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몸'과 '교회'와 차이점
이근호 2006-10-23 08:53:02, 조회 : 124, 추천 : 1
성경상 '그리스도 몸'과 '교회'와의 차이는 전혀 없다. 완전 일치한다.
그런데 종교 세계에서는 차이가 난다.
즉 '그리스도 몸'의 개념'을 품지 않는 '교회'가 등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스도 몸'이 '그리스도 몸'으로 존재하는 관권은,
1. '머리' 부분이다. '머리', 즉 통제권자가 누구냐 하는 점이다.
머리부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어야 하고 그 분만이 머리며 그 어떤 인간도 그 머리 될 수가 없다. 즉 눈에 보이는 그 어떤 인간도 머리를 대신하거나 머리로서 행사할 수 없다.
2. 지체라는 것은 오직 머리의 말씀에만 종속되지 결코 눈에 보이는 그 인간에게도 종속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머리 되시는 분의 하신 공로의 능력으로만 지체가 지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자진해서 그리스도 몸에서 떨어져 나가려고 한다면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종속되면 그만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그리스도 몸이 몸되게 하고, 이 개념으로 유지될 때만 진정 '교회'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몸이란 경로를 거치지 않고, 바로 '교회'라는 종교 단체로 나서는 것이 추세이며 대세이다.
즉 '그리스도 몸'이 아닌 '교회'가 교회 전체를 장악해버린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1. 전문성직을 평생 직업으로 잡은 자들(목사)이
교회 하나 꿰차고. 평생 생계비를 그 퀘찬 교회에서 뽑아내려는 근본 의식을 가지고 전문성직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무슨 사건이 터져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의식 때문이다.
'누구든지 내 평생 생계비 뽑는데 저해되는 자, 내가 가만두지 않으리. 심지어 아무리 예수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이 정신에 입각해서 모든 설교와 목회 방침이 확정된다. 부교역자 뽑는 것도 역시 이 구조 안에만 이루어진다.
이런 목사가 설교 단에서 설교할 때는 직접 들리는 소리 외에 또 다른 소리가 팍팍 터져나온다.
그 '들리지 않는 소리'는 이렇다. '내가 이 교회의 소유주다, 내가 이 교회의 머리다, 이 교회는 내 것이다!. 너희 교인들은 내 밥이다'라는 외침이다.
놀라운 사실은 교인들은 이 보이지 않는 소리까지 온 몸으로 듣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응답한다.
"아멘, 교주이시여. 교주님 시킨대로 비칠터이니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압력 넣으서 축복이나 넘치게 떨어지도록 하옵소서!"
2. 당연히 교인들도 문제있다.
교인들은 옛날 성황당 같은 신전을 원한다.
특정 장소를 차지하고서는 오며 가며, 향불 피우고 정성을 다하면 빌면, 현세에 내세에 복을 받고 행운을 가져다 주는 신전을 원한다, 단지 이것 뿐이다.
목사들은 이런 고객을 잡지 아니하면 장사가 안된다.
목사들이 생각하는 예배당이란 이런 고객의 편이를 위해 하우스(노름 객장)을 개장해 주는 것이다.
그 열린 공간을 소비자가 스스로 채우게 하는 방식이다. 목사는 돈만 챙기면 그만이다. 마치 복채받듯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만나는 오늘날 '한국 교회 부흥'을 낳은 것이다.
어디에도 '좁은 길로 가라' 십자가 앞에서 늘 자기를 부인하라' '내 복음을 위하여 십자가의 길로 가라"라는 것은 목사에게나 교인에게나 낯설은 구호가 되고 말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는 철지히 무시하기로 목사나 교인들이 합의한 것이다.
머리에서 흘려내려오는 말씀이 차단된 교회,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에 뜻이 있어 허락하신 악마의 전당이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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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그리스도 몸'과 '교회'와 차이점
최은성 2006-10-23 19:30:14, 조회 : 75, 추천 : 0
>
교회가 세상과 같아지자, 하나님의 은혜가 가치없이 함부로 나누어 지게 되었다.
교회(전문성을 평생 직업으로 잡은자들)는 교인들에게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들였다는 결정적인 열매가 나타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었다는 표적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제시하는 집사와 장노의 자격을 무시한채,
침례를 주거나 직분을 줌으로써 교인들을 교회에 붙잡아 두려고 하고 있다.
사단은 교인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 노심초사 하는 교회(전문성직을 평생 직업으로 잡은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를 거짓 교인들로 채우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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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라도 저주를 피할 수 없다!
박윤진 2006-10-23 23:05:22, 조회 : 158, 추천 : 0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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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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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본문에 의하면,
사도 바울 일행이 전한 복음이 있고 다른 복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갈 1:7)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 외(外)의 것은 모두 다른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이 무엇인지 알면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가 왜 심각한가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 전하는 자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저주'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복음을 전한다, 복음을 들었다,
이것은 복음적이다, 저것은 비(非)복음적이다라고 하는데
그 기준이 바로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인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정의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으로 적힌 성경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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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바울이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은 자연스럽게
다른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은 저주의 대상입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
우리가 연습하고 훈련하여 누군가를 설득하고자 할 때,
학습의 목표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다른 복음이고 저주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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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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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외에는 모든 것이 배설물일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복음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람들을 좋게하는 것,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기 입니다.
갈라디아서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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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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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가 믿지 않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설득시킬 목적으로,
그들이 복음에 발을 들여놓도록 유도하기 위하여 전하는 말과 지혜,
즉 사람들을 좋게하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면
다른 복음입니다! 저주 받을 대상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자의적으로, 자신의 연구결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 박히심만이
참 복음이라고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장 23-24절의 말씀처럼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므로
사도 바울 또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 완전히 포로가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만을 전하게 하시면서
그 자체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알아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알아서 역사하는데
사도 바울이 여기에 끼여들 자격이나 됩니까?
어떻게 이 복음의 역사 가운데
인간의 좋음, 인간의 지혜, 대중성, 경제성 등을 고려할 틈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라는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십자가의 도를 쏟아내고 계신데
사도 바울이 무슨 수로 사람들에게 통할 만한 잔머리를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똥, 오줌을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틀어막을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전하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임을
확인하고 놀라고
또 확인하고 놀랄 뿐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받을 자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세치 혀로 이것을 변경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세치 혀로 이것을 변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확정하신 것은
인간쪽의 반응이 어떤 것이든지 상관없이 전하고
그 확정하심은 영원히 찬양받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자,
그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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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현 한국교회를 대표해서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면...
이근호 2006-10-24 09:10:22, 조회 : 151, 추천 : 0
>물론 성경에서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언급한 곳이 있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그 십자가 이야기한 것보다 더 많은 분량으로 강조한 대목이 나온다.
그것은 성도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실제로 '제대로 새사람으로서 살아가기'이다.
이 사실도 복음 강조라는 이유로서 누락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을 강조하는데 마치 방해되는 것처럼 '새사람으로서 살기'를 싹둑 자른다면, 이것 또한 사도들의 본래 의도하는 뜻도 아니요, 곧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는 악마의 다른 작전일 수가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십자가 복음+ 새사람처럼 실제로 살기= 주님의 뜻' 이래야 맞는 것이 아니냐?
십자가 '만'으로 주장하지 말고, 그것으로 끝내지 말고 십자가 복음을 시발점으로해서 뭔가 더 나아가야 하질 않는가?
마귀에 속해서, 마귀가 시키는대로 죄를 짓는 사람도 물론 있다. 그들이 바로 불신자들이다.
하지만 성경은 신자들을 위한 책이다.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들이, 어떤 식으로 구원되었으며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를 보여주는 책이다.
따라서 성경을 해석하면서 자꾸만 처음 신자되는 그 자리에만 머물고 제자리 뛰기만해서는 되겠는가?
십자가 복음으로 날마다 은혜받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고 좋은 일이다.
하지만 전체를 보라!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부터 하나님의 선하심이 이미 인간에 내장시켜 주셨다.
설사 복음을 모르는 이방인의 마음 속에도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담겨 있다.
맹자의 말에,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때, 신학적이나 교리적인 것이니 자신이 윤리적 과시함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얼른 가서 구해주는, 측은지심( 惻隱之心)이 인간마다 있고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고하는데, 스스로 양심에 위배되는 짓을 했을 경우에는 누가 와서 지적하기 전에 먼저 알아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도 인간마다 있고
사양지심( 辭讓之心 )이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하는 미덕을 베풀므로서 자신의 존재의 명예를 고귀하게 본심이 인간마다 있고,
시비지심( 是非之心)이라고해서, 누가 가르쳐 주지 않더라도 무엇이 옳고, 그름을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는 느낌을 갖게 마련이다고 했다.
비록 맹자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예수님은 몰랐어도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이런 거룩한 심성을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성도가 이런 이방철학자들의 차이점은 자기 속의 신의 성품을 성령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발달시키고 발현시키는 책임을 지닌 자이다.
이방철학자들이 비록 불완전하게 짐작하고 있는 이런 신의 성품을 이제 복음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는 분명하게 하고, 아는 것에 멈추는 것이 성령님을 통해서 실제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이 생활에 나서는 것이다.
이것을 거부한다면 그야말로 악마가 좋아할 짓이다.
따라서 십자가 복음이 참으로 중요하다. 인간이 자기의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 한국 교회에서 안수받은 목사라면 전체가 다 인정하고 들어가는 바이다. 그래서 정통 교단의 중요함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리라고 사도들이 편지마다 뒷부분이 가득 가득히 명령과 권면들을 주셨는데 그것을 깡그리 무시하고 무슨 낯짝으로 성경을 제대로 봤다고 우길 수가 있는가?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주님에 의해 새로 지으심 성도는, 죄 계속 지어라고 새사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네 안에 있는 성령으로 인해 '의를 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실제로 '의'를 행할 수 있다고 새사람 만드신 것이다.
의를 행할 수 없다면 무엇 때문에 사도들이 권면과 명령들을 주셨겠는가!
전체를 보아라!
복음을 좁게 보지 말고 제발 넓게 보아라.
의를 행하라고 명령한다고해서 결코 십자가 복음을 묵사발 되는 논리가 아니다!
사도가 이점을 다 알고 명령들을 주셨기에 우리 목사들은 사도가 지시한 그대로 맡겨 주신 양들에게 그 권면과 명령들을 그대로 전했을 뿐인데 도대체 한국 교회 목사가 뭐가 문제 될게 있더란 말인가!
일부 목사의 과욕과 비윤리적인 것으로 전체 목사를 매도하지 말라
마귀만 좋아할 뿐이다.
정말 화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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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현 한국교회를 대표해서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면...
박윤진 2006-10-24 11:47:53, 조회 : 132, 추천 : 0
하나님의 약속 안에 무엇이 담겨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죄인을 새 사람 만들어서 인간으로부터 의를 생산하시고자 함이 있는지
아니면 십자가 사건만이 담겨서 새 사람 운운하는 심보까지 공격하고 있는지를 알면
귀하의 주장에 좋은 답변이 될 것이다.
사람은 사람과 약속할 때 쌍방향이다. 서로 주고 받을 것이 있을 때만 계약이 가능하다.
있음에서 있음을 추구하는 소유의 확장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실 때, 이를 굳이 "내 언약"이라고 일방적으로 정의하신다.(창 17:2)
언약은 없음에서 있음을 창조하는 시발점이 된다.
인간은 원래부터 하나님에게는 없음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의 상대방이 아니었다.
왜 일까?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항상 악하여 창조자체가 후회스럽고(창 5:5-6), 수에 칠 가치조차 없으며(사 2:22), 마귀가 그 아비이며(요 8:44)
회칠한 무덤이요(마23:27), 안개와 같은 존재(약 4:14)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아낼 수 없다. 하나님의 거룩을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을 보고서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 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와 언약을 하셔야 자신의 거룩을 온전히 받아낼 수 있을까?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의 거룩을 받아낼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외에는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맹세하신 것이다.(히 6:13)
주님께서 과연 무엇을 스스로 맹세하셨는가? 희생 제물이다.
이 희생 제물이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죄인을 위한 희생제물조차 없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 희생제물로서 등장하신다.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언약을 보여주실 때 쓰셨던 그 갈라진 제물,
야곱과 씨름하여 패배자로 자처하신 천사의 모습,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깨어질 수 밖에 없는 언약의 돌판,
제사법에 등장하는 각 가지 제물들은
모두 하나님의 거룩을 담아낼
하나님의 모습으로 오실 어떤 의인의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의인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로서 에스겔서에서는 '인자'로 등장한다.
바로 이 인자가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언약을 그대로 담아내야만 한다.
희생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
왜 희생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반영해야 하는가?
그것이 약속이며 그 약속의 은혜만이 은혜를 더욱 은혜되게 하기 때문이다.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을 희생 제물 속에 담아내시면서
창조의 처음이 바로 이 은혜였음을, 인간이 바로 이 은혜로 살고 있음을, 죄란 이 은혜를 알지 못하는 것임을
스스로 증거하시는 것이다.
은혜를 은혜되게 하시면서 하나님이 스스로 하나님 되심을 증명하신다.
결국 인간 구원이나 인간 새사람 만들기가 애초부터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왜 죄인일 수 밖에 없는가를 더욱 분명케 하시는 것이다.
죄를 더욱 분명하게 죄되도록 하는 것, 그래서 죄인의 모든 입을 철저히 봉쇄하는 것이 바로 율법의 기능이다.
죄인이 변명할 수 없는 법으로 가두신 후, 그 법을 온전히 이룰 수 있는 의인을 희생시킴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임을 고발해 내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이 분명해 진다.
또한 성령의 역사도 예수님만 증거하는 것이다.(요 15:26)
십자가 사건을 확실히 함에 있다.
그래서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이 바로 의, 죄,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이다.
성도는 바로 이러한 성령님의 책망 아래에 있는 자이다.
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가운에 있는 하나님의 원수로써 발견된다.
그래서 성령이 책망하시고 자꾸 기억나고 생각나게 하셔야 한다.
배워서 될 일이 아니요, 실천해서 될 일이 아니다.
우리의 달음박질로 인함이 아니다.
오직 은혜로써만 가능하다.
성령은 바로 그 은혜로만 가능한 일, 십자가의 도를 믿어지게 하시는 것이다.
그 십자가의 도만 주장하게 하시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임을
날마다 성도에게 확인시키신다.
그렇다면 이러한 확인을 날마다 받아야 하는 성도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날마다 죽고 날마다 태어난다.
성령에 의해 죽고 성령에 의해 태어난다.
하나님의 열심을 자신의 의로 돌리려는 계산을 들킨다. 죽는다.
그래서 십자가만이 은혜의 완성임을 고백한다. 산다.
이 고백은 인생이 거듭될 수록 더 높고 깊고 넓어진다.
결국 자신이 죄인의 괴수임을 십자가 지신 예수님 앞에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허다한 죄를 덮고 계신 십자가의 은혜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깨닫는다.
하나님의 희생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아니라면
도대체 살아있지도 않은 것이 되어 버리는 자가 성도이다.
십자가로 인하여 상한심령이 끝임없이 솟아나는데
이제 이런 상한 심령과는 작별하고 스스로 의를 창출하자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정반대 방향이다.
하나님의 언약과 다르다면 천사라도 저주받아 마땅하다.
이제 귀하의 주장을 살펴보자
'십자가 복음+ 새사람처럼 실제로 살기= 주님의 뜻' 이라고 요약된다.
그리고 새사람처럼 실제로 살수 있는 근거로서
인간속에 내장된 하나님의 형상을 성령이 발현 내지 발전 시킴을 제시하였다.
십자가는 부분이지 전체가 아니며 결론적으로 의를 생산해내는 새로운 인간의 창조를
하나님 뜻의 전체라고 하였다.
위에서 말한 바, 죄인은 하나님의 희생이 아니라면,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도 없는 죽은 존재이다. 이것을 통보하시는 것이 십자가란 말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복음과 '새 사람처럼'이라는 말은 결합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언약이,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께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새 사람이 가능하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십자가 사건을 유발한 것이다.
죄인인 주제에 하나님의 뜻이 자기를 의인만들기 위한 것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십자가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는 것이 바로 사단의 자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단의 자식은 사단의 자식으로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긍휼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저주할 자를 저주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에 잘 부합한다.
인간속에 내장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 형상의 원수의 형상이다.
그 원수의 형상을 도출낸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성도의 본질이 하나님의 원수였음을 계속 생각나게 하시고 십자가 은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날마다 탄식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대신 기도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은 인간안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도와 죄인을 새사람 만드는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안간안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원수를 드러나게 하여
하나님의 언약과 열심이 빚어낸 하늘에 속한 새 사람만을 찬양하며
그 분의 희생으로만 구원됨을 자랑토록 보증하시는 자인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맹세를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키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우리에게 들키지 않으신다.
우리가 늘 십자가안에서 들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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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그렇다면...
이근호 2006-10-24 13:04:16, 조회 : 115, 추천 : 0
당신의 주장대로라면 '자신의 증인된 자'는 결코 아무리 우겨도 성령받은 자가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성령받은 자'라는 뜻인데,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 1:8 )
그렇다면 꼭 십자가 '만'을 이야기하고, 그리고 자신의 여전히 죄인됨을 이야기한다고만해서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까?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의 증인되면 과연 증인이 아니라고 우기시겠습니까?
즉
"예수님 때문에 나는 이미 새사람 되었고, 예수님이 주신 성령으로 인해 지금도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본받고 있다"라는 고백을 하면 (골로새서 3:10) 이것은 성경에 없는 말이고, 이런 성경 귀절을 외친다고해서 꼭 예수님의 증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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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그렇다면...
박윤진 2006-10-24 13:16:42, 조회 : 122, 추천 : 0
귀하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고치면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진짜 새 사람이신 예수님 때문에 죄인인 저는 전혀 새사람이 될 수 없는 자임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살았다고 하시고,
예수님이 주신 성령으로 인해
지금도 나는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본받을 수 없는 죽어마땅한 자임을 깨닫고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하나님의 형상임이 인정됩니다. 믿어집니다."
라는 고백을 하면 말입니다.
이로써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3)
라는 말씀이 성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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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결국 이근호 신학으로 되돌아오는 군요.(내용 없음)
이근호 2006-10-24 13:40:56, 조회 : 104, 추천 : 0
훗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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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근호 신학이라 하심은?
박윤진 2006-10-24 14:06:29, 조회 : 125, 추천 : 1
이근호 신학이라?
성경의 내용을 깨닫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 아닌가요?
이근호라는 죄인을 통하여 성령이 말씀하실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이근호 개인적인 사상으로 치부해야 하는지요?
조용필이 마이크를 잡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면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이 마이크의 노래입니까?
이근호 신학이라고 공격하는 것 자체가
귀하의 주장의 타당성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이근호 신학이 성경에 부합하는지 부합하지 않는지를 말하고
그에 맞는 근거를 말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제가 드린 말씀이
어떤 성도의 고백과 같다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도바울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 잘못은 아닌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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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근호 신학이라 하심은?
이근호 2006-10-24 14:17:03, 조회 : 138, 추천 : 0
귀하의 답변이 너무 놀랍고
너무 고맙고
너무 감사해서
시험했습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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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감사합니다.
박윤진 2006-10-24 14:34:00, 조회 : 112, 추천 : 0
목사님 덕분에
제가 얼마나 나 중심인지,
얼마나 나에게 집중하고 있었는지
다시한번 알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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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두분께 감사합니다.
이준1 2006-10-24 15:19:42, 조회 : 107, 추천 : 0
두분의 가상토론을 통하여
십자가 복음과 종교간의
한치 양보 없는 진검 승부의 내막을
다시금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두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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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에 묶인 깡통
박윤진 2006-10-23 23:56:05, 조회 : 103, 추천 : 0
어느 나라 풍습인가요?
신혼여행 중임을 알리는 표시로 자동차에 깡통을 매어
텅빈 철이며 알루미늄 소리가 도로를 꽤나 괴롭게 하지요.
여름 한 낮,
아스팔트가 녹아내려도 이해되만한 더위에
자동차 한 대가 달리고 있습니다.
신랑은 운전을 하고 있는데,
어???
어여쁜 신부는 보이질 않네요.
말 많은 깡통 소리만 요란합니다.
그렇게 묶여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는 깡통 중 하나가
나무그늘에 버려진 다른 쓰레기를 발견했습니다.
부러웠습니다.
서늘한 그늘에 버려진
저 쓰레기야 말로 상(上)팔자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불평이 시작됩니다.
언제든지 깡통들의 불만은 요란합니다. 들어보면 뭐, 그럴만 합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깡통은 차 밖에 있어야 합니다.
개 똥이 입에 들어가는 일은 차라리 사소한 일입니다.
찌그러지고 패여서
엄마도 못 알아보실 지경이지요.
신혼여행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 귀하신 깡통을 왕고생 시키나!
그늘에 버려진 상팔자의 쓰레기가 시야에서 멀어질 쯤,
자동차에 함께 묶여진 다른 깡통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자동차에 묶여
찌그러지고 웅덩이에 빠지고 먼지를 뒤집어써도
지금 운전하시고 계신 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라는 현실에
감사하고 감사하지 않니?
결코 끊어지지 않는 이 사랑의 줄이 얼마나 감사한지....."
말을 다 잇지도 못하고 또 웁니다.
다른 깡통도 한 마디 거드네요.
"신부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궁금하지 않니?
이 여행이 끝나고 나서 신부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기절할 걸!
우리 쓰레기들을
자신의 신부라고 불러주실 수 있는 분이
예수님 말고 또 계실까?"
가끔 제 정신 아닌(?) 깡통 중 몇몇이
이렇게 신랑의 마음을 대언하고 나면
다들 숙연하게 자신들을 묶고 있는
줄을 바라보게 됩니다.
신랑의 피가 지금도 줄줄 흐르고 있는
그 줄을........
그래도 신랑은 십자가라는 자동차를 멈추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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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과 비웃음의 대상- 끝을 모르는 시련
이근호 2006-10-24 14:15:36, 조회 : 116, 추천 : 1
"훗, 훗 "- 악마의 입가에서 뿌려져 나오는 비웃음 소리!
'십자가 피'까지 '돈'으로 계산하는 오늘날 교회에서
'피 이야기'는 철저하게 조롱과 비웃음의 대상이다.
한마음. 한통속이 되어서 피를 모독한다.
옛날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던 그 자리에 예수님은 십자가 밑에서 로마 군병들의 비웃음 소리를 다 들어셔야 했다.
그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피만 전하면 비웃음 당한다.
피만 안 전하면 존경받는다.
피없이도, 피를 떠나도 괜찮은 인생이 또 있더란 말인가
도대체 인간들이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의 피(행 20:28)를 모독해도 된다는 말인가
왜 피와 상관없는 인생을 살려하는가?
왜 피를 외면 하는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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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신자라면...
이근호 2006-10-25 08:03:24, 조회 : 123, 추천 : 4
정말 신자라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일이 고백되어야 한다.
자기가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과시하듯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 신자라면, 이렇게해서 저렇게해서 우리가 신자 되었으며, 이렇게 저렿게해서 현재 말씀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고 있음이 고백되어야 한다.
정말 예수님이 안에 계신 자라면, 성경 말씀 성취성을 놓고 예수님과 자신 사이에 이런 저런 갈등이나 징계나 환란 가운데서도 위의 것만을 바라 볼 수 밖에 없는 소망을 갖게 되었음이 고백되어야 한다.
그 과정과 절차를 주위 사람들은 듣고 싶어하고 또한 주님의 작용한 증인으로서 마땅히 들려주어야 한다.
예를 들면,
"나는 이 말씀에 대해서는 이렇게 해서 실천해 옮길 수가 있었습니다"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주위 사람들이 그 고백을 듣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 당신은 그 말씀에 대해서 실천했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제가 10년 전에 그 말씀을 의롭게 성취했다고 여긴 수준 밖에 안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10년 전 그 때 당시의 착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 또다른 사건을 만나니 다시 와르르 무너짐을느꼈습니다"라는 타인의 반발을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한 사례를 들어보면,
갈라디아서 6:9에 나오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라는 대목을 10년 전에 읽고서
"나는 이제 두 번 다시 내 인생에 낙심이라는 것은 없다. 선을 행하게 된 게 다 내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일인데 왜 내가 낙심해. 낙심하는 그 자가 곧 거듭나지 못한 자라고 단정할 수 있어"라고 철석같이 자신만만하게 믿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 셀 수 없는 낙심을 매일 같이 해왔으며, 무슨 일을 만나도 낙심없이 그냥 지나간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또 얼마나 많은 낙심을 하며 세월을 보내야 할지... 이것이 나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라고 말할 때,
주위에서 묻기를 그렇다면 당신의 구원문제는 어떻게 됩니까? 라고 한다면
"주님께서 제가 하신 일들로 인하여 제가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을 한다는 것이
과연 예수님이 계신 자에 한해서만 나올 수 있는 '주님에 대한 증거'이다.
그런데 목사들이 이런 고백을 교인들 앞에서, 설교 시간에 감히 고백하지를 못하고 있다.
자꾸 가르치려 한다.
복음에 빚진 자가 아니라 복음 들은 값을 내놓으라는 채무자 행세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목사로서 (교회 어른으로서) 카리스마가 형편없이 깍기고, 카리스마가 깍기면 곧 교인들에게 무시당하는 목사가 되고, 목사에게 무시당하면, 목사 생계에 대해서 관심이 끊어져 교회 돈을 안 갖다 바칠까봐 걱정이 되어서 이런 고백을 못한다.
따라서 목사들은 강단에서 혼자 성경 말씀 다 지킨다는 느낌을 교인들에게 심어주려고 한다. 그리고 그 위신을 자기 목숨보다 더 중요시 여긴다. (주의 말씀의 권위를 파수하는 파수꾼이라는 의식을 빌미삼아)
그래서
교회에서 돈 받으면서도 정당하게 받을 자격자인 것처럼 군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학원 강사가 학원생들로부터 당연히 돈 받아야 하는 것처럼)
문제는 돈, 돈이다. 결국 돈이다. 돈 문제로 귀착된다.
예수님의 피도 돈으로 환산하려는 세상,
참으로 정말 지옥같은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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