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 14장 24절(성령의 보편성)170718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4장 23절, 23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할것이요' 라고 예수님께서 누구를 이렇게 끌어당겼냐하면 아버지를 끌어당겼죠. 아버지를 끌어당기게 되면 그 결과가 뭐냐하면 바로 거처가 생기는 겁니다. 이 거처는 예수님과 사람 사이에 있다고 해서 마련되는 거처가 아니고,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가 여기 개입을 해줘야되요. 아버지가 개입해야되요.
왜그러냐하면 그 거처라는 것이 어떤 거처냐 하면은 그냥 사람대 사람처럼 우리처럼 모이면 되는데,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함께 있는 거처는 그 제자들이 함께 예수님과 아버지하고 함께 있어도 제자들은 눈에 안보였습니다. 그 눈에 안보이는 그 거처를 이야기하는거예요.
제자들은 뭘 생각하냐 하면은 예수님 여기있고 자기 여기 있으니까 이걸로 거처가 얼추 된게 아니냐. 주님이 함께 있으니까. 주님과 함께 있고, 자기가 주님과 함께 있으니까 눈에 보이는 사람들 이렇게 있으니까 이게 바로 주께서 원하는 거처라 생각했는데, 여기에 예수님은 아버지를 도입해버립니다.
아버지를 도입해버리면 그 거처가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거처가 아니예요. 예수님이 혼자 있더라도 주님은 그것을 거처라 봤고, 사람들 보기에는 예수님이 혼자라고 보고.. 이것은 어떤 차이가 있냐하면 바로 아버지와 함께 있는 방식,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있는 방식에 대해서 인간들이 어둡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몰라서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기서 거처라고 이야기 하는것은 너 하고 나 하고의 거처가 아니라, 아버지도 합세할수 있도록 그렇게 구성되어 있는 거처를 이제는 너희들이 그 거처에 있는다.그 거처에.
그러면 그 거처에 있게되면 제자들은 어떤 효과를 받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혼자있어도 아버지와 함께 있는 그 거처말이죠. 그걸 이제는 예수님께에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고, 이제 제자들에게 확대가 되요. 그래서 제자들이 로마에 가든, 사도바울이 어떤 고난을 받든, 아버지와 함께 있고 예수님과 함께 있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그 상태가 되는 겁니다.
이러한 상태는 사실은 그 다니엘에 보면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에 보면 분명히 그 유황불, 유황불이 아니고 그 고로 속에 맹렬히 풀무불 속에 분명히 세사람 들어갔잖아요. 하나, 둘, 셋, 세 사람 들어갔단 말이예요. 들어가고 난 뒤에 그 왕 느부갓네살 왕이 가보니까, 이 세 사람이여야 되는데 한사람이 더 있어요.
그게 바로, 그게 무얼 뜻하냐하면 불속에서 네 사람된게 아니고, 그들이 불속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다니엘 세친구 가운데서 주님이 함께 있었던거예요. 주님과 함께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이제 일종의 신약상태에 대한 미리 예표, 미리 보여주는 예언이잖아요.
그러면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으로 확장시킵니다. 확장시켜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이 제자들이 세상,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은 세상끝에 어디에 가더라도 늘 주님이 함께 있는겁니다. 이게 마태복음 28장 20절에 예언된거예요. 세상끝날까지, 보라 세상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이 거처, 이 거처에 대해서 제자들은 성령오기전까지는 그 거처를 이해못했습니다. 어디를 봐서 예수님은 한분있지, 아버지와 함께 있는게 안보이기 때문에. 그리고 똑같은 오해를 이제는 사도들이 또 성령받고 난 뒤에 주변사람한테 오해를 받게 됩니다. '너나 나나 똑같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을 모르고.
그런데 성경은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 했던 그 수모와 오해를 이제 성령세례받은 모든 성도에게 똑같은 평가를 세상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똑같은 평가를.. '어딜봐서? 너 너 혼자야'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되냐하면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시하듯이, 무시했으니까 죽이라 했잖아요. 무시하듯이.
그 다음에 누구를 무시하느냐? 12제자를 무시하듯이. 지금은 누구? 성령세례받은 사람을 사람들이 무시하듯이. 그렇게 무시의 반복을 통해서 예수님이 당했던 이 세상은 아직도 여전하다는 겁니다.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세상이 예수님 당시의 세상이나 지금이나 동일해야 십자가 사건이 반복해서 이루어져요. 십자가 사건을 유발한 유발요인이 여전히 여기서 살아남아야 됩니다. 방금이야기 한것, 늦게 오신분 있어서 다시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거처. 거처라고 하니 어려운것 같으니 처소라고 합시다. 처소. 처소라는 말을 우리말로 하면 그냥 영역이 아니고 공유된 공간. 공유입니다. 공유된 공간입니다. 또는 다른말로 하면은 공유된 영역, 공간. 이것을 거처라 합니다.
공유라고 했으니까 이것은 단수가 아니죠. 한사람이 아니고 두 사람이상입니다. 두사람이상 함께 있는 겁니다. 이 공유된 영역을, 영역에 대해서 제자들은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있으면 다수가 모였으니까 영역이다. 제자들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인간대 + 인간, 인간. 이렇게 되게 되면 여기서 어떤 공유된 공간이 생기겠지요. 사람들은 이 세 사람이 모여 있으면 여기에 집합체가 되는데, 커뮤니티 이것을 공동체라 이렇게 합니다. 공동된 생각을 가지고 모이면.
그런데 사회에서 이것을 뭐라, 이 세상에서 이것을 뭐라하냐하면 사회라 합니다. 사회. 인간들이 모이면 사회를 이루는 거예요. 인간들은 이것밖에 할줄 몰라요. 그러나 주님이 생각하는 모임은 사회가 아니고 천국입니다. 천국.
제자들과 제자들의 그 구성을 제자들의 커뮤니티, 제자들의 단체, 요새는 노회? 뭐 총회.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이것은 천국이 아니고 뭐가 되냐하면 사회가 되버립니다. 제자들이 모였는데 이게 천국이 되더라 여기는 필히 뭐가 들어가야되냐면 예수님 + 아버지, 플러스 하면 안됩니다.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성이 여기에 함유될때, 이것은 사회라고 불러선 안되고 이것은 천국이라고 불러야되요. 신앙공동체라 부르면 안되요. 공동체란 말 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천국입니다.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뭐가 들어가냐하면은 그동안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받을때 누가 투입했냐하면은 바로 성령께서 투입했죠.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우리 오늘 본문 24절 이전에 쭉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하면은 성령이 예수님과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 처럼 너희도 이 안에 넣어준다. 그 이야기가 이 이야기예요. 그 이야기가. 성령이 들어가는 겁니다. 성령이 들어가버리면 이것은 사회가 아니고 이것은 천국이 되는 겁니다.
로마서 14장에 나오지요. 하나님의 나라는? 뭐 안에서? 성령안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성령안에 있으면 그것은 사회가 아니고, 그게 곧 그곳이 천국이예요. 그게 천국이라 이말이죠.
그래서 천국과 사회의 차이점이 무엇이냐하면은 이것은 예수님이, 예수님이 성령과 함께 있었지요.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있었잖아요.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이걸 뭐라했습니까? 처소라 했잖아요. 처소.
처소라 했는데,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기전까지는 하나님 아버지는 안보이고 뭐가 보입니까? 예수님과 더불어 있는 자기들, 예수님과 더불어 있는 자기. 이게 인간들의 아이디어의 한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괜찮은 사회 만들려고, 사회를 구성할수 있다라는 겁니다. 사회가 바로 유대국가가 되고 이것이 오늘날 흔히 말하는 교회입니다 교회.
유다국가 또는 교회, 천국. 이 천국과 유다국가 교회 이 둘 사이에 차이점이 뭐냐하면은, 유대국가와 교회는 인간들이 생각하기를 인간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여기는 뭐가 생기냐하면은 걱정과 염려가 떠날새가 없습니다.
'이것 깨지면 어떻게 되느냐. 삐져서 다 흩어지고, 교인들 한 100명 왔는데 다 삐져서 흩어지면 교회없잖아.' 자꾸 염려 걱정이 생기는 거예요. 염려 걱정이. 이게 왜 그러냐하면 이게 미완료이기 때문에. 미완료. 미완료이기때문에 여기는 어떤 기대를 갖고 있고, 현재 미완료인데 나중에 뭐 어떻게 되겠지라고 그 간격, 그 결핍된 그 만큼 걱정과 염려로 이렇게 나타나는 겁니다.
우리교회가 한 100명 되는데 200명은 언제되나? 그러면 200명과 100명 사이는 뭐가 되겠어요? 염려 걱정이 있겠죠. 그럼 염려 걱정은 무엇으로 채우겠어요? 그냥 기도 되지만 기도빨, 기도빨로 채우는 거지요. 기도빨로 채우는 거예요.
그 기도한다는 자체가 뭐를 지금 뿜어내고 있습니까? '걱정스러워 죽겠다.' 그것을 뿜어내고 있는거예요. 걱정, 근심은 어디서 나오느냐하면, 이게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두려움. 두려움은 어디서 나오는가? 이것은 불만족에서 와요. 불만족은 어디서 오는가? '복수할거야.'
목사가 교회를 세운다? 어떤 의미냐? 마지막이 어떤 의미입니까? 복수할꺼야! 점하나 붙이고. 복수할거야! 왜? 너희들이 내 가치를 무시했잖아. 우리 집안사람끼리. 내가 목사해가지고 얼마나 대단한 가치있는 존재인가를 내가 보여주리라 이 복수심, 분노 같은게 있어요. 이 분노가 결국 뭘로 나오는가? 기도빨로 나오는 겁니다. 분노가 기도빨로.
이런 경우는 내가 여기 포함되어 있으니까 나 중심의, 내 중심의 커뮤니티, 자기 팬클럽이죠. 서태지와 아이들 그런것처럼. 자기 중심의 자기 말 잘듣는 그러한 기업 또는 이런 회사, 그런 개념의 교회를 상정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테두리가 생기죠. 테두리가.
이 기도되기 위해서는 이런 사람들을 모집할 필요가 있어요. 그럼 이 사람들에게 뭘 모집하냐 하면은, 아까도 강의 했지만 이 교회를 뭐로 운영하냐하면은 이렇게 운영합니다. 교습소.
천국에 갈 필요한 테크닉을 알려줄테니까 적절한 커미션을 내시기 바랍니다. 교습소를 세우는 거예요. 그러면 이 교습소를 할 수 있는 이유가 뭐냐하면은 내가 천국간다는 것은 걱정,근심 이런게 아직 안갔다고 생각하시니까 어떻게 되요? 기대되겠죠. 죽어서 좋은데 가야되니까. 나처럼 생각할꺼다. 나처럼이 반복되요. 나처럼 곱하기 10의 25승. 나처럼,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생각할때 이런 걱정과 기대감이 있다면 나처럼 생각하는거를 끌어모으는 거예요. 끌어모으고, 내가 생각하는 천국 만들기를 성경에 있는 내용가지고 이렇게 조립하게 되면, 이 교회라는 사회단체 공동체죠. 커뮤니티, 공동체가 생기고, 공동체가 생기면 여기에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이런게 있어요. 서로 나누고 이런게 있거든요. 그러면 서로 나누고 흉내내면 되요. 서로 나누고 서로 내것이라 하지 않고, 그런거 마음껏 집어 넣으면 되는 거예요.
거기에다가 나의 요소 예배있고, 교육있고, 선교있고, 또 뭐 찬양있고 이런게 있죠. 그런요소를 내 요소를 다 집어넣는 겁니다. 그러면 대외적으로 뭐라고 합니까? '봐라 우리교회같이 성경대로~! 성경대로 이렇게 완벽하게, 오직 only 성경, 오직 성경만을 외치는 교회가 어디있겠느냐?!' 가장 전통적인 교회라고 대외적으로 이 교습소를 선전할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뭐냐하면, 바로 이게 12제자들의 선입견이예요. 12제자들. 괜찮은 스타! 예수님이죠. 슈퍼스타 아닙니까. 그 슈퍼스타! 슈퍼스타하니까 뮤지컬 생각난다. I Don't Know How To Love Him~ 뭐 그런게 있어요. 막달라마리아가 예수님 노래부른거 있어여.
그 슈퍼스타 되는 그 분이 못하는게 없거든. 물위를 걷고, 병을 고치고, 물고기 아가리 벌리니까 거기서 돈이 나오고, 무슨 마술이 그런 마술이. 죽은 자도 살리고. 이런 스타 있으니까 그 스타와 자기가 연합체를 만들게 되면 이건 뭐 세상에 이런 행운이 없다고 본거예요.
그래서 이미 연합체로 있으니까 이미 이 자체를 하나의 커뮤니티, 12지파의 유다의 사회를 대체할 진짜 마지막때의 교회, 12지파를 가진 교회다. 교회의 시작이다. 이렇게 장담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걱정할것은 남아있는게 뭐냐하면은 '그 천국가면은 누가 더 높으냐? 그런거만 걱정하면 되겠다 다른걱정은 하지마' 하면 안되요. '천국에서는 누가 더 높으냐?' 자기는 따놓은 당상이라 보는 겁니다.
그들의 아이디어에 뭐가 빠져 있냐하면은 십자가가 빠져버렸습니다. 그 슈퍼스타가, 슈퍼스타가 죽어버리면 이건 알멩이가 빠진거예요. 알멩이가.
만약에 예를 들면 문재인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감 나오다가 이제 거의 다 당선된걸로 여겼는데 갑자기 그럴일은 없겠지만 '나 대통령 안할래.' 이렇게 되버리면 그 추종자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 닭 쫓던 개 되죠. ‘사퇴는 니 맘대로 못한다.’ 이렇게 나오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예요. 예수님이 죽는다는 이야기는 그동안 바쳤던 모든 3년의 청춘세월을 다 날린겁니다. 얼마나 복수심이 많았으면 가롯유다가 차마 자기 손으로 못 죽이고, 간접적인 남의 손을 빌려서 예수님을 제거했겠습니까.
내 청춘돌리도 이말이지요. 당신에게 바친 사랑, 사랑이 기껏 이런 배신감으로 돌아올 때, 우리에게 남은것은 '복수할거야' 뭐 이것뿐이 더 있겠어요. 결국 12제자가 예수님을 떠났고, 가롯유다가 팔아먹었다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냐하면은 인간의 사회만들기의 한계성을 이야기 하고, 동시에 그러한 예수님 죽이는데 직접적인 처벌세력은 뭐냐하면 유대주의 입니다. 유대국가주의예요. 유대국가주의.
국가라 하는것은 뭐냐하면 개인이 모여서 단체로 모인게 국가잖아요. 그렇죠? 개인이 모여서 단체가 되죠. 개인이 모여서 단체가 되어버리면 여러분 생각에는 이것은 여러분 안다치고 알죠 뭐 한 두번 들은거 다 안다치고
개인과 사회 또는, 개인과 국가 관계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억압을 하게되면 사람들은 반발해서 국가 권력과 조화를 이루고 조화를 이루다가 다시 어떤 통치자 전체주의, 전제주의, 또 뭐 독재자 등장해서, 독재자가 등장해서 억압을 해버리면 다시 이들은 반발하고 이렇게 된다고 보통 생각하거든요.
지금 그 정치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이나 역사학자들은 이런사람들이 국가와 사회관계는 조화롭게 해야지 억압을 해버리면 반발이 일어나가지고 독재자 물러가고 그 다음에 또 다시 민중중심, 또는 백성중심으로 돌아온다. 뭐 이렇게 하는 겁니다.
얼마전에 끝난 군주란 MBC 드라마 있었잖아요. 군주가 해야 될 덕목은 뭐냐?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이것은 불교국가인 고려시대가 끝나고 조선시대가 되면서 조선시대의 건국이념이예요.
조선시대는 귀족중심이지 왕 중심이 아니예요. 백성을 우선 살피는 그것이 유교정치의 절정입니다. 그것을 이제 경국대전 만들어 가지고 법적으로 해가지고 이룰려고 했지요. 그런데 사실은요, 이게 이런 생각이 너무나 잘못된 생각이예요.
왜냐하면은 백성위주로, 백성위주로 사회가 국가가 구성되는것이 아니고 상호의존적입니다. 상호의존적이예요. 이게 무슨뜻이냐하면은 억압을 했으니까 답답해서 너무 못살겠다 하는데, 국가는 그렇게 성립되는게 아니예요.
백성을 억압을 해서 억압한 독재자가 죽으면 사람들은 환호성을 울리고, 드디어 우리는 해방이다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일시적은 그래요. 하지만 그 다음에 어떤 지도자가 나와도 이 백성들은 국민들은 어떤 감각이 드느냐 하면은 '그때가 좋았다.'
그 보통 옛날의 이야기이지만 여자하고 명태는 3일마다 패야된다. 맞아본놈이 사랑을 알아요. 안때리면 무관심입니다. 줘팰때 이게 사랑이라~ 이게 습관화 되거든요. 습관화 되요.
좋게하는 지도자는 이거는 허풍성이예요. 아무일도 없어요. 야무지게 밟아줄때, 그 밟히는 쾌감이 있어요. 인간은 메조키스트(masochist). 밟히는 쾌감이 있다구요.
민주적으로 목회한다? 교회 꼬라지 안됩니다. 밟아야 되요. 그것도 그냥 밟으면 안되고 줘밟아야되요. 철판 한 열댓장 깔고 줘밟아버려야되요. 그래야 교회가 부흥이 되요. 그 부목사들 그 계약직들, 그들은 모가지 다 날려버려야되요. 모가지 다 날려버려야되요.
고대하고 있어요. 인간은, 신적인 인간의 존재를 고대하고 있다니까요 인간은. 왜냐하면 인간은 의존적이거든요. 상호의존적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의존적이예요. 기댈곳이 있으면 아낌없이 드립니다. 인간은.. 아낌없이..기댈곳이 있으면.
그리고 그 기댈곳이 있으면 아낌없이 드리는데 그게 왜 그런현상이 일어나느냐? 인간내부에 법이 있고, 내가 아는 이 법을 뛰어넘은 이걸 초법이라하는데 이 초법적 존재가 이것을 어려운말로 예외적이라하는데, 법을 안지켜도 되는. 예외적 존재가 있음으로서 우리는 이 법에 비로서 내용과 의미가 발생되게 되어있어요.
왜냐하면 법을 지킬때는 반드시 '보세요~' 하고 누가 보란듯이 법을 지키게 되어 있어요. 누가 보란듯이. 누가 보란듯이.
사람들이 흔히 민주주의라 해가지고 내 맘대로 하면 그게 행복한줄 생각하는데 아니예요. 여러분 소풍갈때 담임선생님 아파가지고 다른반 애들은 담임선생님 다 있는데, 2학년3반은 담임선생님 없을때 걔들이 얼마나 소풍가서 서러워 하는지 압니까? 우리 쌤은? 우리쌤은? 우리 쌤이 없다는 거예요. 대표이사 없으면 회사 안돌아 갑니다. 우리 오야붕, 오야붕.
이게 뭐냐하면 인간은 행동하면서, 이 행동할때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법에 맞추어서 행동해요. 법에 맞추어서 행동하는데 이 법은 누가 지켜보는 자가 있을경우에만 법의 의미가 발생된다니까요.
왜그러냐하면 그래야 이 법을 자기가 초월적인 의지하는 그분의 눈과 마주칠때, 여기서 뭐가 생기냐하면은 나만의 자기 의가 발생되요. 자기 의. '나 잘했지롱~나 잘했지롱.' 어릴때부터 인간은 그렇게 양육받았어요. 부모가 그렇게 했어요. 애들이 혼자해놓고 반드시 검사맡아요. '엄마, 나 잘했지?'라고 하거든요. 그것이 어른되도 마찬가지, 똑같은 그 성격 어디갑니까? 똑같아요.
이것 자기 의는 뭐냐하면 자기만의 의예요. 그래서 이것은 상호의존적이예요. 내가 정말 의란말이 뭐냐하면 내가 존재할 가치가 있다. 더 오래 살아야할 당당함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신이시여 나를 죽이면 안되! 나는 워낙 가치있는 존재이니까.' 그것을 최종목적으로 하기때문에 이 목적을 위해서 보조적인 장치로 뭐냐하면, 이것을 응원하고 독려하고 박수쳐주고 격려하고 칭찬해주고 사랑해주고 이런 초월적인 존재가 이렇게 있어야되요.
그럴 때 이것이 이 단체가 커뮤니티가 안전성을 원한다니까요. 안전성을. '목사님 시켜만 주세요. 시키는 데로 다 할테니까. 이뻐해줘요.' 이거예요. 하여튼 뭐 사랑 못 받아서 한맺힌 사람들... 이뻐해달라는 거예요. 시키는 데로 다 할테니까. 하여튼 지시만하면 그대로 할테니까. 상호의존적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외부적으로 보게되면 너무 교인들이 목사한테 엎어지고 자빠지고 교주도 아니고, 교주보다 더 하지요 사실은 뭐 그냥 뭐 ‘주의 사자님! 사자님!!’ 해가면서 엎어지지만 사실은 그건 하나의 우회적인 방식이예요.
만약에 내가 이렇게 이뻐하는데 나보다 일주일뒤에 온 교인이 목사의 관심사가 말한마디해도 '괜찮네~' 이렇게 해버리면 삐져버려요. '나 다른교회간다.' 삐져버려요. 왜? 진리문제가 아닙니다. 교회는 진리문제가 아닙니다. 나만 사랑받기원하는 그 문제이지. 그것때문에 교회다니지, 진리와 주님께 영광돌리기 위해서 가는게 아니예요. 내가 어디서 이 평생 사랑받겠어요? 교회와서 사랑받지.
이게바로 제자들이 예수님께 요구했던 바 입니다. 요구했던 바. 쉽게말해서 '예수님 저희들과 함께 있어요. 떠나지 말고'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끝에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버리고 어떻게 됩니까? 떠나요. 떠나니까 그 베드로가 어떻게 되요? 아주 끈질기죠. '주님 어디를 가시든지 제가 따라 가겠나이다. 목숨 내 놓고 가겠나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못온다는 겁니다. 너는 올수 없는 곳이다. 그러면 진작에 이야기 하지. 3년동안 다 빼먹지 말고, 이용다 해 먹고, 이용하지 말고, 진작에 이야기 하지, 진작 이야기했음 안갔지.
그게 베드로가 뭘 오해했냐면 그림자라 하는 것은 그림자가 몸을 움직일수 없어요. 그림자가 움직인다고 몸이 따라 움직이지 않아요. 이것은 앞뒤가 바뀐겁니다. 몸이 움직이면 그림자는 움직이기 싫어도 움직여야되요. 제자들은 주님의 그림자 역할 하라고 제자 삼은 거예요.
자신의 개인적인 야망, 사랑받기, 구원, 천당가기 이것 때문에 예수님 계신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이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림자 한겁니다. 이것은 떨어질수가 없죠. 그림자 가위가지고 그림자 한번 잘라 볼까요? 물론 희미한 경우도 있어요. 왜? 구름 끼어가지고...몸을 가리면 그림자가 사라지죠.
자기가 그림자가 아니란 말은 ‘나도 단독적인 딴 몸이야.’ 가기 중심성으로 되돌아 오겠죠. 그러면 '예수님이 그렇게 좋아? 나는 관심사는 나에게 있어.' 이렇게 바뀌겠죠. 베드로가 예수님을 끝까지 붙들고 가는 이것이 이것은 충성심도 아니고 순종도 아니고 순종처럼 보이고 충성으로 보이지만 예수님의 본래의 계획을 전혀 몰라서 그런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계획은 뭐냐? 예수님은 홀로 있는게 아니예요. 누구와? 아버지와 함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제자들이 예수님만 보면서 아버지를 예수님과 함께 있는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들이 속했던 사회, 아까 사회란 말 배웠죠? 사회란건 뭐다? 인간이 인간들로 서로 상호의존적으로 구성한 커뮤니티가 사회죠. 그 사회에서는 이미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님이라고 이미 확정된 상태에요. 이 여호와하나님이.
그래서 예수님이 아들이라하니까 그들이 아는 여호와하나님과 아들 이렇게 연결시키는 겁니다. 아버지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는데, 그들은 주제넘게 착각을 해가지고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자기들이 알고 있다고 지금 우기고 있는거예요.
이거는 원천적인, 근원적인 문제예요. 여기서 나오는 오해가 뭐냐하면 삼위일체라는 겁니다. 삼위일체. 삼위일체가 복음입니까? 삼위일체 알아서 천당 간 사람 한사람도 없어요. 난 장담해 손에 장을 지질께 내. 삼위일체 알아서 천당 간 사람 아무도 없어요.
삼위일체는 버려야되요. 삼위일체가 바로 복음을 가려버린다니까요. 삼위일체라고 이렇게 언급할때 그 안에 뭐가 밑에 깔려있느냐 하면은 익히 형식이라는 것,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형식은 알고, 그 형식에다가 그 다음에 성경을 통해서 내가 아는 내용을 마저 채우면 온전한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이야 누구나 알죠. 창조주, 조물주 뭐 다 알지요. 그런데 형식은 아는데 내용은 몰랐는데 성경이란게 있어가지고 성경가지고 이 내용을 채우면 형식은 맞고 내용이 부실한데 이 부실한 것을 성경으로 채워버리면 온전한 이것이 진짜 하나님 맞다. 라고 생각한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방인들이 아는 하나님이 그게 하나님일까요? 우상일까요? 우상이죠. 이방인들은요 여호와 하나님 뭘 붙여도 그건 우상되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실제로 그들이 역사속에서 고난속에서 체험한 하나님이지만, 이방은들은 사고체계, 인간이 나올수 있는 모든 이성적인 지혜에서 나오는 그런 신이라니까요.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잖아요. 실제로 체험한 것은 유대인, 그래서 유대인들은 뭘 원하고? 기적을 원하고. 헬라인들은 이방은들은 뭘 원하고? 지혜를 원하나 십자가는 둘다가 아니라는 거예요. 기적도 아니고, 지혜도 아니고. 그럼 뭐냐? 모른다죠! 십자가 보고 몰라요. 인간의 힘으로 십자가를 알수 있다면 성령이 오시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오지 않더라도 안다는 것은 100% 그건 이단이예요.
'몰랐는데 성령때문에 알았다' 이렇게 되야되요. 몰랐는데. 그럼 우린 그 사람에게 물어보죠.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뭘 몰랐는데?’ '그냥 겸손해서 한 말인데..' '뭘 몰랐는데?' 그러면 이렇게 해야해요. '난 성경도 모르고, 난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도 모르고,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나와야 되요.
어제 대구강의 할때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대구강의할때 영어하나 썼어요. Trash = 쓰레기란 뜻이예요. 사람들은 이방인들은 하나님이라 하는것을 조물주라 해놓고 동그라미 쳐놓고 안의 내용을 자기가 뭘 채우느냐 하면은, 자기가 납득이 되는 것을 집어넣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쓰레기통이라 해요. 쓰레기통.
나는 아이가 공부잘했으면 좋겠다.' 툭 던져 넣고, '주여, 내가 믿는 하나님은 기도하면 애들 공부 잘하게 하는 하나님이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사업이 잘됐으면 좋겠다.' 던져넣고. 자기의 쓰레기 같은 욕망에서 나온 쓰레기의 일부를 던져넣고, 그런것도 채워넣고 이게바로 참 좋으신~ 참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이게 뭐냐하면 쓰레기통이예요. 쓰레기통! 이게 쓰레기통이라니까요.
본인이 쓰레기니까 본인이 믿는 하나님도 쓰레기통이라는 거예요. 이 쓰레기통의 특징은 뭐냐하면 반드시 복음을 죽인다는 거예요. 이 쓰레기의 내용은 뭐냐? 하나하나 쓰레기 다 끄집어 내면 뭐냐하면 '내가 주인이다, 내가 주인공이다. 내가 소중하다. 나는 나 밖에 모른다.' 이런걸 담아서 여기다 쓰레기 다 집어 넣었어요.
'이 세상에 나를 가장 걱정해주는건 나 말고 누가 있을까?' 이거거든요. 내가 지옥가면 누가 격려해줍니까? 예? 목사님 내가 지옥간다. 누가 나를 격려해줘요? 힘내라! 힘! 여러분~! 누가 나를 위로해주죠? 누가? 누가 나를 위로해줍니까? 누가 나를 위로해줘요?
내가위로해줘요. 내가! 내가 위로해줘요. 친구 가족 필요없어요. 나 말고 나를 마지막까지 나에게 힘을 불어넣어주고 힘내라 힘! 할 사람은 나 밖에 없어요. 그 인간이 교회간다고 달라져요? 쓰레기가 쓰레기에 모여있는거. 쓰레기가 쓰레기 모인곳에. 뭘 달라집니까? 영어로 하면 Trash 쓰레기, 쓰레기통이에요.
진짜 교회는 여기 뭐 있느냐. 여기에 십자가 있어요. 십자가. 십자가 들어있으면 십자가를 믿으라 하면 안되고, 이렇게 질문해야되요. '주님이 왜 죽었습니까? 왜 죽어야되죠?' '너 때문에 죽었잖아.' 사도행전 2장에 나오죠.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제가 어때서요?' '이제부터 한번 시작해볼까? 뭐 때문에 죽어야 되는지 한번 시작해봐?' 그래서 사도를 보내가지고 말씀과 교훈을 준거예요.
다시한번 정리해봅시다. 인간에게는 뭐가 있다? 법이 있는데, 인간에게는 법이 있어요. 법은 반드시 의식하는 사람, 법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게 없으면 안지켜요. 거기 지켜보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 법을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법을 지키면 거기에 대한 보상이 있다고 생각하게되요. 보상.
지킨만큼 보상이 있는거예요. 그런데 인간에게 이런 법을 준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요. 아무도 이 법을 준 사람이 없어요. 그걸 흔히 양심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배운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 양심은 다 있거든요. 그런데 양심을 누가 줬어요? 양심을 준 사람은 없어요. 그냥 태어날때부터 그냥 허락도 없이 이미 우리안에 딱 핵심부분에 중핵이라고 하는데 중핵, 가장 중심되는 핵심부분에 자리잡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법에 최종적인, 우리가 보통 진리라 하잖아요. 그러면 인간은 그 진리를 자기가 이 법이 진리예요. 진리라는 것은 최종적인 법의 완성. 자 이것지키면 더이상 다 지킨거야. 더 지킬것 없어 라는 최종적인 것은 그걸 누가 채우는가 하면은 본인이 책임지고 채워요.
참 재미있죠? 법이 있는데 그 법을 가지고 진리를 찾아가는데 그 찾아가는 그 수고를 누가 하냐하면은 본인이 한다구요. 자 이렇게 지키면 나한테 아~착하다는 소리를 듣겠습니까? 한번 지켜본다고요. 지켜보는데 어떤 상황이 주어지게 되면 내가 지킨 그 법에 의가 그 상황에서 나한테 유리하게 작용해야하는데, 예를 들어 고아원에 가서 사랑을 줬는데 그 주간에 어떤 계약이 있다 계약, 어떤 유명한 계약이 있는데 이만큼 착한일했으면 계약이 성사되어야 할텐데 계약이 다 됐는데 그만 여기서 보이콧했단 말이죠.
그러면 뭐하고 균형이 안맞죠? 나는 고아원에서 착한일 했는데 착한일 했으면 반드시 그냥 착한일 하지 않고 인간은 뭘 기대한다? 보상을 기대하죠. 왜? 보상될때 그걸 진리라고 보기때문에. 보상될 때. 보상이 될때 진리라고 주장하는데 착한일할때마다 그때 그때마다 만족스러운 보상이 안오더라 이말이죠.
교회 처음 다니면서 십일조 안하다가 억지로 했는데, 이상하게 십일조를 5만원냈는데 그 주간에 50만원, 아니 50만원아니지 30배니까 150만원 윗돈이 들어왔다하면 갑자기 무슨생각들어요? 계산 빨리하는거예요. 자 30배, 60배, 100배 복을 받는다 했으니까 5곱하기 30 됐구나. 그럼 그 다음주 얼마를하냐? 그냥 10만원 해보는거예요. 어차피 돈놓고 돈먹기거든요. 산에 가야 범을 잡고, 밑천을 타야 이게 돈이 나오지. 그냥 안되잖아요. 콜~콜!!이게 되야된다 이말이죠.
돈 없으면 뭘로 때운다? 원래 그 벌금없는 사람은 뭘로 때웁니까? 노력하잖아요. 노력이 교회에 봉사로 하는거예요. 돈이 없으니까 교회에 봉사하고 와서 닦고, '주여 지금 다 보고있죠?' 블랙박스 있잖아요, 블랙박스. 지금CCTV 다 보고있는거예요.
힐끔힐끔 보면서 '주여~주여' 그것도 안되면 새벽기도 나와가지고, 제일 먼저 나와가지고, 또 제일먼저 나와가지고 퇴근은 새벽기도 퇴근은 목사님보다 더 늦게 퇴근해가지고, 목사님은 애먹고 지금. 목사님 아침 드라마도 못보고 지금.
그렇게 해서 합당한 그 계산이요, 내가 예상한 수치가 양적으로 맞아 떨어져야 나는 지금 정상적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 확인될게 아니냐 이말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한두번 통하는데 그 다음부터는 안되요. 철야하니까 한 두번할때는 방언 터졌는데, 한 서너번 하니까 방언도 전에 알던 방언, 이건 완전히 녹음기 틀어놓은거 같아가지고 새 방언이 안나오네. 그럼 전에하던 방언이 맞았는지 확인할길이 없어요.
첨에 교회나온다고 안수했는데 갑자기 안수했는데 안수한 사람이 병이 나았다 이말이죠. 감기할때 안수해가지고 병이 나으니까 계산해보는거예요. 계산, 빨리 계산해봐요. 감기걸릴때 손 얹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삼계탕에다가 아니면 아까 그 약 이름 뭡니까? 타이레놀 먹는거하고, 주사맞는거하고 계산해보는거예요. 이게 훨씬 낫단말이죠.
그 다음부터 자기는 됐으니까, 애까지 다 '엄마가, 엄마가 주의 성령받았거든' 다 해보는데 안 나아. 괜히 시기 놓쳐가지고 이게 폐렴으로 빠질수가 있어요. 그렇게 될때 인간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쓰레기통을 다른방식으로 시도해보겠지요.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냐하면은 대리보충 이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형식을 자기가 아는 내용으로 계속 테스트 해보는 거예요. 계속 테스트 해보는 거예요. 왜 테스트 하느냐하면은 내가 지금 정상적인 길을 가고 있는지 아니가고 있는지 테스트 하는겁니다. 그럼 테스트 할때마다 본인은 믿음이 있는거예요? 없는거예요?
완전히 없는거 들통 다 났지요. 왜? 불안하니까. 근심과 걱정이 있지요. 근심과 걱정이 뭐로 나온다고 했습니까? 기도빨로 나오죠. 교회와서 큰소리로 이렇게 하고, 기도하게 되면 한이 많이 맺힌거고, 건성건성하게 되면 별 아쉬움 없는 사람이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만약에 기도가 좀 소홀하다, 안한다 싶으면 목사가 대리보충을 하기위해서 목표를 높여버리는 겁니다. 목표를 높여버려요. 목표를 높이면 목표를 높인만큼 뭐가 생기겠어요? 간격이 생기죠. 간격이. 그 간격만큼 새롭게 돈과 기도빨을 모을수 있는 하나의 유인책이 되는겁니다. 유인책.
어차피 교회는 뭐냐하면 천국이 아니고 뭐다? 사회예요 사회. 너하고 나하고 다 납득되는 끈으로 묶으면 그게 교회라는 겁니다. 그래서 커미션 나오면 돈 생기고, 교인들한테는 내가 하나님이 함께 있는 교회에 있다라는 그 안도감, 그것이 오늘 죽어도 오늘밤 죽어도 천국갈수 있다는 그 자신감으로 이어질수 있는 어떤 공감대를 형성할려고 무던히 뭘한다? 대리보충을 하는거예요.
대리보충하기위해서 목사들은 유명한 강사, 그 은혜받은 간증 강사들 해가지고, '난 이렇게 했더니만 이런 효과봤습니다.' 하면 사람들이 우르르 대리보충 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 오늘 요한복음에 주께서 한 취지가 뭐냐하면 근원적인 것 부터 처음부터 다시봐야되요. 뭐냐하면 인간쪽에서 저 주님의 나라 또는 하나님의 나라를 간격을 인간쪽에서 이렇게 설정하면 안됩니다. 이러면 안되요. 이건 처음부터 이건 하나님의 일이 아니예요.
창세기 3장에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간격은 누가오느냐하면 하나님쪽에서 간격을 조성해줘되요. 그 대표적인것이 아기예수로 태어난거예요. 예수님께서. 아기예수 태어날때 동방박사하고 아기예수하고 간격이 있었습니까?
무슨말이냐하면, 여러분들 그 작은권리 라는 책 혹시 보신적 있으십니까? 그 첫번에 나온건데, 동방박사한테 별이 온거예요? 아니면 동방박사가 별에 딸려온겁니까? 별따라 누가 갔어요? 동방박사가 갔지요. 근데 사람들은 별이 이 지상에 왔다 했잖아요. 별이 지상에 와버리면 지구가 중심이 되어버려요. 별은 중심에 온 셈이 되고.
그러나 그것이 아니고 원래 중심은 뭐냐하면 주님계신 곳이 중심이였어요. 주님이 중심이고 동방박사는 그 변두리에 있던 동방박사가 중심에 당겨져 오는 거예요. 당겨져 오는거예요.
아기예수가 베들레헴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아기예수가 베들레헴에 태어난 그 주소가 팔공로 91, 10-11이라고 합시다. 그럼 팔공로 10-12는 가까워요? 멀어요? 바로옆이니까 가깝죠? 그럼 가까운 사람 구원받았습니까? 아니지요. 아니죠.
그 근처 목자가 이렇게 와서 봤지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의 공간적인 의미의 간격이라 하는것은 바로 옆에 지리적으로 바로 옆에 있으면 더 가깝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중점이 되어있으면 아무리 폴짝 뛰어도 도달할수 없는 다른 공간, 다른 영역이 따로 마련되는 겁니다.
그것이 아기예수가 이렇게 오니까 남들 보기에는 그냥 아기예요. 그냥 그 부모예요. 언제든지 손대면 만질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제자들과 민중들과 대중들은 예수님을 뒤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뒤에서 떠밀고 난리났어요. 서태지와 아이들은 유도 아닙니다. 아주 팬들이 많아요. 귀신도 쫓아내고 자기들이 원하는데 해주니까.
그런데 그 중에서 딱 한사람 접촉한 사람 딱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12년동안 혈루병에 걸린 그 여자. 그렇게 미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누가 믿었냐고 하니까, 믿는 사람 한둘이 아닌데요. 누구 이야기 합니까? 딱 한사람 있었어요. 딱 한사람. 이것은 인위적으로 주님을 주물럭 거린다고 해서 예수 믿는게 아니예요. 보면 믿겠다 하는거 그거 거짓말입니다. 믿을수가 없어요. 믿을수가 없습니다.
간격을 주님 쪽에서 주님 찾아온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예수님과 아버지가 이 세상의 중심이고 그리고 다른 자기의 택한 백성은 어떤자리에 있든지 지옥에 있든지 북한에 있든지 상관없어요. 어떤자리에 있든 북한에서 남한으로 오는게 아니고, 가봐야 또 바깥에 올라가서 방송할거니까, 북한에서 남한으로 오는게 신앙생활이 아니라 어디있든지 상관없이 바로 그리스도에게 오는게,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쫙 땡기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그 땡기려면 그 간격에서 주님이 잡아당기는 그 간격에서 어떤 간격을 우리가 폐기처분 하든지 어떻게 이걸 부정해야됩니까? 바로 내가 누굴 간다? 주님을 상상하면서 해놓고, 내 쪽에서 가고자 하는 모든 시도, 모든 행함을 내가 뭐로 봐야되요? 십자가 앞에서 이걸 부정해야되죠. 부정해야되죠.
부정한다고 우리 안할사람 아니죠. 그러면 하시되 하고 난뒤에 사고적으로 일이 끝나고 난뒤에 수급해서 계속 부정하면 되는 겁니다. 수급해서. 십자가 + 행함이 아니고, 십자가로 인하여 행함이 계속 가위표시, 또 생긴 행함을 또 가위표치고, 또 생긴 행함을 가위표 치는 것. 왜냐하면 이 행함은 내 쪽에서 주님쪽으로 다가가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 쪽에서.
이 시도는 우리가 하지 맙시다 이말은 터무니 없는 거예요. 하지맙시다라는 말은 우리한테 성립이 안되요. 우리는 타고났어요. 우리는 자기의 의를, 자기 솜씨를 자랑질하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입니다.
뭔가 걱정거리 있으면 그 걱정거리를 내 손으로 내 경건으로 내 거룩으로 이 걱정거리를 해소시킬려고 우리는 덤벼들수 밖에 없는 그런 속성을 이땅에 가지고 태어났어요. 이미 이런 종교적인 것은 말릴수가 없습니다. 그게 나쁘다고 해서 안할 우리들이 아니예요.
그러니까 하시라 이말이죠. 하시되 그렇게 땡긴 십자가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하는 행동이, 주님의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한 주님의 속한 하나의 일환이예요 그게. 그것이 나의 일이 아니고 그런 어설픈 짓을 하는 것 조차도 주의 일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설픈 12제자, 말도 안되는 12제자를 그렇게 뽑은 거예요. 그리고 그 뽑은 제자를 내치는것이 아니고, 그들을 사도로 세운겁니다. 못났기 때문에 못났놈~이순재 하지 않습니까. 못났기 때문에! 못났기 때문에. 그 못난 재미로 사는 거예요. 그들이, 사도가. 얼마나 못났으면 자기 것 안챙기겠습니까. 자기것을 용납하지 않죠.
늦게 오신분들 있어가지고 한번 정리하고 10분 쉽시다. 여러분 다 기억나길 바랍니다. 처소하는데 두가지 양식있다 했습니다. 하나는 인간들의 처소, 인간들의 처소는 인간과 인간들의 집합체가 뭐다? 하나의 사회를 이룬다. 연대감을 이루는 거예요. 인간대 인간. 이것은 뭐로 보여준다? 바로 유대국가로서 충분히 제자들도 보여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처소에서 무슨 개념이 나오느냐? 천국개념이 나오죠. 천국개념은 인간대 인간이 아니라 여기 반드시 예수님의 아버지가 개입되요. 예수님의 아버지가 왜 개입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아버지하고 이미 처소를 하나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사람들은 눈에는 예수님만 보이고 뭐는 안보인다? 아버지가 안보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과 아버지의 이 처소에 대해서 인간들은 모르는 거예요. 12제자들도 모르니까 기껏 한다는 것이 인간들과 인간들의 단합체. 이것이 바로 교회를 대신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이제 성령이 오게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10분쉬고 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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