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2017여름9강 하나님을 죽이자 17080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8. 7. 12:58
2017-08-05 11:27:42조회 : 66         
2017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9강이름 : 서경수 (IP:118.47.84.120)

9강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하면서 왕의 하는 일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대들 때 만약 여러분이 왕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 잘났거든, 장래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안다면 네가 해라.” 선지자가 왜 직접 전쟁에 나서지 않고 왕이 나섭니까?



열왕기상 20장 1절에 보면 “아람 왕 벤하닷이 그 군대를 다 모으니 왕 삼십이인이 저와 함께 있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람은 이스라엘 북동쪽에 있는 나라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시리아입니다. 여하간 아람이 많은 군사(10만 명 이상)를 이끌고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포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말합니다.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처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20:3).” 이 말을 전해들은 아합은 꼬리를 내리듯 말합니다. “왕의 말씀같이 나와 나의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20:4)”라고.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더 강한 압박을 했습니다. “내일 이맘때에 내가 내 신복을 네게 보내리니 저희가 네 집과 네 신복의 집을 탐지하여 무릇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을 그 손으로 잡아 가져가리라”고. 상황이 이렇게 되니 아합은 장로들을 소집하여 의견을 물었는데, 장로들은 ‘아람 왕의 말을 듣지도 말고 허락지도 말라’고 했고, 왕은 장로들의 의견을 들어 아람의 사자들에게 거절 의사를 밝혔습니다.



13절에 보면 한 선지자가 예언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전쟁을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라고. 선지자의 말을 들은 아합 왕은 각 지방에서 지도자를 부르니 232명이 모였고, 또 각 지역의 군사를 모으니 7,000명이 되었습니다.



이름 없는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승리를 예언했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질문을 던집니다. 선지자가 이번 전쟁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안다면 왕에게 이런저런 말로 할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전쟁에 나서면 될 것 아닙니까?



전쟁은 한다는 것은 인간이 다 한 통속이라는 겁니다. 모두 같은 부류입니다. 전쟁은 질서의 재편성이라 할 수 있는데, 결국은 하나가 될 수밖에 없어요. 남쪽은 유다, 북쪽은 이스라엘, 그 주변에는 아람, 모압, 암몬 등이 있지만 이들 모두는 다 조폭들일 뿐입니다. 질이 같은 자들입니다.



전쟁을 한다는 것은 나눠져 있는 계파를 통합시키는 하나님의 작업입니다. 나만의 단독적인 영역을 고수하고 있을 때, 더 센 자들이 와서 침략하면 그들의 것으로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전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뜻은 너, 나 가릴 것 없이 모두가 한 통속인 것을 폭로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남쪽 유다, 북쪽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고 이방 나라는 우상을 섬긴다고요? 자기의 영역을 고수하는 자들은 전부 한 통속입니다. 영화 [신세계]에 황정민이 외친 유명한 대사가 있어요. “어이! Brother.” 이 단어가 세상을 보는 적절한 표현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Brother(형제)’라고 했어요. 네가 통뼈가 아니라는 겁니다. 제일 힘이 센 놈이 나머지 모두를 종속시키는 것이 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이걸 어떻게 아는가? 싸워보면 알아요. 전쟁이 벌어지면 내가 평소에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왔는지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속 전쟁을 일으키십니다. 바다에 출렁이는 물결이 잔잔할 때가 있고 파도 칠 때가 있지요. 우리의 삶이 바다의 출렁이는 물결과 같습니다. 결국 우리는 다른 물결과 섞여도 전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전체 물결의 한 부분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바다의 모든 물이 섞이듯이 모든 인간은 섞입니다.



20장 13절에 북쪽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이 이 전쟁에서 승리를 주실 것이라고 했지요. 그렇게 말만 하지 말고 직접 전쟁에 앞장서서 이스라엘의 왕 역할을 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지요. 선지자는 보이지 않다가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 속에서 뒤늦게 등장해서 싸우는 양쪽 모두 한 통속임을 알려줍니다. 선지자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입니다.



여하간 선지자의 말대로 아람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승리한 후에 그들의 본성이 드러납니다. 32절에 보면 전쟁에 패한 아람 왕이 승자 아합 왕에게 하는 말이 나옵니다. “저희가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테두리를 머리에 이고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러 가로되 왕의 종 벤하닷이 청하기를 나의 생명을 살려주옵소서.”



벤하닷의 말을 전해들은 아합이 하는 말이 재미가 있습니다. “저가 살아 있느냐? 저는 나의 형제니라.” 일시적인 강자가 일시적인 약자를 형제로 받아줬습니다. 그러면 이 승리는 10만의 아람 군대에 대한 7천명의 이스라엘 군대의 승리입니다.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승리입니다.



승리할 수 없는 자가 승리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통합시켰다는 뜻입니다. 전쟁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35절에 보면 선지자의 무리 중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여호와의 말씀으로 그 동무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치라.”고 합니다.



이것은 전쟁이 끝나고 승리한 이스라엘이 기쁨하면서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고 여긴 때에 발생한 일입니다. 어떤 선지자가 다른 선지자에게 ‘너는 나를 치라.’고 했어요. 그 말을 들은 선지자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황당했을 것입니다. 아무 감정도 없고 모르는 사람인데 ‘나를 치라’고 하니까 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자가 나타나 그 선지자를 물어 죽였습니다. 지금 이 전쟁은 하나님에 의해서 결판이 났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전쟁을 일으켜서 당신의 위상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나 승리에 도취된 아합 왕도, 항복했는데 상대 왕이 형제라고 받아줘서 안도하고 있는 벤하닷 왕도 이번 전쟁의 의미를 전혀 모릅니다.



두 선지자가 만나서 ‘이번 전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나라가 승리했으니 함께 즐거워합시다.’ 이것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말을 했지요. ‘나를 치라.’ 하나님이 전쟁을 일으킨 뜻이 이것입니다. ‘얻어맞는 하나님의 종이 등장하는 것’이 이번 전쟁에 담긴 핵심 내용이라는 겁니다.



치라고 했는데 안 치니까 사자를 보내 물어 죽였습니다. 때리라고 했는데 안 때렸다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 후에 다른 사람에게 또 치라고 하니까 그 사람은 쳤습니다. 그리고 38절에, 선지자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변장하고 왕을 기다리고 있다가 왕이 지나갈 때 비유를 들어 왕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왜 한편이 될 수 없는 자를 형제로 받아줬습니까?’라는 의미의 말을 한 것입니다.



그 후 수건을 벗으니 그가 선지자란 사실을 왕이 알게 되었고, 선지자가 왕에게 직설적으로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상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저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저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42절).”



세상 힘의 질서 세계에서 어느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빠져나올 수 없는 자를 주님께서 빠져나오게 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얻어맞는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밟고 때리는 짓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다고요. 그렇게 해서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짓밟고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내 속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완악한 본성이 있음을 감지할 수 있어요.



하나님을 죽이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못 받는 겁니다. 본문에 나오는 어떤 사람은 선지자가 때리라가 했는데 안 때렸어요. 그 사람에게 아무 감정도 없는데 왜 때립니까? 그런데 안 때렸다는 이유로 사자가 나타나 그 사람을 물어 죽였습니다. 자신의 착함, 자기의 의로움 이런 것이 그동안 우리의 구원을 교묘하게 방해해서 천국에 못가도록 한 거예요.



날마다 주님을 때릴 수 있는 기회를 주었건만 우리는 거룩하고 선한 자라고 자처하기 때문에 구원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됩니다. 자기의 단독적 영역을 확보하면서 “내가 이만큼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해요. 이런 말 한다고 구원 됩니까? ‘나는 저들과 달리 구별된 삶을 삽니다.’라고 하는 자가 바로 세상과 한 통속이 되어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하고 이익이 되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하지요. 이 말은 누가 못합니까?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데. 자신의 소유가 점점 많아지니까 그것을 계속 쥐고 싶어서 주님께 아부하는 거예요.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자신을 영역을 안전하게 지키려 하는 거예요. 이것을 그들은 ‘주님과 교제한다.’고 해요.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앞으로 내가 하는 일이 잘 풀리고 형통할 것이란 계산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강한 상대인 아람을 이겼습니다. 7천명이 10만명을 이겼어요. 이겼으니까 이제 자신이 갑이 된 것입니다. 그 때 을(아람 왕)이 머리를 조아리니까 아합은 자신의 단독적 존재감을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우리가 누구를 용서한다고요?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이용하는 짓입니다. 선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마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하는 소리로 “우리는 성도이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부활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지요. 이보다 더 마귀적인 모습은 없어요.



아직도 자기 의를 포기하지 않은 겁니다. 옛날에는 윤리, 도덕으로 했다면 이제는 신앙으로 자신의 마일리지를 쌓는 거예요. 남에게 신자 티를 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럴수록 그 사람은 하나님의 핵심적인 뜻을 놓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23절을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목 박한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라고 했지요.



우리에게 가장 거리끼는 것이 뭡니까? 내가 내 모습(사단의 모습)을 그대로 노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고 하나님을 짓밟고 죽이는 이것보다 더 거리끼는 일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배척하고 죽이는 그 순간이 유일하게 구원 받는 순간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 가짜입니다.



구원 받은 자의 표징, 그 끝은 어디냐? 내 손으로 하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내 손으로 죽임으로 ‘나는 사단과 한편이며 나는 늘 나만의 소망을 따로 챙기는데 일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는 것이 폭로됩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든, 삼위일체를 이용하든, 십자가 피를 믿든 간에 나만의 의가 드러나는 것을 기대하면서 사는데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은 방법으로 살아갑니다.



각자가 자기 영역에서 오야봉이 되기를 원합니다. 종로파와 강남파의 오야봉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이 현실 외에 다른 현실은 없습니다. 인간은 힘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 가도 그곳에는 나를 공격하는 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제 아침에 목욕탕에 갔는데 나이가 60정도 된 사람 3명이 마치 목욕탕이 제 것 인냥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저는 피로를 풀면서 조용하게 쉬려고 갔는데 그곳에서도 힘이 작용하고 있었어요. 아람 군대가 그곳에도 있었어요. 그쪽은 3명이고 저는 혼자입니다.



교회 다니는 보통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지 테스트를 합니다. 어떻게 하는가? “아저씨들 좀 조용히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뭔가 기대하는 것이 있어요. 하나님이 나의 편이라면 비록 나는 혼자이지만 저쪽 3명을 이길 것이다. 저쪽에서 내 말을 듣고 “예, 알겠습니다.”하면서 조용히 하면 내가 이긴 것이지요.



그런데 “조용한 곳을 찾으려면 산에나 가지 목욕탕에는 왜 왔어요.”라고 도리어 큰 소리를 치면 상황이 복잡해집니다. 내가 조용히 해달라고 요구한 것과 그쪽이 산에 가면 조용하다고 나온 것은 서로의 영역 싸움입니다. 개가 길을 가면서 오줌을 누는 것과 같습니다. 이곳은 나의 영역이란 것입니다.



각자가 오야봉 노릇을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일부러 목욕탕에 가서 이곳에서는 내가 오야봉이다. 라고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 가니까 먼저 와 있는 오야봉이 있었던 거예요. 사람이 혼자 있으면 시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둘이 있으면 시끄러워요. 그 바닥을 평정한다고.



결국은 나와 다른 사람이 다 한 통속입니다. 만약 목욕탕에 먼저 와 있던 사람이 나의 제안을 듣고 ‘당신을 우리의 오야봉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면 이것은 나의 승리가 됩니다. 그런데 그 나의 승리가 얼마나 사단적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목욕하고 나오는데 얼굴에 붕대를 감고 있는 어떤 사람이 “목사님!”하고 부르면서 자기 얼굴의 붕대를 풀었는데 그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거예요. “당신이 오야봉이 되어 기뻐하는 그 일이 주님을 피투성이로 만든 짓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전쟁은 자기의 것으로 통합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영역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나만의 영역을 용납해 주지 않습니다. 심지어 노인정에 가도 90대 노인들이 70대 노인들에게 군기를 잡습니다. 어디를 가도 혼자만의 영역을 허락하지 않아요.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상대를 자기화 시키려 합니다. “신이시여, 보시옵소서. 내가 저 사람보다는 더 의로우니 이 싸움에서 내가 승리하게 하소서.” 이 의가 사단이 제공한 의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내 의를 챙기려 하는 것이 발각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감지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런 짓을 하면서 그동안 하나님의 의라고 우기면서 결국 나의 의를 쌓는 짓을 해왔습니다. 자기 의를 세우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한 거예요. ‘십자가가 하나님의 의다.’라고 사도가 말하니까 그것까지 내 것으로 가져옵니다. 그래서 나만의 단독적인 왕국을 건설하려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죽인 짓입니다.



우리는 사단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자입니다. 

사단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은 사단이 심어준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사단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매일 우리에게 거리낌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나의 의를 챙기기 위해 양보하고 헌신하고 봉사하고 충성하면서 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나를 치라.”고 하시니까, “주님, 제가 어떻게 주님을 칩니까? 저는 주님을 아끼고 높이는 자입니다.”라고 나오지요. 그래서 사자가 나타나 그 사람을 물어 죽였습니다.



주님을 때리게 되어 있는 인간이 자신을 고상한 자로 꾸며서 ‘나는 절대 주님을 칠 수 없습니다.’라고 했고, 주님은 ‘그러니까 너는 사단의 종이다.’라고 하시지요.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이제 신앙생활 다시 합시다. 다시 한다고 해도 과거의 모습을 탈피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할 일은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날마다 주님을 때립시다. 내가 주님을 때리고, 그것 때문에 주님의 몸에서 피가 흐를 때 그것이 바로 보혈의 피입니다. 내가 주님 피 흘리는 일의 원인 제공자로 항상 십자가 앞에 서는 것, 이 때 우리의 공로는 전혀 챙길 것이 없습니다. 이 때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행한 모든 것이 죄입니다. 이제 마음 놓고 엉터리 짓을 할 수 있다는 이 기쁨은 세상 그 무엇으로도 맛볼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주위 사람을 잘 보세요. 그는 벌 받을까 싶어서 조마조마해 하면서 엉터리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점점 더 인생을 망치고 있는 겁니다.



성도는 노골적으로 주님을 죽이는데, 교회 다니는 불신자들은 ‘나는 절대 부처는 믿지 않고 주님만 믿겠다.’고 장담합니다. 그런데 그가 믿는 주님은 부처예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어느 시점에 투입시키는지 아시겠지요? 투입시키는 방식은 세상의 힘의 질서에 의해 상처 입은 분으로 등장합니다. 그냥 등장하면 모르기 때문에 놀라운 방식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의 행위를 알려주는 거예요. 북쪽 이스라엘에게. 그러면 얼마나 기가 살겠습니까?



뭔가 일이 잘 풀리고, ‘이제 나 혼자 독립할 수 있다.’고 하는 순간 선지자가 개입합니다. 

‘네가 원했던 것이 이것이지. 네 속에 있는 사단이 원했던 것이 바로 이거야. 

나는 신이다. 나는 혼자 살고 싶다.’ 

이런 것이 주님에 의해 노출될 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기회를 부여했고,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22장을 봅시다. 아합은 기적적으로 승리를 했습니다. 이제 남쪽의 여호사밧 왕이 북쪽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살살 분위기를 띄웁니다. “당신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는데 왜 길르앗 라못 땅을 돌려받지 않습니까?”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지역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요단 동편 이 땅이 초목이 우거지고 살기 좋은 곳이라고 르우벤, 갓, 므셋세 반 지파가 이곳 땅을 분배해 달라고 요청해서 얻은 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땅을 나눠준다고 하니까 자신들이 거주할 땅을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사는 땅이 아니라 단독적으로 자신들이 살기 좋은 땅을 주님이 선물로 주는 줄 알았어요. 내가 오야봉의 위치에 오를 때까지 내 행동은 계속 그것을 추구하면서 삽니다. 사단이 우리를 이쪽으로 몰아갑니다. 내가 최고가 되어야지 이 세상에 태양이 두개가 되면 안 됩니다.



하여간 기르앗 라못이 이스라엘 땅인데 아람에게 빼앗겼어요. 그런데 북 이스라엘이 아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했기에 남쪽 유다 왕이 북쪽 왕에게 힘을 합쳐 아람을 완전히 섬멸하자고 제안을 한 것입니다. 22장 1절에 보면, 한 동안은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었는데 유다 왕이 이스라엘 왕을 부추겨서 두 왕이 힘을 합해 아람과 다시 전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전쟁이란 세상을 하나의 힘의 질서로 통합시키는 작업입니다. 이것을 위해 전쟁을 하는데 전쟁을 할 때 선지자에게 물어보고 시작을 했어요. 이런 이야기가 참 어려워요. 여러 사람이 제게 질문을 해요. ‘하나님이 창세전에 구원할 자를 예정했다면 저는 예정 된 자입니까?’라고. 선택은 원인의 자리에 집어넣으면 안 됩니다. ‘선택되었기에 구원 받았다’고 하지 말고, ‘구원되었으니까 소급해서 선택되었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잘난 내가 건짐 받는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방종교입니다. 내가 주님을 때렸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 받은 것은 창세전에 구원하기로 작정되었기에 매일 주님을 때려도 구원 받습니다. 이렇게 될 때 선택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됩니다.



아람을 이긴 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와 아람 군대를 이겼으니까 이후에도 하나님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도와주시겠지’라고. 


우리의 사고방식은 진리가 있고 세상은 진리대로 펼쳐진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이것을 몽땅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인식하는 주체 내부가 분열되어야 해요

내가 두 조각이 납니다. 

그러면 내가 반으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고 그냥 깨어진 파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깨어지면 여기서 회의, 의심, 불신앙, 원통, 분노 이런 것들이 쏟아지면서

‘나는 주님 안 믿고 나 혼자 살래.’하면서 따로 살림을 차리는 이것이 원래 계획된 진리의 노선이 됩니다. 

그러니까 진리는 이미 있지만 

그 진리를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행동들이 진리적인 행동으로 구성되어 갑니다.



진리가 어떤 것인지 이미 확정되었지만 실제로는 매일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에 의해서 새롭게 구성되어 갑니다. 

그래서 내일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오늘은 선택되어 구원 받았다고 확신했는데 내일 탈락이다 이런 소리 들으면 어떻게 하지?” 이런 걱정을 합니다. 

이런 걱정이 선택된 사람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주님이 주체라야지 내가 주체가 되면 하늘의 태양이 두개가 되는 겁니다. 나는 구원 받았다고 큰소리치다가 깨지고, 깨지니까 회개했고, 회개했으니까 또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이것 역시 또 깨어지고 --. 이렇게 돌아가는 것은 내가 단독자로 있다는 것이고, 이 단독자를 유지하고 싶은데 단독자를 방해하는 것은 부숴야 하고, 부술 때 이런 대상은 반드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상자가 붕대를 감은 선지자이고, 배후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자기 확신을 믿음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주님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나를 믿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가 이단인 이유가 바로 예수 믿는 자기를 믿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400명이 모였습니다. 그들에게 왕이 묻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겠습니까?” 이 때 오버하는 선지자가 등장하지요. 11절에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나이다.”



이런 식으로 시드기야는 왕에게 아부를 했습니다. 시드기야가 원하는 것은 세상 권력과 힘인데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온갖 발악을 다하는 겁니다. 인간은 상대를 공격해서 단독자로 우뚝 서는 경우도 있지만 권력자의 마음에 들어 자신을 성장시키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 말씀을 믿습니다.”라고 해도 돈 벌 수 있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주님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요.



돈이 없을 때는 이점을 모르는데 돈이 생기면 달라집니다. 돈이 없을 때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라는 말씀에 ‘아멘’하지만, 갑자기 내 통장에 20억 입금되면 “주여 왜 이런 저주를 저에게 주십니까?”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동안 충성하고, 가난하게 살면서도 빠지지 않고 십일조를 하니 하나님이 이런 복을 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하지요.



어쨌든 내 속에 있는 괴물은 “네가 최고야. 아니 네가 최고가 되어야 해! 네가 원치 않는다고 해도 너의 주인인 나(사단)는 너를 최고로 만들어 내 종으로 활용할거야.” 이렇게 사단은 우리를 몰아갑니다. 이 세상은 들뢰즈의 책 제목처럼 ‘천개의 고원’입니다. 봉천동 언덕에 올라가서 서울 시내 사진을 찍어보세요. 이곳저곳 높은 빌딩과 건물이 있고 아파트가 보입니다. 여러 개(천개)의 봉우리(고원)가 있지만 밤이 되면 각자 자기 집에 들어가 있어요.



그 모두는 똑같은 도시가스를 공급 받고, 상수도를 통해 같은 물을 마십니다. 그러면서도 각자 고유의 영역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벌 건설회사가 재건축을 한다고 모든 건물을 허물면 다 파괴되고 말지요. 낡은 건물에 살다가 새 건물을 제공한다고 하면 싫다고 거절할 사람이 아무도 없지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더 잘 살고 싶은 본성이 모든 이들에게 잠재되어 있습니다. 아직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내가 돈에 환장한 사람인 것이 들통 나지 않았을 뿐 이런 마음은 잠재되어 있고 기도하는 가운데 무심코 이런 소망이 튀어나옵니다. “자식들이 남산위의 노루새끼처럼 잘 뛰놀게 하옵소서.” 노루처럼 뛰어놀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왕이 선지자를 불러 모아 “이번 전쟁이 어떻게 되겠소?”라고 물으니까, 이 기회에 왕에서 잘 보여 출세하기 위해서 모든 선지자들이 승리를 장담하면서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22:7).”라고 하지요.



모든 선지자가 이구동성으로 전쟁에 나가라고 답하니까 여호사밧 왕이 좀 이상했는지, ‘이 사람들 외에 다른 선지자는 없습니까?’라고 물었고, 이스라엘 왕이 이런 답을 합니다. “미가야라는 선지자가 있는데 이 사람은 좋은 말은 하지 않고 나쁜 일만 예언하기에 나는 저를 미워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미가야를 불러옵니다.



이번 강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면서 한 단어를 기록하겠습니다. ‘거짓 영’



20-22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거짓말 하는 영을 선지자들에게 보내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도 하나님과 한 편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 어떤 인간도 다른 사람에게 거짓 영을 줄 수 있는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거짓말 하는 영을 줄 수 없어요. 

제가 거짓말을 할 수는 있어도 남에게 거짓말 하도록 할 능력은 없습니다.



이 말은,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두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거짓말을 해야 할 운명으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거짓 영이 십자가 복음과 충돌하도록 합니다. 

신자들은 ‘십자가 피를 믿습니다.’라고 하면 십자가와의 충돌을 피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내가 어떤 말을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내 행동이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즉 믿음을 고백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미가야는 천상회의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아합 왕에게 조언했던 모든 선지자들은 천상회의를 모릅니다. 

그냥 수평적인 사람일 뿐입니다.



천상회의에 참여한 미가야는 수직적입니다. 

수평적인 역사에 수직적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을 전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수평적인 세상의 모든 일을 사실을 수직적 개입으로 조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거짓 영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 신발 끈을 잡아 당겨도 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거짓 영에 사로잡힌 자는 외부에서 건져주지 않으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외부에서 건져 줄 때 나타나는 현상은 ‘내 속에 있는 사단의 성질 때문에 늘 십자가가 싫어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나만의 단독적인 의를 쌓는데 전혀 보탬이 되지 않아서 주님을 거부했습니다.’ 

이런 고백을 합니다.



개인 구원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구원 받습니다. 즉 집단 구원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언약대로 지금도 생성되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직도 내가 구원되어 내가 행복하기를 원하는 마귀적 습성이 계속 올라온다는 이 자체가 

주님의 십자가 공로만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작업인 것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또 주께서 펼치시는 일을 저희들은 그냥 수용하면서 

구원은 주님의 고유한 권한이란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