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하는 행구
2013년 3월 13일 본문 말씀: 에스겔 12:1-7
(겔 12:1, 개역)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 12:2, 개역) 『인자야 네가 패역한 족속 중에 거하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겔 12:3, 개역) 『인자야 너는 행구를 준비하고 낮에 그들의 목전에서 이사하라 네가 네 처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그들이 보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혹 생각이 있으리라』
(겔 12:4, 개역) 『너는 낮에 그 목전에서 네 행구를 밖으로 내기를 이사하는 행구 같이 하고 저물 때에 너는 그 목전에서 밖으로 나가기를 포로되어 가는 자 같이 하라』
(겔 12:5, 개역) 『너는 그 목전에서 성벽을 뚫고 그리로 좇아 옮기되』
(겔 12:6, 개역) 『캄캄할 때에 그 목전에서 어깨에 메고 나가며 얼굴을 가리우고 땅을 보지 말지어다 이는 내가 너를 세워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게 함이니라 하시기로』
(겔 12:7, 개역) 『내가 그 명대로 행하여 낮에 나의 행구를 이사하는 행구 같이 내어 놓고 저물 때에 내 손으로 성벽을 뚫고 캄캄할 때에 행구를 내어다가 그 목전에서 어깨에 메고 나가니라』
‘하나님은 살아계시다’고 표현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부정적으로 보신다’는 표현이 진실입니다. 사람들이 이 ‘부정적 시선’에 대해서 어둡고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기존의 현실관에 충실합니다. 인간의 눈은 하나님의 일을 보라고 박힌 눈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눈으로 다른 현실관을 수립하고 그 안에서 즐깁니다.
이 현실관은 자연적으로 하나님께서 고대하는 현실관이 아닙니다. 이로서 이 세상에 두 개의 현실이 섞여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상호 통하는 현실이 바로 귀와 눈이 막혀 있는 현실관입니다. 이는 곧 에스겔 행동을 통해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뜻이 무슨 취지인 지를 알지 못하는 현실관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또다른 현실관이 있습니다. 에스겔 1장이나 10장에 보면, ‘하늘의 보좌’가 나옵니다. 이처럼 ‘하늘의 보좌’와 닿아있는 현실관이 에스겔의 존재를 통해서 내비쳤지만 기존의 현실관을 유일한 현실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의 눈과 귀에는 포착될 리가 없습니다. 신약에서는 이 두 개의 서로 다른 현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갈라디아서 6:8에 보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자 그렇다면 이 숨겨진 하나님의 현실관이 어떻게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날까요? 그것은 광야 때, 모세의 인솔하에 움직였던 이스라엘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언뜻 보기에 광야의 이스라엘은 기적이 빈번하게 일어난 것 같지만 실은 드물게 일어납니다. 광야에서 만나가 내리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고 원망하는 자들에게 불뱀이 나오지만 늘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즉 착한 짓 했다고 늘 새로운 축복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요 나쁜 짓 한다고 해서 당장에 징벌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시간들은 그저 일방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런 지루함 속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을 이해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법을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를 알아야 했습니다. 이처럼 광야 이스라엘에게 있어 유일한 현실이란 법이 법으로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만끽하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안착되면서 그들은 주변 국가들의 현실감에 녹아들어갔습니다. 법만이 유일한 현실이 아니라 현실은 따로 있음을 그들은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현실은 바로 ‘자기를 위한 현실관’에 빠져들어간 겁니다. 바로 그 현실관은 하나님께서 기대한 ‘하나님 나라’라는 현실과 상관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평상시의 모든 것은 기적적인 은혜로 이해해야 되어야 하는데 이 연결을 성립시키는 것은 법, 곧 율법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 보기에 지극히 당연해보이는 것들도 다 은혜의 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진정한 율법 완성입니다.
하지만 이 법으로 살아야 될 이스라엘이 처참하게 망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들이 망하는 것은 속 쓰리지 않지만 막상 자신이 망하면 모든 현실이 다 무너져내리는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더 이상 살 이유가 전혀 없을 지경입니다. 이는 그동안 자신이 몸담았다고 자부한 그 현실과 더불어 자신이 무너져내리는 바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런 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직전 마지막 기도하실 때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가 진정성 있게 우리들에게 해당되어야 합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라는 말은 '이 현실 속에서 철저하게 나의 모든 것은 망하게 하소서‘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과정을 하나님께서는 유다 나라에게 일어내시는 겁니까? 그것은 다른 현실의 개시가 바로 이스라엘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루살렘 성벽과 에스겔과 그리고 그 성벽을 뚫는 행동, 이 세 가지가 짝을 이루면서 숨겨진 현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보좌에서 지상을 향하여 숨겨진 현실을 구체화하는 작업을 하십니다. 곧 말씀이 현실이 되는 작업입니다. 그 일반적 법칙을 진행시키십니다. 그것은 바로 ‘망하는 것 자체가 안 망하는 것’이 되게 하시는 방식입니다. 망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유일하게 안 망하게 하시는 식으로 두 개의 다른 현실층을 통과케 하십니다.
낮에는 에스겔 선지자가 이사 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밤이 되면 선지자는 성벽을 뜷고 포로 잡혀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는 은혜가 있던 영토, 즉 성벽 안에서 저주만 있는 영토 즉 성벽 밖으로 나아가고 도망치는 유다 나라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현재 우리가 매일같이 대하는 각종 뉴스나 방송이나 드라마 속의 현실은 바로 하나님 보좌로부터 저주받아 마땅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현실 외의 다른 현실이 있다는 사실을 감잡지 못하고 삽니다. 바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알려오십니다. 이 현실관은 법에 준해서 우리 인간이 철저하게 망해도 싸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망하도록 조치하는 이 조치가 곧 하늘의 보좌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의 현실에서 추방되어 저주의 현실을 접어든 그 현실을 통째로 묶여서 새로운 은혜의 현실로 만들어내는 것이 하나님의 작업입니다. 이것은 분리의 작업입니다. 육의 현실과 영의 현실을 구분짓는 작업을 하나님이 하시고, 그 다음에 육의 현실에서 자기 백성들만 쏙쏙 뽑아서 영의 현실로 옮겨가는 작업을 하십니다.
이 작업에서 우리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는 겁니다. 우리는 저주를 마치 축복인 양, 성공인양 여겼고, 반대로 우리는 축복과 성공을 마치 저주받은 양 여겼던 것입니다. 에스겔은 세상를 향하여 이사 가는 행위가 유대 백성이 포로 잡혀가는 식이 될 경우에만 숨어있는 생명의 현실 속에 있게 된다는 겁니다.
망해도 망하지 않는 은혜, 동시에 안 망하는 것이 곧 망하는 것이 되게 하시는 저주, 바로 이러한 점을 밝혀 보여주는 곳이 바로 에스겔을 통해서 진행된 숨겨진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유도 모르는 채 괜히 현실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힘든 현실에서 도피하는 행각입니다. 차라리 포로잡혀 가는 신세임을 아는 것이 은혜와 용서를 아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한 순간은 하나님의 용서를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