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서의 대화
- 언약적으로 본 욥기 -
Ⅰ. 서 론
구약에서의 언약은 모세언약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아브라함의 언약’이 있었고, 모세 언약 이후에는 다윗언약도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알려주심으로서 그들만이 ‘언약 안’과 ‘언약 밖’의 차이를 눈치 채도록 하신다.
만약에 언약을 생각하지 않는 상태에서 인간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까? 이 점을 욥과 욥의 친구들이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욥과 그 친구들에게 있어 언약이란 대단히 낯선 것이다. 이 낯섬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두고서 욥과 친구들과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는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언약의 진수는 새언약에서야 제대로 밝혀진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5-28)
언약의 완성, 즉 새언약은 예수님의 피와 살로만 수립된다. 살과 피는 수난이요 고난이요 고통이다. 세상 모든 이는 예수님이 만드시는 새언약의 취지를 자신의 능력으로 알지 못한다. 육은 영을 모르게 되어 있다. 성령이 와야 비로소 알 수 있는 바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구약 때부터 이 새언약을 겨냥한 언약적 사건을 터뜨려오셨다. 그 중의 하나가 ‘욥의 고난 사건’이다. 이 ‘고난 사건’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논쟁이 일어난다. 서로 자기 의견이 맞다 는 것이다. 이 고난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면 과연 하나님의 뜻에 접속이 성사될까?
모세 언약에서는 구체적으로 희생제물의 죽음이 제사법으로 통해서 되풀이 된다. 하지만 욥은 모세언약 이전 시대이다. 구체적인 제사법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의 구원관과 속죄관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별은 어떤 식으로 시도하게 되는가?
언약의 성격이 ‘의인의 희생적 고난’이라면 그 언약적 고난의 중심에 서 있는 자는 구체적인 제사법이 주어지지 않는 시대에서는 어떤 식으로 하나님이 주신 고난을 해석하게 되는가? 즉 비언약 사고방식에서 어떻게 고난을 통해서 언약적 사고방식으로 전환이 일어나는가 하는 점을 주목해 봐야 한다.
비언약의 세계는 선악지식으로 중무장된 세계이다. 과연 인간들이 제시하는 선악적 의식으로 하나님을 포착될 수 있을까? 이것은 분명 실패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고난(욥의 고난)은 더 큰 범위로 둘러쳐져 있는 하나님의 고난의 범위 안에 놓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 받는 자는 결국 자기 고난으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고 그 되돌아온 자리에는 아무런 해답이나 해결책이 기다리고 있지도 않다. 여기서 인간은 절대 무능을 느낀다. 그들은
‘하나님의 고난’에서 고난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에게 고난이 온다고 여긴다.
이러한 해석을 유발시킨 인간들의 근본 선악적 인식이 무엇이며 그 당시에 신앙인들의 의식은 어떤 신학적 구조가 짜여져 있는가? 도대체 그 당시 인간들이 신학적 성격이 어떠하기에 ‘하나님의 고난’을 받아들일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더란 말인가? 그 하나님이 고난의 자리를 인간들은 자신들의 고난으로 채워놓고 있었기에 문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고난 인식’을 철거해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에서 인간의 비언약(육)이 가진 한계가 밝혀진다.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비언약 안에 갇혀 있는 인간에게 언약을 소개하시는가? 이것이 욥기의 주제이다.
Ⅱ. 본 론
1. 욥기를 대하면서 버려야 할 선입견
(1) 욥기에는 문학적인 일관된 스토리가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
욥기는 인간들의 일관된 스토리 따라잡기를 인정하지 않고 차단시킨다. 소설이나 시나 희곡이나 모두 읽는 사람들에게 일관된 스토리에 동참하도록 배려하는 차원에서 공감의 장을 마련해준다. 하지만 욥기에는 이런 친절은 없다.
(2) 욥기에는 선과 악의 뚜렷이 구분될 것이라는 선입견
하나님은 선한 분이기에 무조건 하나님 편을 들기만 한다면 자신도 선한 사람으로 간주될 희망을 괴멸시킨다. 즉 인간의 선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함을 이해해서 의식적으로 선한 종교인이 되려는 의도를 용납하지 아니한다.
(3) 욥기에서 사회생활에 필요한 뭔가 얻을 게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
인간의 일상생활에 유용한 처신술이나 대인관계나 개인적인 인격 함양에 도움 되는 지혜가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욥기를 읽기 싶다. 하지만 욥기는 도리어 이러한 인간들의 평범한 의도를 배척한다. 뭐든지 자기에게 유용함이 곧 좋은 것이 된다는 기준에 입각해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을 인정하지 아니한다.
(4)욥기는 교훈집이라는 선입견
욥기에는 깔끔함이란 없다. 그 어떤 체계 있는 신학도 없다. 답답하게 갇혀있던 성질들이 그 성질나는 그대로 터뜨리고 있다. 전개과정이나 대화들이 질식할 정도로 답답하게 되풀이 된다. 심지어 하나님마저 그러하다. 욥기는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어 감동케 하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답답함과 인간들의 답답함을 그대로 반영한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서 심하게 답답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욥의 심적 괴로움에 동참할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해서 욥기에서 얻을 수 있는 느낌은 ‘심히 답답함’이다. 자진해서 이 답답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욥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기본 욕구를 고발하는 책이다. 우리들의 각자 숨겨놓은 기본 욕구의 정체를 하나님의 답답한 대처로 인해 폭로 당하게 된다. 이것이 인내이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야고보서 5:11)
2. 사태의 전개에 담겨 있는 내용들
(1) 무너지는 부러움
1장-2장에서 욥이라는 인간의 존재는 본인 뿐만 아니라 가족과 주변의 모든 이, 심지어 하늘나라까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욥과 하나님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이러한 부러울만한 요건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를 모른다. 모를 때는 무너져서 다시 세워보면 알게 된다. 그 과정이 바로 욥의 처음이요 끝이다.
‘무너지게 하고 다시 세우기’, 이것은 바로 아브라함 언약의 진수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것!(롬 4:17). 욥을 통해 ‘없음’의 의미와 ‘죽음’의 의미가 새롭게 드러난다. 욥은 그 중심에 놓여져 있다. 그의 말대로 그는 피고다. 그런데 문제는 재판이 원활하게 속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이 개입을 자제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욥은 속이 탄다. 재판을 벌려놓았으면 빨리 재판이 진행되어 어떤 결말이든 나야하지 않는가? 도대체 무엇이 ‘없음’이며, 무엇이 ‘죽음’인가?
하나님은 ‘없음’의 근원을 말씀하기 위해 욥을 사용했고, ‘죽음’의 근원을 말씀하기 위해서도 역시 ‘욥’을 사용하셨다. 하지만 욥은 묻는다.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말입니다.
욥은 자기 생명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을 저주한다. 자신이 살지 못한다면 왜 꼭 다른 사람이 살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죽이려면 빨리 죽여라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죽음조차도 계속 지연된다. 왜 그래야 하는가?
이 욥의 질의에 답변할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고난당한 본인이 모른다면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아내도 물론 모른다. 이 욥에게 닥친 고난으로 인해 인간 세계에서 현재 진리처럼 통용되는 각종 무지와 패역과 오류가 총 얼굴을 내밀기 위해 욥의 고난의 현장에 집결된다.
즉 무엇이 고난이며 무엇이 선이며 악이며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냐가 우선이 아니라 근본 욥이 묻는 물음에 우리 인간은 답해야 한다. 왜 하필이면 욥이어야 하는가? 그 욥의 당위성을 인간의 모든 지혜는 응답을 요청받고 있다. 욥의 울부짖음이 귀전을 때리는 와중에서….
(2)공정한 재판을 요청하는 욥
고소인들의 무고한 고발장만 자꾸만 쌓여가고 욥이 혼자서 변호하랴 재판장 불어내랴 바쁘다. 왜 하나님께서는 재판을 지연시킬까?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지 않으니 지연된 재판으로 인해 재판의 내용이 변질되어 간다.
왜 하필이면 ‘나’인가? 에 대해서 답변되어지지 않고, 보편적인 죄와 그 형벌에 대한 원인과 결과 관계 탐색에 초점이 모아진 재판이 되고 만다. 즉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의롭게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죄에 대한 형벌을 어떤 식으로 치루시느냐에 관한 것이다. 욥은 답답한 심정을 품고서 필사적으로 재판의 주제를 흐리지 말라고 고소인들에게 호소하게 된다.
고소인들의 주장은 이렇다.
“죄와 형벌이 필연적 관계로 이어져있음을 욥은 잊어서는 아니 된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죄도 없는 자를 그토록 형벌 내릴 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기에 일처리 또한 공정하지 이를 데 없다. 모든 형벌이란 죄와 연계되어 있다면 욥, 네가 할 일은 너의 죄를 스스로 찾아서 회개하는 것 밖에 없다. 그렇게만 한다면 공정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용서하시고 결국 원상복귀를 해주실 것이다. 이것이 보편적 하나님의 ‘인간 다루심’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세상 다루심’은 하나님에게는 없다.”
하지만 욥은 이 주장에 다음과 같이 되받아친다.
“너희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인간 다루심’에서 왜 너희들만은 쏙 빼느냐? 죄의 크기에 양 만큼 형벌의 크기가 주어진다면 너희들은 지금 내가 당하는 형벌보다 더 큰 형벌도 마땅하다. 이것이 너희들이 주장하는 ‘공정하신 하나님’의 처신이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라. 너희들이 내 처지라면 나도 너희들처럼 병문안에서 그런 안일한 위로 문구나 날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다고 해서 고난 받는 너희들이 내 말에 수긍하겠는가? 동의를 하겠는가? 왜 너희들은 전혀 진전도 보이지 않고 해결책도 되지 않는 방법만 나를 향해 퍼붓는가?”
여기에 대해서 고소인은 이렇게 대꾸한다.
“그것은 잘못한 네가 알지 우리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
여기에 대해서 욥은 말한다.
“모르면 입이라도 다물지 왜 아는 척 하는가?”
그리고 공격 방향을 고소인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직접 돌린다.
“왜 하필이면 스스로 찾아낼 만한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저에게 왜 이 같은 형벌을 내리십니까? 어서 재판이 이루어지게 해주옵소서. 그래서 욥은 죄를 짓지 않았고, 그런 욥에게 형벌을 내린 것은 이 하나님의 착오였다고 알리소서”라는 식으로 나온다.
(3)엘리후의 등장
엘리후는 이 논쟁을 다 지켜보면서 욥과 고소인 양쪽에 다 문제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욥아, 하나님의 일을 망치려 들지 말라. 그렇게 되면 네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된다. 고소인들아, 너희들은 욥과 상관없는 사실을 가지고 욥을 공격하고 있다”
그리고 난 뒤, 엘리후는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정리한다.
“하나님께서 안 나타나신 것이 아니다. 욥, 네가 죄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이점에서 고소인들은 욥을 오해했다. 하지만 고통이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부터 너는 죄를 짓기 시작했다. 이 점에 대해서 너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다. 여전히 너는 네가 죄 없다고 우기고 있다.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고 시작된 일을 통해서 너는 너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공의로움에 대적하는 자로 등장되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 네가 너의 의로움을 강조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의로움은 너에게서 배척당하고 있다. 너의 의로움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께서 일을 잘못하고 있다고 시정을 요구할 권리는 너에게 없다.
너는 하나님마저 조정하려 했다.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게 그렇게 설득했기 때문이 아니요, 또한 하나님이 심판을 행사하는 것도 사람이 하나님에게 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너의 조급함이 하나님의 공정함을 흐리게 했구나. 교만해서는 아니 된다”
(4)하나님의 등장
“욥, 네가 피해자가 아니라 나 하나님이 피해자이다. 그리고 너는 가해자이다. 너로 인해 내가 졸지에 불의한 하나님이 되고 말았구나. 세상의 선과 악은 나 하나님이 처리한다. 너에게 그럴 능력이 없지 아니한가? 괴물을 네 손으로 처리한 적이 있는가? 아무 것도 경작하지 않는 빈 땅에 비를 촉촉이 내리는 지혜에 대해서 네가 알고 있는가? 너는 네 생각만 하는구나.
네 주장에 의하면 이 하나님이 악을 제 때에 처리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세상 사람들이 감당 못하는 이 세상의 무섭고 악한 큰 능력들이 나의 손에 의해서 어떻게 관리되는 줄을 너는 아는가? 어디 답변해보라. 이 하나님은 그 어떤 인간에게도 의무라는 것을 지지 않는다. 이 점을 네가 몰랐구나.”
(5)욥의 회개와 처신
욥은 자신의 역할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기존에 알고 있던 선과 죄 개념 안에 하나님이 갇힌 채로 일하시지 않음을 알았고, 여기에 대해서 무지해서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여긴 자신의 죄를 회개한다.
하나님은 욥의 이러한 역할을 핵심으로 하여 축복과 저주의 기준을 삼고자 하셨다. 욥의 용서가 없으면 욥의 친구의 죄는 그대로 있다. 그리고 욥이 비로소 알게 된 하나님 상에 준해서 축복의 의미를 세상을 알리고자 욥은 전보다 더 큰 축복을 받게 된다.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받은 다음과 같은 계시와 같은 맥락이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2-3)
Ⅲ. 결론
인간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 나름대로 선악 기준을 갖고 있는데 문제는 이 선악 기준이 오로지 자신의 ‘절대 신’으로 군림하는데 충실한 선악기준으로 작용하는데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더 넓은 언약으로 이것을 깨트리신다.
즉 기존의 선악기준으로 도저히 원인과 결과로 연결될 수 없는 ‘없음’과 ‘죽음’의 계시를 언약 사건으로 침투시켜 그 인간을 와해시키고 만다. 절대 자아를 폭파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늘 회개케 하신다.
평소에 그가 알고 있던 하나님도 자신의 선악체계에서 빚어낸 엉터리 우상이었다. 즉 ‘자기를 위한 신 섬기기’였던 것이다. 이것을 깨는 것은 유일하게 최종의 언약 범주가 되는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새언약이라는 범주 안에서 모든 인간은 이미 죽었고 없는 자에 해당된다. 마치 ‘경작하지 않는 황무지’와 같이 스스로 존재 가치나 의미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간들이 매일같이 자기를 사수한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를 속으로 되풀이한다. “나는 그토록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데 왜 하필이면 나보다 못한 자가 나 보다 더 부자가 되게 하느냐? 혹은 나보다 더 악한 자가 내가 고생하는 곳보다 덜 고생하는 벌을 받는가?”하는 식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포기 못한다.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만인으로부터 피해자가 되시는 분을 보내셨다. 이것이 최종 계시 범주다. 마지막 심판도 이 범주에서 실시된다. 누구든지 그 분의 십자가 피 앞에서 자신이 가해자임을 자인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현재 주어진 그 참혹한 형편이라도 하나님의 공정하신 은혜의 선물임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영원한 지옥의 나락에 합세하게 된다.
십자가라는 새언약 앞에서 우리는 늘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해야 한다. 이것이 천국의 풍성한 복에 참여하게 될 복된 자들이다. 이렇게 해서 욥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선지자이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