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여름수련회 제 4강(다윗과 솔로몬: 이근호목사)
제가 방금 한, “열왕기상은 솔로몬 왕부터 시작했습니다.”라는 그 말 자체, 제가 말을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잘못된 표현을 한 겁니다. 왜 그런가? ‘경험하는 자아’와 ‘말하는 자아’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주장이……, 말이 주장이지 사실은 욕구, 욕망이죠, 자기욕구가 담겨 있어요.
그런데 경험한다는 것은 자기가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외부에서 나를 몰아세워 가면 거기에 낯선 경험들을 하기 마련이에요. 방금 제가 “열왕기상은 솔로몬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라고 한 그 말이 왜 정확하지 않은 말이냐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가 생각하는 솔로몬을 하나의 존재로 보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에서 솔로몬은 ‘말하는 자아’로서의 솔로몬이 아니고 솔로몬을 양산하고 솔로몬을 솔로몬답게 만들어내는 주변의 언약적인 환경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을 그대로 살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환경이 주도적이에요. 그리고 그 안에서 솔로몬은 다듬어지고 만들어지는 겁니다. 솔로몬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에요.
솔로몬이 태어날 때는 사전에 다윗약속, 다윗언약이라는 요건을 품고 솔로몬이 태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자신이 나는 혼자기 때문에, 아버지고 엄마고 다 혼자기 때문에 내가 나로 모든 판단을 내 쪽으로 귀결해서 마감시켜 버려요. 편집마감, 원고마감. 나 여기 있음을 확인하게 위해서 우리는 외부의 모든 정보나 소식을 내 쪽에 유리한대로 원고를 마감시켜버리고 기사를 마감시켜 버려요.
내가 나처럼 이렇게 살아가니까 솔로몬 너하고 나하고 어떤 차이가 있을까, 솔로몬을 존재로 간주해서 “솔로몬 너는 착한가? 처음에는 좋았는데 왜 네가 이방여자 만나서 우상 섬겨서 망했잖아. 잘나갈 때 좀 조심하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복을 줬건만 이방민족을 수입해서 쓰니까 나라가 둘로 쪼개졌잖아.”라고 이야기해버려요.
열왕기상의 지금껏 나온 모든 주석이 그래요. 솔로몬에 대해서 모든 설교가 다 그래요. 처음에는 좋았는데 나중에는 나빴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면 안돼요. 솔로몬을 손대지 마세요. 솔로몬은 자기잘못 없어요. 주님께서 솔로몬을 가지고 전반전, 후반전 따로 하나님께서 작품을 만드신 겁니다.
“솔로몬이 많은 복과 재산을 얻었을 때 솔로몬의 태도, 그리고 많은 이방여자가 왔을 때 솔로몬의 태도를 눈여겨봐라. 그게 인간의 역량으로 헤쳐 나갈 수 있는 상황인지. 그럴 수 없느니라.” 그래서 그 솔로몬이라는 그 인간을 탓해서 “나는 다시는 솔로몬처럼 하지 않아야지.”라든지 “나는 앞으로 부자가 되어도 절대로 교만하지 않을 거야.” 이런 망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돈이나 있어야 망상을 하든지 말든지 하겠지만요.
솔로몬은 최고의 거부인데요. 숟가락부터 해서 모든 것이 금인데요. 비교가 안 되지요. 자꾸 사람을 탓하지 마세요. 사람을 탓한다 하는 것은 뭐냐? 그것을 타산지석이라 하잖아요. 남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서 교훈을 받아서 ‘나는 절대로 그렇게 안 되어야지.’ 이 역사의 의미란 뭐냐? 역사의 의미라는 것은 그냥 지난 것이 아니고 과거의 과오를 심사숙고해서 두 번 다시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역사의 의미다, 라고 일반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정말 역사를 아는 사람은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아요. 역사라 하는 것은 환경이 우리를 떠밀어 올리는 거예요. 어떤 구멍이 있어서 물살이 솟구치고 있다 합시다. 거기에 가벼운 어린애를 올려놓았다 합시다. 주변에서 그 어린애보고 “야! 똑바로 앉아. 흔들리면 안 돼.” 애한테 이야기를 해도 소용없어요.
왜? 솟구쳐 오르는 물살이 너무 세기 때문에 몸을 가눌 수가 없잖아요. 이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자꾸 자기가 자기보고 탓하지 마세요. 우리를 주변 환경이 이렇게 합당하게 몰아세운 겁니다. 나의 성격, 성질, 이 모든 것 어느 것 하나 내가 원해서 된 것은 전혀 없어요. 그것을 가지고 다섯 자로 존재의 의미라 합니다.
“언젠가 달려갈 거야” 하는 그 존재의 의미. 어쩔 수 없어요. 어쩔 수 없으니까, 너무 힘겨우니까, 힘겨워서 견딜 수가 없으니까 뭘 로 때우는가 하면 망상으로 때우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망상 없이는, 환상 없이는 살수가 없게 되어있어요. 계속 꿈을 꾸면서 이 힘든 것을 완화시키려고, 주어진 너무나 불확실한 상황에 대해서 숨통이라도 좀 터보려고 계속 조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보면 돼요. 인간이란 환경이 재구성한다. 환경이 늘 재구성하는 겁니다. 경험하는 자아와 말하는 자아 사이에 항상 괴리가 있어요. 그리고 어떤 경험을 해도 말하는 자아는 자기고집을 부립니다. 그래서 말하는 자아는 땅에서부터 하늘로 솟구치고 경험하는 자아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옵니다.
반드시 여기서 늘 일상의 충돌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열왕기상은 하늘에 관련된 선지자의 소식과 말하는 자아, 자기주장이지요, 이왕 태어났으니 한 번 제대로 살아보자고 고집부리는 그 땅의 세계와의 마찰을 열왕기상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게 열왕기상이에요.
따라서 이걸 자아가 어떻게 인식하느냐, 그것은 본인에게 맡겨놓으세요. 욥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데 욥은 그렇게도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에요. 굉장히 할 말이 많아요. 우리 애가 혹시 생일잔치하다가 하나님 앞에 화를 끼치는 것이 있을까 해서 대신해서 제사 드리고, 애가 술 먹고 실수하지 않을까, ‘엄마의 기도 못 잊어’ 하는 것처럼 기도해주고, 그랬는데 자식 열 명이 그것도 하루아침에 다 죽었습니다.
도대체 기도 빨은 어떻게 된 거예요? 하나님이 “이 욥의 믿음을 보라”고 했던 그 욥의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어요? 왜 욥의 기도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말하는 자아의 기도기 때문에 그래요. 말하는 자아의 기도. 출발은 무조건 땅에서부터 해야 돼요. 왜? 고집이 있기 때문에. 한 고집 하거든요.
한 고집하기 때문에 무조건 나로부터 출발하되 기도 가운데서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이 충돌을 일으키면서 뭐가 나오는가? “맞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할 때 이게 복을 함유하고 있는, 포함하고 있는 고백이에요. 복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저절로 이게 뭐가 되는가? 복이니까 그 앞에 ‘행’자를 붙이면 이게 행복한 거예요.
내가 죄인이라 할 때 행복한 거예요. 죄인에게는 어떤 징벌과 어떤 미래가 주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을 터치할 수 있는 권한은 이미 끊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래가 어떤 미래가 준비되어 있다 할지라도 죄인이기 때문에 어떤 조치가 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소관이 아니고 주님이 알아서 할 거니까 걱정을 안 하지요.
모든 행복을 누가 간섭합니까? 걱정과 염려가 간섭하잖아요. 아무리 부자라도 걱정 염려가 있으면 이게 안돼요. 왜 걱정하느냐 하면, 걱정할만한 자격이 있다고 아직도 우기기 때문에 그런데 그것은 말하는 자아를 아주 단단하게 굳히기작업에 나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하는 자아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원래 말은 누가 하는가? 집에 애가 있다 합시다. 30대 중반의 아빠, 30대 중반의 엄마, 그리고 16개월 된 아기, 이 세 사람이 산다 합시다. 이중에 말하는 사람은 이 두 사람밖에 없어요. 아빠 엄마가 말하지요. 아기는 말이 아니고 옹알이죠.
말 못한다고 죽습니까? 아니에요. 아빠 엄마가 아기를 먹여 살리잖아요. 그런데 이 애가 말을 하기 시작하지요. 말하기 전에는 아빠 엄마가 다 먹여 살리기 때문에 그저 얻어먹기만 하면 되는데 말하기 시작하게 되면 본인의 자의식이 생기게 됩니다. 말하는 자아가 생기면 그 다음부터는 아빠 엄마가 귀하냐, 아니면 내 이익에 도움이 되는 다른 것이 있는가를 생각하게 돼요.
이걸 가지고 사춘기라 합니다. 사춘기란 뭐냐? 아빠 엄마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생긴 것을 사춘기라 합니다. 그 소중한 사람이 친구에요. 이젠 친구 말 듣지 아빠 엄마 말 안 듣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빠 엄마의 말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고 아빠와 엄마는 아직도 내가 말을 못하는지 알고 있어요.
옹알이나 할 줄 아는 애로밖에 안보는 거예요. 내가 말을 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나의 주장이 있고 나의 주장은, 무엇이 나의 생존에 이익이 되느냐, 아니면 손실이 되는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 이익이 되는대로 더 소중한 것, 귀한 것을 찾는데 이걸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나는 무엇을 원해야만 하는가?” 이걸 계속해서 찾고 있어요.
나는 무엇을 원해야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그걸 생각하는 거예요. 존 스튜어트 밀이라는 19세기 공리주의학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의 즐거움과 슬픔, 유쾌와 불쾌이외에 어떤 선악도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인간의 선과 악이라는 것은 진리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몸의 컨디션이 말해주는 것이라고.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윤리와 도덕이라 하는 것은 개나 줘버려라, 했습니다. 왜? 자기 몸이 편안하면 그게 선이고 자기 몸이 불편하면 그것이 악이다. 인간은 자기 몸에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에 자기 몸의 유쾌한 쪽으로 몸은 딸려가게 되어 있고 불쾌한쪽은 피하게 되어 있다. 그거 말고 또 다른 진리가 뭐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래서 그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유쾌와 불쾌 말고 다른 구라를 떠는 사람들, 예를 들기를 종교가 어떠니, 신이 어떠니, 윤리가 어떠니, 도덕이 어떠니, 전부 다 개나 줘버려라.” 상당히 극단적인 그 발언에 대해서 우리는 거부합니다.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서 제가 첫 시간에 이야기했어요.
인간에게 있어서 진리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전통이라고 했지요. 관행이고 관습이 진리에요. 인간이 옹알이, 말을 못할 때 말의 주체는 엄마와 아빠가 있습니다. “너 말 그렇게 해서는 안 돼. 밥 빌어먹고 못살아. 나처럼 해야 네가 어디 가서 인간소리 듣고 취직 잘 되는 거야.” 이미 간섭을 받아요.
그럴 때 애는 아빠 엄마 없이는 못사는 줄 알아요. 그래서 걸핏하면 아빠 엄마에게 묻습니다. 그런데 독자적으로 말을 하게 되면, 독자적으로 자기주장이 생기고 자의식이 생기면 그 다음부터는 스스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아갑니다. 그렇게 되면 귀한 것과 귀하지 않은 것, 그것은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내 몸을 유쾌하게 만들면 그것은 좋은 친구고 나한테 불쾌하게 하면 그것이 아빠든 엄마든, 목사든, 하나님이든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 같으면 나는 회피하고 거부하고 배척해 버린다, 라는 요소로 말하는 자아가 되어 있어요. 그러니 여러분이 솔로몬을 생각할 때도 솔로몬이 다윗에게서 태어날 때 하나님의 계시를 띄고 태어난 거예요.
여디디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솔로몬인데 그 솔로몬이 태어났을 때는 누구나 오해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계시로 태어났기 때문에 날 때부터 총명하고 뛰어나고 말씀 잘 듣고 경건하게 살 것이다. 아니거든요. 그것은 솔로몬을 보는 우리자신의 태도가 솔로몬과 같을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그걸 뭐라고 했던가요? 그걸 통째로 적폐라 했지요. 우리를 망치게 하는 요소. 아이를 빼앗겼으니까 재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이 땅에서 아이든 뭐든 우리는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일체 없어요. 재판을 요구할 권리가 없어요.
말하는 자가 누구에게 뭘 해주세요, 주세요, 나는 이걸 원해요, 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한테 있어요, 없어요?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왜? 우리 자체가 적폐기 때문에. 사람이 질문한다는 것은 정신분석학에서는 히스테리환자라고 해요. 반복해서 자꾸 물어요. “목사님,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마을에, 우리교회에 막 올라와 있어요. 자꾸 묻는 거예요.
이러면 또 김 태윤씨는…? 지금 누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은 하세요. 혼자서 갖고 있는 것보다 훨씬 나아요. 왜 자꾸 묻는가? 첫째는 내가 물을 권한이 있고, 나는 이것을 앎으로서 더욱더 구원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정보를 얻음으로 구원에 안심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히스테리가 어떤 원인에 의해서 오느냐? 도착증세. 도착 증세라 하는 것은 경로를 비켜가서 성적인 쾌감을 느끼는 것을 도착 증세라 합니다. 여자는 놔두고 여자 스타킹 보고 웃는 거예요. 희한한 증상이지요. 그걸 도착 증세라 하는데 구약용어로 하면 우상숭배입니다. 자기 허전함을 망상을 통해서 계속 교체를 해나가는 거예요.
왜 자꾸 질문을 해나가느냐 하면, 질문함으로서 경험하는 자아를 말하는 자아로 우상화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살림 차려서 따로 살겠다는 거예요. 내가 아는 식으로 내 구원을 내가 확보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은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정신병자에요. 히스테리환자에요. 자꾸 물어요.
질문은 창조자만이 질문할 수 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욥이 말이 많아요. 기도했는데 왜 이렇고, 내가 나쁜 짓을 한 적도 없는데 왜 이렇게 고난이 많습니까, 이렇게 하다가 주님께서 마지막에 찾아오니까 어떻게 됩니까? 제일 먼저 하는 행동이 뭡니까? 말을 끊어버렸어요.
“제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말이 없다는 것은 드디어 경험하는 자에게 옴팍 삼킴을 당했다는 거예요. 누가 이야기하던가? 완전히 말씀에 사로잡힌 자라고 해서 “고래요? 아이고.”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좋은 평가이긴 한데 믿는지 아닌지 본인만 알겠지요. 경험하는 자에 의해서 옴팍 삼키우는데 경험하는 자가 따로 있어요.
이 경험은 우리를 위함이 아니고 경험하는 본인을 위함이에요. 그 본인이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자기경험을 우리한테 분양한 거예요. 택지분양 하듯이 “너는 나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해라.” 이렇게 한 거예요. 구두 고치는데 꼭 대머리일필요가 있습니까? 아무 상관없지요. 구두만 잘 고치면 되잖아요.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증거 하는데 우리가 남 모습일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예요. 어차피 우리는 분양받은 거니까. 그리스도의 모습을 분양받은 거예요. 그것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의 조상이라 합니다. 믿음의 조상의 나열, 그 리스트를 죽 보세요. 같은 일을 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다양성, 그 다양성을 하나로 묶는 것은 뭐냐 하면, 믿음인데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자기활동성이에요. 정리해 봅시다. 나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나를 만드신 분은 우리 주님이 만드는데 지금 주신 환경이 최적화된 지금의 나의 모습으로 만든 거예요.
합력하여 선을 이룬 겁니다. 그러면 기도할 필요 있습니까? 기도를 하게 하시는 겁니다. 내가 이런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런 일이 나에게 해프닝, 일어났다고 생각하세요. 이번 수련회에 참석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참석 못한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왜? 무슨 일이 일어났어요.
참석하고 싶어서 백날 애써도 안돼요. 왜냐하면 참석 못하는 경험을 하게 하시기 때문에. 그러니 이런 이야기가 어떻습니까? 나쁜 짓 해놓고 핑계대기 좋지요. 멋지지 않습니까? 이런 이론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막 살아놓고. 막국수 나오지요. 막 살아놓고 “주께서 하게 하셨으니 내 탓 없다.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끝.”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그런 이야기가 잘못 됐다는 것을 어떻게 예방, 방지해야 됩니까?
방지하는 방법이 있어요. 그런 이야기는 왜 잘못되었는지? 고백이라 하는 것은 항상 회고적이고 소급적이라는 겁니다. 나는 막 살았는데 주의 뜻이더라, 할 때는 앞에 뭐가 붙는가 하면, 막살았다는 것이 붙어 있어요. 주님의 뜻 and(그리고) 나의 막 삶(죄) 이것이 합쳐져야 되는데 뒤에 붙어 있는 ‘막 삶’을 빼버리고 이것만 이야기하는 이것은 자기 자신의 막 삶을 하나의 원인으로 해서 자기가 기대하는 결과로 변명하는 꼴이 되어버려요.
설명하는 내가 더 어렵다. 나중에 이걸 돌이켜보니까 ‘야, 막사는 가운데서도 이렇게 불쌍히 여겨주셨네.’ 이렇게 나오면 괜찮은데 은혜를 내 행동의 원인으로 자기가 집어넣는 거예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것은 자기 잘남을 증거 하지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 고백, 유사고백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만 드러내지 않는 것은 부채표 활명수가 아니에요. 가짜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이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어법을 부정어법이라 합니다. 사도바울의 모든 말이, 예수님뿐만 아니고 성령 받은 사람의 모든 어법이 부정어법으로 하는 겁니다. 부정어법이라 하는 것은 똑바로 그 실체를 이야기하지 않아요.
똑바로 실체를 이야기해버리면 그 실체를 가지고 원인으로 돌리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고 결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나는 목사님의 부정을 절대로 말하지 않기로 작심했습니다.” 완전히 엿 먹이는 거지요. 뭐예요 이거? 예수님도 마찬가지에요.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게 엿 먹이는 겁니다.
“나는 죄인을 건지러 왔다.” 건진다는 말이 뭡니까? 네가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그냥 두면 너는 망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렇게 하니까 누가 삐지는가 하면, 의인인 자들이 삐지고 죄인들은 좋다고 오는 거예요. 부정어법은 뭐냐? 모든 것이 주님 앞에서 죄 아닌 것이 없는 것이고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뜻이에요.
예수님이,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해버리면 그 다음부터 모든 인간은 필히 죄인 되어야 돼요. 왜? 경험하는 자아가 그렇게 선포했기 때문에. 이게 복음 아닙니까? 십자가가 뭐냐? 십자가가 죽었다는 말은 내 죽음이 필요치 않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에요. 그 정도로 너희는 스스로 의인될 수 없다는 것을 부정어법으로 설명한 거예요.
십자가를 거론하신 주님에 의해서 십자가를 믿게 되면 그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에 함몰이 되면서 나는 죽고 내 안에서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살아나면서 나는 어떤 죄를 지었기에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어야 되는가를 평생을 두고두고 확인만 하는 인생만 살면 되는 겁니다.
다른 사는 이유는 없어요. 다른 이유는 끝났어요. 고아원방문해서 도와주면서 ‘아, 이게 죄구나.’ 복음 전하면서 ‘이게 바로 십자가에 죽을죄구나.’ 이걸 따박따박 다져가면서, 확인해보면 되는 거예요. 자식이 잘못했을 때 “얘야, 그러면 안 돼.”라고 나무라놓고 돌아서서 ‘이게 바로 죄구나.’
그런데 십자가 모르는 사람은 ‘이런 죄는 안 져야 되겠구나.’ 이렇게 돼요. 그게 경험하는 자아에서 도로 뭘 로 되돌아갔습니까? 말하는 자아로 돌아온 거예요. 내가 아는 것으로 내가 구원되겠다는 거예요. 솔로몬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말하는 자아에서 경험하는 자아로 통째로 인생경험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 솔로몬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누구나 솔로몬처럼 인도함을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솔로몬이 부자 되었을 때는, 갑부였을 때는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몰랐어요. 그래서 솔로몬 말년에 전도서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부자 되는 것도 다 소용없는 거라고 한 거예요.
그걸 보면서 우리는 흥, 치, 뽕! “자기가 부자 되는 경험을 해봤으니까 느긋하게 ‘부자 다 소용없다.’ 그런 소리 하지. 나도 부자 되게 해놓고 그런 소리 하게 하옵소서.” 소용없다는 그것을 자기 원인으로 또 집어넣어요. 그것은 솔로몬대로 하라는 말이 아니고 지금 네가 가는 길이 솔로몬이 간 그 길이라는 말이지요.
물론 이런 솔로몬이 다 있는지. 시험 치면 족족 빵점 맞고, 돈도 없고, 그러면서도 솔로몬이라고 우기고. 다시 하겠습니다. 솔로몬이라 하는 것은 말하는 자아에서 경험하는 자아로 바뀌어가는 변천과정을 솔로몬이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솔로몬을 솔로몬 되게 했던 그 핵심요소가 뭐냐?
핵심요소는 죽음이에요. 누구의 죽음인가 하면, 다윗의 죽음입니다. 선을 옆으로 그어볼게요. 1050년에서 1010년까지 사울. 1010년에서 970년까지 다윗. 970년에서 930년까지 솔로몬. 여기서 나라가 둘로 갈라지거든요. 이스라엘은 어디 있느냐? 야곱이 하나님이 계시를 받는데 그 때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네 허리에서 열왕이 나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창 35:11)
그러면 공통점이 있어요. 야곱과 이스라엘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이 원리가 계속해서 주어져요. 사울1과 사울2가 중첩되어 있고, 다윗도 다윗1과 다윗2가 중첩되어 있고, 솔로몬도 솔로몬1과 솔로몬2가 중첩되어 있고 결과적으로 나라가 둘로 쪼개졌지요. 나라가 둘로 쪼개지고 하나는 저주, 다른 하나는 축복으로 나눠지는 것은 그 요소가 다윗부터 잠재되어 있어요.
유다나라는 BC 586년에 바벨론에게 망하고 북쪽 이스라엘 나라는 BC722년에 앗수르한테 망하거든요. 그 망하는 동안에 둘 다 같이 죄를 지었습니다만 유다 쪽은 다윗의 등불이 있어요. 다윗의 등불이 꺼지지 않기에 아직도 너희는 오래 버틴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왜 솔로몬의 등불이 아니냐?
이점을 간파해야 돼요.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것은 다윗 안에 있는 내부적인 요소, 다윗언약의 내부적인 요소가 축복도 있고 저주가 있고 둘 다 있어요. 이런 것이 언약에서 굉장히 어려운데요. 서로 대치되는 두 개의 상반되는 개념이 하나의 속성 안에 포함이 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 설명이 불가능해요. 서로 대치되는데 어떻게 같이 나란히 있느냐는 거지요. 어떻게 같이 나란히 있겠어요?
우리가 지금 해야 될 어려운 작업이 뭐냐 하면, 하늘나라 천상회의와 관련되어 있는 이 언약의 내용이라는 것과 망해야 될 이 두 나라, 지표면에 있는 이 국가라는 것……, 전에도 이야기했지요. 국가라는 것은 우리의 유일한 현실이라고요. 국가 없이는 못살아요.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군함도라는 영화를 보면서 영화관을 뛰쳐나올 뻔 했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너무 비참하고 참혹해서. 군함도에서 조센징이라고 개 패듯 패는 겁니다. 왜 맞습니까? 왜 같은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매를 맞았습니까? 나라가 없어서 그래요. 그들을 지켜줄 나라가 없어요. 나라가 없으니까, 나라가 약하니까, 나라가 힘이 없으니까 다른 나라에게 노예로 팔려서 개 매 맞듯이 얻어맞는 겁니다.
따라서 나라가 있고 교회 있고 성당도 있는 것이지 나라 없는 교회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이 지켜줍니까? 예수가 지켜줘요? 굳건한 나라가 지켜주는 겁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여호와하나님을 안 믿어요. 하지만 그들이 믿는 것이 있어요. 이스라엘 나라를 믿어요.
그 이스라엘 나라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습니다. 여호와 안 믿어도 아무 상관없어요. 그 사람들은 이스라엘나라를 위해서 여호와를 아울러 믿어요. 유대인이 기꺼이 됩니다. 왜? 이스라엘나라를 위해서. 극히 현실주의자에요. 실감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추상적이거나 허황된 논리가 아니에요. 실감나는 것은 우리를 지켜주는 나라에요.
그래서 나라를 위해서 인민이 있는 겁니다. 국가를 위해서 인민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두 유명한 사상가가 있는데 하나는 국가론을 이야기한 플라톤이에요. 또 하나는 헤겔입니다. 헤겔 이전에 존 로크가 있어서 인민 밑에 인민 없고 인민 위에 인민 없다는 천부인권설, 인간에게 인권이 있다는 주장이 있었어요. 헤겔은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인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인권이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장사치에서 나온 거예요. 유럽에서 돈 많은 부르주아가 있었던 거예요. 귀족들만 잘 살지 말고 우리도 잘 살아보자. 그런데 귀족들은 왜 귀족인가? 하나님이 할당한 그 지위가 귀족이에요. 이것은 신이 주신 지위기 때문에 감히 평민들, 상놈들이 거기에 대들면 안돼요.
그런데 그 상놈들이 장사해서 돈을 번거예요. 역사가들은 말합니다. 왜 역사는 평화를 원하는가? 이유는 단 한 가지. 장사해먹기 위해서. 평화로워야 장사가 잘 돼요. 왜 그래야 하는가? 장사란 신용거래거든요. 신용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생긴 것이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 전에도 시장이 있었고 물물교환이 있었어요. 상거래가 다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아니에요. 자본주의는 현재 가진 돈이 없어도 돈을 신용거래로 당기는 것이 자본주의입니다. “다음에 갚을게.”가 있어줘야 계속해서 자본은 투자가 되거든요. 그래서 역사라 하는 것은 자본주의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평화로워야 되고 따라서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상비군이 설치가 됩니다.
상비군이란 월급을 받으면서 항상 출동할 수 있는 군대인데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그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세상의 현실이란 것은 오직 국가인데 헤겔은 말하기를, 시민사회가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시민사회는 이익단체기 때문에 이익이 깨지면 언제든지 분열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러면 나라꼴이 안돼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시민사회를 법으로 옭아맬 수 있고 법으로 처분할 수 있는 뭐가 있어야 되는가? 나라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됩니다. 하나는 시민단체, 시민사회, 경제단체, 회사도 포함되고요. 또 하나는 경찰행정. 조지는 거예요. 시민사회가 다투다보면 폭력이 야기되거든요.
더 큰 폭력을 가지고 기존의 낮은 폭력을 조절하는 기능이 있을 때 국가질서가 유지된다는 겁니다. 아버지 엄마가 있고 형제가 있는데 형제간에 싸운다. 누가 그것을 억압할거예요? 아버지가 “까불지 마!”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법으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국가에는 뭐가 있는가?
법에 전혀 저촉 받지 않는 특수계급이 있어야 돼요. 초법, 그게 바로 왕입니다. 헤겔은 군주제, 왕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왕이 있어야 되고 쿠데타로 바뀌곤 하면 나라가 혼란하니까 세습을 해야 돼요. 이걸 입헌군주제라고 해요. 혼자 다 해먹는 것은 전제주의. 여럿이서 하는 것은 참주정치, 민중들이 알아서 권력을 좌지우지 하는 것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우정치라 합니다.
중우(衆愚)라 하는 것은 가락교회 김 중우집사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리석은 대중’이에요. 세상에는 똑똑한 자가, 힘센 자, 가진 자가 통치해야 나라꼴이 돼요. 어리석은 자들이 백날 해봐야 서로 싸우기만 하거든요. 누가 꽉 잡아줘야 돼요. 여자와 명태는 사흘마다 패야 된다 하잖아요. 그래야 집안 꼴이 된다잖아요. 나라꼴도 마찬가지라서 패줘야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패줄 때, 때려줄 때 사람들은 안심하고 안정감을 느끼는 겁니다. 인권으로 하게 되면 나라꼴이 안돼요. 인권위원회 없애버려야 돼요. 그런 것은 없애버려야 된다는 것이 헤겔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청년들아,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라. 그것이 너희들이 태어난 목적이니라.” 완전히 IS에요.
국가라는 명분,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름답지 아니하냐. 윤봉길, 안중근, 이봉창, 암살, 이런 것. 왠지 그 때가 그리워지지 않습니까, 여러분? 지금도 대구지역에서는 전 두환이 그립다는 거예요. 패니까 나라꼴이 잘 돌아가거든요. 촛불집회 그런 것은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전체를 제가 아까 뭐라고 했던가요? 적폐라고 했지요. 이게 바로 하나님이 원수고 죄라는 겁니다. 문제는 이것이 죄고, 하나님의 원수고, 적폐라고 아무리 해도 그리고 욕을 그렇게 해대도, 우리가 눈 뜨고 있는 한 유일한 현실은 나라가 잘 돼야 내가 같이 밥 먹고 산다는 이 논리 외에 다른 논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말하는 무엇이기에? 말하는 자아기 때문에. 이것을 철저하게 인식해야 돼요. 그래야 열왕기상하……, 다음 대전에서 있는 십자가마을수련회에서는 열왕기하를 하겠습니다. 그래야 열왕기상이 설명이 된다니까요. 솔로몬이 왜 이방여자를 수입하고 그 여자들을 위해서 이방종교를 수입했습니까?
오직 하나. 국민을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지도자는 국민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왜? 국민들이 잘 사니까. 잘 사는데 잘사니까 자기에게 뭐가 없다고 생각합니까? 자기가 잘 사니까 복을 받은 거예요. 유쾌한 것이 복이니까. 잘 살고 있으니까 아쉬운 것이 없잖아요. 아쉬운 것이 없는 것이 행복이잖아요.
행복하게 되면 말하는 자아니까 그 다음에 원하는 것은 ‘여호와 말고 또 내가 원하는 것은 뭐지? 이번에는 다른 신을 한번 섬겨볼까? 이번에는 점을 한번 쳐볼까? 궁금하잖아. 타로 점을 쳐볼까? 마귀가 나오는지 무지개가 나오는지. 장난인데 뭐. 화투에 손을 좀 대볼까? 겨우 십 원내기인데 뭐 어떨까? 술 좀 마셔볼까? 많이 먹지 말고 조금씩만 마시면 되겠지.’
조금씩 먹어서 알코올 중독에 걸린 여자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많이 먹는다고 중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마시다가 중독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 또 다음. 이미 잘 먹고 잘 사니까, 평화로우니까 멈추지를 않아요. 드디어 속에 있는 욕망대로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여력들이 있어요.
부자의 치명적인 취약점이 바로 그거예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쉽게 할 수 있다는 것. 남들이 어렵게 하는 그것, “나이 샷!” 골프, 골프를 푼돈가지고도 할 수 있어요. ‘필드, 그거 5십 만원 가지면 되잖아. 그것도 돈이야? 껌 값이지 뭐.’ 쉽게 할 수 있는 거예요.
돈이 많이 주어진다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번역을 하는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여력이 누적된다는 점에서 축복이지 우리 주님을 더 알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아는 것은 나에게 적폐를 느끼게 할 때만 아는 거예요. 따라서 부자 되시고 자기하고 싶은 것을 다 하세요.
그리고 그것을 적폐라고 여기시면 주의 백성입니다. 제 논리상. 그런데 앞에 논리가 하나 빠졌지요? 그것을 소급해서 해야 돼요. 그렇게 생각하는 자기정당성이 아니라 해보니까 이게 한도 끝도 없고 뭘 해도 허무하다는 것,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느낄 때에 주님께서 이 땅, 헛된 세상에서 나를 건져내셨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감사하지요.
물론 비용은 좀 들었습니다. 많이 들었어요. 헛짓 많이 했지만 어쨌든 나는 주님이 구성하는 사람이지 내가 주님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을 구성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솔로몬은 나중에 알게 된 겁니다. 나중에 전도서를 쓰게 되지요. 그 솔로몬이 이 땅에 태어날 때 다윗의 요소를 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두 가지로 되어 있어요. 생물학적 다윗, 이것은 죄짓는 자에요. 그것이 역대상 마지막에도 나오는데 하도 교인수가 많아지니까 내 역량이 어느 정도 되는지 궁금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 둘, 셋, 넷, 세는 거예요. 그 헤아리는 것, 하나, 둘, 헤아릴 때 요압이 말렸어요. “주께서 더 주실 것을 왜 자꾸 헤아립니까?”
헤아릴 때 어린애 말고 어른들 헤아렸습니다. 헤아리는 족족 며칠 후에 전염병으로 다 죽었습니다. 하나씩 셀 때마다 다 죽은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은 뭘 몰랐느냐 하면, 생물학적 다윗은 있음이 없음을 바탕으로 해서 있음이라는 것, 있음이라는 것은 한시적이고 순간적이고 영원한 것은 무, 없음, 안개같이 없어진다는 그 없음이 바탕인데 바탕은 모르고 잠간 있다가 없어진다는 거기에다 혹한 거예요.
“야, 저 숫자 봐라. 좋~다!” 이렇게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생물학적 다윗의 죄짓는 것을 무슨 다윗으로, 언약적다윗으로 바꿔주는 겁니다. 언약적다윗은 본인이 아니에요. 이것은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메시아는 누구의 자손인가? 다윗의 자손으로 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왔다는 것은 보기에는 볼품없지만 그 안에 엄청난 분이 계시다, 그런 뜻이에요. 일반사람들이 예수 안 믿고 하나님 믿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이라는 그 이미지는 내가 감히 도달할 수 없는 엄청난 분이기에 나의 모델, 나의 모방이 된다고요. 그 거룩, 내가 언젠가 그 거룩에 도달하고야 말리라.
그런데 예수님의 꼴은 비참하거든요. 자기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하는데 막상 따라가려고 하니까 너무 엄청나게 비참하다는 말이지요. 너무 허름하고요. 누적된 것이 없어요. 미래를 기약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옵션으로 처리해요. 하나님을 믿는데 숟가락 하나 더 얹는 것으로 “나는 예수 믿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예수님은 잠깐 왔다가 빠지는 개념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들어갔다가 빠지는 개념이에요. 거룩한 하나님상상을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도 마찬가지에요. 다윗도 “야, 숫자 봐라. 우리나라 복 많이 받았다.” 하는데 그 후에 갑자기 전염병이 돌아서 사흘 만에 7만이 죽었지요.
죽고 난 뒤에 다윗이 아라우나 타작마당, 모리아 산에서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를 드리면서 무엇과 연결되느냐 하면, 다윗과 먼 미래, 사실은 먼 미래도 아니지만, 미래의 예수그리스도와 연관을 시킵니다. 그러면 다윗부터 추락해야 돼요. 날개 있는 것은 추락합니다. 계속 추락해서 진짜 나에게 찾아온 하나님은 높은 곳에서 오시는 분이 아니고 저 낮은 지점에서 오시기 위해서 그 연결지점의 최초의 왕이 누구냐?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을 풍선처럼 키워놓고 완전히 빵, 하고 터뜨립니다. 솔로몬이 좋아 보이냐? 빵 터져버리면 그 안에 십자가 들어 있다. 솔로몬은 자기가 가진 것을 믿은 자가 아니라 자기의 적폐, 자기 죄로 인하여 오실 십자가지신 메시아를 기다린 사람이 솔로몬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솔로몬은 모든 것을 가졌고 모든 것을 다 우상숭배로 날려버렸어요. 나라꼴이 말이 아니에요. 우상숭배로 다 날려버렸어요. 그것은 뭐냐? 솔로몬이 좋아했던 모든 여호와는 사실 그 속성은 여호와도 아니고 껍데기만 여호와고 사실은 전부 다 인간의 본성인 우상, 여호와가 싫어하는 적폐, 우상적인 인간들이 원하는 신들로 가득 차 있는 이 세계, 이 세계를 솔로몬은 예수님 오시기 전부터 마지막 때, 말년에 그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내가 가졌던 이 모든 것은 십자가의 원수 된 그 모습인 것을 전도서에서 이야기합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이 이 역사 안에 죽음을 심어놓았다. 그래서 결혼식에 가지 말고 어디에 가라? 장례식에 가라. 그게 너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비로소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를 살린다는 사실을, 죽음이, 미리 당겨서 경험하는 그 죽음이, 경험하지 않은 죽음이 내 죄라는 모습으로 미리 당겨서 나에게 경험되는 그것이 말하는 자아, 나밖에 모르는 자아를 도리어 건져내는, 구원하는 십자가의 기능으로 여러분 안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세상 살면서 주께서 경험케 하는 부자 같은 경우나 땅 사놨는데 백배나 오른다는 그런 일이 있거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이게 풍선인줄 알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애가 공부를 잘한다든지 사법고시 합격했다든지 “주여, 그것도 풍선인줄 알겠지만 일단 기분은 좋습니다. 터뜨릴 때 터지더라도 일단 감사히 접수하겠습니다.” 이렇게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