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칼
2013년 2월 20일 본문 말씀: 에스겔 11:5-10
(겔 11:5, 개역)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렇게 말하였도다 너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아노라』
(겔 11:6, 개역) 『너희가 이 성읍에서 많이 살륙하여 그 시체로 거리에 채웠도다』
(겔 11:7, 개역)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성읍 중에서 너희가 살륙한 시체는 그 고기요 이 성읍은 그 가마려니와 너희는 그 가운데서 끌려 나오리라』
(겔 11:8, 개역)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칼을 두려워하니 내가 칼로 너희에게 임하게 하고』
(겔 11:9, 개역) 『너희를 그 성읍 가운데서 끌어내어 타국인의 손에 붙여 너희에게 벌을 내리리니』
(겔 11:10, 개역) 『너희가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변경에서 너희를 국문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신앙의 외부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자꾸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바르게 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까?”라고 묻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잘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131편에 보면,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이는 압니다. 그저 만족스럽게 엄마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더 이상의 질문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모든 것을 친히 아시기에 그 알아보심 앞에서 우리 성도가 새삼 자기 폼을 낼 필요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갓난 아이처럼, 하나님께서 길러주시는 대로 자신이 존재하고 움직이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유대나라는 뭔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없어야 함에도 두려워합니다.
신앙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되게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 나라 귀족이 칼을 무서워하는 것을 잘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래놓고서는 그들이 그 무서워하는 칼을 그들에게 일부러 보내겠다고 하십니다. 유대 나라 귀족들은, 예루살렘의 막강한 방비막을 가마솥으로 여기고 자신들은 그 속에 안전하게 거하는 고기라고 자부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진정 하나님 품 안에서 만족하고 두려움없는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자신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을 자신에게서 놔 버리는 겁니다. 에스겔 당시의 유대나라 사람들은 막강한 주변 강대국인 바벨론의 군사력에 공포를 집어먹고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그 바벨론의 침공을 하나님께서 막아주셨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공포에 떨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자기 방어책에 불과합니다. 그 안에서 철저하게 갇혀있는 꼴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두려움에서 빼내는 것이 구원이기에 차라리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정면으로 제공해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칼’입니다.
신약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10:34-36에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약 때의 원수와는 달리 신약 때, 인간에게 가장 큰 공포심을 주는 대상은 바로 각자 인간들이 가장 사랑하고 떨어져 살 수 없다고 자부하는 집안 식구들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로 등장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0:20에 보면,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주체는 구약과는 달리 신약에 오면 더욱 근접한 요인까지 하나님께서는 깊숙이 지적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일체 인간이 자체적으로 구원받을 만한 요건을 갖추는 식으로 구원하겠다는 것을 용납해주지 않으시겠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8:21에서 베드로는 나름대로 자기 식의 구원을 시도합니다.
즉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역량을 보이고자 하여, “몇 번까지 용서해주면 됩니까?”라고 묻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어떤 임금이 자기 신하의 막대한 빚을 탕감을 해준 이야기를 끄집어 내십니다.
그리고 그 탕감 받은 신하가 막상 자기 집에 가서는 몇 푼되지도 않는 돈을 갚지 않는다고 심하게 구박을 해대는 사항도 같이 언급하십니다. 그리고 분명히 임금이 용서한 그 신하를 용서를 취소하고 대단히 분노를 퍼뜨리면서 그 신하를 처벌하지 경우를 예를 드십니다. 이는 모든 인간들이 ‘용서를 가짐으로서’ 구원을 따내려는 식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일체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을 ‘용서받은 자’로 구원받겠다는 시도를 예수님은 거부하시고, ‘용서를 보여주는 자’로서 베드로를 구원하시려는 겁니다. 즉 베드로는 용서를 가지는 대상이 아니라 ‘용서’가 베드로를 필요로 하는 겁니다. 용서가 성사되는 작업에 베드로가 집어들어갈 때,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방법입니다.
창세기 3:21에서 이미 인간은 생명나무로 통하는 길이 차단된 형편에 있습니다. 따라서 새삼스럽게 그 길을 개방해서 인간들로 하여금 그 생명나무를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칼을 언급하시는 이유는, 아예 인간을 죽이겠다는 겁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인간들은 죽음이 찾아들지 않는 방식으로 죽음에서 벗어보자 하지만 하나님의 방식은 그것이 아니라 죽음 속에 들어와서 죽음 밖으로 나가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이 생명은 더 이상 성도 개인이 소지할 생명은 아닌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의 말씀이 이런 경우를 말해주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즉 ‘예수 안’, ‘십자가 안’이라는 사도의 편지 속에 나오는 용어들은 그 안에서 성도는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로서 더 이상 자기 구원권리가 박탈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비난 이것은 용서 뿐만 아니라 믿음, 소망, 사랑 모든 면에서 개인은 그것을 소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내시는 그 작업에 성도는 죽음으로 참여당하는 식으로 구원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 면전에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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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2-22 01:19 |
28강-에스겔11장 5-10(하나님의 칼)13022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1장 5절에서 10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63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1:5-10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렇게 말하였도다 너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아노라 너희가 이 성읍에서 많이 살륙하여 그 시체로 거리에 채웠도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성읍 중에서 너희가 살륙한 시체는 그 고기요 이 성읍은 그 가마려니와 너희는 그 가운데서 끌려 나오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칼을 두려워하니 내가 칼로 너희에게 임하게 하고 너희를 그 성읍 가운데서 끌어내어 타국인의 손에 붙여 너희에게 벌을 내리리니 너희가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변경에서 너희를 국문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여호와께서 현재 예루살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이미 알고 계셨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누군가 자기의 생각과 마음을 다 꿰뚫어서 미리 알고 있다면 인간에게 자율이나 자유 혹은 인간의 선택 같은 것은 하나의 허풍에 불과하고 소용없는 객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내 딴에는 비밀로 한다고 하는 모든 것이 이미 귀를 만드시고 눈을 만드신 분이 팔짱끼고 주시하고 관찰하고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주님의 눈과 귀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때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라고 자기한테 묻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 이야기를 왜 묻습니까? 새삼스럽게 결심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 보면 신앙생활이 제대로 되고 태만하면 신앙생활이 잘 안되고, 그런 겁니까? 내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느냐를 주님한테 묻는다든지 내가 스스로 나에게 묻는 것은 신앙의 차원이 아니고 자기가 한 번 잘나보겠다는 오기의 차원입니다. 우리를 주시하는 분이 있다면 그런 질문조차 다 쓸데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고 나는 그 지켜보는 분 앞에서 그냥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 이것이 얼마나 차분한 신앙생활입니까?
시편에 보면 성도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해 놓았어요. 방금 막 젖을 먹고 배부른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서 엄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것, 그렇게 시편이 이야기합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찌어다.”(시편 131:1-3)
실컷 아기가 젖을 빨아놓고는 엄마한테 하는 말이 “엄마, 나 어떻게 살면 돼?” 이것을 묻는다는 것은 엄마한테 꼴 밤을 맞으려고 약을 올리고 있는 거지요. 내가 널 지켜보고 있고 너도 날 쳐다보면 되지 그 앞에서 어떻게 내가 독자적으로 어떤 행동을 바르게 한다는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앙의 특징을 한 마디로 하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두려움이 없는 것, 모든 일에 있어서 전혀 두려움이 없는 것, 그리고 지금만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일도 두려움이 없고 앞으로 5년 뒤에 어떻게 될까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죽고 난 뒤에 지옥 가면 안 되는데, 라는 두려움도 없는 것.
그런데 만약에 두려움이 발생되었다고 한다면 오늘 본문에 뭐가 준비되어 있느냐하면 8절에 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칼을 두려워하니 내가 칼로 너희에게 임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유다나라가 칼을 두려워하고 있으니까 될 수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 칼날, 적들이 쳐들어오지 않게 해달라고 나름대로의 대책, 자기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는 방법을 강구할 때, 그리고 그들은 그 안에 들어가서 스스로 갇혀 있으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겠지.’라고 버티는 것, 그것은 인간이 아무리 버티고 버텨도 두려움 안에서 버텨봐야 두려움 안에 갇혀 있는 꼴이 되는 겁니다.
세상의 어디에, 북극이나 남극이나 밀림 어디에 박혀 있더라도 두려움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고 아무리 수백억짜리 저택에 산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 안에서 겁을 낸다면 그것은 마귀와 함께 있는 겁니다. 그 자체가 지옥생활입니다. 홍콩의 유명한 배우 유 덕화라는 사람이 갓난애한테 벌써부터 2백 억짜리 저택을 지어줬답니다. 좋은 집에 산다는 것이 스스로 나는 이 정도로 무섭다는 겁니다. 그 유덕화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나라 귀족들도 동일하게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3절에 보면 “그들의 말이 집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즉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 이 성읍이 든든한 가마솥이 되고 그 안은 든든하고 완전하게 방비가 되어 있는데 그 안의 고기로서 우리는 안전하게 되면 아무 탈도 없고 어떤 공격이 들어와도 이 가마솥이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식으로 예루살렘을 의지했던 겁니다. 그런데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말에 대해서 이미 안다고 선언을 하십니다. 7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성읍 중에서 너희가 살륙한 시체는 그 고기요 이 성읍은 그 가마려니와 너희는 그 가운데서 끌려 나오리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약간 난해한데요. 유다귀족들은 말하기를 절대로 이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지켜주기에 멸망될 일이 없다, 이렇게 장담을 하고 있습니다. 안전한 가마솥안의 고기처럼 안전하다고 한 거지요. 그렇게 자기 자신을 고기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다 지켜보시니까 아시고 하나님이 이 정도까지 아신다는 것을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마태복음 10장의 말씀 중에 제가 좋아하는 말씀 중에 하나가 이런 것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보고 하시는 말씀 중에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8-20) 라고 했어요.
권세자들에게 끌려갔을 때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너희 속에서 말하는 이가 너희가 아니요, 이 ‘너희가 아니요’라고 분명히 했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네가 말하는 것은 너희가 아니요, 이런 이야기는 정말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도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내가 말하는데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요, 라는 말을 곁들인다는 것은 미친 사람 아니면 안 되는 이야기에요. 네가 말하는데 네가 아니고 네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그렇게 말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쉬운 말로 하면 “제자야, 너는 빠져라. 네가 이기려고, 네가 한 번 혼내주겠다는 식으로, 네 자존심 세우려고 예수 이름으로 나서지 말라.” 하는 겁니다. 제자들이 자기식대로 이야기하면 분명히 자기 속의 두려움을 자기식대로 해소하려고 말들을 내어놓을 거예요.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고 지켜보려고 하는 식으로 주저리주저리 내놓을 것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하게 되면 누가 화를 내느냐하면, 적들이 화를 내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 속에 있는 성령님이 오히려 제자들보고 책망할 거예요. “네가 그 입을 다물라. 네 일도 아니면서 네가 스스로 너를 보호하겠다는 식의 변명을 늘어놓을 이유가 없다.” 그 말입니다. 지금 에스겔 당시에 유다의 적이라는 것은 뚜렷합니다. 그것은 유다를 공격하는 바벨론, 주변에 이방신을 믿는 그 이방나라사람들이겠지요.
유대사람들은 적들을 바벨론이고 주변 이방나라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 자신이 유다가 적이라고 여기는 분류항목에 턱 하니 하나님이 등장해 버리고 에스겔이 등장해버리는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 적은 로마가 아니고 그 당시 예수님 가장 가까이 포진해 있는 여호와 믿는, 그리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그 집단이 바로 예수님을 공격하는 집권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예수님을 경유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적이고 악마적이고 마귀적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잠깐 쉬세요, 하고 빼버릴 경우에는 우리사이가 얼마나 돈독한 사이, 서로 정 나누는 사이, 부모자식 사이라 할 찌라도 예수님 앞에서는 둘 다 예수님을 공격하는 한패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점을 먼저 말씀드리고 본문 계속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4절에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아까 에스겔에서 여호와가 칼을 준다고 했지요. 인간이 칼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에 두려워하는 것이 있었어요. 옛날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가족 간의 유대가 끊어질까 두려워했던 겁니다.
35절에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가장 친한 사이잖아요. 이것은 친한 것 이상의 혈육관계고 한 몸 관계지요. 그 다음에 “며느리가 시어미와” 이것은 깨져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관계고요,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는데 칼 들고 설치는 자가 두려운 것이 아니고……, 참 성경 말씀이 어려워요. 내가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하기에 그 사람은 나에게 항상 두려움을 줄 수 있는 요인이 되는 겁니다. 어린 자식이 취직해서 바깥에 나가면 부모는 그 자식이 잘 하고 있나 싶어 맨 날 전화를 하잖아요.
“너 어딘데? 회사냐?” “엄마, 좀 전화하지 마.” “걱정이 돼서 그러지. 취직한지 한 달도 안 되어서 그런다.” 내가 가장 사랑하기에 가장 걱정거리가 되고 가장 걱정거리가 되기에 나에게 두려움을 가장 크게 줄 수 있는 요소가 바로 예수님께서 원수라고 지칭했던 집안 식구입니다. 인간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하나님, 우리 애하고 나하고 믿음생활 잘해서 나나 저 애나 몽땅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바치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삽니까, 라는 질문, 내 자식과 나와 합해서 신앙생활 잘하면서 살까요, 라는 질문은 아무 의미가 없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괜히 주님 앞에 잘 보이려고 애를 써요. 잘 보이겠다고 애쓴다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 여전히 무섭고 두려운 요소가 그 안에 잠겨 있다는 거예요. 하나의 둥지, 무서움과 두려움과 공포라는 둥지에서 우리는 짹짹거리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무섭고 두려워하고 눈만 뜨는 걱정거리가 되는 그 둥지, 시커먼 둥지도 의도적으로 친히 하나님께 마련해 주신 둥지입니다. 우리는 굉장히 걱정스럽고 우리가 겁 안내는 상태를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다면 우리는 안정된 신앙상태에서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돌리겠는데, 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우리 쪽에서 본 하늘나라고요 정작 하늘나라는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당연히 겁내는 것을 깔아놓고도 우리보고 뭐라고 하느냐, “겁낼 필요 없다. 얘야!” 이렇게 나오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말이지요. 제가 여러 번 하지만 사도행전의 그 말씀은 계속해서 해도 기분 좋아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보자기에 담아 내리면서 먹으라고 한 거예요. 보자기가 내려오잖아요. 내려오는데 밑바닥은 보이고 그 안에 뭐가 담겼는지는 안 보이지요. 그러니까 베드로 입장에서는 당연하게 먹으라는 명령과 함께 뭐가 내려오니까 분명히 내가 좋아하는 것은 주님이 좋아할 것이고 주님이 좋아하는 것은 내가 좋아할 것이고,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은 주님이 먹을 수 있는 것이고 주님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역시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이라는 식으로 자기는 주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면서 먹으려고 한 거지요.
그런데 막상 보니 어쩌면 내가 못 먹는 것만 골라서 다 담아 놓았어요. 개고기, 순대, 곱창, 염소 탕, 억지로 먹을 수는 있어도 별로 안 좋아하는 오리고기, 별로 먹고 싶지 않은 청국장, 몸 생각해서 억지로 먹기는 해도 안 좋아하는 것들, 이런 것들이 가득해요. “목사님, 제가 음식점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가보니 보신탕집, “목사님, 이거 잡수시고 복음 많이 전해주세요.” 아, 어떤 분이 제가 개고기를 못 먹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할 때 거기서 제가 휴대폰으로 짜장면을 시킬까요, 어떻게 할까요?
그 순간 저는 얼마나 공포에 질리겠습니까? 그러나 주의 음성이 들리기를 “먹어라.” 그런 식이라는 말이지요.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고요, 개고기까지 주의 음성에 연관될 필요는 없습니다.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18장 21절에도 나오거든요. 제자들이 하는 이야기는 뭐든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지난주일 오후설교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베드로가 “예수님, 제가 몇 번 용서하면 됩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할 때에 예수님께서 “일흔 번의 일곱 번 용서해라.”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취지는 이렇습니다. 제가 설교 처음에 한 이야기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베드로는 내가 어떻게 남을 용서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고 어떻게 기뻐하겠는가를 생각하는 거예요. 베드로는 그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자부한 겁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생각을 오늘도 우리도 갖고 있어요. “하나님, 어떻게 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습니까?” 라는 질문, 의문 자체가 사실은, 제가 설교 시작부터 지금 수차례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것을 묻는 것은 주께서 원하지도 않아요.
베드로는 몇 번이나 용서합니까, 라고 물었다는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용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어떤 사람이 임금에게 빚을 탕감 받고 기분 좋아했는데 막상 자기 집에 가서는 자기가 받은 임금으로부터의 막대한 탕감을 무시하고 자기한테 돈 몇 푼 빌린 사람 붙잡고 돈 내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럴 때 임금님이 화를 냅니다. 그 신하를 분명히 탕감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식을 듣고는 그 신하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용서를 해줬다, 하는 행실 보니 용서 못하겠다, 용서 안 됨, 그런 과정을 예수님이 지금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되어버리면 사도바울의 편지에 나와 있는 것, 사도들의 모든 신학이나 모든 구원관에 있어서 대 혼란이 야기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용서하면 영원히 용서받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마태복음에서는 용서해 줘놓고 그 용서를 취소시키는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우리가 어떻게 자신만만하게 주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불안해서 못살겠다고 나오겠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취지를 몰라서 그래요. 하나님은 우리가 용서 받는 자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용서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용서를 챙기고 용서를 소유하는 사람으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는 용서의 장에 우리를 끌어서 거기에 집어넣어서 우리를 통해서 용서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작업에 우리가 초청받아서 구원받는 겁니다. 이것은 용서뿐만이 아니고 모든 개념들이 다 그래요. 믿음, 소망, 사랑, 율법, 하나님나라,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있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들어 사용했다는 그 현장에서 우리는 구원받는 겁니다.
베드로의 문제점이 뭐냐, 자기부터 출발해요. ‘내가 어떻게 용서하면 하나님께서 날 용서해주시겠습니까?’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용서 받았다가도 용서가 취소된 사람의 경우를 베드로 앞에 제시해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490번 용서해야 되는데 만약에 490번 중에 489번째에 실패하면 베드로는 구원 못 받아요. 처음부터 그렇게 묻는 것 자체가 구원 못 받아요. 우리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자체가 이게 구원받지 못할 마음 자세가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할 것 같으면 생명나무 가는 길을 개방했지 그것을 폐쇄시킬 하등의 이유가 없거든요.
창세기 3장에서 생명나무 가는 길을 폐쇄시킨 이유는 우리는 구원 받을 자격이 애초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마귀의 사주를 받아서 “안 되지만 자꾸 사정해 봐라. 지성이면 감천인데 정성만 들이면 하나님도 감동받아서 네 소원을 들어준다.” 자꾸 이런 식의 압박을 뒤에서 밀어내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거기에 말려든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입장에서는 큰 작업을 해야 돼요. 어떤 작업이냐하면 내 중심으로 어떻게 구원을 받아 챙기느냐 하는 그 사고방식이 있는 인간을 그 사고방식 자체를 주께서 철폐해 버리고 구원을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우리가 존재한다는 식으로 바뀌기 시도를 주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 시도를 하신 것이 뭐냐, 칼이었습니다. 칼은 우리가 가장 무서워하는 그것인데 그것을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조성해 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겠다는 모든 시도가 애당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의도였음을 주께서 깨닫게 하세요. 내가 어떤 식으로 용서 받아서 천국 가겠다는 계획과 시도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하는가? 거기에 대한 주님의 공박을 피하지 말고, 주께서 주시면서 ‘받아먹으라’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피하지 말고 죽음 속에 들어가서 죽음을 이기도록 하나님께서 제시하시지요. 그게 뭐냐, 십자가에 들어가서 부활로 튀어나오는 것을 우리에게 장만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될 때 구원이라는 것, 어느 누가 자기에게 주어진 죽음을 서슴없이 받겠습니까? 그럴 위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지요. 도망치기 바쁘지요.
도망치기 바쁜 우리에게 끝까지 주께서 따라오십니다. 끝까지 따라와서 삼켜버립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삼켜버리지요. 삼키게 되면 우리는 캡슐 안에 싸인 채 구원받아요. 그 캡슐을 가지고 신약에서 뭐냐, 예수 안, 십자가 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여, 제가 주님을 믿은 것이 아니고 주께서 저를 덮쳤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저를 덮쳐서 제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사는 것은 제 안에 제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실제를 우리 입에서 고백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 용서하라는 모든 말씀은 나를 가지고 주께서 친히 성취해 내시는 방식으로 모든 말씀을 이루어나가십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나 된 것, 내가 구원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께서 일방적으로 하신 일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하는 것으로 구원받게 되고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죽음, 우리에게 주어진 칼은 우리보고 뭘 이뤄내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에게 칼을 준 것은 내가 친히 칼 마저 이기게 하는 비책도 이 주님한테 있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에스겔에서 그렇습니다.
시편 126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5) 오늘 최 장로님이 요한계시록 정리가 끝났으니 머리말을 써달라고 해서 이런 취지의 머리말을 써서 보내드렸어요. “이 세상을 가장 지혜롭게 사는 방법은 계속 우는 것이다. 울면 된다.” 울다 보면 이 세상에 더 이상 애착이나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늘 실패하고 늘 실망하기에 더 이상 이 세상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하는 거지요. 요한계시록 자체가 뭐냐, 우리 발을 이 세상에서 뜨게 만드는 거예요.
계속해서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은 승리하게 되어 있고 하나님 믿는 사람은 계속 실패하는데 심지어 목숨까지 날아가는 정도의 패배를 계속 안겨준다는 이야기가 요한계시록이에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5)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흔적, 예수님의 뜻을 발견한다 할 때 제가 얼른 생각나는 것이 있어요. 물리학에 보면 사후물리학이라는 것이 있어요. 상당히 학자들이 재미있게 표현했는데 죽고 난 뒤의 물리학이라는 뜻입니다. 물리학이 시체놀이 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이야기냐, 빛은 광자로 되어 있거든요.
아인쉬타인같은 초기물리학자들은 빛이 파동이냐 입자냐를 실험할 때 막에다 그것을 때려버립니다. 때리면 흔적만 남고, 그러니까 시체 같은, 신호만 남고 광자는 사라져버려요. 흔적과 신호만 포착하고 그것을 분석해서, 그러니까 시체를 분석해서 빛의 성질을 파악하려고 한 거예요. 그것을 재미있게 표현해서 죽은 시체를 분석해서 그 사람의 본성을 파악한다, 사후물리학이라고 한 거예요. 우리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오게 되면 ‘우리가 어떻게 살까요?’라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 저는 왜 죽어야 됩니까?’하는 식으로 사후물리학 하는 식으로 우리자신은 없어지고 우리 몸이라는 흔적만 있는 이것을 가지고 말씀과 언약 앞에서 분석에 들어가는 겁니다.
물론 현대물리학에서는 살아 있는 광자자체를 살아있는 채로 생생하게 분석하는 방법이 있어서 20세기 초에 그것을 연구한 사람이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했지요. 그건 그렇고 우리 자신은 이미 죽은 자인데 죽었다, 라고만 하지 말고 어째서 우리는 주와 함께 죽어야 해, 라는 그것이 우리를 죽이는 그것이 바로 살리는 일이며 하나님은 그 방법 외에 달리 우리를 구원하는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죽어 있는 나에게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나에게 미련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특징이 뭐냐, ‘주님이여, 제가 어떻게 살아야 구원받습니까? 제가 어떻게 살아야 복을 받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주께 영광을 돌립니까?’라는 질문자체가 우리한테는 성립이 되지 않고 주님께서 퍼붓는 식으로 주님이 어떤 식으로 나를 다루십니까, 라는 식으로 늘 거울 앞에 서듯이 주님 앞에 선 채로 걱정 없이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방식입니다.
지금 그 방식대로 에스겔에서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칼을 들고 나오셨다, 칼이다, 너희가 너희를 보기는 가마솥의 고기라고 보지만 내가 보기에는 뭐냐, 너희들의 죄악 된 증거물들이 그 가마솥에 한 가득 있는 것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죄를 겨냥해서 칼로서 바벨론을 통해서 공격해 오는데 그렇게 너희를 잊지 않고 그 죄를 낱낱이 지적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너희를 구원시키는 절차인 것을 너희가 믿으라, 그 말이거든요.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서 더욱더 두려워하게 하는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우리가 두려워한다는 그 원인조차, 우리 쪽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 하는 그 시도자체가 잘못되었기에 두려워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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