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2017여름8강 엘리야 선지자 17073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8. 7. 12:56
2017-08-05 11:26:28조회 : 37         
2017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8강이름 : 서경수 (IP:118.47.84.120)

제 8 강 엘리야 선지자 (녹취: 정석훈 목사)



지난 시간에 나봇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나봇은 자신의 엄마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봇이 왜 포도원을 자신의 부모가 물려주었다고 거론하지 않고 여호와를 고집할까요? 그 이유는 자신과 엄마의 관계보다 여호와의 말씀이 우선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고, 나 구원받기 위해서 여호와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가 먼저 계시고, 여호와의 계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부모를 통해서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엄마 없는 자식이라 해서 집안에 엄마 아빠가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더 근원적이고 더 원천적인 하나님께 의미를 두어야지 그것을 잘라 버리고 부모에게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엄마 아빠가 지옥 가는 곳에 따라 가는 것 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이방민족, 이방 신에게는 그것이 없습니다. 우리 가정이 어떻게 행복하게 잘 사느냐에 모든 것을 굳혀 버립니다. 그래서 모든 이방민족에게는 조상 제사가 있습니다. 모든 민족은 조상 제사가 기본입니다. 죽은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자손이 존재하는 의미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구조주의에서 온 세상의 종족을 다 조사해 보니 조상제사를 중심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혈육적입니다. 이것을 굳히는 겁니다.



호모 사피엔스 이론을 주장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조상을 따라 가니 그 끝이 호모 사피엔스가 나오고 나중엔 원숭이가 나옵니다. 그런데 구약은 특수하게 하나님에 의해서 없는데서 생겼다고 합니다.



엄마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면 사래는 아기를 못 낳습니다. 그런데 얘기 못 낳는 여자가 이삭을 잉태한 이후에 사래라는 이름이 사라로 바뀝니다. 이 말은 사라 자신이 이삭의 엄마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네(이삭)가 나를 낳았다’가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시한 약속이 나를 존재케 했다는 겁니다. 내 존재의 토대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람도 덩달아 아브라함이 되는 겁니다.



이처럼 육에 대해서 다른 토대를 집어넣습니다. 인간의 기본적이 육의 본성을 극복하고 언약이 육을 이겨서 새로운 토대를 집어넣는 것은 이스라엘에게만 등장하고 이방민족에게는 없습니다. 이방민족은 그냥 가족 위주로 조용하게 삽니다. 그러나 나봇은 죽습니다.



왕상 18장에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선지자는 자연현상과 짝을 이룹니다. 비가 오지 않게 하고, 비가 오지 않지만 비가 올 것입니다. 말씀으로 이벤트를 벌이면 그 이벤트에 대한 짝으로 자연현상이 일어날 것이라고 18:1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엘리야가 어떤 이벤트를 벌이느냐? 엘리야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연히 벌어지게 됩니다.



“아합이 궁내대신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일백 인을 가져 오십 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었더라(왕상18:3-4).”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갈 그 때에 우연히 오바댜를 만나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오바댜가 길에 있을 대에 저를 만난지라 저가 알아보고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왕상18:7).” 엘리야가 오바댜에게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오바댜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자신이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일백 인을 오십 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여 살렸다는 겁니다. 비록 내가 임금님의 녹을 받고 있지만 이렇게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엘리야 선지자의 말대로 엘리야가 여기 있다고 왕께 고했을 때 자신의 말이 거짓이 되면 자신은 죽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오바댜는 이미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신이 나의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고하였다가 저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왕상18:12).”



오바댜는 자신이 죽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했고 뿐만 아니라 이세벨이 선지자들을 죽일 때 나라의 녹을 먹고 있었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백 명이나 숨겨 살려주었다는 겁니다. 공무원이지만 나라 정책에 반대해서 이렇게 애를 썼었는데 이런 공로는 알아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궁내대신 오바댜가 아무리 나름대로 열심을 내어도 그것으로 나라가 바뀌거나 국가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오바댜가 목숨 걸고 선지자들을 돌보아도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죽이 맞지 않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막상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되는 상황 앞에 서니 엘리야 선지자에게 “우리 안 만난 것으로 합시다.”라고 합니다. 오바댜가 죽음 앞에 벌벌 떠는 모습을 보니 오바댜는 여전히 권력의 하수인으로 있을 뿐입니다.



왕상 18:16-17절에 아합 왕이 엘리야를 만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라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 엘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한 것이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이렇게 먼저 말로만 선전 포고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은 선지자에겐 개인 구원 같은 것이 없습니다. 선지자는 항상 집단 구원을 언급합니다. 나훔이라는 선지자는 니느웨의 집단적인 저주를 외칩니다. 오바댜는 에돔 나라의 저주받을 운명을 소개합니다. 선지자의 외침에는 개인 구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단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잘나서 구원 받는 것이 없습니다. 단체가 구원받으려면 하나님께서 단체에게 동일한 조건을 제공합니다. 앞선 시간에 분양이라고 말씀드렸는데 동일한 조건을 분양해서 단체로 구원시킵니다. 가난하든지 부자든지 관계없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그 누구라도 구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긍휼과 사랑이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 긍휼과 사랑으로 구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한 뭔들 못하겠습니까?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제는 판이 이스라엘 전체로 커졌습니다. 엘리야는 이미 비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비오는 것은 기정사실로 합니다. 문제는 그동안 왜 비가 오지 않았는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그냥 자연현상에 의해 비가 오지 않았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밝힙니다. 열대성 저기압으로 인해서인지, 엘리뇨로 인한 온난화 현상 때문에 비가 오지 않았는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판을 새롭게 갈기 위해서 비가 오지 않았는지 밝혀 보자는 겁니다.



여기에 보편적 인간의 종교지혜가 총 집결됩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대결에 나서면서 그들이 갖고 있는 인간이 신을 향한 땅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모든 기술들을 동원합니다. 그 테크닉을 보면 오늘날 교회에서 나오는, 전시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일까요?



바알의 선지자는 850명이고 엘리야는 혼자입니다. 850:1이 숫자로는 간단합니다. 그러나 중학교 교정에 850명을 모아 놓아 보세요. 그 많은 장로와 목사 850명을 모아 놓고 엘리야를 반대하는 사람을 물을 때 모두 다 손을 듭니다. 여기에서 엘리야 편에 설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만약 자리에 여러분이 서 있다면 얼마나 기가 죽겠습니까? 기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편이 하나도 없음을 인해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극한 소수라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일관된 뜻은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850명 모두를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계십니다.



대결하는 방식을 엘리야가 제시합니다. 각자 송아지 한 마리씩을 갖고 와 준비된 제단 위에 각을 떠서 놓습니다. 단 불은 붙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각자 신의 이름을 부르자고 합니다.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고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겠다고 합니다. 이름만 불러서 불로 응답하는 쪽이 승리하는 것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여기에 인간들의 지혜가 동원됩니다. 일단 불이 나려면 연소될 온도보다 높아야 됩니다. 그 온도가 되려면 에너지가 그만큼 집중이 되어야 합니다. 그 에너지를 인간들의 열심과 기도 빨로 가져오려 할 것입니다.



실제로 혼자 기도하면 뜨겁지 않다가 여러 명이 한 목소리를 합창으로 기도하면 시끄러워지고 시끄러워지면 아이울음소리가 납니다. 그 아이의 울음소리가 자신의 기도 빨의 신경조직을 더욱더 강화 지속시켜 아이 울음소리를 더 크게 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이렇게 해야 목이 쉰 목소리로 할렐루야가 나옵니다. 그래야 목사님은 기도원에서 은혜 많이 받았다고 인정합니다. 이것을 한번 하게 되면 매우 재미있습니다. 혼자서 하는 기도를 여러 명이 하게 되면 등짝에 땀이 납니다. 땀이 증발되면서 시원합니다. 육체가 시원해지면, 죤 스튜어트 밀이 말한 것처럼 그것이 선이 됩니다. 갑자기 은혜가 확 올라옵니다. 시원하고 은혜 받고, 은혜 받으니 저절로 찬송이 나오고 주위 사람들이 부러워합니다. 목이 쉬고 발성이 제대로 안 되니 방언이 됩니다. 목쉬고 방언되고 시원하니 이것이 은혜의 삼종세트 아닙니까? 그러니 발걸음 가볍게 기도원에서 내려옵니다. 그런데 내려오다 누구와 만나 싸워 은혜 다 빼앗깁니다.



그러니 아침부터 낯까지 바알의 이름을 부르면서 바알이여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소서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경쟁에서 매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바알의 이름을 부르는데 바알은 ‘ㅂ +ㅏ + ㅇ + ㅏ +ㄹ’입니다. 여호와는 ‘ㅇ + ㅕ + ㅎ + ㅗ + ㅇ + ㅏ’입니다. 바알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850명이고 이들의 음성입니다. 엘리야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바알이라고 부를 때 음파가 증가 되면서 음파가 세게 됩니다. 자기들끼리 자아도취에 빠진 겁니다. 은혜를 자신이 유발했고 자신이 유발한 그 은혜에 도취되어 은혜에 흠뻑 젖습니다. 그런데 은혜에 젖으면 뭐 합니까? 지금 송아지가 멀쩡한데. 연기도 나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뜨거우냐, 얼마나 은혜 받느냐는 경쟁조건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것의 결국은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얼마나 기도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을 용의가 있느냐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제물의 의미입니다. 소유하는 것이 은혜가 아니라 여호와는 희생합니다. 자진해서 저주받는 겁니다. 그것을 누가 하겠습니까? 아무도 못합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 언약은 애초부터 엘리야가 관여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기획은 하나님께서 나서서 몸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알아서 불을 붙이시어 제물을 태웁니다. 인간이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자신을 저주해서 자신을 태워 버리는 종교가 여호와 종교이며 언약이며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죽고 너는 살아라.”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방종교는 내 죽음이 빠집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삼위일체나 예수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이것은 무조건 아세라 종교요 바알 종교요 우상숭배입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희생합니다. 그러나 그 희생은 죽기 위한, 저주받기 위한 희생이 아닙니다. 복을 더 받기 위한, 구원 받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침부터 정오까지 근무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엘리야는 저들을 조롱합니다.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 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여기에 대해 저들은 발작을 합니다. 더 큰 소리로 신을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를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합니다. “바알신이여,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는데도 우리 편이 되어주지 않겠습니까?”라고 외치는 겁니다. 인간들은 신을 못 떠납니다. 인간은 신을 못 떠나기 때문에 지옥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건져내어 신을 떠난 자만 천국 갑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처음부터 추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추방되었기에 어디 들어가려고 서성거립니까? 자기 지점을 모릅니다. 추방되었으면 추방되었지 어디를 넘봅니까? 자기 주제도 모르고 생명나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합니까? 남들이 가니 자기도 가는 줄 알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갔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변화산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과 별세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주님 십자가 언제 지십니까를 이야기 했습니다. 내 대신 언제 저주 받습니까를 이야기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이 복음입니다. 내가 하지 않기에 비로소 내가 구원되는 겁니다. 만약 내가 할 수 있다면 나는 구원되지 못합니다. 할 수 없는 자를 위해서, 해도 소용없는 죄인을 위해서 의인이 찾아오셔서 죄인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론적으로 다 아실 겁니다. 그러나 이 내용이 평생 우리의 바닥을 장식해야 합니다.



이제 엘리야가 나섭니다. 불가능을 더욱더 강조합니다. 불로 태워질 제단에 물을 붓습니다.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만들고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 그리하라 하여 세 번 그리하니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왕상18:32-35).”



불이 붙을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되었습니다. 이것을 절연이라 합니다. 완전히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인간이 천국갈 수 있는 길은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에 갈 수 없습니다. 기대하지 마세요. 내가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바알종교, 아세라 종교뿐입니다. 바알종교의 특징은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있는 종자, 있는 곡식 잘되게 하옵소서.”



지금은 과학이 바로 종교입니다. 왜 종교냐 하면 있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변환시켜서 자기에게 실용적으로 지급하기 위해서 계속 있음을 변형한다는 점에 있어서 이것은 바알, 아세라 종교에 해당됩니다. 과학자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조건은 딱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이 과학이 죄입니다.”라는 고백으로. 이 과학이 십자가 앞에서 아무 소용도 없는 무의미한 죄의 모습이라고 하면서 생물학과에 가시고 물리학과에, 포항공대에 입학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죄이냐를 발견하는 겁니다.



과학이 종교라고 해서 과학을 하지 않고 농사를 짓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농사는 죄가 아닙니까? 그러니 이왕 죄 지을 것 같으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됩니다. 돈 되고 재미난 것을 하면 됩니다. 이러나저러나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해 이중처벌 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처벌은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그렇게 살다가 죽을 때 죗값으로 죽는 줄 아시면 됩니다. 과학자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죗값으로 죽습니다. 농사꾼으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죗값으로 죽습니다.



엘리야는 이 일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임을 말합니다. 36절입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언약이 살아 있다는 말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 앞에 여호와는 살아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살아계시기에 이런 기회를 엘리야에게 주신 겁니다. 이런 일을 받은 자가 선지자입니다. 선지자가 하는 모든 일과 일정은 절대로 선지자 자신에게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일이 아닙니다. 집단구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집단구원은 선지자 개인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책임입니다. 따라서 언약대로 새로운 집단,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기 위해서 그 많은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즉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여기에서 잠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했는지를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서 4:25절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죄에서 의로 전환되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약속한 자가 계셔야 합니다. 지상의 육에서 시작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분의 죽음이 죄를 의로 바꾸어 줍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는 과정에서 언약완성이라는 말이 비로소 성사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이 계획을 짰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지시하셨고 아들은 성령의 도움으로 그것을 완성시켰습니다. 이것이 소설이 아니고 이론이 아닌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만이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셨다는 것은 절연상태, 완전히 끊어진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아버지의 영이 와서 죽으신 예수님을 부활시키지 아니하면 다시 살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이 너희 가운데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이 무대를 장식할 몸은 죽을 몸입니다. 우리는 죽을 몸으로 살면 됩니다. 간단하지요. 마땅히 죽을 몸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것도 못합니까? 지금 살려고 하니 힘든 겁니다. 뭐하고 죽을까? 취직해서 죽을까? 연금 타면서 죽을까? 사업하다 죽을까? 나이 많아 99세까지 살다 죽을까? 시를 쓰다 죽을까? 크루즈 타고 여행하다 죽을 수 있고 기타 치다 죽을 수 있습니다.



전도서에서 너의 젊은 날을 즐겁게 살라고 합니다. 전도서를 요약하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그런데 놀려니 돈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모순 아닙니까? 놀기 위해서 돈 벌어야 되고 돈 벌려면 힘들고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힘 들자는 말입니까? 놀자는 말입니까? 그러니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어차피 중력에 의해서 다 허물어지게 될 것입니다.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매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2-8).” 통합해서 죽을 몸입니다. 그런데 죽을 몸이 얼마나 귀한 몸입니까? 이 몸이 살 몸 같으면 전혀 귀하지 않습니다. 죽을 몸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은 사랑받는 자가 죽습니다.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요셉이 죽잖아요. 아버지 입장에서는 요셉이 죽었습니다. 짐승에 물려 죽은 증거인 피 묻은 옷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같으면 DNA 조사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그 때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삭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사랑하는 맏이 에서가 저주 받았습니다. 자기 입으로 자기 사랑하는 자를 저주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머뭇거림 없이 칼로 이삭을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멈추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전에 숲속에 양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숲속에 양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셨으면 폼만 냈을 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을 진짜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삭이 놀랐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죽음이 결부되어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이것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문제는 엘리야는 그 후를 기대하거나 상상한 적이 없습니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왕상18:38).” 엘리야 자신도 놀랐습니다. 그동안 이 땅에 비가 오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땅을 우상섬기는 땅으로 만든 것에 대한 저주요 심판 선언입니다. 그런 후 비가 내립니다.



이 비는 참으로 무서운 비입니다. 오늘 비가 하루 종일 왔습니다. 그 비가 무서운 비입니다. 그 빗방울 하나하나에 노아가 드린 희생제물의 피가 담겨 있는 빗방울입니다. 선인과 악인에게 비를 주시는 것은 노아 언약입니다. 이 세상은 궁창 안에 들어 있습니다. 컨테이너 박스입니다. 여기는 언약체계가 가동됩니다. 비올 때 되면 비가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비가 옵니다. 비가 온다는 것은 너희들은 이제 핑계치 못하리라는 말입니다. 너희가 지옥가도 핑계치 못하리라는 겁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 마태복음 5장에서는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5:45).”고 하십니다.



저들은 누가 이것을 베푸는지 모릅니다. 실은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이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미리 앞당겨서 그들에게 햇빛과 공기를 주신 겁니다. 그런데 받아 놓고도 누가 보낸 줄을 몰라요. 감사할 줄 몰라요. 절연상태이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 현상이 열왕기상 19장에 나옵니다. 엘리야가 이런 일을 벌여놓고 여자 이세벨이 등장합니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인다고 선포합니다. 죽인다는 소리를 듣고 엘리야는 자기 할 일 끝났으니 자살하러 갑니다. 자살하기 전에 유서를 써 놓습니다. 로뎀나무 아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영화 [비트]에 보면 조인성이 오토바이를 타면서 두 팔을 벌려 죽으려고 하는 장면과 같습니다.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상치 못한 만남이 있습니다. 천사가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먹으라고 합니다. “왜 네 마음대로 죽으려고 하느냐? 아직 일 끝나지 않았다. 아직 게임 끝나지 않았어. 끝까지 너를 부릴거야.” 사도 바울도 자기 소원이 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복음 들어야 할 자들 때문에 주께서 계속해서 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찍 제대하는 것이 소원인데 주님은 제대 못하게 말뚝을 박으라는 겁니다. 컨테이너 안, 궁창 안에 그 당시에 해야 될 일이 남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일어나 먹고 마시고 음식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호렙산에 이르러 그곳 굴에 머물렀습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19:9)?”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내가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19:10).” 여기에 대해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19:18).”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개인 구원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너를 구원함이 아니고 칠천 명의 남은 자들을 위해서 엘리야 네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엘리야 네 자신의 인생을 살라고 너에게 일을 시킨 적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구원하려고 생고생하셨습니까? 사도바울이 자기 구원하려고 생고생 했습니까? 예수님 믿으면 구원받는데 왜 더 살 필요가 있습니까? 주께서 남은 인생을 계속 굴리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칠천 명을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으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 하느니라(롬11:5-6).” 여기에서 남은 자라는 개념이 상당히 의미 있지요. 남은 자는 피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자진해서 무엇인가를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잘라 내고 잘라 내고 잘라 내고 그래서 남은자입니다. 오직 은혜로만 남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숱한 잘라냄이 있었습니다. 잘라냄이 너는 아니야 너는 아니야라는 작업을 지금도 성도 주변에 숱하게 발생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십자가도 믿어야 하지만 행함도 있어야 한다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믿음 플러스 행함을 주장하기에 은혜로 남은 자가 아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만나게 되면 화 내지 마시고 주님이 자르기 위해 칼 휘두르는 소리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이 떨어질 때 누가 보아도 롯의 부인이 구원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씀을 롯의 가정에 주신 이유는 기어코 뒤돌아보게 해서 천국가지 못할 사람을 가지 못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롯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이 말씀대로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롯의 처는 두고 온 집에 어떤 보물이 있었는지 뒤돌아보았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9:62).”



예수님께서 롯의 처의 사건을 그대로 인용하고 계십니다. 롯의 처가 뒤돌아봄으로서 처음 주셨던 뒤돌아보지 말라는 조항이 잘라 낼 자를 잘라내기 위한 조치로서 철저에 철저를 기한 일이라는 겁니다. 이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우리 딸은 복음을 모르고 남편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본인이 염려할 사항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은 오히려 “너나 잘해. 너도 만만치 않아.” 주님의 일에 대해 우리가 시비 걸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주님의 뜻은 매사에 합력하여 하자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19:11-12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19:11-12).”



왜 이렇게 요란스럽게 나타납니까? 나타나는데 아니다, 아니다라는 식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앞으로 엘리야가 요란스럽지 않더라도 말씀만 주면 말씀으로 충분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요란스럽게 자연세계와 조를 짜서 할 필요가 없고, 이제는 엘리야가 해야 될 말을 그대로 하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아 후대의 선지자들의 총합이 엘리야의 치마폭에 다 담기는 겁니다. 이후로는 말씀만 하면 주께서 도와주시지 않고 오히려 자기 아내조차도 죽게 됩니다(겔24:18). 선지자들은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사람 똥으로 음식을 해 먹습니다. 벌거벗고 다닙니다. 모로 잠을 잡니다. 허리띠를 땅에 묻어놓고 썩은 것을 확인합니다.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행동을 합니다. 이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이 가장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분에 가장 가까이 갔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란 떠는 선지자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입니다. 나머지 다른 선지자는 말로 합니다. 이것을 문서 선지자라고 합니다. 문서는 멸망 후까지 보관되기 때문에 멸망 후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하는 겁니다. 말씀 그대로네! 예레미야의 경우엔 왕이 두루마리를 찢어버리면 또 씁니다(렘36:20). 주님은 고요한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요란 떤다고 살아 계신 것이 아닙니다. 고요해도 중요한 것은 그 내용입니다.



그 후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합니다. 이 예후가 아합의 집에 속한 이스르엘에 남아 있는 자들을 다 죽입니다(왕하10장). 또한 그 존귀한 자와 가까운 친구와 제사장들을 죽이되 아합에게 속한 자를 하나도 남기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알 섬기는 자를 멸하기 위해 궤계를 씁니다. 바알을 위하는 대회를 거룩히 열어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모조리 몰살합니다. 속이 시원합니다. 그렇게 한 후 예후는 이 일이 엘리야를 통해 주신 여호와의 일이기에 나는 정당하다고 핑계됩니다. 감정 섞이지 않았을까요? 섞였습니다. 그래서 예후는 잘립니다. 이 말은 곧 북 이스라엘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거기에 의로운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어떻게 바르게 하더라도 솔로몬 이후 왕들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까지 내리막길로 내려가기에 여기에 긍정적인 의미를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앞에서는 어떤 인간도 의로운 인간이 없고 새로운 왕, 임마누엘 왕이 올 때까지는 “나는 이런 엉터리 왕이었습니다.”를 고백하는 증인들로 세워질 뿐입니다. 이 내려가는 바퀴를 돌리는 자들이 선지자들이요 이 선지자들을 천사들이 도와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