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강 엄마 없는 아들 (녹취 정석훈 목사)
세상에서 사람을 치워봅시다. 사람을 치워버리면 산과 들, 나무, 풀 등만 남게 됩니다. 사람이 없다가 6일째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슨 의미로 있겠습니까? 우리는 평소에 내가 주인공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간을 다 치우면 땅이 왜 있고 하늘이 왜 있는가? 인간이 없음에 불구하고 새들은 창공을 날고 물고기는 바다를 헤엄치게 되면 인간은 진정 이 땅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주인공이 아니라면 일종의 손님 같은 것입니다. 인간이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을 마음대로 할 자격도 없고 그러한 능력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누구로부터 규제받고 지시를 받습니까?
인간이 ‘나는 내 즐거움대로 산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 날 때 ‘나는 태어났으니 내 하고 싶은 대로 산다’는 식이 되어 버리면 이 세상에 우리 인간이 빠져도 되는데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있는가에 대한 답변을 내놓을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여기에 대한 답변을 모르고 삽니다. 그렇다면 그 원리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구약 이스라엘 나라를 통해 그 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비해 이방민족은 조용합니다. 열왕기 상을 보면 싸움이 일어나면서 아주 복잡합니다. 그러나 그 시대 이방민족에게는 이러한 복잡한 싸움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고요하게 농사짓고 살아가면서 세상이 원래 그렇지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만큼 이방민족은 그들이 사는 이유와 의미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반해 이스라엘을 통해 제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이 왜 있고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지가 알려집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려지지만 그들이 가만히 있다고 해서 알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의 등장은 상당히 불길한 인물의 등장입니다. 이스라엘이나 유다가 잘 살고 있는데 선지자들이 말썽을 유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들끼리 잘 하고 있는데 주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오지랖 넓은 짓입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등장은 인간들이 정상적으로 사는 것이 정상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외칩니다. 살아있으면 정상적으로 간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불길한 인물이 한 오지랖을 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자신에게 이익 되는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열왕기 상에서 선지자들이 말하는 핵심은, 인간이 사는 이유가 상당히 엉뚱하게 나타납니다.
즉 엄마가 있는 사람과 엄마가 없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구분하신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엄마 없는데 아들이 생겼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기존 이 땅은 엄마 아빠로부터 줄지어 나오는 자들로 채워 놓았는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보실 때에는 어려워서 못 보시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엄마가 없는데 태어 난 자식으로서 이 세상을 물갈이 하겠다는 오지랖을 선지자는 말합니다. 그 불길하다는 것은 기존의 인간질서, 토대 자체를 제거하고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겁니다. 엄마 있는 사람을 엄마 없는 사람으로 바꾸어 보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엄마에게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열왕기상 15:1,2절입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왕 제 십팔 년에 아비람이 유다 왕이 되고 예루살렘에서 삼년을 치리 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마아가라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앞서 말씀드린 유다 왕가와 북 이스라엘 왕가의 그림, 그리고 그 가운데 선지자의 그림이 떠오르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엄마 이름을 왜 사용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열왕기상 14:21절입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유다 왕이 되었으니 르호보암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사십일세라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서 빼신 성 예루살렘에서 십 칠년을 치리 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라 암몬 사람이더라.”
여기서 엄마 소개를 왜 할까요? 모친이 나오는 이유는 엄마 있는 자식이라서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엄마 없이 무슨 자식이 나옵니까?’ 라고 할 겁니다. 그러니 선지자들이 한 오지랖을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납득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납득이 되지 않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자기 자신의 사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을 폭로하기 때문에 엄마 없는 아들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삼하7:14절에 근거해서 제시를 합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을 지어드리겠다고 하니 여호와께서 자신이 아버지가 되고 아들이 되는 가문을 만들 텐데 그 가문이 내가 기거하는 곳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인간이 집을 짓는다고 그곳에 하나님께서 자리 잡고 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거주지를 자기 아들이라는 인격에 들어오시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엄마 없는 아들이 등장했거든 그 속에 너희들이 보고 싶은 하나님이 계심을 알라는 겁니다. 나단 선지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인간의 존재이유를 새롭게 바꾸어 버립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도 엄마 없이 한 번 태어나 볼래.’ 하겠지요. 엄마 없는 가문이 하나님의 가문으로, 천국 가는 가문이라면 있는 엄마 취소하고 엄마 없이 태어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 없이 태어나는 그런 날이 옵니다. 성령에 의해 거듭나게 되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늙었는데 어떻게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날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자신의 태어난 과거를 근거로 해서 ‘두 번째 태어나면 됩니까?’라고 질문합니다. 백번 찾아와도 안 됩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입니다. 엄마를 육으로 봅니다. 이와 달리 태어나는데 어떤 방법으로 태어나야 하는가 하면 성령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욕심이 난 겁니다. 하늘나라는 가고 싶고 방법이 없으니 자신이 생각하는 방법대로 실천에 옮기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묻습니다. 여기에 대해 주님은 니고데모의 기대를 좌절시켜버립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 즉흥적이요 우발성입니다. 고대한다고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을 기다린다고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바람이 지나간 그 뒷자리, 그 흔적을 통해서 바람이 지나갔다는 것을 알뿐입니다.
바람은 요청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쳐지나가면서 그 흔적이 남는데 천국 갈 새로운 영적 사람이 태어난다는 겁니다.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 손에서 떠나 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고민이 됩니다. 주님께서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것도 알지 못하느냐?”는 말씀은 알고 모르고의 문제 정도가 아니라 도대체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양자 물리학에서 말하는 이중슬릿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중 슬릿 실험은 양자역학에서 빛의 파동성과 입자성을 구분하는 실험입니다. 빛을 이중 슬릿 실험 장치에 통과 시키면 그것이 파동이냐 입자이냐에 따라 결과 값이 달라집니다. 파동은 회절과 간섭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파동이 양쪽 슬릿을 빠져나오게 되면 회절과 간섭이 작용하고 뒤쪽 스크린에 간섭무늬가 나타납니다. 반면 입자는 이러한 특성이 없으므로 간섭무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의 차이를 통해 실험 물질이 입자인지 파동인지를 구분합니다.
빛이 파동이 나올 것이라 생각하면 파동이 나오고 입자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면 입자가 나옵니다. 그러니 입자, 파동이라는 괴물이 이미 인간이 무엇을 측정하려고 하는지를 눈치를 챘습니다. 이것은 과학자의 관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인격체도 아닌 입자의 관찰로 주도권이 돌아간 식입니다. 이 말은 입자라는 그 실체가 내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를 사전에 간파해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서비스를 해주는 겁니다.
인간이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입자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입자가 평소에 인간을 관찰하고 있었던 겁니다. “네가 실험하는 것이 이 정도 밖에 안 되지? 그래 너 원하는 대로 마음껏 해 줄게.” 또 다른 괴물이 있어서 인간을 아기 다루듯이 다루고 있으니 과학으로 시작했다가 귀신 만난 꼴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원하는 대로 해준다는 것은 죽은 물체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보다 월등한 괴물과 인간이 마주하게 되는 그 세계가 웅장한 자연의 세계입니다.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모든 출발을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 에서부터 출발할 때 우리의 관심사의 마지막 결과는 나는 구원받기 위해 이런 식으로 했기에 그 기대하는 바에 따라 나는 구원받았다고 할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상대하는
진짜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피해갑니다.
만약 나의 구원에 대해 내 기대대로 호응해 주면 구원된 상태 안에 우리 공로가 섞이게 됩니다.
“간절히 바랐더니 그대로 되었네!”
이렇게 되면 천국은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함유됩니다.
영의 나라에 육이 섞이게 되고, 생명나무의 나라에 선악과 열매가 몇 개 달린 셈이 됩니다.
천국은 철저하게 생명나무만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선악과 요소는 일절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아는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시켰습니다. 인간을 배제했습니다. 배제된 인간이 갖고 있는 재주는 선악적인 재주밖에 없습니다. 선악을 구분해 바르게 사는 재주 외에는 부릴 재주가 없습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협상에 나서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인간들과 협상해서 넣어주는 곳이 아닙니다. 인간과 협상하지 않고 완전히 갈아엎습니다. 불판 갈듯이 갑니다. 흘러오는 육에서 단절된 모든 인간은 내가 모으겠지만 육과 연결된 자는 받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처럼 육과 끊어진 것을 ‘할례’라고 하고, 이 할례의 완성이 골로새서 2장에서 ‘세례’라고 합니다. 얼마나 인간적인 육을 끊어버리고 싶어서 할례의 완성인 세례를 주시겠습니까?
세례는 골로새서 2장에서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2:11-12).”
“네가 들어오면 내가 죽을 게. 네가 들어오는 꼴을 못 보겠다. 차라리 내가 죽겠다. 내가 죽더라도 네가 너희 엄마 아빠에게서 받은 DNA 갖고 들어오는 것은 도저히 못 보겠다.”는 겁니다. 차라리 내 죽음으로 바꾸고 만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린 의미입니다. 그래서 육이 있는 사람, 선악과 체계를 갖고 있는 사람은 십자가에 대해서 반드시 참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지혜롭지 못하게 그게 뭐냐고 합니다.
십자가 피로 용서받아 천국 간다는 것에 대해 장난 치냐고 합니다. 우리에게 지혜가 있고 이성이 있고 신을 사모하는 경건함이 있는데 왜 그런 것은 값으로 쳐주지 않느냐고 합니다. 왜 우리가 행한 것은 일절 거부하고 예수님이 행한 것만 우리에게 적용시켜 우리를 천국에 데려가느냐는 겁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 것이 있고, 들어가지 못할 요소가 무엇인가?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가 어리석으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가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는 능력입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는 그 과정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을 삽입시킵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어 줍니다. 이것이 성전이고 이 일을 하는 자들이 레위인들입니다.
남쪽 나라에는 레위인이 있고 북쪽 나라에는 레위인이 없습니다. 그래서 북쪽 나라는 가짜가 됩니다. 그렇다면 남쪽 유다나라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제사가 있고 레위인이 있다면 그 나라가 망하지 않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제사장이 있고 레위인이 있고 성전이 있다고 해서 그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성전은 문제없지만 성전 주변은, 주변의 나라들은 멀쩡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 옆에는 멀쩡한 인간이 오면 안 됩니다. 예수님 십자가 옆에 달린 자의 직업이 무엇이었습니까? 강도입니다. 일부러 강도란 직업을 강조합니다. 강도라도 오늘밤 낙원에 갑니다. 강도는 그 시대에 순위가 낮습니다. 다른 사람 다 천국가도 강도는 못 갑니다. 구원 받을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강도가 구원받는데 가장 적절합니다. 육의 어떤 요소도 천국갈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해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강도질 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강도질 두 번 하면 옆에 있는 사람이 열 번 했으면 ‘나는 저들과 같지 않습니다.’라고 합니다. 강도에도 수준이 있다는 겁니다. 지식 있는 강도, 덜 떨어진 강도 없습니다. 한 번을 하던 두 번 하든 철저한 강도여야 합니다. 지금 사람을 갈아치우는데 문제 삼는 것은 인간의 출처, 즉 엄마의 질이 더러워서 그렇다는 겁니다. 엄마를 언급하는 것은 그 엄마로 인해 태어난 자식은 똑 같이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니 유다나라도 희망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희망 없다는 이것이 희망 있음을 암시하는 겁니다.
‘너 죄인이야.’ 라는 말은 ‘너 구원 받았어.’ 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부정어법입니다.
부정어법으로 말하는 이유는 “너도 그것을 나와 같은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졌지, 그렇지?” 하는 겁니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추론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했지요. 이런 믿음은 인간이 만든 발명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서 나온 믿음은 받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믿음을 우리에게 택배로 보내 주십니다. 뜯어보면 내 믿음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구성하신 믿음, 주님의 믿음입니다.
주님의 믿음을 분양합니다. 주님께서 분양해 주시는 것은 택한 백성에게 한도 끝도 없이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오병이어입니다. 오천 명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만일 오천 십 오명이라면 양식 떨어집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는 영생에 대해서는 네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네가 누구와 함께 있느냐? 주님과 함께 있다면 네 인생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남은 떡이 12광주리입니다. 빵 먹었던 사람들의 호칭이 열두 광주리, 왕이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런 식으로 만들어 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내 쪽에서 백성이 되려고 애쓸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되려면 왕부터 와야 됩니다. 왕부터 엄마 없이 태어났다면 백성은 그 왕 때문에 절로 승리합니다.
신앙은 ‘내가 어떠냐?’가 아니라 ‘우리의 왕이 어떠냐?’를 소개하는 것, 즉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나는 아닙니다.’를 동반합니다.
‘나는 아니고 예수님입니다.’를 고백하도록 하루하루를 살게 하시는 겁니다.
가게에 손님이 오더라도 내가 기대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보내셨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이런 일을 벌이셨습니다. 임의로 보냈습니다. 오늘 손님이 백 명 왔는데 하나하나를 주님이 임의로 보냈습니다. 소문 듣고 왔다는 말 믿지 마세요. 그 다음부터 안 올 수 있습니다. 주께서 우연히 보내셨기에 그 다음날 백 명 기대하지 마세요. 한 명도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일 문제입니다.
매사에 주님과 함께 성령의 바람 속에서 살아가시면 됩니다. 말이 멋있다. 모든 것이 성령의 바람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 세상이 프뉴마라는 바람이 응집되어 있다는 겁니다. 성령은 마지막에 예수님의 복음의 네트워크입니다. 그 가운데서 지상에 나타난 선지자의 모습은 갈아치우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들은 원수가 되고 피해를 보게 됩니다.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불길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역사 속에 숨어 있는 비밀이 있고 그 숨어 있는 비밀과 역사를 주장하는 인간이 다투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 안에는 감추어진 비밀이 있는데 그 비밀은 인간에게 노출되게 함이 아니라 그 반대로 노출 안 되게 하기 위한 비밀입니다. 이것을 뽑아내는 것은 육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와서 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 엄마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 자녀는 엄마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팔자입니다. 내가 아무리 개과천선 해봐야 엄마가 악하기에 나도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열왕기를 보면 나라꼴이 여자에 의해서 엉망진창이 되어 버립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이세벨에 의해서, 그리고 남쪽 유다는 아합과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왕하11:1)가 망쳐버립니다. 여자의 아들이 아니라 여자가 나서서 그렇게 됩니다. 열왕기상 21장을 봅시다. 나봇의 포도원이 나옵니다. 이 땅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곳에 포도원이 생기고 그곳에서 나봇이 포도 농사를 짓습니다. 이것이 이방나라라면 아무 의미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이스라엘입니다. 포도원이 있었고 그곳에 나봇이 농사를 짓습니다. 그런데 나봇은 포도원과 자신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뜻과 약속과 법칙을 함유해서 없는데서 포도원이 생겼고 없는데서 나봇 자신이 생겼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이세벨의 악함을 노출시키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일종의 선지자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없는데 성령의 바람으로 생겼다. 그 어리석은 십자가를 받게 되었다. 모든 교회가 싫어하는 십자가를 받게 되었다.” 문제는 이렇게 복음을 알게 되면 주변에 숨겨진 엄마의 육에서 나온 자식들이 자기 영역이라고 시비 걸고 나오는 계기가 되면서 복음이 내 구원용이 아니라 내 주변이 얼마나 악마적인가를 노출시키는 선지자적 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자신에게 팔라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 나봇은 못 판다고 합니다. 그 때 존재 의미가 드러납니다. 나봇은 이 포도원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이기에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팔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합 왕이 찔찔 짜면서 누구를 찾아가느냐 하면 자신의 아내 이세벨을 찾아갑니다. 수심이 가득한 아합 왕을 본 이세벨이 그 이유를 알자 “여호와 같은 소리하고 있네.” 당신이 뭐요? 왕이잖아요. 왕은 비어 있는 권력의 공백을 자신의 권력으로 꽉 매웠습니다. 보이지 않는 중심이 아니라 보이는 자신을 쳐다보라는 겁니다. 내가 왕이고 대통령이니 나를 쳐다봐야 안정이 된다는 겁니다. 다들 그런 나라이기에 여기에 대해 어느 누구도 시비 걸 수가 없는데 바보같은 나봇이 임금이 포도원을 달라고 하는데 여호와를 거론하면서 포도원을 팔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래서 이세벨이 거짓 증인을 내워 나봇이 왕을 저주하였다는 이유로 돌로 쳐 죽입니다. 꼭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결국 포도원을 빼앗습니다. 이것이 정치고 현실이고 이 세상을 운영하는 힘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대변해 주는 속성입니다.
한번 물어 봅시다. 지금 나봇이 혁명을 하기 위해 북 이스라엘에서 촛불집회를 합니까? 지하 투쟁조직체입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나봇이 여전히 하나님의 의미를 품고 있다는 그 이유뿐입니다. 그래서 포도원을 팔라고 할 때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21:3).”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변이 그런 나봇을 가만두지 않고 죽여 버렸습니다.
세상 나라에서 인간이 존재할 이유는 없습니다. 존재할 이유 없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유일한 이유입니다. 따라서 누가 죽었다고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바보같이, 죽긴 왜 죽어. 살아야지.” 그러나 나봇은 자신이 산다는 것이 존재의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약속의 땅에 약속대로, 율법대로, 언약대로 포도원을 얻었다고 합니다. 내 목숨이 내 토대가 아니라 여호와가 자신의 토대라고 합니다. 그렇게 단순무식하게 그것을 인정한 겁니다. 그러니 나봇 벗기고, 이세벨을 벗겨 버리면 그 존재를 지탱하는 것이 완전히 다른 색깔입니다. 나봇이 재벌이 아닙니다. 평범한 보통 백성입니다. 그러나 그 토대가 여호와의 아들입니다. 여호와로부터 주어졌습니다. 우리 엄마가 그랬다는 것이 소용없습니다.
엄마 없다고 말씀드리니 ‘나봇이 엄마 없이 태어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실 겁니다. 그 내막은 상당히 함축되어 있지만 갈라디아서 4:4-6절을 보겠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는 말은 남자 없이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 법칙대로 아들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물갈이 하실 분이 여자에게서 오셨다는 말입니다. 사무엘하 7:14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의 여자가 아니라 특수한 여자를 통해 이 땅에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복음이고 구원입니다.
엘리야의 특징이 바로 엄마 없는 사람을 보여줍니다. 그 근거는 신약에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애기를 못 낳는 여자에게서 천사의 예고에 의해 태어납니다. 그러니 장차 올 아들부터 구약 노선으로 흘러가면 세례요한, 엘리야가 모두 엄마 없는 자들입니다. 말라기 4:5절에 보면 엘리야가 올 것을 예언했고, 그 엘리야가 바로 세례요한이라고 마태복음 11:1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의 기능의 특징은 엘리야처럼 오는 세례요한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호적을 조사해 보니 아이 낳을 수 없는 여자가 천사의 예고를 통해 세례요한을 낳습니다. 그 세례요한의 역할은 자기 자신이 누구냐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실 메시야를 앞서서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엘리야부터 말라기까지 모든 선지자가 엘리야에 함축, 응축이 되어 있습니다. 헤쳐 모여라고 하면 엘리야 치마폭 속으로 다 들어갑니다. 그 말은 모든 선지자의 특징은 엄마 없이 이 땅에 태어난 자의 모든 양상을 선지자들이 보여 주는 겁니다. 선지자의 특징은 이 땅에서 붕 떠 있는 상태입니다. 솔로몬부터 내리막길로 갑니다.
열왕기상 11:1절을 보면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솔로몬의 사랑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왕비 빼고 천명의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천명의 여자들이 무엇을 달고 왔습니다.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11:4).” 각자의 신들을 달고 왔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직접 만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않았다는 말씀은 솔로몬이 이방여인을 사랑할 때부터 다윗 노선에서 갈라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솔로몬이 나쁜 짓 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다윗이 안고 있던 그 속내를, 즉 솔로몬 때 와서 무엇이 다윗의 노선이 아닌가를 보여 줍니다. 그 노선들이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 왕들을 통해 보여 줍니다. 그들은 모두 엄마 있는 자들로서 망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 엄마들이 열왕기상 11:5-8절에 나옵니다.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 같이 좇지 아니하고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저가 또 이족 후비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저희가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솔로몬은 정말 남자다워요. 사랑하는 여인의 종교까지 사랑했습니다. 노선이 다른 것을 무엇으로 질책하느냐 하면 “내가 다윗의 가문에서 내 아들이 나온다고 했는데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지 않는 노선을 이미 개시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다윗의 노선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것은 이방 여인으로 인해 남북이 갈라지고 나라가 엉망진창 되고 부서지는 와중에서 나라를 붙들려고 그들이 누구를 핍박합니다. 그들로부터 핍박받는 자들이 바로 선지자들입니다.
왕조는 세습제가 되지만 선지자는 연결성이 없습니다. 서로 세력 구성하는 것 없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끊어질 때 하는 겁니다. 선지자직분은 주께서 부리실 때까지만 하면 됩니다. 제대하라고 하면 제대하면 됩니다. 선지자는 나라를 복구하는데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팔자 편합니다. 핍박은 받지만 속마음은 굉장히 편합니다. 어차피 망할 세상을 향해 망하라고 하는 것보다 편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첫 강의 때 왕들 이름을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에게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은 현실 전부입니다. 인간은 있다. 있으니까 살아야지. 우리끼리 나라 세워서. 이것이 전부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현실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이 현실에 깊이가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남 유다 북 이스라엘이 싸움을 하는데 그들의 싸움은 현실 잘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단합하고 힘 모으는 겁니다. 이것이 육의 나라입니다. 육의 나라이지만 어디에도 빈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냅니다. 그러자 난데없이 불길한 일들이 자꾸 생깁니다.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선지자는 뒷북치듯이 소급해서 이야기 합니다. “왕이여,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 주신 약속의 땅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비약속적으로 이방신의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선지자들이 말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대자연을 동원하여 불길한 징조를 일으키는 보조를 맞춥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그림으로 그리면 평화로운 둥근 큰 원 안에 조그만 검은 점이 생겨 암세포처럼 점점 커집니다. 이 하얀 나라, 평화로운 나라에서 불길한 점이 있다면, 여기에 가뭄 들고, 전쟁이 일어나고, 전염병이 퍼지면 선지자가 톡 튀어 나와 그것이 일어난 것이 검은 점에서 나온 것이라고 외칩니다. 이 말은 곧 나라는 망해도 언약은 망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나라는 망해도 언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기어코 이 지상에 이루는 겁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교체작업, 판을 바꿉니다. 여러분들이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이런 징조가 있으니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기 바란다고 외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말은 “절대로 당신들은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습니다. 망하기 전까지는”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그들이 개과선천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외치는 겁니다. 앞서 이중 슬릿 실험에서 인간이 입자를 관찰하는데 도리어 관찰 받는 입자가 자기를 연구하는 물리학자를 관찰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기 나라를 잘 가꾸고자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선지자는 너희들은 우상을 섬기고 결국은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우상숭배로 인해 망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우상숭배에도 끄떡없이 하나님 자신의 계획에 대해서 차질 없이 진행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선지자들을 통해 알려 주는 겁니다. 그러니 선지자는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불길한 자연현상과 짝을 맞추어서.
엘리야가 왔을 때 가뭄이 들었습니다. 열왕기상 17:1절입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십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삼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삼년 반 동안 비오지 않는 것은 자연현상이 아니라 선지자의 등장과 관련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을 것 같았으면 그들이 애초부터 우상 숭배 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핍박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존재 토대가 무의미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평화로운 세상인 원 안에 인간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고 처리할 수 없는 불길한 요소가 있는 가운데 이 세상이 지금까지 돌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