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수요설교-주의 신(겔11;1-4)이근호130213

아빠와 함께 2013. 2. 13. 21:42

주의 신(겔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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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2-13 21:09 
주의 신

2013년 2월 13일                            본문 말씀: 에스겔 11:1-4

(겔 11:1) 그 때에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려서 여호와의 전 동문 곧 동향한 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그 문에 사람이 스물다섯 명이 있는데 내가 그 중에서 앗술의 아들 야아사냐와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를 보았으니 그들은 백성의 고관이라

(겔 11:2)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사람들은 불의를 품고 이 성 중에서 악한 꾀를 꾸미는 자니라

(겔 11:3) 그들의 말이 집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즉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 하나니

(겔 11:4, 개역) 『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그들을 쳐서 예언하고 예언할지니라』

하나님의 신의 활동이라는 것은 인간을 다치게 하지 않고 곱게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인간이 벌려놓은 일에 협조 차원에서 일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들의 의도나 생각을 비켜 가십니다. 타협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의 신’이 어떻게 일하시느냐에 대해서는 신약의 성령님이 어떻게 일하시느냐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에 있어 성령님의 일은 인간의 이해력을 배척하십니다. 인간의 지혜와 노력과 경건들을 물리치시면서 일하시는 것이 성령님의 일입니다. 이는 인간쪽에서 하나님쪽으로 다가서서 연결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조치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령 앞에서 인간들의 모든 노력은 다 무용지물입니다.

성령님께서 이런 식으로 일해야만 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모든 가능성과 자질은 다 판정 났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메시아나 신이나 계시에 대한 모든 이해는 결국에는 예수님을 살해해야만 하는 동기로만 작용할 뿐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내면 낼수록 예수님에 대한 핍박의 강도가 같이 더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 이후에 성령님이 등장하는 이유는 이미 인간에게는 하나님께 영광돌릴 만한 요소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 확정되었음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인간에게 나오는 모든 것을 배격하십니다. 바로 이와같은 취지에서 오늘 본문에 ‘주의 신’이 나타나십니다.

인간들이 뭘 쥐고 아직도 신과 연결을 시도하는지를 분명히 하시면서 그 방식을 배격하십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배격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야 새로운 피조물도 창조하십니다. 성령님이 찾아들면 구원이 아니되고자 버틸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리에 맞는 피조물을 친히 만드어 내십니다.

이 만드시는 작업에서 구원받은 당사자가 할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주의 신’이 에스겔에 나타나셔서 이것저것 지시하는 것도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어내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해서 기존의 인간의 생각에 추가적으로 더 얹는 식으로는 하나님께서는 일하시기 않습니다.

하지만 주의 신을 받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자들은 기어이 자신의 방식에 집착하게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25명의 사람들도 그와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나름대로 시간관과 공간관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 공간관에 있어 ‘주의 신’은 특정 지역에 억매이지 않고 건질 자를 건지십니다.

성전을 움켜 쥐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상관하면서 예루살렘이라는 지정된 장소만을 채택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말고 다른 지역으로는 분명한 확정된 계시를 내리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접어들면 하나님께서는 건질 자를 건지시는데 있어 골짜기나 산정상이나 바다나 육지나 지하 같은 것을 것이 장애가 될 수가 없습니다.

바람 부는 것이 ‘유럽 바람’ 다르고 ‘아시아 바람’ 다르지 않듯이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일한 속성을 발휘해서 구원하십니다. 성령을 거부할 수 있는 위인은 없습니다. 따라서 특정 장소를 점유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령님은 오직 복음 전파를 통해서 나타나십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에 의해서 설교하면 모든 청중들이 다 믿는다가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서 설교해도 반드시 믿어야 될 자만 믿는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2:14-16에 보면,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시간관도 주의 신 앞에서는 소용없습니다.

특정 장소에는 특별한 날짜와 시간에 드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그 논리는 ‘이스라엘 역사관’의 허물어뜨림과 동시에 같이 무너집니다. 주의 신이 이스라엘에 나타나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자기 위주의 역사관과 하나님의 뜻을 연결시켜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잘못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사적인 역사나 이스라엘이라는 공적인 역사관을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란 모든 역사를 소급해서 몽땅 은혜라는 이름으로 용서받은 죄로 규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록 자신들이 잠시 이방나라에 붙잡혀 있지만 언젠 『가는 독립국가로서 메시아를 영접할 것이라는 역사관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역사관에 편들지 아니하고 오히려 부정해버리십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게 되면 십자가 업적을 근거로 해서 나오시는 영이기에 인간의 모든 행위가 십자가 피 앞에서 평가받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아무리 나름대로 충실하고 긴 역사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 어느 것 하나 죄 아닌 것이 없게 됩니다.

예를 들면, 어제의 한 행동을 근거로 인간들은 오늘 하늘의 축복을 고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어제 한 행동은 항상 죄가 되고 그 죄를 이미 오늘에 용서했기에 오늘도 은혜로 생존하고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어제의 죄를 용서 못하는 자가 있으니 곧 당사자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보기에 깨끗한 역사 만들기에 주력해서 어제 한 나쁜 행동으로 인해 오늘 신으로부터 벌을 받아 자기 역사가 망가지거나 흠이 나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바로 이러한 염려 자체가 여전히 온전히 주의 신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오직 ‘없는데서 있게’, 그리고 ‘죽은데서 삶’을 방식으로 실시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성도는 매일같이 용서하고 소급해서 모든 것을 용서해주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이미 용서한 것을 우리 자신이 용서하지 않는 법이 없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2-15 14:31 
27강-에스겔11장 1-4(주의 신)13021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1장 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62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1:1-4


“때에 주의 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여호와의 전 동문 곧 동향한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그 문에 이십 오인이 있는데 내가 그 중에서 앗술의 아들 야아사냐와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를 보았으니 그들은 백성의 방백이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사람들은 불의를 품고 이 성중에서 악한 꾀를 베푸는 자니라 그들의 말이 집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즉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 하나니 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그들을 쳐서 예언하고 예언할찌니라.”


하나님의 신이 등장할 때는 신약에서 성령께서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와 관련시키면 되겠습니다. 신약에 보면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시라 할 수 없다고 단정 지어 놓았습니다. 그 말을 달리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 없이 개인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자질이나 경건이나 열심이나 착함이나 선함 같은 것을 모아봐야 그런 것으로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게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뻔하지요. 일을 자기가 했으니까. 신을 빙자에서 자기 영광, 자기찬양, 자기자랑으로 돌아오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신약시대에서는 구원에 대해서 이미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못을 박아놓았습니다. 성령이 와야 주님을 제대로 믿게 되고 십자가도 알게 되고 구원을 받는다, 하는 그 말은 성령이 안 오게 되면 아무리 설득해도 그 사람은 구원 못 받는 것이 확실하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신약에서 일하는 이런 경우는 구약부터 그러한 성령의 일이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신, 여기 1절 “때에 주의 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라고 해서 주의 신이 등장한다는 것은 주의 신을 받지 않는 사람에게는 번역이 안 된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주의 신은 사람들이 자기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가로막는 역할을 하시는 것이 주의 신이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신약에 오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데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이스라엘, 바른 이스라엘, 진리대로 사는 이스라엘을 성신으로 인하여 만들게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두 가지고 나눈다면 성령이 하시는 일은 첫째로, 통역 불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너희능력으로는 천국에 오지 말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천국에 갈 사람은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친히 창조해 낸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가만 들어보면 인간들의 모든 시도와 노력을 철저히 배격하고 밀치는 느낌을 받지요.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면 제대로 된 겁니다. 왜 그런가, 오늘 본문에서 주의 신이 임한다는 이 말은 그 당시 유대나라 있었고 이스라엘나라가 있었지만 첫째는 그들을 배격하고 둘째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는 겁니다. 구약에서부터 이미 이러한 작업을 했고 이 구약의 성신의 작업방식은 신약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인간 쪽에서 성령 믿자, 성신 믿자, 이런 것은 말도 안 되고요, 성령이 와야 예수님도 믿게 되고 성령도 믿게 되고 하나님도 믿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신께서 오실 때에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들이 이해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다 배격한다 하는데 바로 그 증거가 하나님의 신이 임하는 시점이 인간들이 성전을 붙들고 있던 그 시점에 오시는 겁니다. 오게 되면 성전은 더 이상 쓸모없는 짓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아디시피 성전이란 공간적으로 한 장소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라 하는 것은 조석으로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시간적으로 아침저녁마다 제사를 드림으로서 하나님과의 접촉을 시도하는 특정한 공간, 이게 바로 성전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성전을 불에 태워서 멸망시키는 그 시점에 주의 신이 임했다는 그 말은 이제는 주의 신께서 하는 영역이 특정 장소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특정 지역을 벗어나서 일하게 되는 거예요. 이게 시편에 나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7-10)


선교라는 것, 전도라는 것, 꼭 외국에 나갈 필요가 있을까요? 성령이 하시는 일은 바람 같기 때문에 한국에서 부는 바람, 유럽에서 부는 바람, 아프리카에서 부는 바람이 다를 리가 없거든요. 같은 공기의 흐름이고 공기는 질소와 산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산소 21퍼센트와 질소가 약 78퍼센트쯤, 이렇게 공기가 되어 있는데 그 공기가 압력에 의해서 흐르면 그것이 바람인데 유럽의 바람은 냄새가 좀 다른가요? 유럽의 공기흐름이나 한국의 것이나 맨 그 바람이 그 바람이듯이 하나님이 특정장소, 기도원이나 예배당 앞이나 뒷자리, 그런 식으로 특정지역에 구애받는 식으로 사람을 건지지는 않습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의 편지에서 이렇게 합니다. 주의 신은 말씀, 복음 외치는 곳에 함께 일한다, 다른 말로 하면 역사한다, 사역한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의 신이 임하면 반드시 믿어야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분명히 주의 신, 성령에 의해서 말씀을 전했는데 왜 안 믿는가, 이렇게 하시는데 안 믿는 것도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마지막에 사도바울이 그것을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내가 이렇게 성령에 충만해서 전하지만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사도가 복음을 전했지 모든 사람을 다 데려오기 위해서 복음을 전한 게 아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2장 15절과 16절에 보면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똑같은 현장에서 똑같은 복음을 전했지만 망해야 될 사람한테는 악취로 들리고 구원받아야 될 사람에게는 향기로 들리게 되어 있어요. 사정이 이러한데 안 믿는 사람이 생겼다고 해서 이것은 성령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안되는 겁니다.


설교 처음에 했던 이야기, 성령은 첫째는, 통역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통역하는 것도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고 성령의 은사를 받아야 통역이 되니까 결국 인간 쪽에서는 믿는 것이든 통역이든 그 무엇도 다 차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인간은 못하는데 그 안 되는 일을 주께서는 되게 하셔서 반드시 자기 백성을 건져서 천국으로 데려가는 작업을 성령이 오셔서 한다는 말입니다. 벌써 몇 번째 이야기하는데 또 합시다. 주의 성신이 하는 일은 그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거역하고 배격하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건질 자를 건져서 데려간다는 이 두 가지 작업을 하신다. 그 작업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특정지역에 구애 받지 않고 일하신다는 겁니다.


구원 받을 자인데 구역이 문제가 되어서 구원 못하는 그런 법은 없다는 말입니다. 북한이기에 구원 못하겠다, 그런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북한이든 남한이든 지하핵실험장인데 상관없이 성신께서는 다 관여합니다. 모든 인간은 해골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해골이고 죽어있기에 죽은 인간을 살리는 권한은 주의 성신의 일 뿐입니다. 공간만 구애 안 받는 정도가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구애 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좀 어렵습니다. 옛날에 주의 신이 유다자체를 배격하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사람들은 자기들의 고유한 역사관, 시간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떤 역사관인가? 옛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을 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약속을 지키신다. 따라서 우리의 나라가 계속 유지될 것이고 이 이스라엘 나라의 미래에 다윗 자손으로 오시는 메시아가 우리를 영접해서 결국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천국 백성으로 만들 것이다, 라는 시간관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시간관은 이스라엘 위주의 시간관이지요. 어떤 경우에도 이스라엘은 살린다는 것이 이스라엘 위주의 시간관, 역사관으로 갖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의 신이 오게 되면 그것 구애받지 않고 없애버립니다.


로마서 11장에 보면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주의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택한 자는 다 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혈통적인 이스라엘 역사관을 갖고 있는 그 사람들을 건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누구나 자기의 과거나 현재 미래의 시간관을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정말 성령이 와서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게 되면 ‘아, 그 때 27살 생일날 성령이 와서 날 믿게 했구나. 11월 5일에 주의 성령이 내게 왔어. 나의 역사 속에 성령이 온 그 날은 아주 특별한 날이야.’ 이렇게 고정해서 자기 역사는 자기 역사대로 살리고 별표 치고 기념일로 해서 11월 5일은 내가 성령 받은 날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을 거예요. 이것, 구원파입니다.


구원 파는 누구한테 배웠겠어요? 기존 교회한테 배운 거예요. 기존교회, 개혁주의 신학 하는 사람들한테서 다 배운 거예요. 주의 성령이 오게 되면 구원받은 기념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신이 에스겔 통해서 나타날 때는 기존의 이스라엘 역사를 깡그리 무시하고 파괴해버리는 작업과 동시에 창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의 인간을 새롭게 창조한다는 것은 기존의 인간들이 어디에 휘둘려 있으며 어떤 시간간과 공간관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그것을 전부 다 부정해 가면서 새롭게 창조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성령 받아서 예수님을 주라고 제대로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나 위주의 시간관, 나 위주의 역사관이 의미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한다면 ‘에이, 그것은 옛날에 아브라함한테 한 것이지.’ 그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하는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여기서 지난 화요일 부산강의를 잠시 다시 해보겠습니다. 흥부전을 하는데 놀부도 나오지요. 마지막 장면에서 박을 타는 장면이 나옵니다. 박이 열릴 때 슬금슬금 톱질하세, 하니까 박이 쫙 갈라지면서 어떤 인물이 나와서 “흥부야! 네가 착하구나.” 할 때 흥부가 제비 다리를 고쳐준 시점만 착한 것이 아니고 그 전부터 형한테 얻어맞고 형수에게 밥 풀 붙은 주걱으로 얻어 맞으면서 수모를 당한 그 모든 것까지 다 포함해서 “착하구나. 복 받아라.”해서 복을 주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제가 이것만은 압니다. 놀부가 억지로 제비다리를 부러뜨려놓고 다시 고쳐줬잖아요. 꼭 예수님 같이 병 주고 약을 줘요. 놀부가 일부러 제비다리를 부러뜨려 놓고 그 다음에 고쳐 놓고서 기다렸던 거예요. 놀부도 박을 타니까 박이 갈라지면서 거기서 도깨비가 나왔는데 그 도깨비가 제비다리를 부러뜨렸다는 것만 지적하는 것이 아니고 그 전에도 놀부가 한 짓들, 똥 누는 놈 주저앉히고 호박에다 말뚝 박고, 하여튼 그런 악질이 없는데, 그 모든 악질에 대해서 한꺼번에 소급해서 도깨비가 망치 들고 놀부를 때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박을 타니까 성령이 나왔다는 말은 예수 믿는 그것이 잘했다고 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주의 은혜로 살아왔다는 것을 소급해서,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소급해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겁니다. “네가 너 된 것은 지금 이 순간 예수 믿는 것이 착하다고 그것에 대해서만 복을 주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기 전부터 태초부터 너의 너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거예요. 그럴 때 1월 5일에 예수 믿어서 복 받았다고 그것을 기억한다는 자체가 성령 안 받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성령 받아버리면 모든 날이 1월 5일입니다.


여러분이 알기 쉬운 것,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안식일 날이 중요했어요. 이스라엘에는 제사법이 있어서 안식일 날 제사법은 평일에 드리는 상번제와 달랐어요. 그만큼 안식일은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 오시고 성령 오고 난 뒤에는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누구야? 아직도 안식일을 지키라고 누가 너희를 꾀느냐? 너희들이 안식일을 지키면 내가 전한 복음과 위배되는 거야. 만약에 너희가 안식일을 지키면 내가 복음 전한 것이 다 헛것이다.”라고 갈라디아서 4장과 골로새서 2장에서 언급을 한 거예요.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골 2:14-16)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8-11)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신 측에서는……, 고신 측이고 합동 측이고 뭐고 다 마찬가지지만, 안식일을 주일로 살짝 바꿔서 지키고 있다는 말은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주의 신마저 자기 소유로 장악을 하고 있어요. 주의 신은 모든 것을 배격하고 이스라엘나라가 갖고 있던 고유한 역사를 철폐시켜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조하고 천국 갈 사람을 만드는데 그 성령이 하는 작업은 모르고 자기가 뭔가 성경말씀대로 안되니 ‘아, 이것은 육으로는 안 되니 성령이 오면 지킬 수 있겠지.’ 해서 날아가는 성령을 잡아서 그 성령을 이용해서 자기가 율법 지킬 만한 사람이라고 뽐내기 위한 목적으로 성령을 그냥 소유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 이것은 마귀의 덫에 그대로 빠진 겁니다. 성령을 받은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기를 “자기를 부인”(막 8:34)하라고 되어 있는데 성령을 안 받은 사람들은 성령을 자기의 자랑거리로 무슨 훈장처럼 주렁주렁 달고 다닙니다. 인민군장교들 옷이 늘어질 지경으로 훈장 주렁주렁 달고 다니듯이 온갖 성령의 열매라는 것들을 달고 다니는데 다닐 때 마다 철렁철렁 소리가 나요. 교회에서는 왜 소리가 유난히 많이 나오는지.


“나는 27에 장로 되고 서른에 뭘 했고 서른다섯에 뭘 했고……. 너는?” “나는 25살에 서리집사 되었고 35살에 장립집사로 승진해서 42살에 돈 내고 드디어 장로가 되었다.” 는 이런 것들입니다. “나는 권사 되고 싶은 맘도 없었는데 남편이 장로 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권사가 되었다.” 그런 것들을 어디에 새겨놓았나 하면 자기 역사를 유지하면서 거기에 새겨놓은 거예요. 그러면 예수 믿을 때만 은혜지 내가 처음부터 은혜라는 말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어떤 경우에도 은혜입니다, 라는 말은 하지 말아야 돼요.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는 것을 다시 정리하게 되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두르고 있는 모든 시간관과 그 공간관이 전부 다 허물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주의 신이 임했는데 주의 신이 임할 때 주의 신이 임하지 않은 사람과 비교해보자는 말입니다. 그 이야기하기 전에 이것부터 먼저 이야기합니다. 에스겔을 설명하게 되면 사람들이 굉장히 어려워하는 이유가 과거에 있었던 그 일을 오늘날에는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 문제입니다. 그 문제를 두고 교인들도 그렇게 난처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지금 에스겔 당시의 역사 속에 일어난 그 일이 해석되고 적용되려면 우리도 성전이 있어야 하고 우리도 예루살렘에 가 있어야 되는가? 옛날 그 때 에스겔 당시에 있었던 일을 우리가 이해를 하려면 똑같은 장치와 설비가 있어야 되느냐, 이렇게 질문하는 분이 있는데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일을 할 때는 이것만 아시면 해석이 다 돼요. 하나님이 일을 할 때는 우리와 협상하거나 타협하는 것이 아니고 파괴시키고 창조한다, 이것만 아시면 구약성경은 깔끔하게 정리가 돼요. 하나님이 “잘 있었나?” “잘 있었습니다.” “그래, 나와 손잡고 일하자.” 이렇게 일하시는 분이 아니고 파괴시키고 창조하는 겁니다.


어제가 2월 12일이죠. 2월 12일을 하나님의 은혜로 지냈습니다. 오늘은 2월 13일입니다., 그럴 때 ‘2월 12일에 잘 있었지. 2월 13일도 잘 지내야지.’ 그것이 아니고 2월 12일에 있었던 이것을 파괴하고 2월 13일에 새로운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왜 그런가하면, 언약의 하나님은 반드시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속성을 가진 일만 벌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모든 일은 항상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같이 죽은 자인데 자꾸 살아 있는 척 하면 안돼요.


“하나님이여, 어제 내가 너무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어제 죄 지은 것을 가지고 오늘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어요. 부흥회를 할 때 참 많은 사람이 속아 넘어가는데 회개하라고 하니 10년 전 혹은 수십 년 전의 것들도 회개하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이런 머리를 굴리는 사람도 있어요. “여러분, 이번 부흥회는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다 회개해야 됩니다.” 하니까 수요일에 다 회개를 안 해요. 목요일에 할 회개를 남겨놓고 목요일 되어도 금요일에 회개할 것은 또 떼어 놓지요. 그래야 시간을 심심치 않게 때울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어제 무슨 일을 했는지 간에 그 잘못에 대해서는 묻지를 않습니다. 왜냐, 오늘 내가 살아 있잖아요. 누구 덕분에? 주님의 은혜로 살아 있다는 말은 어제의 꼬리를 가위로 잘라버린 거예요. 어제 일을 용서하지 않은 것은 주님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에요. ‘어제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지?’ 이것은 우리가 용서 안하고 있는 거예요. 왜 우리가 어제 일을 용서하지 않느냐 하면 어제 착하게 살았으면 오늘 복을 더 받을 것이라는 자기 시간대를 자기가 꾸려나가기 때무넹, 자기 역사를 자기 손으로 만들어나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역사는 은혜의 역사가 아니고 자기 행함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그짓을 한 겁니다. 그 짓을 한 사람이 누구냐? 오늘 본문 1절에 보니까 25명이 나와요. 어떻게 해서 25명인가, 하여튼 그것은 모르겠고 어찌되었든 25명인데 “그 중에서 앗술의 아들 야아사냐와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를 보았으니.”라고 나오지요. 이름도 어려운데 이 사람의 이름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들이 뭐라고 하느냐, 3절에 보면, “그들의 말이 집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즉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


아직 건축할 때가 멀었으니 이 성은 가마솥처럼 단단하게 있고 우리는 그 안에 안전하게 들어 있는 고기 같아서 외부에서 어떤 공격을 해도 우리는 끄떡없다,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자기 고유의 역사관, 시간관, 그리고 자기 고유의 역사관과 시간관에 입각해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위주로 관계해서 자기 좋으라는 식으로 해석을 하는 거예요. ‘설마 나의 역사를 뭉개지는 않겠지.’ 그래서 인간이 진리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진리가 아니고 자기와 연관시킬 때만 그것을 진리라고 우깁니다. 자기 위주로 만들어놓고 진리를 안다, 그러는 거예요.


예를 들면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게 사랑입니까? “잘 들어보세요. 나는 예수님 사랑합니다. 알았지요? 그렇게 사랑하니까 이제는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주세요.”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 사랑이냐는 말이지요. 자기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그 위주로 예수님을 끌어당기는 거예요. 반면에 주님의 진짜 사랑을 받은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제가 어떻게 주님을 사랑할 런지 모르겠습니다.” 앞의 이야기는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뒤의 예는 “나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어떻게 주님을 사랑해야 될지.”


바로 두 번째 이야기가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에요. 너무 큰 사랑을 받아서 이 사랑을 어떻게 사랑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I don’t know how to love him……” 이런 노래가 있어요. “나는 어떻게 당신을 사랑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앞에 것은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뒤엣것은 “주께서 시작했습니다. 나는 주님의 사랑에 그냥 걸려든 것뿐입니다. 나를 질질 끌고 가서 주님의 그 사랑의 품으로 합류되도록 하는 것이 주의 작업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앞엣것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니 주님은 내 뜻대로 되게 해 주옵소서. 이만큼 사랑하는데 내 소원 안 들어주면 섭섭하지요.” 이렇게 나옵니다.


주의 신이 오게 되면 모든 것을 파괴시킵니다. 파괴시킬 때 사랑을 받은 사람은 ‘아, 그동안 내가 파괴되는 것이 안 되더니만 주의 사랑이 오니까 이것이 되네.’ 자기파괴, 자기부인, 이것이 다 되는 거예요. 부족합니다, 가슴 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사랑을 받았을 뿐인데 더 이상 내 자랑이나 내 주장을 하기가 부끄럽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전에 베드로가 주님의 사랑을 알기 전에는 “예수님, 제가 남 용서하기를 몇 번이나 하면 됩니까?”라고 내가 몇 번 용서를 하면 주님 보시기에 “베드로야, 네가 한 용서는 내게 합당한 용서다.”라고 판정을 받겠느냐고 항상 자기로부터 일을 시작한 거예요.


그러나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요한복음 21장에서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하고 말지요.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할 때 “주께서 다 아시잖아요.”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성령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라는 표현을 한 겁니다. 성도가 하는 모든 것은 그냥 ‘하라’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성령의 뜻에 따라서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성령을 안 받아놓으니까 자기 시간대와 자기 공간대를 가지고 그냥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고 시도를 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 하다 보니 행한 것도 자기가 행하고 자기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의 판정도 자기가 하고. 자기가 축구선수도 하고 심판도 자기가 하고, 그게 무슨 축구입니까?


자기가 오프사이드반칙을 범해놓고는 “이것은 반칙 아니야.”라고 자기가 판정 내리면 그게 무슨 게임이 됩니까? 행하는 사람과 판정하는 사람이 동일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은 말이 안 되지요. 이것은 도 닦는 것이고 이것이 종교지요. 한 말씀만 더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본문에 25명이 나오고 그 사람들을 악한자라고 하는데 그 악한 자가 뭐냐 하면, 자기의 시간과 공간을 붙들고 있는 겁니다.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 이런 식으로 하니까 에스겔 24장 3,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말을 받아서 이렇게 하십니다. “너는 이 패역한 족속에게 비유를 베풀어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한 가마를 걸라 건 후에 물을 붓고 양떼에서 고른 것을 가지고 각을 뜨고 그 넓적다리와 어깨고기의 모든 좋은 덩이를 그 가운데 모아 넣으며 고른 뼈를 가득히 담고 그 뼈를 위하여 가마 밑에 나무를 쌓아 넣고 잘 삶되 가마 속의 뼈가 무르도록 삶을찌어다.”


이것은 완전히 사골입니다. 예루살렘 자체가 가마인데 끓는 가마가 된 거예요. 성령을 안 받은 인간들은 자기를 보호하는 가마솥이라고 봤는데 하나님은 그 말을 받아서 “그래, 가마솥은 맞는데 못 빠져 나와서 완전히 몰살당하는 가마솥”이라는 겁니다. 그 가마솥 안에 담긴 고기는 푹 고아진 사골처럼 되는 거지요. 끓는 가마라는 것은 예레미야 1장 13절에도 나와 있지요.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일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지옥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 기대하거나 미련가질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일 때문에 우리가 울고불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파괴하시면서 창조하기 때문에. 우리가 애지중지 아깝다 하는 것도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과거의 시간과 공간속의 애지중지하는 것들이거든요.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키웠지 자꾸 내가 공들여서 키운 것이 아닙니다. 주의 은혜로 키웠듯이 내일 되면 주께서 또 키우실 거예요. 안 키우면 그냥 천국 가면 되고. 모레 되면 또 키우실 거예요.


항상 주님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관리하고 있는데 왜 자꾸 우리는 우리가 성령을 조정해서 성령을 내 소유물로 삼아서 개나 하인 부리듯이 해놓고 어떻게 예수님을 주라고 거짓말을 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날마다 은혜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날마다 죄를 짓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용서 받는 그 용서의 효과로서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육신으로 죄 안지을 때 없었고 세상 모든 돌아가는 것이 내 위주, 내 이익위주로 손해 안 보려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가 어찌 죄가 아닐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것을 또 용서하시고 십자가피로 또 용서해주시니 날마다 죽고 또 살아나는 성령의 사람으로서 예수님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