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이전지역강의포함)

가락강의-성령의 보편성 17071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8. 12. 08:27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3SB7iKuhnDI"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navaDJH4Yk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홍민희 (IP:210.♡.246.108)17-07-20 15:28 
가락-요한복음 14장 24절(성령의 보편성)170718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4장 23절, 23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할것이요' 라고 예수님께서 누구를 이렇게 끌어당겼냐하면 아버지를 끌어당겼죠. 아버지를 끌어당기게 되면 그 결과가 뭐냐하면 바로 거처가 생기는 겁니다. 이 거처는 예수님과 사람 사이에 있다고 해서 마련되는 거처가 아니고,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가 여기 개입을 해줘야되요. 아버지가 개입해야되요. 



왜그러냐하면 그 거처라는 것이 어떤 거처냐 하면은 그냥 사람대 사람처럼 우리처럼 모이면 되는데,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함께 있는 거처는 그 제자들이 함께 예수님과 아버지하고 함께 있어도 제자들은 눈에 안보였습니다. 그 눈에 안보이는 그 거처를 이야기하는거예요. 



제자들은 뭘 생각하냐 하면은 예수님 여기있고 자기 여기 있으니까 이걸로 거처가 얼추 된게 아니냐. 주님이 함께 있으니까. 주님과 함께 있고, 자기가 주님과 함께 있으니까 눈에 보이는 사람들 이렇게 있으니까 이게 바로 주께서 원하는 거처라 생각했는데, 여기에 예수님은 아버지를 도입해버립니다. 



아버지를 도입해버리면 그 거처가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거처가 아니예요. 예수님이 혼자 있더라도 주님은 그것을 거처라 봤고, 사람들 보기에는 예수님이 혼자라고 보고.. 이것은 어떤 차이가 있냐하면 바로 아버지와 함께 있는 방식,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있는 방식에 대해서 인간들이 어둡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몰라서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기서 거처라고 이야기 하는것은 너 하고 나 하고의 거처가 아니라, 아버지도 합세할수 있도록 그렇게 구성되어 있는 거처를 이제는 너희들이 그 거처에 있는다.그 거처에. 




그러면 그 거처에 있게되면 제자들은 어떤 효과를 받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혼자있어도 아버지와 함께 있는 그 거처말이죠. 그걸 이제는 예수님께에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고, 이제 제자들에게 확대가 되요. 그래서 제자들이 로마에 가든, 사도바울이 어떤 고난을 받든, 아버지와 함께 있고 예수님과 함께 있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그 상태가 되는 겁니다. 




이러한 상태는 사실은 그 다니엘에 보면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에 보면 분명히 그 유황불, 유황불이 아니고 그 고로 속에 맹렬히 풀무불 속에 분명히 세사람 들어갔잖아요. 하나, 둘, 셋, 세 사람 들어갔단 말이예요. 들어가고 난 뒤에 그 왕 느부갓네살 왕이 가보니까, 이 세 사람이여야 되는데 한사람이 더 있어요. 




그게 바로, 그게 무얼 뜻하냐하면 불속에서 네 사람된게 아니고, 그들이 불속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다니엘 세친구 가운데서 주님이 함께 있었던거예요. 주님과 함께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이제 일종의 신약상태에 대한 미리 예표, 미리 보여주는 예언이잖아요. 



그러면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으로 확장시킵니다. 확장시켜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이 제자들이 세상,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은 세상끝에 어디에 가더라도 늘 주님이 함께 있는겁니다. 이게 마태복음 28장 20절에 예언된거예요. 세상끝날까지, 보라 세상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이 거처, 이 거처에 대해서 제자들은 성령오기전까지는 그 거처를 이해못했습니다. 어디를 봐서 예수님은 한분있지, 아버지와 함께 있는게 안보이기 때문에. 그리고 똑같은 오해를 이제는 사도들이 또 성령받고 난 뒤에 주변사람한테 오해를 받게 됩니다. '너나 나나 똑같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을 모르고. 




그런데 성경은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 했던 그 수모와 오해를 이제 성령세례받은 모든 성도에게 똑같은 평가를 세상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똑같은 평가를.. 
'어딜봐서? 너 너 혼자야'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되냐하면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시하듯이, 무시했으니까 죽이라 했잖아요. 무시하듯이. 



그 다음에 누구를 무시하느냐? 12제자를 무시하듯이. 지금은 누구? 성령세례받은 사람을 사람들이 무시하듯이. 그렇게 무시의 반복을 통해서 예수님이 당했던 이 세상은 아직도 여전하다는 겁니다.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세상이 예수님 당시의 세상이나 지금이나 동일해야 십자가 사건이 반복해서 이루어져요. 십자가 사건을 유발한 유발요인이 여전히 여기서 살아남아야 됩니다. 방금이야기 한것, 늦게 오신분 있어서 다시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거처. 거처라고 하니 어려운것 같으니 처소라고 합시다. 처소. 
처소라는 말을 우리말로 하면 그냥 영역이 아니고 공유된 공간. 공유입니다. 공유된 공간입니다. 또는 다른말로 하면은 공유된 영역, 공간. 이것을 거처라 합니다. 



  
공유라고 했으니까 이것은 단수가 아니죠. 한사람이 아니고 두 사람이상입니다. 두사람이상 함께 있는 겁니다. 이 공유된 영역을, 영역에 대해서 제자들은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있으면 다수가 모였으니까 영역이다. 제자들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인간대 + 인간, 인간. 이렇게 되게 되면 여기서 어떤 공유된 공간이 생기겠지요. 사람들은 이 세 사람이 모여 있으면 여기에 집합체가 되는데, 커뮤니티 이것을 공동체라 이렇게 합니다. 공동된 생각을 가지고 모이면. 




그런데 사회에서 이것을 뭐라, 이 세상에서 이것을 뭐라하냐하면 사회라 합니다. 사회. 
인간들이 모이면 사회를 이루는 거예요. 인간들은 이것밖에 할줄 몰라요. 그러나 주님이 생각하는 모임은 사회가 아니고 천국입니다. 천국. 




제자들과 제자들의 그 구성을 제자들의 커뮤니티, 제자들의 단체, 요새는 노회? 뭐 총회.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이것은 천국이 아니고 뭐가 되냐하면 사회가 되버립니다. 제자들이 모였는데 이게 천국이 되더라 여기는 필히 뭐가 들어가야되냐면 예수님 + 아버지, 플러스 하면 안됩니다.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성이 여기에 함유될때, 이것은 사회라고 불러선 안되고 이것은 천국이라고 불러야되요. 신앙공동체라 부르면 안되요. 공동체란 말 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천국입니다.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뭐가 들어가냐하면은 그동안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받을때 누가 투입했냐하면은 바로 성령께서 투입했죠.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우리 오늘 본문 24절 이전에 쭉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하면은 성령이 예수님과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 처럼 너희도 이 안에 넣어준다. 그 이야기가 이 이야기예요. 그 이야기가. 성령이 들어가는 겁니다. 성령이 들어가버리면 이것은 사회가 아니고 이것은 천국이 되는 겁니다. 

  


로마서 14장에 나오지요. 하나님의 나라는? 뭐 안에서? 성령안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성령안에 있으면 그것은 사회가 아니고, 그게 곧 그곳이 천국이예요. 그게 천국이라 이말이죠. 



그래서 천국과 사회의 차이점이 무엇이냐하면은 이것은 예수님이, 예수님이 성령과 함께 있었지요.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있었잖아요.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이걸 뭐라했습니까? 처소라 했잖아요. 처소. 

  


처소라 했는데,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기전까지는 하나님 아버지는 안보이고 뭐가 보입니까? 예수님과 더불어 있는 자기들, 예수님과 더불어 있는 자기. 이게 인간들의 아이디어의 한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괜찮은 사회 만들려고, 사회를 구성할수 있다라는 겁니다. 사회가 바로 유대국가가 되고 이것이 오늘날 흔히 말하는 교회입니다 교회. 

  


유다국가 또는 교회, 천국. 이 천국과 유다국가 교회 이 둘 사이에 차이점이 뭐냐하면은, 유대국가와 교회는 인간들이 생각하기를 인간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여기는 뭐가 생기냐하면은 걱정과 염려가 떠날새가 없습니다. 

  


'이것 깨지면 어떻게 되느냐. 삐져서 다 흩어지고, 교인들 한 100명 왔는데 다 삐져서 흩어지면 교회없잖아.' 자꾸 염려 걱정이 생기는 거예요. 염려 걱정이. 이게 왜 그러냐하면 이게 미완료이기 때문에. 미완료. 미완료이기때문에 여기는 어떤 기대를 갖고 있고, 현재 미완료인데 나중에 뭐 어떻게 되겠지라고 그 간격, 그 결핍된 그 만큼 걱정과 염려로 이렇게 나타나는 겁니다. 




우리교회가 한 100명 되는데 200명은 언제되나? 그러면 200명과 100명 사이는 뭐가 되겠어요? 염려 걱정이 있겠죠. 그럼 염려 걱정은 무엇으로 채우겠어요? 그냥 기도 되지만 기도빨, 기도빨로 채우는 거지요. 기도빨로 채우는 거예요. 



  
그 기도한다는 자체가 뭐를 지금 뿜어내고 있습니까? '걱정스러워 죽겠다.' 그것을 뿜어내고 있는거예요. 걱정, 근심은 어디서 나오느냐하면, 이게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두려움. 두려움은 어디서 나오는가? 이것은 불만족에서 와요. 불만족은 어디서 오는가? '복수할거야.' 

  


목사가 교회를 세운다? 어떤 의미냐? 마지막이 어떤 의미입니까? 복수할꺼야! 점하나 붙이고. 복수할거야! 왜? 너희들이 내 가치를 무시했잖아. 우리 집안사람끼리. 내가 목사해가지고 얼마나 대단한 가치있는 존재인가를 내가 보여주리라 이 복수심, 분노 같은게 있어요. 이 분노가 결국 뭘로 나오는가? 기도빨로 나오는 겁니다. 분노가 기도빨로. 




이런 경우는 내가 여기 포함되어 있으니까 나 중심의, 내 중심의 커뮤니티, 자기 팬클럽이죠. 서태지와 아이들 그런것처럼. 자기 중심의 자기 말 잘듣는 그러한 기업 또는 이런 회사, 그런 개념의 교회를 상정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테두리가 생기죠. 테두리가. 



  
이 기도되기 위해서는 이런 사람들을 모집할 필요가 있어요. 그럼 이 사람들에게 뭘 모집하냐 하면은, 아까도 강의 했지만 이 교회를 뭐로 운영하냐하면은 이렇게 운영합니다. 교습소. 




천국에 갈 필요한 테크닉을 알려줄테니까 적절한 커미션을 내시기 바랍니다. 교습소를 세우는 거예요. 그러면 이 교습소를 할 수 있는 이유가 뭐냐하면은 내가 천국간다는 것은 걱정,근심 이런게 아직 안갔다고 생각하시니까 어떻게 되요? 기대되겠죠. 죽어서 좋은데 가야되니까. 나처럼 생각할꺼다. 나처럼이 반복되요. 나처럼 곱하기 10의 25승. 나처럼,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생각할때 이런 걱정과 기대감이 있다면 나처럼 생각하는거를 끌어모으는 거예요. 끌어모으고, 내가 생각하는 천국 만들기를 성경에 있는 내용가지고 이렇게 조립하게 되면, 이 교회라는 사회단체 공동체죠. 커뮤니티, 공동체가 생기고, 공동체가 생기면 여기에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이런게 있어요. 서로 나누고 이런게 있거든요. 그러면 서로 나누고 흉내내면 되요. 서로 나누고 서로 내것이라 하지 않고, 그런거 마음껏 집어 넣으면 되는 거예요. 



거기에다가 나의 요소 예배있고, 교육있고, 선교있고, 또 뭐 찬양있고 이런게 있죠. 그런요소를 내 요소를 다 집어넣는 겁니다. 그러면 대외적으로 뭐라고 합니까? '봐라 우리교회같이 성경대로~! 성경대로 이렇게 완벽하게, 오직 only 성경, 오직 성경만을 외치는 교회가 어디있겠느냐?!' 가장 전통적인 교회라고 대외적으로 이 교습소를 선전할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뭐냐하면, 바로 이게 12제자들의 선입견이예요. 12제자들. 괜찮은 스타! 예수님이죠. 슈퍼스타 아닙니까. 그 슈퍼스타! 슈퍼스타하니까 뮤지컬 생각난다. I Don't Know How To Love Him~ 뭐 그런게 있어요. 막달라마리아가 예수님 노래부른거 있어여. 



그 슈퍼스타 되는 그 분이 못하는게 없거든. 물위를 걷고, 병을 고치고, 물고기 아가리 벌리니까 거기서 돈이 나오고, 무슨 마술이 그런 마술이. 죽은 자도 살리고. 이런 스타 있으니까 그 스타와 자기가 연합체를 만들게 되면 이건 뭐 세상에 이런 행운이 없다고 본거예요. 

그래서 이미 연합체로 있으니까 이미 이 자체를 하나의 커뮤니티, 12지파의 유다의 사회를 대체할 진짜 마지막때의 교회, 12지파를 가진 교회다. 교회의 시작이다. 이렇게 장담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걱정할것은 남아있는게 뭐냐하면은 '그 천국가면은 누가 더 높으냐? 그런거만 걱정하면 되겠다 다른걱정은 하지마' 하면 안되요. '천국에서는 누가 더 높으냐?' 자기는 따놓은 당상이라 보는 겁니다. 



그들의 아이디어에 뭐가 빠져 있냐하면은 십자가가 빠져버렸습니다. 그 슈퍼스타가, 슈퍼스타가 죽어버리면 이건 알멩이가 빠진거예요. 알멩이가. 




만약에 예를 들면 문재인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감 나오다가 이제 거의 다 당선된걸로 여겼는데 갑자기 그럴일은 없겠지만 '나 대통령 안할래.' 이렇게 되버리면 그 추종자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 닭 쫓던 개 되죠. ‘사퇴는 니 맘대로 못한다.’ 이렇게 나오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예요. 예수님이 죽는다는 이야기는 그동안 바쳤던 모든 3년의 청춘세월을 다 날린겁니다. 얼마나 복수심이 많았으면 가롯유다가 차마 자기 손으로 못 죽이고, 간접적인 남의 손을 빌려서 예수님을 제거했겠습니까. 



내 청춘돌리도 이말이지요. 당신에게 바친 사랑, 사랑이 기껏 이런 배신감으로 돌아올 때, 우리에게 남은것은 '복수할거야' 뭐 이것뿐이 더 있겠어요. 
결국 12제자가 예수님을 떠났고, 가롯유다가 팔아먹었다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냐하면은 인간의 사회만들기의 한계성을 이야기 하고, 동시에 그러한 예수님 죽이는데 직접적인 처벌세력은 뭐냐하면 유대주의 입니다. 유대국가주의예요. 유대국가주의. 




국가라 하는것은 뭐냐하면 개인이 모여서 단체로 모인게 국가잖아요. 그렇죠? 개인이 모여서 단체가 되죠. 개인이 모여서 단체가 되어버리면 여러분 생각에는 이것은 여러분 안다치고 알죠 뭐 한 두번 들은거 다 안다치고 


개인과 사회 또는, 개인과 국가 관계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억압을 하게되면 사람들은 반발해서 국가 권력과 조화를 이루고 조화를 이루다가 다시 어떤 통치자 전체주의, 전제주의, 또 뭐 독재자 등장해서, 독재자가 등장해서 억압을 해버리면 다시 이들은 반발하고 이렇게 된다고 보통 생각하거든요. 

  


지금 그 정치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이나 역사학자들은 이런사람들이 국가와 사회관계는 조화롭게 해야지 억압을 해버리면 반발이 일어나가지고 독재자 물러가고 그 다음에 또 다시 민중중심, 또는 백성중심으로 돌아온다. 뭐 이렇게 하는 겁니다. 

  


얼마전에 끝난 군주란 MBC 드라마 있었잖아요. 군주가 해야 될 덕목은 뭐냐?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이것은 불교국가인 고려시대가 끝나고 조선시대가 되면서 조선시대의 건국이념이예요. 



조선시대는 귀족중심이지 왕 중심이 아니예요. 백성을 우선 살피는 그것이 유교정치의 절정입니다. 그것을 이제 경국대전 만들어 가지고 법적으로 해가지고 이룰려고 했지요. 그런데 사실은요, 이게 이런 생각이 너무나 잘못된 생각이예요. 



왜냐하면은 백성위주로, 백성위주로 사회가 국가가 구성되는것이 아니고 상호의존적입니다. 상호의존적이예요. 이게 무슨뜻이냐하면은 억압을 했으니까 답답해서 너무 못살겠다 하는데, 국가는 그렇게 성립되는게 아니예요. 



백성을 억압을 해서 억압한 독재자가 죽으면 사람들은 환호성을 울리고, 드디어 우리는 해방이다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일시적은 그래요. 하지만 그 다음에 어떤 지도자가 나와도 이 백성들은 국민들은 어떤 감각이 드느냐 하면은 '그때가 좋았다.' 




그 보통 옛날의 이야기이지만 여자하고 명태는 3일마다 패야된다. 맞아본놈이 사랑을 알아요. 안때리면 무관심입니다. 줘팰때 이게 사랑이라~ 이게 습관화 되거든요. 습관화 되요. 




좋게하는 지도자는 이거는 허풍성이예요. 아무일도 없어요. 야무지게 밟아줄때, 그 밟히는 쾌감이 있어요. 인간은 메조키스트(masochist). 밟히는 쾌감이 있다구요. 

  


민주적으로 목회한다? 교회 꼬라지 안됩니다. 밟아야 되요. 그것도 그냥 밟으면 안되고 줘밟아야되요. 철판 한 열댓장 깔고 줘밟아버려야되요. 그래야 교회가 부흥이 되요. 그 부목사들 그 계약직들, 그들은 모가지 다 날려버려야되요. 모가지 다 날려버려야되요. 




고대하고 있어요. 인간은, 신적인 인간의 존재를 고대하고 있다니까요 인간은. 
왜냐하면 인간은 의존적이거든요. 상호의존적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의존적이예요. 기댈곳이 있으면 아낌없이 드립니다. 인간은.. 아낌없이..기댈곳이 있으면. 




그리고 그 기댈곳이 있으면 아낌없이 드리는데 그게 왜 그런현상이 일어나느냐? 인간내부에 법이 있고, 내가 아는 이 법을 뛰어넘은 이걸 초법이라하는데 이 초법적 존재가 이것을 어려운말로 예외적이라하는데, 법을 안지켜도 되는. 예외적 존재가 있음으로서 우리는 이 법에 비로서 내용과 의미가 발생되게 되어있어요. 



왜냐하면 법을 지킬때는 반드시 '보세요~' 하고 누가 보란듯이 법을 지키게 되어 있어요. 누가 보란듯이. 누가 보란듯이. 




사람들이 흔히 민주주의라 해가지고 내 맘대로 하면 그게 행복한줄 생각하는데 아니예요. 여러분 소풍갈때 담임선생님 아파가지고 다른반 애들은 담임선생님 다 있는데, 2학년3반은 담임선생님 없을때 걔들이 얼마나 소풍가서 서러워 하는지 압니까? 우리 쌤은? 우리쌤은? 우리 쌤이 없다는 거예요. 대표이사 없으면 회사 안돌아 갑니다. 우리 오야붕, 오야붕. 

  
이게 뭐냐하면 인간은 행동하면서, 이 행동할때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법에 맞추어서 행동해요. 법에 맞추어서 행동하는데 이 법은 누가 지켜보는 자가 있을경우에만 법의 의미가 발생된다니까요. 



왜그러냐하면 그래야 이 법을 자기가 초월적인 의지하는 그분의 눈과 마주칠때, 여기서 뭐가 생기냐하면은 나만의 자기 의가 발생되요. 자기 의. '나 잘했지롱~나 잘했지롱.' 어릴때부터 인간은 그렇게 양육받았어요. 부모가 그렇게 했어요. 애들이 혼자해놓고 반드시 검사맡아요. '엄마, 나 잘했지?'라고 하거든요. 그것이 어른되도 마찬가지, 똑같은 그 성격 어디갑니까? 똑같아요. 



이것 자기 의는 뭐냐하면 자기만의 의예요. 그래서 이것은 상호의존적이예요. 내가 정말 의란말이 뭐냐하면 내가 존재할 가치가 있다. 더 오래 살아야할 당당함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신이시여 나를 죽이면 안되! 나는 워낙 가치있는 존재이니까.' 그것을 최종목적으로 하기때문에 이 목적을 위해서 보조적인 장치로 뭐냐하면, 이것을 응원하고 독려하고 박수쳐주고 격려하고 칭찬해주고 사랑해주고 이런 초월적인 존재가 이렇게 있어야되요. 



  
그럴 때 이것이 이 단체가 커뮤니티가 안전성을 원한다니까요. 안전성을. '목사님 시켜만 주세요. 시키는 데로 다 할테니까. 이뻐해줘요.' 이거예요. 하여튼 뭐 사랑 못 받아서 한맺힌 사람들... 이뻐해달라는 거예요. 시키는 데로 다 할테니까. 하여튼 지시만하면 그대로 할테니까. 상호의존적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외부적으로 보게되면 너무 교인들이 목사한테 엎어지고 자빠지고 교주도 아니고, 교주보다 더 하지요 사실은 뭐 그냥 뭐 ‘주의 사자님! 사자님!!’ 해가면서 엎어지지만 사실은 그건 하나의 우회적인 방식이예요. 



만약에 내가 이렇게 이뻐하는데 나보다 일주일뒤에 온 교인이 목사의 관심사가 말한마디해도 '괜찮네~' 이렇게 해버리면 삐져버려요. '나 다른교회간다.' 삐져버려요. 왜? 진리문제가 아닙니다. 교회는 진리문제가 아닙니다. 나만 사랑받기원하는 그 문제이지. 그것때문에 교회다니지, 진리와 주님께 영광돌리기 위해서 가는게 아니예요. 내가 어디서 이 평생 사랑받겠어요? 교회와서 사랑받지. 

이게바로 제자들이 예수님께 요구했던 바 입니다. 요구했던 바. 쉽게말해서 '예수님 저희들과 함께 있어요. 떠나지 말고'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끝에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버리고 어떻게 됩니까? 떠나요. 떠나니까 그 베드로가 어떻게 되요? 아주 끈질기죠. '주님 어디를 가시든지 제가 따라 가겠나이다. 목숨 내 놓고 가겠나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못온다는 겁니다. 너는 올수 없는 곳이다. 그러면 진작에 이야기 하지. 3년동안 다 빼먹지 말고, 이용다 해 먹고, 이용하지 말고, 진작에 이야기 하지, 진작 이야기했음 안갔지. 



그게 베드로가 뭘 오해했냐면 그림자라 하는 것은 그림자가 몸을 움직일수 없어요. 그림자가 움직인다고 몸이 따라 움직이지 않아요. 이것은 앞뒤가 바뀐겁니다. 몸이 움직이면 그림자는 움직이기 싫어도 움직여야되요. 제자들은 주님의 그림자 역할 하라고 제자 삼은 거예요. 




자신의 개인적인 야망, 사랑받기, 구원, 천당가기 이것 때문에 예수님 계신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이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림자 한겁니다. 이것은 떨어질수가 없죠. 그림자 가위가지고 그림자 한번 잘라 볼까요? 물론 희미한 경우도 있어요. 왜? 구름 끼어가지고...몸을 가리면 그림자가 사라지죠. 



자기가 그림자가 아니란 말은 ‘나도 단독적인 딴 몸이야.’ 가기 중심성으로 되돌아 오겠죠. 그러면 '예수님이 그렇게 좋아? 나는 관심사는 나에게 있어.' 이렇게 바뀌겠죠. 베드로가 예수님을 끝까지 붙들고 가는 이것이 이것은 충성심도 아니고 순종도 아니고 순종처럼 보이고 충성으로 보이지만 예수님의 본래의 계획을 전혀 몰라서 그런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계획은 뭐냐? 예수님은 홀로 있는게 아니예요. 누구와? 아버지와 함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제자들이 예수님만 보면서 아버지를 예수님과 함께 있는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들이 속했던 사회, 아까 사회란 말 배웠죠? 사회란건 뭐다? 인간이 인간들로 서로 상호의존적으로 구성한 커뮤니티가 사회죠. 그 사회에서는 이미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님이라고 이미 확정된 상태에요. 이 여호와하나님이. 

  
그래서 예수님이 아들이라하니까 그들이 아는 여호와하나님과 아들 이렇게 연결시키는 겁니다. 아버지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는데, 그들은 주제넘게 착각을 해가지고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자기들이 알고 있다고 지금 우기고 있는거예요. 



이거는 원천적인, 근원적인 문제예요. 여기서 나오는 오해가 뭐냐하면 삼위일체라는 겁니다. 삼위일체. 삼위일체가 복음입니까? 삼위일체 알아서 천당 간 사람 한사람도 없어요. 난 장담해 손에 장을 지질께 내. 삼위일체 알아서 천당 간 사람 아무도 없어요. 



삼위일체는 버려야되요. 삼위일체가 바로 복음을 가려버린다니까요. 삼위일체라고 이렇게 언급할때 그 안에 뭐가 밑에 깔려있느냐 하면은 익히 형식이라는 것,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형식은 알고, 그 형식에다가 그 다음에 성경을 통해서 내가 아는 내용을 마저 채우면 온전한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이야 누구나 알죠. 창조주, 조물주 뭐 다 알지요. 그런데 형식은 아는데 내용은 몰랐는데 성경이란게 있어가지고 성경가지고 이 내용을 채우면 형식은 맞고 내용이 부실한데 이 부실한 것을 성경으로 채워버리면 온전한 이것이 진짜 하나님 맞다. 라고 생각한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방인들이 아는 하나님이 그게 하나님일까요? 우상일까요? 우상이죠. 이방인들은요 여호와 하나님 뭘 붙여도 그건 우상되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실제로 그들이 역사속에서 고난속에서 체험한 하나님이지만, 이방은들은 사고체계, 인간이 나올수 있는 모든 이성적인 지혜에서 나오는 그런 신이라니까요.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잖아요. 실제로 체험한 것은 유대인, 그래서 유대인들은 뭘 원하고? 기적을 원하고. 헬라인들은 이방은들은 뭘 원하고? 지혜를 원하나 십자가는 둘다가 아니라는 거예요. 기적도 아니고, 지혜도 아니고. 그럼 뭐냐? 모른다죠! 십자가 보고 몰라요. 인간의 힘으로 십자가를 알수 있다면 성령이 오시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오지 않더라도 안다는 것은 100% 그건 이단이예요. 



'몰랐는데 성령때문에 알았다' 이렇게 되야되요. 몰랐는데. 그럼 우린 그 사람에게 물어보죠.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뭘 몰랐는데?’ '그냥 겸손해서 한 말인데..' '뭘 몰랐는데?' 그러면 이렇게 해야해요. '난 성경도 모르고, 난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도 모르고,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나와야 되요. 

  


어제 대구강의 할때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대구강의할때 영어하나 썼어요.  Trash = 쓰레기란 뜻이예요. 사람들은 이방인들은 하나님이라 하는것을 조물주라 해놓고 동그라미 쳐놓고 안의 내용을 자기가 뭘 채우느냐 하면은, 자기가 납득이 되는 것을 집어넣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쓰레기통이라 해요. 쓰레기통. 

  


나는 아이가 공부잘했으면 좋겠다.' 툭 던져 넣고, '주여, 내가 믿는 하나님은 기도하면 애들 공부 잘하게 하는 하나님이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사업이 잘됐으면 좋겠다.' 던져넣고. 자기의 쓰레기 같은 욕망에서 나온 쓰레기의 일부를 던져넣고, 그런것도 채워넣고 이게바로 참 좋으신~ 참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이게 뭐냐하면 쓰레기통이예요. 쓰레기통! 이게 쓰레기통이라니까요. 




본인이 쓰레기니까 본인이 믿는 하나님도 쓰레기통이라는 거예요. 이 쓰레기통의 특징은 뭐냐하면 반드시 복음을 죽인다는 거예요. 이 쓰레기의 내용은 뭐냐? 하나하나 쓰레기 다 끄집어 내면 뭐냐하면 '내가 주인이다, 내가 주인공이다. 내가 소중하다. 나는 나 밖에 모른다.' 이런걸 담아서 여기다 쓰레기 다 집어 넣었어요. 



'이 세상에 나를 가장 걱정해주는건 나 말고 누가 있을까?' 이거거든요. 내가 지옥가면 누가 격려해줍니까? 예? 목사님 내가 지옥간다. 누가 나를 격려해줘요? 힘내라! 힘! 여러분~! 누가 나를 위로해주죠? 누가? 누가 나를 위로해줍니까? 누가 나를 위로해줘요? 



내가위로해줘요. 내가! 내가 위로해줘요. 친구 가족 필요없어요. 나 말고 나를 마지막까지 나에게 힘을 불어넣어주고 힘내라 힘! 할 사람은 나 밖에 없어요. 그 인간이 교회간다고 달라져요? 쓰레기가 쓰레기에 모여있는거. 쓰레기가 쓰레기 모인곳에. 뭘 달라집니까? 영어로 하면 Trash 쓰레기, 쓰레기통이에요. 



진짜 교회는 여기 뭐 있느냐. 여기에 십자가 있어요. 십자가. 십자가 들어있으면 십자가를 믿으라 하면 안되고, 이렇게 질문해야되요. '주님이 왜 죽었습니까? 왜 죽어야되죠?' '너 때문에 죽었잖아.' 사도행전 2장에 나오죠.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제가 어때서요?' '이제부터 한번 시작해볼까? 뭐 때문에 죽어야 되는지 한번 시작해봐?' 그래서 사도를 보내가지고 말씀과 교훈을 준거예요. 

  


다시한번 정리해봅시다. 인간에게는 뭐가 있다? 법이 있는데, 인간에게는 법이 있어요. 법은 반드시 의식하는 사람, 법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게 없으면 안지켜요. 거기 지켜보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 법을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법을 지키면 거기에 대한 보상이 있다고 생각하게되요. 보상. 

  


지킨만큼 보상이 있는거예요. 그런데 인간에게 이런 법을 준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요. 아무도 이 법을 준 사람이 없어요. 그걸 흔히 양심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배운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 양심은 다 있거든요. 그런데 양심을 누가 줬어요? 양심을 준 사람은 없어요. 그냥 태어날때부터 그냥 허락도 없이 이미 우리안에 딱 핵심부분에 중핵이라고 하는데 중핵, 가장 중심되는 핵심부분에 자리잡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법에 최종적인, 우리가 보통 진리라 하잖아요. 그러면 인간은 그 진리를 자기가 이 법이 진리예요. 진리라는 것은 최종적인 법의 완성. 자 이것지키면 더이상 다 지킨거야. 더 지킬것 없어 라는 최종적인 것은 그걸 누가 채우는가 하면은 본인이 책임지고 채워요. 

  


참 재미있죠? 법이 있는데 그 법을 가지고 진리를 찾아가는데 그 찾아가는 그 수고를 누가 하냐하면은 본인이 한다구요. 자 이렇게 지키면 나한테 아~착하다는 소리를 듣겠습니까? 한번 지켜본다고요. 지켜보는데 어떤 상황이 주어지게 되면 내가 지킨 그 법에 의가 그 상황에서 나한테 유리하게 작용해야하는데, 예를 들어 고아원에 가서 사랑을 줬는데 그 주간에 어떤 계약이 있다 계약, 어떤 유명한 계약이 있는데 이만큼 착한일했으면 계약이 성사되어야 할텐데 계약이 다 됐는데 그만 여기서 보이콧했단 말이죠. 



그러면 뭐하고 균형이 안맞죠? 나는 고아원에서 착한일 했는데 착한일 했으면 반드시 그냥 착한일 하지 않고 인간은 뭘 기대한다? 보상을 기대하죠. 왜? 보상될때 그걸 진리라고 보기때문에. 보상될 때. 보상이 될때 진리라고 주장하는데 착한일할때마다 그때 그때마다 만족스러운 보상이 안오더라 이말이죠. 



교회 처음 다니면서 십일조 안하다가 억지로 했는데, 이상하게 십일조를 5만원냈는데 그 주간에 50만원, 아니 50만원아니지 30배니까 150만원 윗돈이 들어왔다하면 갑자기 무슨생각들어요? 계산 빨리하는거예요. 자 30배, 60배, 100배 복을 받는다 했으니까 5곱하기 30 됐구나. 그럼 그 다음주 얼마를하냐? 그냥 10만원 해보는거예요. 어차피 돈놓고 돈먹기거든요. 산에 가야 범을 잡고, 밑천을 타야 이게 돈이 나오지. 그냥 안되잖아요. 콜~콜!!이게 되야된다 이말이죠. 

  


돈 없으면 뭘로 때운다? 원래 그 벌금없는 사람은 뭘로 때웁니까? 노력하잖아요. 노력이 교회에 봉사로 하는거예요. 돈이 없으니까 교회에 봉사하고 와서 닦고, '주여 지금 다 보고있죠?' 블랙박스 있잖아요, 블랙박스. 지금CCTV 다 보고있는거예요. 



힐끔힐끔 보면서 '주여~주여' 그것도 안되면 새벽기도 나와가지고, 제일 먼저 나와가지고, 또 제일먼저 나와가지고 퇴근은 새벽기도 퇴근은 목사님보다 더 늦게 퇴근해가지고, 목사님은 애먹고 지금. 목사님 아침 드라마도 못보고 지금. 

  


그렇게 해서 합당한 그 계산이요, 내가 예상한 수치가 양적으로 맞아 떨어져야 나는 지금 정상적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 확인될게 아니냐 이말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한두번 통하는데 그 다음부터는 안되요. 철야하니까 한 두번할때는 방언 터졌는데, 한 서너번 하니까 방언도 전에 알던 방언, 이건 완전히 녹음기 틀어놓은거 같아가지고 새 방언이 안나오네. 그럼 전에하던 방언이 맞았는지 확인할길이 없어요. 



첨에 교회나온다고 안수했는데 갑자기 안수했는데 안수한 사람이 병이 나았다 이말이죠. 감기할때 안수해가지고 병이 나으니까 계산해보는거예요. 계산, 빨리 계산해봐요. 감기걸릴때 손 얹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삼계탕에다가 아니면 아까 그 약 이름 뭡니까? 타이레놀 먹는거하고, 주사맞는거하고 계산해보는거예요. 이게 훨씬 낫단말이죠. 


그 다음부터 자기는 됐으니까, 애까지 다 '엄마가, 엄마가 주의 성령받았거든' 다 해보는데 안 나아. 괜히 시기 놓쳐가지고 이게 폐렴으로 빠질수가 있어요. 그렇게 될때 인간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쓰레기통을 다른방식으로 시도해보겠지요.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냐하면은 대리보충 이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형식을 자기가 아는 내용으로 계속 테스트 해보는 거예요. 계속 테스트 해보는 거예요. 왜 테스트 하느냐하면은 내가 지금 정상적인 길을 가고 있는지 아니가고 있는지 테스트 하는겁니다. 그럼 테스트 할때마다 본인은 믿음이 있는거예요? 없는거예요? 



완전히 없는거 들통 다 났지요. 왜? 불안하니까. 근심과 걱정이 있지요. 근심과 걱정이 뭐로 나온다고 했습니까? 기도빨로 나오죠. 교회와서 큰소리로 이렇게 하고, 기도하게 되면 한이 많이 맺힌거고, 건성건성하게 되면 별 아쉬움 없는 사람이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만약에 기도가 좀 소홀하다, 안한다 싶으면 목사가 대리보충을 하기위해서 목표를 높여버리는 겁니다. 목표를 높여버려요. 목표를 높이면 목표를 높인만큼 뭐가 생기겠어요? 간격이 생기죠. 간격이. 그 간격만큼 새롭게 돈과 기도빨을 모을수 있는 하나의 유인책이 되는겁니다. 유인책. 

  


어차피 교회는 뭐냐하면 천국이 아니고 뭐다? 사회예요 사회. 너하고 나하고 다 납득되는 끈으로 묶으면 그게 교회라는 겁니다. 그래서 커미션 나오면 돈 생기고, 교인들한테는 내가 하나님이 함께 있는 교회에 있다라는 그 안도감, 그것이 오늘 죽어도 오늘밤 죽어도 천국갈수 있다는 그 자신감으로 이어질수 있는 어떤 공감대를 형성할려고 무던히 뭘한다? 대리보충을 하는거예요. 



대리보충하기위해서 목사들은 유명한 강사, 그 은혜받은 간증 강사들 해가지고, '난 이렇게 했더니만 이런 효과봤습니다.' 하면 사람들이 우르르 대리보충 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 오늘 요한복음에 주께서 한 취지가 뭐냐하면 근원적인 것 부터 처음부터 다시봐야되요. 뭐냐하면 인간쪽에서 저 주님의 나라 또는 하나님의 나라를 간격을 인간쪽에서 이렇게 설정하면 안됩니다. 이러면 안되요. 이건 처음부터 이건 하나님의 일이 아니예요. 



창세기 3장에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간격은 누가오느냐하면 하나님쪽에서 간격을 조성해줘되요. 그 대표적인것이 아기예수로 태어난거예요. 예수님께서. 아기예수 태어날때 동방박사하고 아기예수하고 간격이 있었습니까? 



무슨말이냐하면, 여러분들 그 작은권리 라는 책 혹시 보신적 있으십니까? 그 첫번에 나온건데, 동방박사한테 별이 온거예요? 아니면 동방박사가 별에 딸려온겁니까? 별따라 누가 갔어요? 동방박사가 갔지요. 근데 사람들은 별이 이 지상에 왔다 했잖아요. 별이 지상에 와버리면 지구가 중심이 되어버려요. 별은 중심에 온 셈이 되고. 



그러나 그것이 아니고 원래 중심은 뭐냐하면 주님계신 곳이 중심이였어요. 주님이 중심이고 동방박사는 그 변두리에 있던 동방박사가 중심에 당겨져 오는 거예요. 당겨져 오는거예요. 




아기예수가 베들레헴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아기예수가 베들레헴에 태어난 그 주소가 팔공로 91, 10-11이라고 합시다. 그럼 팔공로 10-12는 가까워요? 멀어요? 바로옆이니까 가깝죠? 그럼 가까운 사람 구원받았습니까? 아니지요. 아니죠. 

  


그 근처 목자가 이렇게 와서 봤지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의 공간적인 의미의 간격이라 하는것은 바로 옆에 지리적으로 바로 옆에 있으면 더 가깝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중점이 되어있으면 아무리 폴짝 뛰어도 도달할수 없는 다른 공간, 다른 영역이 따로 마련되는 겁니다. 



그것이 아기예수가 이렇게 오니까 남들 보기에는 그냥 아기예요. 그냥 그 부모예요. 언제든지 손대면 만질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제자들과 민중들과 대중들은 예수님을 뒤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뒤에서 떠밀고 난리났어요. 서태지와 아이들은 유도 아닙니다. 아주 팬들이 많아요. 귀신도 쫓아내고 자기들이 원하는데 해주니까. 

그런데 그 중에서 딱 한사람 접촉한 사람 딱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12년동안 혈루병에 걸린 그 여자. 그렇게 미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누가 믿었냐고 하니까, 믿는 사람 한둘이 아닌데요. 누구 이야기 합니까? 딱 한사람 있었어요. 딱 한사람. 이것은 인위적으로 주님을 주물럭 거린다고 해서 예수 믿는게 아니예요. 보면 믿겠다 하는거 그거 거짓말입니다. 믿을수가 없어요. 믿을수가 없습니다. 

  


간격을 주님 쪽에서 주님 찾아온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예수님과 아버지가 이 세상의 중심이고 그리고 다른 자기의 택한 백성은 어떤자리에 있든지 지옥에 있든지 북한에 있든지 상관없어요. 어떤자리에 있든 북한에서 남한으로 오는게 아니고, 가봐야 또 바깥에 올라가서 방송할거니까, 북한에서 남한으로 오는게 신앙생활이 아니라 어디있든지 상관없이 바로 그리스도에게 오는게,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쫙 땡기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그 땡기려면 그 간격에서 주님이 잡아당기는 그 간격에서 어떤 간격을 우리가 폐기처분 하든지 어떻게 이걸 부정해야됩니까? 바로 내가 누굴 간다? 주님을 상상하면서 해놓고, 내 쪽에서 가고자 하는 모든 시도, 모든 행함을 내가 뭐로 봐야되요? 십자가 앞에서 이걸 부정해야되죠. 부정해야되죠. 



부정한다고 우리 안할사람 아니죠. 그러면 하시되 하고 난뒤에 사고적으로 일이 끝나고 난뒤에 수급해서 계속 부정하면 되는 겁니다. 수급해서. 
십자가 + 행함이 아니고, 십자가로 인하여 행함이 계속 가위표시, 또 생긴 행함을 또 가위표치고, 또 생긴 행함을 가위표 치는 것. 왜냐하면 이 행함은 내 쪽에서 주님쪽으로 다가가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 쪽에서. 




이 시도는 우리가 하지 맙시다 이말은 터무니 없는 거예요. 하지맙시다라는 말은 우리한테 성립이 안되요. 우리는 타고났어요. 우리는 자기의 의를, 자기 솜씨를 자랑질하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입니다. 



뭔가 걱정거리 있으면 그 걱정거리를 내 손으로 내 경건으로 내 거룩으로 이 걱정거리를 해소시킬려고 우리는 덤벼들수 밖에 없는 그런 속성을 이땅에 가지고 태어났어요. 이미 이런 종교적인 것은 말릴수가 없습니다. 그게 나쁘다고 해서 안할 우리들이 아니예요. 

  
그러니까 하시라 이말이죠. 하시되 그렇게 땡긴 십자가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하는 행동이, 주님의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한 주님의 속한 하나의 일환이예요 그게. 그것이 나의 일이 아니고 그런 어설픈 짓을 하는 것 조차도 주의 일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설픈 12제자, 말도 안되는 12제자를 그렇게 뽑은 거예요. 그리고 그 뽑은 제자를 내치는것이 아니고, 그들을 사도로 세운겁니다. 못났기 때문에 못났놈~이순재 하지 않습니까. 못났기 때문에! 못났기 때문에. 그 못난 재미로 사는 거예요. 그들이, 사도가. 얼마나 못났으면 자기 것 안챙기겠습니까. 자기것을 용납하지 않죠. 



늦게 오신분들 있어가지고 한번 정리하고 10분 쉽시다. 여러분 다 기억나길 바랍니다. 
처소하는데 두가지 양식있다 했습니다. 하나는 인간들의 처소, 인간들의 처소는 인간과 인간들의 집합체가 뭐다? 하나의 사회를 이룬다. 연대감을 이루는 거예요. 인간대 인간. 
이것은 뭐로 보여준다? 바로 유대국가로서 충분히 제자들도 보여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처소에서 무슨 개념이 나오느냐? 천국개념이 나오죠. 천국개념은 인간대 인간이 아니라 여기 반드시 예수님의 아버지가 개입되요. 예수님의 아버지가 왜 개입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아버지하고 이미 처소를 하나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사람들은 눈에는 예수님만 보이고 뭐는 안보인다? 아버지가 안보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과 아버지의 이 처소에 대해서 인간들은 모르는 거예요. 12제자들도 모르니까 기껏 한다는 것이 인간들과 인간들의 단합체. 이것이 바로 교회를 대신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이제 성령이 오게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10분쉬고 합시다.

 홍민희 (IP:210.♡.246.108)17-07-20 15:37 
가락-요한복음 14장 24절(성령의 보편성)170718b-이 근호 목사 




예, 시작하겠습니다. 예수님하고 아버지 사이에 성령이 있고, 그것을 보혜사라 14장에서는 보혜사라 합니다. 보혜사가 왔던 상태를 가지고 14장 24절에 보면은 저희가 내말을 지킬터이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 말을 듣는자는 내 말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이렇게 해서 그 처소,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있는 그 처소, 그 처소가 어떻게 운영되는가 그것을 미리 예수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제자들한테는 이것은 알수가 없어요. 왜냐면 오순절 성령이 안왔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예수님이 한 이야기이고.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몸에서 이미 기획, 프로젝트가 이미 시작이 됬으면 그것은 나중에 몸에 지체까지 저절로 확산이 되는 것입니다. 확산되는데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지요. 왜 성령께서 하시느냐? 그것을 설명합니다. 




왜 인간들의 제자들의 성심성의와 그들의 개과천선과 왜 그걸로는 안되고 왜 성령이냐하면은,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여기 요단강에서 성령을 받았단 말이죠 성령을. 성령을 받았는데 성령의 특징이 뭐냐하면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아무게 없게 이 땅에서는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하는 기능이 성령의 기능이예요. 




알아서 예수를 믿는 사람을 전부 다 차단시킨 겁니다. 알아서 예수를 믿는 사람을 모두 다 차단시킨 겁니다. 그 이유가 예수님의 요한복음 14장 이야기 나오기 전에, 마태복음 12장에서 성령에 대해서 언급한데가 있어요. 그 점이 좀 어렵더라도 여러분 오늘 좀 참으셔야됩니다. 어렵더라도 견뎌내야되요. 




마태복음 12장 보게되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1절에 보면 사람의 모든 죄와 해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해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왜 어려운 이야기이냐하면은 성령께서는 범위를 보편적으로 넓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떻게 착하냐? 나쁘냐? 했는냐에 대해서 일체 묻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작용에 의하면. 성령이 오기전까지는 내가 구원받는데 있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태도를 갖고 어떤 행함을 하고 어떤식으로 해야 구원받느냐는 사적인 문제예요. 하나님 우리에게 말씀 주셨고 말씀을 내가 지키면, 내가 지키면 남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킨 당사자 내가 구원받는 시대가 성령을 제껴버리는 시대예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되면, 성령 오게되면 개인적으로 어떻게 하느냐 상관없이 성령 나름대로의 보편이 되요. 보편이란 말이 어려운데, 만약에 성령이 이 동그라미 면적이라면, 나중에 예수님 오시면 성령의 면적이 퍼져버리면, 이것이 점이라고 한다면, 점이 큰 면적이 되버리면 면적내에 이게 바로 보편이 되는 거예요. 보편. 확대가 되요. 




여기있는 성격이 성질이 본질이 이렇게 퍼져도 동일하게 모든 구석구석 동일한 성질이 거기에 다 적용이 되게되어 있습니다. 적용이 되는거예요. 성령께서. 




개인적으로 어떻게 하느냐 묻지 않고, 니가 예수한테 얼마나 욕하고, 욕설하고 때리고 그것은 일체 묻지 않는다. 인자된 나에게 어떤식으로 했는가 일체 묻지 않고, 성령을 해방하게 되면 완전히 이 보편에 이 성령이 본 보편에 이거는 탈락된 사람,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으로 확인이 될 수가 있는것입니다. 그런시대가 와요. 




그럼 이런 시대가 될려면 이제 머리 잘 써야 되요. 이런시대가 될려면 성령과 함께 있는 예수님이 어떤 면면을 보여줬느냐 하면은, 어떤 인간도 본인의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가 확증이 되게 됩니다. 그래야 성령의 일방적인 보편성이 성립이 되요. 



한 사람도 자기 행함으로 구원되었더라 이러면 안되요. 단 한 사람도 자기행함으로 구원된적이 없었다가 분명히 해야되고, 앞으로도 계속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되어야되요. 그 이야기가 마태복음 12장 28절에 나옵니다. 아니 12장 29절에 나옵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이렇게 되어있죠? 




자 여기 세간이 세간과 집주인과 도둑 삼자의 관계를 한번 봅시다. 일단은 세간은 자기가 알아서 자기 집에서 탈출이 Exodus 탈출이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지요. 세간밑에 뭐 발 달렸습니까? 요래요래요래. 쌀뒤주가 요래 걸어가가지고 담 넘어 갑니까? 못되지요. 




아예 구원될자를 예수님은 뭐로 보느냐. 세간, 세간 살이 세간으로 쳐 버립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간이 되어버리면 이 세간은 도둑이 오던, 집주인이 오던, 때리면 때리는데로 맞아야되요. ‘이러시면 안됩니다.’ 이런거 없지요. 세간이라하는 것은 물건입니다. 




물건과 인격, 물건과 인격의 차이점이 뭐냐하면은 인격체는 얼굴이 있고, 물건은 얼굴이 없어요. 인간이 사회성이 형성될려면 얼굴보고 사회성이 형성되요. 얼굴보고. 얼굴있는 자는 사회성이 성립되요. 눈을 보니까. 




그 사람의 마음의 창은 뭐예요? 그 마음의 창은 그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나오죠. 뭐가 밝아야한다? 눈이 밝은자는 마음이 밝다 했죠. 그래서 사실은 그 사람들 이렇게 보게되면 저는 이 눈을 보거든요. 눈을 딱 보게되면 눈이 주님한테 관심이 없는 사람은 형광등이 갈 때되면 어떻게 됩니까? 어지럽죠? 왔다갔다 왔다갔다. 형광등 갈때쯤 되면. 




눈이 관심사가 주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굉장히 불안해요. 세상에 갔다가 왔다갔다...한쪽은 교회에 걸치고 한쪽은 집에...보는 내가 불안해. 복음이 없는 사람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예수도 믿어야되고 행함도 해야되고, 왔다 갔다 왔다갔다 형광등 왔다갔다 해야되요. 

그래서 그런사람들의 특징을 한자로 하면 ‘욱’ 두자로 하면 ‘교주’ 세자로 하면 ‘한푼만’ 네자로 하면 ‘정신병자’ 다섯자로 하면 ‘복수할거야’ 여섯자로 하면 ‘나도신자다’. 일곱자로 하면 ‘내말빨서게해줘’ 전부다 자기에 관한 겁니다. 자기에 관한. 




그래서 성도는 성도가 성령오게되면 ‘헉’ 그 다음 두자로 하면 ‘앗싸’ 네자로 하면 ‘고마워요’ 다섯자로 하면 ‘그냥떠날래’ 여섯자로 하면 ‘너한테준것도아깝다.’ 일곱자로 하면 ‘나 언제데려갈거예요.’ 드론같아요. 드론. 그만큼 안정되게. 세상에 세상과 땅 어느쪽이냐 갈등하지 않습니다. 성령오게 되면. 





그 눈이 안정되어 있어요 눈이. 복음을 전하게 되면 ‘헉! 그런 것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불신자 한테 하면 ‘나도 신자거든’ 이렇게 나와요. 그 말하는데 얼굴이 막 불안해. 눈돌아 갔어. 애들 막 화날 때 눈돌아 가잖아요. 이 세간 살이 얼굴은요 세간 살이 얼굴은 누가 대신하냐하면 그 집주인이 그동안 그 사람을 대신해서 얼굴을 대신해서 얼굴을 대체한거예요. 




내가 어떻게 살아야되고 나는 어떻게 움직여야 되고, 그것을 마귀가 나를 가지고 마귀의 심성, 마귀의 본성가지고 대신 나를 갖고 논겁니다. 마귀의 심성이 뭐냐하면은 내가 신 처럼 되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신처럼 되는데 방법이 뭐냐? 악은 버리고 선을 취하는 것, 그것이 선악체계입니다. 선악체계를 가지고 어쨌든 간에 내가 될수 있도록 나쁜 사람 되지 말고, 좋은 사람 되어가지고 이제 하나님이 오든 어떤 하나님이 오든 내가 ‘나 이렇게 착해요.’ 라는 소리 하면서 들이밀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심지어 그 착함은 자기 잘못에 대해서 여유분을 마련할 정도가 아니구요. 이것은 어디까지 가냐하면은 자기 자식이나 손자나 자기 가족이 만약에 나쁜짓할때는 내가 대신해서 쿠폰을 많이 모아놓는 거예요. 쿠폰을. 



중국집에 가가지고 쿠폰 많이 모아두잖아요. 많이 해 놓으면 내 아이가 못나서 벌받을 것을 어미의 착함의 마일리지가 딱 들어서가지고 ‘하나님이여 저를 봐서라도 우리 딸은 어떻게 너무 심하지 않게 벌 주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많이 모아놓은 마일리지 어떻게 써먹을 겁니까? 그런데 써먹어야지요. 




여러분 종교, 교회 딱 그거예요. 딴 것 아무것도 아니예요. 교회가는 착한일, 예수믿는 착한 일 해서 마일리지 쌓아서 나한테 좀 내가 여유분이 있으면 남한테 나누어 줘서 이웃사랑이죠, 나눠주어가지고 우리 식구 우리 가족이나 천당가자 그것뿐이예요. 그게 전부예요. 그게 바로 세간에 갇혀있는 꼴, 악마가 그렇게 우리한테 그거 외에는 다른 진리를 우리한테 이야기 한적이 없습니다. 마귀가. 그건 진리도 아니지만, 거짓말이지만. 




세상에 주님이 담 넘고 올지누가 알았겠어요. 주님께서 답을 떡하니 자세가 좀 건방지다만은 앉아가지고, ‘삐리리’ 불면 우리가 알아서 ‘저 소리는 무슨소리인고?’ ‘주님의 소리다 나가자.’ 문을 열고 들어가 그렇게 구원받는 줄 아는데 아니예요. 주님과 우리 관계가 아니라니까요. 


주님과 우리관계 같으면 우리 행함으로 구원받습니다. 주님의 일방적인 보편성이 될려면 지금 우리가 보편적으로 갇혀있는 그 주동자가 누구냐? 그게 마귀, 악마예요. 그래서 도둑이 와서 우리를 데리고 ‘자지?’ ‘잡니다.’ ‘가자, 가자’ 이렇게 하는게 아니고, 누굴 찾아갑니까? 도둑이. 




집주인을 찾아가 집주인하고 좋게 돈 흥정해가지고 ‘이거면 되? 이거면 되겠어?’ 이러는게 아니고, 아예 집주인을 묶어 버리죠. 수갑채우고 포승줄 두 번 더 돌리고 하죠. 그러면 악마가 어떻습니까? 거기다가 입까지 막아버려요. ‘음!!음!!’ 이렇게 하고 있지요. 그러면 아주 당당하게 ‘가자! 이 뒤주야 가자. 이 컴퓨터야 가자!’ 끌고 가는데 이 세간 살이를 보란 듯이 가는거예요. 보란 듯이. 




여러분 인생은 아름다워 라는 영화 혹시 보신 적 있습니까? 그 나치때 아버지가 자식한테 기 안죽을려고 그 유대인이 잡히잖아요. 유대인이 잡혀가지고 로마한테 죽을 때, 그 얼마나 아버지로서의 그 참 나라 없는 설움이 얼마나 부끄럽겠어요. 그러나 자식한테는 희망을 주기 위해서 잡혀가면서도 아이가 보는 앞에서 잡혀가면서도 당당하게 걸어가요. ‘아빠 지금 마지막 게임하는 중이야.’ 거짓말 하면서 애 한테 기 안죽일려고 하듯이. 





지금 그것은 가짜로 그렇게 하지만 주님께서는 일부러 마귀가 있는 곳으로 휘익~ 돌게 합니다. 아까 집사님이 하는 이야기가 교회 좀 자주 다니라 하지요. 휘익~ 일부러 마귀있는 곳에 가요. ‘봐라봐라 저 하는 이야기 너는 훅 빠졌잖아.’ 우리가 주의 손을 잡는게 아니예요. 주님이 손목을 잡고 가는데, 가다보니까 주님 손이 몇 개인지? 옆에 보니까 내 비슷한 동생이, 그래서 양쪽 다 공통점이 있어요. 둘다 마귀한테 잡혔다는 그거예요. 




그래서 교회의 이웃사랑이 교회에서 성도끼리 사랑이라하는 것은 뭐냐하면 양쪽다 주특기 자랑하는거 양쪽다 뭐냐하면은 불가능을 다 포함한체 불가능을 내어놓고 교류해야되요. 불가능을. 





‘나는 기도잘해서 구원받습니다.’ 이런 소리 하면 안되고 ‘나는 기도도 할줄 몰라요. 했다하면 두시간 반, 아~난 기도 못해.’ ‘아~~참 기도 잘하네요. 난 세시간하는데.’ ‘나는 내가 안수해가지고 병 나은 사람이 한 40명 되는데, 아 난 그것밖에 못해요.’ ‘아 난 50명인데...’ 전부다 그 자체가 구원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불가능한 요소임을 내놓을 때 비로소 교제가 되요. 교제가. 





옛날에 30~40년 전인가? MBC에서 웃으면 복이와요 그런 코미디 프로그램을 했는데, 거기서 구봉서, 배삼룡이 둘다 다 지금 죽었지만, 그 사람들이 프로에 나오는데 양반집 인사법하는거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 하느냐하면은 서로 상놈인데 양반인척 한다고 어디서 뭐 대서소를 하나 베껴왔는데 순서를 정해줘요. ‘어험~이렇게 시작합니다.’ 그걸 세상에 어험~하면 되는 걸 가지고 둘다 다 똑같은데 베껴왔기 때문에 ‘어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다음순서 저쪽에서 하고 자 이제 내 차례이요 이렇게 한다고. 




그 말은 뭐냐하면 둘다 겸손한거예요 둘다. 둘다 다같이 겸손하듯이 성도의 교제라 하는 것은 내가 이런식으로 해서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이런식으로 내가 헛 짓 했습니다라는 것. 이런식으로 십일조하고 이렇게 교회 충성,봉사하고 목사 섬기고 이런짓 해가지고 나한테 복이나 올까? 구원이나 될까? 상급이나 예수믿는 것은 기본이고 천당가면 상급더 쌓을까? 이런 사기에 넘어가가지고 이런 짓거리를 했습니다 라고 내놓을때만 교제가 되요. 안그러면 교제가 안됩니다. 




못난이 3형제 있잖아요. 그런데 물론 이렇게 하게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냐면 못난 이것이 자기 의가 될수 있으니 그땐 조심해야되요. 못난 것을 또 자랑질 하는거 있어요. 못난걸 녹음해가지고 ‘니가 못났나, 내가 못났나’ 또 시합해가지고 둘이 멱살잡고 내가 더 못났다고 싸우고 이러면 안되고 





어떻게 못난걸 했는가? 그걸 잠깐 설명해드릴께요. 내가 한번 적어볼께요. 
내가 못났다. 누구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주께서는 내가 처리할수 없는 악마와 싸우기 위해서 악마에 속한 우리를 우리가 뭣도 모르고 예수님 죽였는데 반대해서 주님은 우리손에 죽은 자기손에 죽었던 그들을 도리어 죄인을 건져내시기 위해서 피를 흘렸단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성령안에서의 보편성, 보편성이라 했지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되는게 내가 못났다가 성립이 안되요. 왜냐하면 내가라고 하면 이게 뭐냐하면 이게 주체가 되거든요. 주체는 상황따라서 이게 바뀝니다. 주체는 상황따라서 바뀌어요. 주체에서 상황따라 바뀌는데 그 바뀔 때 마다 공식이예요. 




자아 + 상황 = 주체가 되요. 나는 허상, 허상이 상황이 주어지게 되면 상황에 비추어서 ‘그래! 그게 나지!’ 라고 새로운 주체로서 구성하게 되어있어요. 이것이 만약에 2017년도 5월 5일이라하면 2017년도 5월 6일에는 또 이 주체가 같을까요? 다른주체예요? 다른주체죠. 




자아는 어때요? 동일한 자아예요. 왜냐하면 자아는 어디서 나오는가? 이 허구는 자아의 실체는 없어요. 자아는 없어요. 없는데 뭐가 있느냐하면 몸이 있어요. 몸을 자아라고 이렇게 허구적으로 이야기 하는 겁니다. 어렵지요? 자아라는 것은 없어요. 




여러분 신체 머리부터 한번 전신거울 앞에 서세요. 그 중에 자아가 어느지점에 박혀있습니까? 요만한 점으로. 심장에 있어여? 머리에 있어요? 발바닥에 자아가 있어요?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거울에 비취는 것이 뭡니까? 자아가 비취는게 아니고 뭐가 비춰요? 내몸이 비취잖아요. 내 몸이 비취면 나는 어디있어요? 없잖아요. 내가 지금 장난치는 것 아닙니다. 아 있다 없다를 눈으로 확인해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금 실제로 박힌 눈으로 거울로 보고 확인하잖아요. 한번 쭉 스캔해보세요. 스캔. 쭈욱~. 내가 어디있어요? 없지요.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예요? 없어요. 




그래서 몸이 뿜어내는 효과다 뭐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자아라 하는 것은 어디서 나오느냐하면은 자아란 이 몸에서 자아 나왔지만 여기서 이 자아라고 불러주는 것은 뭐냐하면 바로 남들이 내 몸이기 이전에 남들이 나를 부를 때 우리는 여기서 이 몸에서 ‘나 여기있어요.’ 하고 내비취는 거예요.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할 때 저 여기있습니다 할 때 그 때 그게 바로 아담의 자아가 되는 겁니다. 




자아라 하는 것은 홀로 있을때는 자아라는 것이 없어요. 항상 대리적인 관계가 있을 때 자아라는 것이 성립됩니다.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그냥 목마르다 물 마시잖아요. 그런데 물마시면서 요란스럽게 ‘내가! 지금! 나에게! 물을 마신다!’ 이런 궁시렁궁시렁 하면서 물 마시는 사람 없어요. 그냥 물 마셔요. 신체가 목마르니까 신체란 손을 들고 마신거예요. 




그런데 딱 마시고 난 뒤에 누가 와가지고 ‘누구야 이 물 마신자가?!누구야!’ 라고 불러주니까 ‘아이고, 내가 마셨네. 내가’ 할 때 내가 나온다 이말이지요 내가. 꿈에 여러분 등장하지요 꿈에. 밤에. 모든 꿈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나지요. 꿈에 자기 본 사람있습니까? 꿈에는 자기가 주인공인데 자기가 안보여요. 





어쨌든 항상 몸이 있는곳에 뭐가 따라붙는다? 나 라는 것이 붙어 있는데 상황이 주어지게 되면 그때 그때마다 이 주체가 자기 가치가 달라져요. 주체라는 것은 뭐냐하면은 남들이 불러줄 때 ‘나는 이런사람이라고 이야기 해야지.’ 그 순간적으로 마음먹는 그것이 주체예요. 마음먹는 주체예요. 그래서 주체라는 것은 상황따라 달라져요. 




예를 들어서 주체가 혼자 집에 있을때는 효자인데, 예비군복만 입으면 완전히 개되는. 상황에 따라서 나오지도 않는 소리 휙휙 불다가 나중에 마누라한테 걸리기만 해봐라. 괜히, 그 술판에 갔다가 술도 못먹는데 술먹고 완전히 토하고 있단 말이죠. 별로 술도 안먹는데 그 분위기 맞춰준다고. 




이게 뭐냐하면은 상황이 내가 뭔가 되겠다 하는 것은요 그 주체가 되겠다 하는 것은 나중에  술깨고 난뒤에 자기가 억지로 재조립해서 그렇지, 막상 상황에 딱 들어가면 그 권세에 굴복하게 되어있는데 이게 뭐냐하면 마귀한테 당했던 그 버릇이다 이 말이죠. 




이것은 이론이 아니고 이것은 자동적이예요 자동적. 그동안 이 몸을 악마가 관리했잖아요. 관리한 그 속성이 상황따라 유감없이 나와버립니다 유감없이.그래서 가정환경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어디서 근본도 없는 것이 우리집에 시집올려고! 이게 드라마 아닙니까? 근본도 없는게 뿌리도 없는게 시집와서 응! 꼬셔가지고, 임신했나? 이거면 되겠어? 갑자기 봉투 딱 내밀고 유학 가라. 없애버려라 하잖아요. 근본도 없는것들이 어디 감히 간병인으로 들어와가지고 다 쫓아내버리고 자기가 사모님 역할할려고, 이렇게 된다면 그럼 어떤 예를 들어서 그런일이 없는데 예를 들으면 그런게 있다 합시다. 




간병인이 들어왔는데 이름이 김선아죠. 간병인이 들어왔다 칩시다. 들어와가지고 품위있는 그녀라는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들어와가지고 쫓아 낼 때 그 여자가 왜 그 회장님 사모님 될려고 했는가? 상황이 보니까 간병인되어 월급타는 것 만족스럽지 않아요. 지금 중요한 이야기 합니다. 




나는 간병인으로 사기전과 있는 것을 속이고 간병인으로 살게됬겠다고 왔는데, 막상 와보니까 이 집안이 말이 아니고 잘만 하면 사모님 되가지고 그 재벌회사를 몽땅 차지할수 있겠거든요. 그러면 새로운 상황이 왔을 때 뭐가 병행됩니까? 욕심을 더 내게 되죠. 욕심을 내게되는 그 속성을 누구한테 배웠냐 이말입니다. 제가 지금 묻는 것이. 





누구한테 배웠어요? 세간 살이가 누구한테 배웠습니까? 누구한테 그동안 길들여져 있었어요? 누구한테? 집주인한테 길들여져 있죠 집주인한테. 그게 뭐냐하면 예수님 오시기전에 이미 악마의 보편성이 꽉 자리잡고 있는거예요 보편성이. 그 보편성에서 말씀 지켜서 구원받겠다고요? 구원받으면 나오는게 뭐겠어요? 악마의 심성으로 예수믿는 것 밖에 더 있어요? 


악마의 심성으로 삼위일체 믿고 심성으로 율법지키고 뭐 더 있습니까? 다 평소에 ‘나는 신이다, 내가 최고다, 나한테 관심있고’ 그 버릇 그대로 있죠. 이미 악마가, 악마가 뭐냐하면 ‘너는 니가 신이 될수 있다.’ 왜냐 악마 본인이 신 되고 싶어서 반항했잖아요. 악마 본인이 독자적인 노선 걷겠다고 한 그 심성을 세상이 그대로 물려받은거예요. 




모든 아담의 자손이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해서 성경500독하고 기도 빡시게 하고 백날 해봐야 결국 돌아오는 것은 마지막 목적은 뭡니까? 역시 이런행위가 나한테 투자가 되니까 나는 이런 행위로 말미암아 지금보다 향상된 변화된 나의 새로운 존재다 이렇게 나온다 이말이죠. 그런 목적없이 무슨 교회를 갑니까? 




전에 설교시간에도 이야기 했지만 ‘주님이여 죽여주옵소서’ 이런 목적으로 교회갑니까? ‘주여 오늘도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그런건 우리교회밖에 없어요. 십자가 마을밖에 없고 다 그렇게 하지 않아요. 




사람이 착해야 복을 받잖아요. 나쁜 짓하고 염치없이 복을 달라고 할수 없단 말이죠. 뭔가 하나님 앞에 바친게 있어야 그 다음에 당당하게 복달라 할수 있다. 복 주면 누구것이 됩니까? 남의 것 됩니까? 누구 것 됩니까? 내꺼 되잖아요. 그럼 나는 그 만큼 향상되고 나는 점점 더 절대자 되는데 그 만큼 가까이 approach 접근해 가는 겁니다. 




이것은 타고 났어요.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고, 악마가 이미 그런식으로 자기 악마의 집에 세간 살이를 그렇게 다 깔아놨다니까요. 바둑판도 그렇고 가스렌지도 전부 다 악마의 품성으로 완전히 전부다 악마의 작품으로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저기서 만약에 예수님께서 집주인을 안 찾아가고 아까처럼 금방처럼 앉아서 해 볼까요? ‘삐리리~삐리 나는 십자가죽었다.’ 하면 ‘저건 십자가다. 우리를 위해서 흘린 피다. 찾아가세.’ 악마를 안 거치고 찾아가게 되면 그러면 그렇게 예수믿는 것은 누구 좋아라고 예수믿는 것입니까? 답변해봐요. 누구 좋으라고 예수믿는거예요? 예? 자기 구원받을려고 하잖아요. 




그래서 모든 교회의 주장은 뭐냐하면 자기구원이예요. ‘나 구원받기 위해서 뭘 하면되지? 목사님 알려주세요’. ‘예수 믿으세요. 예수의 피는 우리의 장손의 죄를 용서합니다.’ ‘아이고~까짓것 믿지. 뭐 어려워요. 예수 피 믿죠.’ 선지국 피도 마시는데 그 피를 못마셔? 내가 좋다는데 뭘 못해 내가 한 행동이 나한테 이익이 된다는데 뭐 못해요 뭘 마다 합니까? 




뭘 안 거쳤습니까? 악마를 안 거치고 다은 독립적인 자립 의지 또는 자유의지가 있고 어떤 정보를 주면 정보를 내가 습득해서 그만큼 향상된다는 사고방식이 완전히 무장되어 있죠. 이 자의식에. 이 자의식에 무장되어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보편성은 백날 교회믿어봐야 악마의 보편성이 확장된 것 뿐이죠. 그러면 주님은 우리한테 찾아올 때 어떻게 오느냐? 악마를 거챠서 오잖아요. 악마를 거쳐서 올 때 악마를 거쳤다는 증거가 뭐냐? 십자가예요. 십자가. 





이것은 너와의 관계가 문제가 아니고, 나의 보편성에 니가 함몰되느냐하는 문제예요. 나의 보편성. 니가 어떻게 나한테 하느냐가 아니라 나의 큰 월남치마, 이 월남치마라는 것 여러분 아세요? 주름치마인데 월남치마인데, 펑퍼짐해서 발까지 다 덮여요. 권사님 월남치마 알지요. 월남 안가봤지만 다 아시잖아요. 주름치마. 서문시장가면 많이 팝니다. 




발까지 이 치마가 길어요. 옛날 아이들이 엄마한테 이 치마밑에 갔다니까요. 하도 이 치마가 커가지고 ‘엄마 미안해.’ 숨어버렸어요. 숨바꼭질 할 때 애들이 꼬마들이 엄마치마 밑에 숨었다니까 치마가 하도 면적이 넓어서. 




예수안이라는 보편성 안에 우리를 집어 넣어 버립니다. 집어 넣고 혼자 못 움직이게 만들어요.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데 그 동행하는 모습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성령이 관계해 있잖아요. 그 성령의 관계를 여기에 그대로 적용시켜버리면 우리는 성령안에서 같은 처소가 되어서 이동해도 같이 이동하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요한복음 14장에서 지금 예언하고 있는 겁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말씀을 지킨다? 뭘 어떻게 한다. 결국 그 말씀의 완성은 사랑이죠. 나를 사랑한다. 그러니까 말씀의 완성은 뭘 지켰다가 아니라, 사랑이 모든 율법을 다 완성한거예요. 여러분 다 아는 예 이지만 여러분들이 이 기를 좀 살려야 되니까 여러분 다 아는 문제 답 이야기 해보세요. 




어떤 남편이 있는데 평생을 바람을 안피웠어요. 그게 사랑입니까? 쪼다죠. 그게 사랑이겠어요? 나는 간음질 한적없다. 바람 피운적 없다. 그것도 자랑입니까? 정말 남편이라면요. ‘여보 내가 바람도 못 피워서 미안해.’ 




무슨말이냐 하면은 현재 바람 못피우는 것 마저도 나로 하여금 더욱 더 죄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작용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런 남편 기대하지 마세요. 그런 남편 없습니다. 없다고 치고, 왜냐하면 그게 사랑이라는것은 뭐냐 ,사랑이 사랑이 아니고 당신앞에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밝히는 그게 사랑이예요. 




그런데 그 아내 앞에 밝히면 안되요. 반드시 중간에 뭐가 들어가야되요? 아내와 나 있다면 중간에 십자가를, 십자가를 통해서 봐야되요. 십자가를. 
이 십자가를 보게되면 십자가를 바라보게되면 내가 당신을 명령할수 있는 권한이나 자격이 나한테는 없음을 알아요. 




모든 부부싸움은 자기한테 권한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부부싸움이 나는 것입니다. 모든 부부가 싸우는...뭐 이쪽은 전혀 부부싸움을 안하니까. 모든 부부는 어떤 권한 행사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거예요. 권한행사 때문에. 




‘내가 이만큼 해줬는데 너는 나한테 해준거 뭐야?’ 이렇게 되는거예요. 나는 여자가되서 한달에 7백 벌었는데 너는 백수가 되가지고 살림이나 해가지고 더는 더 못산다. 나는 너한테 7백만원이나 벌어주는데 너는 한푼도 안벌고 쓰는 재미로 뭐가 말이 많냐 이렇게 될 때,  권한 문제가 되는 거예요 권한문제. 권한문제가 될려면 보편성에서 탈피해가지고 개별과 개별자의 만남이죠. 




개별자 개체. 개체자와 개체가 만나게 되면 이것은 어떻게 해도 뭐냐? 사랑이 아닙니다. 대표자가 없으니까. 내가 나의 대표자가 되니까, 자꾸 자기 권리만 이야기 하는거예요 자꾸 자기 권리만. 




이건 뭐 실제로 예를 드는건 아닌데요. 아내가 바깥에 몸에 피곤하다. 그러면 분풀이를 누구한테 하겠습니까? 남편보고 이제 분풀이를 푸는 거예요. 그런데 그날따라 남편이 반듯하네. 뭐 시비거리가 있어야 되는데, 도무지 찾을수 가 없어. 아내가 오면 밥상 탁 차려왔는데 아무리 찾아도 뭐하나 딱 걸렸다 하면 그 틈새에 틈새시장을 노려 그 틈새에 오늘 있었던 모든 스트레스를 다 풀어버립니다. 




그것이 사람이 세상 사는 방식이예요. 풀지 않으면 폭팔해버리니까 안되요. 만만한게 집안이기 때문에 집안 가족들에게 다 풀어버리는 거예요. 이게 남편은 쓰레기통이죠. 아내도 마찬가지고 쓰레기통이예요. 그래야 부부가 유지가 되요. 양쪽 다 쓰레기가 되야 유지가 되지 한쪽이 선인, 신성 이렇게 나오면 못 삽니다. 




한쪽이 도사, 도인이 되면 안되요. 한쪽이 천사고 한쪽이 악마되면 안됩니다. 둘다 천사되면 물론 안되고, 둘다 악마가 되야되요. 왜? 출생지가 악마이기 때문에. 둘다 세간 살이이기 때문에. 둘다 못난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평소에 남은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도대체 당최 어떤 점이, 어떤 점이 악마에 악마를 대변하는 성격이냐를 이제 97세 살때까지 너무 끌었습니까? 95세까지 죽을 때 까지 계속해서 펼쳐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은 나의 뭐가 되느냐? 나의 피해자가 되요. 나의 피해자. 나는 가해자가 되고. 그럼 나는 내가 죄인되는데 드디어 성공한겁니다. 남들은 다 피해자로 다 만들어 놓고 자기의 성질의 분풀이로 다 만들어 놓고, 자기는 ‘아이고 속 시원하다.’ 이런식으로 인간들은 살아가기 마련이예요. 




인간은 존재한다는 자체가 죄인입니다. 존재한다는 자체가 죄인이 되요. 카프카(Kafka)라는 독일 작가의 ‘법 앞에서’ 라는 단편작품이 있어요. 단편작품이 있는데 시골농부가 호출당했어요. 어떤 그 재판받으라고 호출당했는데 문은 열렸어요. 




문이 열렸으면 들어가면 되는데, 앞에 문지기가 있어요. 문지기가 있는데 문지기가 하는말이 ‘너 앞으로 계속 만나는 문지기 너 감당하겠어?’ 문은 열렸는데... 그 문이 법의 문이예요. 이 말은 뭐냐하면은 인간은 이유도 없이 무조건 처벌 받게 되어 있는데, 문제는 처벌 왜 받는지 그 이유는 니가 알아서 채워야 되요. 니가 알아서. 





참 그 책이 심오하지요. 사람은 별 나쁜 짓 하지도 않았는데, 사는게 이렇게 힘들어요. 사는게. 그냥 산속에 혼자 살면 힘든거 모르는데, 그 산속에 가도 5일장 있잖아요. 5일장 내려와서 나이키라도 신발 살라하면 힘들어요. 이거 분명히 3만원짜리 같은데 5만원, 10만원하네. 그걸 깍아야된다는 그 괴로움 미치는 거죠. 




좋은관계아니고 나쁜 원수관계되야한다는 그런 것부터 해서 모든 그들 찌끄러기가 다 싫어요. 산속에 그냥 전기 쓰고 사는데 가끔은 누가 오느냐하면은 전기검침하러 와요. 그것도 귀찮아. 




산다는 자체가 이유도 모르는체 벌받고 있으니까. 그 이유를 누가 알아야 되는냐. 본인이 살면서 그것을 마주쳐야 됩니다. 분명히 범죄인으로 호출해놓고 아무 소식이 없어요. 나를 호출한 판사쪽에서 아무 소식이 없어요. 그냥 문지기만 있어요. 들어갈려고 하니까 ‘감당하겠어? 너? 갈수록 점점 죄인되는데 힘든데 감당하겠어?’ 결국 그 농부는 죽어버려요. 왜 죽는냐? 죄인으로 죽어요. 뭐도 모르는체? 죽을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체 죄인으로 죽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성경 내용을 잘 이야기 했는지. 그래서 카프카의 대목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사람이 왜 죽는지는 모르는데 사형할 때 사형 방법이 뭐냐? 그 사람의 신체에다가 재봉틀로 뭐하냐하면 재봉틀로 그 사람의 죄목을 죽는 순간에 죄목을 자기 신체에다가 타투, 문신을 새겨버려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이 멀쩡한 몸이 죄 지은게 아니고 원래 이런 죄목을 잔뜩 짊어 진 체로 다만 내가 내 죄를 모르는체 갔다가 마지막 사형당하는 그 순간에 내 몸을 보니까 원래 이런 죄목들이 나한테 삽입되었기 때문에 그 삽입된 죄가 효과, 효력을 나타낸다고 나는 한평생 힘들게 살아야된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이게바로 복음 아닙니까? 이게 바로 복음이거든요. 주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뭐를 부르러 왔다? 죄인! 타투가 되어있는 인간을 부르러 왔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말이죠. 




중풍병자가 마태복음 9장에 중풍병자가 중풍병 고치러 왔어요. 친구하고 조를 짜 가지고. 하여튼 존재하는 것이 남한테 피해를 줘요. 대기표를 뽑아야 되요 사실은. 대기표 순서표를 뽑아야 되는데, 이게 사람이 아무리 급해도 지붕을 뚫고 하이킥이예요? 뭐예요. 지붕뚫고 내려오는 그런 반칙이 어디있어요. 남들은 뭐 지붕 못 뚫어서 못 뚫습니까. 




사람이 점잖아야 되잖아요. 뭔가 경우가 바라야지, 규칙이 있는데 지붕뚫고 내려왔어요. 수리비 만만치 않을거 같은데 견적 얼마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붕 뚫고 들어왔을 때 그렇게 뚫고 자 하는 그 염원이 목적이 뭡니까? 집사님 목적이 뭐였을거 같아요? 그 사람들의 목적이. 




중풍병 낫게 해 달라고 했죠. 참 주님을 모독해도 보통 모독한게 아니예요. 중풍병 낫게 해 달라는 거예요. 뭔데 하나님이 자기 중풍병 낫게 해줬습니까? 낫게 하겠어요? 너 뭐 잘났다고. 아까 이야기 했지만 모든 문제는 뭐가 생긴다? 자기한테 뭔가 요구할수 있는 권리가 자기한테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이건 마귀 심성이예요. 




주님께서는 중풍병을 낫게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죄를 용서해버리죠. 죄를 용서하니까 중풍병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이쪽의 보편성 그게 중풍병자 친구들 입장에서는 ‘중풍병! 중풍병! 낫는거! 낫는거!’ 목적으로 병 낫는거 목적으로 하다가 그 보편성에 있다가 고치고 낫더니 그 죄의 보편성은 날라가 버리고, 아니 그 병의 보편성은 날라가 버리고 죄 용서해주시는 분의 보편성안에 모든게 휩싸여 버렸습니다. 




그럼 묻습니다. 그 중풍병 걸린사람 천년 살았습니까? 만년살았습니까? 늙어 죽었겠지요. 늙어 죽었잖아요. 뭐 결국 죽었잖아요. 이제는 그리스도 죄 용서 앞에서는 용서 받고 난뒤에는 죽을 때 중풍병 걸려 죽으나 그 병이 도져서 죽거나 암에 걸려서 죽든지 그것은 주께서 문제 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주체가 되기 때문에. 




이제 그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아까 주체 이야기 할때에 자 공식 이야기 해보세요. 뭐 + 뭐는 주체다? 자아, 이 허구입니다. 자아는 없어요. 신체 + 상황이 되게 되면 이게 ‘나는 기타잘쳐’ 기타 잘치는 사람 보지도 못했어요. 그 동네에서 자기 반에서 잘쳐. 그러다가 전문가 앞에 가면 아휴 기타 때려부셔버려요. 주체가 바뀌어요. 주체가 바뀐다 이렇게 되지만 사실은 정답이 아니고요, 이렇습니다. 




이렇게 주체가 바뀌는게 아니고 여기에 물결이 있다 물결. 물결, 주님의 성령의 물결. 성령의 물결에 우리 몸이 사해처럼 동동 떠다닌단 말입니다. 떠다니게 되면 여기 A지점에 주체가 다르고, 둥둥 떠다니는 동일한 인간이 B지점에 왔을 때 주체가 달라져요. 


아까는 내가 어떤 주체가 달라진다 이렇게 되버리면 어떤 문제가 생기냐하면 내 자아가 미리 예상하게 되고 목적으로 삼을수 있어요. 목적 삼으면 그것이 기도의 제목이 될수 있어요. 


‘주여 이런 인간되게 하옵소서.’ 술 끊고 담배 끊고 뭐 커피도 끊고 다 끊고, 자기가 생각하는 괜찮은 존재를 미리 땡겨서 상상해서 그 상상에 맞추어서 목표를 잡아가지고 내 기도빨이 어느정도 위력이 있는지를 중보기도 있는지를 시험, 측정, 시험 해보겠다는 시험에 빠지게 되버리죠. 그러면 그렇게 아이디어를 끄집어 내는 주인공 이 누구입니까? 나. 





이때 이 주체가 있을거 아닙니까? 그러면 내가 이렇게 되옵소서 하면 주체A, 주체A가 가상했던 주체B가 되는 겁니다. 그럼 이것은 폐쇄적이죠? 자아 패쇄적이죠. 그럼 자기 꾀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는 겁니다. 자기가 목표 설정해 놓고 여기서 기도할까요? 십일조 할까요? 


이런식으로 자기 즐거움, 자기가 즐거운 어떤 종교생활 하게 되면 이게 바로 취미가 되버리는 거예요 취미. 오락이 되고. 도 닦는재미, 도 닦는 재미, 날마다 향상되는 재미. 




이걸 가지고 외부에서는 경건했구나, 거룩하구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그 취지에 맞구나 이런식으로 막 구라를 막 떠니까 자기는 평생을 이 굴레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못 벗어나고 이걸 또 자랑질을 해야되거든요. 자랑질 할려면 이 간증을 이 과거사를 자기의 과거 역사를 자랑질할 맞는 맞춤교회를 찾아가야되요. 




찾아갈 때 어떻게 찾아가? 약간 봉사해 본다구요. 봉사해가지고 우리교회처럼 봉사하나마나 이렇게 가만 있으면 그 교회 안가고, ‘아이고 성도님 이렇게 봉사하니까 성령받았습니다.’라고 칭찬들을 하게되면 자기가 외부적으로 확증이 되니까 좀 더 있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간의 성령받지 못한 사람은 악마의 품성 때문에 남한테 인정받고자 하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여기보세요. 이사람 뭐냐하면 주체가 A에서 바뀌는데, B를 예상을 못한다는 거예요. B가. 





내일 내가 뭐가될지 예상을 못하고 더 나아가서 예상하면 안되요. 오늘 염려는 오늘로 하고 푹 주무셔야되요. 우리교회 어떤 집사님이 계시는데 아주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다른 것 못 물어보고 이렇게 물었어요. ‘잠은 잘 주무십니까?’ 잠은 잘잔다는 거예요. 


세상에 이 지구 75억 인간중에서 잠 잘 자는 사람 나와보라 그래요. 현재 75억 인구중에서 잠 잘 자는 사람 나와보라 그래요. 숫자 몇 명 되겠습니까? 문재인? 지금 못 잡니다. 여러분 가운데 잠 잘 주무시는 사람 누구 있습니까? 하나님께 사랑받은 사람이예요.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 




잠이라 하는 것은 미리 온 죽음이거든요. 내일까지 단절되어 있으니까 죽음이죠. 죽음이란 것은 내일이 없는 삶이 죽음 이거든요. 그러니까 잘 때, 가세요. 그냥. 주무실 때 ‘안녕~ 자식들아 안녕~ 나 요걸로 간다. 그런데 에어컨좀 틀어주고 갈때라도 시원하게 갈테니 안녕~’ 죽음이란 매일같이 현실화시키는 장차 올 죽음을 미리 당겨서 성취시켜서 현실화시키는 것이 잠입니다. 




그래서 잠을 안 잔다 하는 것은 이 무슨 악마의 심보예요. ‘못 죽겠다! 내 뭐 할 일이 있어. 내일 뭘 해야되!’ 아주 발악을 해요 발악을. 절벽에서 손을 놓으면 되는데, 절벽에 손을 놓는 것이 잠이거든요. 밤은 깊었는데 절벽에서 손을 안 놓네. 발가지고 손을 꽉 찍어버려. 





그냥 놓아야 되는데 그 밤 만큼은 제발 손을 놓아야 되는데, 밤에도 내일 걱정해가지고 손을 못 놓는게 자기 상상한 주체B 때문에 A가 지금 힘들어 하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한테 가해자가 됩니다. 참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주일날 설교에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여자는 항상 한발은 죽음에 있고, 한발은 현실에 있기 때문에 여자가 정말 지혜롭다 라구요. 왜? 죽음을 생각해볼 때 이 땅에서 연약해도 상관없어요. 




그런데 남자는, 여자의 이름은 뭡니까? 생명이예요. 영생이죠. 그런데 남자이름은 뭡니까? 흙 이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남자는 맨날 흙 위에서 왔다갔다 해요. 땅덩이 흙 위에서 흙. 결국 내가 하는 행세가 나로 하여금 흙으로 밀어내는 중이다 이런 뜻이거든요. 




자기는 최고로 알지만 사실은 여자보다 강하지만 강한자가 바보예요. 그래서 주님의 이 땅에서의 공유라 주님의 처소라 하는 것은 약한자들만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약해서 죽거든요. 약한자로서 주님께서 돌아가셨고, 사도들도 때리면 때리는대로 맞으면 맞는데로, 잘된 것은 잘된대로 받아들이고, 못난 것은.. 


내가 가난에 처할줄도 알고 부에 처할줄도 알고 이것은 내 소관 아니니까. 내 소관아니니까 그냥 내가 물위에 떠다니는 거예요. B를 몰라요. 내일 내가 뭘 될지를 몰라요. 죽으면 죽으리라. 죽으면 죽지 뭐. 


그 살려달라는 권한이 나한테 있다? 없다? 없어요 어차피 세상살이는 독자적인 세상살이 없어요. 주인이 누구냐가 다를 뿐이지 어차피 잡혀있기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체포되어 있기는 마찬가지 거든요. 




이제 갑자기 우리가 만약에 쌀뒤주 압니까? 여러분 쌀뒤주 압니까? 만약에 우리가 쌀뒤주라고 합시다. 사도세자 2주동안 갇힌 쌀뒤주. 쌀뒤주가 이렇게 있다고 합시다. 있는데 우리가 쌀뒤주라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그냥 주인이 시키는 대로 악마가 시키는 대로 살 뿐이예요. 이것을 고칠려고 하지 마세요. 타고난게 나 밖에 모르는데 나만 사랑하는데 그걸 어떻게 고칩니까? 




뭐 결혼이 뭐고 감동 먹는다고요? 아이고 그거 속지 마세요. 인간은 자기 외에는 누구에게도 감동 안먹어요. 궁극적인 감동은 자기에게만 감동 먹습니다. ‘당신이 날 사랑해줬으니까 나는 당신한테 감동해서 나도 당신을 사랑해.’ 라는 내가 얼마나 대견한지. 


결국은 자기한테 감동먹잖아요. 핑계는 남 핑계대지만 결국 자랑질은 결국 누구 자랑질입니까? 마지막 남은 것은 자기 자랑질이예요. 




그러면 우리입장에서는 자기밖에 모르니까 안고칩니다. 그런데 여기서 뭐 우당탕탕 이쪽 주인하고 담넘은 도둑하고 한바탕 싸우는 것 여기에 대한 목격자를 가지고 이게 바로 12사도들입니다. 12사도. 


사도가 때려도 복음전해야 되니까, 나에게 은과 금은 없으나 내가 너에게 주노니 주의 이름으로. 악마를 이긴 그 소식에는 내가 전하지 않을수가 없다 이미 월남치마 속에, 오늘 제목을 월남치마라고 하면 아무도 모르겠지. 그냥 처소 집에가서 생각해봐야해요. 



이 안에 들어있는 사람 같으면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곡해받고 오해받고 아버지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너는 너의 아비는 악마다.’ 라는 그런 오해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상황을 똑같이 반복되시거든 그런 현상일어나시거든 여러분들을 이미 예수님의 성령의 보편성 안에 속했다고 보시면 되는것입니다. 오늘 제목 나왔다 ‘성령의 보편성’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와 함께 있기에 모든 율법의 완성이 주의 사랑인 것을, 십자가의 사랑인 것을 이제는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기도합니다. 아멘.