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2017여름5강 성전 17073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8. 7. 12:53
2017-08-05 11:18:54조회 : 23         
2017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5강-열왕기상 강해:성전이름 : 오용익 (IP:119.192.174.155)

2017 여름수련회 제 5강(성전 : 이근호목사)

 

구약에서 초장기에는 구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애굽이라는 땅에서 빠져나오면 어디로 가는가? 약속의 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구원의 의미는 땅에서의 이동이지요. 애굽에서 살다가 딴 데 가서 사는 것을 구원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땅 하나 가졌다면 그것으로 구원되었느냐 그 문제가 생기겠지요?

 

애굽에서 살던 이스라엘 후손들이 고생고생 해가면서 약속의 땅을 접수했습니다. 그러면 구원된 겁니까? 이미 다윗시대에는 가나안 그 약속의 땅을 점령, 접수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구원될 것이 없잖아요. 흔히 구약을 공부하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 있다. 뭐? 씨와 땅을 약속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의를 더 포함시킵니다만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같이 자손을 많게 했다. 땅 주신다. 끝났네요. 얻을 것 다 얻었잖아요. 약속의 땅에 이미 도착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많아졌는데 새삼스럽게 거기서 또 구원을 받을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의 역사가 다윗시대로 끝날까요? 끝나지 않는다는 말은 그게 구원이 아니야, 그런 뜻이에요. 야곱이 별미를 바쳐서 복을 받아서 양떼가 많고 소떼가 많아졌다. 그러면 그것이 구원입니까? 그게 복 받은 거예요? 하박국에서는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지요.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한다고 했잖아요.

 

도대체 지금 다윗처럼 나라가 잘되고, 사람들 숫자 많고, 가나안 땅 차지했고, 아브라함 언약대로 이방민족과 전쟁해서 하나님의 나팔 불고 승리했고, 이렇게 모든 것을 했으면 여기서 구원의 의미가 뭐냐는 겁니다. 구원의 의미가 뭐냐? 간단한 문제인데, 이미 안정된 상태로 국가가 형성되었는데 구원의 의미는 뭐냐?

 

이 국가라는 것, 국가에서부터 구출돼야 돼요. 그런데 제가 줄곧 여러분을 의식해서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국가가 유일한 현실이며, 유일한 현실이라는 말을 제가 반복하는 것은 절대로 인간은 그 현실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눈에 보이는 현실 말고 우리가 어디 가서 살아요?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국가로부터 구출 받아야 되는 겁니다. 구출 받으려면 이 국가가 적폐, 어떤 적대, 부정한 요소가 있어서 이 국가가 무너지는 작업과 병행해서 새로운 국가가 성립될 때 국가라는 형식, 땅이 아니고요, 땅에서 세워진 그 국가라는 형식으로부터의 탈출이 성공하는 겁니다.

 

그러면 옮겨 타야 되는데 옮겨 탈 나라는 어디에 있느냐 하는 거예요. 현재 잘 먹고 잘 사니 전혀 나갈 마음이 없어요. 솔로몬 같은 경우에는 나라가 너무 잘 살아요. 그런데 그것을 싫어한다? 그것을 마다한다? 미쳤어요? 그것을 왜 마다해요? 사람들이 교회에 오면서 복 받기를 원합니다.

 

못사는데 잘 살고, 애들 잘 되고, 가정 화목하고. 또? 또 뭐요? 내 몸 건강하고. 또, 또, 또 뭐요? 그러면 되었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탈출할 용의가 되어 있습니까? 미쳤어요? 왜 거기서 탈출하는데? 구약의 탈출, 구출, 이게 신약의 용어로 하면 구원입니다. 구원이라는 말을 탈출로 봐야 돼요.

 

4자성어로 탈출이 뭐냐? 식겁했다. 큰일 날 뻔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솔로몬의 나라는 너무 잘 살거든요. 솔로몬의 나라가 여러분을 뭘 괴롭게 한다고요. 그렇게 못살아서 한 맺혔지 이렇게 잘사는데 왜 거기서 큰일 난다는 생각을 하겠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이 성경 이야기가 우리한테 아무런 유혹거리나 매혹거리를 제공 안한다는 이야기를 제가 하고 있는 겁니다.

 

잘 산다. 집안 잘 된다. 행복하다. “도를 아십니까? 구원에 대한 소식을 알려드릴까요?” 그러면 그쪽에서 하는 말이 “내가 그 소리를 들어야 될 이유를 설명해 보세요. 내가 당신으로부터 이 괜찮은 상황, 행복한 상황에서 구출, 빠져나와야 된다는 소식을 당신으로부터 꼭 들어야 될 이유를 당신이 나에게 이야기해달라고요.”

 

뭐라고 하겠어요?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사람들의 기대치에 도달했는데 왜 거기가 싫다고 빠져나오겠습니까? 이게 안 되면 사실은 열왕기상 강의 의미 없어요. 탈출해야 되는데 탈출할 맘이 없는데 무슨 강의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다윗시대의 탈출의 의미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못 그리는 그림이지만 그려보겠습니다.

 

여기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면서 싸우고 있습니다. “너 왜 전화 안 받아?” “바빠서 못 받았지.” “너 내가 싫으냐?” “싫기는 무슨? 친구잖아.” “너 전에도 그랬잖아.” “뭐, 뭐?” 이렇게 서로 티격태격 싸우고 있어요. 싸우고 있는데 저 뒤에서 토네이도, 혹은 큰 불이 났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렇게 서로 각자의 눈으로 보다가 둘 다 고개를 돌려서 같이 불난 쪽을 쳐다보면서 “뭐지?” 하겠지요. 이게 구원입니다. 지금 두 사람이 서로 잘났다고 싸우다가 저 뒤에 불이 난다든지……. 제가 전에 대구 비산동에 살았는데 서문시장에 불이 굉장히 자주 났어요. 이렇게 불이 난다든지 토네이도가 일어난다든지 뭐가 있어버리면 갑자기 둘 사이의 이야기에서 저쪽으로 관심을 확 돌리게 됩니다.

 

그러면 이 기존의 순간이 무슨 순간이 되느냐 하면, 이게 무의미가 되는 거예요. 이게 일상의 무의미가 되는 거예요. 내가 이 땅에서 하는 모든 것이 

갑자기 의미 있는 것이 발생함으로서 

이쪽은 일상의 무의미가 되고 

이쪽으로 의미가 쏠리면서 

이것은 적폐상황이라는 것이 드러날 때 

이게 바로 탈출이 되는 겁니다.

 

그게 열왕기상 8장 12절에 나옵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솔로몬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캄캄한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로소이다 하고.”

 

제가 권사님 보고 읽어달라는 이야기를 안했는데……. 이걸 부정어법이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타입이 꼭 그런 타입이에요. 여기 보면 “여호와께서 캄캄한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 캄캄한데 계시겠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걸 먹구름으로 설명한 거예요. 원래 이 세상은 인간만이 유일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어디에 가도 거기에 인간들만 살고 있어요.

 

인간들만 사는 인간들의 세상. 그런데 여기에 인간들이 의미를 붙일 수 없는 낯선 사태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땅을 방문한다는 소식입니다. 그냥 하늘에 계시면 될 텐데 구태여 이 땅을 방문하겠다는 거예요. 촌에 있던 시어머니가 한 25년 동안 생전 며느리 집에 안 오는데 25년 만에 처음으로 “얘야, 너희 집에 갈게.”라는 사태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자기일상이 무의미하게 되어버려요.

 

시어머니가 방문하면서 일상의 의미의 중심이 바뀌게 되는 것, 이것이 다윗시대의 탈출입니다. 다윗시대에 솔로몬이 국가가 만들어지고서 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성전을 건립하는 계획을 추진했다고 보통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전 건립하겠다.

 

그런데 우리가 그냥 들어버리면, 아, 국가는 국가대로 있고 그 안에서 성전 안에 만들겠다는 뜻이구나, 라고 생각하겠지요. 그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국가 무너집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모실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게 된다면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모든 의미가 심판의 대상, 나의 일상적인 모든 것이 같이 동거하기 때문에 과연 동거할만하냐, 못하느냐, 그 중차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아까 그 그림 다시 보세요. 

시커먼데 있다는 그 시커먼 것이 뭐냐 하면, 옛날의 구름기둥을 이야기합니다. 

그 구름기둥으로 인도해서 시내산의 흑암으로 왔고 

그 흑암은 나중에 성소 안에 있는 지성소의 어두움을 의미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계속 시커먼데, 컴컴한 데 계시는 거예요.

 

거기에 반해서 인간들은 어디에 사는가? 밝은 곳에 삽니다. 밝은 곳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활동영역이 되고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활동, 노동은 그 자체적으로 의미가 누적이 되지요. 내가 이만큼 고생했다는 이것이 누적이 되는데 그러면 그 누적을 보면서, 도대체 저 시커먼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있는 이 지상에 방문하셨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런 의미가 있는데 저런 하나님께서는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동행한다 하니까 동행하려면 조건이 있어야 돼요. 이쪽에 있는 어두운 곳에 계시는 하나님의 의미와 인간의 노동의 의미가 합치가 될 때만 동거가 가능합니다. 만약 합치가 안 된다면 인간세계는 전부 다 망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누가 아는가? 다윗이 알기 때문에 성전을 중앙센터로 만드는 거예요.

 

성전을 중앙센터로 만들어서 하나님이 컴컴한데 계시는 것을 밝은 대낮에 성전거주지를 만들어서 

이 거주지 주변에 우리를 포진해 버리면 

이쪽 하나님의 오심의 의미가 산포(뿌려주는 것)되어서 연결고리로 하게 되면 

성전의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거예요. 

이 성전의 네트워크가 시편에 보면, 이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그 네트워크, 그물망, 촘촘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거예요. 그것이 열왕기상 8장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난 뒤에 그 네트워크에 어떤 의미가 흐르고 있는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지상의 인간의 노동에서 나오는 의미하고 달라요.

 

인간의 지상의 노동의 의미와 다르다면 어떤 의미인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죄를 짓고 어떤 전쟁에 패배하고 전염병이 돌고 남들에게 여러 가지 학대를 받을 때에도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게 되면 그 모든 것을 원상복구를 시켜 줄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해주옵소서.” 이게 바로 성전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들어보게 되면 


구원이라는 것이 전에는 무엇이었나? 

내가 여기 애굽에 살다가 약속의 땅에서 사는 것, 나의 이동이 구원이라면, 다윗 전까지는 그랬다면 

진짜 구원은 뭐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지상에 이동하는 그것이 구원입니다


UFO. 인간들이 사는 여기에 외계인이 쳐들어오는 거예요. 에일리언.

 

시고니라는 여배우가 등장하는 <에일리언> 시리즈가 있지요. 아주 무시무시해요. 어두컴컴한데 계신다는 주께서 내 다리 내놔라 하는 식으로 계속 따라오는데 이 원초적인 창조의 의미가 없다면 인간들은 의미를 찾기 위해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호모사피엔스를 찾아야 돼요.

 

수직적으로 찾을 것이 없으면 호모사피엔스, 원숭이 쪽으로 가야 돼요. 거기서 나온 영화가 <혹성탈출> 유인원이죠. 여러 갈래가 있는데 그중 한 갈래가 진화한 것이 인류의 조상이다. 거기에 호모를 갖다 붙이는 거예요. 호모하빌리스, 호모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 호모아파렌시스, 최초의 이브, 이런 식으로.

 

현재 있는, 21세기에 있는 인간이 의미의 토대를 방사성동위원소의 연대측정방식으로 계속 추적하다 보니까, 최초의 인간은 아프리카에서 생겼는데 이것은 유인원에서 갈라진 그 고리가 오늘날 호모사피엔스가 된다. 그 호모사피엔스가 점점 발달해서 이제는 호모데우스, 인간 스스로가 신이 된다는 데까지 계속, 어디까지일지 모르지만 계속 진화한다는 거예요.

 

진화론에 의미가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발전이라는 의미가 있고 또 하나는 그냥 변화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은 발전이라는 의미보다 변화한다는 의미에 가깝게 진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늘 변화한다. 인간이 변화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두뇌피질이 정보가 많이 들어오면 피질 스스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변화하게 되면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예상 밖의 새로운 창의성이 발휘된다.

 

그 창의성을 발휘해서 미래에 인간은 불멸의 존재로 계속 나가보자는 거예요. 어디까지나 수평적입니다. 지구에 살다가 환경오염이 심해지고 지구온난화가 심각해지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달에 기지를 만든다든지, 달의 뒤편, 혹은 화성이나 목성으로 옮기면 된다는 거예요.

 

이게 구약적인 것, 애굽에 살다가 약속의 땅으로 옮긴다는 사고방식입니다. 본인들이 이동하는 거예요. 괜찮은 환경, 괜찮은 기후 찾아서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 전체가 적폐요 이 전체가 무의미, 의미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미 인지했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공포하는 그 기능이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만든 목적이에요.

 

원래 성전중앙은 비어있습니다. 인간이 끼어들 수가 없어요.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1년에 한 번밖에 못 들어갑니다. 그러면 공백이지요. 비어있는 그 빈자리에서 솟아나오는 천상의 기운이 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른 이방민족과 차이나는 나라로, 천국의 백성의 모형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형성되어 가는 것, 이것이 열왕기 초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궁금한 것. 구원이라는 것은 원래 인간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인간은 약속의 땅에 도달했기 때문에. 구원은 뭐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지상에 내려온 하나님의 자기과정, 자기경로가 구원이 되는 겁니다. 외계인이지요. UFO. 와서 태우고 인간이 살던 곳은 다 불로 싸질러 버리고 따라 나가 사는 것. 메시아가 와서 그렇게 할 때 어떤 원리가 있고 원칙이 있을 것이 아니냐는 말이지요.

 

너는 타라, 혹은 너는 타지 말라, 이런 것이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엘리베이터에 마지막 장로님이 탔는데 “만원” 그래서 장로님이 내리시고 잠시 장로님 부부가 생이별을 했습니다. 중량이 초과되었으니 더 이상 못 탄다는 이것은 엘리베이터의 원리잖아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에 타서 UFO처럼 따로 천국에서 살아가는 그 원칙은 무엇이고 원리는 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이 무의미하다고 했지요. 그 무의미한 것이 여기에 옮겨 탈 때 하나님 보시기에 무의미한 것이 옮겨 탈 때는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음으로 전환되면서 이 외계비행체에 올라타서 천국에서 살아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 무의미한 것을 유의미로 옮기는 그 방식은, 원래 둘이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서로 싸우는 이 의미, 이 의미가 무의미로 달라질 때의 그 원리하고 전혀 다른 원리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자기를 부인하다고 해서 구원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나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회개하면 성령세례 받는다면서요. 회개합니다. 성령세례주세요. 내가 예수 믿습니다.” 인간에게서 스스로 자기 힘으로 의미 있는 자기를 무의미로 아무리 탈색하고 그것을 증발시키려고 해도 그것은 불교가 돼버려요.

 

도 닦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는 닦여 봤자 점점 닦여진 그 자신은 빛이 나게 되어 있어요. 도 닦는 것도 공들이잖아요. 공들이 작품을 다 포기하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아기를 목욕시킬 때 더러워진 목욕물만 버려야지 목욕통 안의 아기까지 버리면 안 된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그러면 안 되고 아기를 목욕시켜놓고 아기까지 같이 버려야 구원을 받아요. 물 버리고 아기는 건졌다, 이러면 안 되고 몽땅 다 갖다 버려야 돼요. 그러면 만약에 그것까지 해내겠다 하면서, “나중에 목욕 다 하거든 목욕물과 함께 나까지 다 버려라.” 하게 되면 그쪽에서 시키는 대로 돈 받고 해주면서 나를 함께 다 버려줍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어떤 것이 있느냐 하면, 버림을 받으면서 ‘지금 잘 하고 있지?’라는 이 의식이 또 남아가지고 자기는 안 버려져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만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시간이라 하는 것은 의식에서 나오는데 이 의식의 문제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끊어지지 않는가 하면, a라는 감각이 오고 그 다음에 b라는 감각이 옵니다. ‘똑딱’이지요. 그 다음에 다시 a-b, 똑딱, 똑딱, 하게 되면 인간의 의식은 ab를 한 짝을 이뤄서 패턴화 시켜요. 그러면 그 다음에 a가 다시 올 때는 뭘 기대하느냐하면, 필히 b라는 것이 와야 그 패턴이 완성이 된다는 것을 은근히 기대하게 돼요.

 

이것이 바로 개인적 시간의식입니다. 이것은 남이 뽑아낼 수 없어요. 수학시간은 어째 그리 시간이 빨리 가는지. 누굴 기다릴 때는 시간이 더디 가는데 수학시간에는 몇 문제 풀었다 싶으면 벌써 5분 남았다고 하거든요. 이것도 수학공부를 좀 하는 사람에게나 해당되지 몇 분 뒤에 시험지 내고 나가는 사람은 관계없고요.

 

정말 수학이 좀 된다 싶으면 시간이 빨리 가요. 개인적인 시간의식은 특징이 뭐냐? 단절이 없어요. 왜 의식은 계속해서 지속되니까. 끊어짐이 없어요. 그래서 시간을 끊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왜? 내 기억에 끊어짐이 없으니까. 술을 마셨나요? 기억의 필름이 끊어지게.

 

그렇지 않고서는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은 절대로 끊어짐이 없이 줄곧 이어져 갑니다. 그래서 나라는 그 나는 기억덩어리에요. 기억의 다발. 내가 살아온 모든 감각들을 한 데 모아놓은 기억의 다발인데 기억은 의식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것이 지속돼요. 끊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어떤 발악을 해도 나 자신을 내 속에서 지울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스스로 무의미하게 만드는 이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방법은 뭐냐? 방법은, 성전에 올라타서 구원받을 사람은 성전자체 내에서 어떤 능력이 나와서 이쪽에 어떤 조치, 의미 있는 것을 무의미로 바꾸는 조치를 해줘야 됩니다. 조치를 해주는데 그것이 열왕기상 2장에 나옵니다.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보복이 일어나는 겁니다. 다윗이 죽고 난 뒤에 솔로몬이 칼을 휘둘러서 소위 주요 인물들 다 잘라냅니다. 소위 김 기춘, 최 순실, 우 병우 잘라내고 조국으로 물갈이해서 새롭게 포진시키죠. 그 작업이 열왕기 2장에 나옵니다. 주석이나 모든 사람이 이걸 보면서 솔로몬이 나라 만들기 위해서 권력을 집중시킨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뭘 빠트리느냐 하면, 그 국가가 일반적인 이방나라와 다른 원칙이 있다는 것을 빼먹어요. 그 원칙 모르면 탈출, 구출이 안 된다고요. 다윗시대에 살다가 정권이 바뀌어서 솔로몬시대에 살면 그것으로 행복이 이어집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성전에서 나오는 모든 원칙은 의미 있는 나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겁니다.

 

무의미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일상을 수정하라는 말이 아니고 뭘 해도 거기에 의미를 주지 말라는 거예요. 일상에서 뭘 하기는 해요. 하기는 하는데 이게 의미가 없다 이 말이지요. 이 방법에 대해서 지난 낯 설교에서 소개를 한 적이 있어요. 비오는 날의 수채화. 가수 세 명이 부르는 노래 있잖아요.

 

여러분은 세속은 잘 모르니까. 그 <비오는 날의 수채화>의 가사를 언급했습니다. 비오는 날에 깨끗한 붓 하나 감추고 비오는 거리에 나가서 색칠을 하는 거예요. 색칠을 하게 되면 음악이 흐르는 카페는 초콜릿 색깔, 빗방울 떨어지는 가로등 밑은 보랏빛으로 칠해버립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뭐냐? “세상사람 모두다 도화지속에 그려진 풍경처럼 행복하면 좋겠네.” 비오는 날의 그것을 수채화로 그려버리면 그 안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동작 그만이 되는 거예요. 얼음땡 게임이에요. ‘동작 그만’이 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나는 ‘동작 그만’ 인데 비는 계속 오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비 오라고 기우제 드렸습니까? 요청했습니까? 비오는 것은 누구 맘 대로에요? 내가 요청하지 않았는데 비가 계속 내리잖아요. 이 말은, 내 활동사이사이에, 너와 나 사이에 하나님의 활동, 행동이 계속 끼어들고 있는 겁니다. 끼어들고 있는데 우리의 주 관심사가 자기행동에 주목하다 보니 뭘 놓친 거예요?

 

주께서 비를 내리고 있다는 주님의 실존, 우리가 너무나 자기 노동에 집중하고 있다 보니까, 거기에 너무나 눈길을 주다 보니까 주님이 일하고 있다는 것, 비가 오는 것이 무의미해져버린 거예요. 욥기에 나옵니다. 욥과 하나님의 대화 가운데서 의미싸움이에요.

 

욥이 하는 말이, “제가 이런 일을 하고 이런 말을 했으니까 의미입니다.” 하니까 하나님 말씀이 “그렇다면 네가 염소새끼 낳을 때에 있었느냐? 황무지에 비가 올 때 네가 있었느냐? 북두칠성 만들 때 네가 뭐하고 있었지? 네가 태풍을 불게 했어?” 비오는 날의 수채화 중에서 욥은 하나의 정지된, 길가는 행인 2에 해당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욥이 스톱이 될 때 모든 것이 스톱이 됩니까? 아니지요. 욥이 스톱이 될 때 저 태양은 누가 요청해서 돌지? 별은 왜 빛나는데? 강물은 왜 흐르는데? 파도는 왜 치는데? 결국 이건 뭐예요? 우리가 만든 의미 있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무의미라고 배척했던 그 세계 속에 

우리가 하나의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끼어든 훼방꾼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채 무지한 상태로 자기노동, 자기행한 것만 집중해서 살면서 

얼마나 불평불만들을 해댔습니까?

 

그런데 그냥 비만오고 해만 비추는 것이 아니고 그 주인공이 여기 등장한다는 거예요. 그 주인공이 어두컴컴한데 계셨는데 이 음지를 양지로 드러내겠다는 겁니다. 국정원입니다. 음지에서 일했던 것을 양지로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너희들이 일상에서 자기 힘으로 했던 그 모든 것이 실은 하나님께서 다 의도한 네트워크의 일부였다는 것을 소개할 때 그게 구출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그 네트워크에 존재함을 소급해서 수용하면 돼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더 보탠다는 것이 수상해요. 뭔가 더 열심히 하겠다는 이것이 불신앙입니다. 그거 한다고 해서 태양의 각도가 바뀝니까? 바뀐 사람 있기는 있네요. 히스기야가 15년 더 사는 그것, 그것은 위반사태거든요. 이제 제가 이야기한 그 본론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성전과 인간 사이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살아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오면 됩니다. 성전은 그것을 받아주는데 여기 중간에 뭘 넣는가? 죽음을 경과해서 성전에서 받아줍니다. 성전은 뭐 하는 곳인가? 하나님의 죽음을 반복시키는 것이 성전 안에 있는 기계장치에요. “양 가져와. 소 가져와” 그래서 솔로몬은 지혜를 받을 때 일천번제, 일천번제니까, 일반번제의 천배나 했으니까 다 드리는데 한 1주 정도 걸렸지 않겠느냐 하는데 일천번제 끝나는 날에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요.

 

솔로몬이 국가를 세우고 거기서 피바람 내면서 정적들을 제거한 그것은, 내가 권력을 쥐었다는 자기권력욕구에 의한 국가설립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전, 우리 아버지 다윗이 그렇게 원했던 음지에 있던 하나님을 양지로 드러내는 그 작업을 제 선에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유언이고 다윗언약의 지속성입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죽음 안에서 뭐가 끊어지는가 하면, 우리의 지속과 우리의 동질성이 다 끊어지는 겁니다. 우리의 시간은 끊어집니다. 그러면 여기 성전안의 시간을 뭐라고 하는가? 그걸 묵시라고 하는 겁니다. 묵시와 우리의 시간과의 차이점은, 묵시는 기존의 모든 인간들의 연속된 시간을 끊는 거예요.

 

제가 이걸 자기고 첫 시간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원고의 마감날짜에요. “원서 마감되었습니다. 합격자 발표 했습니다. 이미 14만 4천으로 끝났어요. 더 이상 서류 안 받습니다.” 끝났습니다, 가 포함된 묵시에요. 왜 끝났느냐 하면, 모든 것은 묵시를 이루는 근거가 되는 메시아의 행동이 다 이루었기 때문에.

 

다 이루었기 때문에 묵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묵시에 포함이 되는 UFO에 들어간 사람은 뭘 보느냐? 뒤돌아보면서 살아요. 뒤돌아보면서 사는 그 해석이 요한계시록 해석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모든 것은 우리가 뒤돌아보면서 사는 거예요. 앞으로 될 일도 과거에 속하는 겁니다. 앞으로 될 일도, 과거 현재의 이 지상에 흐르고 있는 역사는 ‘다 이루었다’ 앞에서는 이미 완료된 채 그 안에서 흐르고 있는 시간에 불과해요.

 

“그래. 시간아, 흘러라. 나는 정답을 쥐고 있거든.”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목 베인 영혼, 두 번 사는 거예요. 부활도 두 번 있고 죽음도 두 번 있어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첫 번째 부활에 이미 들어간 사람입니다. 첫 번째 부활에 들어가 버리면 이미 인간의 동질성은 끊어진 거예요.

 

인간의 동질성이 끊어졌다는 말은 과거에 있던 내 이미지와 과거의 내 아픈 추억, 트라우마, 마음의 정신적인 상처, 부부싸움 해서 얻어맞은 상처, 이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하게 되는 거예요. 왜? 이미 주님이 십자가지실 때 그런 쓰레기는 다 소각시키기 때문에 그래요.

 

“너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주님을 위해서 일어난 일, 복음을 위해서 일어난 일이지 너의 지속성과 동질성을 위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아예 기억의 다발을 소각장에 집어넣어 버리는 거예요. 그걸 지난 낯 설교에서 했는데 그걸 가지고 이중처벌금지법이라고 했어요.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어떤 남편이 아내를 죽였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서 모든 정황이 남편이 죽인 것으로 나오니까 경찰과 검찰에서 시체 없는 살인에 대해서 18년 옥살이를 했다 칩시다. 18년 살고 나왔는데 경찰도 검찰도 남편도 그제야 보니까 아내가 다른데서 다른 남자 만나서 잘 살고 있어요.

 

그때에 던진 문제가 뭐냐? 지금 살고 있는 아내를 죽일 때 그것이 처벌받느냐는 겁니다. 왜? 18년 동안 받은 것은 뭡니까? 18년 동안 형을 산 그것은 뭐예요? 안 죽였는데 이미 죽였다고 했잖아요. 지은 죄는 없는데 벌은 다 받았잖아요. 이미 벌 받은 입장에서 이제 본격적으로 소매 걷어붙이고 칼 들고 이제 아내를 맘대로 죽여도 이중처벌금지법에 의해서 용서받을 것 밖에 없지요. 벌부터 먼저 받았으니까.

 

벌부터 받고 죄는 나중에 짓고. 그게 성도 아닙니까? 십자가에서 벌 다 받고 이제 남은 것은 죄 짓는 것만 남았네. 이 느긋함, 아, 이 자유스러움, 이 자유의 바람. 결국은 내가 하는 행동, 아침 먹고 점심 먹고 강의 듣고, 이 모든 행동이 어떤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느냐 하면, 그걸 하면서 나라는 동질성, 지속성, 나라는 과거에 대한 감각, 말하는 자아, 이 모든 죄 때문에 주께서 미리 십자가 졌다는 것을 알고 그 다음에 우리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 나는 혼자다, 나는 나만 사랑한다는 이 죄가 있잖아요.

 

죄라고 해서 엉뚱한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펑범한 모든 것, 존재가 유죄입니다. 그 모든 죄를 묵시적 관점에서 행할 수가 있는 겁니다. 너는 무슨 통뼈가 되어서 그렇게 대담하고 담담한가? 이것은 주님께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래요. 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 사람의 의미는 새로운 네트워크에서 구성된 의미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은 성공을 했니, 주식투자를 어떻게 했니, 하는 그런 것은 다 의미 없는 거예요. 참 이론은 그럴싸하다. 이것이 이론으로 맞는 이야기인데 솔로몬의 성전중심의 국가가 성립되면서 그 다윗시대에 구원이 되고 구출이 되는데 문제는 사람들이 “목사님, 그것을 늘 수시로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수시로 알았으면 좋겠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 마음대로 안돼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 행복하라고 수시로 “너는 깨달아라. 다 이루었다.” 이렇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복음이라는 그 원천적인 작동을 위해서 필요할 때만 수시로 깨닫게 해요. 어떤 사람은 그 텀이 12년 5개월 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5분마다 십자가를 깨닫는 사람이 있고, 그것은 본인소관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그 네트워크의 활용도에 따라서 집중해서 활용할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어요. 제가 이렇게 하면 “12년 5개월 만에 십자가 은혜를 알았다면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 맞습니까? 나는 너무 오래 걸리는데. 텀이 너무 길어서 12년에서 다음에 25년이 되면 그 사이에 재림하신다든지 할 때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는 어떤 징조 같은 것이 따로 없겠습니까?” 이렇게 걱정을 하거든요.

 

분명한 것은 교회 머리가 주님이잖아요. 성전의 주인공이 주님이잖아요. 그렇다면 그런 걱정조차 적폐가 되겠지요. 무슨 뜻이냐 하면, 12년 5개월 만에 십자가를 알았다면 그 때 “바보같이 내가 좀 자주 알걸. 이렇게 12년 5개월 만에 알다니.”라고 후회할 수 있는 주체적중심이 없어요. 12년 5개월 만에 알면 그 순간이 묵시의 순간이기 때문에 그 12년 5개월이라는 그것이 하루 같고 하루가 12년 같아요.

 

지나간 것이 12년이냐, 20년이냐, 5백년이냐, 그것은 깨달음의 순간이 왔을 때……, 깨달음의 순간이라고 하니까 꼭 법정스님 같은데, 깨달음의 순간이 왔을 때는 그런 기간마저도 무의미해져버려요. ‘진즉에 알걸’ 이런 욕심을 내지 마세요. 그러면 그 깨달음이 왔을 때 어떤 느낌이 정리되느냐 하면, “12년 동안 주께서 꾸준하게 이끌고 오셨군요. 그리고 앞으로도 묵시세계에서 그렇게 이끄실 거군요.” 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또 자기 지평적인 시간 스케줄을 끄집어내서 남들은 3일 만에 은혜를 받았다 하는데 나는 12년 만에 은혜가 왔다는 식으로 남과 비교하는 그런 것은 나중에 진짜 은혜를 받게 되면 다 무의미한 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지요. 어쨌든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언약에서 나오는 것이 뭐냐?

 

죽음이 나오는데 솔로몬시대에서는 그 죽음을 도와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게 나단선지자에요. 그러면 이제 기초는 얼추 했다 치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열왕기에 들어갑니다. 열왕기상에 이제 들어가는데 나단 선지자가 솔로몬 왕에게 조언을 해서 정적들을 다 처단했습니다.

 

그렇다면 왕이 높은가, 선지자가 높은가, 그런 생각이 들겠지요. 솔로몬이 그냥 솔로몬이 아니고 제사장입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은 솔로몬을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는 것이 아니고 솔로몬은 유일하게 공백, 빈자리를 아는 사람이에요. 솔로몬 안의 빈자리가 뭐냐? 성전입니다.

 

그러면 솔로몬은 성전지킴이에요. 이 말은 뭐냐? 모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은 “나 아니오.” 아까 이걸 무슨 어법이라 했습니까? 부정어법이에요. 나 아니요. 인간의 열심에서 나온 의 아니요 하나님의 의.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모든 것이 앞에 부정어법이에요. 첫째 시간에 부정어법을 뭘 로 이해한다고 했습니까? ‘AND(그리고)’

 

다시 할게요. 앞과 뒤에 차이나는 두 개의 개념을 설치하고 ‘그리고’라고 한다면 뒤에 있는 이 요소로 말미암아 기존의 개념을 뒤엎고 새로운 개념으로 전체를 통합시키는데 ‘그리고(AND)’가 들어간다 그 말이에요. 그래서 차이나지 않는 ‘그리고’는 소용없어요. 브라질과 이탈리아, 이런 식으로 똑같은 인간끼리 붙여봐야 소용없다 했지요.

 

차이나는 거요. 그래서 성전에서 솔로몬은 비어있는 것만 주목하고 쳐다보도록 하게 하는 그 능력이 빈곳에서 언약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국가는 없습니다. 이번 수련회 제목이 뭡니까? “은밀한 나라.” 나라가 없어요. 나라가 없다는 것을 뭘 로 내세우는가? 솔로몬 나라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의 있음이 진짜 이스라엘이 없음을 증거 하는 있음이 되는 거예요.

 

제 실력으로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사자성어로 해서 “영구 없다.”를 누가 이야기합니까? 영구가 이야기한다고요. 영구 없다! 이거 누가 합니까? 본인이 이야기하잖아요. 여기서 웃어줘야 되는데……. “나 성도 아니야.”라고 누가 이야기해요? 성도만이 할 수 있어요. 계속 자기를 비우는 거예요. 자기를 비키는 거예요. 자기 아니라는 말이지요.

 

너희들이 나를 존재로 보지만 나는 존재를 거부하는 어떤 기능, 기능관계, 그 언약관계에 있어요. 그러면 보이지 않는 것이 실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이 기능이 어떤 기능이 있느냐 하면, 전염병 돌 때, 그리고 죄를 지었을 때에, 전쟁에 패배했을 때, 그런 것들이 죽 나옵니다.

 

열왕기상 8장이 긴데 8장 46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참 이게 복음 아닙니까?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있다고요? 없어요. 무의미해요. “나는 범죄 했는데 이제 범죄 안해야지.” 의미 없습니다. “내일부터 착하게 살아야지.” 의미 없어요. 착하게 살겠다는 그 자체가 범죄에 해당돼요.

 

“내가 잘하면 되잖아요.” 네가 잘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없다고 해야 돼요. 하는 내가 없는 거예요. 내가 없으니까 잘하는 것도 없어요.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에브리바디 없어요. 있는 것은 주님이 있음으로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각자 지금 눈에 보이는 존재들로 이렇게 짜여 있는 겁니다.

 

믿을 것을 믿어야지 인간을 믿어요? 없어지는데? 오늘 있다가도 내일 없어지는 안개니라. 물방울이라고 했잖아요. 의미 없으니까 막 살아도 되는 거예요. 조심조심 살 필요가 없다니까. 발을 조심조심 할 필요가 없어요. 물론 남에게 피해가면 안되니까 쿵쾅거리지는 마시고요. 층간소음이 되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만약에 내일 어떤 시험, 운전면허시험이 있다고 하면 본인이 알아서 조신하게 살아요. ‘내가 브레이크를 팍팍 밟다가 떨어질 수가 있다. 지금 내가 착함의 선행을 많이 쌓아놓으면 그것이 다 업보가 되어서 낼 운전면허 시험에 한 번에 합격할 가능성이 있다.’라는 이 법이 내 속에 관통해서 작용한다니까요.

 

내일 수능인데 술 처먹고 들어오는 가장은 없어요. 아무리 술을 좋아해도 적어도 큰 아들 맏이의 수능시험일 전날은 자숙하는 겁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실제로 이것은 하지 않지만 내일 큰 일 앞두고, 큰 계약 앞두고 무질서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동은 복음 안다고 해서 바뀌지 않아요.

 

우리교회는 새벽기도 없습니다만 새벽기도회 자주 나오면 ‘무슨 일 있구나.’ 그 다음에 새벽기도에 안 나오면 ‘해결되었구나.’ 자기에게 의미된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걸 놓치기 싫어해서 정성을 다해요. 정성과 조심과 윤리도덕을 집중시킵니다. 그게 범죄에요. 여전히 자기의미를 고수해서 그것으로 스스로 자기를 거룩한 곳으로 구출해내려는 타고난 인간의 육적인 본성이기 때문에.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원근을 물론하고 적국의 땅으로 끌어간 후에 저희가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 사로잡은 자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하며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 열조에게 주신 땅 곧 주의 빼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저희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저희의 일을 돌아보옵시며.”(왕상 8장 46-49)

 

솔로몬이 숨도 안 쉬고 기도한 모양이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이제 이 성전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런 일이 이스라엘에게 필이 벌어져야 됩니다. 포로 잡혀 가야 돼요.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겁니다. 무엇을 증거 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없는 비어있는 곳이 모든 있음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그것을 우리는 항아리처럼 껴안고 있는 백성이다. 이것이 택하신 백성입니다.

 

포로 잡혀도 괜찮아요. 망해도 괜찮아요. 그것이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그렇게 되는 네트워크의 일부로 생각하신다면, 기능으로 생각하신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과 연관성이 있는, 연결되어 있는 생명과 함께 있는 묵시의 존재입니다.

 

십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