 번째 친구인 엘리후의 말은 뭐냐? “욥 너는 자꾸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 언급도 안하시고 잠잠히 계신다’고 하는데, 고난도 하나님의 계시인 것을 네가 왜 모르느냐”고 하는 겁니다. 고난도 하나님의 계시인 것을. “욥아! 자꾸 네 선에서 다루려고 하지 말고, 고난 자체가 훌륭한 계시인 것을 네가 왜 모르냐” 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십자가 마을을 욕하는 사람들의 말이 그거잖아요. 맨 날 십자가마을은 하는 소리가 “우리는 죽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는데 그렇게만 말하면 안되고, “부활도 생각하면서 긍정적으로 나가야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죽어야 한다”는 이것이 계시입니다. 우리가 뭘 빼고 자시고 할것이 없어요. 그냥 그 자체로 우리에게 덮치는 명령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하는 그것만 좋아하지 말고, “나사로야 죽어라”하는 것도 받아야만 합니다.
“살리라” 하는 것만 좋아하고 감사하지 말고 “죽으라” 할 때는 죽어야 하는 겁니다. 에스더는 뭐라고 했습니까?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요새말로 하면 “까라면 까!” 백부장의 말에 의하면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나이다”(마 8:9) 예수님이 “이만한 믿음은 못봤다”고 합니다. 자기 선에서 자기 일을 처리 하려고 시도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우리의 예상문제를 비켜가서 우리의 무의식속에 있는 욕망을 건드리는 겁니다.
욕망은 진동합니다. 건드리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건드리기만 해봐라!” 항상 이것은 ‘불툭불툭’ 합니다. 욕망의 성격이 원래 그래요. “하이고! 우리 누나는 얼마나 성격이 온화한지 꼭 백설공주 같아. 얼마나 착하고 얼마나 온순한지.” 천만의 말씀입니다. 덜 건드려서 그래요. 덜 건드려서. 그래서 제가 욥을 연구하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하! 욥기는 뭔가 트랙터가 확 갈고 지나갔구나.’ 그게 뭐냐? 고난의 트랙터가 욥 전체를 완전히 깔고 지나갔어요.
욥을 가지고 고난을 한바탕 쫙 깔아 보니까, 비로소 여기 저기 큰소리가 나고 싸움과 논쟁이 실컷 벌어지는 거예요. 십자가를 한번 쫙 깔아 보니까 그동안 점잔 빼던 놈들이 그동안 감추었던 성격 다 드러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시대의 현상입니다. 신의 존재를 사람들은 수용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용서하지 않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십자가를 용서하지 않아요. 왜? 손님이 오지 않는다고.
십자가는 상품 가치가 떨어져요. 왜냐하면 이유를 찾기 위해서 온 사람들에게 이유를 줘야 고객에 대한 서비스가 되는 겁니다. 커피 1호점을 내는 이유가 뭡니까? 여자가 남장을 해서 종업원을 하고 있는 이유가 뭡니까? 고객들에게 맛있는 커피를 제공하는 거잖아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는 돈 되는 일이 뭡니까?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줘야 할것 아닙니까?
그들이 원하는 것이 뭐예요? ‘행복한 가정 꾸미기’, ‘긍정적 사고방식’, ‘하면 된다’는 적극적 사고방식을 키워주는 거잖아요. “당신은 사랑받기 원하는데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게을러서 그렇지 열심히만 하면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축복의 대상입니다.” 그래야 장사가 되는 겁니다. 거기에 십자가가 왜 낍니까? 누구 기죽일 일 있습니까? 십자가가 낄 이유가 없습니다.
트랙터 가지고 밀어버려야 돼요. 예수님의 고난으로 밀어버려야 돼요. 특히 욥의 친구중에서 ‘회개하라’고 합니다. 와! 이것은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이거 거짓말입니다. ‘회개하라’고 친구가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네들이 고난을 안받아 봤으니까, 자기 경험상 느낀 경험입니다. 뭐냐하면, ‘나는 회개하니까 복이 오더라’ 하는 자기 경험을 일방적으로 욥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는 욥도 알고 있어요. 욥도 회개 했었던 사람입니다. 그들이 아는 수준은 욥도 다 압니다. 이창호하고 9급하고 바둑을 두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그것은 게임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지금 욥이 받는 것은 회개할 성질의 고난이 아니고 ‘낯선 고난’ 이라니까요. “회개하고 십자가를 믿어라.” 이것은 십자가를 모독하는 겁니다. 십자가는 회개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의 현실입니다.
이것은 내가 회개하든 안하든 그냥 내게 찾아온 겁니다. 나하고 의논하지 않고 십자가 졌어요. 괘씸죄입니다. 나하고 의논을 해야 할 것인데. 의논하지 않고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제 일방적으로 그것을 적용하는 적용단계만 남아 있어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십자가는 이미 졌는데, 사태는 이미 벌어졌는데 아직도 자기 행위를 주장하는 사람이 누구냐’ 이말이죠.
그런 사탄의 꾀임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