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뜻

언어의 질서

아빠와 함께 2013. 3. 16. 14:36

대전130228b-마13장28절(언어의 질서)37강- 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13장24절,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비유가 또 나오지요. 앞에 나오는 비유는 씨 뿌리는 비유 보통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지난번에 설명을 해드렸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라 하는 것은 4종류의 밭이라고 돼 있는데 사실은 4종류의 밭이 사람이 4종류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 보기에 예수님이 갖고 있던 예수님이 다이아몬드라면 예수님이 하신 일이 다이아몬드인데 4가지 서로 다른 측면을 두고 이야기 한다 이리 이야기했지요.

 

만약에 4면이 앞, 뒤 있다면 예수님이 하는 조명등이라면 이쪽에서 보면 빨간색으로 보이고 저 쪽에서 보면 파란색도 보이고 어떻게 일하면 노란색도 되고, 주황색도 되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주신 말씀, 말씀이 무슨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마귀가 등장해서 사람들의 말씀을 빼먹는 현상이 보이게 됩니다. 또 말씀이 작용하게 되면 복음을 들을 때 잠시 기뻤으나 환난당할 때 넘어지는 그런 작용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마귀가 와서 말씀을 빼앗아가는 그것도 예수님의 말씀이 이 땅에서 반드시 해내는 일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또 씨를 뿌리게 되면 어떤 사람들은 좋다고 하다가 나중에 환난당할 때는 주의 일을 벌일지라도 반드시 주를 버려야만 돼요. 그게 주님을 버리고 환난일어 났다고 나는 주님 싫어, 라는 현상이 일어나 줄 때, 그것도 예수님이 씨를 뿌리는 취지 중에 포함이 됐다 이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좋다고 하다가 갑자기 돈의 세상사는 유혹과 세상의 즐거움에 빠져버리니까 나중에는 예수님 잊어버리고 예수님 누구지? 이런 식으로 복음이고 뭐고 다 버렸을 때, 그 현상도 필히 일어나 줘야 되는 거예요. 그것도 예수님께서 말씀을 뿌릴 때, 농부가 씨를 뿌릴 때, 반드시 그런 것도 일어나도록 예정된 겁니다. 예정된 결과가 일어나줘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 씨를 뿌리니까 무럭, 무럭 자라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다는 것도 이런 열매도 맺어줘야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될 때, 열매를 맺든, 마귀에게 속아 넘어가든, 환난 때문에 배반을 하든, 이 모든 것이 다 누구 안에 들어있는 이야기다?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위적인 인간의 자기 결단 같은 것은 여기서 싹 다 빠지지요. 다 빠지는 거예요. 나쁜 밭에서 회개해서 좋은 밭 되려하는 시도는 전부 다 엉터리해석입니다. 성립이 안 되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올 때, 좋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필히 이런 예수님을 배반하고 마귀한테 쫓아가는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 줄 때 ‘과연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었구나!’ 어떤 사람이 복음 듣고 좋아하다가 환난 당했다고 넘어질 때, 그것조차도 주께서  ‘아, 말씀하신대로 이미 예언하신대로 그 갈 길을 그런 현상이 일어나야만 하는군요.‘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30배, 60배, 100배 열매 맺을 때 이것은 우리의 열매가 아니고 누구의 열매다? “바로 씨 자체의 열매입니다.” 고백할 수 있는 자만이 정말로 옥토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60배 기대한 것이 아니고 60배건, 100배건 간에 내가 나한테 적용할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나를 그냥 마구잡이로 옥토 되게 하셔서 열매 맺게 하시는 모든 그 능력은 어디에 합류돼 있습니까? 씨 속에 포함된 능력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니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자유권에 속하는 겁니다. 그것이 지난 시간에는 씨 뿌리는 비유였습니다. 이런 씨 뿌리는 비유를 세상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지요. 왜냐 하면 세상 사람들은 자기로부터 이해가 시작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건 어려운 건 아닌데 여러분들에게 하나의 교양으로 상식으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걸 딸기라고 합니다. 호박씨, 깨강정 제 얘기 한 번 들어보세요. 이게 왜 딸기 입니까? 딸기, 깨강정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사물의 질서’라고 해요. 이걸 가지의 ‘언어의 질서’라고 합니다. 이걸 1:1로 지칭할 때, 대응선, 대응이 된다, 하는 겁니다. 깨강정은 결코 딸기가 아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문제되는 거예요. 딸기, 깨강정, 물병 이것은 언어의 질서가 돼 가지고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인간에게서 나오는 겁니다. 영어로는 스트로우베리, 딸기 이것은 우리나라의 언어질서에 의해서 딸기지, 미국가면 딸기가 무슨 소리인지 모른다 말이지요. 영어로 해야 되니까. 어쨌든 인간에게서 나온 거죠.

 

그러면 깨강정, 딸기 이것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이것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자연에서 나오지요. 아무리 생물학이 발달하고 DNA가 발달해도 그 딸기 하나를 만들어낼 수가 없어요. 있는 딸기를 개선하고 개량하고 번성하면 되는데, 애초에 딸기가 없는데 단지 딸기 하나 만들어볼까? 언어가 먼저 ‘딸기’라고 만들어 놓고 딸기에 합당한 딸기 제품을 만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묻습니다. 사물의 질서가 갑이에요? 언어의 질서가 갑이에요? 사물의 질서가 갑이지요. 언어의 질서는  뒤따라가는 을이지요.  왜냐 하면, 인간 몸 자체가 사물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 여기서 어렵습니다.

 

인간들은 인간의 질서가 인간보고 인간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니까 딸기나, 물병이나, 깨강정이나 이런 거 사실은 사물의 질서인데, 이것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우리가 안 만들었지요. 이건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만들었잖아요. 사물의 질서는 하나님이 만들었는데 뒤늦게 인간이 뒤늦게 같은 사물의 일종인 인간이 나와서 여기다가 이름을 붙인 겁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데리고 하나님이 만든 것에 이름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름을 지으라고 하는 그것은 이제는 다 너희에게 소속됐다는 말이 아니고 이름 지으라고 하달한 너마져 이름 짓는 것에 대해서 책임을 묻겠다는 거예요.

 

교무실에 있는 선생님이 학급에 학생 수가 현재 몇 명인지 알아보라고 반장보고 이야기했어요. 학생이 몇 명인지 반장보고 이야기 했어요. 출석안한 학생을 불러오라는 말도 아니고 32명인데 30명이 왔다고 해서 애 둘을 보태서 두 명 더 채우라는 말도 아니고 있는 애 숫자만 세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선생님, 지금 학급에 30명입니다.”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그 30명이 되는 모든 학생들이 다 반장소유입니까?  반장소유 아닙니까? 아니지요. 언어의 질서를 가지고 인간에게만 언어의 질서를 주신 것은 니 인간만큼은 일반사물들은 있음 그 자체, 하나님께서 참새를 기르신 그 자체, 들풀을 만드신 그 자체로 됐지만, 인간에게는 언어를 통해서 하실 일이 있어요. 그게 뭐냐, 그 나라 의를 이뤄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그 나라 의를 위해서 아담이 만들어졌는데 그 나라 의를 이룰 때, 그러면 지금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에서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것이 뭐냐 하면, 청지기 정신, 잘 맡아 관리 잘해서 환경보호하고 이게 우리 인간이 해야 될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서 사는 책임과 하나님이 주신 자연물들 잘 관리해서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잘 기도해주고 하는 생태문제 그런 거 하잖아요. 이산화탄소가 너무 많아가지고 온난화 때문에 생태가 깨졌다 하지 않습니까? 그건 과학을 몰라서 하는 소리에요. 지구의 공전에 의하면 10만년 주기로 빙하기는 오게 돼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백날 환경보호 안 해도 공전하면 축이 달라져서, 축이 달라지는 이유는 지구는 1초에 10만Km씩 태양의 주위를 돌게(공전) 돼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구와 태양 사이는 뭐가 있느냐 하면, 중력장에 연결되기 때문에 고무판에 무거운 물건을 두 개 둔것이 되는 거 예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입니다.

 

태양에 있는 변화가 지구의 변화를 주게 돼 있어요. 에이스 침대가 아니거든요. 한 쪽에서 누르면 저쪽에서는 물렁하게 돼 있어요. 물침대처럼.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조차도 어디에 속한다? 사물의 질서 속에 포함돼 있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이 특별히 보는 것은 뭐냐 하면, 언어의 질서를 주는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2장에 보면, 인간에게 특별히 뭐 주지요? 선악과를 집어넣고 뭐라 합니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언어적인 명령을 주잖아요. 언어적인 명령.

 

언어적인 명령을 줄 때, 모든 딸기는 있으면 돼요. 참새나 독수리나 그냥 있으면 돼요. 전봇대에 있으면 되는데, 인간은 있는 것 더하기, 선악과를 안 따먹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 말귀를 알아먹고 안 따먹어야 되는데 만약에 안 따먹었을 때에 그 나라 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바로 아까 생태학을 하고 환경보호하고, 이것이 그 나라의 의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뭐냐 하면, ‘마지막 아담과의 관계’입니다.

 

마지막 아담이 누구냐 하면, 로마서 5장에 보면 누구지요? 예수님! 예수님을 증거 하는 임무를 누가 맡았다? 첫 번째 아담이 받은 거예요. 그럼 명령을 위반했잖아요. 그럼 명령을 위반했으면 첫 번째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의 관계가 인간이 그 관계를 깨드렸다고 해서 관계가 끊어질까요? 안 끊어져요. 이미 인간 쪽에서 위반할 줄 알고 명령을 내린 겁니다. 율법을 더한 것은 위반하기 위해서예요. 왜? 예수 그리스도를 위반하는 측면에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도록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위반한 쪽에서 예수님을 증거 하려면 우리는 저주받아야 되고 심판을 마땅히 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위반 안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증거 한다면 우리는 주님과 우리사이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은 위반했어요? 위반 안 했어요? 위반 했지요. 거기에 누가 개입했습니까? 악마가 개입했지요. 악마가 개입해서 위반케 했잖아요. 그걸 누가 허락했습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셨잖아요. 왜냐 하면,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했거든요. 예수님을 증거 하는, 미리 앞당겨서 온, 예수님의 흔적으로서, 인간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리고 그 사이에는 무슨 질서? 언어의 질서. 언어의 질서는 명령이라 했지요. 선악과 따 막지 말라, 했다 말이지요. 위반한 거예요. 위반한 입장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은 뭐냐 하면, 그냥 예수님이 아니고 십자가, 죽으심. 그래서 제가 낮에 설교할 때, 하나님은 줄곧 죽어있었다. 이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 있어요. 제가 주일날 아침에 설교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이 하나님이 존재하는 증거는 뭐냐 하면, 자기가 이스라엘 있음으로 하나님은 살아있다 했지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그렇게 생각했던 자들 중에 최고가 누구냐 하면, 사도바울이었지요. 자기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으니까. 우리 조상이 이스라엘이라면 그걸로 이미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왜냐? 이스라엘은 누가 만들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는 혈족 민족이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직접 만들었기 때문에 살아있다고 했는데, 자기가 예수님 만나고 보니까 그것은 바로 우상이었습니다. 왜냐,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 땅에서 볼 때 죽어있는 하나님이에요.

 

우리는 우리가 안 죽고 살아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꾸 살아있는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실상은 우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진짜 하나님의 관계는 죽어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때만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거예요. 그러니까 완전히 사도바울과 모든 이스라엘은 지가 생각한 신을 만들어 놓고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우겼던 거예요. 이름을 여호와라 붙여놓고. 어느 질서? 언어의 질서.

 

그러니까 구약전체가 말씀이잖아요. 구약에서 좋은 말 다 뽑았어요. 여호와, 주의 이름, 오늘날 기독교신학과 똑같아요. 다 뽑아서 돈 벌이로 자기 몸에다 다 입혀놓고 주의 용어, 이런 말을 하기 때문에 기도하기 때문에 주께서는 지금 살아계시고 우리도 살아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 잘해 봅시다. 라고 나온 거예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누가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누구한테 당했지요? 그렇게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그렇게 거추장스럽게 했던 그들에게 진짜 하나님이 죽어버렸으니까 누가 죽였어요? 살아있다고 여긴 것들이 예수님을 죽여 버렸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말합니다. 누가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는 스스로 알아서 죽는 거예요. 그러면 살아있는 인간들 앞에는 진짜 하나님은 죽어있는 것이고 죽어있는 인간들 앞에는 하나님은 비로소 살아있는 거예요.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되고, 둘 중에 하나는 살아나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복음과 기독교차이가 나는 겁니다.

 

기독교의 모든 역사, 어제 퇴임했던 그 교황부터 해서 모든 역사는 예수님이 누구냐를 이야기하지 않아요. 교회가 무엇이냐를 이야기해요. 그 사람들 교회정치꾼들입니다. 교회는 이 시장바닥에서 교회가 되려면 항상 돈이 유입돼야 돼요. 돈 없이는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돈 없이는 아무것도 이게 안 되는 거예요. 돈이 있어야 교회가 되고 교회가 있어야 그 나라 의를 증거 해도 증거 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 자신들이 살아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까 태양과 지구처럼 중력으로 엮어져 있어서 하나의 고무판처럼, 같은 침대처럼 울렁울렁 쓰고 있잖아요.

 

예수님이 죽어있다면 예수님의 진짜 성령 받은 종은 이 땅에서 어떻게 해요? 산 자라고 보는 게 아니고 나는 이미 죽었어요. 라는 고백으로서 주님과 같이 활동하게 되는 겁니다. 날마다 죽음에 넘기게 되면 비로소 죽음에 넘기 울 때, 그 속에서 죽음이란 것이 마련돼야 예수님이 살아 역사하는 겁니다.

 

사도행전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보잖아요. 봤을 때, 앉은뱅이는 자기가 자기를 보기 때문에 오해한 게, 지금 나는 엄연히 살아있는데, 문제가 앉은뱅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라고 이야기하지요. 내가 지금 살아있는데 앉은뱅이가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내가 앉은뱅이지만 살아있는 나를 더 살리기 위해서 돈을 주세요, 라고 할 때 베드로와 요한이 아주 섭섭한 이야기를 했어요. 뭐냐 하면, 돈 없습니다. 이렇게 했어요. 금과 은은 내게 없다 했어요. 그리고 당신의 아픈 자리는 당신 자리가 아니고 이미 당신은 죽은 자인데, 죽은 자리를 활용하시는 주님의 자리입니다.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주께서 당신에게 무슨 일을 일으킨 겁니다. 그래서 앉은뱅이가 일어난 겁니다. 이건 앉은뱅이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앉은뱅이가 자기 일어날 것을 예상해서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봤다면, 아마 베드로와 요한은 돈을 줬을 거예요. 왜냐 하면 기어이 그 사람을 죽은 자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평소에 이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 라는 것을 기어이 비켜가야 돼요. 그걸 안 비켜가게 되면 자기 살아있음을 토대로 한 신을 불러오기 때문에 그 신은 100%가짜입니다.

 

주께서 하는 일은 항상 우리를 계속해서 무시하는 겁니다. 그 삭개오 보세요. 삭개오도 무시했잖아요. 구원받은 사람치고 무시 안당한 사람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한다는 말하기 전에 구원하면 오죽 좋아요. 배신3번이나 한다고 해 놓고 그 다음에 찾아오잖아요. 진작 찾아오지. 베드로 니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닭 운다는 주의 말씀이 더 중요한 거예요. 닭 운다는 주님의 언어의 질서가 개떡 같은 인간의 언어질서와 합쳐져 버리면 인간의 개떡 같은 언어의 질서는 그냥 개떡이라는 걸 드러내시면서 그 아무것도 아닌 그런 인간을 통해서 주께서 말씀의 질서를 실현시키는 방법, 그게 바로 비유입니다.

 

사람의 언어는 분명히 언어를 질서라 했습니다. 이거는 딸기고, 코끼리고, 코스모스 했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자기가 이것을 주님의 것이 아니고 자기가 건방지게 이걸 점령하려고 했어요. 내가 멍멍이, 송아지라고 이름 붙였다고 자기가 지시한 것처럼 전부 다 자기 것으로 여긴 겁니다. 처음에 아담이 이름을 다 짓지만, 이미 만들어진 것에 이름을 지었잖아요. 그런데 아담이 하나 이름 못 지은 게 있어요. 왜?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뭐냐 하면, 여자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에요. 그러면 아담이 모든 사물의 주도권을 잡을 때, 장차 오실 예수님의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서 대표자로 했지만, 왜냐 하면, 예수님이 모든 사물을 쥐고 있으니까. 그걸 앞당겨 보여주기 위해서 아담에게 그런 지시를 한 거예요. 그때 여자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여자가 없었지요. 그럼 여자는 이름 다 짓고 난 뒤에 왜 태어난 거예요? 그럼 여자는 어느 쪽에 속합니까? 여자는 남자 쪽에 속한 것이 아니고 바깥에서 주어진 것이 여자지요. 그래서 남자는 여자들을 볼 때 신기하게 보는 거예요. 이상하다? 왜 저렇게 생겼을까? 같은 사람인데.

 

무슨 말인가 하면, 나는 사람이잖아요. 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잘 들어보세요. 그럼 내가 사람이라면 사람이라 하는 모든 원형의 모습이 이미 나한테 다 포함돼 있지요. 왜, 나는 사람이니까. 내가 만약에 어떤 사람의 요소가 없다면 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나는 사람이라고 누가 이야기할 때는 어떤 사람이 등장하든 전부 다 공통된 요소가 나한테 이미 있으니까 나는 언어의 질서이고 나는 사람이라는 자신만만하게 살아나갈 수 있다 말이지요. 그런데 여자가 태어났다. 저거는 분명히 내가 알고 있는 내가 끄집어낼 수 있는 사람의 보편적인 그것과는 이탈되어 있어요. 내게 있는 게 없고 내게 없는 게 있잖아요. 잠언서에 나옵니다. 여자는 누구한테서 왔다? 여호와로부터 온 거예요. 여자는 여호와로부터 온 거예요. 이 여자는 그냥 여자가 아니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의 지목할 수 있는 여자일 경우에 이걸 ‘아내’라고 합니다. 아내일 경우에. 왜냐 하면, 이 여자와 아내의 차이점은 아내는 그냥 온 것이 아니고 같이 살려고 온 거거든요.

 

우리가 아는 진짜 남자라면 어떤 여자가 살러 왔을 때는 “어이! 저리 가! 저리 가! 따라 오지 마! 따라 오지 마!” 이래야 돼요. 왜?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나만 있으면 돼요. 나만 있으면 되는데 안가는 기라, 계속. “저기요.” “저리 가!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한다. 저리 가!” 여호와께서 보냈거든요.“ ”저리 가! 여호와께서 너 같은 존재를 보낸 적 없어.“ 왜? 나는 아담이니까. 결국 여자가 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데 남자를 남자로 하여금 예수님과 연관시키는데 중도 개입으로서 여자가 들어가야 한다 말이지요. 여자가 들어가서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고 남자는 남자라고 큰 소리 치다가 결국은 남자가 아니고 나는 아담이다. 아담이란 뜻이 뭡니까? 나는 그냥 흙에 불과하고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그런 요인으로서 여자가 와서 그리스도 속에 들어가는 관계 속에서 정상적인 관계가 틀어져야 되고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비로소 진짜 인간, 예수님을 증거 하는 진짜 인간들은 그 때는 남자나, 여자나 하는 것이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의 신부로서만 해야 될 장차 남아있는 주님의 시나리오를 위해서 처음부터 그렇게 나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남자 여자 하는 것은 이것은 우리가 지상에 있을 때만 유효하고 나중에 부활의 나라가 뭡니까? 남자 여자 없어요. 중성이 돼요. 천사와 같이 되어서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가는 거예요. 왜 이런 것이 어렵게 느껴지는가 하면, 이게 언어의 질서라는 이것에 이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생각안하고 하나님께서 말로서 우리보고 예수 믿어라, “주 예수를 믿어라.” 7자지요. 이 문장이 떨어진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10장에 보면,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는 자는 그 다음에 뭡니까? 구원을 얻으리라. “아휴, 문장 쉽네.” 왜, 언어의 질서니까. 이거야 유치원 아이들도 외울 수 있지 않습니까? 나는 언어의 질서다. 언어의 질서에 주님께서 구원 받을 것을 주셨기 때문에 기존의 언어의 질서에 이것을 받아들이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요 말은 언어의 질서는 주님이 갖고 있거든요. 주님께서 주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언어의 질서를 다 완전히 부셔버리는 겁니다. 우리의 언어의 질서가 무너진다는 말은 모든 율법이 주어진 것은 너는 뭐하기 위해서? 심판 받아도 싸다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언어의 질서 십계명을 준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예를 들어서 탐내지 마라, 할 때 어느 선까지 ‘주여, 탐내지 않았습니다.’하는 순간 탐내지 마라의 숙제가 저 만큼 새롭게 더 많이 생겨버린 거예요. 예수를 믿어라 할 때, ‘저, 예수를 믿습니다.’ 할 때 주님께서 “예수를 믿는다 했나?” “네, 믿는다 했습니다.” “믿는다는 상태를 어떤 상태를 가지고 믿는다고 하는가? 니가 설명해 봐라.” 하면 난감한 거예요. “그냥 믿습니다. 주님이여!” “설명하라니까. 니 언어의 질서 갖고 있잖아. 설명해보라.” “아, 지적으로서는 지식으로 확보하고 감정적으로는 뜨겁고 그리고 의지적으로는 전도 많이 하고 이거 세 개 합하면 믿는 겁니다.” 그럼 주께서 “뜨거우면 그 온도는 몇 도지? 어느 정도? 아침 9시에 뜨겁드나? 오후 4시30분에 뜨겁드나? 어느 게 뜨거워?” “오후4시30분에 뜨거운 거 같으면, 오후4시는 뜨거운 거 아니네.” 이리 나온다니까요.

 

우리는 우리의 언어의 질서에서 다 수용이 안돼요. 그러니까 마태복음13장에 있는 모든 비유는 우리보고 지키라는 거예요? 주님이 지킨다는 거예요? 주님이 지킨다는 말이에요. 주님이 지켜서 이 지킨 것이 우리에게 들어올 때는 그 다음에 우리에게 어떤 것인가? ‘나는 마태복음 13장 읽어도 우리는 이걸 지킨 적이 없습니다. 일체 없습니다.’ 그런 고백을 합니다. 일체 우리는 이 말씀을 애초부터 지킬 수도 없고 지킬 힘도 없고 지킬 재주와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말씀은 주께서 말씀하시고 누가 회수해 간다? 주께서 회수해 가는데 그냥 말씀만 회수해 가는 게 아니고 못 지킵니다. 하는 우리의 모가지를 쥐고 멱살을 쥐고 못 지키는 것으로 소문난 우리를 저는 자, 병든 자, 이런 인간들 네거리에 나아가서 아무나 굴려 걸려가지고 가다보니까 그게 혼인잔치라.

 

못 지키는 인간 카니까 주의 혼인잔치에 천국에 우리가 참여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면류관 반납하고 주께서 이렇게 혼자서 당기는 일도 다 주께서 지키신 일입니다. 그런데 일반 교인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지키라, 예수님의 비유를 지키라고 하는 겁니다. 지키라는 명령 중에 하나를 봅시다.

 

마태복음13장 29절,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주인이 가로되 그 다음에 무슨 명령이 떨어졌지요? 가만 두라, 를 우리가 지킬 수 있습니까? 교회의 이단하나 들어왔다. 가만 둘 수 있습니까? 그래, 가만 두어라 저거 뽑다가 알곡까지 뽑는다, 할 때 주께서 묻습니다. “니가 알곡이 뭐고 가라지가 뭔지 니 아나?” 우리는 “내가 알곡이고요. 제 말에 반대하는 자는 가라지입니다.” 누구 맘대로. “내가 보기에는 니가 가라지인데.”

 

어느 이단치고 자기가 가라지라는 이단 없습니다. 오직 베드로와 사도들만 “우리는 가라지였습니다.” 고백하는 거예요. 성령을 받아야 예수님만 알곡이고, 우리는 몽땅 다 가라지일 뿐입니다. 알곡과 가라지 씨 뿌리는 모든 권한은 주님에게 해당되는 겁니다. 주님이 알아서 알곡 가라지를 하는 거예요. 가만 두어라고 명령하지만, 이 명령을 하는 이유는, 애초부터 명령하지 말지 왜 명령하는가, 명령을 해줘야 우리의 언어의 질서가 깨어지기 때문에 스스로 분열해야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는 맹탕이 아니거든요.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한다 말이지요. 지키려고 하는 것이 바리새인이고. 그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 누구입니까? 사도바울이고. 사도 바울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모든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심판아래 두게 하려하심이라,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아까 사물의 질서, 언어의 질서 다시 해 봅시다. 딸기, 물병, 깨강정, 이렇게 할 때 이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이게 우리 인간에게서 나왔습니다. 사물의 질서 이런 딸기가 있지요. 코끼리도 있고 해바라기도 있습니다. 인간이 딸기라고 지칭할 때 오, 딸기 있네. 저거 딸기라. 하지를 않게 돼 있어요. 창세기2장에서는 그냥 지시했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뭐로 바뀌는가 하면, 이미 3장으로 바뀐 입장이에요. 3장에서 바뀌게 되면 이 언어의 질서는 아주 곱게 아주 객관적으로 그렇게 다가서지를 않아요. 그냥 다가서는 것이 아니고 내가 딸기라고 하면서 나에게 어떤 이익이 있을까? 내 생명을 얻는데 있어서 어떤 이익이 있을까? 그만큼 자기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 이 말입니다. 이마에 땀 흘리고 있고. 모든 게 정상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정상이 아닌 것에 대해서 저 딸기나 깨강정이나 물병은 나한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물의 질서 앞에 누가 등장하는가? 예수님이 등장했잖아요. 예수님이 인간으로 등장했잖아요. 인간은 뭐예요? 인간은 유기체로 가지고 있었던 게 어디에 속해요? 사물에 속하지요. 예수여! 또는 랍비여! 스승이여! 라고 제자들은 예수님보고 호칭했습니다. 그냥 호칭한 게 아니지요. 스승이기 때문에 스승이라고 호칭한다. 아니지요. 뭐라고 봅니까? 내가 저 예수를 스승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늘나라 갔을 때 우리 중에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앉느냐, 그렇게 하지요. 너무 어른이에요. 그래서 주께서 이 사이에 집어넣을 때 뭐냐 하면, 어린아이를 집어넣습니다. 어린아이를 집어넣는 이유는 어린아이 배후에 누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있어요. 나는 너희들을 기어이 어린아이처럼 만들어서 집어넣겠다는 말씀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가질 못할 것이다. 그 비슷한 이야기가 있지요.

 

마태복음에 보면 이 어린아이에게 실족케 하는 것은, 요새 같으면 차라리 어린아이를 성폭행하거나 어린아이를 죽여라 이리 이야기 할 건데, 주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범죄방법을 알려 줍니다. 어린아이에다가 맷돌을 목에다 감아서 “애들아, 잠깐 잠수 배워줄까” 해서 잠수복을 입힌 게 아니고 맷돌을 목에 매가지고 통영앞바다에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어린아이 어떻게 됩니까? 수영 배우려하다 잠수 배우려하다 영원히 바다 밑에서 죽겠지요. 애를 그런 식으로 잡는 거다. 어떤 게 잡는 것인가 하면, 누가 우리 가운데 높으냐 하는 그 것은 애를 그런 식으로 바다에 수장시키는 범죄와 같은 질의 범죄를 행한 것이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말은 예수님의 언어의 질서에서 나왔지요. 그 말을 한 것에 대해서 나중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정하잖아요. 나 저 사람 모른다, 했지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정할 때, 뭐도 같이 부정해 버린 거예요? 어린아이를 실족케 하는 것은 통영앞바다에다가 연자 맷돌해서 깊은 바다에 집어넣는 거와 동일하다, 라는 그 말도 나는 이제 안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내 언어질서에다가 못 들어오게 만들겠습니다. 예수 당신의 모든 발언과 어떤 생각과 어떤 모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도 내 언어질서에 근처도 못 오게 하는 내뱉겠습니다.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합니다. 이 말과 똑같은 겁니다. 그동안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을 어디까지 들었어요? 듣기는 들었는데 마음 밭에는 안 들어오고 자기 마음 밭에는 자기 언어질서가 따로 있는 거예요. 자꾸 언어질서 하니까 어려운데 이걸 쉽게 합시다.

 

인간의 언어질서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언어질서에 자아가 있거든요. 나를 어떻게 천국 보낼 것이냐, 모든 방법론이 나와 있다 말이지요. 그러면 신이 이야기했던 공자, 맹자이야기 했던 괜찮은 것은 다 집어넣어서 자기를 구원하려한다 말이지요. 그렇다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한 것은 결국 뭡니까? 나는 내 식대로 살아서 구원 받겠다. 이런 뜻입니다. 4자로 이야기하면, ‘살고 보자.’예요. 살고 보자. 미국에 어떤 흑인이 성령이 충만한지 악령이 충만한지 모르겠습니다만, 몰래 국경선 넘어서 북한에 들어가서 너무 많이 맞아서 죽다가 살아났잖아요. 맞을 때, 예수고 하나님이고 다 어디 있어요. 뭡니까? 살고보자예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걸려들면 살고보자예요. 과속으로 경찰에 걸렸을 때에 “아이고, 헐은 거 끊어 주세요.” 그런다 말이지요. 헐은 거 끊어 달라는 게 성경 어디에 나오지요? 성경에 안 나오지요. 그 말은 뭐냐, 성경에 안 나와도 이미 우리 속에 나름대로의 평소에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아야 돼! 라는 자기만의 고유 언어질서가 있지요. 그 경찰은 누가 보낸 거예요. 아침에 빡세게 기도해도 할 수 없이 걸린 게 누가 보낸 겁니까? 앞 차는 과속해도 그냥 지나갔어요. 그런데 하필 오줌 누고 지퍼 올리면서 걸린 기라, 모든 게 범사에 협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 우리의 본색이 유감없이 튀어나온 거예요. 우리가 가라지에요. 우리가.

 

우리는 가라지인 걸 모르로 알곡 하는데, 가라지였다 말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언어질서가 따로 있기 때문에 주님의 언어질서는 먹히지를 않는 거예요. 먹히지 않는다는 말은 필요 없다는 거예요. 죽던, 살던 나는 모르겠다는 말이에요. 바나바는 살리되, 예수는 뭐하라? 죽여 버려라. 매일같이 일어나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어떤 돈 많은 유력한 사람을 만나길 원하지, 예수 복음 들고 오는 것은 만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유력한 자를 안 만나고 있으니까 그렇지, 옆자리에 앉아있으면 나중에 하고 지금 같이 갈 수 있겠다, 합니다. 항상 우리는 주께서 데리고 가는 것은 이렇게 멱살 쥐고 온갖 못난 인간 다 겪게 만들어요. 왜? 그것이 오실 자의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에게 죄가 들어오도록 허락하신 것은 오실 자가 점잖은 분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죽는 모습으로 왜 꼭 죽는 모습으로 와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아담으로 하여금 죄 짓게 만든 겁니다. 그게 에베소서 1장4절에 나옵니다. 포인트만 잡게 되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전에 지요. 그 다음 7절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우리가 그리스도 안이지요. 첫 째 시간에 안에는 뭐가 없다? 안에는 시간이 없는 거예요. 그럼 창세전에 하는 것은 예수 안에, 창세전에 같은 말입니다. 같은 말에 7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하다. 그 다음에 뭡니까? 그의 뭐로 말미암아? 피로 말미암아.

 

그러면 예수의 피는 묵시 안에서는 이미 거기서 확정된 사실이죠. 어쩌다 보니까 실수해서 예수님이 죽은 게 아니고 예수님께 사람들이 너무 화가 나서 욱하는 성질에서 예수님을 죽이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창세전에 피 아니면 피로만 주가 주되게 하신 아버지와 아들의 내 살과 내피를 마시라는 계약이 있었던 거예요. 신학자들이 이걸 모르는 거예요. 신학자들은 예수님을 존재로만 생각하는 거예요. 나중에 살다보니까 이 땅에 별일이라고 보는 거예요. 십자가 피가 창세전부터 확정된 사실을 그들은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 하겠다하는 거예요. 그건 지 나름대로 언어질서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십자가입니다. 창세전부터 지금까지 십자가예요.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이 새 언약 중심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믿는 것이 뭐냐 하면, 어리석은 것을 믿어야 돼요. 똑똑하면 안돼요. 우리는 어리석은 것을 믿는데, 어리석은 게 뭐라 했습니까? 어리석다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 어리석음입니까? 아이큐가 한 자리도 안 되는 걸압니까? 어떤 사건 앞에서만. 십자가 앞에서만 우리는 졸지에 뭐가 돼요? 정말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고백할 수밖에 없고 그 어리석은 자라는 그것이 태양과 지구에 같은 중력이라는 고무판에 같이 있으면 우리가 어리석었습니다. 하는 그 어리석음을 통해서 우리의 똑똑함이 아니고 누구의 지혜? 예수님의 지혜가 어리석음을 유발시키면서 나오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나, 어리석어!” 그게 주님보기에 똑똑한 거예요. “나, 죄인이야.”할 때 우리가 예수 안에서 의인되는 거예요. 그냥 의인이 아니고. “나, 죄인입니다.” 함으로 의인되는 게 아니고 “나는 죄인입니다.” 맞아요. 그게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입니다. 하는 유발하시게 하는 주님의 능력이 주님의 의라는 말입니다. 루터는 그 말을 표현을 못해서 누가 질문을 하니까 “우리는 죄인이고 우리는 의인이다.” 이리 했어요. 그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죄인인지 의인인지 둘 중에 하나하라. 하나의 존재에 두 가지의 술어가 나올 수가 없어요. 나는 의사다, 간호사다. 둘 중에 하나만 하라 말이지요. 가끔 의사하고 가끔 간호사하는 그런 뜻이 아니거든요. 나는 간호사 될 때도 나는 의사였다. 그건 말이 안돼요. 그건 양자 역학에서는 돼요. 파동이고 입자다. 그런데 양자역학은 아인슈타인이 양자 역학하는 것을 보고 그건 모른다는 소리는 안하고 이것밖에 할 줄 모른다. 이리 말해요. 이걸 안다는 것은 결국 모른다는 이야기가 돼요. 알갱이야? 파야? 어느 쪽이야? 파동자체야? 아니면 입자야? 이렇게 되지요. 그것이 지금으로선 인간의 한계 때문에 과학에서는 그것밖에 할 수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모호한 게 아니고 염소, 양. 성경에서 이런 거는 있어요. “누가 염소입니까?” 이렇게 묻는 것은 잘못 묻는 거예요. 누가 염소입니까? 하면 안 되고 “누가 염소이며, 양입니까?” 이렇게 질문 두 개 다를 집어줘야 돼요. 왜냐 하면, 누가 염소냐, 양이냐 할 때 답변은 예수님께서 정하신대로입니다. 이게 정답이거든요.

 

그러니까 누가 묻는 그 당사자가 이미 여기에 묻는 당사자도 염소, 양 중에 이미 포함이 됐는데, 자기 손에서 나온 그것이 자기를 멱살 쥐고 자기를 끌고 갈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외부에서 끌고 가야지, 내가 나를 끌고 가게 되면 이것은 하나도 안 끌고 간 게 돼요. 내 손이 내 멱살 쥔다고 끌립니까? 안 끌리지요. 발은 가만히 있는데. 안 되잖아요.

 

누가 염소입니까? 양입니까? 하는데, 예수님이 정하시고 정하신 방법은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가지고 정하거든요. 왜냐 하면, 갈라디아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내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하잖아요.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십자가할 때, 이 십자가를 염소가 이야기하는 십자가와 양이 이야기하는 십자가를 어떻게 구분하느냐 이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요한일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 속에 성령께서 알게 하신다는 거예요. 성령께서. 성령은 또 뭐예요? 성령은? 그러니까 계속해서 주님은 우리의 언어질서를 피해가 버려요. 성령님은 주님의 언어질서에 속했기 때문에 우리의 언어질서에 먹히지를 않아요. 주여~하는 것이 성령을 감화시킵니까? 쭈여! 하는 것이 성령을 감화시킵니까? 성령이 “이게 미쳤어. 내 앞에서 그런 소리하지 마라.” 왜? 쌍시옷 하는 쭈여! 하는 이런 언어질서에 성령님은 거기에 말려들지를 않습니다. 성령님은 주님의 말을 듣지, 우리 말 안 듣습니다.

 

성령님은 조사관입니다. 자고로 조사하러 오신 분이에요. “조사관님, 일하지 마시고 우리 식사같이 할까요?” 이러면 안돼요. 조사관보고 “다 치우고 우리 좋은 게 좋은 거 아닙니까? 우리 식사합시다.” 이리해서 봉투 줍니다. 성령한테 뇌물주고 하는 것은 순복음교회밖에 없어요. 성령은 누구말만 듣느냐 하면, 천사들 앞에서 예수님 말만 들어요. 조사하러 온 분은 우리를 책망할 뿐이에요. 의에 대해서 책망할 뿐이지, 우리는 회개만 하면 돼요. 회개만 하면 될 뿐이지, 성령하고 마치 식사같이 하고 어디 아는데 같이 갑시다. 이럴 필요 없다 이 말이지요. “그냥 우리는 또 다시 뭘 해도 죄밖에 나올 게 없습니다.” 고백을 성령이 책망하기 때문에 나온 결과물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어리석음에서 나왔습니다.” 이 말은 진짜 그 어리석음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진짜 지혜가 어리석던, 죄졌던, 죄 안 졌던지 상관없이 오직 구원은 너의 행동과 관계없이 니 속에서 그걸 유발시킨 십자가에서 나온 겁니다.

 

끝으로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삭개오가 구원받은 것이 4배나 토색한 것을 갚아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이 그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나만 있으면 안돼요. 나를 늘 질책하고 나무라고 아침에 눈뜨고 숨 쉬는 것까지 옆에서 주께서 주신 거라고 느껴지는 그 성령의 이어주심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언어질서에서 주님의 언어질서로 바꾸는 거예요. 그러니까 알곡과 가라지는 무엇이 알곡인지, 무엇이 가라지인지는 니가 회개하면 알곡이고, 회개 못하면 너는 가라지고. 그런 겁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니가 알아서 뽑지 마라, 이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에 우리 인간만 만드셨는 줄 알았는데 왠지 선악과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생명나무도 만들어 놓았고 난데없는 여자도 등장했습니다. 이 모든 배치가 우리 원하는, 우리 좋아라 하는 것이 아니고 배후에 예수님 좋아라고, 예수님 증거 하라고 있는 배치인 줄 아오니 항상 주님을 만날 때까지 예수님만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링크 :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3대전/SDV_1099.avi, Hit:6
 첨부파일 : 대전130228b-마13장28절(언어의 질서)37강- 이 근호 목사.hwp (81.0K), Down: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