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일치된 마음(겔11;19-21)이근호130306

아빠와 함께 2013. 3. 7. 20:25

일치된 마음(겔 11: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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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3-06 21:22 
일치된 마음

2013년 3월 6일                          본문 말씀: 에스겔 11:19-21

(겔 11: 19, 개역) 『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겔 11:20, 개역)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겔 11:21, 개역) 『그러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좇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일치된 마음’이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에서 기대하는 바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남들이 다 자기와 같기를 원합니다. 자기와 같은 마음을 지닌 그 집단 속에서 푹 잠겨서 마음 펀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원하는 ‘일치된 마음’과 하나님이 만들어 내시는 ‘일치된 마음’은 같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엄청난 오해를 했습니다. 긴 역사 속에서 그들은 일치되고 단결된 마음을 나름대로 형성했다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바벨론 제국 앞에서 그들은 그들은 쓰레기 취급받게 되었습니다. 출애굽 이전의 노예 생활로 되돌아가 버렸습니다. 뭐가 문제가 되었을까요?

그들의 일치된 마음은 그저 그들이 평소에 원했던 그 ‘일치된 마음’일 뿐이었습니다. 무엇을 위한 일치된 마음인지 누구를 위한 일치된 마음인지가 전혀 자리 잡지 못했습니다. 에스겔 3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해골이 가득한 골짜기로 데려갑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을 주어서 생기가 들게 만들고 결국 ‘하나님의 군대’가 되게 하셨습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군대’였습니다. 그러나 이 군대는 이스라엘을 위한 군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원수를 겨냥한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집어넣을 수 없는 그 속성 자체가 무기가 되어서 벌어지는 전쟁에서의 군대입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감히 해내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스라엘은 군대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 해골들 사이에는 결코 누가 더 잘났다든지 누가 더 못났다든지 하는 차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같은 바짝 마른 해골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비-차별성하나님의 원수를 부수는 강력한 무기로서 작용하게 됩니다. 이들 하나님의 군대는 같은 동기생이기도 합니다.

서로들 끼리 조직을 구성하는데 있어 일치성이 아니라 군인으로서 군대가 해야 될 임무와 사명이 동일한데서 일치성입니다. 그냥 안락하게 놀고 즐기기 위한 구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비해서 오늘 본문의 유대나라는 참담한 형편에 있습니다. 바벨론 공격 앞에서 전혀 맥을 못추고 있습니다. 이는 유대나라 나름대로의 일치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일치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동기생 의식 속에서 근원적인 문제가 놓여져 있습니다. 그 문제가 뭘까요?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의 나라’ ‘우리의 것’을 챙기는 그런 일치성을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 아니라 ‘내 율례와 규례’를 지키는데 있어 일치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 율례와 규례의 일치성에 있어 왜 ‘하나님의 신’이 개입되어야 하는 겁니까? 그냥 인간의 강한 결심과 경건심과 의지에 맡기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은 원래 같은 고향 출신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 있을 때에 다들 힘든 노예생활을 하였고 이방민족으로 취급받았습니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우월적 직위를 주장할 수가 없는 점에도 동기생들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애굽에 마지막 재앙을 내리던 날 밤, 이스라엘만큼은 동일한 약속에 준해서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서 가문을 잇을 수 있는 형편에서 탈출이 성사되었습니다.

홍해바다 가운데 난 그 길을 다함께 건너왔으며 광야에서는 같은 생수와 만나라고 하는 같은 양식을 먹고서는 그들은 지내왔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일치된 마음이 아니되래야 될 수 없는 형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민수기 16장에 보면, 이스라엘 내부에 틈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모세와 같은 지파에 속한 고라 자손들이, 자신들이 맡은 레위지파의 일보다 모세 가족이 갖고 있다고 여긴 그 일이 더 좋아보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우리들은 같은 처지에 출애굽 했기에 우리들 중에서 월등하게 지도자급을 연속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특정가족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들의 주장이 참으로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백성들이 고라의 주장에 동조했습니다. 하지만 고라자손이 잊은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율례와 법도는 사람들을 동등한 존재자로 본다는 취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그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군소리 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점입니다.

신약에 들어와서 율법과 법도는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입을 막고 저주 아래 두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인간이 바짝 마른 해골로 취급당해도 반발할 수 없다는 겁니다. 고라 자손들은, 자신들이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은 겁니다. 일단 출애굽 했으니 애굽에서 익혀왔던 이성적 본성을 본격적으로 마음껏 발휘해도 괜찮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죽음 바탕 위에서 율법와 법도를 해석할 줄 몰랐습니다. 신약 때의 율법이란, 의인은 오직 예수님 뿐이며 모든 인간은 죄인일 뿐임을 분명히 하게 하십니다. 바로 이러한 죄인됨에서 오는 동기의식이야말로 하나님의 군대로서 하나님의 원수와 싸우는 무기가 됩니다.

바벨론 이전의 나라들을 이스라엘이 이기고 왔을 때는 바로 자신들이 죄인이며 오로지 자신과 함께 계신분만이 의롭다는 사실을 알았을 경우였습니다. 그러나 승리 뒤에는 곧장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에 속한 나라’라고 인식하게 됩니다. 즉 ‘승리한 나라’를 자기 소유로 전환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바벨론을 데리다가 자기 백성 유대나라를 쳐부수게 하셨습니다. 철저하게 깨어지게 하셨습니다. 진정 누가 하나님의 원수적인 발상으로 살아가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신약에 와서, 모든 성도들이나 사도들도 마땅히 교회를 사유화 할 가능성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관여할까요?

요한복음 15:18-19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복음으로 인해서만 세상으로부터 미움받게 하십니다. 이 적극적 미움이 해골에서 나온 살아있는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그들과 함께 계신 분은 ‘죽은 하나님’이시며 그들의 마음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이 성령으로 인하여 사도들은 적들에 대해서 내부적으로 일치된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단순히 살지 말고 복음적이 이유가 지시가 넘쳐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3-07 21:10 
30강-에스겔11장 19-21(일치된 마음)130306-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1장 19절에서 21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63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1:19-21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러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좇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에스겔 37장에 나오는 내용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해골이 가득한 골짜기로 데려갑니다. 분명히 시작은 해골인데 나중에 사람이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다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살릴 때 분명 목적이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군대되게 하는 것입니다. 군대라고 했으니 군대는 그냥 놀고 즐기고 관광이나 하면서 잠이나 자는 집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군대가 군인다운 경우, 군대가 진가를 드러내는 경우란 전쟁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살려내되 그냥 살려내는 것이 아니고 분명히 방향성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 방향성은 싸우라, 싸우는데 그 싸움의 대상이 누구인가, 바짝 마른 뼈들이 자기 원수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알 리가 없지요. 그런데 뼈들로 하여금 뼈 되게 만들었던 그들이 곧 너희들의 원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 하나님께서 뼈들에게 말씀을 통해서 힘줄을 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새롭게 살게 하시는데 그들이 살아남으로써 온 몸으로 직감하고 느끼는 것이 뭐냐 하면, ‘아하, 우리가 싸워야 될 적이 있구나.’라는 점입니다.



그 적은 하나님에게도 적이고 하나님에게 속한 우리 성도에게도 적이고 공통된 적입니다. 그 적과 싸워야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더 나아가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간단히 말해서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골이 되고 흙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제대로 싸워야 될 적들을 맞닥뜨리지 않고 또 싸워야 될 적들에게 싸워서 승리하지 못했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서 이스라엘 나라가 바벨론에 잡히고 마는 겁니다. 자 바벨론이 하나님의 적이고 이스라엘의 적이라면 분명히 이스라엘은 적에게 졌습니다.
 


적에게 져서 포로 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해골로 간주하시고 그 이스라엘에게 이긴 바벨론을 하나님이 친히 용사가 되셔서 이기게 되면 이스라엘사람들의 자각 속에는 그냥 이 땅에서 밥 먹고 편안히 살기 위해서만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뭔가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힘으로는 졌는데 하나님이 개입하니 너희들이 다시 하나님의 군대로 돌변해서 결국은 하나님의 용사로서 승리를 거두는 집단이 된다.’라는 그 과정 속에 성도라는 것이 비춰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요즘 식으로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평소에 우리가 뭘 그렇게 지키려고 합니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밥 먹고 일하고 하는 그 모든 것이 뭘 지키려고 하는 일이 분명한데 무엇을 그렇게도 애달아하면서 지키려고 하는 겁니까?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힘, 이것을 무기라고 한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그 무기, 나를 지키는 그 무기가 무엇을 겨냥해서 무엇을 대상으로 싸우려고 우리는 이것을 무기라고 여기고 싸우려고 드는 겁니까?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할 수밖에 없는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새롭게 이해해야 됩니다. 본문 19절에 보면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둔다고 했는데 제가 이 본문 이전에 먼저 에스겔 37장을 이야기한 것은 뼈로 가득해서 해골이었던 자들이 나중에 성신이 임해서 군대가 되었다면 그들은 일종의 같은 훈련소 출신입니다. 그들은 고향이 똑같아요. 그리고 그들이 살게 되기 전의 처음 시작한 그것이 같아요. 다 해골이었습니다.
 


이것을 출애굽으로 한다면 그들이 처음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향이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경과해 온 그 과정도 동일해요. 전부 다 애굽에서 살았고 애굽에서 노예생활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너 잘났다, 나 잘났다, 할 수가 없는 거지요. 그리고 그들이 애굽에 있으면서 그 애굽나라의 모든 아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민족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무사히 가정을 이루고 나왔다는 점에서 그들은 동기생 들입니다. 네가 잘했니, 내가 잘했니, 일체 모든 것을 주님 앞에서는 거론할 수가 없어요.
 


주님 제가 저 사람보다 더 제가 잘났지요, 라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제가 지금 계속해서 일치된 마음이 뭔가를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무엇을 위한 일치된 마음인가, 그것을 설명하는 거예요. 그들이 홍해바다도 건너왔습니다. 홍해바다 건너와서 바닷물에 빠져죽어야 될 사람들인데 모세가 바닷물을 지팡이로 열어서 건너왔다는 점에서 또다시 그들은 완벽한 동기생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광야생활을 하면서 똑같은 물을 마셨고 똑같은 양식을 먹었습니다. 그들이 먹은 양식은 요새말로 하면 기숙사식당이나 매한가지죠.
 


메뉴가 같아요. 그리고 물도 같아요. 바위가 깨어져서 나온 물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그 바위를 가지고 예수그리스도라고 하지요. 어쨌든 바위가 깨어져서 그 바위가 품고 있던 물을 40만 대군이 동일하게 마셨습니다. 양식도 똑같이 하늘에서 내린 만나라는 이름의 양식을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끄시고 인도하시는 취지가 무엇인가? 이스라엘이라는 그 집단속에서 독특하게 이스라엘과 나를 따로 분리시켜서 내가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렇게 튄다는 것, 그런 것을 이스라엘나라 자체, 집단자체가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같은 물, 같은 고향, 같은 양식, 그렇게 나왔던 그 후손들이 오늘 본문에 적혀있는 에스겔 시대에 오면 그들이 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뭐가 문제였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그 일치된 마음, 같은 생각을 가지고 해야 되는데 그렇게 했던 이스라엘이 망했거든요. 뭐가 문제가 된 거지요? 본문 19절에 보면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19절의 이 말씀에서는 뭐가 문제냐 하면, 그들 가운데 굳은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굳었다는 것에 대해서 19절에 반대말이 무엇으로 나오느냐하면 부드러운 마음이죠. 부드러운 마음의 반대마음이 굳은 마음입니다. 굳은 마음 반대말이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이란 무엇이며 굳은 마음이란 뭐냐, 서로 반대말이니까 그 안에 서로 반대되는 기준만 제시하면 그만이겠지요. 그것이 20절에 나옵니다.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굳은 마음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나는 못 지키겠다, 이것이 굳은 마음이고 부드러운 마음이라는 것은 내 율례와 규례가 그 사람 속에까지 들어와서, 그러니까 규례와 율례가 속까지 들어와서 완전히 우리들의 굳은 마음을 깨버리고 녹여서 부들부들한 마음, 밀가루를 만지면 부드럽듯이 그렇게 부드러운 마음, 덩어리지지 않는, 쉽게 말해서 ‘나’가 없는, 이것은 내 것이니 내가 지키겠다는 그 나의 것, 나의 영광을 위해서 이것만큼은 지켜보겠다는 그런 것들이 없는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이에요.
 


이것을 질문으로 고쳐서 해보겠습니다. 우리들이 정작 목숨 걸고 지키고 싶은 것이 뭘까요? 내가 명예와 위신과 생명을 다 바쳐서 ‘하나님, 정작 내가 이것만큼은 빼앗기지 않게 하옵소서.’라는 그것이 뭐냐는 것이지요. 그것이 만약에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라면 그것은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 안에는 하나님의 원수가 담겨 있겠지요. 하나님의 원수가 어떤 내용인지를 지적하는 내용이 그 안에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여, 이것은 그 동안 내가 내 것이라고 만천하에 공포했던 나의 것입니다. 따라서 제발 이것만큼은 나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다치지 않게 해 달라.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것입니다. 나의 수고와 애씀과 노력이 다 포함된 것입니다.’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강퍅한 마음이고 굳은 마음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제가 아까 처음 이야기한 하나님의 원수와 연관시켜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해골 된 자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서 핏줄과 힘줄이 생기도록 해서 산사람을 만들었고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군대라 하는 것은 일치된 마음이 되어 있습니다. 일치된 마음이라 하는 것은 그들이 원래 고향이 하나고 그 모든 과정에 동일하게 하나님이 들어갔기에 그 과정에서는 내 것, 네 것이 생겨날 수가 없지요. 그런데 자기 인생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개입했으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 되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은……, 제가 지금 벌써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다시 강조합니다만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은 ‘그렇습니다. 우리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소리 하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서 하나님의 적을 향하여 싸움하기 위해서 우리를 해골에서 군대로 만든 겁니다. 우리 적이 아니고, 내가 싸우고 싶은 나의 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원수와 싸우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보냈다는 것은, 바벨론을 우리가 이겨낼 수 있느냐, 이겨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분명히 그들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다. 이스라엘은 하나다.’라고 해서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잘 되었다 생각했는데 막상 하나님께서 의도해서 바벨론을 보내주니 그들은 바벨론을 이겨낼 수 없었음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가 생각하기는 ‘우리는 다 하나님을 같이 믿고 같이 사랑하고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킨다.’고 자부했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자부했는데 막상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서 이겨낼 수가 없을 때 과연 이것이 제대로 하나님의 군대로 가동되었느냐에 대해서 그들은 지금 실패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군대라고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자기 자신들은 일치된 마음을 가지고 율례를 나름대로 지키면서 누가 뭐래도 우리는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자부를 했지만 바벨론 앞에서 처참하게 망가지고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문제만 던지면 안 되고 이제 문제점을 알았으면 해결점도 성경을 통해서 알아봐야 되는 겁니다. 먼저 문제점부터 언급하겠습니다. 민수기 16장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세의 인도와 지도를 받는 가운데서 고라자손이 등장해요. 16장 1절에 보면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라고 되어 있어요.
 


낌새가 이상하지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중보자로 세워서 이스라엘 되게 하셨는데 그 가운데서 고라를 대표자로 해서 새로운 당이 등장하는 겁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이 고라가 모세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 ‘우리가 출애굽 할 때는 하나같이 동일한 은혜를 받아서 나왔는데 어떻게 우리가 같은 레위지파로서 어떻게 모세 가족만 대대로 나라의 지도자급으로 행세하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 하는 것이 고라자손들의 주장하는 바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라자손들은 하나님의 제사 일을 하면서 모세의 자리가 탐난 거예요. 그래서 고라자손은 당을 지어서 모세에게 대듭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무엇이 문제인가가 여러분의 머리에 잘 안 들어오지요? 고라자손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다. 출애굽도 같이 하고 광야에서 같이 고생했다. 그러니까 지도자급도 돌아가면서 하자.’ 요즘 사람들이 들으면 굉장히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지도자를 어느 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돌아가면서 하는 것이 사람 보기에도 그렇고 하나님 보기에도 그야말로 일치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멋들어진 정치적인 방안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요.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이라는 하나님의 원수에 철저하게 망가지고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혀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이유가 드러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속까지 파고 들어가기를 원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 나라에 망한 것은 율례와 법도가 마음속까지 들어오지를 않았어요.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 담겨 있는 본래 취지와 의미하고 전혀 다른 취지와 의미가 인간의 마음속에 굳은 마음을 형성케 했습니다. 구약부터 이렇게 진행하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먼저 결론부터 언급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는가,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오직 의인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속이 확 풀리지요. 그것은 신약의 이야기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뭐냐, ‘율례와 법도는 우리가 능히 지킬 수 있고 이것을 지키게 되면 우리는 일치된 마음이 되어서 어떤 나라가 와도지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방금 이야기한 것 속에 뭐가 빠졌지요? 신약 이야기를 다시 해 볼까요?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서는 ‘율법아래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는 내용과 오직 의인은 예수님밖에 없고 그 의인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고 영생 얻는다.’는 내용이 신약이거든요. 그런데 구약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말씀을 주셨으니 우리가 말씀을 지키면 말씀이 이제 우리 속에 섞인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 여러분이 다 아시지요? 우리는 신약이기에 신약의 그 편을 들고 싶겠지요. 구약 사람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우리도 알지요. 그러나 알면 뭐합니까? 그것을 안다 할지라도 우리 속에 진짜 율례와 법도가 들어왔느냐 그 말입니다.



신약의 결론을 또 다시 말씀드립니다. 율례와 법도는 우리를 죄인 되게 하고 의인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내용을 품고 율례와 법도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율례와 법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것을 지키겠다.’가 아니라 ‘우리는 그 앞에서 죄인이다. 어떠한 벌을 받아도 우리는 항상 받을만하고 우리가 어떠한 적을 만나도 패배하고 절망해야 되고 우리는 초죽음을 당해서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만이 율례와 법도가 우리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민수기 16장에서 고라자손이 당을 지어서 모세에게 대든 것은 뭐냐, ‘모세나 우리나 다 같이 하나님 앞에서 죽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살려냈다는 것은 모르고 이미 우리는 홍해를 건너왔기 때문에 옛날에는 죽을 뻔 했지만 이제는 우리가 산사람들이니까 산사람들끼리는 막 먹고 돌아가면서 지도자 하자.’라는 주장이 고라당의 주장이에요. 슬슬 이해가 되십니까? 고라가 모세한테 대든 것은 ‘옛날에는 다 우리가 죽을 뻔한 것이 맞지만 이제는 다 우리가 살았으니 산 사람입장에서는 동등하지 않나? 그러니 지도자급은 돌아가면서 하자.’라는 것이 고라의 생각이고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동의했습니다.
 


우리가 들어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지금 네 번째 이야기하지요. 신약은 뭐냐 하면, 어떤 인간도 말씀 앞에서는 저주받을 사람이고 오직 의인은 메시아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이 신약의 율례와 법도 안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알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신으로 일치된 마음’에서 성신이 뭐냐를 알아야 되는데 성신이 뭐냐 하면 죽은 하나님의 영이에요. 성신, 성령은 죽은 메시아의 영입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이 땅에 사시다가 가신 분의 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사시다가 죽으신 분의 영이에요.
 


죽으신 분의 영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사실은 살 가치도 없고 죽은 채로 살아간다는 것을 우리가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성신, 요새 말로 성령이라는 것은 우리보고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어떤 분, 어떤 분의 마음입니다. 그분의 마음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그 분이 우리 속에 들어온 것이 돼요. 그분은 모든 율례와 법도를 다 지킨 분입니다. 그 지킨 분이 내가 다 지켰다는 마음으로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성령 안에서 ‘주여, 우리는 뭘 해도 죄인입니다.’라는 고백만 나올 뿐이에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글쎄! 주님, 우리가 그것을 알고 믿습니다. 왜 자꾸 안 믿는다는 인상을 그리십니까?’하는데 ‘알죠. 십자가 아는데 그것 모를까요? 다 압니다.’라고 큰 소리로 반박할 거예요. 하지만 신약시대의 고린도교회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서 1장에서 고린도교회에 대해서 뭐라고 나오는가?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고전 1:12-14)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파가 왜 등장합니까? 고린도교회도 ‘우리도 예수 믿는다.’ 하면서 왜 교회에 파가 등장하지요? 뭔가 이상하지요? 이것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로 분명히 우리는 이스라엘이고 하나님의 군대라고 자부하면서 막상 바벨론과 하나님의 원수와 붙여놓으니 여지없이 박살나고 패배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지요? 제가 이야기할게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만들었는데 우리 것 되라고 만들어줬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이제는 우리 것이라고 생각해서 거기에 자기 존재의 의미를 갖다 붙인 겁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머리는 그리스도요 우리는 지체입니다.’ 아무리 고백을 해도 항상 우리 맘속에 ‘그러니까 이 교회는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항상 품게 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품는 것은 좋은데 그런 식으로 품어버리면 정작 우리가 싸워야 할 마귀에서 늘 지게 되고 여지없이 패배당하고 하나님의 원수한테 밀리게 된다는 것이 문제에요. 옛날 구약 성도들이 실패한 것처럼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사도들도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인데 그들도 역시 실패할 것이 아닌가?
 


역시 그들도 실패했지요. 실패했다면 그들을 하나님께서 인도할 것인데 그 인도하시는 방법이 뭐냐, 그게 바로 오늘 본문 가지고 전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분명히 이스라엘이 실패했고 오늘날 우리들도 실패합니다. 예수님이 직접 개입해야 돼요. 개입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는가? 요한복음 15장 18절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여기서 예수님이 미움에 대해서 거론합니다. 제가 예수님 말씀과 바꾸어서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 엉뚱한 말을 해볼게요.
 


“여러분이 교회를 사랑하시지요?” “예, 우리 다 같이 사랑합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시지요?” “예, 우리 다 같이 사랑합니다.” 미움이라는 말을 안 하고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해서 일치된 마음을 가질 때 그런 일치된 마음은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너무나 인간적인, 죄악 된 인간들의 일치된 마음의 단합대회에요. 사람이라는 것은 영화를 봐도 혼자 보면 재미가 없고 밥을 먹어도 혼자 보면 재미가 없고 TV를 봐도 혼자 보면 재미가 없고 등산을 가도 혼자 하면 재미가 없습니다.
 


사람이 일치된 마음을 갖고 싶은 이것은 타고난 겁니다. 교회도 혼자 오면 재미없고 예배도 재미가 없겠지요. 그런데 예수님 방식은 뭐냐, 사랑하고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마음을 사용합니다. 주께서 사용하는 것은 뭐냐, ‘너희들 훌륭하지? 너희들이 애써봐라. 서로 사랑해라.’ 이것이 아니라 우리 말고 적이 와서 우리에게 미움을 주도록 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요한복음 15장 18절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이것이 오늘 설교의 요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냥 놔두면 우리는 옛날 이스라엘 짝 나요. ‘하나님, 사랑합니다.’ 해 놓고 맨 날 져요. 하나님께서 우리원수를 가지고 우리를 미워하도록 만들어요. 다 같이 미움을 받는데 예수님 복음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그것은 일치된 마음입니다. 주님에 의해서 이미 하나님의 군대로 조성된, 싫다든지 좋다든지 할 수 없을 정도로 일치된 마음을 가진 하나님의 이스라엘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9절, 계속 읽어볼게요.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이 미움이라는 단어를 주님께서는 사용하시고 그것을 실천에 옮깁니다. 미움 받으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왜냐, 서로 사랑을 남발하면 그것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교회단결, 집회단결, 그것밖에 안돼요. 그러나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 의사가 아니라 주께서 친히 우리 인생 속에 개입했다는 증거입니다. 복음을 인하여 미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왜냐, 윤리와 법도를 다 지킨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의 적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그 경로로 이 세상을 살았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받았던 그 미움 받음에 우리가 참여될 때 우리가 주의 형제들과 일치된 마음을 갖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복음 때문에 미움을 한껏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기대했기에 미워하는가? 그것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십자가로서 반대하니까 그들은 미워하게 된 거예요. 인간적인 방법, 인간의 열심히 하나 될 수 있다, 단결할 수 있다는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말합니다. ‘그런 식으로라면 옛날 이스라엘이 성공해도 벌써 성공했다. 하지만 그들이 실패한 것으로 봐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도 죄밖에 나올 것이 없는 죄인이다.’
 


주님께서 우리가 지옥 갈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복음을 싫어하는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때 그것은 우리 노력이 아니라 주께서 의도적으로 조성해주고 하나 되게 하는 하나님의 군대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적인 방법으로 얼마든지 단결할 수 있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정치적 방안으로 협력하고 위로하면서 사랑해주면서 주고받으면서 살 수 있지만 그런 식으로도 실패했습니다. 주의 방식은 미움이오니 우리가 미움 받을 때 도리어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