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21a 울산목양교회 특강-구원, 그 이후
(강의:이근호 목사)
구원에 두 가지가 있지요. 하나님 입장에서의 구원과 인간 입장에서의 구원이 있다면, 여기에 [구원, 그 이후]라는 것도 하나님 입장의 ‘구원 그 이후’가 있을 수 있을 것이고, ‘나는 구원돼야 되겠습니다’ 인간 입장이 있단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 입장과 인간 입장이 같을 것 같으면 메시아가 다녀가면 아무 일이 없어야 되는데 하나님 입장에 있는 메시아가 인간세계에 왔을 때 여기서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이 충돌이 바로 십자가가 되고, 십자가 사건 이후에 비로소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니까 십자가 지시고 그 다음에 승천하셔서 하나님 오른 편에 서서 예수님의 영으로 오시는 분이 성령님이기 때문에 여기서 하나님 입장과 인간 입장이 충돌을 일으켰다? 서로 안 맞아서 안 맞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입장은 옳고, 인간의 입장은 그르다, 잘못됐다, 오류다 이 말이죠.
여기서 하나 꼭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것은, 하나님 입장에 있다고 해서 인간 입장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잘못됐다는 것으로 계속 유지가 돼야 된다는 거죠. 잘못됐으면 처리하면 그만 아니냐? 이게 처리가 안 돼요. 하나님 입장을 세우기 위해서는 잘못된 인간 입장이 계속 나와 줘야 되는 겁니다.
구원에 관해서 이렇게 될 때 인간 입장과 하나님 입장이 서로 다르다는 것, 그래서 충돌을 일으킨다. 그래서 충돌이 없었으면 유사성, 비슷하다 혹은 서로 공통점이 많다 하겠는데 여기서 십자가 충돌로 말미암아 적대적 관계에 놓이게 됐다. 인간 입장에서 생각하는 구원관에 의하여 하나님 입장에 생각하는 것이 적대적 관계, 그러니까 하나의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구원관이 하나님 입장이고, 인간 입장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마적이고, 인간이 보기에 하나님이 악마적이고. 따로 여기서 뭘 만들어내느냐 하면, 하나님 입장이라고 구성한 인간 입장이 새롭게 성립되겠지요.
그럼 여기서 이 구원 그 이후는 구원관에서 나오니까 구원부터 먼저 설명해 드리면 하나님 입장은 낙타와 바늘 이야기하면 인간은 구원 불가능이다. 하나님 입장에서 인간은 자력으로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고, 인간의 입장은 가능합니다. 불가능할 거냐, 가능할 거냐 그 싸움이 벌어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냥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불가능한 이유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인간 입장이 왜 불가능 하느냐 하면, 이것은 창세기 3장에서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추방할 때부터 내재돼있는 게 있어요.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있기 때문에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있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 왜 하나님 앞에 배격 당하느냐 하면, 여전히 선악적인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걸 기초로 해서 구원을 달성하려 하니까.
쉽게 말하면 지상에 있는 선악적인 요소로 생명나무를 따먹겠다고 나서는 시도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창세기 3장 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차단을 시켜 놔버렸죠. 인간이 선악적인 사고방식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이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창세기 3장의 입장을 견지, 견고하게 유지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다는 것을 관철하죠. 인간은 현재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죽음이 찾아오니까 어쨌든 간에 죽어서라도 좋은데 가야 되겠다는 구원의지는 선악과적으로 여기서 발산을 하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허락을 하지 않고.
그러니 낙타와 바늘구멍 이야기에서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지 못한다. 제자들이 주눅이 들어서 ‘그럼 누가 구원합니까?’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신다. 구원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구원이 있긴 있는데 뭐는 안 된다? 인간들이 하는 자기 방식으로서는 하나님의 철저하게 막아놓은 생명나무를 처리하려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은 자가 생명나무에 못 들어감’라는 이 원칙은 원칙대로 고수하기 때문에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하나님 입장의 구원이 따로 나오는 겁니다.
강의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 간단합니다. 인간은 구원을 받고 싶어요. 왜? 사는 게 힘들기 때문에. 죽고 난 뒤에 문제가 걱정되기 때문에 구원받고 싶은데, 에덴동산 가고 싶고, 천국 가고 싶고, 낙원에 가고 싶고 여기선 힘들게 살았지만 죽어서라도 영원토록 좋은데 복락을 누리고 싶은데 선악적인 요소를 자체적으로 해소할 방책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줘서 그걸 뭐로 다 이해하느냐 하면, 자기가 갖고 있던 선악적인 선입관으로 수용하기 때문에 자기가 말씀 듣고 실천에 옮기는 하나하나 뭐가 나오느냐 하면, 선악적인 요소를 깔린 채 나오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입장하고는 맞질 않아요.
이 점에 대해서 충분하게 그동안 숱하게 실험을 해왔는데 그 실험한 마지막 대표자가 누구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죠. 이 바리새인에 대해서 하나님 입장에 선 예수님이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 말만 들으면 바리새인은 현재 누구보다도 제일 가까이 천국에 접근된 사람처럼 보이지만 이 바리새인 보고 예수님은, “너희 아비는 마귀다” 했습니다.
어떤 누구도 바리새인도 더 의를 갖지 못하고 그러한 명제 하나, 그런데 그 바리새인은 마귀 자식이라서 화 있을진저 저주받을 것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조사해보니까 그들은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가? 이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토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고, 시편에 보면, “이스라엘아 말씀을 들으라” 하는 쉐마, 들으라는 말씀에 의해서 순종, 회개하라, 지켜라. 안식일과 십일조와 각종 율법을 다 성의껏 지키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뭉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했습니다.
특히 사두개인 같은 경우는, 하나님이 약속한 죄 씻어준다는 성전을 관리하고 운영하고 그걸 지켜내기 위해서 평생을 바친 사람들이 사두개인들입니다. 이 사두개인들의 열심은 상대적으로 말씀을 제대로 몰라서 실천에 못 옮기고, 성전의 관리를 안 하기 때문에 더러운 족속에 속한 계층들을 더불어서 최고 대표자가 되어서 주님 보기에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간다”라는 대변자 역할 하죠. 이 사람마저 천국에 못 간다면 결국은 모든 어떤 사람들의 금식과 기도와 어떤 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의 조건을 이룰 수 없다 이 말이죠.
구제요? 오른 손이 한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한 적이 있습니까? 기도요? 무엇을 이룰까 안 한 적 있습니까? 전부다 무엇을 이룰까 원하는 걸 기도했잖아요. 머리에다 기름 바르면서 금식 안한 척하면 금식한 적 있습니까? 그게 우리 마음속에 되겠습니까? 여자를 보면서 음욕을 안 품었다고요? 형제를 보고 미워하지 않았다고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전혀 염려한 적 없다 이 말입니까? 남을 비방한 적 없어요? 남을 판단한 적 없습니까? 막 좁은 길 들어가려고 환장한 적 있어요?
하나님 입장에서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은 이상은 하나님께서 일체 생명나무 자격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가능성을 앞장세워서 쳐들어오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에 보면, 인간들이 보기에 이 불가능성 자체를 어리석음으로 보고, 하나님의 불가능성이 인간의 지혜로서는 어리석음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불가능성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바로 충돌했던 십자가의 능력이 이 불가능성을 앞장세워서 쳐들어올 때 인간이 어리석은 것을 믿게 되면, 불가능성이 이 안에 폭발해버리면 그 사람은 하나님 입장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뭐냐 하면, A라는 사람이 어리석었다. B라는 사람도 어리석었다. 근데 C라는 사람은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지혜인 줄 알아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A, B, C가 공히 모두 다 아담에 속한 사람인데 A와 B와는 달리 C가 딴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성립이 안 되죠. 똑같은 아담의 속성을 입었기 때문에 A와 B와 C가 똑같은 생각을 해야지, A가 복음을 거부한다. B가 거부한다. 당연하지요. C도 거부한다, 당연한데 C가 거부하지 않고 영접했다?
이것은 C의 본래의 능력은 관계없이 고린도전서 2장에 보니까 C라는 인간 속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십자가에 근거한 성령님이 하나님의 깊은 지혜를 이 C에게만 특별히 주게 되면 C는 그야말로 눈을 떠서 ‘야,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다’라는 것을 비로소 아는 사람이 되고, 그 다음에 A, B로부터 격리되는 뭔가 핍박을 받고 수난을 당하는, 같은 인간으로서 ‘내가 모르는데 네가 왜 아느냐’라는 건방지다는 평가와 함께 자연적으로 격리가 돼버리는 거죠.
그러면 A, B는 뭘 고소하겠습니까? 그것은 아까 바리새인이 고소한 이것, 인간이 불가능성이 아니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하여 다하는 이것을 밑천으로서 ‘선을 많이 행하면 좀 봐주소, 넣어주소’ 이런 식으로 그냥 밀어붙이는 거예요. 성경은 성경이고 ‘하여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충 밀어붙이기 식으로 나가고, 이쪽의 C라는 사람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못 들어가는 것을 예수님이 대신 모든 장벽을 해소해서 예수님의 공로로만 우리가 들어갑니다’라는 십자가가 이 안에서 재현되겠지요.
이렇게 되면 이걸 다 지워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인데 그렇다면 ‘구원 그 이후’라면 하나님 입장 같으면 방금 설명한 구원 이후란 인간 속에 예수님의 자기 정신과 자기의 뜻을 여기에다 심는 작업, 이것이 구원 그 이후가 되겠고, 인간들 입장에서 구원 그 이후란 것은 가능성의 확대.
예수 믿는 것이 내 힘으로 믿었다면, 믿는 것이 자체적인 나의 선악적인 요소로써 믿었다면, 앞으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의로움도 내 선악적인 요소로써 말씀과 권면과 명령들을 순종함으로써 ‘믿음+거룩한 생활=구원’에 이르는, 그러니까 믿음은 한 순간에 갔지만 거룩한 생활은 아직 미완료로 남아있기 때문에 ‘구원 그 이후’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도 바울의 권면대로 거룩하게 합당한 빛과 소금의 역할, 빛의 자녀의 생활을 할 때 이것이 결합이 될 때 추가될 때 비로소 구원은 이뤄진다’라는 입장을 고수하게 돼있습니다.
이쪽은 하나님 입장은, 하나님께서 불가능성으로 왔기 때문에 그 인간 속에 하나님의 불가능성이 계속 스며들게 되면 하나님이 자체적인 말씀성취가 그냥 여기서 폭발이 일어나고, 왜 인간은 말씀을 지킬 수 없는가가 드러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구원이 될 때 이 사람은 예수님의 소유로 넘어가버리고, 자신도 예수님의 몸의 지체가 돼버리는데
인간들 입장에서는 자기는 주체가 여기 있고 하나님은 대상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십자가 지셨으면 내가 믿고, 믿더라도 결합이 안 되니까 계속 하나의 대상이 되고 나는 여기 행동의 주체가 되고, 그 다음에 믿었으니까 능력은 내 소유가 되고, 그 다음에 선한 일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하게 되면 나의 소유의 선한 일로 계속 누적이 되고 축적이 되겠지요.
어디까지 축적이 되느냐?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라.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는 데까지 올라가게 된다. 그럼 예수님 형상을 본받은 모델이 누구냐? 데레사 수녀? 한경직 목사? 김수환 추기경? 누구를 모델로 삼을 것이냐? 그 모델이 만약에 한경직 목사란 모델이 있어도 소용없어요. 환경이 그런 시간과 공간적인 환경, 가정환경, 교회환경이 맞춰줘야 그 모델이 있을 수 있거든요.
그리고 성경에 모델을 찾으면 되지 않겠냐? 다윗을 본받자. 아브라함을 본받자. 다윗, 아브라함 이 사람들은 자기가 나온 터전이 다 달라요. 스데반 모델은 뭡니까? 죽음이었잖아요. 아브라함 모델은 자기 아들 바치는 거예요. 그럼 바쁘지요. 아들을 바쳐야 되지 돌에 맞아 죽어야 되지. 억수로 바쁜 거란 말이죠. 또 사도 바울을 사십 대에서 하나 뺀 매를 세 번이나 맞았단 말이에요. 우리가 어디 가서 매 맞을 데가 어디 있습니까? 요새.
결국 모델을 삼을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선악의 요소에서 모델을 삼는 게 뭐냐 하면, 최선을 다하는 내가 나의 모델이 되겠죠. 성심성의껏 다하는 내가 나의 모델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개의 이러한 구원 이후의 의식에서 과연 성경 자체가 ‘구원 그 이후’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있게 해주느냐 하는 그 문제를 성경 본문을 보면서, 오늘 주제 본문인데 봅시다. 구약성경 1286페이지 오바댜 1장 17절, 18절. 강의 전에 기도 안 했다고 어떤 사람 뭐라 하던데 나중에 기도할게요. 옛날에 마산 근처인가 왜 강의 전에 기도 안 하느냐고 사상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끝나고 난 뒤에 기도했는데.
오바댜 1장 17절, 18절.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요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며 에서 족속은 초개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의 위에 붙어서 그를 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
이 본문을 보면 두 개의 주체밖에 없지요. 하나는 야곱 족속과 하나는 에서, 이 두 족속에 따라서 세상은 종말이 온다. 그렇다면 인간이 말하는 ‘구원 그 이후’는 여기 에서에 속하겠지요. 오바댜 선지자 예언에 의하면 전 인류가 멸망이 오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야곱과 에서에 관계에서 멸망이 온다는 겁니다. 계속 충돌이죠. 그런데 오는 종말이 뭐였습니까? 신약 자체가 종말이니까 십자가죠.
그렇다면 야곱과 에서의 갈등이 십자가로 이어지고 그것으로 세상이 끝나는 질적 요소로 규정이 되는데 여기 오바댜 1장에 17절, 18절 이 내용에서 결국 야곱은 복을 받고, 에서는 저주를 받는다 이 말이죠. 형제간이잖아요. 어머니 이름이 리브가인데 쌍둥이 형제간인데 여기서 왜 에서가 저주받는 이유가 뭐냐 하면, 오바댜에 보면 에서가 야곱을 괴롭혔어요.
창세기 12장 1절에서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주시고 하는 말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에게 저주를 받는 자에게는 저주를 받는다.” 저주와 복을 가름하는 기준을 하나님 입장이라는 말을 통해서 계속해서 이 땅에서 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기준을 주셨어요. 그게 하나님 입장입니다.
왜 에서가 야곱을 저주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야곱은 하나님의 기준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에 에서는 야곱이 하나님의 복의 기준이라는 그 자체에 대해서 반감을 갖고 있는 거예요. ‘나, 그것 인정 못하겠다.’
다윗과 사울의 관계에서 우리가 사울의 입장을 생각해봅시다. 왜 사울이 다윗을 그렇게 미워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중심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다윗 중심이 되었다는 그 점이 자기 본성상 너무너무 싫은 거예요. 여기 이 목사님 계시지만 하나님께서 ‘나는 이근호 너하고 상대 안 하고 이장우 목사하고만 상대하겠다’ 이러면 듣는 내가 기분 나쁘잖아요.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잘못 없다.’ ‘제가 뭐가 부족합니까?’ ‘부족한 것 없다.’ ‘그럼 제가 나쁜 짓 했습니까?’ ‘그런 것 없다.’ ‘그런데 왜 이장우 목사님 중심입니까?’ ‘내 마음대로다.’
가인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왜 제 제사 안 받습니까? 안 받으려만 다 안 받든지, 받으려면 다 받든지 왜 제 제사는 안 받고, 동생의 제사는 받습니까?’ ‘내 마음대로다.’ ‘그럼 내 마음대로 죽입니다.’ 죽이잖아요. 에스비에스 [가인과 아벨] 드라마 시작됐는데.
근본적으로 내 입장을 고수하는 한 전혀 하나님의 입장을 접근할 방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입장을 철회할 용의가 전혀 없기 때문에. 내 구원은 내가 챙긴다. 남이 책임져준다? ‘나는 양심이 고와서 그것까지 안 바랍니다. 하여튼 내 구원은 내가 챙기겠습니다.’ 이렇게 나서는 것이 인간이 본성이란 말이죠. 그런데 ‘너하고 상대 안 해.’ 얼마나 기분 나쁜 이야기입니까? 그 기분 나쁨을 극복할 수 있어야 돼요. 오히려 그걸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돼요.
만약에 이장우 목사님이 복과 저주의 기준이라면, 얼씨구나 하고 가서 빌면 되거든요. 살려주세요. 불쌍히 여겨 주이소. 이러면 된다 이 말이죠. 얼마나 편해요. 지 뭔데? 우리 보기에는 자연적으로 살려 주이소. 불쌍히 여겨 주이소. 이래 나오면 아무 문제없는 걸 가지고, 아이고 지 꼬라지나 내 꼬라지나 똑같은데 잘난 것 뭐가 있는데? 튕기죠. 우리는 튕기는 것 때문에 문제라. 신앙생활에 탁탁 튕겨요.
‘하나님, 왜 우리 사업 부도나게 합니까?’ ‘나, 너 중심으로 일 안 하거든.’ ‘저 사람은 왜 사업 잘 되게 합니까?’ ‘나, 가 중심으로 일했거든.’ 갑자기 우리는 뭡니까? 튕기죠. 저 사람보다 못난 게 뭐가 있고, 여러 가지 조건 겁니다. 왜 내 중심이 아닙니까?
사람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후유증이 남았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나도 안다’ 그거에요. ‘나는 선에 대해서 알고, 악에 대해서 안다는 겁니다. 아니까 하나님은 나한테 막무가내로 쳐들어오지 마시고 나하고 의논해서 구원합시다. 저도 얼마든지 착해질 수 있으니까. 선도 알고 악도 아니까. 악한 건 버리고 선한 것은 더욱더 증진시키면 되니까. 그러할 용의가 있고 양심도 준비돼있으니까. 저하고 의논해서 지시만 하시면 구원받겠습니다’라는 조로 나오죠.
하나님 말씀이 ‘그것 때문에 생명나무 못 따먹게 하겠다’ 바로 그 마음 때문에. ‘어쩌란 말입니까?’ ‘내가 정해준 사람 따로 있어. 그분을 축복하면 복 받고 그분을 저주하면 저주받는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따로 기준을 제시한 삽입시켜 놓은 게 있단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에서가 야곱을 미워해서 결국은 야곱은 당합니다. ‘너는 당해라. 모든 뒤처리는 내가 심판할게.’ 이것이 오바댜 예언서 내용입니다. 당하는 야곱도 성질나요. 자기가 복의 근원인데 지옥 갈 인간한데 일방적으로 당하니까 자기 손으로 자기 힘으로 이것들을 손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요.
그런데 이래 되면 야곱 본인이 잘나서 복의 근원된 줄 알고 착각하게 돼요. ‘나는 당해도 쌉니다’ 하면 되는데 ‘저 되도 않은 인간에게 내가 당하다니 못 참겠다’ 이래 나오면 안 돼요. 야곱은 그냥 당하고 책임은 하나님이 지시고, 에서는 공격하고 그렇게 해서 세상은 종말은 끝난다 이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입장에서 ‘구원 그 이후’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 하나님 약속이죠. 에서는 저주받고 야곱은 복 받는다는 이것을 크게 쓰겠습니까? 오늘 강의에 중요한 것 들어갑니다. 이 야곱은 복 받고 에서는 저주받는 이것을 [증식]이라고 합니다. 이게 구원 그 이후에 하나님이 하시는 증식하는 겁니다. 십자가에 있었던 그 사건의 증식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1절,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십자가 사건의 증식, 이걸 확대시켜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야곱아 당해라. 계속 당해라. 죽기까지 당해라. 요한계시록 12장.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11절) 왜? 주께서 증식하고자 하는 것은 너의 증식이 아니고, 주의 십자가 복음의 증식이기 때문에 늘 당하는 요소가 있어야 돼요.
그러면 증식은 어떻게 하는지 그 방법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는지 이야기해보겠어요. 1948년 존 폰 노이만이라는 유대인 학자가 있어요. [자동자 이론]이라는 논문을 제출했는데 이것은 물질의 증식이 아니라 ‘논리의 증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쓴 논문입니다. 첫째 시간부터 어려운 거지만 참으세요. 나중에 어려운 것 하게 되면 쉬운 게 되니까.
이 사람의 주장을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의 A라는 기계가 있는데 이 기계를 뭘 만드는 기계에요. 이 기계에서 만약에 팔이 있다면 팔에서 N이라는 제품을 만들어낼 때 이 사람은 자체적인 I라는 기술을 가지고 N이라는 제품을 만들어내요. 우리는 이것을 생산이라 하거든요. 생산하고 이거는 생산물이 되는데 이래 되면 생산할 것은 계속 있지만 생산한 N 속에는 뭐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처음에 만들었던 기술이 포함이 안 돼있지요.
안경을 내가 만든다면, 안경 보고 ‘안경아 네가 안경 만들어봐’ 안경 못 만들잖아요. 만들어진 것은 만들어진 분의 만들 때 창조기술을 내포하지 않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뭐가 되느냐 하면, 증식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증식하고 있잖아요. 이런 논리 가지고는 하나님의 창조 작업, 피조물이다. 현재 교회에서 알고 있는 이런 논리로는 하나님 뜻을 해명할 수 없다 이 말이죠.
하나님은 창조주고 나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계속 증식해야 되는데 ‘나는 피조물이다’ 그래봐야 증식 안 되잖아요. 피조물 속에 하나님의 증식 원칙이 들어가야 되는데 뭐만 우기느냐 하면, ‘피조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부족합니다’ 처음부터 부족한 걸 아는데 부족했으니까 쫓겨났지. ‘나는 부족합니다. 하나님 알아서 다 해주이소. 아예 맡기고 논다. 헌금이고 봉사고 없다. 나는 부족한데 뭐.’
복음 전하면서 만날 얻어먹는 욕이 그거잖아요. 이근호 목사는 헌금도 안 해도 된다 하더라. 봉사 안 해도 된다더라. 나쁜 짓 해놓고 구원받는다 하더라. 만날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증식에 대해서는 안 하고 자기 입장에서 편한 것, 그냥 놀면서 천당 가는 것. 여러분 놀면서 천당 가면 선종 못합니다.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위해서 친구가 돼주어야 되지.
그래서 노이만은 어떻게 했느냐 하면, 여기서 같은 이걸 보편자란 어려운 말 하는데 빼버리고, A가 자기하고 똑같이 생긴 똑같은 기능을 갖고 있는 B를 하나 만들어서 넣어요. 생산은 아니고 복사를 하는 거예요. 그 복사에다 B 속에다 A가 갖고 있던 원칙을 기술을 하나 달아서 이것 전체를 C라는 것을 자동자라는 걸 만들어서 결합을 시켜놓고 기계를 돌려버리면 나오는 게 생산되는 게 이것과 똑같이 생긴 A, B, C 뭉텅이로 돼있는 전체를 D라 하는데 똑같이 생긴 이런 게 하나 튀어나온다 말이죠.
이게 튀어나올 때 두 가지가 있어야 돼요. ‘복제’가 돼야 되고 ‘번역’이 돼야 돼요. 기술 자체도 복제된 상태에서 번역된 것이 포함돼있어야 됩니다. 이런 논리적인 이론을 내세웠는데 1953년에 크릭이란 사람이 DNA 구조를 밝혔습니다. 그 DNA라는 것은 인간의 세포에 핵이 있고, 핵 속에 염색체가 코일처럼 말린 그것이 DNA에 이중으로 꼬인 거예요. 그 DNA는 ‘당+염기+인산’ 이 구조로 돼있는데
이 DNA가 다음의 DNA를 번식할 때 복제를 하고 전이를 하고 세 번째 번역을 해요. 복제는 DNA 스스로 하고 전이는 메센지에다 m-RNA, 메센지에다 번역을 할 때는 t-RNA 이렇게 해서 부모와 같은 DNA를 자식이 그대로 복제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 자식이 부모 닮은 자식을 또 결혼해서 낳을 수 있는 게 돼요. 이게 증식된다고. 성경하고 관계없습니다. 이런 게 있어요. 이거는 고등학교 생물책에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증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피조물이다’ 이러면 안 돼요. 나를 만들었던 원리도 만들어진 그 안에 같이 담겨있어야 그게 제대로 하나님의 창조의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또 그걸 통해서 증식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 교재에 [인간 의식의 한계] 1페이지부터 3페이지 하기 전에 먼저 전제로 4페이지 하려면 이걸 제가 자세히 안할 겁니다. 왜냐하면 현대수학에 관련된 이야기기 때문에. 그런데 현대수학이 왜 성경이야기에 들어가야 되는가? 설명을 해야 되는데
인간 입장에서 봅시다. 그림으로 합시다. 너무 어렵게 하면 안 되니까. ‘나’가 있지요. 마지막에 누군가 남을 때 누가 남아야 돼요? ‘나’가 남아야 되죠. 도중에 여기서 누가 빠지면 안 돼요? ‘나’가 빠진 다른 나가 되면 우린 그걸 축복이라 보질 않아요. 창세기 1장에 보면 ‘축복’이란 말이 뭐냐? 팽창력을 말하거든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만날 뭘 만드시고 복 주시면 퍼지는 거예요.
현재 나라는 질적인 요소가 계속 확대될 때 그게 축복이지, 내가 빠지고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나를 장악해서 ‘야 너 때문에 내가 컸다’ 우린 이걸 기분 나빠서 축복이라 보지 않는다 말이죠.
내가 우리 집 가게에 감자탕하고 있는데 장사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남에게 세 줬다. 세 들어온 가게가 열 배가 남았다. 그때 ‘당신 축복 받았네요.’ ‘왜요?’ ‘장사 잘 된다면서요.’ ‘내 가게입니까? 그 사람 가게지. 아이 기분 나빠. 왜 나 할 때는 장사 안 되다가 남 할 때 잘 돼.’ 남이 받은 축복을 축복으로 간주하지 않는 독선적인 자아, 이게 선악과 따먹은 후유증 아닙니까. 예수님 잘 되는 거, 눈꼴 시려. 예수님 잘 되도 소용없어요. 내가 잘 돼야 돼요. 내가 잘 돼야 기분 좋지. 나는 못 되는데 예수님 잘 되서 하늘나라 가 계시다. 기분 영 안 좋아.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보세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여기 ‘나’가 누굽니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했는데 이 사랑의 개념이 고린도전서 13장에 뭐라 돼있습니까?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아야 사랑이라는 거예요. 사랑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넘겨주기. 자기의 모든 걸 상대방에 몽땅 넘겨주기에요. 젊은 사람들 사랑해 보세요. 사랑할 때 기분 어때요? ‘나 당신 사랑해.’ 그 말이 뭔 뜻입니까, 다른 말로 번역하면 뭐예요? 몽땅 다 너 해라. 안 해 봤어요?
사랑이 뭐예요? 내 것 몽땅 다 가져가라 이 말 아닙니까. 물론 연애할 때만 그렇지. 결혼하고 난 뒤에 입 싹 씻지만. 하여튼 사랑할 땐 몽땅 다 주잖아요. 몸도 마음도 다 가져가라. 당신 가져가면 내가 마음이 시원하겠다. 이게 사랑이잖아요. 사랑은 넘겨주는 겁니다. 상대방에게 자기의 모든 걸 양보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 입장은 구원받을 때 그 구원의 주인공과 핵심은 알맹이가 내가 여전히 유지되어야 그걸 구원이라고 간주하는 거예요.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원인을 네 가지 찾을 수 있습니다만. 철학에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거든요. 이 말이 뭐냐 하면, 이걸 수학적으로 풀면 이렇습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나’죠. 그럼 여기서 10미터에서 봅시다. 뭐로 보입니까? 사람 보이죠. 100미터에서 봅시다. 뭐 움직여져요. 사람 맞지요. 한 2킬로미터에서 봅시다. 사람 뭐로 보입니까? 점이죠. 그래서 데카르트란 수학자는 모든 사물을 x와 y의 좌표, 하나의 점으로 본 거죠. 이 p라는 점은 (4.5)의 좌표로 모든 것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하나의 점으로 봅니다. 점은 ‘침투 불가능성’이에요.
그래서 그때부터 인간은 뭐만 생각하느냐?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십 년 후에 내가 돈 얼마나 벌까? 우리 교회는 십 년 후에 교인 몇 명일까? 아예 문 닫을까? 다음 주 헌금을 얼마 나올까? 내 새끼 이번에 행정고시 친다는데 합격될까? 항상 자기중심으로 침투 불가능성, 이거 꼭 외워 놓으세요. 네가 내 마음 알아. 알기는 개뿔이 알아. 하나님 내 마음 압니까?
항상 인간은 자기를 하나의 침투 불가능한 점으로만 존재하는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내가 나라고 생각할 때만 나인지 알지, 남이 이야기해주는 그건 나가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내 생각할 때만 내가 된다는 거예요. 심지어 교회 올 때도 마찬가지고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고. 자기 생각을 종교적으로 포장한 게 기도죠. 평소에 생각했던 것 뒤에 예수 이름 붙이면 기도 아닙니까. 쉬지 말고 기도한다는 것 쉬워요. 그냥 아무 때나 가면서 예수 이름 붙이면 다 기도에요.
수학적으로 점으로 보는 거예요. 점 속에는 나의 노동, 나의 수고, 나의 희생, 나의 봉사 이런 것들은 남한테 빼앗기면 안 돼. 나의 성화 이런 것도 남한테 빼앗기면 안 돼. 자기가 착한 일 한 것을 남이 가져가면 용납 안 돼. 항상 나 착한 것, 내가 훌륭한 것, 내가 자질이 좋아지는 것, 모든 것이 하나의 중력으로서 나한테 점 안에 응축이 돼야 돼.
그래서 데카르트는 말하기를 모든 인간은 움직이는 운동으로, 또는 운동방정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에 있어서 힘이라 하는 것은 운동 힘입니다. ‘m×v’라는 질량 곱하기 속도. 이것이 운동학으로 된 겁니다. 모든 게 운동한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라이프니찌라는 사람이 가만히 보니 이게 틀렸다는 거예요. 왜? 이렇게 운동을 하게 되면 서로 피해가면 되지 뭐가 안 되느냐? 아까 이야기한 충돌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되게 돼있다. 그런데 세상에 보면 서로 밉고 싸우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운동학으로는 설명이 안 되고 세상을 설명할 때 충돌되려면 [동력학] 다른 말로 한 자로 하면 누가 힘세냐? ‘힘’으로 설명해야 되지 이거는 내가 어떻게 움직인다, 나는 가고 싶으면 간다. 가고 싶더라도 힘에 의해서. 꼼짝 마라 하면 꼼짝 말라는 거예요. 어린애가 시장에 가서 ‘엄마, 이것 사줘’ ‘사지 마’ 엄마한테 말 듣잖아요. 뭔가 내가 운동하는 게 아니고 힘에 의해서 힘이 우선적이지 내가 하고 싶은 운동이 우선이 아니란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이렇게 정리해야 되죠. 운동에너지는 ‘질량 곱하기 속도’인데 만약에 질량을 네 배로 늘리자. 속도를 그 대신 네 배로 줄이자. 그러면 데카르트에 의하면 네 배 늘이고 줄였으니까 똑같이 돼야 되는데 실제는 안 그렇다는 거예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서 공을 시험을 했다 하는데, 시험했는지 안했는지 몰라요. 시험했다 하니까 한지 알지 증거 없답니다.
속도가 뭐냐 하면, v=√2gh 이런 공식이 나왔다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높이라 하는 것은, 이건 하지 맙시다. 어쨌든 간에 이 공식에 집어넣으니까 그냥 해선 안 맞고 v² 해야 된다 말이죠. 이 제곱을 계속 무한대로 늘여보니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에요. 다 할 필요없이 하나만 하면 돼요. 질량이 우선이 아니고 힘, 힘이 세상을 지배하는 우선이다. 이것이 관건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의 점인데 에서란 인간과 야곱이란 인간, ‘어이, 인간 똑바로 해’ 똑바로 해야 될 문제가 아니고, 에서를 에서답게 야곱을 야곱답게 하기 위해서 각자 배후에 뭐가 있어야 된다? ‘힘.’ 힘에 의해서 움직일 뿐이고, 에서는 하나의 점이고 야곱도 점에 불과하고 사실은 야곱 배후에 있는 힘과 에서 배후의 힘에 의해서 세상은 충돌이 일어나고, 그 충돌이 뭐냐? 십자가까지 이어진 거예요.
이걸 더 사회학 논리로 들어가면 사회라 하는 것은 인간성과 인간성의 관계가 아니고 배후에 갖고 있는 힘과 힘의 그물망, 관계망. ‘너희 집 청와대에 아는 사람 있어?’ 이처럼 항상 어떤 자기 배후의 힘을 동원시켜서 ‘나는 이런 힘에 의해서 지금 움직이고 있는 사람인데 너는 어떤 힘에 의해서 움직이지’라는 식으로 사람들은 자기보다도 자기가 속해 있는 힘에 의해서 운명이 결정되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라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 배후에 있는 하나님 힘과 그리고 바리새인이 갖고 있는 인간의 힘이 그야말로 충돌에 의해서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충돌이 일어나요. 그럼 여기서 뭐가 빠져야 돼요? 점에 불과한 점의 색깔, 점의 인품, 점의 훌륭함 이런 것은 힘에 비하면 작은 변수, m에 지나지 않아요. 진짜는 v 제곱, 속도가 결정하지 내가 뭘 갖고 있느냐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세리와 창기 걱정하지 마세요. 주의 십자가 힘이 있으면 세리와 창기라도 하늘나라 가는 겁니다. 외부에 어떤 힘이 지배하느냐가 중요하지 내가 가정환경이 어떻고 어떤 교단, 이건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 어떤 힘에 의해서 여러분 움직이십니까? 10분 쉬면서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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