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뜻

구원 그 이후 3-090221

아빠와 함께 2013. 3. 17. 08:49

 

20090221c 울산목양교회 특강-구원, 그 이후

(강의:이근호 목사)



정리해 봅시다. 상징계란 사람이 신이 아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키도 크지 않고, 나는 머리가 좋지 않고, 나는 부족하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 욕망은 어찌 그리 갖고 싶은 것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많고, 피터팬처럼 날아다니고 싶고, 남 갖고 있는 것 다 갖고 싶고, 남 잘 사는 집 보면 다 갖고 싶고 우에 내 욕망은 그렇지? 이거는 한도 끝도 없어.


누가 날 자제시키면 좋겠다. 그게 상징계. “먹는 걸로 족한 줄 알라” ‘아하, 주의 말씀이구나. 내가 인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가지고 인간 만들려고 귀한 말씀 주셨구나. 내가 복종해야지’ 하고 복종하는 거예요.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 오늘 먹는 것, 입었지요. 끝났어요. 집에 합선 되서 불 다 났어. 욥은 그 정도 안 됐어요. 그래서 타협했지요. ‘하나님,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알 테니까 앞으로 내게 불상사 같은 거라든지 불운 같은 것 생기지 말게 하옵소서’라고 어느 정도 타협책을 하죠.


이 두 가지가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고, 상징계에도 속하지 않고 상상계에도 속하지 않은 낯선 경외심, 권위, 위엄, 계시, 통찰력, 은사 이런 것들이 나에게 막강한 두려움과 알 수 없는 공포심으로 엄습하죠. 이게 뭐냐? ‘실재계


예를 들면, 김수환 추기경 죽음 앞에서 욕하면서 죽을 때는 눈물 흘려. 뭔가 상징계, ‘저는 이 정도 하면 되지요? 이 정도 할 테니까 너무 힘들게 하지 마세요’ 나의 타협책을 빗나가는 위반하는 내가 생각하는 나의 시스템, 인생원리원칙 그것이 굳혀졌는데 그걸 치고 들어와서, 칼 바르트는 이걸 보느냐? ‘위기’


인간이 갑자기 돈이 없고 몸이 아파서 위기라 아니라 내가 인생 이렇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잘못 사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상징계 틈을 면도칼로 째버리는 거예요. 뭔가 나라는 껍데기를 쨀 때 피가 쏟아 나오듯이 내가 모르는 진짜 나만의 세계, ‘나는 신앙생활 이렇게 할 거야. 나는 인생을 이렇게 살 거야’라고 꾸려놓은 그것을 나의 허락도 없이 침투해서 나를 혼란케 하고 두려움과 공포심에 몰아넣는 그 어떤 세계가 있다. 


그런데 이거는 잠시잠간이에요. 있다가 사라져버려요. ‘아하 내가 꿈을 꿨어. 내가 뭘 잘못 생각한 거야. 그래 맞아. 내가 착각한 거야’라고 흔들고 스스로 없애버리고 공중에 흩날려 버리고 없는 걸로 치지만 다시 어느 날 순간적으로 갑자기 ‘내가 죽는다면? 안 돼. 내가 죽으면 지옥이야. 안 돼. 이러면 안 돼. 나는 주님을 믿어야지’라고 그런 어떤 느낌, 이게 바로 무의식 세계, 실재계.


실재계 뜻은 나의 허락 없이 그리고 나의 예상과 기대를 빗나가게 벌어지고 나에게 영향을 주는 그 무엇, 그걸 실제계라 하는 겁니다. 상징계는 ‘하나님 이렇게 열심히 하면 복 주지요. 내가 기도하면 기도 안 할 때보다 더 하나님이 사랑해주지요’ 예상과 기대인데 이것이 전혀 없이 나로 하여금 내 밑바닥부터 흔들어버리고 나로 하여금 종잡을 수 없게.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런 것, 이게 바로 실재계라는 겁니다. 인간에겐 종교를 떠나서 무종교든 기독교나 관계없이 모든 인간에게는 모두 다 무의식적으로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실재계는 항상 상징계라는 벽 뒤에 숨어 있다가 돌발적으로 우발적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에 이 벽을 뚫고 벽을 넘어서 들어가려고 하면 벽이 자꾸 뒤로 이동해서 절대로 인간의 힘으로 실재계에 침투하는 것을 실제계가 허락하지 않아요.


하이데거의 존재이론 있지요. 존재가 튀어나올 때만 알 수 있고, 존재자는 존재의 원천은 항상 감춰져 있어요. 루터신학에서는 이걸 하나님은 감춰지신 것. 이사야 45장에 나오지요. 그것도 그냥 숨어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숨어있는 하나님. 아무리 찾으려고 해서 찾아지지 않아서 포기했는데 포기하니까 쳐들어오는 거예요. 다시 ‘드디어 꼬투리 잡았다’ 하고 쳐들어가니까 다시 멀어지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실재계에 이런 게 많아요. 순진한 교인들이 교회 옵니다. 목사가 말합니다. 십일조를 안 했을 경우에 주어졌던 저주의 사례들, 십일조를 떼어먹었을 때 패가망신한 자들의 사례를 쭉 이야기하지요. 이것 듣고 십일조 안 한다 하는 것은 보통 강단이 센 사람 아닙니다. 만약에 이것 듣고도 십일조 안 한다면 목사는 다음주에 더 센 걸 들고 오죠. ‘이래도 안 내놔’ 하는 식으로. 성경 말씀 정도가 아닙니다. 실제 사례.


그래서 십일조를 내니까 목사가 이 설교를 철회하고 당분간 안 했지요. 교인들 속에 상징계가 남아 있지요. 상징계 아시겠지요. 나라는 욕망을 자제시키는 어떤 다른 외부의 권위적인 말씀이라든지 법칙, 원칙, 윤리, 도덕 이런 걸 말하지요.


십일조를 쭉 하다가 ‘만약에 안 해버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는 금지된 것을 욕망한다. 나는 타 넘어봤어요. 미군부대에 보면, ‘접근하면 발포한다’ 했죠. 무서워서 안 가잖아요. 타 넘어봐? 보통 타 넘게 되면 초콜릿 하나 주고 보냅니다. 발포 안 합니다. 와서 ‘다음에 넘지 말아요’ 하고 준다고.


십일조를 안 해버리면 과연 목사님이 말한 그런 저주가 주어질까 시험을 해보는 거예요. 시험해볼 때 넘으니까 애가 성적이 오르고, 사업이 잘 되고, 교회가 부흥되고, 가출했던 남편도 돌아오고 만사가 형통하더란 말이에요. 그러면 이 사람은 넘었어요, 안 넘었어요? 안 넘었어요. 십일조 벽이 그 사람이 넘을 줄 알고 후퇴해버린 거예요.


이 전체 이야기하는 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선악이에요. 선악의 논리에 의하면 악이 선을 아무리 침투해도 선은 악이 침투한 그 범위에서 어느 날 벌써 저만치 후퇴해 있어요. 여러분, 길 가다가 떠있는 달을 잡으려고 한 적이 있습니까? 달을 잡으려고 백날 설쳐도 달은 먼저 앞장서서 아무리 가도 약 올리듯이 있지요. 멀리 가지도 않아요. 쫓아가면 맨 그 자리에 있다고. 저 산 넘으면 달이 있겠지 해서 산 넘어 가보세요. 산 넘어 산이지.


그처럼 인간의 선은 항상 악이 침범하지 못하는 여유를 두고 멀찍이 선은 추구하는 대상으로만 악을 악으로 드러내는 대상으로만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나쁜 놈들은 반복해서 내가 죄인이라 하니까 어느 정도 죄인인가를 반복해서 시험을 해본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강호순이라든지. 근데 뭐든지 자꾸 해보면 악이 안 돼요. 시시해서 못해요. 보통 오십 대 아주머니들이 나는 가정을 버리고 연극 보러 다니고 자기 취미 생활하잖아요. 한 육 개월만 해보세요. 세공 다듬고 뭘 만들고. 재미없어 못해. 뭐든지 반복하면 흥미체감의 법칙에 의해서 갈수록 흥미가 뚝 떨어져요.


처음에 초신자 나와서 교회에서 임명장 금박으로 해서 권찰한다고 할 때는 진짜 눈물 막 나지요. 한 삼 개월만 해보세요. ‘바빠서 못하겠습니다.’ 반납해버린다고. 재미 하나도 없어. 여리고 성 정복한다고 백날 해봐도 여리고 성 정복 안 했을 때가 재미있지, 정복하고 나면 재미 하나도 없어요. 남자들이 여자 차지해놓고 버리는 이유가 뭡니까? 중고잖아요. 신품이 쎘는데. 재미 하나도 없어요. 돌아눕지요.


더 센 놈으로 자극을 줘야 그때 잠자는 자극이 또 깨어나죠. 음식 맛도 그렇고, 취미도 그렇고 심지어 신학 작업도. ‘함 봐라. 오늘 하나님 뜻 다 안다.’ 백날 해봐라 뭐 있는지. ‘나는 나다.’ 이걸로 끝나는 거예요. 결국 남은 것은 마지막에 거울이 있고 신학을 열심히 한 초췌한 자기 얼굴만 보고 ‘네가 나다. 여기까지 왔나?’ ‘여기까지 왔다.’ ‘너 뭐 보이나?’ ‘신학하고 있는 나만 보이네.’ ‘끝. 헤어지자.’ 예수를 개코로 믿었어요? 예수 믿는 나를 믿었지. 마지막 남는 것은 이거라니까.


역시 교회는 돈이지 신앙이 중요한 게 아니구나. 그래서 목회 삼십 년 하고 터득한 게 교회는 돈이다. 예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 믿는 척 해야 돈이 생기지. 하나님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 믿는 척 해야 순진한 교인들이 돈 갖고 온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하나님 믿는 척 해야 된다.


그러나 우리끼리는 안다. 우리 선수끼리는 안다. 목사들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 없고, 추기경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 없고 다만 돈 많은 장로나 돈 많은 교인들만 좋아한다는 그것. 그거는 목회 초자는 몰라요. 적어도 이십 년 정도해야 나처럼 이십 년 해야 이 진리를 알지. 오늘 천기의 비밀을 누설했다. 안 되는데. 이거는 마치 마술사가 마술의 비법을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무의식에서 문제점이 나와요. 문제점이 4페이지 제일 위에 있습니다. 제가 그냥 안 읽고 넘어가는 것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무지무지 어려워요. 이것 설명한다고 귀한 시간 다 보낼 수 없어서 대충 알아듣게만 이야기하겠어요. 4페이지에 그게 뭐냐 하면,


사람은 존재하면 반드시 이름이 있어요. 이름이 있다는 말은 이름에 해당되는 존재가 있지요. 하나님께서 뭐라 했습니까? 어떻게 구원받으라 했습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라. 이 말은 누가 계시다? 그 이름에 일치되는 주님이 계신다 말이죠. 주님이 계시고, 주님이 하신 일이 있고, 하신 분을 내가 넘기고서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거예요. 로마서 10장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럼 주의 이름이 있는 것 보니까 주님이 계시잖아요. 우리한테 이름이 있지요. 우리 이름은 아담이죠. 아담은 누가 졌습니까? 하나님이 아담 지어놓으면 이 아담인 이상은 아담의 운명을 벗어납니까, 못 벗어납니까? 못 벗어나게 돼있어요. 왜냐하면 이름을 지으신 분이 운명을 이름에 함축시켜서 이름에 담아놨기 때문에 아무리해도 아담적인 성질을 벗어나지 못해요.


그러면 우리 이름은 각자 이근호 있지만 결국 로마서 5장에 보면 아담이고, 아담의 속성이 담기는 거예요. ‘제 이름은 아담이 아닌데 아담이라 합니까’라고 저한테 따진다면 이렇게 답변하고 싶어요. 축구선수 이근호하고 저하고 같습니까? 전에 인터넷 ‘이근호’ 치면 몇 개 나왔는데 요새 ‘이근호’ 치면 축구선수 다 나와 버려서 내건 없어. 센 놈이 왔어.


그러면 그 사람 운명하고, 내 운명 같지 않지요. ‘이름을 잘 지으라고요?’ 그건 사기꾼이에요. 이름 같다고 운명 같은 게 아닙니다. 이름은 하나님이 지어준 아담 속에 포함돼있어요. 그런데 아담 속에서 나온 이름이 있어요. 이게 마지막 아담, 예수님이죠. 따라서 예수님을 보려면 어디 속에 들어가야 보입니까? ‘아담’이란 이름의 진수 속에 들어가 줘야 왜 예수님께서는 따로 나와서 하나님께서 왜 마지막 아담과 옛날 아담을 구분했는가 이유를 알 수 있죠.


그래서 옛 아담이 누굴 믿는다? 새로운 아담,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데. 이 아담의 운명을 한 마디로 한 자로 하면 ‘죄’의 운명이고, 여기서 나온 예수님의 운명은 ‘의’의 운명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쉬운 게 아닙니다. 어떻게 아담이 죄의 운명이 되고,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죄에서 의가 나옵니까? 이거는 말이 안 되지요.


연탄이 하얗게 되는 방법은 뭡니까? 다 타버리면 되죠. 그러나 그 재질은 하잖아요. 그것 하고는 안 되고, 죄에서 의가 되는 방법은 한 방법밖에 없습니다. 죄를 끝장내면 ‘넌 죄야, 죄야. 이 마이크야, 마이크야’ 하고 손가락질 하는 이게 의에요. 오늘 강의 끝났네. 죄를 죄라고 지적할 수 있는 그 관계를 가지고 의라고 합니다. 동의 안 하는 듯한.


사람이 자기가 착하다고 의인 되는 게 아니고, 성경에 보면 죄를 용서하는 행위 있잖아요. ‘너 죄인이야?’ ‘맞습니다.’ ‘내가 용서해 줄게.’ 그 용서하는 행위를 가지고 그게 의란 말이죠. 우리는 자꾸 소유개념으로 생각해서 ‘나 의인이에요’ 만날 의를 가지려고 하는데 가지는 게 아니고, 그냥 죄인으로 있어도 ‘내가 씻어줄게’ 그 씻어주는 것이 그게 의가 되는 거예요. 그걸 ‘관계개념’이라고 합니다.


관계개념이란 말이 어려우니까 쉽게 합시다. 삼촌이 조카한테 언제 삼촌 됩니까? 언제가 아니잖아요. 태어날 때부터 삼촌이잖아요. 제 [피]라는 책에 나오죠. 자기는 남편하고 결혼했지 형수 되려고 결혼 안 했는데, 결혼하고 보니까 어떤 남자가 와서 ‘형수님’ 이런다고. ‘나 너한테 형수 되려고 결혼한 것 아닌데. 아저씨 누굽니까?’ ‘우리 형수님 되십니다.’ ‘어, 예상 밖인데.’ ‘하여튼 되십니다.’ ‘누군데?’ ‘남편 동생 되거든요.’ ‘아, 남편하고 결혼하니까 줄줄이 따라 나왔구나.’


그처럼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우리가 ‘너 죄인이야’ 할 때 ‘알았어요. 의인 될게요’라고 할 게 아니라 죄인이라고 지적하는 그 행위 속에 의인 되게 하는 행위도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의 이름은 의의 이름이고 우리 이름은 죄의 이름인데 이 죄인을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의인 되게 하신다고,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은 죄를 묻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용서하는 그 자체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심이라. 사도 바울이 자칭 의인 중에 의인이었습니다. 율법을 다 지킨 사람이고, 자기가 율법 지키기 시합에서 그랑프리 탄 사람이었어요. 따라올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 같은 아담끼리 비교할 때 그런데 여기에 낯선 아담, 새로운 아담이 들어오니까 뭔 죄를 지은 게 아니라 자체가 바로 죄였다. 왜? 그분이 의니까. 이쪽은 죄가 돼줘야 돼요.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선악과 속에서 선과 악이 아니라 선악과 따먹었다는 자체가 죄가 되고, 선악과 상관없는 게 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힘으로 자기 선악과 지식을 토해낼 수 없습니다. 우린 뭘 해도 자기 반성하게 돼있어요. 이게 아담의 속성이니까. ‘잘했을까, 못 했을까?’ 만날 생각하는 게 그건데.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말씀으로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의 자기 증식을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했던 예수님의 원칙이 발동이 돼버리면 그까짓 것 이런 나의 판단, 나의 자책 이런 게 문제도 안 돼요.


탕자가 돈을 날렸다는 사실이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한테 문제가 됩니까? 안 되지요. ‘기다렸다 이놈아’ 이렇게 되지 아버지가 영접하는 자체 속에 걔가 과거에 귀신하고 놀아나고 돈 날린 그것은 그 안에서 전부다 없어져버려요. 해소돼버렸다 이 말이죠.


그런데 품에 안지 않은 형은 따지는 거예요. ‘저놈은 돈 날린 놈. 난 착실한 형. 저놈한테는 간음죄가 있고 나는 없고. 저놈은 소고기 먹고 나는 수입산 고기 먹고.’ 만날 따지는 거예요. 왜냐? 아버지 품에 안긴 증식이 없기 때문에 그냥 자기 증식이죠. 아담의 자기 증식만 획책할 뿐이죠. 교회 와서도 자기 자랑하고. 죄인이 아무리 키워봐야 죄만 더 커질 뿐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걸 가름하느냐 그건 아직까지 이야기할 단계 아니기 때문에 다음에 이야기하고 계속 진도 나가봅시다. 하나하나 논리의 고리를 따져보는 거예요. 그냥 믿습니다 할 게 아니라 따져보는데.


여기 무의식 세계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이름인데, 이름은 하나로 귀결되는데, 무의식에서는 이름이 둘 돼버렸어요. 하나는 연약한, 자제력 결핍. ‘내가 저 사람을 용서해야 될 텐데. 용서해야 돼, 용서해야 돼’ 하고 있는데 딱 얼굴 보니까 금방 주먹이 나오더라. ‘너는 교회 나온 지 벌써 삼십 년 믿은 사람이 성경 말씀에 용서하라고 했는데 자제력 잃고 쳤느냐?’ ‘글쎄 내 마음은 용서가 굴뚝같지.’ 이거 로마서 7장입니다. ‘보니 성질나더라.’ 


술 먹고 늦게 들어올 때 ‘천사 같은 내가 참아야지. 내가 교회 권사인데 참아야지’ 하다가 남편 낯짝을 보고 ‘또 처먹었나’ 이러죠. 그래서 문제점이 뭐냐 하면, 나라는 인간이 둘로, 두 개 이름으로 나눠지는 것, 어느 쪽이야? 신체야, 마음이 어느 쪽이야? 이걸 결합할 수 있는 재주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어린아이는 마음은 동일시되지만 실제적으론 일치되지 않는 결핍성이 남아있는 이상은 둘 중에 어느 것이 인간인지를 모를뿐더러 더욱 나쁜 것은 유리한 쪽으로 급히 도망을 친다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4페이지 위에서 세 번째 줄에. [‘이름’이란 자신을 지시하고 자신을 대표하고 자신을 외부에 알리게 된다. 신체가 자아의 자제력을 무시하고 방출하면서 현실화시키는 식으로 자신을 알리게 되고 또한 그러한 자신의 행동을 차후에 변명을 늘어놓는 주인공으로서도 또 다른 자신을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둘 중에 어느 쪽이야? ‘지킬과 하이드’처럼 괴물 같은 나와 점잖 빼는 나, 둘 중에 어느 쪽이야?


[이처럼 오직 나는 하나의 유일한 의미로만 존재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말썽꾸리기 나와 뒤치다꺼리하는 나, 이처럼 두 개의 이름이 같은 존재를 표현하는데 필요하다.] 이걸 플라톤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추상적으로 더 완전한 것을 하늘에 두고 감각적인 것을 땅에 두어서 이 감각적인 것을 날마다 자기를 치고 자기를 절제하고 점점 순화시킴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진선미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인격도야 하죠.


이걸 계단식으로 이야기한 사람이 누구죠? [천로역정] 문제는 한 칸 쉬어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도철학에서는 이래 봅니다. 인간성이 나쁜 것은, 맹자 엄마가 교육시킬 때 세 번 이사했지요. 요새 엄마한테 비교도 안 돼. 열댓 번도 하는데. 인간이 인간성 하는 것은 자기의 인격도야로 안 되더라. 그럼 뭐가 필요한가? 환경이 중요하더라. 환경에 의해서 순수한 피가 유지 되어야 된다고 해서 나온 유명한 제도가 인도의 카스트 제도입니다. 질 좋은 놈은 질 좋은 놈끼리 놀아야지 좋은 질이 더 유지가 되고, 나쁜 놈은 포기해버려.


그래서 모순이 뭐냐 하면, 절대로 너는 나쁜 친구하고 놀지 마라. 그럼 그 친구는 뭐가 돼버립니까? 아까 처음에 나온 모순, ‘그레데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다’ 하고 똑같은 거예요. 자기를 집어넣어보니까 전부다 모순이죠. ‘너 나쁜 친구와 놀면 안 된데이.’ 그러면 그 나쁜 친구는 손해 보잖아요. 그 나쁜 친구 입장에서는 자기보다 질 나쁜 놈과 하기 때문에 그 질이 어떻게 돼요? 생각해보세요. 그 친구가 질이 나아져야 계속 친구를 따라잡을 하나의 목표가 되는데 그 친구가 질 낮은 나와 사귀어버리면 친구는 더 이상 나하고 사귈 목표점이 안 되잖아요. 그 책임 누가 집니까? 하여튼 사람들은 앞뒤도 안 가리고 무조건 자기만 좋으면 진리라. 조금만 생각해보면 되는데.


유교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그 사람의 발걸음을 통해서 인격을 안다’ 하는데 그때 우리가 제일 궁금한 게 뭐냐? 발걸음 제대로 된 모델케이스 한번 보자. 보니까 안동 권세가의 집이 나오는 거예요. 이게 우편배달부 바쁜데 피해줍니다. 애가 아픈데 이래 와 되겠습니까?     얼마나 사람이 이기주의인지. 아까 이야기한 상징계 속에 타협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의 대체물로. 아까 나온 게 뭡니까? 신체는 안 그런데 배는 꼬르륵 하면서도 배가 안 고픈 척 해야 선비답다 하잖아요. 둘 중에 누구냐 말이죠.


아는 목사님이 주일날 설교 잘 하기 위해서 아침마다 금식하는데 점심 때 곱빼기를 먹어요. 에너지 분량에선 전혀 차등이 없어. 오히려 더 많이 먹어요. 그래서 이것도 인간을 표현하는데 핑계거리만 하나 더 늘어났구나. 이리 피하면 이리 피하고 저리 치면 이리 피하는, 아주 얍삽하기 짝이 없는, 인간으로선 부족하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6페이지, 인간이란 그 다음에 뭐라 돼있습니까? [자리로서 말한다.] 인간이 처음 출발할 때 인간의 자리가 있어요. 그 자리를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자리’에요. 신학자들은 하나님 형상을 이걸 소유용이 되는 어떤 사물로 봐요. 사물이라든지 어떤 독립된 하나의 덩어리로 봤지요. 하나님의 형상에서 뭔가 솟아나온다는 걸 몰랐던 거예요. 제가 아까 첫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뭐가 솟아나옵니까? 힘이 나오지요. 우리가 신약성경에 보면 그 힘은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힘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 자리를 만드는 속에서 뭐가 솟아나온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고 주를 사랑하는 자는 복을 받는다’는 그 바탕자리가 하나님 형상 자리입니다. 인간은 인간을 위해서 만든 게 아니에요. 인간이 그냥 아무렇게 다 만든 게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분의 면면을 보이기 위해서 피조물로 만들어진 거예요.


아까 A라는 보편자 있지요. 거기서 N이라는 생산물이 나왔지요. 생산물은 아무리 생산돼도 A라는 처음의 그걸 못 벗어나요.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죽었잖아요. 그러면 아담의 아들도 뭐 해야 돼요? 죽어야 되죠.


도킨스라는 사람이 [이기적 유전자]에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인간이라는 것은 DNA를 표현하는 표현력에 불과하다. DNA를 받쳐주는 기계에 불과하다. DNA가 자아 증식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하나의 마당놀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세포 속에는 DNA가 들어있으니까. 그 DNA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다 보니까 인간이 된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만약에 맞는다고 한다면, DNA를 교체하면 우리가 무슨 인간된다? 다른 인간되죠. 그리고 자기가 되고 싶은 어떤 사람이 있다. 노래를 못하는데 조용필이 잘한다. 노래를 잘하는 조용필이 갖고 있는 DNA를 두뇌에서 끄집어내서 이식하면 졸지에 뭐가 돼요? 제2의 조용필이 되는 거예요. 그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 사람 되고 싶다 한다면, 예를 들어서 저 사람이 갖고 있는 기억 있잖아요. 공부한 것을 따라서 책 보면 자기 눈만 나빠져요. 어떻게 하느냐? 잠잘 때 흡입하는 거예요. 그 기억되는 부분, 단기 기억하는 해마부분을 떼어서 자기한테 집어넣고 빈 자리에다 자기 걸 집어넣으면 졸지에 자기 엄마 보고 ‘아주머니 누구세요’ 이렇게 돼요.


만약에 누가 예수를 잘 믿는다. 걱정하지 마세요. 예수 잘 믿는 그것을 공장에서 실험실에서 대량생산해서 집어넣으면 다 예수 잘 믿어요. 이게 방금 마지막 이야기한 건 뭐냐 하면, 사람을 통한 증식은 주님께서 허용한 적이 없습니다. 죽여 놓고 증식하는 거예요. 죽음 안에 증식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죽음의 증식, 피의 증식, 아담의 죽음의 증식. 이거는 선악적으로 유지되는 증식이고, 예수님의 피는 자체가 생명나무입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는 것이 새로운 증식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든 인간의 피든 죽음에서 나오게 되는데, 그 죽음을 교재 3번에서 두 자로 ‘폭력’이라 했습니다. 5페이지에 중간에 보면, 시편 50편 22절 다같이 읽어볼까요.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여기 목양교회 보면 성경 말씀 붙여놨잖아요. 좋은 말씀인데 저거 떼어버리고 시편 50편 22절 붙여버리면 기겁할 거예요. ‘찢으리라’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찢으리라.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여기 속에 대입하면 노태우, 전두환 집어넣으면 되겠지요. 그리고 교회는 안 다니는데 내가 좋아하는 여자 친구, 그 뒤에 뭐가 나온다? 찢으리라. 그러면 교회에 안 다니는 여자 친구 왜 사귑니까? ‘찢으리라’ 이것 이야기하려고. 잘 사귀겠다?? 춤추면서 찢으리라.


결국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찢어지게 돼있지요. 같이 살겠습니까? 찢으리란데. 그런데도 사는 것 보면 뭘 잊어버렸다? 한쪽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렸죠. 둘 다 찢으리라. 하나님을 믿는다, 교회 다닌다 하면서도 말씀을 버리면 추상적인 하나님만 남지 성경말씀, 하나님의 폭력, 하나님의 죽음, 본인부터 그것을 ‘우리 집에 들어오지 마세요. 싫습니다’ 하고 거부해버린다 말이죠. 그래놓고도 살았다 하는데 성경에서 그걸 뭐라고 합니까? 그걸 죽음. 죽음 없이는 하나님 일을 안 해요.


그 폭력 가운데 가장 대규모로 일어난 폭력이 뭐냐 하면, 출애굽 당시에 애굽 나라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의 자기 집 맏아들이 돌아가셨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애굽 나라 교도소 갇혀있는 죄수 그 사람의 친정집에 잠자고 있는 맏아들이 주의 사자가 애굽 나라를 휩쓸 때 그 시간에 돌아가셨어요.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사자가 떴다 하면 산 자가 있다, 없다? 모든 사람이 다 죽은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나오죠.


예수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다 죽은 것이다. 이것 안 믿겠다고 극구 달려들어요. 아~ 혼났습니다. 지난 몇 년간. 아직도 마찬가지지만. 이것 못 믿겠다는 거예요. 예수 믿는데 왜 우리가 죽은 자냐 말이죠. 갈라디아서 2장 20절 가지고 예수 믿는데 왜 죽은 자냐 하는 거예요. ‘예수 믿기 때문에 죽은 자입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예수 안 믿었으면 우리는 산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 앞에 설 때 십자가 설 때 우리는 이미 죽은 자요,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내가 사는 게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아무리 이야기해줘도 못 알아들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 앞에 서는 게 아니고 항상 타인 앞에 자아와 타인과 비교하기 때문에 ‘너 살았다면 나도 같이 흉내 낼 수 있다’ 만날 가능성을 시도하기 때문에 죽은 자라고 생각 안 드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내가 죽었다’는 말보다 더 기쁜 소식이 또 있을까요? ‘죽은 놈 뭐 만지기’라고 차마 불알이란 말은 못 하겠습니다만.


죽은 자인데 탕자한테 뭘 요구합니까? 십일조, 이웃사랑 그거 요구 안 합니다. 다만 죽은 자라는 것을 표시 내는 하나의 지침이죠. 누가 십일조 내면서 자기 의와 신을 겸해서 할 자가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안식일 지킨다고요? 안식일 지킬 것 같으면 교회만 나온다고 안식일 지키는 게 아니에요. 개울에 빠진 개를 건져내야 돼요. 건져내면 뭐 해요. 가축병원 보내면 안 돼요. 자기가 살려내야 돼요. 교회 가기 바쁜데 죽은 개까지 살려내야 되고 열한 시 넘으면 어떻게 하려고. 안 되지요. 남 살려내기는커녕 안 죽이면 천만다행이죠. 가다가 온갖 욕을 해서 ‘빨리 가란 말이야’ 남 다 죽여 놓고.


죽은 자한테 기대를 걸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아예 보내지도 않았습니다. 죽은 자로 간주하고 보냈어요. 병든 자가 자기가 집에서 치료할 것 같으면 미쳤다고 병원 옵니까. 자기가 집에서 주사 맞고 다 하지. 병든 자가 치료가 안 되니까 의사한테 오는 것 아닙니까. 의사가 환자 앞에 놓고, ‘당신 왜 아파’ 이러면 안 되죠. ‘아파요.’ ‘아파요? 내가 고쳐줄게요.’ 이게 의사지. ‘내가 아프지 말라 했잖아. 왜 아파.’ 이건 의사가 할 말이 아닙니다. ‘아이고, 장사 잘 되는구먼’ 이러고 고쳐주면 되죠.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는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죄인을 불러서 구원하신다 했어요. 이 죄의 개념은 오직 예수님만 알고 있는 죄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한테는 예수님의 죄의 개념이 증식이 안 됐어. 제자들 속에 증식이 되어야 예수님이 용서한 것처럼 제자들을 통해서 용서한 것도 용서가 되게 돼있어요. 요한복음 19장에 나오죠. “내가 너희를 사한 것처럼 너희도 내 이름으로 사하는”데 다만 조건이 있어. 신부 이름이 아니고 목사 이름이 아니고 바로 주의 이름으로 한다 이 말이죠.


어떤 사람은 ‘주의 이름’으로 한다니까 하나의 문장인 줄 알고 있는데 주의 이름은 그분, 예수님이죠. ‘주의 이름으로 산다’는 말은 뭐는 빠진다? ‘절대로 내 능력으로 살 수 없나이다’ 하는 표시를 상대방에게 이야기하란 말이죠. ‘내 기도로 당신을 못 낫게 합니다’ 하는 표시를 내면서 기도하라 이 말이죠. 우리가 누구를 기도할 때 ‘절대로 내 기도의 능력으로 당신을 낫게 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포함시켜줘야 그래야 뒤에 붙는 게 무슨 말입니까? ‘이 모든 기도를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주님께 맡기는 일임하는 거예요. 이것 하나 설명하는데 길게 해야 돼요. 혼탁스러워서.


자리 이야기했어요. 여기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자리가 있고, 이 자리는 형상으로써 장차 해야 될 복과 저주의 기준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복과 저주라 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에 보면, 저주가 다른 말로 하면 죽음입니다. 죽음을 요한계시록에서는 둘로 나눕니다. 하나는 첫째 죽음, 둘째 죽음. 삶에 대해서 첫째 부활, 둘째 부활.


그렇다면 이 형상 자리가 인간은 뭘 보여주느냐 하면, 죽음을 보여주고 그 다음에 생명이 머무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 앞에 뭐가 있습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요인이 있죠. 그게 무슨 나무? 선악과. 그 앞에 생명나무. 생명나무, 선악과 이것이 동산 한 복판에 둠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한 복판에 있는 의미와 자기 존재 의미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이 의미 속에 함께 이해하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생명나무는 보호할지언정 하나님은 인간은 보호한다, 보호 안 한다? 보호 안 한다. ‘나가.’ 아이가 오디오를 깼다. 보통 부모 같으면 오디오는 사면 되고. ‘너 안 다쳤나?’ 이렇게 묻는 게 정상이잖아요. 그런데 희한한 오디오 광인 아버지 같으면 ‘아이고 불쌍한 내 오디오. 나가 이놈아’ 그럴 때 듣는 자식 기분 나쁘겠습니까. 그 기분 나쁜 것을 한 자로 ‘죄’에요.


제가 사실 첫째 시간에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걸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은 다윗 중심으로 일함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내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이 수용을 해달라는 거예요. 뭐 믿음 좋습니다, 신앙 좋습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안 믿고, 하나님 내 중심으로 일하심을 인정하신다면 저는 최고 믿음으로 쳐주겠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내 중심으로 일 안 한다는 것. 예수님 중심으로 일 한다는 것. 왜? 나는 나에 속한 게 아니고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마지막 아담, 예수님 중심으로 일하지 내 중심으로 일하지 않아요. 이것 하나만 되신다면 앞으로 여러분들 남은 인생은 축복, 축복입니다. 이걸 두 자로 하면, ‘선종’입니다. 정말 선종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은 내 중심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내 중심이 아니다. 개죽음 당하든 독사에 물려 죽든 하여튼 그래도 하나님은 일 자알 하셨습니다. 다만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뭐다?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의미가 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를 더불어 함께 이 세상에 인간으로 만들어낸 겁니다.


이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합쳐서 이걸 안에 다 포함돼있는 이 상징의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과 저주의 기준으로써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죽음, 저주요, 예수 믿는 자는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원래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자리가 하나님의 형상 자리죠. 생명나무와 축복 자리가. 인간이 범죄 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난 뒤에 생명나무만 남고 선악과 퍼지죠.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형상이 바탕까지 관여하게 되죠. 이 전체 범주가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의미를 보여주는 그런 장으로 넓혀졌습니다. 생명 되시는 하나님의 형상의 자리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 지상까지 내려오셔야 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의 형상의 고유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인간을 따라서 내려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가 들어가려고 한다 말이죠. 이게 바로 우상 아닙니까. 인간의 조작된 신, 자기 닮은 자기와 유사한 신을 만들어놓고, ‘나는 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선하시다. 나는 자비를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비, 사랑이 많을 걸. 나는 전능할 걸 원하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만날 인간들이 이런 걸 만들어놓고 막상 쳐들어갈 뿐이고, 주님은 나올 뿐이고, 여기서 충돌이 일어날 뿐이고, 충돌이 뭡니까? 십자가로 이어지고 이 십자가는 구원하는 하나님의 모든 지혜는 그 안에 다 들어있고.



아무래도 소리 때문에 10분 쉬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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