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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여름수련회(열왕기상) 은밀한 나라1강-유다와이스라엘 17073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8. 7. 12:47
2017-08-05 10:52:34조회 : 65         
2017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1강-열왕기상 강해:유다와 이스라엘이름 : 한윤범 (IP:119.192.174.155)

2017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1강-열왕기상 강해:유다와 이스라엘

(강의:이근호 목사)

 

 

주께서 준비하신 일이 오직 주님께 영광되기를 원합니다. 저희들 주님의 선물 받는 입장에서 하나님께 누가 되지 않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만 날마다 새롭게 주 앞에 드러날 수 있는 귀한 선물 수여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이번 수련회에서 하려고 하는 열왕기상입니다. 열왕기상은 신약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구약에 있어요. 구약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오해하기를 옛날 한물 지나간 일이 아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나간 일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이 있다면, 십자가 사건 안에서 고유한 시간과 고유한 공간이 새롭게 여기서 분출됩니다. 기존에 인간들이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과 투쟁하게 돼있어요. 싸우는 겁니다.

 

고유한 특이한 시간이란 이미 완성 또는 완료로 마감이 돼요. 보통 원서마감이란 말을 하지요. 그런데 인간의 시간은 아직도 가볼 때까지 가보자는 식이에요. 마감을 히브리서 1장에서 마지막 때, 종말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공간이란 그동안 인간이 피땀 흘려 만들어놓은 문명을 이야기합니다. 문명은 에너지와 관련돼있어요.

 

서유럽의 사상가들은 20세기 들어오고 난 뒤에 과학에 적용되는 질서를 사회현상까지 그대로 전환시키고 있습니다. 과학으로 증명된 원리를 과학에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원리까지 적용시키죠. 그러면 에너지를 어떻게 캐내고 개발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이 사는 사회 자체가 거기에 변동돼야 된다는 겁니다.

 

1차, 2차, 3차, 4차 산업이 있는데 1차 산업은 기계라서 인간의 완력을 기계가 대체하는 겁니다. 2차 산업은 전기에 관해서 또는 기차 등을 통해서 해당되는 효과를 영토로 확장시키는 겁니다. 3차 산업은 컴퓨터, 인터넷. 4차 산업은 현재 인공지능 시대인데, 인간의 노동을 기계가 대신함으로써 이건 어디까지나 과학기술분야인데 그것이 사회분야로 바뀝니다.

 

1800년 대 최초로 독일에서 복지정책을 벌입니다. 에너지를 활용하는 문제가 사회 정치 경제 분야까지 영향을 끼쳐요. 1854년에 영국에서 최초로 부가가치세가 성립됩니다. 그리고 프랑스에선 19세기 초에 공교육을 거론하고 있어요. 모든 국민을 전부 다 교육시키겠다는 겁니다. 에너지를 통해서 우리가 사는 공간을 에너지로 획기적으로 바꾸는 겁니다.

 

그러면 4차 산업에서 에너지 활용도는 우리가 사는 공간이 인간만 사는 공간이 아니고 로봇과 함께서는 공간 자체 개념이 달라지는 거예요. 어쨌든 간에 그냥 우리끼리 주어진 대지, 땅에서 문명을 발전시켜서 살아보자는 식이죠. 그래서 목성, 달도 가고 화성에도 가고 기지를 만들고 하는데 십자가에서 나오는 공간 개념은, 이미 너희는 죽었고, 땅 자체가 마지막 종말에 의해서 불쏘시개가 되는 겁니다. 불로 태워집니다. 그러면 확연히 다르잖아요. 여기는 발전하세, 개발하세, 이렇게 되고, 이쪽은 우리는 이 땅에서 발을 빼세, 후딱 떠나버리세, 이런 관점이에요.

 

이쪽에는 에너지가 있는 한 살 힘이 있다는 것이고, 땅이 불 심판, 불도 에너지거든요. 불로 확 쓸어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땅을 운영하는 에너지는 오로지 복음을 위해서만 동원된 에너지지 인간이 이 땅에서 더 버티기 위해서 제공된 지하자원은 아니에요. 바깥은 태양에너지, 땅 속엔 석탄과 석유 아닙니까. 복음을 위해서 이 땅에 필요한 에너지란 말이죠.

 

그러면 인간들은 에너지를 통해서 계속 자손을 번성하는데 이걸 생식이라 하지요. 생식해야 산다. 이쪽은 복음으로 산다. 산다는 방법과 수단이 다르지요.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으로 산다. 이건 복음으로 산다. 이쪽에선 죽으면 안 돼. 이쪽은 죽어야 산다. 말이 통할 리가 없습니다. 전혀 통하지 않지요.

 

그래서 십자가란 오늘날도 핍박을 받게 돼있어요. 거부당하게 돼있고. 십자가 복음을 핍박하고 거부한다는 것은 복음 말고 다른 방식으로 살기로 작심했다는 뜻이에요. 나는 이런 에너지를 축적하는 방식으로 살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복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나는 에너지로 이 사회에서 살고 싶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땅에는 종교가 없는가? 종교가 있지요. 복음 빼고 종교가 있어요. 그게 교회라는 사기 단체를 만드는 겁니다. 그냥 거기서 친하게 지내는 것. 그래서 복음 말고 교회가 장차 우리가 죽고 난 뒤에 천국이 있다면 나는 교회를 통해서 가겠다. 이쪽에선 교회를 통해서 천국 가겠다. 이쪽에서 복음으로 간다. 이게 확연하게 다르잖아요.

 

그래서 여기 있는 교회는 어떻게 운영되는가? 에너지로 운영돼요. 에너지를 축적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매개를 화폐라 합니다. 돈. 사람들은 교회를 원하고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그래서 에너지를 위해서 마이닝mining, 비트코인 채굴한다고 하지요. 교회마다 채굴하는 거예요. 계속 채굴해서 교회가 유지되도록 해야 되지요.

 

그러면 교회란 뭐냐? 에너지가 만든 사회구조에 멤버가 되는 겁니다. 멤버가 되면서 교회는 자기가 살고 있는 공간과 시간의 확장을 위해서 복무하고 봉사하고 섬기는 기능이 바로 교회 기능이 되죠. 에너지를 확보해서 보다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얻고 미래를 대해서 확보한 구원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교회는 그들이 원하는 식의 구원방법을 제공하는 게 교회입니다.

 

그런데 복음이란 우리가 섬기는 게 아니에요. 복음은 섬기고 받들어 모시는 게 아닙니다. 교회는 인간의 단체기 때문에 인간이 활동해야 유지가 되는데 복음은, 예수님이 활동하고 거기에 인간들은 방해물이 돼요. 주님이 부활하셔서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괜히 인간들이 걱정들 하는 거예요. 지난번에 우리 교회에서 교인들 40명 나갔는데 이번 주 세 명만 왔는데 이래서 교회 되겠는가? 주께서 또 촛대를 옮기는 게 아닌가? 촛대를 아무리 옮겨도 괜찮아요. 일곱 교회는 주께서 쥐고 계시니까.

 

요한계시록에서 쥐고 있다는 말은 이겁니다. 모든 시간은 완료적 차원에서 실시되고 있는 거예요. 여기 있는 복음을 중심으로 교회 해보겠다는 이 교회, 그건 항상 복음 앞에서 미완료, 어설픔, 옮겨져야 될 단체로 늘 등장해야 돼요. 그래야 복음을 빙자로 교회를 안 믿기 때문에. 교회는 마지막 때 복음으로 완료되기 때문에 완료의 완료됨은 그냥 완료 되어서는 완료가 안 되거든요. 반드시 미완료가 들어갔다가 주님에 의해서 깨지고 부셔지고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또 다른 미완료가 들어가고 빠지고 들어가고 빠지고 하는 가운데서 진짜 영원한 동일성은 복음밖에 없다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여러분, 마술사들이 마술할 때 갑자기 마술하다 스톱하는 경우가 있어요. 수리수리마수리 니코, 내 코 찍고 하지요. 왜 그러냐 하면 그런 칸막이가 있어줘야 신기한 함이 드러나거든요. 아무 관계없는 엉뚱한 짓을 하면서 그걸 살짝 비키는 겁니다. 이건 전에 이야기했지만 축구에서 프리킥을 찰 때 앞에 골키퍼가 있고 차는 게 다 보이잖아요. 그러면 자기 팀이 스크럼을 짜요. 하나, 둘 찰 때 비키면 수비수들이 우왕좌왕할 때 빈자리로 차거든요. 그때 호날두가 차든지 매시가 차면 들어간다 말이죠.

 

복음은, 이게 복음입니다, 하면 인간은 그걸 덥석 소유하려고 덤벼들어요. 소유가 되면 복음이 완료가 돼야 되는데 뭐가 완료되느냐 하면, 나는 어제 십자가 복음 받아들였다. 그러면 본인 완료돼버립니다. 그러면 복음이 믿음의 대상이 아니고 예수 믿는다는 자신이 믿음의 대상이 돼버리죠.

 

이미 인간에게는 고유의 공간과 시간이 있는데 그걸 예수님의 고유한 공간과 시간을 자기의 시간과 공간으로 때우면 여기서 어떤 게 나오느냐 하면, 복음이야기, 예수님은 이렇게 하셨다는 이야기가 나와야 될 걸 나는 스무 살 때 어떻게 선교했고, 사십에 복음 받아들이고, 오십에 개척교회 두 군데 하고 자기 드라마가 나와 버려요. 그건 복음이 전한 것이 아니고 가짜 복음을 전한 것이 돼버려요. 소위 간증이란 이름으로.

 

따라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미완료, 어설픔, 가짜 이런 것들을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불러내요. 오늘은 네가 가짜 노릇 해볼래? 그런 관계로서 교회를 만들어요. 가짜인 줄 뻔히 알면서 교회를 만듭니다. 그러면 가짜 교회와 복음에 얽매이면서도 어설픈 교회로 연결되는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이쪽 교회는 원칙이 있어요. 오늘 우리가 하려는 열왕기의 원칙대로, 구약에 주어진 약속대로 원칙이 가짜로 드러납니다. 구약대로 주께서 이스라엘로 부름 받았다가 내침을 당하고 멸망당하는 그 과정을 오늘날 교회가 반복하게 되면 그 교회는 복음으로 구원받는 교회고, 이쪽 교회는 사람들 눈치를 보는 겁니다.

 

이쪽 교회는 이미 망했다 치고 시작하는데 이쪽 교회는 완료기 때문에 이미 세상 끝까지 가봤기 때문에, 이쪽은 안 가봤기 때문에 기도 빡세게 하고 헌금 많이 하고 선교하게 되면 주께서 아마 도와주실 걸? 참된 복음만 전하기 때문에 주님이 도와주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걸 아웃소싱이라고 이야기해요. 아웃소싱은 하청 주는 겁니다.

 

법적인 아웃소싱은 그 나라에 불법적은 공장을 베트남이나 라오스로 옮기면 그 나라에선 지금 환경문제가 급한 게 아니고 투자 받는 게 급하기 때문에 불법적인 제품 생산을 인도네시아에서 만들고 상표는 누가 갖고 있는가? 환경을 중요시하는 본국에서 갖고 있으면 전혀 불법이지 않으면서 상품은 상품대로 생산하는. 이건 불법을 떠넘기는 거죠.

 

교회가 두 군데 되지요. 한쪽은 어설픈 교회지만 주께 붙어있는 것, 또 한쪽은 인간들 자기의 생식과 생존, 생계를 위해서 복 달라는 교회. 공통점은 둘 다 어설프다는 겁니다. 차이점은 뭐냐 하면, 이 교회는 교회 믿어서는 안 된다는 교회에요. 여기는 교회에 목숨 걸었어. 교회에 등록하고 성만찬하고 물 뿌려주면 그걸로 생명책에 기록된다고 거기에 목숨을 거는 겁니다. 이건 사기죠.

 

여러분, 어설픈 것과 사기는 다릅니다. 사기는 노골적이잖아요. 이 사기가 바로 구약에는 거짓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 교회는 참 선지자라 하거든요. 여러분들이 참 선지자라 하니까 죄 없는 줄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고 참 선지자는 자기가 죄인인 걸 아는 자가 참 선지자에요. 나는 결코 메시아가 아닙니다. 아모스는 나는 선지가가 아닙니다. 그냥 양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해요.

 

가짜 교회는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해요. “여러분, 예수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믿고 싶은 사람은 손들고 나오세요. 오늘도 열두 명 나왔습니다. 다 같이 할렐루야 찬송합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어설픈 교회는, “나는 예수를 믿은 적 없고 전적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는 겁니다. 이쪽 가짜교회는 믿는 게 뭐가 어려워. 믿지 뭐. 참된 주님의 복음으로 발생된 교회는 도저히 주께서는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우리한테 지시했다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믿어봐야 결국 예수 믿는 나를 믿는 것을 마감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구약이 옛날이야기가 아니죠. 옛날이야기가 아닌 것을 구약, 옛 언약이라 해요.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면 새 언약, 옛 언약이 동시에 다발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 주제는 나왔네요. 뭐냐 하면 어설프자. 늘 실수하자. 완벽하지 않기. 참 이런 게 복음이거든요. 더 나가서 할 수 있는 대로 죄 짓자, 이런 것. 기쁨으로 죄 짓자. 얼마나 당당합니까. 보통 당당한 게 아니에요. 죄 지면 안 된다고 벌벌 떠는 것은 아직도 믿음이 없는 거예요. 믿음이 없으니까 조마조마한 겁니다. 조심해야 되고.

 

강물을 걸을 수 있는 어떤 특허 받은 신발이 있다 합시다.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걷듯이 그 신발을 신은 사람은 와~ 물이다. 우리가 건너보세요. 그런데 신발이 없는 사람은 15년 믿었는데, 20년 방언했는데 내일도 방언해야지. 17년 동안 안수해서 병 낫게 했으니까 내년에도 병 낫게 해야 될 텐데 안 되면 그 사슬이 끊어지는데. 이런 거예요. 벌벌 떠는 거예요. 쫄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이름을 바꿔야 돼요. 이 어설픔, 박 당당, 최 죄인. 다 같은 이야기에요. 이미 주님이 마감했기 때문에 우리는 할 것 없음. 이쪽은 미래가 없고 희망이 없으면 내 마음이 불편해서 안 돼. 그래서 은혜 만들어내기, 다른 말로 은혜받기. 이쪽은 이미 주셨기 때문에 당당함, 자유, 어설퍼도 상관없어요. 이때는 아파도 아프니까 성도거든요.

 

그래서 복음이란 인간이 아무리 힘을 다해도 복음의 위력을 대체할 만한 게 없고 주님의 복음을 인간이 아무리 죄를 지어도 다 커버할 수 없고 주님의 복음은 죄 짓는 틈새 사이에 빛을 주시는 겁니다. 빛을 주시기 때문에 그 주님의 얼굴의 빛난 영광에 감히 그 앞에서 우리의 착함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어설픈 자기변명으로 주님 앞에 하소연, 한풀이하지 마세요. 다 엄살입니다. 말도 안 되는 엄살이에요. 이미 복음으로 끝내버렸잖아요.

 

자기가 예수 믿는다고 덜 힘들면 그게 보다 더 완성입니까? 그런 것 없어요. 보다 더 완성이란 게 없어요. 나에게. 어제보다 나은 오늘, 이런 게 없어요. 주님의 복음이 우리에게 구멍을 뚫어서 주님의 복음의 영광이 구멍이 더 커져서 누더기 돼버린 구멍을 통해서 확연하게 비쳐 나올 뿐이지 나란 존재 자체가 더 커지는 건 없습니다.

 

이쪽 교회 특징은 교회를 다녀야 돼요. 그런데 이쪽 교회는 그냥 있어도 교회에요. 공간 개념이 어딜 가나 우리를 죽게 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어딜 가고 한 달 두 번 나오든 의미가 없어요. 물론 헌금도 의미 없고요. 우리 시간도 의미 없는데. 내가 앞으로 5년 더 살고, 10년 더 살고 그게 의미 없어요. 나는 90 살았는데 너는 60 살았지. 내가 이겼지. 이런 것 없습니다.

 

인간 나름대로 나오는 시간과 공간이란 에너지 축적과 관련돼있어요. 에너지 축적이 상품이 되고 상품은 돈으로 교환되는 거예요. 그래야 생존되기 때문에. 그래서 돈 벌고 산다는 것이 나쁜 겁니까, 라고 하는데 그것 안 해도 나빠요. 우리는 이미 죄인으로 확정된 이상은 되돌아가서 어떤 짓을 해도 선한 게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는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어떤 분이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는데 전에 십자가마을 수련회에 참석했는데 밤새도록 보험 들라고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정말 제대로 죄 진 거예요. 복음 가운데 형제가 아니고 보험 가운데 형제에요. 발음 잘해야 돼. 십자가마을에서 영업하신 거예요.

 

열왕기상이란 구약, 옛날 언약에 해당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언약에 해당된다면 언약은 항상 기존의 시간과 공간에서 새롭게 돋아나는 식이에요. 인간의 시간의식에서 전부 커버되는데 그것을 뚫고 역사나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독특한 복음의 시간관이 신약에 오기 전에 마지막 되기 전에 가시처럼 불쑥불쑥 구멍 뚫고 나오는 겁니다. 그것이 선지자에요.

 

선지자는 위와 연관돼요. 땅과 연관되는 게 아니고. 선지자 특징은, 지상의 역사는 혈통의 역사거든요. 혈육의 역사와 관계없이 천상회의에 참석해서 하늘과 관련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선지자가 말하는 모든 말의 의미는 복음의 시간과 공간이란 환경에 의해서 그걸 담아서 말하기 때문에 기존의 인간 역사 관점으로는 풀어낼 수 없습니다. 풀어낼 수 없으면 핍박밖에 더 있어요? 죽어버리죠.

 

구약에서 이걸 알기 위해서 시간과 묵시, 다시 말해서 혈통적인 노선과 선지자 노선 둘 다 알아야 됩니다. BC 1050~1010 사울 왕, 1010~970 다윗, 970~930 솔로몬이에요, 931년에 드디어 남북으로 나눠집니다. 제가 방금 역사와 묵시를 다 이야기하려면 왕과 선지자의 대비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강의제목을 말씀드리면, [유다와 이스라엘]이에요. 저는 강의 준비하면서 유다와 이스라엘을 제목으로 할 게 아니고 초점이 어디 있느냐? ‘와(and)’로 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리고’란 말이 의미가 있는 게 뭐냐 하면, 뒤에 항목에 있는 단어가 하나의 요소가 되어 전체를 포괄하는 토대를 이룰 때 ‘와’라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와’ 뒤쪽에 있는 이것이 요소가 되어서 전체의 토대를 이룰 때만 ‘와’라고 써놓은 문장의 의미가 비로소 밝혀지는 거예요. 접속사라는 게 원래 그런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은 저주받습니다. 유다는 복 받지요. 그래야 복과 저주, 언약의 두 가지 요소가 되거든요. 그런데 저주라는 요소가 토대가 되는 거예요. 토대가 될 때 복의 의미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해되시겠지요. 뒤쪽에 있는 그러니까 유다와 이스라엘은 말이 돼요. 말 되니까 O. 그런데 브라질과 이탈리아, 이건 X에요. 왜? 둘 다 동등한 세상나라니까. 여기서 ‘과’는 그냥 덧붙인 것뿐이에요. 아무리 덧붙여도 새로운 의미가 나올 질 않습니다. 이 ‘과’는 복음적 관점에서 X가 되는 겁니다. 인간과 인간도 마찬가지로 X에요. 같은 인간이 되면 안 돼요.

 

그런데 이건 특이해요. 남자와 여자. 남자와 여자는 X가 아니고 O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남자란 여자를 통해서 소급해서 남자의 의미를 다시 새기거든요. 여자란 말은 창세기 3장에서 생명이고, 남자는 아담이니까 흙, 물질로 환원돼요. 죽음 되기 때문에 여자라는 생명이 토대가 되어서 인간은 왜 죽어야 되는지 의미가 보장되니까 ‘와’가 성립되니까 맞는 거예요. 그 다음에 하나님과 인간, 이것도 O가 됩니다. 항상 원리가 뭐냐? 반드시 차이가 나야 돼요. 차이가 나면서 그 차이를 극복하고 전체 하나의 통합된 의미가 주어질 때 ‘와’라는 말을 쓰는 것이 합당한 거예요. 벌써 어깨 만지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과 인간을 봅시다. 하나님의 의미가 뭐냐? 하늘에 계신 어르신이 하나님이 아니거든요. 인간을 요소로 해서 새롭게 하나님이 규정되니까 이건 O가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 돼버리면 이건 X가 돼요. 새로운 의미를 추가할 필요가 없거든요. 인간이 요소가 되어서, 쉽게 말해서 땅에 온 하나님만이 하나님이란 말이죠. 인간이 상상한 신은 하나님이 아니란 말입니다.

 

둘이 안 되는 이유가 십자가 죽음이 그 둘을 용납하지 않고 한쪽은 버리고 한쪽은 채택하게 돼있어요.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이게 된 그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고, 예수님이 살해당한 것은 바로 모든 인간세계에서 오직 그 하나의 하나님으로 모든 게 묶여있어요. 하나님이 땅에 온다는 생각을 어느 인간도 해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가짜인 것이 탄로 나는 것이 싫어서 제거해버린 거예요.

 

십자가 사건은 뭐냐 하면, 자기의 잘못과 자기의 근원적인 착각이 들키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을 사전에 베개로 덮어 죽여 버린 사건이에요. 그게 십자가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을 십자가 사건을 복음이라 해서 반복해버리죠. 반복하니까 인간들은 자기 스스로 고칠 수는 없고 이미 모든 의미는 십자가로 확정된 상태에서 소급당하죠. 계속해서 모든 게 가짜라고 지적하게 될 때 우리는 가짜 맞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해도 여러분이 못 알아들어서 가짜 맞는다는 말 때신 진짜를 알기를 원합니다. 하는데 그런 일은 없어요. 인간은 진짜를 소지할 수 있는 권리가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만 가져야지 내가 가지면 교주가 된다니까요. 복음이고 뭐고 주님이 가져야 돼요. 우리가 갖고 있으면 안 돼요. 왜냐하면 복음은 갖고 있는 걸 꺼내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적용시킬 능력까지 함유해야 복음을 안다고 할 수 있거든요.

 

복음을 알려주세요. 왜? 가지려고? 그것으로 뭐 하려고요? 돈 되는 것도 아니고 왜 가지려 해요? 구원받기 위해서. 복음을 소유한 내가 소유한 그것을 인식해서 구원받아요? 그게 바로 마귀의 십자가잖아요. 복음이란 복음을 가진 자가 일방적으로 능력 줘서 그 효과로써 우리가 구원받은 겁니다. 내가 따로 가질 필요가 없다고요. 혹시 주머니에 복음 있거든 다 내놓으세요. 내버리세요.

 

우리가 그 복음을 왜 가지려 합니까? 복음대로 살지도 않을 걸. 어차피 우리는 어설프잖아요. 어설픈 얘한테 M16 2정과 다이너마이트 20킬로 지고 소풍 가라. 그게 말이 되겠어요? 성령까지 주면서. 잘 갖고 놀면 재밌는 소풍 될 거야. 그걸 왜 줍니까? 가지고 놀다 터져버릴 걸. 그 위험한 것을 우리가 왜 가져야 돼요?

 

복음을 알겠다는 것은 뭐냐 하면, 주님의 구원이 영 못 믿어진다는 뜻이거든요. 못 믿어지면 안 믿으시면 되는 거예요. 주님이 믿음직스럽지 않다는 거예요. 그러면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고백하면 그게 성도인데 믿음직스럽지 않은 걸 억지를 부려서 남한테 믿음 없는 걸 티 안 내려고 하니까 불신자 되는 거예요. 무슨 이야기인지 나중에 올릴 테니 보세요.

 

어쨌든 간에 멸망 받을 이스라엘, 이걸 나눠서 남 유다, 북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우리 생각엔 유다만 하나님께서 키울 것 같으면 이스라엘 역사는 왜 필요하고 이왕 나가떨어질 나라를 왜 자꾸 기록했느냐고 하는데, 그게 바로 이쪽이 계속 있어줘야 유다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 유다는 구원받고 이스라엘은 멸망 받습니까? 맞아요. 멸망 받는 이스라엘 속에 유다가 들어있어요.

 

이쪽 유다는? 없는 유다지요.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교체해서 새롭게 등장하는 유다, 그것을 예수님은 열두 제자로 시작해서 새로운 열두 지파를 이룹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언약이 열두 지파거든요. 열두 지파의 왕이 바로 예수님이거든요. 인간의 사회에서는 백성이 있고 백성이 왕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야 왕과 백성이 성립이 돼요. 사무엘하 8장에서 그렇게 역사하는데 마지막 때가 되면 백성 하나도 없어요. 왕이 먼저 있고 왕이 백성을 생산해 나가는 방식을 씁니다.

 

왕이 백성을 생산하느냐 하면, 에스겔 37장 말씀대로 뼈들이 소복이 모여 있는 골짜기로 가요. 그게 왕의 입장에서는 좋아요. 왜? 살려주세요, 저 여기 있어요, 저 뽑지 않으면 섭섭해 할 겁니다, 라고 할 게 없어요. 조용해. 전부 다 뼈니까. 그 뼈가 어떤 건 촉촉한 뼈, 말랑말랑한 뼈, 그런 것 소용없어요. 전부 다 바짝 마른 뼈.

 

인자되신, 에스겔에선 장차오실 예수님을 인자라 해요. 그 인자는 하늘에서 내려오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이 완료된 입장에 있어요. 그래서 에스겔은 항상 선지자로서 미래의 관점에서 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물어요. 인자야, 이 뼈들이 살겠느냐? 그걸 왜 묻느냐 하면, 절대 불가능해요. 구원이라는 것이. 왜 그러냐 하면, 지식이 모자라서, 성경책이 안 두꺼워서가 아니라 이 땅에 이걸 할 수 있는 담당자가 없어서 그래요. 이걸 매개자, 중보자라 하는데 이 땅에 없어요.

 

이미 모든 인간은 악마의 손에 있기 때문에 담당자가 없기 때문에 물어요. 살겠느냐? 그때 에스겔이 담당자를 여호와 하나님께 돌립니다. 자기가 선지자면서도. 그러니까 선지자 기능은 내가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주께서만 할 수 있다고 증거하는 자가 선지자에요. 자기는 전혀 할 게 없음을 고백하는 게 선지자가 이 시대에 선지자가 여러분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아무것도 한 게 없이 구원이 돼버렸으니까 그냥 돈이나 벌자가 아니라 선지자 노릇을 하는 거예요.

 

선지자 노릇하는데 택시 모는 선지자, 농사짓는 선지자, 교사하는 선지자, 백수인 선지자, 잘 나가도 퇴직한 선지자, 선지자 종류와 관계없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주께서 하셨다는 고백을 내놓지요. 그런 고백을 내놓는데 사전에 구약의 언약대로 하게 되면, 우리는 못합니다, 라고 같이 쟁반에 바쳐서 이야기해요. 우리는 뭘 해도 주께 영광이 안 됩니다. 우리는 못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 바울의 권면과 명령들이 바로 우리는 여기에 합당한 의미에 충족시키지 못한 죄인이라고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주는 거예요. 이건 사도 바울 본인도 못 지켜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그 본인도 못 지켜요. 이야기한다고 지키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점점 더 신약의 마지막 때 의미를 담아서 이러니까 우리가 우리 힘으로 구원되는 게 아니고 십자가 피로 구원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권면을 주신 거예요.

 

그래서 931년에 나라가 둘로 쪼개집니다. 여러분은 이 중간에 있는 선지자들을 주목해야 돼요. 북쪽 이스라엘은 처음에 여로보암, 나답, 바아사, 엘라, 시므리, 오므리(디브니), 아합, 아하시아, 요람 해서 840년까지 이렇게 돼요. 이쪽에 유다는 르호보암, 아비얌, 아사, 여호사밧, 여호람, 아하시아 여기까지 같이 갑니다. 유다 쪽에 왕이 적더라도 북쪽 이스라엘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서 수명이 얼마 되지 않아서 이렇게 맞추는 겁니다.

 

그런데 왕이 이렇게 있더라도 선지자들을 주목해야 돼요. 오므리에서는 에훗이란 선지자, 처음에 여로보암에서는 이름 모를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그 다음에 아히야, 잇도. 이쪽에서는 르호보암에서는 스가랴, 스마아, 아사랴, 하나니. 여호사밧과 여호람에서는 아하시엘. 이름 못 들어본 선지자들이 등장합니다.

 

여러분이 지루할까봐 다 못 적었는데 지루하더라도 적어볼까요? 요람 다음에 예후가 나오고 에후 다음에 여호아하스, 요하스, 여로보암 2세, 이게 750년까지고. 유다에선 아하시아 다음에 요시아 있고 아마샤가 있는데 아주 오랫동안 통치해서 왕 둘만 해도 얼추 이것과 비슷해요. 여로보암 2세 다음에 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마지막에 호세아. 722년에 망합니다. 유다 쪽은 한참 멀었어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아몬,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이렇게 끝나는 거예요.

 

그러면 선지자들은 어디 배치돼 있느냐 하면, 아합에서는 유명한 선지자 미가야가 있어요. 왕들이 있는데 국가에 왕들이 있다는 말은, 현재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현실 전부가 이겁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생존/생계의 세계, 눈에 보이는 국가의 마주침, 이게 전부에요. 전쟁도 마찬가지인데. 없는데 여기에 선지자가 등장하게 되면 틈이 갈라지면서 선지자가 갖고 있는 언약적 의미로 양쪽을 당겨버립니다.

 

신발 끈을 조일 때 양쪽을 잡아당기면 바짝 조이죠. 이렇게 예를 들 수 있고, 볼링장에서 마루와 마루 사이에 홈이 있지요. 잘못 던지면 홈으로 떨어지잖아요. 국가와 국가 사이에 홈이 있으면서 홈 속에서 주께서 비로소 역사를 떠 바치고 언약적 원동력이 에너지가 선지자와 함께 있는 겁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뭐가 있느냐 하면, 이번에 강의 총제목이 [은밀한 나라]지요. 여러분이 구약을 보면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이렇게 나오는데 실제로 성경을 보면서 화가 나는 게 있을 거예요. 아는 사람만 화가 나지만. 선지자의 순서가 역사적 순서가 아니에요.

 

요나는 어디 있느냐 하면, 여로보암 2세에 있어요. 위쪽은 엘리야 담당이고 밑에는 요람부터 해서 엘리사 담당입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 선지자를 기록하지만 밑에서 바짝 조인다고 생각해보세요. 여기 있는 모든 인간의 눈에 보이는 역사는 선지자 쪽으로 와르르 무너지는 겁니다. 그리고 선지자의 홈에 마지막 도착 지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거든요.

 

예수 그리스도로 오면서 세상의 모든 국가들은 주님 앞에 없는 나라, 무너질 나라고 그리고 우상의 마지막 발에서 태산이 이뤄지는 영원한 나라가 세상 나라를 무너뜨리면서 새로운 나라가 나오는데 그것이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 그래서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보라 어린양이 왔다고 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눈에 보이는 유대나라든 세상나라든 끝났어. 죽었어. 너희는 다 지옥 가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