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역
2013년 3월 20일 본문 말씀: 에스겔 12:8-13
(겔 12:8, 개역) 『이튿날 아침에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 12:9, 개역)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 곧 그 패역한 족속이 네게 묻기를 무엇을 하느냐 하지 아니하더냐』
(겔 12:10, 개역)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것은 예루살렘 왕과 그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온 족속에 대한 예조라 하셨다 하고』
(겔 12:11, 개역) 『또 말하기를 나는 너희 징조라 내가 행한 대로 그들이 당하여 사로잡혀 옮겨갈지라』
(겔 12:12, 개역) 『무리가 성벽을 뚫고 행구를 그리로 가지고 나가고 그 중에 왕은 어두울 때에 어깨에 행구를 메고 나가며 눈으로 땅을 보지 아니하려고 자기 얼굴을 가리우리라 하라』
(겔 12:13, 개역) 『내가 또 내 그물을 그의 위에 치고 내 올무에 걸리게 하여 그를 끌고 갈대아 땅 바벨론에 이르리니 그가 거기서 죽으려니와 그 땅을 보지 못하리라』
사람이란 새로운 기준이 등장하지 아니하면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인자人子’라고 부르시면서 자꾸 새로운 일을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유대 백성들을 패역한 백성으로 단정짓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호되게 다루십니다.
왕은 눈이 뽑히고, 백성들과 귀족들은 노예 신세가 되어 바벨론으로 잡혀가게 만듭니다. 이러한 상황은 그동안 인간들이 나름대로 방식으로 이 땅에서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나선 모든 일이 다 패역한 일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유대 민족들은 다른 민족과는 달리, ‘주의 이름’과 동거한 민족입니다.
그들이 살았던 땅은 그냥 일반적인 땅이 아니라 ‘주의 이름’과 같이 살던 그 땅입니다. 이는 곧 그 땅에서 일어나고 진행되는 모든 것이 일방적으로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한 일들이다는 말이 됩니다. 사람들은 혼자 사는 것이 훈련되어 있습니다. 자기 곁에 누가 다가와서 바짝 긴장하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생활을 같이 한다는 것은 기존의 자아상이 몽땅 바뀔 요량을 하지 아니하면 성사될 수 없는 일입니다. 서로가 힘들게 마련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살 사람이 아닙니다. 천국가서 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천국이란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좋아할 나라이기에 이런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같이 좋아하지 아니하면 천국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민족들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가는 이유는, 평소의 마음가짐이 ‘주의 이름’과 동거할 마음가짐이 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패역한 마음’입니다. 무엇이 패역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어떤 식으로 들어갔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원리는 곧 애굽에서 빠져나오는 원리와 동일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은 어린양의 피로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이 어린양의 피 정신이 내내 이동하는 이스라엘과 더불어 있는 경우에만 약속의 땅에 입성할 수가 있습니다. 어린양의 피 정신이란, 이스라엘 나라 백성의 모든 목숨들을 담보로 압수해서 보관하고 계시다고 보시면 됩니다.
약속의 땅이 인위적으로 들어갈 수 없는 이유는, ‘주의 이름’이 갖는 초인적인 위신과 위상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노력해서 들어갈 수 있는 나라면 애초부터 약속의 땅도 아니요 천국도 아닙니다. 사람들의 모든 아이디어와 노력을 차단하면서 성립되어야 하는 것이 약속의 땅이요 천국입니다.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사람이 자기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는 항상 앞 일에 대해서 지금의 사정을 감안해서 항상 상상의 나래를 펴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 신화에 오딧세이라는 영웅이 등장합니다. 그는 10 여년 동안 바다를 헤매는데 어느 계곡에서는 그동안 무수한 선원들을 감미로운 노래로서 유혹하여 암초에 배를 바딪치게 하는 사이렌이라는 여신이 살고 있습니다.
음악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그 누구도 그 노래의 유혹에서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이점을 미리 알고 있었던 영웅 오딧세이는 선원들에게 자신의 몸을 돛대에 꽁꽁 묶어서 본인이 아니라 풀어달라고 애원해도 절대로 풀어주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바로 이러한 계산들은 지금의 자아상에서 상상한 것으로 장래에는 ‘유혹에서 이겨낸 자아상’을 미리 내다보는 식입니다.
과연 이런 게 신앙생활일까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사정 두지 말고 마구 자신을 패라고 당부하는 것이 과연 죄의 바다를 무사히 건널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도닦는 것 밖에 안됩니다. 이런 구원관의 문제점은 지금부터 상정한 미래의 자아상이 곧 구원받는 자아상이라고 본인이 구상할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구원받는 자는, 우리 안에 예수님의 어린양이 계셔서 그분의 죽음이 밖으로 표출되는 양상을 띠게 됩니다. 즉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아예 예수님의 죽음에 함께 죽은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이상향이나 보다 우수한 인격 소유자가 된 자아상을 상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마저 예수님과 더불어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0:28-29에 보면,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대하면서 불신자나 성령 받지 못한 자들이 이렇게 빈정댈 것입니다. “흥, 누가 죽으래. 강한 힘으로 인간들을 물리치면 되지 왜 나약하게 죽어놓고서는 이제와서 묻느냐”라고 나올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자기 아들을 죽여놓고서는 그 책임을 차후에 인간들에게 묻는 방식으로 나오십니다.
이것은 곧 ‘회개없이는 구원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회개의 기준이 수립되어야 합니다. 그 회개의 기준은 ‘주의 이름’입니다. ‘인간의 최선의 노력이나 할 도리’가 회개의 기준이 아닙니다. 어린양의 죽으심 자체가 유일한 회개의 기준입니다. 천국의 원리는 이미 노아홍수 때부터 등장하고 있습니다.
홍수와 방주와 그리고 ‘정결한 짐승 7쌍, 부정결한 짐승 2쌍’은 이 땅이 어떤 원리에 의해서 창조되고 조성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홍수가 끝나고 다기 뭍으로 나올 때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를 잡습니다. 이로 인하여 땅은 다시 옛날 그 시절의 땅이 다른 원리 위에서 돌아가는 땅입니다.
곧 이 땅에서 정결한 피가 흐르는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원리에 준해서 땅은 영원함이 보장됩니다. 곧 피의 영원함을 간직하는 땅이 바로 천국입니다. 이 천국에 들어가 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자신의 모든 것이 인정받지 못함을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로 여기는 자입니다. 유대나라는 이 은혜를 모독하고 그 대신 힘있는 나라인 애굽만 의지했습니다. 당연히 주의 이름과 동거하는 원리가 다르니 추방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죄의 박물관으로 만들어지고 있음을 감사히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