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21b 울산목양교회 특강-구원, 그 이후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제가 이야기한 것은 뭐냐 하면, 성경에서 축복과 저주가 결정되는 것이 점 같은 나의 행동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누구의, 나는 하나의 점으로서 내 임의대로 내 마음대로 못하고 뭔가 떠밀고, 잡아당기고, 사용하시는 다른 힘의 논리에 의해서 다른 힘을 봐야 돼요.
충돌을 통해서 그것이 충돌+충돌+충돌이 종말까지 이어지지요. 종말에 도착해서 마지막의 기준이 뭐냐 하면,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받는다. 반대로 하면 주를 사랑하면 구원받는다. 복 받는다 같은 뜻 아닙니까. 이 종말의 기준이 충돌, 충돌 일으켜 온 것에 소급해서 여기다 의미를 주는 거예요. 아브라함부터 해서 나오잖아요.
의미를 주는 이 원칙을 하나님 입장의 구원 그 이후에 그대로 이 기술, 이 증식의 방식을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예를 들면, 아브라함에게 증식이 뭐냐? 아들이 둘 있지요. 이스마엘이 있고 한쪽은 이삭입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이 누가 복 받을 사람인가를 놓고 여기서 뭘 일으키죠? 충돌을 일으킵니다. 이삭에서 보면, 야곱과 에서에서 충돌을 일으키고. 야곱에서 보면, 요셉과 다른 여타의 아들들 간의 충돌을 일으키는데
여기서 충돌을 일으키게 하는 힘은 마지막 때에 주라는 분, 주의 이름이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면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받는 이런 원칙이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증식해 온 겁니다.
그럼 이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십자가 지시고 이 증식의 원리를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이렇게 될 때 여기서 우리가 꼭 알아야 될 건, 이스마엘, 에서, 요셉 말고 다른 형제들, 이런 사람들의 입장이 바로 우리 인간의 입장이란 말이죠. 하나님 앞에 배척받을 수밖에 없는 그 속성, 그 이야기가 우리 인간의 입장이 된단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의 입장을 증거한 이유가 뭐냐? 마지막 때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이유가, 우리 인간들 죄 때문에, 인간들 반발들 때문에 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려면, 반드시 인간은 어떤 마음을 갖고서 살아가느냐가 필히 알아줘야 ‘아, 이것 때문에 주께서 죽으셨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럴 경우에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를 포기하고 날 위해 죽으신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거죠. 우리 전체를 주님 앞에 넘겨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 자신이 가해자가 될 경우에 우리한테 피해 입은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죄성을 넘겨줄 수 있단 말이에요. 이걸 사랑이라 하는데
‘주님 저는 저를 사랑하지 않고 주를 사랑합니다. 나를 부인하고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사랑합니다’ 할 때 사랑할만한 이유를 본인이 알고 있어야 돼요. 자기가 어떤 인간인줄 모르고 부정해버리면 어떤 현상이 벌어나느냐 하면, ‘주여, 제가 주님 앞에 나를 낮춥니다. 낮추는 모습이 어때요? 괜찮지 않습니까? 저 사람 두 시간 낮췄는데 전 세 시간 낮췄습니다. 이 사람보다 훌륭하지 않습니까?’ 항상 낮추면서도 자기 자신의 가치를 낮추면서도 자기 자신을 포기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겸손하게 합니까? ‘주여, 오늘도 금식했습니다. 옆에 있는 세리는 금식도 안 하고. 오늘도 아까운 돈을 십일조로 드립니다. 저 세리를 십일조하는 꼬라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구제했습니다. 저 옆에 있는 세리는 구제도 안 합니다.’ 주님이 뭐라 했습니까? 네가 저주받을 놈이야. 네가 나를 힘들게 하는 인간이란 말이죠.
그래서 온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핑계고, 사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상하기 짝이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유지하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흉내를 내는 거예요. 하나님이 작용해야 될 걸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자기가 하나님처럼 자기가 하나님 되어서 자기를 치는 것, 이거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엄청나게 해왔던 겁니다.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엄청나게 해왔던 거거든요. 하나님의 일은 모방이나 흉내 내지 말아야 돼요. 이것은 자기 자신 배후에 악한 영이 있다는 것을
그러면 이제 2페이지부터 같이 봅시다. 2페이지는 뭐냐 하면, [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1페이지에서 이야기한 것은 뭐냐 하면, 완벽한 신학을 어떻게 구축하느냐? 1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 줄에 [일상 언어는 신뢰할 수 없는 자연성을 지니고 있기에 정확한 표현과 전달과 개념구성에 있어 신뢰도가 떨어진다.]
‘베들레헴’의 원어가 ‘떡집’이라고요? 그것 근거 없는 이야기에요. 부흥사가 한 소리가 다 퍼져버렸어요. 히브리 원어는 제한된 몇 개 안 되는 사물을 여러 개로 표현하다 보니까 오늘날같이 다양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할 단어가 제한돼있어요. 하나로 여러 개 써먹는다고. 그래서 원어를 따져서 뭘 나오는 그런 건 없습니다. 원어라 하는 것은 오직 뭐냐 하면, ‘차이성’, ‘변별성’으로 그 의미를 아는 것이지, 원어 자체에 무슨 뜻이냐는 그런 건 없어요.
‘너는 개다.’ 이걸 누구한테 이야기하면 화를 낸다고. 그런데 이게 화낼 게 없어요. 왜냐하면 ‘너는 개다’ 하면 ‘ㄴ, ㅓ, ㄴ, ㅡ, ㄴ, ㄱ, ㅐ, ㄷ, ㅏ’ 이것의 조합 아닙니까. 이게 왜 화가 나는데? 이게 왜 성질나는데? 남들이 이야기할 때 자기 머리 속에 있는(피질이라 하는데) 언어조합 속에 자기가 예상한 것이 들어올 때, ‘이런 게 들어오면 화낸다’가 구축돼있을 때 들어오면 화가 나게 돼있어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기분 나쁠 때 누가 좋은 소리해도 오해하고 기분 나빠요. 지금 자기 애가 성적이 올라져있다. 이웃집 아주머니가 말하기를 ‘아저씨는 걸을 때 신발을 질질 끄노’ 하면 내가 기분 나쁠 땐 한 마디 하죠. 그런데 애가 시험에 합격했는데 ‘아저씨는 신발 질질 끄노’ ‘아이고, 질질 끌어도 괜찮습니다, 그거.’ 이래 된다 이 말이죠.
어떤 심리학자가 조사를 해보니까 인간은 이성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감성에 의해서 조절한다 이래 돼있어요. 정확한 언어라는 것은 그때그때마다 감정이 다 다르기 때문에 ‘어’ 다르고 ‘아’ 다르다 하잖아요. ‘님’에서 점 하나 더 붙이면 ‘남’이 된다 했잖아요. 어느 시인이.
사람이 언어를 가지고 시비 건다는 것을 언어는 핑계에 불과한 겁니다. 그래서 언어연구 백날해도 성경을 풀어도 소용없고, 학자들은 언어는 하나의 신뢰도가 떨어지니까 그때그때마다 다 다르니까 이걸 하나의 ‘기호’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기호는 아주 냉철하고 냉정하니까. 그래서 프레게란 사람은 인공적인 언어, ‘기호’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어요. 이걸 언어실증주의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20세기 초에 들어와서 이런 틀이 나타난 거예요.
왜 기호로 하느냐 하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냐는, 여러분 ‘1+2=3’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도 말릴 수 없죠. 하나님 보고 ‘1+2=6’ 하면, ‘에이, 하나님 틀렸습니다’ 하죠. 사과 하나 있는데 사과 두 개 있다. 사과 몇 개입니까? 사과 세 개죠. 에디슨이란 사람이 어릴 때 사과+사과=사과 두 개 된다. 그래서 ‘1+1=2’다 학교에서 이것 배우고 난 뒤에 학교 안 갔습니다.
선생님에게 질문을 했어요. ‘선생님, 저게 왜 1+1=2가 됩니까?’ 답변해 달라 하는데 선생이 답변할 수가 없었어요. ‘사과 여기 하나 있거든.’ ‘예.’ ‘또 하나 있거든.’ ‘예.’ ‘그래서 두 개 되거든.’ ‘예. 그런데 1+1=2가 됩니까?’ ‘너 맞을래?’ 그때부터 학교 안 다녔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됐어요. 왜냐하면 사과는 실물이잖아요. 기호는 뭡니까? 논리 아닙니까. 논리하고 실물하고 붙이는 본드 있습니까? 그런 본드 시장에 팔아요? 안 팔잖아요.
원숭이 한 마리하고 원숭이 한 마리는 두 마리 된다 하잖아요. 그럼 원숭이한테 물어봤습니까? ‘원숭이야, 네 두 마리 맞나?’ 원숭이들은 꽤꽤객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주변이 어떤 일이 있든 간에 자기 논리화 시킨다 이 말입니다. 뭐든지 하나님이 되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래. 지 마음대로 한다니까.
지 마음대로 하는 건 좋아요. 그걸 두 자로 뭐라 합니까? 이걸 ‘진리’라 하니까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뭐냐? 하나님의 노림수, ‘너희들의 진리를 피해서’ 하니까 그게 복음은, 십자가는 어리석음이 되는 거예요.
수학박사가 구원 못 받은 거예요. 왜? 수학박사는 진리만 추구하는데 그 진리가 사실은 하늘나라에서 통용되는 진리는 아니다 이 말이죠. 인간의 수학은 이 지상에서 인간들끼리 통용되는 진리인데 그 인간끼리는 뭡니까? 자아가 납득이 되는 내가 이해되는 내가 납득되는 식의 종교, 교회, 교단, 내가 납득이 되는 선종, 이런 것.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서민들이 울었잖아요.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날 위해 울지 말고 네 딸들 위해 울어라” 주님을 천국의 사람으로 본 거예요. 예수님은 지옥의 심판주로 오셨단 말이죠. 사람들은 예수님께 잘해주면 천국 구원받는 줄 알았어요. 지옥과 관련된. 내가 예루살렘이 유황불, 멸망할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있는 위치가 멸망한다는 기대는 하지 않아요. 왜? 자기는 진리대로, 자기가 진리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진리라고 우기는 대로 살기 때문에. 강 씨가 사람 죽였잖아요. 왜 죽였냐니까 기분 나빠서 죽였다는 거예요. 자기는 무조건 옳은 거예요. 열 명 여자를 죽였던 간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이 말이죠. 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게 진리 아닙니까, 인간 보기에.
‘너 예수님 왜 안 믿는데?’ ‘내 마음이다 와.’ 얼마나 간단해요. 특히 교회 나오는 부모님들 제일 힘든 게 뭡니까? 자식들 교회 안 갈 때. ‘야야 아빠, 엄마 다 집산데 너 교회 안 가?’ ‘엄마, 내 마음이다.’ 에디슨이, ‘1+1이 왜 2 됩니까’ 설명 못하는 것처럼. ‘엄마, 나 오늘부터 이상하게 가기 싫다. 안 갈란다.’ ‘왜 안 가는데?’ ‘왜 안 가는 게 어딨어. 엄마는 오줌 안 나오는데 화장실 가나? 안 가잖아. 봐. 나도 교회 가기 싫은데 안 가지 뭐. 엄마는 왜 엄마 입장만 생각하노.’ 엄마가 할 말이 없어요. 그때는 협박에 들어가죠. 용돈 안 준다든지, 맛있는 것 안 해준다든지. 그러면 걔가 양보하죠. ‘한 달에 두 번은 가 줄게.’ 정치적 타협을 하는 거예요.
그것을 그냥 맹목적, 인간은 이러한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게 성경에서 자기 마음대로 아니고, 바로 아담의 속성이 나오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성경을 볼 때 인간의 자아중심을 철저하게 파헤쳐야 됩니다. 그 파헤치는 것을 우리가 하기 전에 힐베르트란 수학자가 잘 정리했어요.
그 전에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쟁이라 하니” 디도서 1장 12절에 나오니까 이 에피메니데스란 6세기의 철학자가 이야기한 것이, 철학자를 멱살 쥐고 하는 말이, 그럼 네가 한 말이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져볼 때 그쪽에서 할 말이 없단 말이죠.
왜냐하면 그레데의 어떤 선지자가 ‘그레데 사람은 항상 거짓말쟁이다’ 하니까 ‘그럼 너는 그레데 사람이냐, 아니냐?’ ‘그레데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 말한 그것이 거짓말이네.’ 거짓말이라 하면 지는 허망한 거고, 진짜라 하면 자기를 빼달라는 이야기고, 자기를 빼버리면 ‘모든 그레데 사람은 항상 거짓말’ 이것도 말 자체가 안 되고. 쓸데없는 소리했네, 결국.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한 거예요.
자기를 집어넣고 이야기해도 모순이고, 자기를 빼도 이야기해도 모순이 되는 겁니다. ‘나’가 여기 있고, ‘예수님’ 여기 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주시하는 이 ‘나’는 어디서 나온 거예요? ‘야야, 예수를 믿어라. 그래야 내가 기쁘지.’ 이 나하고, 이 나하고 둘로 분열됐죠. ‘나는 지금 착한 일 하고 있다’는 판정을 내가 하고 있어요. 이 괴물 어디서 나왔어요? 이거 왜 나왔는데?
기도 하면서 ‘주여, 지금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 30분 째, 기도하는 가운데 ‘기도 마치고 뭘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나 따로 있어요. 기도하는 나 따로 있고, 기도 잘하고 있는가를 판정하는 나 따로 있고, ‘예수님 기도하는데 안 도와주시고 뭐 합니까, 부탁입니다’ 부탁하는 나 따로 있고. 내가 예수님과 나를 지금 중매를 해줘요. 억지를 내고 있다고. 붙으라고. 내 안에 나 있다? 또 들어있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가버리면 예수님이 아는 성경해석 따로 나오지요, 내가 하는 해석 따로 나오지요. 예수님은 나에게 용서해 줄 준비가 돼있다. 나는 그러면 죄인이다. 죄인이 용서해 줄 주님에게 용서를 구하는 나는 뭐가 돼요? 의인 돼요. 그럼 나는 죄인이에요, 의인이에요? 둘 중에 하나만 고르면 어느 쪽이에요? 죄인 되어서 주님께 용서를 구하는 아주 착한 의인됐다고요.
그러니 이 모순점을 너무너무 어렵기 때문에 이걸 수학화 시켜서 간추려보자고 여기에 힐베르트란 사람이 주장했는데 넘어갑시다. 2페이지, 1931년 괴델이란 사람이 불완전성 정리한 걸 했어요. “수론을 무모순의 공리계로 형식화할 떼에는 결정불능 명제가 포함된다”란 문장인데 ‘수론’, ‘무모순’, ‘공리계’, ‘형식화’, ‘결정불능’, ‘명제’ 여섯 가지의 전문용어가 나오는데 이에 대한 설명을 해야 되는데 어렵게 되죠. 이럴 땐 그냥 넘어가요.
2페이지 중간에 밑에 보면 이렇게 돼있어요. [불완전성 정리의 논증은 아주 복잡하지만 중심이 되는 아이디어는 매우 단순하다. 괴델은 간단한 산술의 특징을 이용하여 “나는 증명될 수 없다”] 이걸 발견했어요. 수학으로.
‘내가 없다’가 아닙니다. 자꾸 증명될 수 없다면 사람들이 없다고 잘못 생각하는데 없다는 게 아니고, ‘나는 여기 있다는 것을 내가 증명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증명할 수 없으면서도 분명히 있잖아요. 그러면 증명할 수 없는 내가 날 증명한다는 것이 무모한 짓이 돼버리면 더 이상 내가 나에 대해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증명도 못하는 주제에 뭐 한다고 권리주장 하겠습니까?
권리주장 못하면 나를 구원하려고 하는 나의 모든 애씀과 노력이 그게 쓸모없더라도 우리는 수용을 해야 돼요, 말아야 돼요? 수용을 해야 되죠. 우리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입장이죠. ‘하나님 저를 구원해주소서.’하면, ‘네가 누군데?’ ‘저는 어릴 때부터 일을 했고.’ ‘그게 증명되나?’ ‘아, 안 되네요.’ ‘안 되면 입 다물고 있거라.’
그러면 여기서 내가 나를 증명할 수 없으면 결국 내가 주장하는 진리가 진리 됨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되지요. 그럼 내가 주장하는 개혁주의가 참된 신학이라 하는 걸 증명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왜 개혁주의 주장하는데요. 왜 교단 주장해요. 내가 다니는 교회는 훌륭한 교회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하지요. 왜 자기 교회 자랑해요.
‘내가 믿는 예수는 진짜 구세주다.’ 증명할 수 있습니까? 못 하지요. 왜 자꾸 증명하려고 설치는데. 앞에 뭘 제거해야 돼요? ‘나’를 제거해야죠. 제거하고 뒤에 나오는 걸 뭐로 바꾸어야 됩니까? 능동태가 아니고 수동태로 바꿔야죠. ‘믿어지는 주님은 나의 구세주입니다.’
‘내가 믿는다’ 하면 안 되죠. 내가 제거돼버리고 ‘나는 믿어졌다’ 뒤에 뭐로? ‘하나님의 선물’로. 주체가 나에서 예수님으로 바뀌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일하시는 중에 하나가 나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셨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이렇게 될 때 그 사람은 나의 증인이 아니고 예수의 증인이죠.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이런 인간들을 증식하고자 하는 겁니다.
아직 증식방법에 대해서 제가 이야기 안 했습니다. DNA만 이야기했지 DNA 같은 증식방법 이 성경 전체에 어떻게 적용되는 것은 다음, 다음 시간에 계속 나오니까 그때 하고 지금은 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내가 누구냐’에 대해서 집중해서 해봅시다.
한 가지 더 이야기한다면, ‘내가 기도해서 복을 받았다’ 하는 것을 내가 증명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당신, 복 받았지. 저주받았지’ 어떻게 알아요? 주체를 집어넣어야 되죠. 그럼 나를 제거하고 수동태로 ‘나는 복 받았다’ 누가 너에게 복을 주는데? ‘예수님께서 복을 주셨다.’
그렇다면 예수님 주신 복이 뭐냐? 조사해 보니까 성경의 예수님 복은 뭡니까? 예수님의 증인 되는 것. 왜냐하면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나의 증인 되리라.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항상 나를 제거한 그 관계가 복이 되잖아요. 그런데 ‘내가 복 받았다’ 해놓고 남의 것이 아닌 나의 재산이라든지, 남의 것이 아닌 나의 의로움이라든지, 나의 실력 이런 걸 가지고 복 받았다 하면 자기의 증인되죠. 복 받은 것이 아닌 결국 예수님의 복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결국 저주받은 거죠. 여전히 예수님의 증인 자리에 들어가지 못했으니까 자기 잘남을 통해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그러한 입장이기 때문에 예수님 입장에서 예수 안이 아닌 예수 바깥이라는 저주의 힘, 운동, 동력이 작용하는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신앙생활에 가장 위험한 경계가 있어요. 봉사하다가 갑자기 소유로 전환될 때 금방 넘어가요. ‘봉사합니다, 봉사합니다. 그저 섬깁니다, 섬깁니다.’ 하다가 갑자기 소유로 넘어가요. 내가 얼마나 섬기는가 정리해보자. 소유할 때는 반드시 ‘나’가 들어가야 소유가 적용되죠. 봉사개념은 뭡니까? 남이 크게 보이고 자기는 작게 보여야 되는데 남 섬긴다, 섬긴다 하다 갑자기 남은 작게 보이고 내가 크게 보이는 거예요.
주일학교 교사가 크리스마스 준비한다고 다른 교사들 나오지 않는데 혼자 퇴근해서 교회 남아서 열한 시까지 크리스마스 준비하다가 연극 준비한다고 ‘그래도 난 봉사해야 돼. 목사님 말씀대로 봉사해야 돼. 이런 봉사도 감사다’ 이렇게 하다가 십 개월, 이십 개월 돼서 그래도 같은 교사들 안 나오니까 갑자기 성잘 나잖아요. ‘난 이만큼 했는데.’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돈인데 하나님께 드려야지.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고 바치게 된 것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런 바칠 수 있는 기회도 없는 사람도 있는데 난 바칠 랍니다.’ 두 번째, ‘하나님, 이렇게 하게 되서 감사합니다.’ 세 번째, 가만 보니까 성질나잖아요. ‘난 올해 이만큼 헌금 냈는데 너 얼마 했노?’ 꼭 갑자기 소유로 바뀌어버려요.
목사도 마찬가지에요. ‘이 교회 섬기겠습니다. 이 개월 동안. 삼 개월 섬기겠습니다. 오 개월 섬기겠습니다.’ 장로님 와서 ‘그만 섬기고 나가시지요.’ ‘내가 이 교회 와서 교인들 얼마나 불어놨는데. 퇴직금 줘.’ 갑자기 내 소유가 돼버렸어요.
이러한 반칙을 용납하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전부다 묵계적으로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것. 그러면서도 진리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참 더러운 진리입니다. 이런 진리가 다 있습니까? 나는 절대로 날 증명될 수 없습니다. 자세한 건 괴델의 ‘불확정성 정리’ 집에 가서 보세요.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를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난 증명될 수 없다’ 이 말은 ‘나를 포기했다’는 말입니까? 아니죠. 하여튼 나는 있는데 건드리지 말란 이야기에요. 내가 날 증명 안 하더라도 날 건들리지 마라. 그러면 증명할 수 없으니까 결국 뭡니까? 하나의 침투 불가능한 점이 되죠.
‘침투 불가능성’ 이게 발전하면 바로 우울증, 자폐증. 하루 종일 자기만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오늘 행동을 잘했을까? 하나님께서 회개하라 했는데 나는 잘했을까, 못했을까? 하나의 점이죠. 점은 작으나 크나 특징은 면적도 없고 모양새도 없어요. 그냥 점일 뿐이에요. 점점 더 블랙홀이에요. 자기한테 완전히 빠져 들어가요.
심지어 어느 정도 되느냐 하면 나중에 주님께서 자기를 버렸다 할지라도 지옥에 가면서도 자기가 자기를 다독거려요. ‘주님은 널 버려도 내가 너를 지켜줄게. 우리 같이 지옥가자.’ 지가 자기한테 위로하느라 난리라. ‘힘내, 용기 내. 널 지켜줄 건 나밖에 없어. 걱정하지 마. 내가 함께 있으면 지옥에서도 넘어갈 거야’ 철저하게 하나의 점으로 귀착되는 겁니다.
점이 귀착되면 될 수록 관계가 철회되지요. 무슨 관계가 철회된다? 사랑의 관계가 철회되죠. 넘겨줄 사람이 점점 더 적어지는 거예요. 봉사할 사람도, 섬길 사람도 없어 점점 더 적어지니까 내가 점이 되니까 관계가 철회되니까 남도 점으로 보이죠. 이게 주체고 점이 객체라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점점 더 나에게 집착해버리면 예수님은 저만치 떨어진 하나의 객체가 되고 대상이 되죠. 대상이 되면 이 관계는 끊어졌지요.
이 점에서 나오는 폭발, 분노, 분개. ‘내 인생 왜 말아먹게 했습니까, 왜 날 힘들게 했습니까?’ 주님 뭐라고 합니까? ‘네 게 네 게 아닌데?’ ‘내 것이 아닌 걸 왜 날 만들었습니까? 내 인생을 왜 살게 하셨습니까?’ 이게 유명한 욥기에 나오죠. ‘주여, 저를 이 땅에 태어나서 햇빛을 보게 하십니까? 차라리 엄마 뱃속에서 새까맣게 유산되는 게 낫지 왜 태어나서 날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욥이 강력하게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지요. 철저한 주체가 되죠.
그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네 주변에 있는 것 누가 만들었지? 네가 거기에 대해서 아는가? 네가 점으로 보는 것들에 대해서 아는가?’ ‘모르겠습니다.’ ‘네가 염소새끼 낳을 때 봤나?’ ‘모르겠습니다.’ ‘네가 별자리, 북두칠성 만들 때 네가 붙여놨느냐?’ ‘아닙니다.’ 뭐든 모르겠데. ‘그렇다면 황무지에 비 오는 이유를 아느냐?’ ‘황무지에 비가 왜 오는데요?’ ‘오는 걸 아느냐?’ ‘모릅니다. 황무지에 비가 왜 내리는데요? 채소도 안 키우는데.’ ‘그냥 오는 이유를 아느냐?’ ‘모릅니다.’ ‘그렇다면 너도 황무지의 자갈에 불과하다. 네가 보기에 별이 무심해 보이듯이, 네가 보기에 염소가 무심해 보이듯이 너는 바로 내가 보기에 그냥 있으나마나한 무심한 의미 없는 존재다.’
의미 없는 존재를 주께서 의미 없다는 걸 알려준다는 관계성, 이 관계성이 뭐냐?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아무 의미도 없는 점 같은 인간을, 네가 점 같은 인간이라고 통보해주는 그 다가오시는 사랑, 누군가 나의 주체를 주제파악을 하게 하시는 그 음성,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스파이더맨에서 거미줄 나오듯이 그냥 벽돌 하나에 거미줄 쳐버리면 거미줄에 벽돌이 낚아 채이듯이 그냥 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인간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우리가 알아야 돼요.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어떻게 이 문제를 점점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를 힘들다 하는 걸 알거든요. 힘든 것을 어떻게 바깥세상과 관계를 맺고 나로 하여금 자폭하는 이 성질에서 벗어나서 웃으면서 긍정적인 삶을 살도록 어떻게 노력하느냐? 그 대체 방법이 뭐냐가 이제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게 뭐냐?
인간의 의식은 자아밖에 없죠. 나밖에 없다. 그런데 이래서는 안 되니까 의식의 범위를 넓혀 봐요. 의식에서는 자아밖에 없어요. 모든 것이 나한테 의미가 될 때만 의미가 있으니까. 여기에 꽃이 있다. 평소에 늘 꽃이 있었어요. 출판사에. 책상에 있는 줄 몰랐어요. 그런데 하루는 가만히 보니까 출판사에 출근해보니까 꽃이 있더란 말이죠. 저 꽃이 내가 너를 꽃이라고 이름 부를 때 나한테 다가와서 하나의 의미가 된다니까. 태초에 의미가 있다 했잖아요. 누가.
의미 되면 뭐 합니까? 꽃의 생각은 다른데. ‘아저씨 누구세요?’ 사람의 의미는 일방적이에요. F4가 등장해서 ‘야, 오늘부터 너하고 사귀기로 했어.’ ‘네가 누군데?’ 지 마음대로라. 상대방은 생각도 안 하는데. ‘나 이제부터 예수 믿기로 했어.’ 예수님 하신 말씀이 ‘너 누군데?’ 예수님 응답도 없어요. 저 혼자 예수 믿는다고 난리치고. 자기 혼자 소명 받고 신부되고 선종하고. 웃기고 있네.
예수의 증인이 안 된 이상은 예수님 오신 사람이 아니에요. 성령이 임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든 뭘 믿든 그건 자기 증인이에요. 자기 증인 안에 자기 소유성. 넘겨줄 게 없어요. 넘겨받을 것만 있고. 예수도 집어넣고, 삼위일체도 집어넣고, 개혁주의신학도 집어넣고 전부다 자기 배 채우기 위해서 다 집어넣는 거예요. 내놓을 게 없어요. 전부다 채워 넣기에 바빠요. 이것은 자기 증인이 되겠지요.
그래서 이 의식을 탈피하고자 나온 게 ‘무의식’입니다. 그럼 의식에서 탈피가 되었는지 들어보세요. 자기밖에 없는 의식을 어떻게 해서 무의식은 탈출 성공했는가? 나름대로 성공했어요. 여러분, 성공한 방법이 궁금하지 않습니다. 저 혼자 흥분하고 있습니까, 지금.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나’라는 의식을 접고 ‘나’라는 신체 보니 그야말로 욥이 하나님을 대한 것처럼, ‘나는 연약하고, 나는 부족하고, 나는 모자라고, 나는 실수가 많고, 실패할 수밖에 없고, 전부를 모르고 부분만 알고, 내 욕망은 내 마음대로 안 다스려지고, 내 욕망은 변화무쌍하고, 내 행동이 내 생각대로 안 되고.’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용서하라’ 좋은 말이죠. ‘용서하라’ 일곱 번 외우면 용서됩니까? ‘용서하라’는 말이 성경에 있더란 말과 저 사람 용서하는 것 하고 같습니까? 택도 없습니다. ‘아이고, 용서를 해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내가 저 사람 용서해?’ 용서가 안 돼요. ‘용서하라’는 말, 성경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 말, 나는 잘 알고 있지요. 알고 있으면 뭐 합니까? 한 번이라도 용서가 안 되는데.
그래서 신체를 가지고 라캉은 ‘어린아이’로 봤어요. 어린아이는 어릴 때 육 개월에서 이십사 개월 내에 어린아이를 보니까 거울에 비친 자기와 자기를 동일시, 같이 하려고 붙잡아요. 원숭이 보면 원숭이가 자긴 모르고 달려들죠. ‘아하, 저게 남이 아니고 나구나.’ 나 같으면 만질 수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다가나니까 거울이 딱딱하지요.
여기서 인간은 동일시하는데 동일시한 주체를 꺼버리는 동일시를 깨뜨리는 현실성, 현실적인 육체의 문제가 있어요. 나는 조용필처럼 노래를 잘하고 싶다. 그런데 목소리는 완전히 음치라. 그때 결핍을 느끼죠. 결핍을 통해서 인간은 양보의 미덕과 배려하는 것, 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것, 예의범절, 저 사람을 도와주면 이득이 온다는 측은지심, 양심 이걸 통해서 타협책을 내요.
이걸 가지고 일치하는 것, 뭐든지 내가 좋아하는 걸 ‘상상계’라 하고, 상상계가 만족스럽게 일치되지 않으니까 이걸 타협하는 걸 ‘상징계’라. 상징계 담당자가 주로 부모, 교사, 목사입니다. 상징계가 뭐냐 하면, ‘너는 이런 인간이어야 돼. 너는 용서하는 인간이어야 돼’라고 목사가 설교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일치시키려고 해요. ‘그래 나는 용서하고 싶어.’ 안 되잖아요. 안 되니까 용서하는 모방을 해요. ‘집사님, 교회에서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했지요.’ 그게 용서입니까, 용서하는 폼을 내는 겁니까? 폼을 내는 거죠.
쉽게 이야기합시다. 여러분, 남을 사랑하는 게 어렵습니까, 남에게 내걸 다 주는 게 어려워요? 요한일서 3장 16절에 뭐라고 돼있던가요? 형제를 사랑함이 ‘사랑한다, 사랑한다’ 이러면 다 때우면 끝나는 겁니까? 그게 사랑의 마지막인가요? 아니지요. 형제를 사랑하면 어떻게 됐다고요? 형제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으라 했지요. 미쳤습니까? 사랑한다고 때우면 되지, 차비 정도는 줄 수 있는데 잠재울 순 있는데 왜 내 귀한 목숨을 내놓으라고 해. 정말 미쳤어~
남은 고사하고 자식, 남편을 위해서 모든 걸 준다고요? 자식 결혼해서 취직하라 해도 나중에 사업한다고 ‘아버지여, 집 좀 잡히면 안 됩니까’ 할 때 용서가 되던가요? ‘너는 네 인생 살아라, 아버지가 그래 교육 안 했다.’ 이것도 핑계지요. 사실은 돈 주기 싫다 이 말 아닙니까.
세상이라 하는 것은 자기 사랑이 굳혀져 있는 이상은 남한테 내놓을 사랑은 빈약하기 짝이 없어요. 그리고 내놓은 사랑도 반드시 회수할 담보를 받고 사랑합니다. 줘버리고 도망가고. 어디 불뱀 만났어요? 다 담보 내놓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너 사랑해줄 테니까 공부 잘해. 용돈 인상해줄 테니까 공부 잘해.’ 반드시 부자간에도 주고받는 거래관계에 있다고요.
목사가 심방 갈 때 그냥 가지 않습니다. ‘심방 가줬으니까 다음주에 꼭 와. 다른 교회 가기만 해 봐라.’ 이런 어떤 자기 노동에 대한 보상 같은 게 있어줘야 자기 자아 정체성이 현상 유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 현상유지를 성경 어디에 사랑이라고 규정한 게 있던가요? 장로님 있던가요? “하나의 밀알이 죽으면 열매를 맺으리라” 그거지 현상 유지해라, 그게 어디 사랑이라고 성경 어느 구절에 그런 게 있던가요? 온유, 화평, 자비, 양선 그게 현상 유지하라 하는 게 어디 그런 게 있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타협을 하는데 어떻게 타협하느냐? 어떤 문제냐 하면, 의식적 같으면, 예를 들어서 ‘딸아 나이도 서른하난데 선봐라.’ ‘누군데요?’ ‘의사고 집에 돈도 있고 결혼하면 병원도 같이 하고 집에서 살림만 하면 되고 골프나 치고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남편 돈 벌어 준다.’ ‘싫어요.’ ‘의사고 집안 좋은데 왜?’ ‘키 작잖아요.’ 나안 키 작은 남자는 싫을 뿐이고~
‘나는 상상계에서 항상 남들은 170도 용납되지만 나는 180 돼야 돼’라고 주장하는 자기가 그걸 좋아하는 그 근거가 어디서 나왔어요? 참 희한하지요. 도대체 당신은 무슨 근거에서 180이하는 무조건 안 된다는 그 정당성 대봐라. 아까 했잖아요. ‘내가 싫다.’ 이게 정답이 되는 게 뭐냐? 그 사람 속에, 무의식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180은 돼야 돼’라는 욕망이 있는 이상은 그 사람의 무의식에서 의식이 나오거든요. 의식은 무의식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이 무의식 세계에서 주장하는 겁니다. 의식은 껍데기고 허수아비고.
그래서 미운 인간에 미소를 띠울 때 무슨 미소입니까? 썩소, 썩은 미소 아닙니까. 이게 뭐냐 하면, 미소는 띠고 싶은데 더러워서 못 띠울 때 썩은 미소 나오듯이 인간의 무의식인데 이 무의식은 인간의 욕망에서 나왔기 때문에 의식에서 나온 율례와 도덕이 여기에 관여를 못하게 돼있어요. ‘해라.’ ‘아버지, 내가 못 합니다.’
그럼 선 보지요. 키 180에 인물 잘 생겼고. ‘네 소원대로 185다. 됐나? 해라.’ ‘안 합니다. 의사 아니라서.’ 그럼 뭘 원하는데? 의사고 185에 집안 좋고 그 다음에 나한테 무조건 잘해주고 바람피우면 안 되고. ‘너 혼자 살아. 너 잘못됐는지 아나?’ 잘못됐는지 알지요. 의식은 잘못됐는데 뭐가 날 안 놔준다? 내 무의식이 안 놔주는 거예요. 그럴 때는 타협을 해야 돼요. 일단은 이재용하고 살고, 천억은 받아내고. 그러면 되는 거예요. 타협책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상징계에서 말하는 도덕이란 뭡니까? 도덕이란 절대 기준이 있는 게 아니고 자기의 타협을 정당화시키는 그 범주를 자기 나름대로 도덕이라 보죠. 나의 타협책은 이건 양보 못한다 할 정도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그걸 선한 것으로, 옳은 것으로, 그게 도덕적인 것으로 좀 봐 달라 이것이 바로 상징계에서의 타협안입니다.
그런데 이 타협안을 인간들은 누구한테 가져가요? 예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서 뭐가 주어지죠? 말씀이 주어지요. 이 말씀에 대해서 자기의 욕망은 뒤로 빼돌리고 타협책을 가지고 나옵니다. ‘내가 이 말씀 지켜줄 테니까 하나님, 내 욕망대로 해주겠습니까?’ 이걸 간단하게 지성이면 감천이다. 빌면 복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간구하는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전부다 이런 걸 집어넣어서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자가 없느니라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모든 걸 할 수 있다” 이런 걸 가지고 말씀 지켜 줄 테니까 내가 원하는 것 해줄 용의가 있습니까? 내가 금식할 테니까 우리 교회 부흥시켜 주시랍니까?
개척교회 얼마 안 되는데 ‘몇 명 나오는데?’ 할 때 열 명 나온다는 말을 해야 교회 같지. 두세 명 나온다 하면. 세 명 중에 사모 한 명에다, 자식 한 명. 근데 사모 한 명 나오고 자식 둘 나오는 그 교회가 하늘나라에 문제 있습니까? 하늘나라에 전혀 문제없어요. 누구한테 문제 있어요? 지 욕망에 문제 있지요. ‘하나님 저 죽을까요?’ 하나님 뭐라고 하십니까? ‘죽어라, 죽어라’ 합니다.
이게 네 번째 할 시간에요. 뭐냐 하면 죽음 속에서 증식이 이어져요. 그것 하려고 몇 단계 더 해야 돼요. 하나님의 증식은 예수님의 자기 증인 증식은 삶의 범주가 아니라 죽음이란 범주 안에서만 증식이 되고, 삶의 범주에서는 증식이 안 돼요. 왜냐하면 인간이 살았다 하는 건 산 게 아니기 때문에. 그건 좀 있다 이야기하고.
그래서 이 상징계에서 타협하다가 여기서 라캉은 뭘 발견했느냐 하면, 상상계라 하는 것은, 뭔가 내 욕망이 ‘야 저랬으면 좋겠다. 나는 노래를 조용필처럼 했으면 좋겠다’ 했는데 다른 친구가 있다가 ‘조용필 그건 목소리도 아니다. 진짜 가수는 기타치는 서수남이 더 잘한다.’ ‘나는 서수남 싫어. 조용필 좋아’ 하더란 말이죠. ‘난 나훈아가 더 좋아’ 서로 싸운다 말이죠.
상상계에서 일치성이 안 되니까 상징계로 타협하는데 이 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상징계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여기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변화는 10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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