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_cross070730c(3강)
(강의:이근호 목사)
자리에 앉아주시고,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욥기에 보면 선악과 따먹고 타락했다는 이야기 없어요. 그리고 에덴동산 이야기도 거긴 물론 없습니다. 노아홍수 이야기도 없습니다. 욥기에 욥의 친구들이나 욥이 자기의 본심을 드러내는 이런 논쟁 가운데 본심을 드러내는 글들에 보면, 창세기 1장, 창세기 2장, 3장, 4장, 5장 이런 이야기 하나도 없습니다.
창세기 2장, 3장 선악과 하는 이야기라든지 창세기 노아홍수 이야기, 그 다음 아브라함 이야기, 이런 것은 나중에 모세가 하나님 계시를 받고 이스라엘 백성 너희들은 정말 택한 민족이야. 왜 택한 민족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 할 때 창조 때 이야기를 소급해서 이야기 하다 보니까 창조와 현재 이스라엘과 장차 올 메시아가 이렇게 소위 구속사로 꿰지요. 언약사로 꿰는데.
일반 이방민족들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방인들에 있어서 창세기 선악과 이야기라든지, 4장에 가인, 아벨 이야기라든지, 노아홍수 이야기라든지 그것은 관심사가 없는지, 그것은 자기하고 관계없다고 여기는지 그게 뭐 중요해.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는데 그게 자연의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는데 그게 뭐 대수냐. 하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걸 우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방인들은 이 자연세계 자체,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 계시다는 자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 온전함으로 보는 거예요. 온전함. 죄가 있고, 마귀가 들어와 선악과 따먹으라고 꼬셔서 따먹고, 무슨 문제가 있고. 무슨 문제 있는 세상으로 보는 게 아니고, 세상 돌아가는 자체가 완결성을 지닌 온전함으로 본다는 거예요.
욥기 1장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살펴보시고, 마귀는 사탄은 그 앞에 두루 다녔다. 사탄이 나오잖아요. 이스라엘의 창세기 3장 이런데 보면, 사탄의 등장이 말씀 끊어지면 등장하지만 욥기 1장에서는 사탄이 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사탄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 창조의 온전함이 뭐, 흠집이라도 났단 말이냐? 그게 뭐. 사탄이 있겠지 뭐. 사탄이라 하는 것은 욥기에서 ‘고소자’로 ‘고발자’ 어떤 학자들은 그게 원래 보디가드다.
사탄이라 하는 것은, 원 용어가 원래 왕들의 보디가드라 해서 민심을 정탐할 때 그때 용어가 사탄인데 그러한 구조, 왕이 있고 민심이 정당하냐, 임금에게 지금 칭찬이 자자하냐. 그걸 탐색하는 그런 탐색인데 그것이 이 땅의 구조가 그대로 하늘까지 그대로 이어지면 하나님에 어전회의가 있었고, 그 앞에 사탄이 있었는데 어이, 사탄. 니 어디 갔다 왔는데? 세상을 두루 갔다 왔습니다.
거기 욥이란 사람 주목해 봤나? 그 사람이 어땠어요? 내 보기에는 완전한 자야. 흠이 없어. 너도 알다시피 욥은 의인이야. 사탄이 이야기하기를 지가 먹은 게 있으니까 좋아하지, 먹은 게 없으면 뭐 좋아하겠습니까? 그래 나오네. 그래 나옵니다. 좋다. 니 지금 욥의 의를 완전히 무시하는 모양인데, 그러면 한번 빼어 와봐라. 한번 빼어볼까요? 유혹하지요. 이래 이야기됐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해서 욥 1장에서 하나님 만든 세계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이래선 안 돼. 그 사탄은 제거돼야 돼. 라는 요한계시록에 그놈은 지옥 불에 넣어야 돼. 그러한 긴박감이라든지 요청, 요구, 은근히 사탄이 없어지기를 원하는 심판받기 원하는 그 기대감을 이 욥기 1장에 있는 욥이나 욥의 친구들이 지상에 있는 인간들이 그걸 하나님에게 강력히 요구한 적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사탄 때문에 못살겠습니다. 갈아치웁시다. 그놈의 천사 말도 안 돼. 이런 식으로 데모한 적 있느냐 이 말이지요. 없잖아요. 그렇지요?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따먹을 때 아, 이건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에 의해서 작살난다. 이게 분명히 야, 이거 한바탕 붙겠네. 이래 나오지만 욥기 1장에 보면, 사탄이 있더라도 사탄이 그런 고소하더라도 그게 어때서? 그게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온전함이 어떻게 흠집이 되고, 그게 하나님 앞에 하나님 창조세계에 대해서 빌미거리가 되느냐 이 말이죠. 없어요.
사탄이 있으면 있고, 사탄이 있든 쪼개져 있든 그건 있는 거고. 나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그 자체가 그게 뭐 어때서. 더 이상 뭘 더 원해. 그 자체가 온전함이고 완결성 있는 온전함인데 그게 어때서 말이죠.
그래서 욥기 1장을 보면서 죄가 무엇이냐? 뭐, 사탄이 무엇이냐? 이런 것들을 이해할 때 욥와 친구들 그 시대 이방인들 신학시스템, 신학구조 그걸 접근해 보려고 한다면, 사탄이 있고 하나님께 어떤 고발을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하늘나라에 창조에 문제가 있다, 이거는 흠집이 생겼다. 라고 말하지 않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고방식을 우리는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 말입니다.
신학자들은 쓸데없는 [신정론]이라는 걸 말 끄집어내요. 신의 정의론. 신이 과연 정의롭다면 어떻게 광주사태가 일어나느냐? 이런 거요. 신이 정의롭다면 어떻게 내 돈 떼먹고 도망간 놈이 잘될 수 있느냐 이런 문제. 과연 신이 살아계시는 겁니까? 신이 살아 있다면 왜 이렇게 불의가 횡행하고 의인이 이렇게 수난을 받는. 그러니까 이거는 뭔가 하나님의 정의는 정의대로 살리면서 악들이 설치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어떤 정당한 논리가 성립되는가? 이런 신정론이라 하는 게 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신정론을 하나님의 정의를 새삼스럽게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뭔가 하나님의 창조하심에 문제가 있다고 시비 거는 그 태도 자체가 사탄적인 태도라고. 그게 마귀적인 태도다 말이죠. 욥기 1장에 그런 게 없어요. 사탄이 활동하더라도 그거는 활동하면 되고, 나는 나대로 활동하면 되고. 욥이 사탄 물러가라고 욥하고 친구들이 플래카드 걸고 데모한 게 아닙니다. 파업한 게 아니거든요. 못 살겠다, 사탄 때문에. 이런 식으로 한 게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욥의 이방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바탕이 유대인이 아니잖아요. 우리 바탕이 이방인이잖아요. 욥의 하는 이야기를 쭉 들어보면 야, 평소에 우리가 우리 본색을 은근히 살짝 숨기고, 마치 유대인 행세, 언약백성 흉내를 곧잘 내면서 왔다는 것을 알아요. 솔직하지 못하고. 언약백성 흉내 낸 거예요.
유대인들을 이해합시다. 메시아 오지 않으면 우린 멸망합니다. 메시아 와서 이 로마에서 벗어나고 메시아 와서 다시 우리를 제사장나라, 왕 나라로 해 달라. 다윗의 나라, 다윗의 왕이 오셔서 최고의 이스라엘 나라를 유대인들을 아브라함 자손을 최고의 반열에 오르게 해 달라. 그렇게 간절히 기대한 건 이해하는데,
우리 필리핀이나 저 몽골이나 아프리카나 우리나라 사람 같은 경우에 여호와 알면 좋고, 없으면 뭐 없는 데로 살고. 우린 그래야 솔직한 거 아닙니까. 언제부터 우리가 유대인 이었어요. 종교 없이 살라하니 찝찝해서 죽고 난 뒤에 보험 하나 들어놓은 식으로 교회에서 가 보니까 예수 믿으면 된다 해서 없는 것보다 안 낫습니까.
뭐 하나 보험 하나 들어놓은 식으로 믿고, 죽으면 낙원 간 강도처럼 오늘밤 네가 낙원에 있으리라. 이런 보너스 받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평소에 보험 하나 잘 들어놨구나. 이런 심정이지, 뭐 애통하고 절통하고 반드시 메시아는 와야 되고 그런 마음은 없다 이 말이죠. 오면 오고, 말면 마시고. 오면 올 때까지 나는 내 할 일 하고. 그러면 된다 이 말이에요. 초대교회처럼 구름타고 오실 건데 하늘 쳐다보고 그럴 필요 없다 이 말이에요. 오실 분은 알아서 올 거고, 나는 내 할 일 하면 된다. 이래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이 세상은 별 문제가 없고 별 탈이 없다는 겁니다. 별 탈이 없다는 이 의식을 이방인 되는 우리들이 우리의 본심으로 받아주기를 간곡히 추천합니다. 아무 탈이 없어요. 그러니까 교회 안 나가도 아무 탈이 없고, 하나님 안 믿어도 아무 탈이 없어요. 그저 자식이나 잘 키우고 돈이나 잘 벌면 돼요. 아무 탈이 없어요.
사도행전에 1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아주 무서운 이야기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부활되기 전까지는 이방인들이 자기들 신을 그러니까 엘 샤다이죠. 자기의 신을 온전한 신을 어떤 믿던 간에 거기 대해서는 묵인했다는 거예요. 거기 대해서 시비 걸지 않았다는 겁니다. 묵인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십자가 지고 부활하고 난 뒤는 드디어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최종 심판할 날을 정하시고, 오직 믿는 것은 예수님과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야만 그 최후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 날을 이미 확정지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완결적이고 온전함이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거예요. 신을 믿으면 그걸로 족하다고 여겼던 것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그거는 어떤 신을 믿던 그거는 전부다 값어치 없는 것으로 아무 헛짓한 것으로 그렇게 간주하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옛날 것에 있던 그 구조 있잖아요. 신학적인 구조는 이거는 있어봐야 위조지폐가 돼서 소용없는 부도난 거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하나님이든 뭐든 간에 세상을 다시 봐야 될 그러한 전기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유대인에게만 가는 게 아니고, 나는 차라리 유대인의 사도가 아니라 이방인들의 사도로 복음의 빚진 자로서 나는 당신들, 이방인들 향해 달려간다. 이래 돼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만약에 이 이야기를 불교신자나 아닌 사람이 들으면, 사도 바울 보고 상당히 오지랖 넓다고 이야기할 겁니다. 니나 잘하세요. 남 신, 어떤 신 믿든 관계없이 나이키를 신든 운동화 신든 관계없이 니 신이나 잘 신으세요. 할 겁니다.
누가 이야기하던데. 어떤 영어강산데 예수 안 믿는 영어강사가 아프가니스탄을 평가할 때 아주 격분을 하고 있어요. 뭐냐 하면, 이 예수쟁이들 미쳤다고 그 아프가니스탄 저거들 신도 있는데 저거들 신 잘 믿고 있는데 예수쟁이들은 저거들 신 믿으라고 이렇게 교체를 강요하느냐? 이거 말도 안 되는 인간들이다 이 말이죠.
그 심리는 뭐냐 하면, 그거에요. 그 심리를 좀더 나가보면, 종교를 믿는 건 자유돼 그것을 독특하게 튀려고 하지 마라 이거죠. 보편화시켜야지 자기가 믿는 예수를 특수화시키는 것은 만약에 그렇게 돼버리면 자연세계 자체가 문제성이 있는 게 돼버려요. 처음부터 문제를 품고 오게 된다고.
그러나 우리 조상들이 믿는 하나님은 항상 세상이 어떻게 달라져도 한 가지 변하지 않는 봄, 여름, 가을, 겨울과 이런 대자연 법칙이 똑같이 일률적으로 되풀이하는 걸 봐서 봄, 여름, 가을, 겨울 똑같이 봐서 이 세상 자체가 어떤 문제성이 없다는 거예요. 문제성이 없는 것을 괜히 예수라는 걸 내세워서 새로운 종교라 해서 떴다고 해서 쑤시지 말라는 겁니다.
베드로후서에 보면 나오지요.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이방인들이 뭐라 합니까? 자꾸 세상 멸망, 멸망하는데 멸망, 멸망이라고 주장하는 그때나 옛날이나 한결같이 전에로부터 눈에 보이는 이 세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있었다. 그런데 당신이 예수 복음 가르치는 당신이 무슨 근거에 의해서 이 모두 똑같은 자연세계가 없어지고 불로써 태워진다는 과격한 발언을 하느냐 이 말이죠. 뭘 근거로 해서 그러냐 말이죠. 작년의 대자연이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한결같이 똑같은데.
그때 베드로후서 3장에서 이런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면서 그들은 물로 심판 받는 것과 소돔과 고모라의 불로 심판 받는 것을 일부러 잊으려 합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욥기 1장에 보면, 물로 심판 받는 것, 소돔과 고모라에 불 심판 받는 것, 그 이야기 없습니다. 욥의 친구들의 그 발언 속에 아무리 분석해도 그들의 발언 속에 뭐냐 하면, 신의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걸로 완결되고 그걸로 온전합니다 말이죠. 그걸로 됐지 과거에 이 세상이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에 허점이 있다는 것은 그들에겐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만약에 진짜 그들이 이 창조에 문제가 있다는 말은, 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문제가 없다와 차이 나잖아요. 그러면 문제 있음은 문제없음을 하나의 목표로 한 그 사이에 뭔가 허점이 남아요. 결핍이 남는다고. 모자람이 있다고요. 사람이 모자람이 있으면 따라붙어야 되잖아요. 이거 미치는 거 아닙니까. 이거 미친다고.
온전한 것을 온전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마음이나 편하지, 아니야 이거 뭐 남았어. 아니야. 이게 아니야. 문제 있어. 이러면 그 문제 있는 이걸 버리고 부정하고 문제없는 온전함을 또 따라가야 되니까 그만큼 숙제가 남아 있잖아요. 이거 숙제 남아있으면 사람 미칩니다. 스트레스 받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얼마나 편합니까? 다 덜 이루었거든. 그렇거든. 남아 있는 거 너희들이 더 해야 되거든. 이래 하면 다 이루었다는 것에 대해서 기쁨이 없이 늘 미흡함을 메우어야 될 스트레스가 또 생기는 겁니다.
다 이루었음을 믿어라. 그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니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 피가 그게 하나님 사랑이고 그걸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하나님께는 이미 하나님의 영광된 존재가 되었다. 예수님의 공로다. 뭘 행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지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 자까지라도 하나님은 의롭다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공로 쪽에서 나왔던 그러한 혜택이다.
따라서 네 자신의 부족분을 메우려고 시도하지 말라. 그런 것은 율법에 속한 사람인데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율법하고 거래를 끊어야지. 이제는 남이 동네에 와서 왜 율법 갖고 쩔쩔매느냐? 이런 식으로 갈라디아서, 로마서 이야기된다 이 말이죠. 얼마나 좋아요.
자유란 말은 마음대로 한다는 의미의 자유가 아니고, 어디서 ‘탈출’ 가지고 자유라 합니다. 이 자유개념이 출애굽기 개념에 나옵니다. 내가 행동을 어떻게 할까요? 라는 내 존재 개념에서 자유가 아니라 어떤 영역에 있었는데, 그 영역에서는 우리가 자유가 없었고 속박된 상탠데 너를 속박했던 그 대목이 이제는 벗어지고, 너를 속박하는 속박이 없다는 의미에서 자유거든요.
그러면 자유를 진짜 아는 사람은 뭘 알아야 하느냐 하면, 그전에 무엇이 우리를 힘들게 했고, 우리를 모질게 했고, 우리로 하여금 기죽게 만들었느냐? 그 내막을 아는 사람이 비로소 탈출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탈출 안 했으면 과거에 자기가 수갑과 족쇄가 어떤 건지 분간할 줄 모르잖아요.
탈출이 이미 되었기 때문에 가보니까 어, 전에 내 수갑이었네. 내 족쇄였구나. 안다 이 말이죠. 그 족쇄와 수갑을 뭐라 했습니까? 율법이라 했단 말이죠. 그리고 그 율법, 수갑과 족쇄가 가둬 놓는 정도가 아니고, 그렇게 율법 안에 있는 사람은 결국은 사망이 옵니다.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쏠 때 화살을 장착해서 쏩니다.
장착하는 화살이 뭐냐? 율법이라는 화살이에요. 우리보고 쏩니다. 너, 이웃을 미워했지. 에라 니 죽어라. 하고 쏜다 말이죠. 그런데 사망이 화살 들고 쏘려고 하니까, 나한테 쏘는 기라. 내 하는 말이 사망아, 니 지금 엉뚱한 놈한테 쏘려고? 사망아, 니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있다가 니가 통뼈가? 이카고. 니가 지금 화살을 율법으로 만들어놨잖아. 그렇다. 잘 아네. 그런데 예수 안에서는 이미 율법에서는 벗어났는데. 니가 지금 어디로 쏘노? 쏠데 없네. 딴 놈 쏴야겠다. 가버린다 이 말이죠. 그게 고린도전서 15장 이야기 아닙니까. 율법아, 도대체 니가 지금 뭐를 겨냥해서 쏘는 게 뭐냐 이 말이죠.
탈레반 그 사람이 총을 들고 할 때, 샘물인지 뭔지 생순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 교인들이 사망아, 니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나와야 돼요. 이러다가 밉보여서 먼저 죽을 수도 있지만.
죽기 무서워서 종노릇하는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해방했다. 저는 예수를 믿습니다. 니, 내 믿는다 하는데 내 뭐 했다고 믿노? 죽기 무서워하는 것을 해방시켰잖아요. 알기는 아는구나. 뭔가 주님하고 이바구, 이야기 주고받는 컨버세이션, 대화가 통해야 돼요. 예수님 믿습니다. 하고 도망치지 말고 예수님한테 질문을 받아야 돼요. 니 내 어떻게 생각하고 믿노? 이미 사망에서 해방했잖아요. 알긴 아는구먼. 뭔가 편안하게 주고받는 게 있어야 돼요.
그래서 욥기 1장에서 사탄이 있고 하나님 있고 주고받고 내기를 하더라도 인간은 결국 게임의 장난감이죠. 사탄과 하나님께서 장난치는 거예요. 장난친다는 게 어폐가 있지만 어쨌든 내기를 하는데, 여기에 아무 이유도 없이 동원된 게 욥이잖아요. 욥의 입장은 그걸 모르지만 어쨌든 욥이 이런 내기 때문에 여파로 인하여 욥에게 심한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자체가 자식 열 명 다 죽고, 재산 다 날아가고. 이 자체를 욥은 엘 샤다이 인식은 뭐냐 하면, 완결적이고 온전함으로 본 거예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도 하나님이다 이 말이에요. 여기 있는 책상을 아까 호텔직원이 가져다주고 갔는데, 지금 와서 책상 가져가도 호텔 그대로 있잖아요. 뭐 문제 있습니까? 호텔 갑자기 지진이 일어납니까?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도 하나님이라는 이 말은 나한테 어떤 일 있더라도 하나님의 온전함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이 말입니다. 그게 바로 그 이야기를 욥도 이야기하고 욥에게 비난을 퍼붓는 욥의 친구들도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욥의 친구가 세 번씩 이야기합니다. 총 아홉 번 이야기하죠. 한 사람이 세 번씩. 세 명이. 나중에 친구가 한 번 더해서 열 번 하는데. 열 번이나 논쟁이 왔다갔다하는데 욥은 그때마다 아주 이야기가 자기가 꾸중을 한 5분 들으면 욥은 30분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나중에 화가 나서 하는데.
욥의 친구들이나 욥이 할 때 누굴 비판하고 평가할 때 그거는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온전함에 대해서는 시비 걸지 말자는 거예요. 그런데 욥도 그거야 나도 알지. 근데 하나님이 온전하다, 철저하고 완결됐다 하는데 그렇다면 그런 이론에 의해서 안 맞는 사태가 벌어졌잖아. 이거 어떻게 좀 해명해다오. 친구들아. 친구야, 이것 좀 해명해 봐라. 이러는 거예요. 해명이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완결성과 온전함으로 있기 때문에 완결성과 온전함에 어떤 고난이 오게 되면, 아이고 고난 그거 없는 식으로 합시다. 고난을 없는 식으로 할 수 없는 거예요. 쉽게 합시다. 지금까지 어려운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떻다고요? 온전함이죠. 세상을 아주 빈틈없이 죄도 따지지 말고, 마귀 있든지 말든지 온전해요. 온전한 하나님이 뭐로 바뀝니까? 여호와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으로 바뀌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유대인의 책에 구약성경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바뀔 때 놀라운 사실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맡는 온전한 자연세계에서 새로운 여호와 하나님이 터져 나온다고 이래 봤는데, 그 여호와의 흔적이 세상에 위에서 터져 나오는 게 아니고, 같은 동료, 어제까지 친구란 같은 인격체로 낯선 인물로서 욥이 우리에게 등장하는 거예요. 누가? 여호와의 흔적을 받은 인물이. 예수 그리스도 생각 안 납니까?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시편 그냥 외우다시피 했고, 유대 율법사들은 구약성경을 한 마디로 도사입니다. 모르는 게 없어요. 달달 외웁니다. 요새 중들, 반야심경 외우듯이 거의 다 외웁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외우는 가운데 뭐가 들어있겠어요? 예레미야 들어있고 이사야 들어있지요.
예레미야, 이사야에 여러분들이 얼른 이해가 되는 게 뭐냐 하면, 밥 굶는다고 금식이 아니고, 가난한 자에게 도와주는 것이 금식이다. 너희들이 고아와 과부를 학대해 놓고 성전에 와서 기도한다 해서 내 기도 들어줄 줄 아느냐? 웃기지 마라. 그런 것은 소돔과 고모라하고 똑같은 것이다. 너희들이 양을 잡아서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고, 양을 잡아서 제사 드린다고 내가 기뻐하느냐? 그 양은 양이 아니라 돼지 목 따는 거다. 이래 이야기한다고. 더러워서 못 받겠다, 더러워서. 하는 행실 꼬라지를 보니까 더러워서 못 받겠다는 거예요.
행실 꼬라지가 더러우면 그것 때문에 유대나라가 바벨론에 포로 잡혀서 나라가 망했다면, 그렇다면 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조금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해야 될 행동은 됩니까? 이레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 해서 그거 모아서 이웃에 구제하고, 더욱더 율법에 충실하면 되잖아요. 그거 되잖아요.
그게 옛날 조상들이 미진한 것, 못했던 것 그것이 교육이어서 아하,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웃사랑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래서 메시아 기다리기 위해서 성경말씀 그대로 율법 그대로 다 지키면 이웃사랑하고 하나님 사랑하면 언젠가는 우리가 옛날에 다윗의 영광을 회복할 것이다. 이런 생각 말고 또 다른 아이디어가 나올 리가 없지요. 예. 인간에게. 그렇지 않습니까? 안 그렇다는 듯이 보이는데.
세상이 온전하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 뜻대로 만사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니까 인간이 손댈 것 없다 이 말이죠. 없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교훈하기 위해서. 유대인들 사상은 그거에요. 구원은 하나님 은혜로 받습니다. 출애굽 보세요. 그들이 행한 것 없이 은혜로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영광 돌리는 것은, 그 사람이 말씀대로 그만큼 말씀대로 더 충실하게 실천에 옮기면 실천에 옮긴 만큼 양만큼 마일리지 양만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사고방식입니다.
이 사고방식 말고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사고방식 있으면 나오라고 그래요. 한국교회에서. 없잖아요. 없어요. 그게 성화론 아닙니까. 뭐 있어요. 교회에서 맨 날 듣는 게 뭡니까? 초반에 예수 십자가로 구원받는다 해 놓고 끝에 나오는 이야기 뭐예요? 돈 내라 아닙니까. 쓸데 있는 돈 아니고 다 쓸모없는 돈이니까 내라 이 말 아닙니까. 그게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전부다 말이죠.
바리새인들이 바보가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바보, 등신이 아닙니다. 너무 똑똑해요. 바리새인보다 의가 더 낫지 아니하면, 너희들이 결단코 천국에 못 가리라. 벌써 예수님도 알아주는 바리새인이에요. 한국교회가 주기철이니 뭐 백 날 해도 바리새인 하나 못 따라 붙입니다. 지가 주기철 설교법 다 외웁니까? 안 되잖아요. 나이 많아서 자꾸 잊어버리지 어떻게 합니까.
유대인들은 성경 자체도 모자라서 참고 도서까지 만들어서 그것까지 다 지켰어요. 안식일 지키라. 이 정도 해서 속이 안 차요. 안식일 지키는 ( )는 어떻게 삶고, 담요는 어떻게 들고, 그것까지 세세한 세칙까지 규칙까지 다 만들어서 그저그저 하나님 말씀 지켜서 두 번 다시 이 나라가 에서의 이방민족에게 눌리지 않고, 여호와만 영광 돌리는 그 나라, 지금도 그 나라 유대인들이 추구한다 이 말이죠.
인간의 고상함이라 하는 것은, 누가 어느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고상함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고, 날이면 날마다 진화하고 발달하는데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는 겁니다. 천사보다 인간이 위대한 점은 뭐냐? 천사는 처음부터 천사고 끝까지 천사지만, 인간이 위대한 것은 처음 인간으로 태어날 때 악마지만 동물이지만 가면 갈수록 천사처럼 된다는 이러한 발전성이 있고 희망성이 있다는 것이 바로 인간이 위대하다고 이방인들이, 이방 철학자들이 그렇게들 주장해 왔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도 이 욥기가 구약 아닙니까. 유대인들은 이 욥기를 다 압니다. 다 알아요. 다 알고 욥에서 그들이 건지는 건 뭐냐? 힘들어도 참자. 주께서 알아주시겠지. 그게 결론에 나와요. 거기에 십자가 복음이 나올 턱이 없습니다. 힘들어도 참자. 주께서 도와주시겠지. 그런데 놀랍게도 힘들어도 참자. 주께서 도와주겠지. 여기에 표를 던진 사람이, 욥의 세 친구부터 해서 욥까지 다 던집니다. 그 정도는 나는 안다. 그런데 이게 웬 고난이냐?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 신학적인 체계가 틈이 생길 때는 알 수 없는 고난에 의하여 틈이 생기면서 여기서 욥은 자신도 몰라요. 자신도 모르는데 자꾸 장래, 우리는 알아요. 장래에 올 그리스도가 내뱉는 그리스도가 해야 될 일을 예수님이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해야 될 일을 이런 고난 중에서 다 끄집어내요. 본인도 모르는 채.
아마 본인이 미리 예수님 알았으면 쌍둥이라 할 거예요. 예수님이 당하는 수모를 미리 앞당겨서 욥이 다 끄집어내요. 자기는 끄집어내는 것이 장차 예수 그리스도와 매치된다는 걸 맥락이 같다는 것을 그건 모르지요. 그냥 속상해서 너무 아파서 울부짖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뭔가? ‘고엘’이에요. 고엘 사상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후견자’ 후견자인데 말이 좋아서 후견자지 이게 매니저 같은 그런 느낌이지만 그런 느낌이 아닙니다. 이게 뭐냐 하면, ‘복수자’에요. 가난한 자에게 억울한 일 당할 때 그 사람이 복수할 힘이 없을 때는 하나님이 정의의 이름으로 대신해서 복수해 주는 사람, 이걸 가지고 고엘이라고 합니다.
이미 고엘이 나왔다 이 말은 이미 욥과 욥의 친구들은 적대관계가 형성됐다 이래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복수는 신의 온전한 정의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반드시 신명기나 출애굽기에 반드시 허용이 돼요. 복수가 허용이 됩니다.
하되 너무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그러니까 이빨 부러뜨리면 이빨만 부러뜨려야 되지 이빨 하는데 코까지 부러뜨리지 말고. 눈 아프면 눈만 때려야지 눈 말고 귀까지 때리는 그런 거 없기. 어느 정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지만 한계를 정하되 정당한 복수를 그것을 허용합니다. 그 복수를 허용함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나님께서 고엘사상, 후견자사상을 계속 끄집어내요.
이게 끄집어낼 때 사람들은 여기서 오해가 발생되는 거예요. 보통 복수자라 하는 것은 신체 당당하고 여기 배에 王자 있고 근육질이고 이렇잖아요. 후견자를 요청하는 자가 후견자를 가해하고 피해자로 만드는 그러한 대상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가난한 자가 사기를 당했습니다. 공사를 했는데 공사대금, 860만원 못 받았어요. 얼마나 억울해요. 그땐 누가 합니까? 정식적으로 정의의 심판에 호소를 하지요. 고소를 하게 되면 민사재판에 열어서 차압 들어가서 갚아줍니다. 이게 정의가 살아있는 이웃, 온전한 사회입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부터 했지요. 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게 뭡니까? 온전하게 돌아가지요. 질서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죠. 그런데 욥에 와서는 이것이 뭔가 삐거덕 한다 이 말이죠. 제대로 호소를 하면 너무 억울합니다. 원수 갚아 주세요. 라는 그 당사자가 호소하는 그 놈을 가해자로 만들고, 아니, 그 사람을 피해자로 만들고 자기가 가해자가 되는 그런 구조로 욥이 미끄러져 간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거는 아주 뒤틀림이죠. 내가 말하는 게 더 어렵다.
스스로 피해자가 된다고 여겼는데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해서 이것이 피해자가 억울함을 호소하다 보니까 이게 결국 뭐가 되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학대하는 가해자로 변하는 과정에 욥이 있다 이 말입니다.
베드로가 장모가 죽었을 때 열병 들었을 때 누가 낫게 해줬습니까? 예수님이 낫게 해줬지요. 베드로가 나중에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베드로가 예수님 보고 뭐라 했습니까? 난 모른다고 했지요. 그죠. 이게 베드로 이야기가 아니고, 현재 복음 안다고 자처하는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를 베드로가 대신해서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이 세상에 피해자가 오직 하나만 남아야 되겠다는 것이 하나님 뜻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가해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가해자가 돼버리면 지금까지 내가 믿었던 이 온전한 하나님, 정의로운 하나님 다 깨지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온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반듯하게 살아갔다. 반듯하게 살다보니까 공사대금 떼먹히고 나는 억울해 죽겠다.
그러니까 억울해 죽을 테니까 지금 나는 피해를 받았으니까 피해 본 것이 내가 나쁜 짓 한 게 아니잖아요. 나쁜 놈은 따로 있잖아요. 그럼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저쪽은 나쁜 놈이 되잖아요. 나는 좋은 사람, 저놈은 나쁜 놈. 라는 이런 구조가 어떤 틀이냐 하면, 온전하신 하나님이고 정의로운 하나님이라는 틀 안에서 가능하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그걸 끄덕끄덕 들고 어디로 가는가? 예수님한테 가는 거예요. 예수님 재판 좀 해 주세요. 라고 하니까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뭡니까? 생명은, 내가 어떻게 너희들 돈 문제에 간여하려 온 줄 아나?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게 아니다. 엉뚱한 소리 하신다 이 말이죠. 그럼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이럽니까? 에이, 너나 죽어라, 씨. 이게 무슨 메시아야. 이거 사이비 아니야, 이거. 내가 본 온전한 하나님하고 영 질이 다르네.
빌라도가 있다가 여러분, 명절날 죄수 하나 놓아주는 법이 있는데, 예수님 놓아줄까요, 여기 강도 바나바 놓아줄까요? 표 거수하라. 바나바! 바나바! 예수님은, 죽여라! 죽여라!
그게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이 시스템, 신학체계 정상입니까? 정상이 아니라도 우리는 정상이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래야 우리 마음이 안정감을 찾는 것이에요. 안정감을 찾는다고. 지금 욥의 고난 때문에 누가 수모를 당하느냐 하면, 욥의 친구들이 수모를 당해요. 어떤 주석가에 의하면 욥의 친구들이 신학자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보가 아니라 말이죠. 공부 많이 했다 이 말이죠. 다 하나님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한 사람이에요.
그러면 욥에게 고난이 안 찾아왔으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친구 아이가. 서로 친하게 지내고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입니다. 아무 탈이 없어요. 왜? 사상이 똑같으니 욥이나 친구나 똑같으니까. 욥아, 니가 재산 많은 것은 평소에 어려운 사람을 도와줬기 때문에 복 받아서 그렇다. 나도 알고 있어. 그러나 이것은 내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순수증여, 하나님께서 그냥 공짜로 주신 거니까 공짜로 나눠주는 것뿐이지. 주신 자도 하나님이고 거둔 자도 하나님이야. 그럼 욥의 친구들이, 그 이야기는 우리도 이미 알고 있지. 그러니까 우리가 친구사이지. 아무 일이 없어요. 아무 일이 없다고요.
여러분, 구조를 한번 보세요. 여러분한테 잠시 문제 내겠습니다. 안타까운 문젠데. 신이 여기 있고 우리 인간이 여기 있어요. 신과 인간 가지고 여러분, 신학체제 만들어보세요. 신학체제, 조직신학을 만들어보라고. 창조론 만들고, 구원론 만들어 보세요.
남은 건 뭡니까? 신이 계시면 신의 존재를 알아야 되고, 그 신이 존재하면 우리가 존재하니까 우리가 존재하고 신이 존재하니까. 신께서는 분명히 정의로울 것이다. 정의롭고 선하고 아름답고. 그럼 우리가 신의 피조물로써 할 도리가 뭐냐? 우리도 정의롭고 선하고 아름답고. 이것 외에 다른 신학체제 나온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여기에 무슨 십자가가 왜 끼여 들어갑니까? 십자가 왜 필요해요. 십자가 빼도 아무 일 없어요.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는 십자가 없는 교회가 되고 말았어요. 아무 일 없어요. 십자가, 예수님 고난 받는 이야기 하지 말란 거예요. 잠시 고난 받았지만 결국 부활 된다는 거예요. 이거는 결국 무슨 의미냐 하면,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하는 거예요. 잠시 고난 받지만 너는 다시 하나님 말씀에 회개한다면 옛날처럼 더욱더 복을 받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마치 욥 전체를 아는 것처럼 먼 미래를 예언한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보고 네가 하나님도 모르면서 왜 까부느냐? 이런 책망을 들을 이유가 없고 더더구나 자기가 한 수 가르치겠다는 사람한테 와서 형님, 내 잘못됐습니다. 날 위해서 대신 기도해주세요. 요청할 이유 없어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전복해야 돼요. 완전히 뒤집어야 돼요. 모레시계 목욕탕 사우나에 5분 되면 빠지는 그거 사우나 들어가고 싶으면 뒤집으면 됩니다. 모레시계 뒤집으면 됩니다. 뒤집어야 돼요.
뒤집어서 우리가 있는 신의 자리에다가 마귀를 집어넣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마귀를 이겼던 것을 이게 하나님을 넣어보세요. 그러면 우리는 가해자가 되죠. 우리가 짓밟고 있으니까. 가해자가 되고 거기는 피 같은 게 있고. 이 피가 솟구쳐 올라와서 우리를 마귀로부터 해방시켰다. 이걸 전복.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썼어요. [거꾸로 사는 삶] 누가 썼는지 잘 모르겠는데. 대장간에서 나왔어요.
머리가 발에 가고, 발에 있던 위치가 머리 가까이 된. 뭔가 거꾸로 된. 그 거꾸로 산다고 해서 문제 해결되는 게 아니고, 유일하게 온전한 거꾸로 보여주신 분은 말구유까지 말구유인지 양구유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죽기까지 복종하죠.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죽기까지 낮아지신 분은 이 세상에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 분이 박혀있는 그분이 내 인생을 대체해서 내 안에 파고드는 그리스도의 것으로 살아가는 것을 가지고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것. 예수님의 인생으로 바뀔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구약성경을 예수님 증거하는 걸로 예수님 중심으로 구약성경을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기를 보면서 유대인들이 일반 성령을 받지 못한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의 욥기 주석이나 해석과 그것도 봐야 돼요. 왜? 우리의 옛 모습이니까. 보고 그 다음에 십자가로써 보는 것 하고 확연한 차이점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어떻게 인내했더니만 나중에 복 받았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욥의 인내를 알아라. 야고보서에 나오거든요.
욥의 인내가 뭐냐 하면,
자기 인내를 믿은 게 아니고,
심판주가 나를 이렇게 만드신 분이
결국 그분에 의해서 내가 그분을 증거하는 사람으로서
미리 앞당겨서 세상을 살아갔다는 것을
그걸 견디는 게 바로 인내였어요.
그래서 야고보서에 뭐냐? 네가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해서 이를 보려는 자들아, 그런 생각 자체가 니가 죄악인 줄 알지 못하느냐? 그럼 죄악 아닌 게 뭔데? “주의 뜻이면 이것저것도 하리니”라고 돼 있잖아요. 결국 그건 뭐냐 하면, 그게 인내에요. 그걸 견뎠단 말이죠. 철저하게 내 생각 안 하고 날 거꾸로 뒤집는, 그런 생각이 그게 인내가 되는 거예요.
야고보서 5장에 보면 품삯을 받지 않은 가난한 자가 너무 억울해서 하소연하니까 야고보서 하는 말이 기다려라. 줄게. 오늘날 악덕업자가 꼭 돈 받아서 안 주는 것처럼. 준다 안 카나. 줄게. 거기서 한 마디 더 얄밉게 하면, 이른 비, 늦은 비 오게 돼있으니까 이른 비 오면 늦은 비 오게 돼있으니까 심판주 살아계시니까 다 갚아줄게. 아주 무책임한 전혀 이 땅에 위로가 안 되는. 그런 식으로 야고보가 돼있지요.
그래서 욥의 우리가 이런 욥기를 보면서 이게 욥 스스로가 자기 신학관으로는 뭔가 더 담을 수 없는 새로운 사태가 내 내부에 일어났구나. 하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자,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것을 좀더 약간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렇습니다. 온전한 세계, 여호와 하는 전능하시니까. ‘전능한’이라 하면 못 할 게 없으니까. 온전한 세계에서 뭔가 이해가 안 되는 해석 불가능한 사태가 벌어질 때 그것이 하나의 인격, 인간 인격체에 의해서 벌어진다 했습니다. 그러면 인격체에서 벌어지면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선하시다, 공의롭다 하는 이런 이야기가 욥의 첫 번째 이야기지만 나중 끝에 가서는 뭐냐 하면, 욥의 사적인 이야기로 마감돼요. 개인 이야기로 마감된다고.
욥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온전하심, 특히 욥, 넌 자꾸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시비 걸지 마. 욥이 니가 어려운 거 당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흠집이 있는 게 아니야. 라고 욥의 친구들이 이야기한다 말이죠. 그들의 관심사가 전체를 보는 관심사에서 점점 더 욥, 너 왜 그래 고집이 세. 라는 하나의 개인에게 집약되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지목하고 하나님의 선택한 사람의 사적인 이야기가 나중에 모세언약에 나가면 이게 집단적 운명으로 바꿔요. 집단적 운명으로 하나의 원리로 집단이 움직이는 원리로 이게 가능하게 된 거예요.
지금까지 잘 이해한다 하고, 지금부터 어려운 이야기하겠습니다. 수학이야기입니다. 2, 3, 4, 5, 6. 있다는 말은 이건 결국 무슨 뜻하느냐 하면, ‘1’을 기준으로 했을 때 ‘2’가 되고, ‘1’을 기준으로 ‘3’이 되고, ‘1’을 기준으로 ‘4’가 된다는 겁니다. 사과가 하나 있을 때는 하나지만 네 개 있으면 ‘4’가 되지요. 사과 네 개가 있다는 말은 결코 네 개 하나를 하나로 묶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는 하나로 취급하지 않고 네 개는 네 개로 취급하겠다. 할 때 ‘4’자란 숫자를 씁니다.
이런 경우가 많은데 부부 갈 때에 어, 두 사람이 가네. 할 때는 부부라는 것을 일괄적으로 상대 안 하고 두 사람 각자각자로 볼 때는 ‘2’라는 복수 개념인 2라고 씁니다. 그런데 부부 같이 갈 때 어, 부부 하나네. 하면 한 부부라 할 때 이거는 두 사람이 가도 한 부부가 되죠.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온전한 하나가 이 세상에 자연세계에 묶어서 이게 하나의 지목 받은 인격체가 돼버리면, 저절로 A라는 사람, A라느 사람은 욥의 친굽니다. 좀 참으세요. 이거 어려운데 참으세요. B라는 사람은 욥입니다. 욥과 욥의 친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둘 다 같은 집에 속성에 속했는데 갑자기 욥에게 고난이 떨어지면 여기서 균열이 일어난다 했지요. 갈라지죠. 친구로 왔다가 뭔가 됩니까? 원수가 돼버리죠. 서로 잘났다고 욕합니다.
그러면 하나가 ‘1’이 돼버리면 떨어져 나간 ‘1’이 돼버리면, 욥의 친구는 비록 세 사람이라도 전체가 뭐가 되느냐? 새로운 욥이란 ‘1’과 적대관계에 있는 ‘1’이 돼버려요. 그러면 이 공식이 어디 맞느냐 하면, 창세기 3장 15절에 공식에 맞아 떨어져요. 뭡니까? 아무리 새끼 쳐도 전부다 일괄적으로 뱀의 새끼에 속하고, 이쪽에 욥의 후손은 아무리 새끼 쳐도 그건 뭡니까? 예수 안에 그리스도 안에 속한 게 돼버려요.
이게 설교시간에 몇 번 이야기했는데 지루하더라도 들어보세요. 설교 모르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히스기야 유대나라에 히스기야 때에 앗수르 군대가 포위했을 때, 그때 포위한 것이 몇 만 명이냐 하면, 십팔만 오천 명입니다 분명히 숫자가 십팔만 오천 명이에요. 한 명이 아니고 십팔만 오천 명입니다. 그런데 죽을 때 어떻게 죽느냐 하면 같이 죽어요.
성격도 다르고 심지어 혈액형도 달라요. A형, AB형 다 다릅니다. 그런데 같이 죽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고향이 다르고, 키가 다르고, 체중이 다르고, 뭐가 다르고, 성격 다 달라도 DNA가 다 다르다 할지라도 하나, 유대가 하나님께 대적했던 하나님께 대들어, 대들어. 하나님께 대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일괄적으로 질적으로 같이 되서 죽어요. 언니한테 대들면 안 되지.
하나님은 양을 보는 게 아니고, 어느 층에 속했느냐를 보는 겁니다. 그 십팔만 오천 명 가운데 입영통지 받기 전에 연예인도 있을 것이고, 싸이도 있을 것이고, 안 그러면 농사짓다 온 사람도 있을 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들이 전쟁하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들이 십팔만 오천 명이라도 동시에 다 죽어버렸습니다. 하나. 하나, 하나로 보는 겁니다. 하나, 하나.
이걸 가지고 하나님께서 언약의 하나님은 언약 안이냐, 언약 밖이냐를 보시지 언약 안에 몇 명 들어있고, 언약 밖에 몇 명 들어있느냐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기드온 군사가 몇 명 갖고 이겼습니까? 300명이잖아요. 젖먹이 아이가 많은 적들을 이기잖아요. 이것은 젖먹이 아이가 지가 무슨 근육 불었다고 젖먹이 아이가 쭉쭉 빨면서 근육해서 이기겠습니까? 어디에 지금 어떤 속성이 발휘되는 영역 속에 있느냐? 그리스도 예수 안이냐, 밖이냐 이래 보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나는 십자가 안에 있으니, 세상은 십자가 밖에 있고 나는 십자가 안에 있어 둘 다 원수가 됐다 이 말이죠. 나, 사도 바울은 공부 잘했거든. 그걸 묻는 게 아니고, 나는 지금 내가 공부 잘한다가 아니라 나는 지금 누가 안에 들어있는 것을 인하여 내 말 듣지 않는 사람은 누구 밖에 있다고 확정되고 결정 나 버린다 말이죠.
결국 이 전능하시고 온전한 하나님이 둘로 잘라집니다. 욥 중심으로 잘라지고, 욥과 같은 고난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을 알아야 돼요. 이것은 바로 이방인들이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이방인들이 그 사고방식이 어떤 계기에 의해서 깨어져야 비로소 여호와를 아느냐고 넘어가는 과정을 설명해주는 겁니다.
그때 그들이 온전함이라고 여겼던 것은 뭐냐? 바로 ‘우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이 경과하고 난 뒤에 십계명의 일계명이 뭡니까? 하나님을 믿으라가 아니죠. 하나님 알거든 잘하는 짓이다가 아니죠. 뭡니까? ‘나 외에 다른 신’ 해서 나의 신과 다른 신을 ‘1’과 일대일로 대립시키는 일에 들어갑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그걸 지키려면 두 개를 알아야 돼요. 나의 신을 알아야 되고, 그 다음에 다른 신이 어떤 신이냐? 그건 이방인에게 물어 봐! 욥한테 물어 봐. 이방인이 어떤 신인지. 십자가도 필요 없고, 언약도 필요 없고, 아브라함도 필요 없고, 선악과이야기도 필요 없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그것도 필요 없고, 있는 내가 온전함에 자연도 온전함이라는 그런 불교적인 인식, 인간인 우리도 지금도 품고 있을 것입니다.
쉬고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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