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3강-열왕기상 강해:적폐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BC 931년에 북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갈라졌습니다. 다시 한 번 써보지요. 여로보암, 나답, 바아사, 엘라, 시므리, 오므리/디브니, 아합, 아하시야, 여호람. 남쪽에는 르호보암, 아비얌, 아사, 여호사밧, 여호람, 아하시야로 840년까지 되는데 지금 우리가 열왕기상하고 있잖아요. 성경에 보게 되면 솔로몬 이후에 성경 이야기가 ①르호보암 이야기, ②여로보암 이야기, ③아비얌 이야기, ④아사, 여기 바아사에 ⑤선지자 예후가 있어요. ⑥오므리, ⑦⑧엘리야, ⑨아합, ⑩여호사밧, ⑪엘리사, ⑫여호람. 이런 순서로 성경에 기록이 돼있단 말이죠.
그러면 제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양쪽 국가가 있는데 그 국가를 당겨주는 게 예후, 엘리야, 엘리사 그리고 북쪽에는 이름 없는 선지자. 여러분, 열왕기상은 다 읽어보셨지요? 보게 되면 국가로 나오더라도 국가 사이에 틈을 통해서 선지자가 두 국가를 묶어주는 이야기를 합니다. 묶어준다는 말은 국가를 유지하겠다는 뜻이 아니에요. 국가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이들의 망함과 병행해서 선지자가 품고 있는 새로운 나라를 솟구쳐 오르게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은밀한 나라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국가 망하는 것을 신경 쓰지 말고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는 선지자가 소개하는 이 나라만 신경 쓰면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인데 이 망하는 국가가 어떤 국가냐 하면, 유일한 현실이에요. 다른 현실은 없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고 우리가 느끼는 모든 현실은 결국은 괜찮은 나라의 백성이면 된다는 그 의식 외에 아무 의식이 없어요.
쉽게 말해서 내가 이 땅에서 사는데 죽어서 내가 어디 갈 거냐? 천국 간다. 그러면 천국 가면 이 땅에 있는 것보다 더 순수하고 완벽하고 철저한 어떤 나라에 가겠지,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상상적 천국이란 겁니다. 있지도 않은 천국이에요. 망상이죠. 이건 전혀 열왕기상도 모르고 구약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이들이 망해야 돼요. 유다 망하고 북 이스라엘 망해야 비로소 망함과 동반해서 나오는 것이 선지자가 예언한 세계가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제3의 관찰의 자리에 있는 게 아니고 유다냐, 북이스라엘이냐? 이게 우리한테는 유일한 현실이라니까요. 현실을 망가뜨린다면 그 현실 속에 우리도 포함되는데 현실이 무너질 때 우리도 같이 무너지는 거예요. 같이 무너지는 작업과 병행해서 아들의 나라, 예수님의 나라가 등장하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어느 걸 골라잡는다는 사고방식은 너무나 잘못된 거예요.
이 험함 세상 버리고 주님의 나라에 가겠다고? 그렇다면 그렇게 이야기하는 험한 세상에서 네가 어떤 식으로 구성원으로 있느냐? 그런 질문은 자기한테 안 하고 있는 게 문제에요. 그 험한 세상, 악한 세상에 누가 일조했습니까? 본인이 일조했다고요. 본인이 거기에 협조가 된 상태에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고 존재하는 법이 없어요.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은 뭐냐? 내가 이 땅에 존재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내 존재를 위해서 피해자가 꼭 필요한 겁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잡아 죽이겠다는 거예요. 너, 내 손에 죽어봐라. 그게 숨겨진 진짜 나다움은 내 손에 누가 죽지 않는 한 나라는 것이 밝혀지지 않게 돼있습니다. 나만 믿나? 아무도 안 믿어.
“나, 당신을 사랑해.” 내 손에 당신 죽어볼래? 내가 당신을 죽일 때 비로소 내가 몰랐던 진정한 면들이 나에게 등장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누구냐에 집중 관심이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네가 내 앞에 무릎 끓어주고 나로 인하여 피해를 좀 봐다오. 그게 다단계 아닙니까? 그걸 어려운 말로 했지만.
나는 이 땅에서 가만히 놀면서도 돈 벌 그만한 자격자 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거든? 그러니까 너는 내 밑에 와서 일하고 나는 돈 벌자. 왜? 나는 그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에. 네게 그런 자격 있다는 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그건 묻지 말고. 나는 내 존재만을 위해 살기 때문에. 그런 건 물으면 안 돼요. 사람이 산다고 해서 그냥 홀로 사는 게 아닙니다. <나는 가수다>를 패러디하면 나는 혼자다. 만고의 진리입니다. 천국 가서 마음에 안 맞는 사람 만나면 어떻게 하려고요? 결국 나는 혼자에요. 남이야 죽든 말든 관계없고 나만 안 다치면 되는 겁니다.
선지자를 만났다. 얼추 들어보면 상당히 믿음 좋고 신앙 좋은 것 같지만 열왕기상 17장 봅시다. 열왕기상 17장 18절 보면,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이게 앞에 가뭄 들었을 때 길르앗 디셉 사람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를 만났는데 그 과부는 마지막 떡을 먹고 아들과 동반 자살하려고 했는데 그걸 엘리야가 가로챘어요. 죽는 마지막 자유마저 선지자가 개입해서 빼앗아 가버립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비가 지면에 내릴 때까지 통에 가루는 다하지 않고 기름병은 없어지지 않고 풍족하게 살았다는 이야기거든요. 어떤 불쌍한 과부가 선지자 만나서 팔자 폈다는 식인데 나는 혼자다, 라는 것이 들통 나지 않았어요. 그렇게 해서 선지자가 와서 죽기 직전에서 살려냈습니다. 선지자를 만나서 여인이 살고 자기 아들도 살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열왕기상 17장 18절에 그 아들이 죽어 버려요. 이게 선지자 효과입니다. 살려줬기 때문에 고맙다는 생각, 왜냐하면 사람이 기본적으로 내가 사는 것이 나에게 가장 고마운 일이거든요. 남이야 죽든 말든 무조건 나는 혼자니까. 하나님께서 나는 살고 싶다는 것에 호응하는 것처럼 선지자가 오니까 선지자는 하나님이 보냈잖아요.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내가 사는 것에 동조하고 착한 하나님인 줄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살려줄 때는 언제고 귀한 아들을 죽여 버립니다.
이것을 열왕기 전체 선지자 역할을 우리가 생각해 봐야 돼요. 성경 한 구절을 더 찾아보겠습니다. 열왕기상 16장 34절을 보면,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여호수아 6장 26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대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 이 예언대로 열왕기상 16장 34절에서 세우니까 맏아들 아비람이 죽었고 마지막 아들 스굽이 죽었으니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대로 되었더라.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이 대목은 오늘날 개혁주의신학 자체가 완전히 엉터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개혁주의신학은 뭐냐 하면, 인간들아 걱정하지 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러한 복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이게 개혁주의신학의 기초에요.
개혁주의신학은 “사람들아”, 일단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이 문제가 돼요. “하나님께서”, 인간은 하나님을 알거든요. 종교성이 있기 때문에. 자기 존재를 누가 만들었겠어요? 논리적 추리를 인정하는 걸 두 자로 믿음이라 해요. 어떤 사물을 보고 거기서 논리적 추론을 수용하는 걸 믿음이라는 거예요.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과 완전히 달라요.
모든 것은 나는 혼자로부터 시작하는데 나는 여기 있다. 내가 나를 관리하지 않으면 누가 관리하는가? 아무도 관리해줄 사람 없거든요. 내 미래가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이냐? 그건 내 하기 나름이니까 어떤 정보라도 다 끌어 모아야 돼요. 신의 계시, 선지자들 예언, 삼위일체, 성경에 나오는 좋다는 건 다 끌어 모아서 나로 하여금 죽고 난 뒤에도 팔자 피게 만드는 작업에 나서는 그것을 오늘날 교회라는 업소에서 해주니까 교회 다니는 겁니다. 이익이 있으니까.
나한테 미래가 안정되면 현재 심리적 안정을 취할 것이니까 미래가 보장 못하면 지금도 흔들리니까 나의 안정성을 위해서 성경말씀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이야기 듣는 회사에 자기 몸을 맡겨서 등록해서 자기를 건지겠다는 이것이 개혁주의신학이라는 거예요. 제 이야기하니까 그게 맞는 이야기 아니에요? 이런 투는 여기는 없습니다만 제가 괜히 오버하고 있지만.
자기를 인간으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열왕기상에서 사르밧 과부에게 진짜 선지자가 나타났잖아요. 초청했습니까, 오라 했습니까, 심방 요청했어요? 아니에요. 그냥 들이닥쳤을 때 잠시 사르밧 과부는 자기가 익히 알고 있던 나는 혼자인데 하나님은 좋으신 분일 거다. 이렇게 어려울 때 하나님이 내 아들과 나를 살려주시니 고맙습니다. 이게 전반전이에요. 그렇게 이해했단 말이죠.
그런데 후반전에 가니까 아들을 죽였단 말입니다. 처음부터 뭐가 잘못 됐느냐 하면, 나는 인간인데 내가 어떻게 할까? 교회 가서 성경에 나오는 정보 모으기, 추리하는 논리를 받아들이면 그게 믿음이 되고, 이 자체가 처음부터 이 세상이 우리를 죽이기 위한 세상이란 걸 놓치고 있단 말이죠.
열왕기상 16장 34절에 여리고 성에다 건축하면 네 맏아들 죽이고 그 다음 두 번째 아들 죽인다는 그 모습은
마치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네가 모든 것을 따먹을 수 있되 선악과는 건드리지 말라는 것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여리고 성에는 건축하지 말고 그 외에는 건축해도 되지요, 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왜? 우리는 살기 위해서 혼자서 살아남기 위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고 잘못될 것은 피하고 아무 사고 나지 않고 문제가 없는 것만 찾아서 하면 나는 살 수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이게 오해가 되는 게 뭐냐 하면, 어떤 지역 여리고 성이라 할지라도 뿜어 나오는 게 있어요.
천상회의에 관련된 예언자적 요소가 그 지역 말고 다른 지역의 본질을 결정짓는 요소들이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거예요.
장마철에 맨홀에서 물이 역류되어 나오지요. 그러면 맨홀과 멀리 떨어진 사람들의 집에도 나중에 부엌에 물 들어옵니다.
저쪽 맨홀에서 넘쳤기 때문에. 어떤 특정 지역을 피하면 나는 괜찮다는 게 성립이 안 돼요.
왜냐하면 이 현실은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 거기에 구심점, 중심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서울 근방 경기도에 비 온다고 하니까 제가 얼마나 걱정이 되는지. 반 지하에 사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밤에 잠을 못 자요.
내가 돈 보태준 적도 없고 보증 서 준 것도 없는데 얼마나 걱정이 되는지. 우리 집만 아니면 되잖아요.
십자가는 정보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모르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을 결정짓는 모든 본질이 십자가에서 매일같이 솟구쳐 오르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모르는 것은 자기 원천, 오리지널을 모르는 거예요.
국가를 선지자로 묶는데 그 선지자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지금 계속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리고 성이 갖고 있는 의미가 뭐냐? 나팔. 여리고 성에서 이긴 무기가 놀랍게도 나팔이었습니다. 그때 부른 나팔의 의미는 이미 승리했다는 겁니다. 그걸 이미 접수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세상에서는 백성들이 있고 백성들이 지도자를 뽑거든요. 영웅을 뽑아요. 인간은 영웅을 자기 지도자로 삼습니다. 영웅을 세습화시키면 왕이 되는데.
하나님 나라에서 왕은 혼자밖에 없어요. 자기가 왕 됨을 인정하는 백성들을 없는 데서 만들어내야 되고 죽은 데서 살려내야 돼요. 이게 바로 종말로 모든 것이 마감되고 난 뒤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알아서 손들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세요. 이걸 요청할 수 없어요. 그렇게 되면 주님 혼자 승리했음이 그 사람 속에 빠져있기 때문에 그래요. 돌아온 백성 안에 주님이 일방적으로 백성 되게 했음이 담겨있어야 돼요.
탕자가 집 나갔다가 돌아올 때는 나는 아들 아님으로 돌아와요. 그런데 일부러 아버지는 기존의 아들임을 제거하는 상거가 먼데 기다렸습니다. 본인이 인간도 아니고 본인이 아들에 적합하지 않는 그때를 기다렸습니다. 기생과 술 먹었는지 돈 다 털어먹고 그야말로 낭인이 되어서 어딜 돌아다녔는지 수개월 동안 돌아다니다가 탕자 되어 오는데 저에게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사르밧 과부라면 선지자여, 저에게는 애초부터 아들이 없었습니다. 죽이든 살리든 제가 관여할 바가 못 되네요. 이럴 때 비로소 그 사람은 누구로부터 호출 당한다는 관계를 보여주게 됩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는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럴 때 우리 안에 들어있는 요소가 그냥 우리를 지옥 보내려고 있는 것이 아니고 선지자가 소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나팔,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 속에 죽어야 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걸 적대, 적폐라고 이야기합니다. 요새 유명하죠. 뭔가 내 손으로 끄집어낼 수 없으면서 나를 서서히 파괴로 몰아가는 적폐.
그 적폐에 대해서 누가복음 18장에 봅시다. 적폐가 없으면 선지자와 무관한 사람이에요. 선지자는 그 사람이 스스로 구원될 수 없는 요인이 네 안에 있다. 사르밧 과부야 네 사랑하는 아들이 너를 죽이고 있다는 거예요. 가뭄이 문제가 아니고 굶어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네 속에 있는 게 널 죽이고 있는데 그것을 주께서 바꿔주는 거예요. 네 아들이 아니고 주님의 아들로. 어떤 절차를 겪어야 되는데 없는 데서 있어야 되고 죽은 데서 살아나는 이삭의 절차가 있어줘야 그 사람은 언약의 나라에 갈 백성이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18장 1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기서 바리새인은 지옥 간 바리새인, 조금 있으면 지옥 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순회재판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너는 지옥이라고 판정내렸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완전히 개혁주의신학이죠.
여러분 저를 따라서 합창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과 같지 아니하고” 한 번 더요. “이 사람과 같지 아니하고” 그게 바로 우리 모습이에요. 자기 자신의 순수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타인을 피해자로, 희생물로 모집하게 돼있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잘났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자도 사귀고 남자도 사귀어요. 인간이 누구와 서로 사귀고 좋게 지낸다는 것은 상대를 통해서 자기 순수함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그게 이 세상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성경 달달 외우면서 일 년에 몇 독하면서 성경 보는 이유는, 이 성경을 보고 새벽기도 나오고 기도하는 나와 성경도 모르고 기도하지 않고 헌금도 할 줄 모르고 교회도 안 나오는 저들과 같지 아니함을 늘 비교하는 자로서 존재의 기쁨 같은 것, 향유, 존재의 즐거움을 나름대로 즐기고 있는 거예요. 순수에 순수를 더해서.
순수라고 하지만 경건이라 하고 거룩이라 합니다. 성화라고 이야기하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니까 나 자신이 인간이니까 바리새인 되는 거예요. 난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저렇게 나쁜 짓 안 하고. 나는 선한 것만 찾아다니고 악한 것은 피해 다녔습니다. 이게 타고난 인간의 본성이죠.
그러면 구원받기 위해서 어떤 꼼수를 쓰면 되겠습니까? 저들과 같지 아니함을 반대로 하면 되겠느냐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겠지요. 나는 저들과 같습니다. 그런다고 구원해주는 것 아니에요. 어디서 꼼수를 부려. 성경에서 나오는 이런 사람은 지옥 간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시 탕자 이야기 안 해도 되지요. 우리는 우리의 적폐를 감추고 그럴싸한 면을 타인에게 비추는 거예요. 속에 썩어가는 것은 계속 감추면서.
그래서 경건, 거룩 이것은 속에 다른 게 들어있는 것을 극구 부인하면서 포장을 한단 말이죠. 페인트칠하듯이 두껍게. 여자들 화장 두껍게 하면 못 봐줘요. 가부키도 아니고. 떡칠해서 누구 얼굴인지 분간도 안 되지만. 경건과 거룩 이런 것으로 포장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영역을 순수한 하나님과 같이 있을 수 있는 관계라고 자기가 점검하고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면 이게 아니라면 우리가 나쁜 짓을 일부러 찾아서 할까요? 깡패 짓을 한다든지 내 속의 적폐와 맞는 짓 같은 것, 그런데 일부러 죄인 되기 위해서, 탕자 되기 위해서 마음도 안 맞는 조폭이 된다. 조폭이라 해도 가정에서 다 도와줘야 돼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조폭사회에 들어가면 거기서도 나 저 사람과 같지 아니하고, 또 나와요. 같은 조폭인데 의리 없는 놈이 있고 나는 의리는 약간 챙겼다고 해요. 인간은 아무리 나쁜 짓을 하고 싶어도 선과 악을 나름대로 무게를 달아요. 어떤 자리에 가도 나름 본인은 저들과 같지 않은 약간은 순수하고 착하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내 희생물로 간주해버립니다. 인간의 본성이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는 나는 혼자란 것을 피할 능력이 없습니다. 나쁜 짓해도 그 동네에요. 착한 동네에 가면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난 착한 며느리다. 병든 시어머니를 위해서 몇 년 봉사했습니까? 10년 했습니다. 10년 해서 이 동네에서 그것도 효부라고? 이 아줌마는 25년, 20년 쫙 있어요. 한 달 용돈 얼마 드립니까? 없는 가운데 백만 원 드립니다. 이백, 삼백. 밑반찬은? 다섯 가지. 어떤 사람은 백 가지, 이백 가지. 어디서 주제파악도 안 되고 여기서, 분위기를 보고 해야지. 금식은 며칠 했습니까? 7일. 그 동네는 전부 40일 넘긴 사람들이에요. 방언했다 하면 몇 분합니까? 8분, 12분. 여기는 3시간짜리.
뭐와 같지 않고 하는 이 본성을 우리 힘으로 벗어날 수 없어요. 그래서 여기서 선지자가 지혜가 필요합니다. 모든 선지가가 어디서 나왔는가? 970~930까지 기간은 솔로몬입니다. 열왕기상은 솔로몬부터 시작합니다. 그 솔로몬 이야기에서 지혜가 나옵니다. 그 지혜의 정점이 솔로몬의 재판에 나와요. 지금부터 솔로몬의 재판에 담겨있는 의미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솔로몬 재판이 왜 나오느냐 하면, 열왕기상 초반에 나오지요. 벌써 열왕기상에 들어간 거예요. 열왕기상 3장 20절에 보면, 창기 둘이 왕에게 와서 재판을 요청하는 겁니다. 이 솔로몬 재판이 모든 지혜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아가서 솔로몬이 지었는데 지혜를 전도서 1장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얼마나 많은 책을 썼고 나름대로 지혜를 이야기했지만 되돌아보면 다 헛짓이다. 아무 의미 없는 짓이에요. 이 땅에서. 그저 있을 때 잘하라는 것은 주실 때 즐기는 것이 그나마 남는 장사에요. 이 땅에서 어떤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전도서 7장에 보면, 결혼식에 가지 말고 장례식에 가라 해요. 얼마 전에 제가 우리교회 집사님 발인예배 했는데 연락을 했는데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지 단 한 명도 안 왔어요. 그런데 결혼식이라면 그랬을까? 그래서 섭섭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다시 한 번 확인한 거예요. 복음으로 달라질 인간은 없다는 것. 말씀으로 살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 거예요. 왜? 나는 혼자기 때문에.
사실은 다 오고 싶은데 하나님이 그때마다 할 일을 주셔서 못 오신 거예요. 제가 구차스럽게 변명하는 겁니다. 마침 주께서 그때 못 갈 사정들 다 주신 거예요. 온 교인 전부 다. 마무리를 이렇게 좋게 지어야 돼요. 안 그러면 큰일 납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솔로몬이 일천번제 드렸거든요. 산당에서 드리고 기도할 때 자기의 목숨 비는 것과 원수 죽는 것과 부귀영화를 달라고 하지 않고 주님이 직접 관리해달라는 거예요. 내 백성 아니고 주님의 백성이니까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책임져주세요. 나는 비껴나겠습니다. 주께서 지혜를 주신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통치인데 왕의 통치지요. 그 통치가 솔로몬의 재판에서 등장합니다. 솔로몬이 많은 재판을 했겠지만 특별히 이 재판을 하는 이유가, 솔로몬의 재판에서 장차올 복음, 계시가 땅에 어떤 양상으로 도달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용은 여러분 아시죠. 창기 둘이 얘를 낳았어요. 한 아기가 깔려죽었어요. 죽은 아기 처리하고 옆에 친구 아기를 시미치 떼고 자기 아기라고 우기는 겁니다. 거기 cctv 없었어요. 과학수사대 동원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재미나는 것은 그 자리에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데 솔로몬한테 가져왔다는 게 문제 아닙니까. 솔로몬은 봤습니까? 솔로몬은 잠도 안 자고 백성들 죽었는지 온 동네 돌아다녔습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솔로몬의 재판이 아니에요. 솔로몬은 목격자 아닙니다. 자기도 몰라요. 남의 일이라니까요. 그 아기 죽을 때 옆자리에 같이 잔 것 아니에요. 왜 솔로몬한테 가져옵니까? 그 현장에 있지도 않았는데 왜 나한테 가져와? 너희끼리 싸우든지 말든지 난 몰라. 이래야 되는데 솔로몬이 그 재판을 일단 수용한다는 것은 솔로몬이 아니라 솔로몬 자리가 중요해요.
그걸 왕의 이중 자리라 합니다. 왕의 이중 자리는 두 가지가 있어요. 법적인 지위가 있고 생물학적인 지위가 있어요. 생물학적 지위는 왕이라도 죄 지을 수 있고, 왕이라도 늙어죽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법적 지위는 영구해야 되고 계속 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꼴이 안 돼요. 나라가 질서가 안 잡혀요.
교황이란 이중신분을 갖고 있어요. 교황이 완전하냐? 당신은 나쁜 짓 한 적 없어? 교황한테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에요. 질문 자체가 잘못 된 거예요. 교황의 자리는 천주교 성당을 대표하는 상징적 자리에요. 법적인 지위의 관계기 때문에 그 사람의 자질이나 태도에 관계없이 교황은 교황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생소하게 느끼지 마세요. 왜냐하면 오늘날 교황이 각 교회가 목사들 아닙니까. 목사님, 그것 잘못됐어요. 목사는 하나님이 직접 치는 것이지 감히 교인들이 나한테 하극상의 반란을 일으키느냐. 목사는 기름 부은 자다. 참기름인지 들기름인지 모르겠지만 기름 부은 자에게 대들다가 망한 집구석이 한둘이 아니야. 성경의 전문가들이 다 하는 이야기니까 확인해줘? 친구야, 오늘 오후 청년회헌신예배 해 달라. 알지? 목사 대들다가 이빨 뿌려진 것 하고. 똑같은 인간들이 똑같은 짓을 하니까 전문가들이 알지 아마추어가 뭘 알아, 이렇게 생각한다니까요.
이중으로 돼있다는 이야기는 왕의 입장에서, 그러니까 바보 등신 앞장세워서 수렴 청정한다. 죄인 하나 앞장세워서 뒤에 진짜 의인 되시는 주님이 다루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솔로몬은 범죄 현장에 없었어요. 아무것도 모르지만 주님에 의해서 그 송사가 지금 솔로몬 앞에 와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 정답은 누구를 위한 정답이냐 하면, 앞으로 이스라엘을 어떤 지혜로 통치할 것이냐는 액기스를 전달하는 계기로서 두 창기 가운데 한 아기 죽는 사건이 이스라엘에서 유발된 거예요.
이걸 오늘날 우리한테 적용시킨다면, 우리 집 개를 잃어버렸다. 개를 잃어버린 것은 이 세상이 복음으로 통치하고 십자가로 통치하고 있다는 걸 증거하는 확인하는 계기로서 우리 집 개가 집을 나간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이 성도 본인이 오늘날 솔로몬이거든요. 성도가 해야 될 것은 뭐냐? 개 나감과 십자가 복음의 관련성은? 그것 연구해야 돼요. 수돗물이 갑자기 안 나온다. 수돗물 안 나오는 것과 십자가의 관련성은? 그것 따지는 게 복음적인 삶이에요. 연관성 없으면 재판 못합니다.
재판을 어떻게 하는지 보세요. 재판을 할 때 하나님이 통치하는 것은 적폐와 적대를 경유해서 재판을 판시합니다. 적폐와 적대는 지난 시간에 했어요. and란 말을 했지요. 뒤에 있는 개념이 앞의 개념에 새롭게 부과하기 위해서 차이 나는 개념을 붙인다고 이야기했지요. 그 방법입니다. 적폐와 적대를 끄집어내야 주님의 지혜에 담긴 복음의 내용이 나와요. 적폐와 적대가 안 나오면 백날 재판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럼 적폐와 적대가 뭐냐 하면, 이겁니다. 내 아기가 죽었어요. 이게 적폐와 적대입니다. 저 못된 계집이 멀쩡한 내 아기와 바꿔치기해서 자기 아기라고 우겼습니다. 그래서 내 아기를 잃어버렸습니다. 그걸 되찾게 해주세요, 라는 것이 적대와 적폐에요. 그것 때문에 솔로몬에게 고소하러 온 거예요.
그러면 모든 사람은 그걸 보고 자기 감정이입을 하는 거예요. 나도 얘가 있는데 못된 여자에게 빼앗기면 얼마나 억울하겠노. 우리는 열왕기상 이걸 보면서 응원합니다. 힘내라, 힘. 솔로몬이 있잖아. 하나님이 지켜보고 있잖아. 정의로운 하나님이 너의 원을 들어주실 거야. 솔로몬한테 재판 참 잘 걸었어. 솔로몬이 보통 분이 아니거든요. 반드시 억울함을 풀어줄 거야, 라고 응원하겠지요. 우리가 있잖아요. 힘내세요.
아버지가 도둑인데 가스관 올라가서 물건을 훔치려고 저녁에 출근할 때 아이가 아버지한테 하는 이야기가 뭡니까?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왜? 우리는 혼자니까. 남이야 물건 잃어버리든 말든 나도 같이 돈 벌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부잣집은 물건을 잃어버려야 되고 돈을 상실해야 돼요. 왜? 나는 혼자니까. 복면가왕은 두 사람 되면 안 돼요. 하나에요. 우리는 신이 되는, 나의 절대적 되는 그게 나의 욕망의 원천입니다.
모든 사람이 바꿔치기한 그 여자는 죽여라, 죽여라. 솔로몬 귀에 막 들어오는 것 같아. 그리고 잃어버린 여인은 불쌍하다. 하나님은 불쌍한 자,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신다. 그 여자에게 아기를 찾아주세요. 그런데 솔로몬은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면, 너희들의 기대하는 이 땅에서 흔히 말하는 정의로움, 억울한 것을 풀어주고 악한 자를 벌하는 그 정의를 솔로몬은 두 동강 내버립니다.
모든 문제가 뭐냐? 둘 다 죽지 않고 아직도 남아있는 아기 하나를 쪼개버립니다. 쪼개면 재판 자체가 사라져요. 지금은 하나는 죽고 하나는 남았기 때문에 억울함이 있지 둘 다 죽었다면, 공평해지잖아요. 그러니까 둘 다 뭔가 있음, 존재, 내 아기가 아직 살아있는데 빼앗기는 게 문제거든요. 그럼 그 아기를 죽여 버리는 겁니다. 다시 오리지널 아예 없는 자리로 되돌아가버려요.
거기에 대해서 오케이? 진짜 아기를 잃어버린 엄마는 오케이라고 한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겁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 세상인데 있음이 쪼개지지 않고서는 그 자리가 없고서는 결코 메시아의 구원이 나오질 않습니다. 아기가 둘로 쪼개지는 그 현장에서 그 틈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가 그 안에 담겨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무엇이 구원을 방해하느냐 하면, 내 것은 내 것이다. 이것 잃어버리면 안 돼. 왜? 내 것이니까. 그 의식 자체가 계속해서 십자가 복음을 가리고 있는 거예요.
그 나쁜 여자는 아기를 둘로 쪼갠다고 하니까 왕한테 그런 권한이 있어요. 아프리카 서부에 있는 모리타니 공화국에선 대통령이 왕 같이 통치해요. 어느 정도로 대통령이 권한이 있느냐 하면, 축구시합에서 지루하게 하잖아요. 그러면 대통령이 명령을 내려요. 잠깐 스톱. 페널티킥으로 끝내라. 실제 있었던 일이에요. 페널티킥으로 시합을 끝냈어요.
왕이란 이미 절대적 결정권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못된 여자 입장에서는 어차피 죽든 말든 이미자기 아들은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자기완 상관없는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자기 아들을 잃어버린 여자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쪼개지 마옵소서. 차라리 저 여자에게 주옵소서.” 이 말은 뭐냐 하면, “왕이여 제가 재판 잘못 걸었습니다. 재판할 문제가 아닌 걸 재판하러 온 제가 잘못 되었습니다.”
그러면 재판의 범주가 뭐냐? 이 세상 안에서 내 것이냐, 네 아기냐 하는 그 문제에서 범위가 벗어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 그 바깥에는 이 전체를 적폐로 간주하는 그러한 여리고 성에 건축하면 죽여 버린다는 진짜 핵심 요소가 우리를 포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컨테이너에 갇혀있습니다. 그 안에서 복닥복닥 내 것, 네 것, 이것으로 싸우고 있어요.
솔로몬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는 이 세상은 몽땅 다 없애버려야 되는 거예요. 그 증상과 흔적을 창녀 둘의 사건을 통해서 이미 하나님께서 흔적을 남기고 있었고 솔로몬은 그걸 통해서 이스라엘이 외부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와 어떻게 연관돼있는지 보여주는 이것이 솔로몬의 재판입니다. 이건 재판 이야기가 아니고 주님의 계시, 복음 이야기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