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2017여름6강 선지자의 나라 17073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8. 7. 12:54
2017-08-05 11:20:06조회 : 34         
2017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6강-열왕기상 강해:선지자의 나라이름 : 오용익 (IP:119.192.174.155)

2017 여름수련회 제 6강(선지자의 나라 : 이근호목사)

 

지난 시간에 놀라운 것 중 하나는 성전이 있어서 그 솔로몬 나라가 계속해서 잘 되어간다, 라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말라는 거예요. 성전 만들어서 나라가 잘 되게 되면 그것을 주님의 나라로 간주하지 않아요. 거기에 살고 있는 내 나라로 간주합니다. “우리나라 좋~다.” 그렇게 돼요.

 

“우리나라 솔로몬 있고 우리나라에 성전 있다. 너희 나라는 그런 것 없지?” 이렇게 돼버립니다. 그게 언제까지 되는가? 종말 때까지 계속 돼요. 신약의 성도는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나오지만 신약 때 오기까지 구약은 뭔가 괜찮은 것이 있으면 즉각적으로 자기자아를 결부시켜서 자아라는 것을 형성시켜 버려요.

 

교회도 그런 것이 있잖아요. “우리교회 설립자 목사님이 얼마나 희생했는지. 손수 벽돌 지어 날라서 교회 지어서 처음에 25명 모였는데 지금 4만 명 모인다.” 하거든요. 25명 모였던 것이 지금 부흥되어서 4만 명이 모인다고. 누구 교회 말입니까? “내가 다니는 교회.” 똑같은 그 잘못을 구약에서 시범조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 솔로몬나라를 운영하는 언약적빈공간에 있는 하나님과 그리고 그 솔로몬나라라고 자처하는 인간들과 사고방식에 있어서 얼마나 괴리가 일어나는지. 망하라고 만든 이스라엘나라를 영원무궁하도록 만들고자 시도하는 인간의 발동이 걸리게 되어 있어요. 우리나라 애국가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그 동해물은 유성 하나 떨어지면 십분 내로 다 말라버립니다. 유카탄 반도에 유성이 떨어져서 공룡이 멸종되었다 하잖아요. 보통 진화론에서. 유성 떨어지면 바닷물 금새 다 흡수 통합됩니다. 솔로몬 왕의 후반에 하나님의 언약이 용납하지 않는 다른 언약이 이방아내를 통해서 계속 수입이 되지요.

 

그렇게 하는 것은 솔로몬의 개인적 견해가 아니라 이스라엘 국민들의 여망입니다. “이 좋은 상태를 계속 지속시켜 주신다면 참 고맙겠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그 나라가 언약을 포기하고 인간들의 집단의지에 따를 수밖에 없어요. 집단의지라는 것은 루소의 개념입니다. 일반대중들의 집단의지에 의해서 국가가 성립할 때 가장 완벽한 국가라고 이야기했어요.

 

집단의지라는 것은 요새말로 하면 여론, 어렵게 해서 이데올로기, 허위의식, 그런 것입니다. 대중들의 생각, 촛불, 이런 것을 이야기하지요. 그것으로 나라가 되고자 하는 이것은 뭐냐? 빈 공백을 인간의 욕구로서, 인민들의 욕구로서 완전히 덮어버리고 메워버리는 겁니다. 빈공백이 없는 거예요.

 

빈공백이 있어야 자기가 무의미한데 공백이 사라져버리면 너나 나나 다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남아 있는 것은 여기서 공백이 없는 이 인민들의 집합에서 권력이 나와요.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나라는 영원히 지구에서 멸망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링컨이 1863년도 1월 달에 노예해방을 선언했는데 그 이유가 소비자를 확대시키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원래 농노와 노예는 구매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그것을 월급 주는 일반노동자로 바꿔버리면 경제가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남부에서는 농노기 때문에 구매자가 아니지만 북쪽의 임금노동자가 되면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북쪽이 더 잘살게 되는 겁니다.

 

그런 기업주의 여망을 링컨 대통령이 외면해서는 안 되지요. 노예해방, 전부 다 임금노동자로 바꿔라, 해서 노예해방을 선언한 겁니다. 다 경제적 이익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처럼 대통령은 인민들의 권력의 상징적 존재로 있어야 됩니다. 여기서 두 가지가 있지요. 하나는 레위인이 있는 나라와 레위인이 없는 나라로 바뀌어요.

 

레위인이 없는 나라가 북이스라엘이고 레위인이 있는 나라가 유다나라입니다. 나라가 둘로 쪼개져요. 레위인이 하는 일이 뭐냐? 사람을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굴 위해서 하는가? 레위인은 하나님을 위해서 하지요. 하나님이 안보이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권력을 줍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권력을 주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우리에게서 권력을 빼앗아가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생산되는 모든 의미를 그 때마다 압수하고 빼앗아 가버립니다. “너는 뭘 해도 의미 없어.” 이렇게 빼앗아가는 일을 주께서 하고 계시는 거예요.

 

빼앗기게 되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모든 것을 빼앗기니까 텅텅 비어있는 것이 되지요. 비어있으면 존재의 가벼움이 돼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네가 뭘 해도 의미 없다.” 여러분, 이게 서글픕니까? 가벼우면 성도고 서글프면 성도 아니고. “그러면 나는 뭐하란 말인가?” 이런 발악을 하게 되면 “야, 무겁다, 무거워. 무겁네. 무거워도 너무 무겁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잘되었다 이참에. 이참에 중앙지는 주님이 다 점령하시고 나는 하고 싶은 대로 살렵니다.” 이게 얼마나 가볍습니까? 빼앗아 간다는 것은 책임진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레위인이 없다는 것은, 북쪽 이스라엘은 인민에 의해서 나라를 새로 만들어보자는 겁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나라에 포진되어 있는 비언약적나라, 이방나라들이 하는 행태와 똑같습니다.

 

권력에 대해서 현대이데올로기 이론에 의하면 권력이라는 것은 대중들이 지도자를 원하는데 그 지도자의 통치이념은 사실은 지도자의 이념이 아니고 피지배계층의 이념을 반영한 것이라는 이론이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발리바르라는 정치학자가 내세운 것인데요. “이념은 피지배자의 목소리의 흔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봉기의 가능성, 혁명의 가능성은 통치자가 억압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내부적으로 그들이 권태롭다든지, 심심하다든지, 바꾸고 싶으면 봉기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이것은 아까도 상상적질서와 상징적질서로 이야기했습니다만 현대 민주주의정치라 하는 것은 뭐냐? 그거 가지고 노는 장난감 같은 거예요.

 

나이 60넘어 퇴직했다. 연금 타먹으면서 집에 있으면 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케이블TV 보는 거예요. 종편이라 합니까? 거기서 종일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싸워라, 싸워라, 그거거든요. “나에게 새로운 게임하는 모습을 보여줘.” 그게 취미가 되는 겁니다. 정치라 하는 것은 축구나 야구 같은 게임이고 “누가누가 잘하나 보자. 야당이 잘하는지 여당이 잘하는지 보자.” 자기는 그걸 바깥에서 즐기고 있는 형태가 오늘날 정치라는 겁니다.

 

정치라 하는 것은 잠시 등장하는 꼭두각시가 나오는 무대극 같은 거예요. 그러면 그 기반은 뭐냐? 그 기반은 경제가 꽉 쥐고 있는 거예요. 이게 마르크스 이론이에요. 경제의 심층적인 하부구조가 정치라는 상부구조를 형성한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요.

 

이것이 망상이에요. 쓸데없는 꿈을 꾸고 있는 겁니다. 정치를 하는 이유가 뭐냐? 할 짓이 없어서 정치하는 거예요. 권태로워서, 심심해서. 더 재미난 일이 없어요. 그래서 싸우고 찢고 하는 것이고 재미로 하는 겁니다. 그 나라가 어쩌면 우리들이 안고 있는 괴물, 악마의 모습에 가장 자연스럽게 부합이 돼요.

 

이 말은 뭐냐? 그동안 레위인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섬긴다고 제사 드린다고 양 잡고 소 잡는 것이 그 당시 사람에게나 우리한테는 얼마나 껄끄럽고 부담되고 부자연스런 일인지 몰라요. 식사할 때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럽습니까? 바쁜데 성경책 들고 교회 가는 그것이……, 물론 요새는 성경책 들고 가지도 않지만요. 전부 다 스마트폰 들고 가요. 교회 가서 예배하는 이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거예요?

 

‘내가 지금 쓸데없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교회에서 그걸 간파해서 “우리교회 오시면 재미난 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번에 남전도회 독도가기로 했습니다. 함께 갑시다.” 이런 것. 계속해서 즐길 거리,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그 부목사는 내년에 재계약이 성사될 가능성이 많아요. 그냥 노는 판이에요. 정보를 획득하는 곳, 어디가면 어린이집 잘 가르치고, 어디가면 피아노 레슨을 싸게 받을 수 있는지, 어디가면 좋은 물건을 싸게 구입하는지, 어느 보험이 괜찮은지, 이런 것들 있잖아요.

 

어디 가면 아가씨들 물 좋고 총각들 많은 교회는 어디인지, 그런 거요. 어디 가면 기업체 회장들이 있어서 취직자리 열어줄까,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그러한 사교모임,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에요. 공백이 없으니까. 그걸 인간적인 힘으로 덮어버렸어요. 종교라는 것도 사회일부로서 하나의 심급이라 하는데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서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자는 그것뿐입니다.

 

그것은 북쪽 이스라엘에서 그렇게 한 거예요. 지금부터 열왕기에서 북쪽 이스라엘로 갈라질 그 때 성전이 있는 유다나라와 성전 없는 나라로 갈라졌다고 제가 언급했지요. 그러면 그렇게 갈라지는 것이 나쁜 일입니까? 이게 필연적입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안고 있는 그 다윗언약, 솔로몬이 있는 성전에서는 성전에 그냥 집안에 하나님이 가두어진 것이 아니에요.

 

성전은 건물이거든요. 성전이 건물인데 그 성전에 계신 분이 무형체, 형체가 없는 식으로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형체 없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나중에 그 이름에 합당한 실체가 결합이 된다는 말이지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다윗의 자손이여.” 이렇게 돼요.

 

이름이 먼저 있고 그 이름에 합당한 실체, 어떤 육신이 나중에 등장해요. 어쨌든간에 중요한 것은, 복음은 뭐냐? 하나님이 이 땅을 방문했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 하나님이 왔다는 거예요. 불이 나면 쳐다보듯이 “누구야?” “하나님이야.” “뭐?” 이럴 때 우리는 그 관심사를 하나님이 오신 거기에 주목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사실 그것도 그때뿐이지만.

 

성전을 건물이라고 할 때 이 성전이 건물이다, 라고 다윗은 생각했고 솔로몬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를 제가 봤는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옛날 일본의 괴기영화에 보면 브라운관에서 머리 풀고 흰 소복입고 아줌마가 기어 나오는 대목이 있지요.

 

<링> 브라운관 화면에서 머리 긴 여자, 하도 머리가 길게 덮어서 얼굴도 잘 안보여요. 컷을 좀 하든지 해야 할 정도로. 머리를 치렁치렁 해서 화면에서 기어 나옵니다. 브라운관에서, 비인격적인 물체에서 인격체가 튀어나오지요. 이 성전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다윗가문을 튀어나오게 만들어요.

 

이렇게 되면 건물은 뭐냐? 하나의 허물이 돼요. 뱀의 허물. 허물을 벗고 그 안에 있는 주인공이 “나도 한번 이 땅에 살아보자~자~자~” 해서 기어 나오지요. 다윗가문이 나오는데 그 다윗가문의 열차가 길어요. KTX처럼. 길쭉하게 되었는데 그 마지막 끄트머리가 여인의 후손 메시아가 그 끝부분에 연결되어서 등장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14대, 14대, 14대로 해서 마지막에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 나시니라, 스스로 나시니라, 임마누엘, 이렇게 소개되어 있어요. 신약과 구약이 다윗언약을 모르면 예수 그리스도가 어디서 기어 나오는지를 몰라요.

 

예수님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예수님은 공백에서 나왔지요. 빈자리에서 나온 거예요. 빈자리에서 나오게 되면 주변에 있는 소위 땅을 밀어내는 겁니다. 쭉쭉 밀어내는 거예요. 쭉쭉 밀어내게 되면 주름이 지겠지요.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 하늘의 별도 집결하고 동방박사 집결했습니다.

 

집결할 때 누구도 따라 나오는가 하면, 아기 예수가 태어나기 전에 꾸준히 이 세상을 지배하던 악마도 여기에 주목해서 헤롯을 시켜서 두 살 밑의 애들을 다 죽이게 만들었어요. 이것은 특이한 사건입니다. 애 하나 그게 뭐라고 군대를 동원합니까? 이것은 헤롯의 자기생각이 아니고 헤롯을 지배하는 배후의 악마가 공격하는 거예요.

 

인간은 그런 아이디어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 오셔서 귀신보고 나가라고 하니 귀신이 나가잖아요. 병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이 나가는 거예요. 군대귀신이 막 나가고요. 나가면서 한 소리 하지요.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오셨군요. 아직 시간도 안 되었는데 너무 일찍 오셨잖아요.”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은 “뭐라는 거야?” 대화 내용 자체를 몰라요. 기괴합니다. 공백이, 존재로 연결되어 있고 꽉 차 있는 이 세상에 뻥, 뻥, 하고 구멍이 뚫리는 겁니다. 구멍 사이에서 뭐가 나오는가? 하늘의 낯선 기운들, 성령께서 그 구멍을 통해서 기어 나오지요

제발 바라기는 여러분이 누더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천지에 스타킹도 펑크 나고, 양말도 펑크 나고, 온 옷에 펑크가 나서 

내가 아닌 다른 요소가 거기서 온천수 나오듯이, 

예상 밖의 카톡이 울리듯이 

계속해서 낯선 기운이 뿜어지기를 바라요.

 

누가 보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미쳤든 말든. 미친 것에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편집증이라 해서 하나 안에 모든 것을 집결시키는 그런 증세가 있는 반면에 

자기가 여러 개 되는 것을 정신분열증이라 해요. 그래서 들뢰즈라는 학자는, 이 세상 인간은 두 종류로 되어 있다. 하나는 편집증, 또 하나는 정신분열증, 다 같이 미친놈들이라고 했어요. 출세하려고 하는 것은 도착증, 집착증, 편집증, 그리고 남에게 아부하는 것은 정신분열증.

 

여기서 뭐 하면 예, 예. 저기서 뭐 하면 또 예, 예. 정신분열증 환자. 이렇게 두 종류밖에 없어요. 자진해서 을이 되고 하나는 자진해서 갑이 되어야 되고. 그 두 종류밖에 없는데 사실은 두 종류가 아니에요. 그 두요소가 함께 우리 안에 들어 있어요. 상황 따라 달라지지요. 자기가 자기를 구성하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어쨌든 이 성경이야기를 제대로 하게 되면 이것은 미친개 이야기에요. 귀 옆에 해바라기 꽃 꽂아야 돼요. “남에도 눈이 와요” <환상이 커플> 에 나오는 대사 있잖아요. 뭘 봐야 대화가 되지요. 긴 꼬리를 드러내면서 성전에서 나옵니다. 나오면 성전은 그냥 허물이에요. 성전은 허물이니까 나중에 완료, 메시아가 왔다 싶으면 이 성전은 허물이니까 불타 없어져야 돼요.

 

그런데 유다나라나 북 이스라엘이나 모두 무엇에 관심이 있느냐 하면, “우리는 성전 있다.” 존재입니다. 뭔가 걸치고 있다는 것. 공백으로 뭉쳐야 되는데 성전덩어리를 갖고 있는 거예요. 지금도 1948년 독립한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에도 이스라엘군대가 이슬람사람들 동쪽으로 못 가게 막아서 몇 명 죽고 대치 상태에 있지요.

 

이 성전은 스가랴의 예언에 의하면 언젠가는 감람산에 메시아가 두 산에 두 발 딛고 나타난다는 겁니다. 유대인의 메시아는 신이 아니에요. 인간이에요. 다윗의 세습화된 왕이 실제 인간의 모습으로 감람산에 서게 된다는데 내가 그 소리 듣고, ‘대체 유대인의 메시아는 키가 얼마나 되어야 되는데?’

 

딱 보니까 어떤 이미지냐 하면, 바로 배트맨이에요. 스파이더맨이고. 어벤져스 이미지에요. 그 감람산에 턱 하니 거인이 섰다. 유대인들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보수주의라고 하는 사람들, 7년대환란같은 이상한 소설 쓰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도 지금 “이스라엘을 주목하라.” 이러고 있어요.

 

이 사상과 같지 않은 것은 대체신학이기 때문에 우리만이 진짜 복음이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어요. 성전이 깨어지게 되면 이 성전은 이 성전의 내용물에 의해서 대체가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집은 예수님의 몸이 하나님의 집이 되고 그 예수님의 몸에 함께 있는 성도가 움직이는 성도가 되는 거예요.

 

성전은 형체가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메시아가 사느냐 죽느냐로 결정되는 거예요. 메시아는 오늘날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따라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성전이 되는 겁니다.

 

유다는 “우리는 성전 있다. 우리는 레위인 있다.” 그런데 북쪽 여로보암은 혹시 남쪽의 성전에 갈까 싶어서 경계선인 단과 벧엘에 두 개의 성전을 따로 만들고 8월 15일 광복절에 대 속죄일을 만들어서 남쪽에 있는 여호와종교와 유사한 종교를 설치해서 고객만족에 나섰습니다.

 

레위인도 아닌 다른 사람을 제사장으로 삼아서 “너희들의 종교욕구는 충분하게 보장해준다. 남쪽 성전 있는 곳으로 가지 말라.” 그러니까 남쪽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니.”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너희는 성전 있나? 우리는 있어.” 그들은 성전 없는 채로 망했고 유다는 성전 있는 채로 망해요.

 

망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왜? 성전에는 건물에 갇혀있는 분이 계신 것이 아니고 어떤 새로운 혈통을 통해서 다윗의 자손으로 계속 이어져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혈통에 속한 사람은 참 좋겠다. 왜? 다윗의 혈통이니까. 그 혈통에 속한 사람, 어떤 사람이 그 혈통에 가담될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것은 그 혈통에 소속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혈통을 부정하는 힘이 있어야 돼요. 그 부정하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선지자에서 나옵니다. 열왕기를 봅시다. 솔로몬성전을 짓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솔로몬 성전은 딴 게 아니고 모세 때 지었던 그 성막에서 딱 곱하기 2를 하면 돼요.

 

모든 치수가 딱 두 배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언약궤가 있고 그렇거든요. 하여튼 아까 이야기한 대로 어두컴컴한 음성적인 것을 성전을 통해서 양성화시켰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12장에 들어갑니다.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저로 왕을 삼고자 하여.”

 

솔로몬은 사라져야 될 이유가 솔로몬이 사라지면서 이 나라는 솔로몬의 나라가 아니고 사실은 다윗의 나라, 다윗언약의 나라입니다. 이런 것을 설명하려고 하면 제가 자꾸 부담이 돼요. 참 다윗언약이 어려워요. 생물학적인 다윗과 다윗언약의 차이가 뭐냐? 다윗이 다윗언약에 속했을 때는 다윗이 범죄를 했어요.

 

밧세바와 간음을 했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장군을 살해해요. 그래서 다윗언약에 속합니다. 다윗은 존재에서 출발해서 “나는 왕이다.” 이렇게 했는데 다윗언약에서 다윗은 “나는 죄인이다.”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죄인에서 출발해서 다윗언약에 뭐가 기다리는가? 레위인이 기다려요.

 

레위인이란 어떤 기능입니까? 제사 드리는 거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양 바쳐서 죄인을 구원하는 그 기능이 반복될 때 다윗언약은 지속되고 살아 있는 겁니다. 다윗언약이 계속 살아있다는 말은 결국 유대나라가 뭘 해야 된다? 죄를 제 때 지어줘야 되는 겁니다. 죄를 계속 지어줘야 돼요.

 

죄를 짓는 그 환경이 뭐냐? 이 국가는 내 나라라는 자연스러운 인식이 곧 죄가 되는 겁니다. 국가는 짐승의 거주지에요. 짐승은 국가 안에서 삽니다. 다니엘에 의하면.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뭐라고 했는가 하면, “우리는 국가를 못 떠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국가가 최종점입니다.”라고 했잖아요.

 

국가가 우리를 보호하지 않으면 군함도 짝나요. 일본이 조센징이라고 막 패버립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에요. 나라 없는 설움 때문에 그들은 맞은 거예요. 나라 잃은 설움이 북받쳐 올라오는 겁니다. “우리도 언젠가 내 나라 갖자.” 그게 자연스럽게 모든 육적인 본성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구출이라는 것이 없어요. 애굽에서 나올 때 여러분이 주목해야 될 것은, 애굽에서 나올 때 모세가 건져내서 갔잖아요. 갔을 때 모세와 아론을 누가 반대했습니까? 빠져나올 히브리인들이 반대했다고요. 나라 없이 어떻게 사느냐는 겁니다. 정권교체 해달라고는 요청할 수 있지만 아예 나가자고 하는 것은 나라가 없는 거예요. 왕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못살아요. 왕 없이, 나라 없이 못삽니다. 누가 보호를 해주고 지켜줘야 되지 않습니까? 이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고 이걸 꼭 말로 해야 돼요? 우리의 모든 태도와 생각은 보호받는 것으로 몸이 쏠리게 되어 있습니다. 군주의 임무는 소속돼 있는 백성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는 거예요.

 

그런데 제퍼슨이라는 미국의 2대대통령이 작성한 미국의 독립선언서에 보게 되면 “행복을 추구”한다고 되어 있지 행복을 충족시킨다는 내용은 빠져있어요. 그것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할 일은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는데 방해하지 않겠다는 소극적인 내용이 들어 있지 “여러분이 뭘 원하십니까? 다 채워드릴게요.” 이것은 아니에요.

 

추구하는 것과 충족의 차이점이 있어요. 겨울인데 수박이 먹고 싶다. “대통령님! 수박 제공할 수 있습니까? 우리나라 대통령이니까 수박주세요.” 그것은 안돼요. 그것은 안 되는데 ‘수박이 먹고 싶다.’ 그것은 경찰이 와서 못 잡아가요. 왜? 자기가 추구하는 거니까. 예가 좀 천박하지요. 좀 실감나게 합시다.

 

내가 남자인데 남자를 좋아하고 여자가 여자를 좋아한다. 국가가 관여 못합니다. 왜냐하면 행복추구권이기 때문에. 그런데 여자인데 여자하고 결혼해서 “부부가 누리는 모든 법적인, 국가적인 혜택을 다오. 우리도 부부로 인정해 달라.” 이것은 국가가 나서면 안돼요. 그것은 충족해주는 겁니다.

 

확실히 차이점이 드러났지요. 개인의 욕망을 채워줄 의무는 없어요. 그러나 본인이 추구하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동성애가 문제가 뭐냐?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고 여자가 여자를 좋아한다, 라고 했을 때 IS는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면, 간단해요. 옥상에 올라가서 밀면 돼요.

 

왜냐하면 코란에 보면 죽이라고 했으니까, 구약에서 죽이라고 했으니까 밀면 되지만 일반나라에서는 그렇게 하지는 않아요. 정신병자는 태어나면 죽기 마련이기 때문에. 멀쩡하게 태어나도 다 정신병자인데 거기에 따로 정신병이라고 더 보탤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뭐냐? 우리도 정상인으로 취급해서 권리를 달라고 하게 되면 이것은 뭐와 같은가? 전국도둑놈협회가 우리도 권리를 달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왜? 행복추구권이거든요. 전국창녀협회가 우리도 합법적인 단체로 만들어달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사회적 정서에 어긋나지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 국가라는 자체가, 그렇게 요구한다는 자체가 이게 정상의 나라가 아니고 짐승의 나라에요. 개인적인 욕구만 올라오는 그런 나라에서 우리가 탈출해야 됩니다. 아직도 구원의 의미가 살아 있어요. 그래서 그런 일이 있거든 “그만 살련다. 더러워서 못살겠다.” 벗어나야 됩니다.

 

벗어날 때 그냥 못 벗어나고 우리로 하여금 “네가 그런 사회를 이루는데 있어서 일조했고 거기에 협조했다.”라는 죄인의 모습으로 함께 섞여서 주님의 제사기능으로 뽑아내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약간 어려운 이야기인데. 북쪽 이스라엘 나라 망했다. 그렇게 되면 그 북쪽나라 사람들 다 어디로 갑니까?

 

온 이방 속에 다 들어가겠지요. 느부갓네살 바벨론 나라로 다 흩어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흩어지고 그 알맹이 하나하나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다윗언약이 다 거기에 삽입되어 있어요. 그 나라가 유대인을 깨물 때 마다 톡톡 터지는 맛이 있어요. 자일리톨 껌처럼 뭔가 들어 있어서 톡톡 터트리면 상쾌해요.

 

이스라엘을 건드려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다윗언약에 저주받을 나라, 악마의 나라라는 것을 티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스라엘의 역할을 누가 하는가? 지금은 이스라엘나라가 못하고요 성도가 온 각지에 흩어져서 성도를 건드리는 것이 주를 건드리는 것이 되어서 톡톡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전도, 선교개념을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사는 동네, 봉천구 2동 사는 그 동네가 선교지에요. 성도가 성도답게 살게 되면 그게 바로 전도, 선교의 장소입니다. 선교지에 가서 사진 찍어 보내서 돈 우려먹을 생각하지 말고 그냥 살면 주와 함께 살게 하신다니까요. 그렇게 해서 다윗언약이라는 것은 이제는 유다나라, 가나안땅이라는 지역적 범주를 떠나서 온 지구 끝까지 다 퍼질 때 그 때가 마지막 때입니다.

 

이제는 이방민족이든 유대민족이든 차이 없이 “왜 내 성도를 건드리느냐? 하나님의 공백을 껴안고 살아가는 그를 왜 건드리느냐?” 하게 되면 그것이 저주받고 지옥가야 될 근거가 모든 천지에 다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편하게 살아도 여러분이 선교사들입니다.

 

선교사 꼬라지하고는! 그렇다마는 어쨌든간에 어떤 꼬라지든 관계없어요. 성령 받아 살면 그게 선교지에요. 선교한다고 아프가니스탄 고르지 마시고요. 파키스탄 그런데, 스스로 자학하듯이 희망 없고 어려운데 골라서 가지 마세요. 수단, 에티오피아, 그런데 가서 눈물로 기도하고 학교 만들어주고. 학교 만들어주는 그것이 무슨 선교입니까?

 

복지대책이지 그게 무슨 선교에요? 거기서 복음 전한다고 하는데 복음을 알아야 전하지요. 그러니까 학교 세우고 교회 세우는 거예요. 교회 세우면 올 것이다. 와서 뭐하는데? 친목단체인데. 친목단체하려고 선교했습니까? “그러면 복음 알고 가면 되잖아요.” 복음 알면 안가지요. 한국에 그냥 있지요. 한국에 복음이 없으니까.

 

선교사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사랑받고 싶어서 가요. 당회장 혼자 사랑을 독차지 하니까 더러워서 가는 거예요. 나도 사랑받을 수 있다, 해서 기독교 없는 나라 태국 같은 곳에 가서 사랑받는 거예요. 사랑받는 기분이 괜찮은 거거든요. 스스로 위로받고 그것이 사는 보람이 있잖아요.

 

이것저것 사업해도 안 되고 저것도 하다가 떨어 먹을 때는 선교사 하세요. 어디 가서 사랑받을 수 있을까? 주께서 꽂아줬잖아요. 주께서 그 현지에 꽂아줬다는 말이지요. 주부면 주부, 꽂아준 것이 선교지에요. 선교할 때 복음으로 하면 되는 겁니다. 어떻게? “나는 예수 안 믿고 산다.” 이런 식으로. “나는 예수 안 믿고 구원받아.” “무슨 그런 일이 있어요?” “주께서 선물로 준비했기에 그 선물의 영향으로 나는 구원받는 거야.”

 

그게 선교지 다른 것이 선교입니까? 믿음 보여준다고 빡세게 기도 빨, 주여, 주여, 주여, 이렇게 쥐어짜지 말고 편하게 살아도 구원받는다는 그게 전도고 선교 아닙니까? 그게 전도거든요. 전도를 이미 요소요소마다 다 한 거예요. 그것은 뭐냐? 다윗언약이 세상이 퍼지면서 다윗언약의 주인공이 드론 띄워서 하늘로 올라가버립니다.

 

땅에 있을 때는 제한된 선교지만 다윗자손 메시아가 위로 올라가 버리면 온 지구가 시간적으로도 끝났고 공간적으로도 다 보이잖아요. 성령을 보내면 성령은 뭐냐? 로봇 팔이 되는 거예요. 태권 V 작동하라, 삐삐삐삐, 온 천하, 북한이고 뭐고 온 천하에 성령을 보내버리면 이것이 주님의 선교방법입니다.

 

“서로 서로 인사해라. 서로 모르지? 고넬료다.” “들어본 적 없습니다.” “베드로다. 너는 들어봤나?” “못 들어봤습니다.” “와서 먹으라.” “못 먹습니다.” “먹어라.” “못 먹습니다.” “예, 먹겠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0장에서 둘이 만나잖아요. 이게 선교잖아요. “빌립아, 사막에 가거라.” “왜 사막입니까?” “먼지가 일어나거든 마차가 달려올 것이다.” “누군데요?” “가보면 안다.”

 

가보니까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나지요. 시키지도 않았는데 에티오피아 내시가 이사야 53장을 펴서 “여기 채찍에 맞는 자가 누구십니까?” “그게 메시아입니다.” 하면서 십자가중심으로 성경을 풀어버리니까 거기서 갑자기 “물이 없나요?” 그래서 타이밍이 물이 있는 곳에 가서 세례를 받고 에티오피아가 기독교국가가 되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주님의 선교에 하자가 없어요. 오류가 없고 실패가 없고. 다윗언약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다윗언약은 공백이에요. 존재가 아니고 빈자리에서 기능이 쏟아지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언약에 따라서 오신 메시아는 “자 내가 여기 있다. 오늘 밤에 저녁 먹을 때 내가 나타나겠다.” 이렇게 하지 않아요.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성령을 주시게 되면 우리는 존재가 가벼워져요. 누가 잘났냐, 하다가 갑자기 저쪽을 봐요. 양쪽 다 관심사가 저쪽이 돼요. 그러면 우리는 의미가 없어져요. 의미가 없어지고 저쪽에 의미가 생겨버립니다. 그 일을 누가 하느냐? 선지자들이 한 거예요. 나단선지자 같은 경우에는 솔로몬 때이고.

 

13장을 봅시다. 이 13장 본문의 박사학위논문들이 굉장히 많아요. 이름 없는 선지자. 이름 없는 선지자가 북쪽 여로보암에게 가서 3백년 후를 예언합니다.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그 날에 저가 예조를 들어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예조라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여로보암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단에서 손을 펴며 저를 잡으라,”(왕상 13:2-4) 이렇게 되어 있지요.

 

공백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이름 없는 선지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 자리를 좀 비워놓아야 된다는 그 이야기를 한 거예요. “우물 같은 구멍, 샘이 있어서 그 샘에서 장차 진짜 메시아가 오는 그런 공간을 마련해야지 그걸 다 네 권력으로 채우면 안 되잖아.” 하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에 적용시키면, 목사의 임무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분이 여기 계십니다.” 그걸 소개하는 일을 하면 돼요. “우리교회의 머리되시는 분은 십자가에 유일하게 피 흘리신 분입니다.” 하고 자기는 비켜난다는 말은 “목사는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 진적이 없습니다.” 하는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여러분들의 구원에 저는 전혀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성경구절을 깨닫는 것은 중앙에 있는 보이지 않는 주의 이름께서 하신 줄로 아시고 그걸 저에게 가져올 필요는 없습니다. 직접 교제하시면 되는 겁니다.” 하고 비워드리는 것이 목사의 할 일이에요. 복음 앞에서 자기를 비켜나 줘야 돼요.

 

비켜나는데 인기가 좀 있으니까, 팬들이 많으니까 비켜나는데 비켜나는 것이 아니고 슬금슬금 자꾸 그 구멍 난 곳을 자기가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들이 “비켜라. 저리 안 꺼져? 왜 네가 얼쩡거려. 십자가 지지도 않은 것이 왜. 나가!” “나는 카리스마가 있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주의 사자고……” “시끄럽다! 비켜, 비켜!”

 

그러면 저쪽에서 “저 사람 퇴출이다.” 이게 북쪽 이스라엘이 했던 거예요. “잡아라, 그 손! 누가 이 교회 당회장을 욕하느냐? 잡아라.” 하니까 그럴 줄 알고 “너희들은 3백년 후에 망한다.” 한 겁니다. 이미 선지자는 묵시의 존재기 때문에 선지자마저도 본인 뜻이 아니에요. 약간 설명을 더 해야 이해가 되겠는데요.

 

여로보암, 이쪽의 성전은 가짜지만 어쨌든 하나님의 제단이 깨질 때 제단에 뭐가 있느냐 하면, 이 나라는 내 나라다, 이 북이스라엘은 내 나라다, 혹은 남쪽 유다는 내 나라, 이 교회는 내 교회, 라는 것들이 힘을 실어서 거기에 주목하고 거기에 돈과 재물을 집결시켰습니다.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이것은 껍질에 불과하다. 껍질이 홀라당 벗겨지고 진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 하니까 이 껍질에 매달려서 이 껍질에 집착을 갖고 있는 사람이 누굴 공격하겠어요? 선지자를 공격하겠지요. 선지자를 공격하면 선지자가 뭐냐? 살아있는 제사의 제물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제사가 되는 거예요. 양 잡다가 이제는 사람 잡는 겁니다.

 

그게 선지자가 하나님이 공백 앞에 서 있는 문지기의 모습이에요. 요한계시록 20장의 목 베인 영혼이에요. 주의 이름으로 믿다가 목이 달아나는 겁니다. 갑자기 왜 목이 근질근질……. “목사님, 우리한테는 왜 그런 순교가 없습니까?” 타이밍이 안 되어서 그래요. 좀 기다려 보세요.

 

타이밍이 안 되어서 그런 경우가 있고 또 우리가 그 기회를 스스로 피해버릴 가능성도 있어요. ‘그러면 내 가족은? 아이고, 안 된다 안 돼.’ 하고 피해버립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무시로, 무시로 복음을 전하라고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그 타이밍과 환경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 타이밍과 환경에 맞도록 복음을 전하라고 했거든요.

 

선지자는, 결국 양이 제사는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성전이 있는 유다나 북쪽 유다나라는 양 잡고, 소 잡고, 염소잡고 했겠어요, 안했겠어요? 많이 했지요. 반복해서 했지요.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더러워서 못 보겠다.” 이사야 같은 경우는 “더러워서 안 받는다. 그 더러운 제물을 어떻게 내가 받는가?”

 

그렇게 이야기한 이사야가 제물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어떤 나라? 보이지 않는 나라, 은밀한 나라를 위해서. 은밀한 나라에서 파견된 기능인이 그 은밀한 나라가 하나님이 여기 이 땅에 너희들과 같이 살고 있는데 너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나라는 무시하고 너희들의 권세, 너희들의 내나라는 것, 내 소유의 나라, 여기에 의미를, 무의미가 아니고 의미를 갖다 붙이는 이 나라, 이 교회에 의미를 주기 위해서 사력을 다하여 유지하는 그 나라는 다른 새로운 짐승에 의해서 계속 교체가 되면서 망해버리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면 여러분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저 선지자 될래요.” 하는데 선지자는 본인이 손들고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는 주께서 정해줘야 돼요. 그러면 선지자는 주께서 기능적으로 정해줘야 되니까 이 이름 없는 선지자의 특징이 뭐냐? 그 선지자가 죽습니다.

 

그것은 누구 죄 때문인가 하면, 자기 죄 때문에 죽어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거든요. 돌아갔습니다. 돌아갔는데 그 소문 듣고 북쪽에 있는 거짓선지자가 뭐라고 사기를 쳤느냐 하면, “나도 선지자인데 우리 같은 업종에 종사하잖아요.” 선지자의공통점이 있어요. 개 코도 아무것도 모르는 게 꼭 스승노릇 하려는 더러운 버릇이 있어요.

 

말이 많아요. 남을 가르치려고 해요. 그래서 하는 말이 “나도 같은 급이고 같은 유인데 아마추어 상대하지 말고 프로끼리 합시다.” 해서 밥을 먹여 주니까 그 이름 없는 선지자가 여기서 그만 시키는 대로 안 해서 24절에 보면 사자를 만나게 해서 죽기는 죽지만 사자가 시체를 먹지는 않아요. 이 말은 뭐냐? 

이 선지자의 죽음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떠났다는 것을 끝까지 마감표상, 증거물로 보여주기 위해서 

그 선지자는 남쪽에 있으면서도 남쪽에 오지 못하고 북쪽에서 죽습니다.

 

그렇게 죽어야 주변에 있는 환경이 망할 나라라는 것을 선지자의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그 정체가 폭로가 되지요. 그러고 난 뒤에 그 선지자를 꾀었던 가짜 선지자는 그 사람을 장사하면서 크게 후회합니다. 그래놓고 33절에 보면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보통 백성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았으므로.”

 

이것은 뭐냐 하면, 고객만족입니다. 고객만족을 함으로써 자기정권을 유지하고 자기가 대장질을 계속 해나가겠다는 거예요. 공백을 자기의 야욕, 정치욕으로 채우는 겁니다. 참 감사할 것은 이런 이야기가 현재 시대에도 낯설지 않는 것은 모든 교회의 꼭대기가 이런 식으로 다 관료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당회장을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장로님들의 상투적인 기도내용에 나와 있어요.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 뭐 어쩌라고? 잘되게 해달라는 거예요. 뭘? 잘되어서 뭐하는데? 결국 우리는 가짜 종교단체에, 가짜 구원단체에 자연스럽게 우리의 속의 괴물, 악마가 친근감을 느끼고 동화될 수밖에 없어요.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교회 없이 어떻게 구원되는가? “목사님, 교회 비판하지 마세요. 교회 없이 무슨 구원이 됩니까?” 제 답변은 하나밖에 없어요. “당신이 왜 구원되어야 합니까?” 선지자가 본인이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에요. 구원되고자 하는 그 자체가 아직도 주제파악이 안된 거예요.

 

구원을 시켜주면 소급해서 “어, 구원됐네.” 이러면 되지 구원될 가능성도 없고 은밀한 나라로 가는 길이 다 끊어졌는데 “구원되어야 해.”라는 그것은 자기천국을 상상하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 구원받고 싶으면 “나 구원 안 받는다. 더러워서 안 받는다.” 이렇게 삐지기 바랍니다. 그래도 십자가 믿어지거든 주님의 선물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저녁 먹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