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성소
2013년 2월 27일 본문 말씀: 에스겔 11:14-17
(겔 11:14, 개역)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 11:15, 개역) 『인자야 예루살렘 거민이 너의 형제 곧 너의 형제와 친속과 이스라엘 온 족속을 향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 하였나니』
(겔 11:16, 개역)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겔 11:17, 개역) 『너는 또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열방 가운데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
사람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은 책상이나 노트 위에서나 드러날 일이 아닙니다. 실제 역사상으로 드러납니다. “내 생각이 하나님 생각과 다르다”고 옳고 고백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우리에게 넘겨주시지 않습니다. 끝까지 우리 자신을 쓰시면서 얼마나 틀리고 다르다 는 것을 혹독하게 경험케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 거주민들입니다. 또 하나는 바벨론 나라로 포로 잡혀가는 사람들입니다. 또 다른 의견을 나타내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편에 서 있습니다. 예루살렘 거주민들과 포로잡혀 가는 사람들의 견해가 서로 다르다고 해서 어느 한 쪽은 옳다고 여기시면 안됩니다.
둘 다 하나님 생각과는 다릅니다. 그럼에도 예루살렘 거주민이나 포로 잡혀 가는 사람들은 둘 다 하나님은 자기편이고 자기 생각과 같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예루살렘 거주민들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하나님의 약속을 눈에 보이는 땅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분명 이 가나안 땅에 살도록 이스라엘에게 허락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진해서 내어보이신 약속을 철회하거나 변경할 리가 없다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 살라고 하시면서 지금에 와서 나가라고 하실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일관성이 있어야지만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오늘날 교회를 통해서도 계속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교회라는 실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는 증거로 간주하는 생각들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 오로지 눈에 보이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교회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깁니다. 과연 그럴까요? 마태복음 6:33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교회라는 것은 ‘그 나라와 그 의’를 증거하고 소개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단 눈에 보이는 교회라는 것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을 토대로 해서 그 나라와 의를 증거코자 한다면 이는 필히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자체는 그 나라와 의 보다는 교회 유지가 시급하기 때문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교회를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를 대신하다고 여기면, “교회가 무너진 마당에 무슨 수로 그 나라와 의를 증거하지? 이는 있을 수 없어”라고 나올 게 뻔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그 나라와 의란 예수님 자체를 증거하고 소개하는 일을 통해서만 진행됩니다.
만약에 교회 자체를 유지하려고 한다면 이 자본시장체제에서는 계속해서 외부에서 돈이 유입되어야 합니다. 돈을 지불하려는 자들에게 돈을 요구할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이 세상은 나름대로 “교회는 이러한 일들을 해주어서 우리를 만족시켜 주어야 돼”라고 바라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날 노인 복지 문제가 아이들 사교육문제입니다. 즉 교회가 맞벌이 부부로 인하여 소홀히 할 수 밖에 없는 노인이나 어린 아이에 대해서 신경써 준다면 거기에 대한 대중들의 기대감이 높아져 그들이 교회에 헌금을 하는 것도 명분이 설 것입니다. 따라서 강단에서 목사의 설교도 여기에 맞추어 진행됩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우리 교회가 그 나라와 의를 증거하기 위해 어렵고 힘든 이웃들에게 성심껏 성의를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데 쓰여지는 돈은 하나님께서 필히 넘치도록 갚아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합당한 일에 동참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고 선전해 댈 것이 뻔합니다.
하지만 정작 사도들을 통해서 진행된 그 나라와 의란 딴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와서 이렇게 버림받았습니다.’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쉽게 말해서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살기 좋게 만들고자 하나님을 찾고 믿는 바로 그런 자들에게 의해서 버림받은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강단에서 증거하고 외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나의 교회, 나의 것, 과거에 하나님의 기적적으로 베풀어주신 이러한 눈에 보이는 실체라서 도저히 버릴 수 없다고 고집부리는 모든 것, 바로 이런 것들을 사수하는 것이 곧 주의 일이라고 믿는 그 인간들에게서 도리어 버림받은 바로 그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만이 그 나라와 그 일에 해당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현재, 눈에 보이는 것을 사수하는 자들입니다.
둘째로 포로잡혀 간 자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이란 자신의 화려한 복귀를 미래를 꿈꾸는 자들입니다. 모든 것을 상실하고 박탈당했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에 뻥 구멍이 뚫려 있게 됩니다. 이런 박탈감에 대해서 하나님의 일에 의지해서 미래에는 필히 그 잃어버린 것을 보상해 주리라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은 진정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보면, 16절에 ‘성소’라는 것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관심사는 개인적인 보상이 아니라 성소입니다. 그렇다면 성소는 어떻게 세워지고 만들어지는 겁니까? 베드로전서 2:4에 보면,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뒤에 연이어 나오는 말씀, 즉 7-8절에 보면,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바로 그 돌, 그 돌이 유일한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기에, 성전으로 규합되는 모든 자들은 필히 예수님과 같은 취지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자에게만 국한 합니다. 즉 모통이 돌이 나머지 성전을 이루는 모든 돌의 성격을 규정하고 결정지어 버립니다.
이렇게 된 것이 바로 ‘거룩한 제사장 나라’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 하신 예루살렘은, 나 때문에 죽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영원토록 증거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이들을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그 나라와 의를 증거케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평생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명예와 영광에 대한 생각뿐이기에 바로 이런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만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